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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하나님 / 시 146:5-10(광복절)

by 【고동엽】 2022. 4. 5.

해방의 하나님

 

                                     시 146:5-10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

                         는도다.

 

오늘은 8.15 광복절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벌써 우리나라가 해방된 지도 금년으로 58주년을 맞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억압받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비참하게 일본으로부터 36년 동안이나 압제를 받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 불행한 역사입니다. 그 기간동안 우리민족이 얼마나 아픈 압제와 고난을 받으며 살았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우리 조상들은 참 불운한 시대를 살았습니다. 개인도 국가도 누구로부터 억압받고 압제받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이 압제의 문제가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압제를 그냥 놔두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이 압제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늘이 심판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구속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 인애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지만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은 “해방의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심판하시고 해방하셨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보았습니다.

본문을 보면 그런 말씀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7절을 보면 “억눌린 사람을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갇힌 자에게 자유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또 8절을 보면 “하나님은 소경의 눈을 여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고 의인을 사랑하신다”고 했고 9절을 보면 “여호와는 나그네를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의 길을 굽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은 분명 해방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압제하지 말라, 고아와 과부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여러 번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해방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억압에 민감하십니까.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해서 지으신 존재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자질을 부여해서” 지으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다른 피조물과 다른 부분입니다. 인간은 적어도 하나님의 인격과 거룩성과 영성과 우수한 자질을 부여받아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유해야 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누구에게도 인간을 억압하고 구속하고 착취하고 압제하고 죽일 권한을 부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일컬어 “억눌린 사람을 위해서 정의로 심판하시고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갇힌 자에게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 두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는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이 우상에게 절하고 제물을 드리고 섬기는 것을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창조자의 자존심 문제이고 권위문제입니다. 우리자녀들이 우상에게 그렇게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심정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또 하나는 누군가를 압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내 자식을 군에 보내지 않으려는 부모의 심정도 내 자식이 압박받고 고생하고 매를 맞고 구속당한다는 그 마음 때문입니다. 내 자식이 학교에서 왕따 당하고 따돌림 당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 편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백성들이 세상에서 압제당하고 구속당하고 속박당하고 고난당하고 죽임당하는 것을 어찌 용납하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해방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어떤 해방입니까.

 

하나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역사를 보면 인간이 인간을 억압한 역사가 참 많습니다. 그 억압 있는 곳에 언제나 하나님의 해방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구약에 느브갓네살을 보십시오. 얼마나 백성을 억압하고 그 권세가 추상같았습니까. 바벨론이 얼마나 많은 약소국을 짓밟고 뺏고 죽이고 압제했습니까. 그러니까 하늘이 심판하여 어느 날 그 권세와 그 나라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애굽은 우상의 나라입니다. 애굽은 우상나라의 상징입니다. 지금도 애급에 가 보면 박물관에 그때의 우상들이 그대로 소장되어 있습니다. 로마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가 그리스도인들을 얼마나 핍박하고 괴롭혔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 짐승의 밥으로 사자 굴에 던져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찢기는 모습을 보며 그들은 구경거리로 삼았습니다. 노예와 포로들을 잡아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니 그 나라가 영원하겠습니까.   

히틀러는 인류역사상 가장 흉악한 권세자였습니다. 인명을 파리 잡듯 죽였습니다. 특히 유태인들의 수난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유태인들을 자그만 치천만 인구 가운데 600만 명을 생매장하여 죽였고 시체를 기름 짜서 겨울 전장에서 땔감으로 빨래비누로 사용하게 했습니다. 그러니 하늘이 그냥 두었겠습니까. 어느 날 하늘이 심판해서 비참하게 최후를 맞게 하지 않았습니까. 일본은 또 어떻습니까. 일본은 우리나라 여성들을 무작위로 잡아 전쟁터로 끌어가 짐승처럼 대하지 않았습니까. 이 땅에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가서 모두 정신병자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억압하고 압제하고 교회에 몰아넣고 불 질러 죽이고 고문하고 희생을 강요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할 짓을 다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이 그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아마 일본처럼 철저하게 심판받은 역사도 없을 것입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삼일 후 8월 9일에는 나까사기에 또 하나가 떨어졌습니다. 그 폭탄은 TNT화약의 2천만배의 위력을 가진 원자폭탄입니다. 그 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반경 1Km내의 모든 생명체는 타죽거나 후폭풍으로 모두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때 모두 69만 명이 죽었고 우리나라 사람도 7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심판이 무섭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인간을 지배하고 억압하고 착취하고 죽일 권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을 억압하고 구속하면 안 됩니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고상한 인격을 가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성품과 형상을 부여해서 창조하신 값있고 품위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압제하고 구속하고 착취하고 죽이면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이라크라는 나라도 하늘로부터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후세인이 백성들을 얼마나 압제했습니까. 후세인은 히틀러 이상이었습니다. 숫한 백성들을 음지로 끌고 가 고문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이 심판하신 것입니다. 북한도 언젠가 그렇게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제 생각으로는 북한은 하나님 방법으로 징계 받아서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심판의 하나님이라면 어찌 북한 땅을 모른 체 하시겠습니까.

사람은 압제받고 살지 말아야 합니다. 압제하는 사람도 나쁘지만 압제받는 사람도 나쁩니다. 억압받는 사람을 보면 억압받을 짓을 합니다. 일본이 이 땅을 강점하던 시기를 보면 우리 조상들이 압제받을 짓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 당시의 궁중생활을 그린 궁중사화를 보십시오. 거기 어디에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생각하는 말 한마디가 나옵니까. 매일같이 권력다툼이나 하고 모략중상이나 하고 음모하는 말만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극은 보기가 싫습니다. 그러니까 남의 나라에 지배받고 사는 것입니다. 미국가시거든 흑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한번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보면 그 사람들은 꼭 무시 받고 억압당하고 살아갈 행동만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로부터 억압당하고 무시당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청소년들 미래준비를 위해서 참 고민이 많은 세대들입니다. 오늘 청소년들을 보면 참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공부하랴 미래가 불투명한 시대를 살아가랴 고민이 많을 것입니다. 그 미래를 위해서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그렇게 일생 남으로부터 속박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청소년들은 누구보다도 더 노력하고 수고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보면 그런 노력이나 수고가 없습니다. 부모는 그런 모습을 보기가 참 힘듭니다. 지금 노력하고 수고해도 어려운 세상인데 그렇게 놀고 그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공부하라고 하면 그것을 구속이라고 생각합니다. 잔소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부모와 원수가 됩니다. 부모의 말을 이해하질 않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공부를 안 합니다. 저렇게 공부하지 않으면 장래가 뻔한데 그런데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들 하나 있는 것이 공부를 하지 않아 늘 반에서 꼴찌를 면치 못합니다. 그래서 하루는 아들을 불러 놓고 “이번 기말 고사 때 또 꼴찌를 벗어나지 못하면 부자지간 끊고 모른척하고 살자”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시험을 끝내고 집에 왔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시험은 어찌 되었나”. 그러자 아들이 대답합니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사람이 오늘 수고와 노력이 없으면 언제나 약자가 되며 지배받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이 시대는 정치적인 압제나 억압 말고 새로운 양상의 압제시대”라는 점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압제와 속박은 더 무섭고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더 구속하는 구속시대입니다. 그것이 좋지 않은 습관으로부터 얽매이는 속박입니다. 이 좋지 못한 습관에 구속되는 것은 정치적 억압보다 더 무서운 억압입니다. 좋은 습관은 건강을 주고 삶의 질서를 제공하고 생활을 건전하게 하지만 좋지 못한 습관은 자신을 무섭게 구속하고 꼼짝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무서운 것입니다. 이를테면 담배중독이 그것입니다. 담배에 중독이 되면 담배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담배는 멋으로 피워야지 중독 되도록 피우면 속박당하고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적당할 때 끊지를 못하고 매일 두 갑씩 피우며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매일 두 갑씩 피우면 내부기관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제가 농촌생활을 해 보아서 아는데 시골에서는 겨울 되기 전 굴뚝청소를 합니다. 일년 동안 아궁이에 불을 때서 굴뚝 속을 보면 온통 검은 재로 가득 쌓여 있습니다. 그것을 긁어내야 불이 잘 피워집니다. 하루 두 갑씩 담배를 피우면 속이 그렇게 되어있을 것 아닙니까. 사람이 그 정도가 되면 완전히 담배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도박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박이 문제가 되는 것은 중독 되기 때문입니다. 도박에 중독이 되면 집문서 들고나가 다 탕진한 후에도 빠져나오질 못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속박입니까. 놀기 좋아하는 습관도 마찬가지입니다. 놀기 좋아하는 습관에 매이면 차분히 앉아있질 못합니다. 밤낮없이 돌아다닙니다. 그런 속박이 어디 있습니까. 알코올중독은 또 얼마나 무섭습니까. 술이 독이라는데도 끊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인터넷 중독이 문제입니다. 젊은 청소년들이 좁은 방구석에 앉아 밤낮 이 인터넷 화면만 바라보고 미쳐서 살아갑니다. 요즘 무작위로 떠 떠오르는 음란화면이 문제입니다. 누르기만 하면 얼마든지 떠오릅니다. 그러니 오늘 청소년들이 밤새워 앉아서 그런 화면에 중독 되어 살아가야 하니 정신의 피해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런 습관들이 삶의 신성함이나 질서 그리고 정신적 건강성을 파괴하고 후에 인생을 억압하는 고리로 작용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속박이고 굴레입니까.

그런가 하면 “물질로부터의 구속”도 대단합니다. 물질은 참 좋은 것입니다. 좋은 대신 해악도 그만큼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물질이 사람들을 사정없이 구속하고 노예처럼 묶어 놓습니다. 오늘은 이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 사람들을 무섭게 묶어 놓고 구속시킵니다. 사람이 이렇게 묶이게 되면 거기서 헤어 나오질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 물신숭배자가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형제도 부모도 친구도 하나님도 주일도 없습니다. 완전히 물질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 빚지는 일입니다. 빚을 지게 되면 사람을 사정없이 구속합니다. 강도가 왜 생깁니까. 빚 때문에 강도짓을 합니다. 요사이 카드 빚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을 보십시오. 카드 빚 때문에 살인을 합니다. 강도짓을 합니다. 사람을 유괴합니다. 은행을 털고 부모를 죽입니다. 이 보다 더 무서운 구속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결국 찾아오는 것은 자기파괴와 이웃파괴 그리고 가정파괴와 인생파괴를 가져옵니다. 사람이 물질에 구속되면 주저 없이 그 물질을 위해서 순교합니다. 재산을 아끼느라 병원도 안가서 몸져누워 지내다 죽습니다. 재산 문제로 부모와 다투다가 집에 불 지르고 부모를 죽이기도 합니다. 증권에 손해를 보고 자살하기도 합니다. 일본으로부터도 해방되어야 하지만 물질로부터도 해방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일본보다 더 아프게 구속합니다.

“죄로부터의 구속”도 무서운 압박입니다. 죄는 소리 없이 사람을 구속합니다. 기쁨을 뺏고 즐거움을 뺏고 행복을 뺏고 마음을 늘 짓누르고 구속합니다. 그래서 죄인은 좇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간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 사건을 저지르고 나서 평생 눈물을 흘리며 살아갑니다. 시편 6편을 보면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죄책감이 나를 구속하고 억압하고 쇠사슬처럼 얽매어 놓습니다. 그러니 그 삶에 기쁨이 있겠습니까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자유함이 있겠습니까. 죄는 내게서 모두를 빼앗아 버립니다.

그런가 하면 “종말의 구속”고 무섭습니다. 오늘은 각종 병이 난무하는 시대입니다. 병도 참 무섭습니다. 그래서 몸이 조금만 이상해도 언뜻 생각나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손에 일이 잡히질 않습니다. 손이 떨립니다. 마음이 떨려오기 시작합니다. 아주 무서운 속박입니다. 희랍사람들은 연회장에 해골을 놓고 “저렇게 되기 전에 즐기며 마시자”고 했습니다. 예수 우리선조들은 “노세 노세 젊어 노세“하고 노래했습니다. 머잖아 찾아올 죽음의 속박이 오기 전에 놀자는 말입니다. 죽음을 속박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부터 경건한 현인들은 종말을 순순히 엄숙한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틴 대제의 대관식 날 그의 절친한 친구가 커다란 관을 선물로 보냈습니다. 관 위에 글자를 새겨 놓았습니다. “자네가 비록 황제이나 자네에게도 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경건하게 살게.” 러시아 피터대제는 침실 천장에 해골을 달아놓고 누울 때마다 종말을 생각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경건한 삶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권세자는 자칫 권세에 묻혀 자신을 잃어버리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을 찾고 권세에 빠지는 것을 막는 일도 지혜로운 마음입니다.

  58년 전에 우리민족은 일본으로부터 36년 동안 압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그 압제의 참상과 이 땅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우리민족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해방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압제당하고 살면 안 됩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정치적인 압제 말고 정신과 마음을 압제하는 일이 더 많은 시대입니다. 악습으로부터, 물질로부터, 죄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오는 억압이 더 강합니다. 압제 당한다는 말은 자신의 권리를 빼앗겼다는 말입니다. 내 주권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신성한 것인데 그것을 뺏기고 사는 것은 분명 불행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로 하여금 이 압제의 구속에서 해방시켜 주시려고 애쓰십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해방의 하나님이십니다. 주 안에서 주어지는 이 자유함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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