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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믿음으로 소원을 이루는 새해가 되자! (마 15:21-28)

by 【고동엽】 2022.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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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믿음으로 소원을 이루는 새해가 되자! (마 15:21-28)

 

  사람은 대개 다 소원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사실 소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소원이 있는 사람과 소원이 없는 사람은 얼굴부터, 눈동자부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소원이 있는 사람은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이 소원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의 평강'이 소원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행복한 가정'이 소원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좋은 직장'이 소원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친구'를 갖는 것이 소원일 수 있고, 또한 '풍부한 물질', '열심 있는 신앙', '명예'를 가지는 것이 소원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큰 믿음'을 달라는 소원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소원인줄 믿습니다. 시37:4절에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할/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소원이 막연한 소원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소원을 가지되 우리는 불타는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고, 남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창조적인 믿음을 가지고 소원을 성취해 나가야 합니다.
  세종대왕도 불타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배울 만한 우리 글이 없는 것을 보시고 쉬운 우리 글을 만들어야겠다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만드신 것이 바로 한글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도 불타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일제의 침략 앞에 날로 기울어지는 조국의 비운을 보고 어떻게 해서든지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고 말겠다는 간절한 소원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 간절한 소원이 그로 하여금 위대한 애국자가 되게 했습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도 불타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19세의 소년이었을 때, 노예시장에서 쇠사슬에 묶여 마치 짐승처럼 이리 팔리고 저리 팔리는 흑인들을 보고 노예제도를 쳐부수고야 말겠다는 간절한 소원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훗날 법을 공부하고 대통령이 되어, 당시로서는 불가능해 보였던 노예해방의 역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간절한 소원을 가진 사람을 쓰십니다. 빌2: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오늘 본문 28절에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할/ 
  ▶소원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①소원은 소명이 됩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이 준 성전 건축을 일생 소원으로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왕으로 세우신 것은 성전 건축을 위하여 세우신 것으로 받아 드렸습니다. 그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소원이 소명이 되었습니다.

  미국 '데이튼'에 목사 아들 둘이 있었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자전거포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바쁠 때에는 같이 일하였지만 한가할 때에는 앞에 잔디 언덕에 누워 쉬곤 하였습니다. 그 때 독수리가 날라 가고, 새들이 날라 갔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갑자기 '사람도 공중을 날라 갈 수가 없을까? 하늘을 날고 싶다' 이런 소원이 생겼습니다. 형제는 하늘을 날고 싶다는 소원을 소명으로 받아 드렸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소원을 주신 것은 '비행기를 만들라는 소명이다'라고 스스로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둘은 결혼도 포기하고 드디어 비행기를 만들었습니다.
  최초 비행기는 1903년 25초 날다가 떨어졌습니다. 비행기를 만들 때 사람들은 비난만 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하늘을 날 수 있냐?'는 비난입니다. 그러나 막상 비행기가 날자 그들이 축하 파티를 열어 주면서 사회자가 말하기를 '이 분은 인류 역사에 쾌거를 이룬 주인공입니다. 연설을 부탁합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면서 많은 사람 앞에 선 라이트는 얼굴이 빨게 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새 중에서 제일 수다스러운 앵무새는 날라 다니는 재주가 없습니다. 그런데 잘 날라 다니는 새는 말하는 재주가 없지요. 나는 날라 다니는 비행기 만드는 데는 세계 최고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말하는 재주는 없습니다. 이것으로 제 연설을 마칩니다.'
  재봉틀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싱이라고 하는 소년이 자기 어머니가 바느질하느라고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어머니로 하여금 바느질을 편리하게 할 수 있게 하여드릴까? 어머니 바느질을 돕고 싶은 소원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미싱은 '그 소원을 자기에게 바느질하는 기계를 만들라고 하는 소명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연구에 몰두하다가 드디어 완성했습니다. 그의 이름을 따서 미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소원은 소명이 되어야 합니다.
  ②소원은 능력이 됩니다. 소원을 소명으로 받아 드리고 감당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소명을 이룰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내가 목표를 정하면 목표는 나를 끌어 준다.' 성공 동기 연구원(SMI) '폴 제이 마이어'의 말입니다.
  '무하마트 간디'가 대영제국과 대결하여 승리한 비결은 무엇인가? 대영 제국은 막대한 돈이 있었으나 간디는 무일푼이었습니다. 대영제국은 막강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간디는 총 한 자루 없었습니다. 대영제국은 철저한 군사 조직을 가지고 있었지만 간디는 군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간디가 이겼습니다. 그 이유가 하나있습니다. 강렬한 소원입니다. 대영제국을 이겨야 한다는 소원이 가장 큰 무기였습니다. 후에 간디가 말했습니다. '목표의 힘은 군사력의 힘보다 강한 것입니다. 조직적인 정신력은 조적적인 군사력보다 위대한 것입니다' 
  까마귀는 호도를 잘 먹는 새입니다. 다른 새들은 호두 먹기를 포기한 새들입니다. 딱딱한 호두는 사람도 까기가 힘듭니다. 까마귀는 호두를 따서 입에 물고 바위 높은 곳으로 올라가 떨어뜨립니다. 호두가 깨어지면 호도 알맹이를 먹기만 하면 됩니다. 만일 안 까지면 다시 하늘로 치솟습니다. 그리고 다시 떨어뜨립니다. 깨질 때까지 그렇게 합니다. 아주 간단한 아이디어입니다. 다른 새들은 소원이 없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생각해 내지 못 했지만, 그러나 까마귀는 호두를 먹고 싶은 소원 때문에 이런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할/
  소원은 능력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잘 지어 하나님께 봉헌하여 드리겠다는 소원은 그를 가장 지혜 있는 왕, 성전을 건축할 수 있는 능력의 왕으로 하나님이 축복하셨습니다.
  ③소원은 성취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등산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산이 좋았더니 어느 날 산 정상에 내가 있었다.' 그렇습니다. 강렬하게 소원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꿈꾸고 있으면 현실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그 길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궁중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아들 낳으면 다 죽여야 할 때 모세 혼자 은총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살아서 종살이하는 운명이 아니라 궁중에 들어가서 사는 축복 중에 축복, 은총 중에 은총을 받았습니다. 금상첨화였습니다.
  그러나 40살이 되었을 때 갑자기 소원이 생겼습니다. 궁중보다 자기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으면서 종살이하고 싶다는 소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민족을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하여야겠다는 소원이었습니다. 행7:23절에 그 당시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모세는 궁중을 뛰쳐나갔습니다. 그리고 소원을 따라 살기 시작했습니다. 소원을 소명을 받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살려 주시고 궁중에서 40년 살게 하신 섭리를 깨달았습니다. 소원이 소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같이 해 주셨습니다. 언제나 모세를 지켜 주시고 수많은 기적으로 함께 하시고 놀라운 은총을 주셨습니다.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였습니다. 소원을 붙잡은 지 80년 만에 소원을 성취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느보산 꼭대기에서 가나안을 드디어 바라보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소원은 소명이 됩니다. 소원은 능력이 됩니다. 소원은 성취가 됩니다. /할/ ◀제목 소개!▶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소원이 있습니다. 자신의 문제, 부모형제, 자녀들의 문제, 또한 사업의 문제, 건강의 문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문제에 부딪쳐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있지만, 도무지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실존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인간의 한계상황, 또는 극한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절대 위기, 절대절망의 사건입니다.
  이 한계 상황에 처하면 인간은 절대자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계 상황에 처한 인간, 바로 그 구체적인 모습을 오늘의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한 가나안 여인이 있었습니다. 막7장에 이 여인은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녀는 과부이며, 가난하고, 천한 삶을 살면서도 딸 하나를 자기의 생명처럼 알고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 미쳐버리고 말았습니다. 딸은 어머니도 알아보지 못하고 괴성을 지르며 머리가 산발된 채 다 찢어진 옷을 입고도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딸의 병을 고치려고 여러 병원, 좋다는 약을 다 써 보았으나 딸의 병세는 날로 심해져만 갔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현대인들에게는 이 여인처럼 절박한 문제 한계상황에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딸의 문제로 밤잠을 못 이루면서 괴로워하고 있을 때 한 기쁜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 소식이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시방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듣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능치 못할 일이 없으며 오병이어는 수만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신 분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물 위를 걸으실 수 있을 뿐 아니라 병든 자를 고치시며 귀신도 능히 쫓아내시는 능력자라는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만이 자기의 딸을 구원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복음을 듣는 것이 귀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자가의 딸을 고침 받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란 확신과 믿음과 소망이 있었습니다. 히브리 기자는 이런 마음가짐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히11: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아멘!/
  성도는 누구나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행위를 살피시고 우리의 말을 들으시며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의 사정을 헤아리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의 실존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139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은 나를 감찰하시고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며 나의 가는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며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신 분'이라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 마음 중심으로 예배드리고 온전히 맡기고 기도하는 자에게 반드시 '응답의 상, 축복의 상, 소원성취의 상, 문제해결의 상, 좋은 결과의 상'을 주십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들어가셔서 가나안 여자 하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여자는 자기 딸의 고통스러운 병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러 온 여인입니다. 그 여인의 딸은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생하는 딸을 보는 어머니의 심정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을 것입니다.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한 일입니까?
  그래서 주님께 부탁을 드리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 한 일은 그 여인이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그래도 예수님이 모른 척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상대적으로 더 큰 소리로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래도 모른 척하십니다. 그 때 제자들이 시끄럽고 귀찮게 생각했던지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예수님, 너무나 시끄럽습니다. 어떻게 해서 좀 보내십시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여인이 계속해서 간청을 할 때에 다시 하시는 말씀이 '자녀들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냐?'고 하십니다.
  사실 이쯤 되면 이 여인이 맥이 빠져 돌아 갈 만도 합니다. 개 취급을 당하는 인격적인 모욕을 받으면서까지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여인은 그 순간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합니다. 오늘 이 부분을 우리가 마음 판에 새겨야 합니다. '주여 옳소이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할/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할/
  성경은 태어나서부터 배울 수 있지만, 믿음은 배워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한 번도 설교는 들은 적이 없는데도 이 여인에게는 놀라운 믿음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가르쳐서 '큰 믿음, 소원을 이루는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이런 믿음을 가지고 올 한해의 소원을 다 이루어나가는 신년새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①이 여인은 유대인들이 개 취급을 하던 이방 여인입니다(21).
  '거기서 나가사' 가버나움에서 떠나 이방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막7장에서는 이곳을 '수로보니게' 땅입니다. 두로와 시돈 지역은 이스라엘의 최북단에 있습니다. 오른편으로는 레바논 산이 있고, 왼편으로는 지중해가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특히 두로는 원래 페니키아 사람들이 살았고, 상업적으로 아주 번영하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332년에 알렉산더 대왕에게 공격을 받아서 완전히 멸망해 버렸는데, 그 뒤로부터는 페니키아 사람들보다는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이 두로에 더 많이 이주해서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한 마디로 이 지역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유대인들의 피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이방인들이 살아가고 있던 지역입니다.
  이 여인을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수리아 지방의 페니키아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다른 데서 온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지역에 살던 원주민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아주 멀리 여행을 하셔서 이방인의 지역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곳은 우상숭배지역으로 아주 유명한 곳입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은 선택된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고 천국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이방인의 땅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버림받고, 저주받은 백성이라고 일컬어졌던 이방인들을 위하여 전도에 길을 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할 때부터 유대 땅에서 이스라엘에게 천국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정작 믿어야 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부터 이스라엘은 자기들만 선택받은 선민이며, 구원은 우리의 전유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만 믿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 땅을 거룩한 땅이고 이방인의 땅은 저주받은 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저주받은 이방인의 땅에 가셨는데 그곳에서 놀라운 믿음의 사람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가나안 여인입니다.

 

  ②이 여인은 흉악한 귀신들린 딸을 둔 여인입니다(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가나안여자가 그 지경에 나와서' 가나안 땅은 원래 7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신7:1절에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족속과 여부스'족속 등 일곱 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의 대표적인 종교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고 있던 족속이 가나안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자는 잡다한 우상을 섬기고 있던 자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잡다한 우상을 섬깁니다. 돌멩이 앞에 절을 하고 불 떠놓고 절하고 굿을 하고 부적도 붙입니다. 불안하기 때문에 잡다한 신들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 여자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사랑하는 딸이 흉악한 귀신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의학으로도 풀 수 없는 고급스러운 문제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딸이 귀신 들어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고 미쳐 날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부모의 심정은 어떠하겠습니까? 갈기갈기 찢어지는 심정일 것입니다. 요즘 자식이 대학만 떨어져도 심장이 갈기, 갈기 찢어진다고 합니다.
  사실 이 어머니에 비하면 대학에 떨어진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본문은 '아주 흉악한 귀신이 그 딸을 사로잡았다'고 했습니다. 부모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기막힌 고통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어떻게 했겠습니까? 분명히 자기가 믿는 신에게 하소연을 했을 것입니다. 제물도 바쳤을 것입니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사랑하는 딸을 고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신에게 아무리 하소연하고 제사를 드리고 굿을 해도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귀신들린 딸을 어찌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이 여인에게 갈등이 온 것입니다. 그동안 믿고 신뢰했던 우상의 종교는 더 이상 아무런 능력이 없는 종교임을 이 여자는 깨달았습니다.
  이때부터 이 여인은 고민하고 다니다가 새롭게 하나님에 대해서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주님을 만나자마자 소리를 질렀습니다.

 

  ▶'소리 질러 가로되' 몇 가지로 생각해 봐야 합니다.
  ⑴부르짖는 믿음이 이 여인에게 있었습니다. 
여기서 '소리질러'란 말은 적극적으로 주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모습입니다. 즉,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여리고 성의 소경 바디매오도 주님을 향하여 소리지르며 부르짖을 때 주님이 그를 만나 주셨고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부르짖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이 여인은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55:6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⑵기회를 놓치지 않은 믿음이 귀합니다. 성공 자와 실패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성공 자는 기회를 잘 잡는 사람이고, 실패자는 기회를 놓친 사람입니다. 주님이 오늘 나에게 오셨습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내일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순간 주님이 오신 이 순간 부르짖어 만나고 기필코 내 딸을 고치고야 말겠다는 그 믿음이 얼마나 돋보입니까?
  여러분, 우리에게는 지금 이 시간이 기회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후6:2절에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⑶이 여인에게 악착같은 끈기가 있는 믿음이 귀합니다. 여기 '소리지르다'는 악착같이 큰소리로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그녀의 외침은 절규요 목숨을 내건 인내의 하소연입니다. /할/
  생명같이 귀한 딸의 고생을 곧 자신의 고생으로 여기고 예수님께 호소한 것입니다. 우리가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은 생명을 건 기도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어떤 기도도 못 들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속으로 생각만 해도 다 알아들으십니다.
  그러나 속에 간절한 마음이 있을 때는 막 터지는 것 같습니다. 그때는 입술을 조용조용히 얘기할 수 없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그랬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이 귀가 먹어서 소리 지르는 것이 아닙니다.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과 자녀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 바로 가나안 여인의 응답 받는 첫 번째 중요한 비결이 된 것입니다. /할/
  ⑷이 여인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긴 신학적 설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주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구약의 예언된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구약에 보면 메시아는 반드시 다윗의 자손에서 나온다고 해서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냥 '다윗의 후손'들이라는 말과는 전혀 다른 '메시아'라는 의미로 사용됐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 어떤 목적으로 따랐다고 했습니까? 병 고치기 위해서만 따랐습니다. 출세하기 위해서만 따랐습니다. 떡을 얻어먹기 위해서만 따랐습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이렇게 따르는 것을 보고 주님께서는 근심하시고 한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놀랍게도 예수님을 주로, 나의 주인으로 알고 '주 다윗의 자손이여' 이렇게 주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단순히 예수를 병만 고치는 의사나 마술사로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구세주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할/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누구로 알고 믿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곳에 있을 때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때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를 누구라 하는 것을 여러 군데서 듣고 있었던지라 대답하기를 '사람들이 예수님을 엘리야라 하나이다 혹은 모세라고 하나이다 혹은 선지자라고 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엘리야나 모세라 하면 당시 이스라엘에서 가장 존경받는 역사적인 인물들입니다. 당연히 얼른 생각하면 그 말을 들고 굉장히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주님은 그 말을 듣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러니까 함께 3년 반 동안이나 함께 자고 먹고 동거동락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그 때 제자들이 아무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을 때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다'
  베드로의 신앙의 고백을 들은 주님께서는 아주 기뻐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네가 이것을 알게 한 일은 네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니라.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할/
  신앙은 고백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처럼 고백하는 것이 축복 받은 고백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았습니다. 즉 모든 문제의 해결 자요, 만백성을 구원하러 오신 분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 고백 속에는 '내 딸의 병도 주님께서는 고치실 수 있습니다.'라는 확실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해결자이심을 확실히 믿으십니까? /아멘!/ 이 여인은 더 깊게 연구해 보면 모성애의 극치를 다시 한 번 볼 수가 있습니다. '내 딸을 불쌍히 여기소서'가 아닙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입니다.
  ⑸모성애의 극치를 이 여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딸은 그 자리에 와 있지도 않습니다. 어디에서 무슨 미치광이 짓을 하고 다니는지 모릅니다. 25절에는 같은 말을 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이 내용을 가만히 보면 '제 딸이 불쌍합니다. 도와주소서'가 아닙니다. '귀신 들린 딸을 가진 어머니의 이 비참한 모습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이런 마음입니다.
  우리는 요 며칠 전에 택시 안에서 두 어린 자식을 살리고 어머니는 세상을 떠난 교통사고의 기사를 접했습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큰 모성애의 사랑 앞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주의해서 보세요! 이 여인이 예수님께 외친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무어라고 합니까? '내 딸이 병들었나이다.' 이렇게 말하고는 '내 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이 여인은 딸이 병들었습니다. 그러나 병든 딸보다도 자기가 더 아프고 더 고통스럽습니다. 이것이 인간 됨이요, 이것이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복 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복 받아서 나만 잘 입고 잘 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받은 복이 사명이 되지 아니하면 그 복은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복이 다른 사람에게 쓰여지는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물질도, 건강도,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어쩌면 이 여인은 자기 자신의 아픔이라면 이처럼 애타고 간절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딸을 사랑하는 이 마음이 이같이 간절하고 절실해서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믿음이 이 여인을 이렇게 만든 것입니다. /할/
  사람이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늙어도 빨리 늙고 병도 많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쓸 수 있는 이 사명의 사람을 우리 주님이 찾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이 여인은 딸의 고통이 자기의 고통으로 알고 '그 아픈 가슴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예수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정신병자 딸을 가졌습니다. 이 딸 때문에 나는 화평이 없습니다. 애 때문에 남편과의 사랑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비웃습니다. 나는 지금 이 딸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불쌍한 어머니는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이렇게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위대합니다. '빅톨 유고'가 쓴 글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불란서 혁명직후에 병사들이 숲을 지나가는데 전쟁에 지친 사람들 중에 한 어머니가 아이 셋을 데리고 길바닥에 굶주려 지쳐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상사가 빵을 하나 던져 주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그 빵을 주워서 세 조각으로 나누어 아이에게 각각 주고는 자기는 자식들이 먹는 것을 쳐다보고 기뻐 웃고 있습니다.
  그때 한 병사가 말하기를 '저 여자는 배가 고프지 않은가 봐' 그때 상사가 이런 말을 합니다. '그게 아니야. 어머니이기 때문에 안 먹는 거야' 어머니이기 때문에 자기는 굶어도 아이들에게 빵을 나누어주는 것을 기뻐하는 게 어머니의 모성입니다. /할/

 

  ③시험도, 난관도 극복하는 신앙이 귀합니다(23).
  ⑴첫 번째 난관은 예수님의 '무응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대답지 않으신 것은 그녀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여러분은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신 줄 압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예수님은 대답을 안 하시고 침묵하십니다.
  그렇게 간절하게 눈물을 흘리면서 무릎을 꿇고 울부짖어 기도했는데 새벽시도를 했고, 철야기도를 했고, 금식기도를 했는데도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실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예수님께서 못 들어서 침묵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 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말로만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고백한다고 응답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 중에 예수님이 메시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독생자이시고 능력이 많은 분이라는 것을 모든 성도가 모르겠습니까?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마음속에 간절함이 없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처럼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과 다릅니다. 사람들이 대부분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 하나님을 침묵하시며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믿/
  아무튼 주님의 그 침묵은 짧은 시간이지만 이 여인에게는 고통스럽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두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부정적이요, 하나는 긍정적인 것입니다. 부정적으로 나가게 되면 응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긍정적으로 나가게 되면 침묵 속에서 더 깊은 응답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그 무 응답의 고통을 잘 극복하고 끈질기게 따라 오면서 기도하고 간구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 극복하기 힘들었던 또 하나의 요소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취하는 태도입니다.
  ⑵제자들의 거절입니다.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이 여자가 귀찮게 자꾸 따라오면서 보채고 있으니 따돌려 버리시라고 아우성입니다. 이 여인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사실 예수님은 뜻이 있어서 침묵을 하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단순히 귀찮게 하니 빨리 보내라는 태도입니다. 제자들은 불쌍한 여자의 문제 해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평안만을 추구하는 오늘의 우리들 모습을 비쳐 주고 있습니다.
  ⑶세 번째 난관은 주님이 또 다시 거절을 하고 말았습니다(24).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이 여인은 가나안 여인입니다. 이방 여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이것은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든지 거절하지 않고 사랑을 베풀어주신 분입니다. 사랑을 받을 자격에 있거나 없거나 간에 구원에 손길을 베풀어 주셨고, 병든 자를 고쳐주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침묵만 하시다가 제자들이 하도 야단을 하니까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곧 택한 백성을 구원하려고 왔지 너와 같은 이방인들을 구원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끊임없는 거절 앞에도 그녀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④그런데 보십시오! 끈질긴 여인의 인내와 믿음을 보세요!(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예수님의 부정적인 태도와는 상관없이 이 여인은 절대 인내와 절대 믿음을 가지고 주 앞에 더더욱 바짝 가깝게 다가옵니다. 예수님은 거절하시고 여인을 거절 속에서도 적극적인 인내와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긍휼을 구하고 있습니다.
  뚝하면 시험에 빠지고 신앙이 넘어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늘 본문의 이 가나안 여인의 신앙은 분 받아야 합니다.
  여자가 '절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간절하게 무릎 꿇고 매달린 것을 의미합니다. 이 정도로 했으면 예수님도 좀 봐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⑤개 취급을 하시는 예수님! (26)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마치 여인을 예수님은 개처럼 취급하고 계십니다. 결국, 이 말씀은 '개 같은 여인아 내가 개와 같은 이방인인 너에게 어떻게 거룩한 은혜를 베풀겠느냐?' 라는 아주 불쾌한 표현입니다.
  여기 떡은 말씀입니다. 능력의 말씀, 축복의 말씀을 상징한 것으로 개 같은 이방 여인에게는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틴루터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녀의 마음을 그리고 그녀의 믿음은 산산 조각나게 했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사실 얼마나 자존심과 체면을 상하게 하는 말입니까? 사실 유대인들은 선민임을 의시대면서 이방 사람들 특히 가나안 사람들을 개로 보았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개같이 음란하고 개같이 무질서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보면서 '자존심도 없지' 하고 말합니다. 여인이 여기에 나오기까지 나름대로 고민이 있고 주저함도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 있는데서 '내 딸이 귀신들렸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용기가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 눈치도 보입니다. 특히 이방인을 개로 바라보는 유대인들 눈치를 봐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감수하고 나왔는데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나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싫으면 관두시오' 하고 돌아서든지, 여기 아니면 내 딸 못 고치나?'하고 일어나든지 아니면 묵묵히 참고 받아들이든지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조용히 음미해보면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이 여인은 자존심을 내세우기 전에 이미 주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께 처음 나왔는데 예수님을 향하여 무어라 부르고있습니까? 27절에서 '주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⑥'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7)
  이 여인은 많은 시험을 줄기차게 당하면서도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너는 개'라고 멸시하는데도 '옳소이다' 즉 옳으신 말씀입니다. 예수 밖에 있는 생명들은 개나 짐승처럼 여긴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참 엄청난 고백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여인의 인내를 본받아야 합니다. '너는 죄인이다' '예 저는 죄인입니다. 물론 더럽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아야 되겠습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이럴 수 있습니까? 여기까지 가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종들을 통해서 때로는 여러분을 책망할 때도 있습니다. 책망은 믿음으로 사랑으로 받는 사람이 신앙의 성숙을 이루고 끝내고 복을 받습니다.
  또 이 여인이 '주여 옳소이다'하고 한 것은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자녀가 아니라 짐승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한 말입니다. 그러니 이 여인은 지금 만일 주님께로부터 내가 어떤 은혜를 받게 된다면, 그것은 내가 마땅히 받을만한 내 몫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나는 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 나는 주님 앞에서는 개와 같은 존재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저 유대인들, 저 주인의 본래의 아들들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흘려 내어버리는 그 아까운 은혜들. 그 은혜들 중에 조금이라도 달라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 은혜 감사히 받아서, 새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이 여인의 고백입니다.
  이 얼마나 간절한 심정인가? 얼마나 주님의 은혜를 높이고 사모하고 있는가? 얼마나 자기 자신을 낮춘 것인가? 한없이 낮춘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을 수 만 있다면, 유대인들이 거부하고 내버리는 그 부스러기 은혜라도 받을 수 있다면 이 보다 더 낮출 수도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여인의 심정이었습니다. /할/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인의 이 고백에 예수님도 깜짝 놀랐습니다. 이 여자가 예수님을 놀라게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이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강도 높은 시험을 계속해도 시험을 당하는 여인은 화를 내거나 자존심을 내세우거나 한을 품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옳소이다.'라는 이 여인의 고백 속에 진정한 겸손과 진정한 믿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주여!'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은 '당신은 나의 생명의 주인입니다.' 이런 고백입니다. 그러면서 이 여인은 '부스러기'라도 요구합니다. '개에게 주는 부스러기라도 주시옵소서! 나에게 부스러기라도 주시면 한 말씀이라도 주시면 단 한 번만의 은혜를 주시면 그 한 번의 긍휼로도 내 딸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라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 부스러기를 무시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 칠병이어의 기적을 베풀 때도 부스러기가 더 많았습니다. 그 때 열두 광주리를 남겼고, 일곱 광주리를 남겼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그 부스러기 신앙을 축복하고 칭찬하고 복을 주십니다.

 

  ⑦주님의 시험에 합격한 여인!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태복음에 예수님으로부터 큰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 받은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 다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입니다. 한 사람은 8장에 나오는 가버나움의 백부장입니다. 그를 향하여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8:10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은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그리고 오늘 본문의 이 여인에게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큰 믿음의 반대는 적은 믿음인데 예수님으로부터 적은 믿음을 가진 자라고 꾸중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마8장에 보면 바다에 큰 지진이 일어나 풍랑에 배가 위험할 때 제자들이 두려워하였고 급기야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8:26) /할/
  그러니까 적은 믿음의 소유자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주위 환경을 보고 무서워하는 자입니다. 또 14장에 보면 한 밤중에 예수님이 바다위로 걸어오실 때 베드로가 예수님인 것을 확인하고 물위로 걸어갔는데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에 빠져갔습니다.
  그러한 베드로를 구해내시고서 하는 말씀이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적은 믿음을 가진 자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의심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큰 믿음을 가진 자는 무서워하지 않으며 의심하지도 않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무서워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되 무서워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면 이 사람은 큰 믿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여기 '네 믿음이 크도다' 참 굉장한 말씀입니다. 크다는 개념도 여러 가지입니다. 이를테면 부자도 웬만한 부자면 감당하라고, 더 큰 부자는 거부하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크다는 것에는 조금 큰 것, 더 큰 것, 엄청나게 큰 것이 있는데 여기 '네 믿음이 크도다'란 원어입니다. 네 믿음이 위대하다는 메가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여인이 믿음이 '메가 톤급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큰 믿음 적은 믿음이 있습니다. 이왕 우리 믿음 생활을 할 바에는 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큰 믿음 있으면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멘!/
  ▶이 여인의 위대한 믿음이 무엇인가?
  ⑴예수님께서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예수님 앞에 가면 병이 나을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⑵'주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이 믿음이 위대합니다. 나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임을 고백하는 믿음, 어떤 사람은 예수님도 믿으면서도 예수님께 의지하지 않고 자기 수단 방법 배경, 돈을 의지합니다.
  ⑶'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부스러기라도 달라'는 그의 태도가 위대합니다. 이런 위대한 믿음은 위대한 축복의 역사와 응답의 역사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될지라' '그 시로 그의 딸이 나으니라!' /할/   (2011년 1월 9일 대예배 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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