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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된 새해를 맞이하려면 수영로교회 정필도 목사님 설교
본문; 사도행전 12:1-7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이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시편기자는 시편 90:10에서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더군다나 세월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달려가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화살처럼 ‘날아간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나간 1년을 돌이켜보면 어찌나 세월이 빠른지 2006년 새해를 맞이하여 새로운 결심을 하고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2월 31일로 올해의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마치 ‘경주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100m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 경주와 같습니다. 경주를 할 때 보면, 선수들이 출발선에 일렬로 늘어서 있다가 출발신호에 맞춰 동시에 출발합니다. 그러나 출발은 같아도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점점 간격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으로 결승점을 누가 가장 먼저 통과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작도 중요하고 중간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입니다. 전도서 7:8을 보면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금년 한해의 마지막 날인 오늘이 가장 중요한 날임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은 지난 1년 동안 신앙의 경주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곰곰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밤 12시가 되면 2006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올 한해의 성적표가 하늘나라에 기록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매우 중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TV를 통해 우리나라 스케이트 선수들이 국제대회에 나가 좋은 성적으로 우승하는 장면을 가슴졸이며 시청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처음에는 2~3등으로 달리다가 결승점에 골인하기 바로 직전에 앞서가는 다른 나라 선수들을 앞지르고 간발의 차이로 우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든 경주의 마지막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신앙의 경주를 잘하려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의 경주를 방해하는 것들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버리지 못하는 죄와 죄악의 습관들입니다. 이것들을 과감히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죄는 쉽게 벗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좀처럼 죄악의 습관이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4절에서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자신의 죄악된 나쁜 버릇을 고치기 위해 40일 금식기도까지 하며 목숨을 걸고 죄와 싸웠습니다. 그 결과 죄를 이기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교회도 부흥하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세상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이 죄악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죄 가운데 살면 망하는 길이고 죽는 길입니다. 신명기 28장을 보면, 순종함으로 받는 ‘축복의 길’과 불순종함으로 임하는 ‘저주의 길’이 잘 설명되어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아니할 때 모든 저주가 다 따라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축복을 받습니다.
금년 한해 유종의 미를 거두려면 우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를 낱낱이 하나님 앞에 자백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1:8~9을 보면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자백한 후에는 반드시 회개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3장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요한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3:7을 보면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 책망했습니다. 다시 10절에서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렇다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 도적질한 사람이 주인에게 찾아가 용서를 빌고 도적질한 물건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적질하던 사람이 다시는 도적질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열심히 일을 하여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구제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엡 4:28). 또 더러운 말을 하던 사람이 더 이상 더러운 말을 하지 않고 덕을 세우는 선한 말을 하므로 해서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는 것입니다(엡 4:29).
또 금방 갚겠다고 약속을 하고 돈을 꾸어간 사람이 1년, 2년이 지나도 자기 할 것은 다 쓰면서 도무지 갚을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살던 사람이 마음을 고쳐먹고 회개하고 원금과 이자까지 다 갚았다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성도님 중에도 하나님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서 잘살아보겠다고 축복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말로만 회개하고 용서를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드리지 않았던 것을 모두 다 갚아야 온전한 회개를 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색으로 집안을 망친 한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사나이의 외동딸이 세느강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옷에서 ‘아버지의 심한 외도와 과음으로 인해 비참하게 사는 엄마를 보면서 도무지 살 의욕을 잃었다’는 유서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사나이는 ‘이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고백하며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프랑스의 교육부장관을 지내고 프랑스 국기인 3색기의 유공자가 된 독실한 신앙인으로 살았던 세계적인 문호인 빅토르 위고입니다. 이 한 사람의 회개가 자신과 세계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처럼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 인간을 학술적인 용어로 ‘호모 사피언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도 생물학적으로는 동물 중의 하나에 불과하지만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점입니다. 생각을 잘하는 사람은 지혜가 생겨서 모든 것을 잘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생각을 잘못하는 사람은 지혜가 없고 무지하고 사람이 미련해집니다. 이런 사람은 짐승과 다를 바 없는 미련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미련한 사람에 대한 말씀이 성경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잠언 26:3과 22:15과 17:10을 보면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자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한 마디로 총명한 자를 경계하는 것이 매 백 개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이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지난 1년 동안 하나님 앞에 어려운 시련을 겪은 사람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징계입니다(히 12:6). 만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모든 것이 잘 되고 평안하다면 사생자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히 12:8).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에게는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면 반드시 징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미련한 사람들은 이를 생각을 잘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하지 않고 늙어서 또는 몸이 약해서 병들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실수로 사고가 났다고 생각하고, 운이 나빠서 못된 인간 만나 손해보고 고생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의 사람이 하는 생각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공중에 나는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29). 여러분! 이 세상에 우연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 사건의 배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사건 속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내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지, 내가 무엇을 깨달아야 할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것들이 있다면 신앙의 경주를 잘 할 수 없고 축복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앞을 막는 것들이 많이 있겠지만 특별히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도의 신앙의 경주를 방해하는 것들은?
1.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교만을 미워하시며(잠 16:5),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대적하십니다(약 4:6, 벧전 5:5). 뿐만 아니라 교만한 자의 집은 허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잠 15:25). 교만은 멸망의 선봉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도무지 충고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가장 미련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 26:12).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감사할 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됩니다.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눈물과 간구를 들으시고 살려주셨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의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역대하 32:24~26을 보면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된 고로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고 또 이적으로 보이셨으나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저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었더니 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예루살렘 거민들도 그와 같이 하였으므로 여호와의 노가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저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교만을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됩니다.
2. 증오심입니다.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증오심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사기친 사람, 손해를 준 사람, 비방하고 다니는 사람, 이간질하는 사람, 고통을 준 사람 등에 대해 증오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증오심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마치 독약을 입에 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자칫 잘못하면 상대편을 죽일 뿐만 아니라 자신도 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미움을 받아 결국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참으로 억울한 죽음을 예수님께서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들을 다 죽일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저들을 미워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용서하시고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원수들을 위해 대신 죽으시므로 저들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로마서 5:8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죽음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부끄러운지 알고 계셨지만, 끝까지 참으시고 그 고난을 다 받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를 기뻐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음에서 일으키시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정복하게 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승리할 때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위임해 주실 것을 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다 구원을 받게 되는 영광스러운 날이 올 것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비록 십자가가 부끄럽고 잔인한 죽음이지만 그 뒤에 따라 올 영광을 바라보고 기쁨으로 그 죽음을 맞이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미워할 수밖에 없는 원수와 같은 인간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이 매우 어렵지마는 용서하고 사랑하므로 해서 찾아오는 영광과 축복을 바라보고 예수님처럼 저들을 용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를 용서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태복음 18:35을 보면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용서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 있을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가 용서하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용서해주시지만 만일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용서해주시지 않는다는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용서하기 싫어도 반드시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하면 자신이 손해 볼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잠언 19:11을 보면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4:31에서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러므로 억울하고 화가 나도 끝까지 잘 참고 견디면서 인내하고, 기쁨으로 용서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할 수 있기 바랍니다. 이를 보시고 우리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리할 때 우리에게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막혔던 문이 활짝 열리고, 기도의 응답이 빠를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이뤄지는 역사가 반드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주신 말씀에 순종하셔서 복된 새해를 맞이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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