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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자 구원을 위한 칼럼

by 【고동엽】 2022.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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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자 구원을 위한 칼럼

                                                                                                      박 재 열 지음

    

조상도 부모도 모르는 사람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어느 누구도 조상이 없는 사람은 없다. 나무는 뿌리가 있고 물은 원천이 있는 것처럼 사람은 조상이 있고 부모가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조상과 부모를 극진히 섬기는 것을 크게 여겨왔던 것이다. 동양의 사상을 지배해 온 유교에서도 부모와 조상에 대한 효를 강조하였고 서양 사상의 근본이 되는 기독교에서도 부모 공경을 인륜의 첫 계명으로 강조하며, 심지어는 부모에게 불효막심한 자에게는 사형까지 시켜왔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조상도 모르는 것들이라고 욕을 먹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은 대부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인 것이다. 성경에는 분명히 유교에서 보다 더 무섭게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했는데 예수 믿는 자들이 욕을 먹는 이유가 무엇인가? 기독교인이 잘못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을 욕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것인가? 분명 어느 한 쪽이 잘못 된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

불신자들은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부모도, 조상도 모르는 것들이라고 한다. 그렇게 욕을 하는 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제사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사가 옳은 것인가? 옳지 않은 것인가?

제사 지내는 것이 조상이나 부모를 공경하는 것인가? 제사는 조상 귀신에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括曠舊嗤?조상 귀신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그러므로 제사 지내는 것은 조상을 귀신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귀신을 싫어하고 더럽게 여기면서 자기 부모와 조상을 귀신으로 대우하는 것은 얼마나 불효막심한 일인가? 진정으로 자기 부모와 조상을 공경하는 사람이라면 돌아가신 자기의 부모와 조상을 귀신으로 생각지 말고, 그 분들이 남기고 가신 뜻대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온 가족이 갖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기에 기독교에서는 최고 큰 조상이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돌아가신 부모와 조상이 남긴 뜻을 생각하며 자녀들에게 조상과 부모의 좋은 점을 가르쳐 주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을 하나님 앞과 조상들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 것을 다짐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살아계셨을 때는 부모를 귀찮게 여기며 서로 모시기를 미루다가 죽은 후에 자기 부모를 귀신으로 취급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이 조상과 부모를 공경하는 것인가? 이제 우리는 1392년에 이성계가 중국에서 도입한 잘못된 전통에서 벗어나 살아계실 때 극진히 효도하고,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천국으로 가셔서 존경받는 조상이 되게하는 올바른 효도로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진정으로 조상과 부모를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을 사랑하고 기다리신다.

 

교만한 자

 

사람의 성품 중에 가장 오래되고 악한 것은 교만일 것이다. 교만은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에서부터 유전 된 것으로 인간을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만든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과 대등한 자리를 차지하려다 쫓겨난 천사가 바로 마귀인데, 첫 사람인 아담의 아내 하와를 꾀어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다는 교만으로 범죄하게 만든 것이다.

오늘날 모든 인간은 교만한 심성을 가지고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의 뜻과 법칙에 따라 부모를 통해 이 땅에 태어난 하나님의 소유물이요, 창조물인 인간이 자기 유익과 욕심에 따라 마음대로 살아가는 모습은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남보다 머리가 좋다고, 남보다 재능이 있다고, 잘 생겼다고, 재산이 많다고,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모습은 더욱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닌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원래부터 자기 것이었는가? 아니다. 모두 하나님께 받은 것이다.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듯이 또한 죽을 때도 빈손으로 가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남보다 많이 받은 것을 가지고 교만을 부린단 말인가?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서 많은 것을 소유했다 한들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차라리 가난하고 적게 가진 것이 낫지 않겠는가? 죽을 때까지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는 자는, 마지막에 지옥 심판을 받게 된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께 돌아왔으면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의논하는 기도도 하지 않으며, 세상에 빠져 살고 시험에 잘 드는 사람도 교만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대적한다고 하셨다. 우리의 교만을 꺾어 하나님의 나라에 귀하게 쓰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고통과 실패를 겪게 하시며 연단하시는 것이다.

이 시간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끊임없이 머리를 드는 교만, 조금만 긴장이 풀어지면 일어나는 교만, 조금만 형편이 좋아지거나 일이 잘 되면 솟아 오르는 교만에 빠져 있지 않는가 생각해보자. 틈만 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과 의논하지 않고 마음대로 살려는 교만을 물리치자.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으니 기도하자. 이 교만 때문에 피 흘리신 예수를 믿고 기도할 때만이 교만을 이길 수가 있다. 할렐루야!

 

모든 인간은 사형수다

 

사람은 예외 없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과정인 것이다. 마치 사형 선고를 받고 사형수가 집행당할 날을 앞에 두고 시간을 보내는 것과 같다. 교도소의 사형수는 인간의 법을 어겨 인간들에게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법을 거역함으로 하나님의 사형 선고를 받은 하나님의 사형수인 것이다. 교도소의 사형수가 불과 수 개월이나 수 년 내에 사형 당하는데, 하나님의 사형수는 짧은 시간 혹은 80년, 100년 후에 사형 당하기도 한다.

교도소의 사형수가 좁은 감옥에 갇혀 부자유한 생활을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사형수는 지구라는 넓은 감옥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 교도소의 사형수가 초조와 불안 속에 사형당할 날을 앞에 두고 있는데 비해 하나님의 사형수인 모든 인간들은 죽음을 잊어버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살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사형수이다.

아무리 유명한 박사가 되고, 영웅이 되고, 부자가 되어도 하나님의 사형수임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교도소의 사형은 목숨만 끊어지는 사형이지만 하나님의 사형은 영원한 지옥까지 가는 사형인 것이다.

모든 인간은 지옥까지 가는 사형수다.

교도소의 사형수가 감옥 안에서 명예와 돈에 대한 욕심과 집을 사는데 정신을 쏟고 있다면 그는 머리가 돈 정신병자일 것이다.

지옥의 사형을 앞둔 사형수가 명예와 권세와 돈 모으는 것과 집을 사는 것이 무슨 급한 일인가? 사형수에게 제일 급하고 중대한 것은 사형 선고를 면제받아 살게 되는 것이기에 머리속, 마음속에 온통 그 생각 뿐일 것이다.

하나님의 사형수인 모든 인간에게 시급한 것은 하나님께 사형을 면제받는 것이다.

지혜로운 인간은 온통 그 생각만 할 것이다.

■■인간은 왜 죽음을 안고 사는 것일까? 해결 방법은 없을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 값으로 대신 죽게 하심으로 사면장을 만드셨다. 이 사면장을 받아들이면 산다. 누구든지 사면장이신 예수님을 믿게 되면 영원한 지옥에서 영원한 천국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이 사면장을 받아들이겠는가 또는 거절하겠는가? 지금 이 사면장을 받아들이자.

지금 예수를 믿어 보자.

가까운 교회는 사면장을 받아들인 당신을 위해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리고 있다.

지금, 지금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당신을 기다리신다. 지금, 지금이다. 할렐루야!

 

진짜 무식한 자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많은 지식이 필요하기에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래서 어느 누구나 지식이 많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여 공부하고 학교를 다닌다. 심지어는 대학까지 공부해야만 유식한 자가 되고 출세하는 지름길로 생각하며 지성인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제도적인 모순과 가난과 나쁜 환경 때문에 누구나 다 대학 공부를 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대학 입시에 떨어졌거나 대학 공부를 못한 것이 인생의 실패자요, 낙오자가 된 것으로 여기며 열등의식을 갖고 사는 자가 허다하다.

그러나 학력 때문에 기를 펴지 못하고 무식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요, 잘못된 생각이다. 이는 진짜 무식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데서 빚어진 결과이다. 박사라도, 대학 교수라도 자기가 어디에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아가고 있으며 인생의 마지막 목적지는 어디인가를 모른다면 얼마나 무식한 자인가? 의학 박사가 기차를 타고 있으면서 어디를 목적지로 하고 달리는지 모르고 있다면 그 의사를 제 정신이 있는 사람으로 보겠는가? 아마 미친 의사라고 비웃을 것이다.

 

인생 열차를 타고 있는 인간들이 어디서 왔으며, 무엇 때문에 타고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고 산다면 이보다 더 무식하고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경에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 모든 지식과 지혜의 뿌리요, 시작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면 인생의 시작, 과정, 목적까지 훤히 알도록 지혜를 주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이기에 예수를 믿고 사랑하면 인생의 근본을 알게 된다. 또한 영원한 생명과 참 행복을 얻게 된다.

진짜 유식한 자는 예수를 확실히 만나서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인생의 근본된 지식을 깨달은 사람이요, 가장 무식한 사람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사는지 어디를 향해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아무리 온갖 지식을 다 가졌어도 가장 근본된 지식인 하나님과 인생의 목적을 모른다면 가장 무식한 사람이 아닌가? 당신은 유식한 사람인가? 무식한 사람인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면 영생을 얻는 진짜 유식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이 시간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앞에 돌아 오라.

모든 교회는 당신이 유식한 사람되어 영생을 얻게 하려고 세워졌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귀하를 기다리신다. 지금, 지금이다! 할렐루야!

 

사람은 미쳤기에 산다

 

제 정신이 아닌 행동을 하며 돌아버린 사람을 보편적으로 미친 사람이라고 한다. 또한 무슨 일에 빠져 열심을 내는 사람도 미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무엇인가에 미쳐서 살아가는 미친 사람들이 아닌가? 많이 미친 사람일수록 그것 때문에 성공했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과학에 미쳐 연구로 일생을 보낸 유명한 과학자도 많이 있다. 일생을 발명하는 일에 미쳐 발명왕이 된 에디슨 같은 사람도 있다. 사업에 미쳐 유명한 사업가가 되기도 한다.

 

사람은 무엇인가에 미쳤기에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이다. 짐승이 아닌 인간은 무엇인가에 미치지 않으면 살 수 있겠는가? 하다 못해 자기와 자기 식구들을 잘 먹이고 잘 입히는 것에 미치기도 하고, 집을 장만하는 것에 미쳐 일생을 보내기도 한다. 자식을 출세시키는데 미쳐 일생을 보낸 후 후회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악한 일에 미쳐 이 사회를 어둡게 만드는 사람도 많이 있다. 도박에 미친 사람, 마약에 미친 사람, 여자에 미친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나쁘게 미친 사람들은 세상을 어둡게 하고 해롭게 하여 비난을 받는다.

비난을 받는 미친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들도 포함된다. ■■예수에 미친 것들, 교회에 미쳤다.■■고 하며 교인을 거칠게 비난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예수에 미친 사람들은 예수께서 인간을 위해 피흘려 죽으신 사랑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사람이요, 이웃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일에 미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예수에 미친 사람은 영생에, 천국에, 이웃을 구하는 일에 미친 사람이기에 비난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인간을 위해 피흘려 죽으신 예수께 미치지 않고 여전히 돈에 미치고, 자기 식구의 잘 사는 것에 미친 사람들 때문에 기독교인이 비난을 받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미쳤기에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무엇에 미쳤는가? 돈, 명예, 출세, 권세같이 썩어질 것에 미쳐서 살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 천국, 내세, 사람다운 삶에 미쳐 사는가? 이왕에 미쳐서 살 바에야 고상하고, 영원하고 높은 것에 미쳐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에 미치면 예수 안에 있는 영생, 천국 영광을 얻고 참 성공을 거둔다.

당신은 지금까지 무엇에 미쳐 살았는가?

이왕이면 지금부터라도 올바로 미쳐서 살아가지 않겠는가? 예수님은 우리를 올바로 인도하신다.

지금 하나님께서 당신을 기다리신다.

 

잘 사는 사람

 

사람은 어느 누구든지 잘 사는 것을 좋아한다. 못 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잘 사는 것을 그렇게 원하면서도 잘 사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돼지가 잘 사는 것과 사람이 잘 사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돼지같이 사는 것을 잘 산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돼지가 잘 사는 것은 열심히 먹고 아무런 병 없이 살을 많이 찌우다가 사람에게 고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저 고민도 없이, 걱정도 없이 질퍽거리는 오물 바닥에서 잠을 자고 커가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왜 사는가? 어디를 향해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서 걱정도 생각도 없이 살다가 죽는 것이다.

사람이 잘 사는 것이 돼지와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고 그렇게 살면서 잘 산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많다. 열심히 돈을 벌어서 자기와 자기 가족을 잘 먹이고 입히는 것으로 잘 산다고 할 수 있겠는가? 돼지가 잘 산다는 것과 사람이 잘 산다는 것이 이 세상의 욕심을 많이 누리고 편히 사는 것이라면 사람보다 돼지가 훨씬 더 행복한 존재가 아닌가? 살기 위해서 땀 흘려 고생하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꿀꿀■■거리며 먹을 것을 받아 가지고 실컷 먹고 잠자며 편히 살아간다. 돼지가 잘 산다는 것과 사람이 잘 산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람은 돼지와 달리 인격체이요, 영적인 하나님의 특별한 피조물이다. 돼지는 사는 동안에 만족과 욕심을 채우는 것이 잘 사는 것이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사람은 영혼이 있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과 함께 내세의 생명을 주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죽음과 죽음 후의 문제를 해결하고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며 기쁨으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지인 천국을 확실히 바라보고, 사는 목적이 부자가 되어 남보다 많이 욕심을 이루는게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웃을 사랑하며, 돼지같이 세상 욕심을 위해 사는 자를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올바로 인도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당신은 오늘까지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떻게 살아가려 하는가? 욕심을 많이 이루려고 사는 것은 사람으로 가장 잘못 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 사람은 바로 살고 잘 살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며 아직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은 아직도 당신을 기다리신다.

할렐루야

 

인생의 끝이 좋아야

 

무슨 일이나 어느 누구에게나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게 사실이다. 시작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시작이 반이라고 말하면서 시작을 빨리하게 하기도 하고 시작을 잘하게 하기 위하여 돌다리도 두드려 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작 못지 않게 중요한 게 바로 끝이 아닌가? 학교에 입학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졸업은 또한 얼마나 중요한가? 아무리 시작을 멋있게 했을지라도 끝이 잘못되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끝이 잘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흔히들 비참하게 죽거나, 가난하고 외롭게 살다가 죽는 경우에 끝이 안 좋다고 한다. 그러나 죽는 모습이나 죽을 때의 환경을 보고 함부로 끝이 안 좋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는 것은 우리의 육체가 죽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고 오히려 죽음과 함께 새로 시작되는 천국과 지옥의 생활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끝이 좋은 죽음은 그 모습이나 환경이 중요한 게 아니고 인생을 어떻게 살았으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죽는 날까지 호의호식하며 자녀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죽은 후에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호화 묘지에 묻혔다 해도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기 생각과 욕심대로 산 대가로 지옥에 떨어졌다면 어찌 끝이 좋은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쉽고 편안하게 신앙 생활하며, 세상 유행과 욕심을 따라 고난과 핍박도 없이 살고 복을 많이 받았다는 칭찬 속에 살다가 죽었다 하자. 그러나 죽음 후에 하나님 앞에 가서 간신히 천국에 들어가서 부끄러워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끝이 좋은 게 아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비록 가난하고 어리석은 것 같아도 죽을 때까지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며, 하나님을 모르고 인생의 목적지도 모르고 사는 불쌍한 세상 사람들을 건지려고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최선을 다하는 자가 끝이 좋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눈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칭찬하는 평가를 받아야 끝이 좋은 사람이다.

당신은 지금 인생을 끝낸다면 과연 하나님 앞에 끝이 좋은 사람인가? 끝이 나쁜 사람인가? 항상 최선을 다하므로 끝이 좋은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이 계실까?

 

추운 겨울이 물러가면 봄이 어김없이 찾아오고, 저녁이 되어 밤이 깊으면 또 새벽이 어김없이 찾아온다.

이러한 우주 자연의 질서와 법칙이 저절로 되어지는 것같이 보인다. 인간들도 그냥 저절로 숨을 쉬고 살아 움직이고 참새도 곤충도 그냥 저절로 자기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며 살아가는 것 같다.

그러나 깊이 생각을 해보면 ■■저절로■■라는 말이 얼마나 모순된 말인가? 팽이를 세게 돌려놓으면 얼마동안은 스스로 돌아가지만 곧 쓰러져 버린다. 시계도 태엽을 감은 만큼 작동을 한다. 다만 기술과 과학의 힘으로 오래 움직이게 할 수 있어 마치 저절로 돌아가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사람이 움직이도록 하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지구가 움직이고 태양이 빛과 열을 발하는 모든 움직임은 사람과 비교가 안 되는 절대자 하나님이 팽이를 사람이 돌리듯이, 시계를 만들듯이 지구와 태양을 돌려놓으신 것이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사는 것 같지만 어느 누구도 자기 의지로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 없이 타의에 의해 생명의 법칙에 따라 출생하게 된 것이다. 모든 동물도 마찬가지로 생명의 법칙에 의해 이 땅에 출생하게 된 것이다.

사람과 아주 비슷한 로보트가 만들어져서 인간과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움직여도 로보트는 사람의 조종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종하는 사람이 아닌 다른 이들은 마치 로보트가 저절로 움직이는 것처럼 생각 할 것이다.

사람도 사람보다 크고 엄청나신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기운만큼 살다가 죽는다. 팽이를 중간에 쓰러지게 하듯이 사람의 생명도 중간에 끝나게 하는 수가 있다. 로보트와 시계를 사람이 관리하듯이 우주와 사람도 하나님이 관심을 갖고 살피시는 것이다.

하나님 없이 우주가 존재하고 사람이 살아간다는 말은 사람이 만들지 않고 기름을 주지 않는데도 자동차가 생겨서 움직이게 된다는 말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금도 살피시고 지키시고 관리하신다. 그러시다가 마지막에 심판하신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산 자는 지옥 쓰레기장에 들어간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느끼게 된다. 할렐루야!

 

세상의 등대

 

사람들에게 가장 오해를 받고 있는 것은 아마 교회일 것이다. 교회의 존재를 올바로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예수를 믿지 않는 분들은 더욱 교회에 대한 오해가 심하여 영리단체나 회사로 보는 이도 있다.

이런 오해를 하게 된 이면에는 교회가 교회로써의 구실을 못한 큰 책임이 있음을 스스로 시인한다.

누가 뭐라든 교회는 세상의 등대이다. 갈 길을 모르고, 인생의 목적을 모르고, 무엇 때문에 사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확실한 인생을 보여 주고 천국가는 길을 가르쳐 주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끊어져 죽음을 향해서 살아가던 사람이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모여 예배하는 곳이 교회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 사람들을 죄에서, 맹목적으로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것에서 건지려고 최선을 다한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은 다른 사람의 영혼들을 사랑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도한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징그러운 벌레를 만난 것처럼 전도자와 교회를 싫어하고 적대시하는 사람까지 있다.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우리도 예수를 믿기 전에는 그렇게 했으니까 말이다.

우리 교회에서도 예수를 비난하던 사람이 지금은 집사가 되어 기뻐하며 확실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다. 아무리 오해를 하고 박대를 해도 교회는 등대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한 사람이라도 죽음과 공동 묘지를 마지막 목표로 삼고 사는 자리에서 구하고 마지막 지옥 형벌에서 건지는 일을 계속할 것이다.

교회는 어찌하든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하려고 애쓸 것이다. 모든 성도들도 진정으로 영혼을 사랑하여 희생과 헌신으로 여러분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 이제 잘못된 교회와 교인을 보고 가졌던 교회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오해를 푸시길 바란다.

교회는 당신을 위해, 당신의 가정을 위해, 지역 사회를 위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있다.

당신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나? 또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가? 인생의 목적지와 목적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 오라.

하나님은 당신을 기다리고 계신다.

 

진짜 복

 

사람은 어느 누구나 복을 좋아하고 복 받기를 원한다. 그러기에 눈에 띄는 곳곳에 복(?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쓴다. 그러나 복을 그렇게 좋아하고 원하면서도 복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확실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이 많거나 출세를 하는 것이 복인 줄로 착각하고 산다. 그러나 이러한 복은 매우 위험하고 헛된 복이다. 돈이 많은 것이 좋은 것 같지만 돈이 많기 때문에 강도가 들어오고, 유괴 당하고, 살해를 당하기도 한다. 출세했기 때문에 불행해지고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가? 돈과 명예와 권세가 좋은 것 같지만 사람을 잠깐 좋게 하다가 해롭게 하거나 죽음과 함께 물거품같이 사라진다. 또 죽음과 내세의 문제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돈과 권력이 많은 까닭에 마음이 어둡고 교만해져서 영혼의 생명까지 지옥으로 가게 한다.

잠시 잠깐 잘 되게 하다가 환경에 따라 해롭게 하고 사람을 망하게 하는 돈과 명예와 권세를 얻는 것이 결코 복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가짜 복이요, 헛된 복이요, 썩어질 복을 진짜인 줄 알고 돈과 명예와 권세를 얻으려고 목숨과 영혼을 바치면서까지 혼신을 다하고 있다. 그러다가 허무하게 또는 비참하게 무의미하게 죽고 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헛된 복 때문에 근심하며, 고생하며, 낙심하다가 인생을 끝낸다.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인가? 진짜 복은 잠깐 잘 되게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잘 되게 하는 것이다.

나를 영원히 잘 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나와 당신을 위해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형벌과 저주를 받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진짜 복이다. 예수를 믿고 그를 의지함이 진짜 복을 얻는 것이다. 예수님은 복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으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 백성이 되어 영생을 얻는다. 그를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살수록 영원히 잘 되니 진짜 복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주를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주를 멀리하는 자는 음란한 여인같이 망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오늘까지 어떤 복을 위해 살아왔는가? 잠깐 있다 없어지는 복을 위해 살았는가? 이제부터 진짜 복인 예수를 믿고 그를 사랑하고 그의 뜻대로 이웃의 영혼을 위해 희생하여 큰복을 소유하기 바란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

 

헛수고 인생 탑

 

사람들은 저마다 보람있는 삶을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다. 이렇게 계획하고 저렇게 노력하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그러나 그 수고한 노력과 고생이 그대로 열매가 맺혀지거나 좋은 결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밤잠을 자지 못하고 고생을 하면서도 삭월세방을 면치 못하여 낙심하는 사람도 많고, 심혈을 기울여 애쓰고 연구하다가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바람에 좌절하거나 자살로 인생을 끝내는 사람도 많다. 자기 마음과 계획대로 되는 것보다 안 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혹 자기의 계획과 생각대로 노력한 만큼 열매를 거두거나 그 이상을 얻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과연 계획대로 이루어지고 그 이상을 얻었다 한들 인생을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인생의 주인되시고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과연 내 뜻, 내 생각대로 산 것을 잘 했다고 칭찬하시겠는가? 성경은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지 않고 하나님을 경배하지도 않으면서 사업을 하고, 출세를 하고, 큰 업적을 세워도 헛된 것이라고 책망하신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인생의 주인에게 의논도 하지 않고 자기 마음과 뜻대로 좋은 일을 했다고 해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좋은 일이 될 수가 없다.

자녀를 위해 고생을 하고 희생을 하여 출세를 시켰다 한들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욕심대로 자녀를 키운 그 수고가 무슨 칭찬들을 일이겠는가?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상의하지도 않으면서 자기의 뜻과 계획대로 수고한 모든 노력과 결과는 하나님 앞에서는 헛된 것이다. 헛될 뿐만 아니라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책망과 벌을 크게 받게 된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살면서 착한 일을 하면 할수록, 큰일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더욱 무시하는 것이요, 대적하는 것이 된다. 비록 큰 출세를 못해도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사랑인 예수님을 믿고 의논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인생을 멋있고 보람되게 사는 것이 된다.

지난 1년동안 고생하며 노력한 것이 헛된 것인가? 보람되고 축복된 것인가? 당신은 오늘까지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며 책망하시는 나 중심의 인생을 살았는가?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하나님 중심의 인생을 살았는가? 아무쪼록 여러분은 헛된 탑을 쌓지 말고 영광과 축복의 탑을 쌓기 바란다.

■■하나님 아버지, 지나간 세월, 헛되고 무너지는 탑을 쌓았지만 이제부터는 보람되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영광의 탑을 쌓게 하옵소서…….■■할렐루야!

 

알곡인가? 쭉정인가?

 

오늘날 인생 중에는 알곡 인생과 쭉정이 인생이 있다.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알곡 인생은 천국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 인생은 불못에 들인다고 예수께서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알곡의 첫째 기준은 하나님의 생명인 예수를 믿는 자인가 믿지 않은 자인가 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자는 쭉정이 인생이나 문제는 예수를 믿는 자들 중에, 교회안의 신자 중에도 알곡과 쭉정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믿는자들 중에 알곡과 쭉정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첫째, 환난의 바람이 불 때 알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고난과 핍박의 바람을 만나게 된다. 즉 작은 어려움, 시험, 손해를 만나도 쭉정이 인생은 주님을 떠나고 교회를 떠나게 된다. 우리 주변에 이런 신자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다. 반대로 알곡 신자는 환난의 바람이 불면 날아가지 않고 오히려 주님 품으로 가까이 갈 뿐 아니라 교회 생활을 더 잘하며 엎드려 기도하게 된다. 환난의 바람을 만날 때 나갈까? 말까? 하는 싸래기 신자도 많이 있다. 우리는 어떤 고난과 핍박의 바람이 불어도 날아가지 않고 오히려 주님의 품안으로 가까이 하는 알곡이 되어야겠다.

 

둘째, 세상의 물결을 만날 때 알 수 있다.

이 세상은 여러 가지 사상과 유행이 물결처럼 몰려온다. 인본주의, 배금주의, 안일주의, 현실주의가 개인과 교회 안에까지 물결처럼 몰려오고 있다.

쭉정이 신자는 이 세상 물결에 떠내려가 주님을 떠나거나 사명을 멀리하게 된다. 그러나 알곡 신자는 어떤 사상과 유행이 몰려와도 떠내려가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고기가 탁류를 거슬러 올라가듯이 더욱 신앙의 정조를 지키며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며 기쁨으로 신앙 생활하며 살아간다.

 

셋째, 떨어져 열매를 맺는가를 봐서 안다.

알곡 신자는 가정과 직장과 이웃 속에 떨어져 열매를 맺는다. 즉 떨어진다는 말은 자기가 있는 곳을 하나님이 섭리하신 사명의 장소로 여긴다는 말이요, 그곳에서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여 예수의 생명을 전하므로 영혼을 살리는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다.

알곡 신자는 예수의 생명이 확실하므로 어디를 가든 하나님의 사명자로 여겨 불신 영혼들을 건지는데 최선을 다하므로 열매를 많이 맺게 된다. 그러나 쭉정이는 떨어지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가서 죽지 않고 자기 욕심대로 살므로 영혼을 살리는 열매가 없다.

아무리 오래 믿고 성경을 많이 알고 교양이 있는 신자라 할지라도 죽어가는 이웃의 영혼을 외면하고 전도하지 않는 자는 겉으로만 알곡일 뿐 실제로는 쭉정이다.

어디를 가든 하나님의 사명을 의식하며 희생하며 전도하므로 열매를 맺는 알곡 신자가 되어야겠다.

당신은 예수의 생명이 없는 완전한 쭉정인가?

예수 믿는 모습만 가진 쭉정인가?

확실한 알곡이 되어 영원히 후회하지 않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성공과 행복

 

사람은 어느 누구나 성공과 행복을 꿈꾸며 그것을 얻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고 있다. 성공과 행복을 위해 꾸준히 노력을 하며 사는 사람을 성실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각기 성공과 행복이라는 꿈을 가지고 공부를 하고 운동도 하며 정치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성공과 행복이라는 꿈을 펴 보기도 전, 소년 시절에 슬퍼하며 죽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성공과 행복을 위한 야망을 갖고 있다가 미처 꽃 피우지 못하고 학생으로 또는 젊은 나이에 죽기도 한다.

또 어떤이는 성공과 행복을 추구하다가 낙심 속에 쓸쓸히 죽어 가기도 하고, 비관하다 자살하기도 한다. 성공한 것 같은 데 행복하지 못해 고민하며 뜬구름과 같은 성공과 행복을 위해 진액을 다 쏟고 몸부림치지만 결국 허무하게 끝나는 게 모든 인간의 모습이다. 잠깐 동안 수 없는 실패와 고난 속에 살면서 때로는 작은 성공과 행복을 맛보면서 희비의 쌍고개를 넘나들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다가 한 세상을 마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가 된 것이 성공과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니고 높은 관직에 앉은 자가 성공과 행복을 얻은 것이 아니다.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고 성공과 행복을 얻는 것은 더욱 아니다. 보이는 현실을 보고 성공한 자다, 행복한 자다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은 이 세상이 기쁨과 슬픔이 수없이 교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에게는 한 평생의 삶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실패했다고 하면 그는 실패자요, 불행자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죽음 후의 내세에 성공과 행복을 얻기 위한 훈련기간이요, 기회인 것이다.

아무리 사람이 보기에 성공한 것 같아도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한 죄 값으로 지옥에 간다면 그는 실패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공은 내 죄를 대신해서 형벌받은 예수를 믿고 따르고 사랑하므로 천국 백성이 되어 상받는 자가 되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까지 세상적인 성공자가 되려고 애썼는가?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때 성공자가 되려고 애썼는가? 아무쪼록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여 예수를 믿고 그의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이 보실 때 성공자, 행복자가 되시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다

 

정직하게 열심히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속상하게 하는 일들이 이 세상에는 많이 있다. 허리띠를 졸라 매며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삼고 열심히 살아가는 서민들을 낙심하게 하는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우리들과 함께 나라와 민족을 위해 고생하며 헌신하겠거니 하고 믿었던 공직자들이 개혁의 바람에 밀려 어쩔 수 없이 공개한 재산을 보고 ■■이럴 수가 있는가?■■하며 깜짝 놀랐을 것이다. 공직을 이용하여 미리 빼낸 정보를 가지고 사방팔방에 땅을 미리 사두어 수십 억, 수백 억의 재산가가 된 것을 보고 배신감과 함께 허털감마저 갖게 한다. 이런일 뿐 아니라 이 세상은 부정과 거짓을 자행하는데도 출세를 하고 악한 자들인데도 잘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오히려 착하고 정직하게 사는 자가 불행한 일과 큰 사고를 만나기도 하고 큰 손해를 보는 경우도 굉장히 많다.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망발을 하거나 또는 하나님은 불공평하거나 잔인한 분이라고 원망을 하기도 한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면서 제 마음대로 사는 불신자가 부자로 살고 사업이 잘 되는 경우를 보면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 마저 낙심하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처럼 불공평한 분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이 계산할 수 없는 것까지도 계산하시는 공평하신 분이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70~80년의 인생은 영원한 영생을 위하여 훈련을 받는 기간이다. 훈련을 받는 중에 상을 주지 않고 훈련과 시험이 다 끝난 후에야 성적이 발표되고 상을 받게 되지 않는가? 인생을 다 끝내면 하나님께서 정확하고 공평하게 갚아 주신다. 하나님이 주신 인생인데도 자기가 인생의 주인인 것처럼 자기 생각과 멋대로 산 사람은 사람이 보기에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했을지라도 지옥의 심판을 받게 되고, 부족하더라도 겸손히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은 천국에 가게 된다. 자신이 피조물이요, 죄인인줄 알고, 사는 동안을 훈련기간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자는 하나님 보시기에 착한 자다.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인생을 다 끝낸 후 정확하게 갚아주신다. 낙심말고 공평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힘있게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께 돌아와서 소망을 가지고 살자. 공평하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힘있게 삽시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데 외적인 기준과 모양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누고 있다. 피부 색깔에 따라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으로 나누고 소득의 수준에 따라 상류층, 중산층, 서민층으로 나누기도 한다. 그 외에 대륙에 따라, 언어에 따라, 종족에 따라 여러 종류로 분류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외적인 모양이나 기준이 아닌 내적이고 본질적인 기준으로 판단해서 세 가지로 나누고 있다. 하나님께서 분류한 세 종류에는 영혼이 있는지 알지 못하고 영혼인 하나님과 끊어져 육에 속한 사람이 있고, 영혼이 하나님과 이어져 살고 있지만 여전히 욕심에 빠진 육신에 속한 사람이 있고, 영혼이 살아 확신과 기쁨 속에 사는 영적인 사람이 있다.

육에 속한 자연인은 지구상에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부류의 사람으로 영혼이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로 자기의 생각과 판단대로 사는 것이 옳은 것으로 착각하면서 사는 사람들이다. 많은 교육을 받으면서도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죽음의 문제, 인생의 목적지, 왜 사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살다가 죽고 만다. 사는 동안에 욕심을 많이 이루고 자기 뜻을 이루며 편안하게 사는 것 같지만 결국 주인이신 하나님도 모르고 제멋대로 자기 맘대로 산 죄 값으로 지옥의 심판을 받게 된다.

두 번째 많은 부류의 사람으로는 인간의 죄값이 멸망인줄 알아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도 자기의 욕심과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늘 근심과 걱정과 세상 욕심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사람으로 예수를 믿는 참 행복을 모르고 자기 자신과 가족만 아는 사람이다. 육에 속한 불신자와 비슷하게 세상의 욕심을 사랑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부끄럽게 후회하면서 간신히 천국에 가게 되는 사람이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은 가장 적은 수로 예수를 확실하게 믿고 인생의 목적지와 삶의 목적을 분명히 알고 기쁨과 감사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여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최고로 여기며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영혼, 죽은 자들을 건지려고 애쓰는 사람으로서 영광스럽게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사람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자기 생각과 마음대로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자기 욕심대로 살다가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갈 육에 속한 사람인가? 믿는 자이면서 욕심을 더 사랑하며 쉽게 살다가 마지막에 후회할 사람인가? 아니면 확신과 기쁨 속에 이웃의 영혼을 위해 애쓰며 사는 사람인가? 지금도 하나님은 기다리신다. 어서 돌아오라. 하나님은 당신을 기다리신다.

 

천당에 갈 수 없는 자

 

사람은 짐승과 다르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며 그와 함께 내세를 의식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 없는 곳이 없는 한 가지는 죽음과 내세에 대한 갈망을 해결하기 위한 종교요, 신앙이다.

인간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이요,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발걸음을 세월과 함께 재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예와 권세를 얻고 부귀를 얻었다 해도 결국 죽어가는 인간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죽음과 내세 문제의 해결인 것이다. 죽어가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다른 문제를 급하게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인간에게는 분명코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내세가 있다. 반드시 죽음 후에는 천당과 지옥이 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천국과 지옥에 가는 것이 모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공평한 뜻이다. 이 세상의 불공평한 모든 일을 내세에서 공평하게 갚아주시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천당에 가고 지옥에 가는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인간의 생각과 판단으로는 천당과 지옥에 들어가는 기준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천당과 지옥에 들어가는 기준은 하나님의 뜻에 있는 것이다. 인간이 볼 때 착하고 악하고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얼마나 착한가 악한가 판단하신다.

천당에 갈 수 없는 자,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이 보실 때 악한 자다. 사람이 볼 때는 착한데 하나님이 보실 때 악한 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

하나님이 볼 때 가장 악한 자는 누구인가?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과 지혜를 자기 것으로 알고 자기 생각과 마음대로 살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경배하라고 준 재능과 재물과 건강으로 자기의 욕심을 위해 사는 것이 가장 악한 자다. 하나님의 가장 큰사랑으로 만들어 놓은 구원의 길이신 예수, 십자가의 은혜까지 저버리는 것은 얼마나 악한 것인가? 하나님을 떠나서 제멋대로 살면서 착하다고 하고 남을 돕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놀리는 일이다. 부모를 배반한 자식이 다른 사람에게 착하게 한다는 것은 부모를 놀리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보실 때 악한 자는 천당에 갈 수 없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돌아오라. 어서!

 

무엇 때문에 살고 있습니까?

 

사람은 자기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또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사느냐고 물으면 그냥 살다가 죽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자기가 존귀한 인간임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조그만 볼펜도 만들어진 이유가 있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사는 지를 모른다니 얼마나 우스운 사실인가? 어떤 사람은 이렇게 대답을 한다. 박사가 되는 것이 자신의 살아가는 목표요, 이유라고 한다. 또 어떤이는 부자가 되는 것이요, 어떤이는 정치가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러분! 박사가 되든, 정치가가 되든, 부자가 되든, 결국 그것은 살아가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음과 함께 허무하게 끝나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마지막 죽음이 있으니까 죽기 전에 내가 세워 놓고 바라는 욕심을 이루다가 죽자는 것 뿐이 더 되겠는가? 죽기 전에 많이 먹어 보고 누려 보고 즐겨 보았자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성이 없는 짐승은 죽을 때까지 자기 본능과 욕심을 많이 채우다 죽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런 짐승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사람은 짐승같이 자기 본능이나 욕심을 채우다 허무하게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이것을 고민한 헤밍웨이는 노벨상까지 탄 사람이지만 자살을 했다. 그러나 진짜 똑똑한 사람은 겸손하게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 앞에 돌아온다.

웰레스라는 지식인은 성경을 연구하여 거짓된 기독교라고 반박하려다 그만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 벤허라는 유명한 소설을 썼다.

인간에게는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이 있어 만물을 만드시고 다스리는 하나님을 섬기게끔 되어 있다. 그렇지 않고 다른 것으로 돈으로 출세하는 것으로는 만족을 얻을 수 없다. 그것만 따라가다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아무리 착한 사람도 인간을 만들고 세상을 만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지 않는다면 용서를 받을 수 없다. 인간들이 죄 때문에, 욕심 때문에 영적인 눈이 멀었기에 하나님을 모르고 왜 사는지를 모르고 그냥 살다 가는 다른 동물과 별로 다른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겸손히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를 믿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마음의 눈이 열려 영원한 참 소망을 알게 되고 무덤이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 당신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어디를 향해 점점 가고 있는가?

 

악령의 기적과 하나님의 기적

 

문명과 지식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은 점점 이성과 과학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초과학의 기적을 염원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으로 풀 수 없는 신비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기적이라고 하는데 이는 오늘날 얼마든지 존재한다. 기적에는 악령의 힘을 빌어 일으키는 악령의 기적과 하나님이 행하시는 성령의 기적이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성과 과학에 빠져 하나님을 부정하고 자신을 믿다가 지옥에 빠지게 하는 것은 악령이 하는 일이다.

악령은 기적을 행하여 자기를 숭배하게 하여 망하게 만들기도 한다. 또한 지성인들을 미혹하여 심령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악령의 기적을 연구하게 하여 거기에 빠져 사로잡는 경우도 많다.

짐승이나, 고목이나, 돌을 섬기게 하며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귀신 장난을 하기도 한다. 악령은 심지어 교회에까지 파고 들어와 하나님의 기적인 것처럼 가장하여 교회를 파괴하고 교인을 미혹하는 경우도 허다한 것이다.

하나님의 기적은 동기와 과정이 순수한 자에게 주며 하나님을 높이고 예수의 은혜를 깨닫게 하여 인격적인 열매를 맺게 한다.

반면에 악령의 기적은 예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비인격적인 행동과 거짓말을 자행한다. 거기에 빠진 사람들은 그게 좋게보여 열광하게 된다. 기성교회와 목사를 비방하며 자기 집단만이 구원이 있다고 하여 사람들을 광신에 빠지게 한다.

30~40년전에 박태선 씨가 소경의 눈을 뜨게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수많은 기적을 일으켜 일간지까지 보도되었을 때 하나님의 기적으로 알았다. 그러나 자기를 예수보다 높은 자로 공언하며 자기를 앞세우다가 결국 사라졌다. 지금도, 앞으로도 바람같이 일어나 기적을 행하며 미혹케 하는 자들이 계속 일어날 것이라고 성경에는 예언되어 있다.

악령(마귀)은 이성과 과학에 빠져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여 망하게 하거나 예수를 믿어도 관념적, 습관적 신앙에 머물게 만든다. 또한 악령은 신비와 기적에 빠지게 하여 악령 숭배자가 되게하고 광신자가 되게한다.

예수를 영접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면 기적과 신비도 체험할 수 있고, 인격도 성숙하게 변화된다.

예수를 진심으로 믿으십시오!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인간에게만은 유일하게 종교심이 있어 하나님을 찾고 내세를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세계 어디를 가나 신을 섬기는 종교가 있고 심지어 짐승이나, 고목까지도 섬기고 있다. 이는 이성과 영혼을 가진 인간이 근본적인 가장 큰 인생문제를 해결하려는 당연한 모습인 것이다.

만약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공산주의자나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인간은 기계요, 생산 수단이요, 우연히 만들어진 존재에 불과하며 무가치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들은 인간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자기들의 이상을 이루기 위해 서슴없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며 혁명을 위해 사람을 몰살시키기도 한다.

오늘날 사람의 존엄성과 생명의 귀함을 무시하고 자기의 욕심 때문에, 돈 몇 푼 때문에, 어린아이를 유괴하여 살인을 저지르고 인신 매매를 자행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천국과 지옥이 없고, 이 세상의 순간적 쾌락이 가장 큰 가치라고 생각하는 사상이 만연됐기 때문이요,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나오는 행동인 것이다. 실제로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굳이 고생하며 살 필요가 없고, 수단과 방법을 가려가며 살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천국과 지옥의 내세가 없다면 인간은 허무한 존재요, 아무 의미가 없는 존재이다. 힘들게 공부하며, 명예를 얻기 위해, 부자가 되기 위해 발버둥칠 이유가 무엇인가? 결국 무덤 속에 파묻혀 한 줌의 흙이 되고 마는데 말이다.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도덕과 윤리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언제 죽어 끝날지 모르는데, 언제 죽어 흙이 될지 모르는데, 죽기전에, 살아 있는 동안에 실컷 욕심을 채우다 가는 것이 최고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는가? 어차피 죽으면 끝나는데 예의와 체면과 도덕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런 생각이 가득한 정치인과 지도자들 때문에 이 나라가 더욱 어둡고 썩어 가고 있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는 짐승은 본능의 욕구를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서슴치 않는다.

천국과 지옥이 정말 없다면 이 세상은 엉망진창이 되어 참혹하게 될 것이다. ■■이왕 죽고 끝날 바에 제 멋대로 제 욕심대로 미친듯이 발광하다 죽자.■■라며 총을 난사하고, 차를 군중들에게 몰아 죽이는 일이 부지기수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분명히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도 반드시 있다고 했다. 교인들 중에도 내세를 의심하며 아무렇게나 자기 욕심대로 사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내세를 확실히 믿는 자는 이 세상을 아무렇게나 살 수 없다. 예수를 믿게 되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만난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과 지옥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지옥가는 자를 위해 전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천국과 지옥이 있으므로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살게 된다.

지옥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사는 사람이 가게 된다. 천국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돌아온 사람과 자기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가게 된다.

당신은 지금 이대로 끝나는 사람이 되려는가?

잘 만나는 것이 큰 복이다

 

인생은 만남으로 시작되고 만남으로 살다가 생을 마친다. 어느 누구도 만나지 않고 혼자 살아 가는 자가 없으며 또한 살아갈 수도 없는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를 잘 만날 때 편안하게 교육을 받으며 살게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엄청난 유형 무형의 유산을 물려받아 크게 잘 되는 사람도 있다.

또한 친구를 잘 만났기에 두터운 우정을 나누며 외롭지 않게 인생을 살고 친구 때문에 대통령이 되고 권력자가 되는 경우도 우리 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다.

스승을 잘 만나서 사회적으로 큰 업적을 남기거나 학문적으로 큰 금자탑을 쌓아 명예를 얻는 경우도 많이 있다.

인간들의 다양한 만남 중에서 또한 배우자를 만나는 일처럼 중요한 일도 없을 것이다. 배우자를 잘 만남으로 천한 자가 귀하게 되고, 어리석은 자가 크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부인을 잘 만나 성공하는 사람과 남편을 잘 만나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부모를 잘 만나는 일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또한 친구를 잘 만나도 내가 근본적으로 잘못되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스승을 잘 만나도 내가 겸손히 배우지 않으면 그 가르침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배우자가 아무리 좋아도 한 쪽에서 잘못된 남편이나 아내라면 조화가 되기 힘들고 행복한 가정 생활을 하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사람이 사람을 잘 만나는 일은 참으로 힘든 일이며 또한 잘 만나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사람을 잘 만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 사람을 잘 만나는 일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잠깐 유익을 주거나 잘 되게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면 인간의 근본적인 영혼이 변화된다. 죽음의 문제, 무엇 때문에 사느냐의 문제가 해결된다. 무장공비였던 김신조 씨도, 과학자 정근모 장관도 하나님을 만나 근본적인 문제와 함께 삶이 변한 사람들이다.

예수를 믿고 받아들일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마귀가 좋아하는 사람

 

사람들은 과학과 합리주의를 좋아하며 그 외의 것을 무시하려 한다. 그러므로 실험되고 증명된 사실만을 인정하는 학문을 과학이라고 하며, 인간의 이성에 맞는 것만을 인정하는 것을 합리주의라고 한다.

과학과 합리주의가 세상을 지배하면서 문명은 발달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황폐하게 되어가고 범죄는 흉폭해지고 격중해가고 있다. 이는 과학으로 인간의 마음을 조절할 수 없고 이성으로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과 인간의 머리로 해결할 수 없고 규명할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우주는 만드신 하나님의 존재와 영혼이 있다는 사실, 죽음 후에 내세가 있다는 사실은 과학과 사람의 머리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마귀나 귀신이 있다는 것을 더더욱 과학과 인간의 머리로 알 수 없고 오히려 과학과 인간의 머리를 의지할수록 악령과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미 서구 문명 사회에서는 귀신 놀이나 마귀와 접신하는 학문과 활동이 보편화되어 귀신들리고 미친 사람, 정신병자가 수없이 많아져 거리를 방황하는 것을 여행하다 쉽게 본다. 마귀나 악령이 있다는 사실을 가까운데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다. 강신 무당은 악신을 받아 무당이 되었기에 아주 영험하게 점을 치고, 작두 위에서 큰 칼날 위에서 춤을 추며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을 보여준다.

귀신이나 마귀가 하는 일은 무엇보다 인간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일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과학과 인간의 머리를 지나치게 의지하도록 하여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거나 돈과 욕심에 빠져서 다른 것을 생각 할 겨를이 없게 만든다.

혹 가다 어떤 사람에게는 귀신을 씌워 마귀의 조종을 받게 한다. 그러므로 마귀가 좋아하는 사람은 인간이 큰 죄인인 것을 모르고, 인간의 지식과 과학을 지나치게 의지하거나 이 세상의 욕심이나 쾌락을 깊이 사랑하는 자인 것이다.

마귀의 조종을 받는 사람은 자기 생각 자기 뜻, 자기 마음대로 살기를 좋아하고, 욕심과 자기 유익, 자기 중심의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고 성경에 말씀하신다.

반대로 마귀가 싫어하는 사람은 인간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요, 인간 지식과 과학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요, 잠깐동안 누리는 세상 욕심보다는 영원한 하늘의 상급과 영혼이 잘 되는 것을 귀하게 여기며 사는 사람이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마귀가 좋아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당신은 살아가는 동안 마귀가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았는가? 마귀가 싫어하는 사람으로 살았는가? 아무쪼록 이제부터라도 마귀가 싫어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되기를 축원한다.

 

인간의 가장 큰 죄

 

사람들은 죄가 있다는 말을 싫어한다. 실제로 교도소에서 살면서도 죄가 있다고 진심으로 깨닫고 뉘우치는 사람이 많지 않다. 환경이 나빴다느니, 어떤 사람 때문이라느니, 등등 여러 가지 이유와 변명으로 자기를 변호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의 모습이다. 하물며 교도소 밖에서 법망에 걸리지 않은 사람과 현행법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들이야말로 어찌 죄가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눈에 보이는 잘못을 저질러야만 죄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도적질이나 살인 같은 죄만이 큰 죄라고 여기고 있다. 물론 이것도 큰 죄지만 이것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큰 죄악은 생명의 근원되시고 인생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그렇게 믿지 않고 경외하지 않고 섬기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인간을 만드시고 지혜를 주시며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는데 말이다.

성경 말씀에도 인간이 두 가지 큰 악을 범하였다고 했다. 생수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버렸다는 말은 생명과 행복의 뿌리가 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섬기지 않았다는 말이다. 스스로 웅덩이를 판다는 말은 자기의 힘과 지혜로 행복과 만족을 얻으려고 제 마음대로 사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큰 죄는 인간의 생각과 다른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자기의 뜻과 생각대로 살면서 자기의 행복과 만족을 추구하는 모습은 인생의 주인을 무시하고 우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둑질이나 살인은 사람에게 행한 죄악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만 인생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예배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정면으로 짓는 죄악이다.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착한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 부모를 버린 자식이 외부에 나가서 착한 일을 한다고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놀리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 자기 뜻과 마음대로 사는 사람은 마귀를 따라 사는 것이 되어 마귀와 함께 마귀가 심판받는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큰 죄악을 해결하는 길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을 확실히 믿고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참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

도덕적인 교양과 인격도 매우 중요하지만 하나님께 완전히 돌아서서 하나님과 깊은 관계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아무쪼록 인간의 큰 죄악이 무엇인 줄 깨닫고 하나님께로 완전히 돌아오셔서 참 행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한다.

 

낙엽같은 인생

 

어느새 가을이 깊어졌다.

엊그제까지 더워서 선풍기와 에어콘을 가까이 하면서 더위를 피하려고 애썼는데 이제 옷을 껴입기 시작하게 되고, 아침저녁으로는 따뜻한 불이 그리워지니 세월이 빠름을 실감하게 된다.

가을이 깊어짐과 함께 나뭇잎들이 낙엽이 되어 길거리를 더럽히고 청소하는 아저씨들을 고단하게 한다. 그렇게 무성하고 푸른 잎들이 떨어져 쓰레기가 되어 불태워지거나 썩어 거름이 되니 참으로 세월과 함께 변화의 급속함에 허무함을 느끼게 한다.

인간도 바로 낙엽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힘차게 푸름을 자랑하며 의기양양하던 나무같이 젊음을 자랑하고 자신의 재능과 지식과 힘을 자랑하는 게 인간이다. 그러나 서서히 나이를 먹어가며 인생의 석양이 되어가고 나뭇잎이 단풍이 들듯이 푸름이 없어지고 가을의 나뭇잎처럼 기력과 의욕이 떨어져 결국 말라 비틀어진 나뭇잎같이 죽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인생이다.

우리 인간은 과연 낙엽같이 떨어져 무엇이 되겠는가? 무덤 속에 들어간 시체가 흙이 되고 거름이 되므로 한낱 낙엽과 같은 인생이 되고마는 것인가? 그저 자녀를 낳고 자녀를 위한 거름이 되어 버리고 마는 낙엽에 불과한 존재인가?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얼마나 불쌍한 자인가? 그러나 우리 인간은 낙엽같이 자녀나 자손을 위한 거름의 역할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위대한 가치와 존재 목적이 있는 것이다. 낙엽은 떨어지면 끝나는 것이지만 인간은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반드시 내세가 있고 천국과 지옥이 있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짐승이나 낙엽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인간이 죄와 욕심으로 눈이 어두워서 인생에 대한 영원한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짐승같이 그저 살다가 죽고마는 줄로 착각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식으로나 머리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모른다. 그러나 예수를 믿을수록 더 하나님의 뜻을 깊이 알게 된다.

예수를 세상보다 더 사랑하고 귀하게 여길수록 우리가 존귀한 자가 된다. 아무쪼록 예수 안에서 영원한 축복의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귀하를 기다리신다. 지금, 지금이다. 할렐루야!

 

짐승만도 못한 인간

 

흔히 사람들을 욕할 때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말한다. 이는 아주 못되고 악한 짓을 한 인간을 일컬어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 말씀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섬기지 않는 사람을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한다. ■■소도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 백성은 하나님을 모르는구나.■■라고 한탄했다. 이 말씀은 쉽게 풀어 말하면 ■■소도 주인을 알고 나귀도 먹을 것을 주는 주인을 알고 있는데 인간이 자기 주인이신 하나님을 모르다니 짐승만도 못하구나.■■라고 꾸짖는 말씀이다.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바로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모르는 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말이다. 가장 악하고 큰 죄는 바로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경배하지 않는 것이다. 소나 나귀의 주인은 인간들이지만 인간의 주인은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지금도 다스리시고 지배하시며 우리의 생명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짐승에게 없는 이성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주어 이 세상을 잘 다스리며, 하나님을 경배하며 살게 했는데 오히려 하나님을 자기 머리로 따지며 비판하는 악한 자로 살고 있다.

짐승에게 없는 지혜와 이성을 주셨는데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은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자의 모습이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인 것이다.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로 타락한 우리를 건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를 보내셨다. 인간의 머리와 지혜를 가지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경배할 수 없기에 예수를 통해서 짐승만도 못한 인간의 눈을 뜨게하고 마음을 열게 하신 것이다. 예수를 믿게 되고, 영접하게 되면 마음이 변화되고 이성이 하나님을 아는 은혜를 받게 된다.

당신은 짐승만도 못한 인간인가?

하나님이 볼 때 선하고 착한 자는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는 자이다. 아무리 착하고 좋은 일을 많이 했어도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모른다면 ■■소도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을 아는데 너는 짐승만도 못한 자로구나.■■하시며 한탄하신다.

짐승만도 못한 자의 마지막은 어떻겠는가? 예수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존재를 깨닫고 알게 된다.

지금, 당장 하나님을 영접하고 그를 의지하라.

그래야만 인간답게 살 수 있다.

 

진정으로 착하고 선한 자

 

사람은 겉으로는 누구나 착하고 선한 것을 좋아하는 것같이 보인다. 또 착하고 선한 사람인 것같은 외모를 가진 사람도 많다. 그러나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상태이기에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인간이 모여 사는 곳에는 미움과 시기가 있고 다툼과 폭행과 살인이 일어나게 되고 세월이 갈수록 지식과 문명이 발달할수록 범죄가 극심해지는 것이다. 선하고 착한 것 같지만 자신에게 손해가 되면 악한 본성이 드러난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칭찬듣는 사람들도 속에는 미움과 시기가 있는데 다만 남보다 밖으로 안 나타나는 것 뿐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고 자기의 재물을 나누어주면서 좋은 일을 하는 사람도 많이 있어 사회를 밝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선행도 인간이 볼 때 선한 것이지 하나님이 보실 때 그것을 착하게 보시지 않는다. 부모를 배반하고 집을 나간 불효자식이 다른 사람에게 인심을 쓰며 좋은 일을 한다고 하면 오히려 부모의 마음이 아프고 괴로운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이 계신 것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존경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는 인간이, 남을 도와주고 남을 위해 희생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어찌 착한 일로 보겠는가?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과 생각대로 자기 욕심대로 사는 자가 아무리 좋은 일과 착한 일을 할지라도 그것은 악한 선행이요, 선한 것처럼 보이는 악행이다. 오히려 하나님이 보실 때 꼴사납고 비웃는 모습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선을 행할 수가 없다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다. 먼저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이 급한 것이요, 선의 시작이다. 마치 집 나간 자식이 집에 돌아오는 것이 먼저요, 효의 시작인 것처럼 인간은 먼저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을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신 형벌과 심판을 받으신 것이다. 하나님께 돌아와서 그의 뜻대로 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이 진정한 선행이요, 착한 일이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을 행하는 착한 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자기나 믿지 왜 귀찮게 하는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인상 중에 나쁘게 비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도하는 문제를 들먹인다. ■■다른 종교인은 그렇지 않는데 유독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왜들 귀찮게 하면서 극성스럽게 전도하는지 모르겠어.■■라고 하면서 비난을 한다. 천주교인, 불교인, 기타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전도한다고 비난한다. 자기만 믿으면 그만이지 왜 남에게 신앙을 강요하느냐는 것이다. 한 두번 해서 거절하면 그만 둘 것이지 진드기처럼 계속 못살게 구는 것은 상식도 없는 행위라고 비난을 한다. 이런 말은 매우 당연한 것같이 들리지만 사실은 아주 틀린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것만이 영생을 얻고 확실한 인생을 살게 되는 길이요, 죄 값으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모든 인간이 사는 길은 오직 예수 믿는 길외에 다른 길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고 그냥 살아가는 사람을 보고 불쌍해서 그냥 둘 수 없는 것이다. 천주교인이든 불교인이든 자기가 믿는 종교가 참으로 영생을 얻는 종교요 인간의 죄와 죽음 후에 문제를 해결 해 주는 생명의 종교라고 확신하면서 조용히 자기만 믿는다면 그는 얼마나 나쁜 사람인가? 이는 마치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고 밧줄이 있는데도 던져주지 않고 구경만 하거나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잔인한 일이 아니겠는가? 대부분의 천주교인이나 불교인들은 전도하지 않는다. 이는 자기가 믿는 천주교나 불교에 확신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전도를 하려고 애를 쓴다. 오히려 전도하지 않는 것을 이상한 일로 본다. 왜냐하면 자기만 영생얻고 남을 죽게 내버려두는 것은 큰 죄악이기 때문이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전도에 관심이 없고 전도하지 않는 것은 아직 예수를 믿지 않거나, 믿어도 확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도 언젠가 확실히 예수를 믿게 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면 인생의 주인도 인생의 목적지도 모르고 욕심을 위해 사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게 된다. 예수를 진짜 믿는 사람의 최고 할 일이 전도요, 하나님의 사랑을 진실로 나타내는 것이 전도요, 신앙 인격의 높은 수준도 이웃의 영혼을 위해 애쓰고 희생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 앞에 최고 큰 상도 전도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다.

이제부터라도 확실히 주님을 만나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되어 참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축원한다.

 

뿌리가 없는 사람

 

살아있는 모든 생물은 뿌리가 있기 때문에 살고 있다. 나무나 풀은 뿌리에서 끊어지는 순간 아무리 파릇파릇 할지라도, 혹은 꽃꽂이로 아름다움을 뽐낸다 할지라도 점점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힘이 넘치고 아름다움을 자랑할 수 있다고 해도 뿌리가 없는 사람은 몸도 마음도 점점 늙어가고 죽어가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뿌리가 끊겨진 존재이기 때문에 큰 소리 치면서도, 유명하다고 하면서도 점점 시들시들 몸이 죽어가고 마음도 그렇게 되다가 결국 죽고 마는 것이다.

흔히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조상도 모르는 사람, 뿌리도 없는 것들 등등의 욕을 하고 있다. 이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하는 오해이다. 제사를 지내는 것이 조상을 위함이 아니라 조상을 가장한 귀신을 위함이요, 결국 그 귀신에게 끌려 지옥으로 가는 것이다. 또한 조상은 뿌리가 아니라 우리의 줄기가 되는 것이다. 생명의 줄기이신 조상을 섬기는 방법은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를 찾아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모든 생명의 근원은 우주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생명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의 뿌리는 하나님이시요, 조상은 하나님께 받은 생명을 전달 해 주는 줄기 역할을 하는 것이다. 뿌리가 되시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아무리 행복한 것 같아도 결국 망하게 되고 아무리 자기 뜻대로 이루었다고 해도 결국 허무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뿌리에 붙는 것이다. 뿌리에만 붙으면 인간은 죽는 것 같아도 결국 다시 새 싹이 나듯 영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떠난 뿌리 없는 인생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뿌리에 붙게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죽어도 다시 영생하는 것이다. 뿌리가 없는 인간은 아무리 똑똑하고 유명하고 부자라 할지라도 결국 잘려진 나무처럼 죽고 불에 타는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다. 뿌리를 찾으라! 이것이 가장 급한 일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하나님은 당신을 기다리고 계신다.

 

사람은 세 번의 인생을 산다

 

사람의 전생애를 가리켜 일생이라고 한다. 이는 한번 살고 끝나는 인생이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인생은 일생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삼생을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 번 사는 인생이 아니고 세 번의 생애를 산다는 말이다.

캄캄한 암흑과 물 속 같은 어머니 배속에서 약 10개월의 한 생애를 나름대로 가장 편하고 안전하게 사는 태아로서의 첫 번 인생을 사는 것이다. 태아 본인은 언제 바깥으로 출생할지 모른다. 아니 어머니 배속 외에 바깥 세상이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하고 산다. 탯줄을 통해 영양을 공급받으며 본능적으로 본능에 의해 살다가 어느 날 차원 높은 환한 바깥 세상으로 출생하게 된다. 두 번째 생은 이 세상의 생애가 고생스러워서인지 ■■으앙!■■하고 울면서 새 인생을 출발한다. 점점 성장해 가면서 자유롭게 활동하며 배속과는 다르게 차원 높게 살아간다.

그러나 여전히 본능을 위해 살기는 마찬가지다. 오히려 머리를 써서 욕구의 본능을 위해 남을 해하기까지 한다. 본능과 욕심을 채우는데 차원 높아진 것이 태아 때 보다 달라진 생애인 것이다.

그렇게 살면서 늙어간다. 태아가 배속 바깥을 전혀 몰랐던 것처럼 인간들은 세 번째 생애인 천국과 지옥의 내세를 생각하지 않고 준비하지 않고 산다.

그러다가 백 년 안에 이 세상을 끝내게 된다. 사람에게는 세 번째 생애인 내세가 있다. 태아 때는 본인에게 책임이 없었지만 이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인격이 있고 지혜를 주셨기에 세 번째 생애를 준비 못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에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했다. 세 번째 생애는 천국과 지옥의 심판이 있는 생애이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 앞에 돌아온 사람은 천국에 간다.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천국 생애를 살게 하기 위해 예수를 이 땅에 보냈다. 예수를 믿으면 세 번째 생애를 천국 내세에서 살게 된다. 그렇지 않고 자기 욕심과 본능을 위해 머리를 쓰면서 살면 세상을 떠나서 그는 지옥의 세 번째 생애를 살게 된다. 가장 아름답고 기쁜 천국에서 세 번째 생애를 살고 싶지 않은가? 이제부터라도 확실히 주님을 만나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되어 참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축원한다.

 

인생의 주인

 

모든 인간은 자신이 인생의 주인인 줄로 알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살고 있으면서도 당연한 듯이 살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스스로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고 자기 뜻과 관계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자기가 세상에 나오고 싶어 나온 것이 아니다.

인간의 태어남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신데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을 외면하고 제멋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는 주인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사는 인간들을 크게 책망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적혀 있다. ■■소도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을 아는데 인간은 어찌 하나님을 모르느냐?■■라고 했다. 즉 인간이 짐승만도 못하다고 한탄하시는 말씀이다. 주인이 있음에도 주인을 모르는 짐승은 미련한 짐승이요, 주인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 주인을 물거나 주인을 떠난 개나 짐승은 죽게 되거나 굶주림에 빠지게 된다.

주인되시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잠깐 기분 좋은 것이요, 곧 죽음과 함께 영원히 지옥에 가게 된다.

주인되시는 하나님이 보실 때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 착하다고 좋은 일을 한다고 좋아하시겠는가? 자기 자식이 부모를 외면하고 도망가서 착한 일 을 한다고 좋아하겠는가? 인생의 목적도 주인되시는 하나님과 관계없이 자기 욕심과 자기 성공에 맞춰 세우고 있다. 인생의 목적은 인간이 정하는 것이 아니고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이다.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우리의 그 동안의 잘못을 깨닫고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어서 돌아오라! 내 인생의 주인에게….

 

반드시 천벌 받을 사람

 

옛날부터 아주 나쁘게 행동하거나 큰 죄를 짓는 사람에게 천벌 받을 사람이라고 욕을 했다. 분명히 매우 나쁘고 악한 사람인데 감옥에도 안 들어가고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경우에 언젠가 하나님께서 벌을 줄 것이라는 말인 것이다. 이 세상의 법으로는 잡아넣어 벌을 주지 않지만 하늘이 용서치 않고 반드시 벌을 줄 것이라는 말이다.

천벌 받을 사람이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이 존재하여 사람이 보고 사람이 밝힐 수 없는 것을 알아서 벌을 주실 것이라는 뜻이 있고 또한 내세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

과연 어떤 사람이 천벌을 받을 사람인가? 천벌이란 하나님이 내리는 벌이라는 말인데 사람편에서 천벌 받을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천벌은 하나님이 주시는 벌을 말함이니, 하나님께서 보실 때 악한 자에게 천벌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악하고 나쁜 것은 사람에게 잘못하는 것보다 하나님에게 잘못하는 것이 아닌가? 자식이 부모에게 불효한 것이 형제에게 잘못하는 것보다 큰 죄인인 것처럼 인간끼리 때리고 속이는 죄보다 더 큰 악은 하나님께 잘못하는 것이다.

아무리 착하고 좋은 일을 많이하고 의롭다고 할지라도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고 인간을 만드신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안 계신 것처럼 무시하고 자기 생각과 마음대로 사는 인간은 얼마나 악한 자인가?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경배하지도 않고 예배드리지도 않고 자신의 욕심과 이상을 위해 사는 인간은 천벌을 받음이 마땅하지 않는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예배 드리지 않고 오히려 귀신과 석상, 돈과 출세와 자기 자신을 섬기는 모든 인간들은 천벌을 받아 마땅한 것이 아닌가? 성경에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사는 죄 값으로 결국 지옥을 가게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모든 인생에게 살 길을, 용서받을 길을 만드셨으니 곧 그의 아들 예수를 믿는 것이다. 죄 없는 예수에게 모든 천벌을 다 받게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누구든지 예수만 믿으면 지옥 천벌을 받지 않고 천국을 가게 된다.

 

반드시 당신에게도 마지막이 온다

 

시작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다사다난 했던 올 한 해가 저물어 마지막이 왔다. 하루의 끝이 있고 한 달의 끝이 있고 한 해의 끝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이 세상에는 끝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학교 생활의 끝이 있고 직장 생활의 끝이 있다. 어쩔 수 없이 아쉬움 속에 찾아오는 권세의 끝, 영광의 끝, 홍안과 미모의 끝도 있다. 이처럼 슬픔과 기쁨이 교차되면서 슬픔의 끝, 기쁨의 끝이 번갈아 찾아온다. 누구나 온갖 종류의 끝을 경험하게 되고 만나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끝 보다 가장 큰 끝은 목숨이 끊어지는 ■■죽음■■이라는 끝이다. 목숨이 끊어지는 ■■죽음■■이라는 끝은 인생이 끝나는 것이요, 인생의 모든 야망, 권세, 명예, 즐거움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끝이다. 목숨이 끝나는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찾아온다.

다른 종류의 끝은 움직이고 다시 해 볼 여지가 있는 끝이지만 죽음이라는 끝은 권력자도 영웅호걸도, 제갈공명 같은 모사도, 공자 같은 성인도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끝이다. 서서히 또는 급속히 찾아오는 끝이 죽음이다.

다른 종류의 끝은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끝이지만 죽음이라는 끝은 인간의 육체가 묘지 속에 들어가 썩게 되는 끝이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부담과 짐이 되게 하면서 마무리를 위임시키는 끝이다.

이렇게 예외없이 찾아오는 죽음이라는 끝은 과연 해결책이 없는 절망적인 것일까?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라고 했으니 죽음이 전혀 소망없는 절망의 끝이 아니라고 말한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만다면 윤리도, 도덕도, 체면도 그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죽음이라는 끝이 오면 그 후에 하나님의 심판과 함께 영혼의 내세가 기다리고 있다. 천국과 지옥이 새롭게 기다리고 있다. 천국과 지옥이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만드신 구원의 길인 예수 십자가를 믿지 않고, 자기 생각과 뜻대로 산 사람은 지옥의 내세가 시작될 것이다. 반대로 예수를 확실히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천국 영광의 새로운 출발이 되는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영혼을 사랑하는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죽음이라는 인생의 끝에 오히려 더 큰 영광스러운 새출발을 하게 될 것이다.

한 해의 끝이 있듯이 반드시 인생의 끝인 죽음도 찾아온다.

아무쪼록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돌아와 천국 백성이 되어서 언제 어느 때 끝이 와도 영광스런 새 출발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죽음 후에는 공평하다

 

많은 사람들이 공평하지 못한 세상이라고 불평과 한탄을 하며 살아간다. 정직하고 선하며 남을 위해 희생하며 사는 자가 억울한 일을 만나거나 불행한 사고를 만나기도 하고, 가난해지거나 병을 앓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반대로 악하며 남을 속이며 거짓으로 사기를 행하며 뇌물을 주고받고 나쁜 짓을 많이 하는데도 권력을 누리고 부자가 되고 유명 인사가 되고 건강한 가운데 장수하는 경우가 많은 현실 때문에 더욱 불공평하다고 원망한다. 칸트 같은 유명한 철학자는 불공평한 현실 때문에 공평한 내세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떠난 가운데 죄악으로 꽉찼기 때문에 불공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악인이 잘되고 선한 자가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에게만 보장된 죽음 후의 내세에는 악한 자가 잘 될 수 없고 의로운 자가 불행해질 수 없는 곳이다. 이 세상에서 행한 대로 공평하고 정확하게 보상이 따르는 곳이 내세인 것이다.

나면서부터 죄를 갖고 태어난 인간이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마음대로 살다가 가는 곳이 지옥이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달리 해결할 길이 없는 죄를 예수께서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심으로 해결된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는 곳이 천국인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천국에 가면 똑같이 좋은 것을 누리는 것으로 생각하며 공평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죄를 용서받아 감사와 감격 속에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위해 산 사람과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의 욕심대로 산 사람과 내세에서 똑같이 좋은 것을 누린다면 얼마나 불공평한 것인가? 성경에는 분명히 말씀하기를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다고 했다. 쉽게 말한다면 예수를 믿는 자가 자기의 유익만을 위해 일생을 살면 간신히 구원을 받을 것이요 조금이나마 순종하므로 작은 별과 같은 영광을 누리는 자도 있을 것이요 큰 별과 같이 큰 영광, 달과 같이 더 큰 영광, 해와 같이 상상할 수 없는 크고 큰 영광을 누리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다. 이는 한 순간 받는 영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누리는 영광이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사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한다. 내세의 영원한 영광을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 어느 범주에 속하는 사람인가? 지금 인생이 끝난다면 어떤 영광을 누리게 되는 사람인가? 이 시간 자신을 돌아보기 바란다.

 

지옥의 비상구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아니 모태에서부터 죄를 가진 인간이다. 거기에다 성장하면서 죄를 더 범하며 살아간다. 죄를 품고 있는 인간이 착하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인생의 주인인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대로 사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을 무시하는 모습인가? 왕을 무시해도 사형을 당하는데 하물며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우습게 보고 자기 욕심과 자기 이상과 자기 생각대로 살다가 죽음 후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얼마나 참혹한 형벌을 당하겠는가? 오늘날 인간들이 희희낙락 쾌락을 즐기며 사는 모습은 암에 걸린 자가 아무것도 모르고 인생을 즐기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모습이 아닌가? 사업 문제, 입시 문제, 집 문제를 가지고 동분서주하며 근심과 걱정 속에 사는 것은 마치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가 날씨가 춥거나 덥다고 투정을 부리며 신경질을 내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모습이 아닌가?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죄악의 암병을 가지고 지옥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이 아닌가? 이 근본적인 것을 해결하지 않고 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는가? 하찮은 것에 신경을 쓰며 근심하며 낙심하는 것처럼 바보스런 일이 어디 있겠는가?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참혹한 지옥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것이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는 미워하시지만 사람은 너무 사랑하시기에 친히 비상구를 만들어 놓으셨다. 아주 크고 확실하게 만들어 놓으셨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님은 구원의 비상구요, 생명의 비상구이시다. 예수님 자신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 형벌을 대신 당하신 것이다. 그는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지옥의 비상구가 되신 것이다.

당신도 지옥의 비상구가 되시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천국으로 들어가게 된다.

하나님은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영혼의 안식처인 예수의 품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왜 예수 믿다 낙오하는가?

 

어떤 화가가 예수의 모습을 그리려고 고민하다가 어느 교회의 성가대원으로 봉사하고 있는 잘 생기고 덕이 있게 생긴 분을 만나게 되어 기뻐했다. 자기가 찾던 예수의 모델로서 안성맞춤의 사람이어서 그를 모델로 삼아 예수님을 그렸다. 그 후에 다른 제자들의 모습은 다 그렸지만 예수를 판 가룟 유다의 상은 영 떠오르지 않아 몇 년을 허송 세월하게 되었다. 고민을 하며 애쓰다가 드디어 가룟 유다의 모습으로 알맞은 사람을 발견하고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다름 아닌 몇 년 전 예수의 모델이었던 성가대원으로서 타락하여 말할 수 없는 악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바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며 변하기 쉬운가를 말하고 있다.

전도를 하다 보면 예수를 믿다 만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은 것을 본다. 옛날에는 잘 믿었다고 하며 심지어는 성가대원, 어린이를 가르치는 교사, 또 집사의 직분까지 받았던 사람들도 있다.

왜 예수 믿다가 낙오하고 말았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분명한 큰 이유는 교회를 다녀도 예수를 확실하게 믿지 못하고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엄청난 축복을 깨닫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하고 교회를 다녔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예수를 믿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 백성으로서 완전히 달라진 것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이 세상의 행복과 욕심을 따라 살다가 마귀의 낚시에 걸려 낙오하게 되는 것이다. 마귀는 할 수만 있으면 믿는 자를 꾀어 넘어뜨리고 미지근하게 믿게 하다가 낙오자가 되게 하는게 목적이라고 성경은 말씀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을 바라보다가 마귀에게 속아 넘어가기도 한다.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완전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따르며 잘 해보려고 하는 불완전한 사람이기에 실수도 하고 죄도 짓기 때문에 예수님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을 사랑할 뿐인 것이다.

또 어떤이는 사업이 잘 되고 자기 일이 잘 되어 거기에 빠져서 교회를 떠나는 낙오자가 되기도 하고 어떤이는 자기 사업과 일이 잘 되지 않아 속상해서 교회를 떠나 낙오자가 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돈하고 자기 목숨을 바꾸는 사람이요, 자기 영혼을 세상의 썩어질 것하고 바꾸는 불쌍한 사람이다.

믿음의 낙오자가 됐다면 지금이라도 돌아서면 된다.

당신은 혹시 믿음의 낙오자가 될 가능성은 없는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확실하게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사시므로 세상의 물결과 바람과 유혹이 와도 떠내려가지 않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귀하를 기다리신다.

지금! 지금이다. 할렐루야!

 

생각해 보셨습니까?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이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에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짐승과 다른 것이다. 사람이 생각을 할 수 있었기에 문명을 발달시켰고 오늘같은 문화생활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며 사는 존재가 인간이라면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일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것이 된다. 생각은 바로 그 사람 전체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인생의 주인에 대해 생각해 보셨는가? 인생이 주인도 없이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 우주 만물과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주인은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이시다. 성경에는■■소도 주인을 아는데 인간은 주인되시는 하나님을 모르는구나.■■라고 했다.

당신은 인간이 사는 목적을 생각해 보았는가? 장관이 되고 부자가 되고, 운동 선수가 되어 자기 욕심을 이루는 것이 인간이 사는 목적이라 생각하는가? 연필이 존재하는 목적을 연필이 정하지 않고 연필을 만든 사람이 정하듯이 사람이 사는 목적도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이 정하셔야 하지 않겠는가? 인생의 목적은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정했다.

당신은 인간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가?

모든 인간에게 예외 없이 찾아오는 죽음은 때와 장소를 무시하고 찾아온다. 모든 야망과 소유를 무너뜨리고 만다.

부자나 유식한 자나 어느 누구도 죽음 앞에는 속수무책이다. 부처님도 공자님도 죽음을 이기지 못하고 무덤에 들어가 썩고 마는 신세가 되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이는 오직 예수님 뿐이다. 당신은 인간의 마지막 목적지를 생각해 보았는가? 인간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목적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가? 버스를 타도 목적지를 알고 타는데 하물며 인간이 마지막 가는 목적지를 모르고 살 수 있겠는가? 인간이 죽으면 그 육체는 무덤 속으로 들어가고 영혼은 내세에 가게 된다. 인간이 마지막 도착하는 곳은 천국과 지옥이다.

예수를 믿고 죄를 용서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천국이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자기 마음과 생각대로 산 사람은 지옥이다. 당신은 생각해 보았는가? 인생의 주인과 인생의 목적과 인생의 죽음과 인생의 목적지에 대해서 말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돌아올 때 올바른 생각을 하여 인생을 바로 살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주님께 돌아와서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신다.

지금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지금.

 

최고의 선물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인도의 어느 기독교 학교에 다니던 제일 어린 반 학생들에게 일어났던 이야기다. 예나 지금이나 인도는 굉장히 가난한 나라이다. 그런데 그 학생들은 매년 영국의 어린이들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여학생들은 인형을, 남학생들은 장난감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았던 것이다.

한 번은 근처에 계시는 의사 한 분이 이 선물을 나누어 줄 책임을 지고 그 학교를 방문하게 되었다. 트럭에 선물을 가득 실은 그는 교정으로 들어와서 학생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었다.

그러면서 그 분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아이들이 살고 있는 어떤 산골 마을에 관한 얘기를 했다. 이야기를 마친 후에 그는 선물을 들고 서 있는 어린 학생들에게 말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헌 장난감들을 그들에게 보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던 것이다. 어린이들은 그 말에 찬성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선물을 보내기로 했다.

그로부터 2주일 후에 그 의사가 헌 장난감을 수집하러 그 학교에 다시 왔다.

그런데 참으로 잊지 못할 광경이 벌어졌던 것이다. 어린이들이 한 명씩 줄을 지어 새 인형과 새 장난감 선물을 내놓았던 것이다. 의사가 깜짝 놀랐던 것은 어린이들 모두가 바로 며칠 전에 받은 자기의 새 물건들을 내 놓았다는 사실이다. 그 의사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왜 그랬는지를 묻게 되었다.

그때, 그 중에 키가 큰 한 소녀가 이렇게 대답을 했다. ■■선생님,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신 걸 생각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가장 좋은 것을 나누어주지 않을 수 있겠어요?■■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멸망할 죄인들의 세상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그 분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옥 갈 인생이 영원한 천국 생명을 얻기 때문이다. 이것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최고 선물인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지금도 그 최고의 선물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신다. 지금, 지금….

 

행복하십니까?

 

인간이 가장 바라는 것이 있다면 행복일 것이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 여러 모양으로 애를 쓰며 살아가고 있다. 행복을 위해 돈을 버는 데 정력을 쏟고, 행복을 위해 공부를 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자고, 행복을 위해 출세의 길을 연구하느라 피곤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행복을 얻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 하지만 참으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사람은 이 세상 것으로 만족과 행복을 누릴 수 없는 고등한 존재이다. 돼지나 짐승은 먹을 것을 주기만 하면 행복하고 태평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이 그런 짐승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짐승과 같다고 자기를 학대하고 멸시해도 여전히 사람인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은 짐승과 같이 세상 물질적인 것만으로는 행복을 누릴 수가 없다.

그것은 사람에게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영혼은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살고 만족을 얻게 된다. 사람들이 죄에 빠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끊어져 있고, 그러기에 행복을 누릴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죄를 이야기하면 자기는 도덕적으로 선하기 때문에, 또는 착하기 때문에 죄가 없는 줄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더 큰 죄인이다. 왜냐하면 죄 중에 제일 큰 죄는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것인데도 죄가 없다고 스스로 내세우니 하나님께는 얼마나 외람된 행위인가? 자기 육신을 낳아 주신 부모를 외면해도 불효막심한 놈이라는데 우주만물을 만드시고 나를 있게 하신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죄인가? 죄를 모르니까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고 또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 행복을 주려고 하신다. 그래서 당신의 죄를 다 갚아 없애기 위해서 자기 아들인 예수를 죄 값으로 대신 형벌을 내리셨고 당신은 그저 그것을 믿고 나오기만 하면 된다. 교회는 이런 기쁜 소식을 가르쳐 주는 곳이요,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고 예수님을 믿게 해주는 곳이다.

당신은 지금 진정으로 행복한가? 돈만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속지 말라. 그것은 행복을 줄 수도, 얻을 수도 없다.

교회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지체하지 말고 결단을 내려야 할 때이다. 하나님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당신을 기다리신다. 하나님 앞에 나와 예수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고 하늘 나라에 이르자.

주 예수를 믿으라!

 

진정으로 행복을 누리는 길

 

문명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의 삶은 풍요롭고 편리하게 된다. 학생들은 수십 리 길을 걸어서 통학을 했으며 주부들은 밥을 하기 위해 불을 때느라 연기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고생을 했던 시절이 불과 수십 년 전의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림 속에 허덕였고, 입을 것이 없어서 위의 형제들에게 물려받아 입었었다. 또한 호롱불 밑에서 이를 잡으며 공부하던 때를 40대 이상이라면 대부분 경험했던 일일 것이다.

그때와 비교한다면 지금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풍요로움과 편리함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이다. 이러한 풍요와 편리함만 생각한다면 불평과 불만은 간 데 없고 감사와 행복이 넘쳐야 됨이 마땅하고, 범죄와 폭력은 사라지고 오히려 사랑과 밝은 모습이 사회에 가득 차야 함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원망과 불평 속에 이혼하는 가정은 늘어나고 온갖 무서운 범죄가 점점 더해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모습이다.

옛날의 왕이 먹어보지 못한 것을 먹으며, 옛날 황제가 누려보지 못한 문명의 혜택을 누리면서도 인간성은 점점 약해지고 서로를 해하며 불신하는 세상이 되어가니 웬일인가? 앞으로도 과학과 문명이 계속 발달하면서 더욱 인간의 생활은 부요해지고 편리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인간 내면의 행복과 기쁨과 평안은 점점 없어지고 불안과 두려움이 더해 갈 뿐이다. 문명과 과학의 힘으로 배를 부르게는 할 수 있고, 생활의 편리함을 줄 수는 있지만 진정한 기쁨과 평안이 있는 행복은 줄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본능만을 가지고 만족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과학 문명을 의지할수록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된다.

인간은 그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야만 하는 영혼이 있는 존귀한 존재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몸부림치며 과학 문명을 발달시키지만 결국 무너지는 바벨탑이 되어 버렸다. 개인적으로는 죽음과 함께 모든 수고가 헛되게 되고 공적으로는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인간이 참 행복을 누리고 만족과 평안을 누리는 길은 인생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 뿐이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를 마음 중심에 모실 때 참 평안과 기쁨을 얻을 수가 있다. 교만함과 세상 탐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참 행복을 누리시다 천국에 가기를 바란다.

 

무슨 목적으로 살아가는가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짐승이나 생물이나 무생물이나 모든 것이 다 저절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다.

컵은 사람이 물을 마시기 위해 만들어졌고 시계도 때를 맞춰 생활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컴퓨터도 인간의 머리 대신 편리한 삶을 위해 만든 것이다.

컵도, 시계도, 컴퓨터도 모두 사람이 만들었기에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계보다, 컴퓨터보다 더 정밀하고 정교한 인간도 하나님이 만든 것이다. 무엇이든 만든 이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컵과 시계와 컴퓨터를 사람이 사람을 위해 만든 것 처럼 사람도 사람을 만드신 분이 자신을 위해 만드셨다는 사실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시계의 목적이 사람을 위해 시간을 잘 맞추는 일인 것처럼 사람도 사람을 만드신 분을 위해 있는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고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다. 또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이 사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이 사는 목적은 인간 자신이 정한 것이 아니다.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

인간이 사는 목적을 자기 자신이 정해 가지고 욕심을 향해 출세를 향해 달려가는 것은 올바른 인간이 아닌 것이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본능과 쾌락만을 위해 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인생의 목적도 없이 되는대로 살다가 죽는 것은 얼마나 큰 죄악인가? 인간은 컵이나 짐승이나 컴퓨터와는 비교가 안 되는 존귀한 존재인 것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욕심을 위해 살기 때문에 참 행복과 기쁨이 없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을 기쁘게 할 때 참 행복과 기쁨이 있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은 바로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다. 당신은 무슨 목적으로 살고 있는가? 예수를 믿으시고 참 인생의 목적을 깨닫고 사시길 바란다.

 

인생은 농사를 짓는 것이다

 

이 세상에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과 법칙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심는 대로 거두는 것 만큼 확실한 것이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말이다. 심은 그대로 나고 심은 그대로 거두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요, 하나님의 섭리이다.

성경에는 인생을 심고 거두는 농사와 같다고 말한다. 우리의 일생 70~80년 동안 뿌리고 심는 것이라고 한다. 한 평생 동안 뿌리고 심다가 인생을 다 끝낸 후 죽음과 함께 거두는 것이다.

결과가 무엇을 심느냐, 뿌리느냐에 좌우된다면 과연 인생은 무엇으로 심는 것인가? 성경에는 따로 씨앗이 있는게 아니고 우리의 생활 자체가 씨앗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생활이 죽음 후에 거두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썩어지는 것과 함께 영원한 영광을 거두는 인생이냐하는 것은 이 세상의 생활이 어떤 삶이냐에 좌우되는 것이다.

사람은 두 종류의 씨앗을 심고 있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육체의 만족과 욕심이라는 씨앗을 심지 않으면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씨앗을 심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 잠깐의 욕심을 위해 자기 자신의 잠깐 행복을 위해 열심히 생활하는 사람은 썩어진 것과 함께 영원한 멸망을 거두게 되는 반면에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위해 이웃의 영혼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은 영원한 영광과 상급을 거두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를 속단하여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농부가 농사를 끝낸 후에야 곡식을 얻는 것처럼 인생도 죽음 후에야 성공과 실패를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자기의 성공과 욕심을 위해 노력을 해서 출세를 하고 큰 부자가 됐어도 그는 하나님 앞에 농사를 실패한 자로서 영원한 멸망을 받게 된다.

그러나 비록 사람 눈에 보이는 큰 성공는 못했어도 일생 동안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영혼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면 하나님 앞에 인생 농사를 잘 지은 자로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자기의 욕심과 신념대로 살면서 썩어진 씨앗을 뿌리는 자인가?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영혼을 위해 사는 영생의 씨를 뿌리는 자인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하셨다. 지금까지 어떤 씨를 뿌리며 인생 농사를 짓고 있었는가? 어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돌아 오길 바란다. 그래야 농사를 잘지어 후회하지 않는 인생이 된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예수님은 귀하를 기다리신다. 지금, 지금이다. 할렐루야!

 

멀리 내다 보는 인생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 일기 중에 ■■큰 인물일수록 멀리 내다 볼 줄 아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매우 깊은 뜻을 담고 있는 말이다. 큰 사람일수록 눈앞의 이익에 빠지지 않는 반면에 소인일 수록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며 산다는 말이다. 그 당시 왜적의 침공을 내다보지 못하고 당파 싸움에 빠졌던 조정 대신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깊은 뜻을 가르쳐 주는 말이다. 우리 인간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과연 얼마나 멀리 내다보며 살아가고 있는가? 멀리 장래를 내다보며 산다는 것은 사람에게만 주신 특권이요 지혜이다. 짐승에게는 본능에 의한 겨울 준비 정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인생의 앞날을 설계하고 계획을 세워 보람된 삶을 살고자 애를 쓰는 마음을 주셨다.

우리 인간들 중에 하루살이 같이 하루하루의 쾌락을 위해 사는 사람도 많이 있다. 좀더 생각이 깊은 사람들 중에 10년 후의 목표를 바라보고 계획하며 사는 사람도 있다. 특별한 사람들 중에 50년 후의 목표를 정해 놓고 집념을 불태우는 사람도 있다. 더 드물게는 후손에게 이루어질 목표를 세워 그것을 위해 사는 사람도 있다. 김용기 장로님은 3대 동안 좋은 밥과 고기 반찬을 먹지 않고 3대 후를 내다보며 이 나라 농민 운동을 하신 분이다.

그러나 아무리 멀리 내다보며 산다고 해도 결국 부질없고 허망한 것이 인생이다. 내일을 내다보며 세웠던 그 목표를 이루기 전에 죽음이 찾아오는 수가 허다하며 또 이룬 다음에 죽음과 함께 헛수고가 되고 마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진정으로 앞을 내다보고 멀리를 내다보려면 죽음 후의 세계를 내다보아야 지혜로운 사람인 것이다. 모든 부귀영화를 뜬 구름같이 만드는 죽음 후의 세계를 바라보고 사는 자야말로 진정 큰 인물이요 현명한 사람이다.

■■1년을 바라보며 농사를 짓고, 10년을 바라보며 나무를 심고, 100년을 바라보며 교육을 한다.■■고 한다면 그러나 영원한 내세를 위해서는 믿음을 심어야 한다. 예수를 믿는 믿음을 심을 때 영원한 영광과 행복이 보장된다.

우리 모두 큰 믿음, 많은 믿음을 심어서 큰 영광, 큰 성공의 사람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

 

진짜 부자가 되자

 

사람은 누구나 소유가 풍족한 부자가 되기를 원하며 또 부자가 되기 위해 일생을 다 바치기도 한다. 이는 부자가 되면 행복이 보장되는 줄을 알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이 세상은 금전 만능 사상과 이기주의, 한탕주의가 만연되어 온갖 범죄는 갈수록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부자가 되는 것은 행복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큰 불행을 자초하게 되는 것임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부자는 돈 때문에 일평생 고생하며 돈을 벌기 위해 범죄하고 남을 속이며 거짓말을 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고민하며 마음 졸이고, 돈 때문에 위험 속에 빠지기도 하며 위협을 당하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다.

또한 부자가 되려는 사람은 올무와 함정에 빠져서 자기를 괴롭히며 살게 된다. 부자가 되면 행복한게 아니라 잠깐의 쾌락을 맛볼 뿐 곧 허탈과 허무감에 빠지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부자는 대부분 지옥에 가게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부자는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돈을 최고로 사랑하고 돈을 최고로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갈 수가 없고 주님을 모실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은 마음이 겸손하여 죄인임을 깨닫기가 쉽고 그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기가 쉽기 때문에 천국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섬기며 사람답게 믿음으로 사는 것보다 부자가 되는 것을 힘쓰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부자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네 영혼이 구원받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또한 이 땅에서 부자가 되는 것보다 하늘의 부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를 믿는 믿음이 있는 자가 진짜 부자인 것이다. 하늘 나라의 부자, 죽음 후의 영원한 부자는 이 땅에서 부자되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자기 소유를 잘 사용한 사람을 말한다.

천국의 부자가 진짜 부자요, 영원한 부자이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믿음으로 잘 사용하고 이웃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잘 사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땅의 부자는 망할 부자요, 지옥갈 부자이다. 믿음의 부자, 사랑의 부자는 영원한 부자로서 행복을 소유한 사람이다.

당신은 어떤 부자인가? 어떤 부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는가? 오늘도 믿음으로 살아 날마다 믿음이 커지고 사랑이 커지는 진짜 부자가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드린다.

할렐루야!

 

망할 부자, 진짜 부자

 

사람은 평생을 살아가며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나게 되고 그와 함께 걱정을 하며 살아간다. 걱정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돈 많은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도 높은 직위에 앉은 사람도 걱정이 많다.

왜냐하면 사람은 잘 먹고 잘 입는 것으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짐승이 아닐 뿐 아니라, 아무리 욕심을 많이 채워도 한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걱정을 잊어버리려고 술과 마약에 빠져 버리기도 한다. 그렇다고 걱정거리가 해결되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심지어는 걱정하다 낙심하여 절망 끝에 자살하는 것으로 모든 고민을 잊어버리는 사람도 있다.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가? 자살한다고 과연 걱정거리가 해결되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살인죄에 대한 심판을 받아 말할 수 없는 지옥의 고통과 형벌을 대가로 받게 된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걱정하며 낙심하고 있는가?

남보다 부자가 되지 못하고 남보다 배우지 못하고 높은 자리에 앉지 못했다고 걱정하고 낙심하는가? 지금 걱정하고 낙심하는 그 문제는 지금 죽음과 함께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허무한 것들이다. 오히려 걱정거리는 언제 찾아 올지 모르는 죽음의 문제라는 사실을 우리는 애써 잊으며 살아가고 있다.

누구에게나 찾아 와서 모든 야망을 물거품처럼 만들어 버리는 죽음이야말로 가장 큰 걱정이요 문제이다. 그리고 죽음 후에 그냥 끝나는 짐승이 아니기에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이 더 큰 두려움과 공포를 느낀다. 죽음과 내세의 심판에 대한 문제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걱정이며 어느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찾아와서 문을 두드린다.

가장 중요한 죽음의 문제와 내세의 문제를 걱정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셨다.

곧 우리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내 죄를 담당하시고 내 대신 형벌과 심판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죽음과 내세의 심판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걱정을 맡아 주신다.

어린 자녀가 부모의 품에 안겨있으면 걱정이 없듯이 인간이 하나님의 품에 예수의 사랑에 들어오기만 하면 주님께서 맡아 주시며 평강을 주시기도 한다. 그러면서 먹고 입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사람답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모르고 심판을 모르고 사는 불쌍한 이웃을 많이 구하여 낼까하는 고상한 걱정을 하게 된다.

당신은 지금 무엇 때문에 걱정하며 낙심하고 있는가? 그것이 당신의 생명보다 영혼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며 네 염려를 내게 맡겨버리라 고 부르신다.

확실하게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어보자.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한 번 주신 기회

 

새해가 또 시작되었다. 한 해가 가면 다시 새해가 오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순간순간마다 죽어 사라져 가기 때문이다. 어제까지 살아있던 사람이 오늘 갑자기 사고로, 질병으로 재난과 여러 가지 이유로 죽어 다시는 다음 날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다. 한 달 전에 열심히 뛰며 일하던 사람이 다음 달에는 볼 수가 없는 경우가 남의 일만이 아닌 것이다.

그런 와중에 한 해를 또 새로 맞이하게 된 것은 굉장히 큰 일인 것이다. 지난 일 년 동안에 굶어 죽은 사람만 1,300만이요, 기타 사고와 질병과 재난과 전쟁으로 죽은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어리석은 사람은 그 마음이 늘 놀고 즐기는데 가 있고 지혜로운 자는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산다고 말씀하고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생을 그저 먹고 즐기며 욕심을 많이 이루는 것만 생각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인생의 종말이 있음을 염두에 두고 인생을 신중히 살고 마지막 결산에 신경을 쓰며 산다는 말이다.

인생은 한 번 뿐이기에 일생이라고 한다. 대학 입시는 떨어져도 얼마든지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에 재수, 삼수생이 있지만 인생은 한 번 주신 기회로 끝나는 것이다. 주어진 한 평생은 하나님께서 주신 한번 뿐인 기회이기에 더 없이 소중한 것이다.

특히 수많은 사람이 한 해 동안 죽어 새해를 맞이하지 못했는데 우리에게 또다시 한 해를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일생을 끝내고 죽음과 함께 하나님 앞에 결산할 때 영원히 상 받는 자와 영원히 벌 받는 자로 갈라지게 되는 것이 인생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며 섬기며 살았는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인 예수를 거부하고 자기 생각대로 자기 마음과 자기 신념과 철학대로 살았는가?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다.

사람이 볼 때에 착한 것과 하나님이 보실 때 착한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부모 마음에 들게 함이 효도인 것처럼 하나님의 뜻과 마음에 들어야 선하고 착한 것이다.

하루가 가면 그 날이 다시 오지 않듯 올해도 지나가면 다시 안 오는 한 번 뿐인 기회이다. 올 한 해를 하나님을 경배하며 예수를 높이며 이웃의 영혼과 생명을 위해 삶으로 한 번 뿐인 인생을 멋있게 사시는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란다.

단 한번 주신 기회라는 사실을 깨닫고 사는 자의 삶은 멋있는 삶이 될 것이다.

 

위의 것을 바라볼 때

 

사람은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살아간다.

■■바라본다■■는 말은 소망하고 기대하며 소원한다는 말이다. 바라보는 것, 다시 말해서 기대하고 소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는 그 사람의 인격과 행동과 생활을 좌우하고 일생을 좌우하게 된다.

모든 인간은 위에 것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과 땅에 것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있다. 땅의 것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이 땅의 살고 있는 동안의 행복만을 소망하며 사는 사람이다.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입고 남보다 좋은 집을 가지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는 것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도 땅의 것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다. 명예와 권세를 위해 일생을 바치는 사람도 땅의 것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다. 심지어 종교인들도, 신앙인들도 땅의 것을 바라보고 땅의 것을 이루기 위해 종교와 신앙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땅의 것은 결국 죽음으로 허무하게 끝나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인간의 조상이 곰이요, 원숭이라고 우기면서 곰과 같이 원숭이와 같이 땅의 것만 생각하고 바라보고 사는 것은 지혜로운 인간이 아니다.

인간만은 머리를 하늘로 향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위의 것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 창조주 하나님께서 특별히 배려를 하신 것이다.

인간은 위의 것을 바라보고 살아야만 한다. 위의 것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은 자신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를 섬기며 그를 경배하며 그를 기쁘시게 하며 그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요, 죽음 후의 내세와 하나님이 주신 영광과 상급을 기대하며 소망하며 사는 것을 말한다.

이 땅의 모든 것은 위의 것을 바라보며 살아가라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세상은 잠깐동안 훈련하고 연습하는 도장이요, 훈련 교실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훈련을 하는 인간이 모든 것을 마치고 영광스럽게 하나님 앞에서는 것을 소망하며 기대하며 사는 자가 위의 것을 바라보고 사는 자라는 말이다.

당신은 지금 땅의 것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위의 것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는가? 당신은 지금 잠깐 있다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세상 욕심을 바라보며 살아가는가 아니면 영원한 소망인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가? 근심과 걱정 속에 파묻혀 사는 사람은 땅의 것을 바라보며 살기 때문이다. 위의 것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근심과 걱정에서 해방될 수가 있다.

이 시간에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님은 우리가 위의 것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피 흘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살아나신 분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를 확실하게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 근심과 걱정을 이기면서 살아갈 수가 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근심과 걱정 속에 사는 사람은 땅의 것을 바라보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의 마지막에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는 그러한 사람이 되자.

 

낙심할 필요 없는 인생

 

사람이 세상을 살다가 보면 큰 어려움을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 누구나 낙심하며 실의에 빠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인생의 허무를 느끼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낙심하게 되는 이유는 소망이 끊어졌기 때문인데 우리 믿는 성도는 소망이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같이 이 세상의 욕심에다 소망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모든 소망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기에 언젠가 변하고 없어지는 것이지만, 믿는 자의 소망은 영원한 천국과 죽음 후의 상급이기 때문에 끊어지거나 없어지는 소망이 아니다.

지금 혹시 낙심하고 있다면 무엇 때문인가 생각해 봐야 한다. 잠깐 있다 없어지는 세상 욕망에다 소망을 두고 있는 게 아닌가 자신을 살펴봐야 한다는 말이다. 믿는 자의 참 소망은 잠깐 있다 사라지는 세상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예수를 믿는 자가 세상 사람보다 차원이 높은 것이다.

사람이 어디에, 무엇에 소망을 두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보여 주는 것이다.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참 소망, 천국의 소망을 가진 자가 되면 낙심할 필요가 전혀 없게 된다.

또한 사람이 낙심하는 것은 자기가 망하게 되었거나 큰 해가 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망할 수 없는 자가 된다. 이미 천국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설혹 세상에서는 실패했다 해도 천국 백성은 천국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다. 망할 수 없는 자가 이미 되었기에 아무리 큰 실패가 와도 망한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손해를 보고 아무리 나쁜 일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결코 손해이거나 나쁜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합력해서 나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어려운 문제나 환경은 나로 하여금 훈련과 연단을 잘 받아 멋있는 주의 성도다운 성도가 되게 하려는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결코 낙심할 필요가 없다.

세상 사람들 같이 큰 실패와 손해를 만나도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참 소망을 확실하게 붙잡고 살아가야 한다. 나쁜 일이 겹쳐와도 나쁜 일로 보지 말고 나로 연단하여 더 큰 복된 사람을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감사하자.

이제부터는 결코 낙심하지 아니하리라 결심하기 바란다. 사랑의 하나님을 확신하고 합력하여 나를 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망할 수 없는 자임을 깨닫고 감사하며 살아가기 바란다.

오히려 세상의 소망을 붙잡고 살면서 사는 불신자들과 세상의 소망 때문에 낙심하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에게 참소망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당신은 예수 안에 있는 영원한 참 소망을 붙잡고 살아 갑니까? 썩어질 세상 소망을 붙잡고 낙심하며 살아갑니까? 지금 예수를 믿으면 소망이 바뀌고 참 평안을 얻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지금 믿으십시오. 지금.

 

열등감의 축복

 

스스로 못났다고 생각하는 열등감이 너무 심한 까닭에 초등학교 때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다. 뿐만 아니라, 남들 앞에서 말하거나 얼굴을 대하는 것도 아주 싫어하고 겁을 내기까지 했었다. 특히 나는 나보다 잘생기고 키가 크고 공부도 잘하는 형에 대해서 심한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이런 열등감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열 살까지 오줌을 싼 것 때문이다. 예닐곱 살부터 오줌을 안 싸보려고 애쓰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물을 가급적 안 먹고, 늦도록 소변을 다보고 잠을 자도 여전히 오줌을 쌀 때가 많았다. 너무 고민이 되어 밤을 꼬박 새우려고 누워서 두 눈을 뜨고 견딘적도 있다. 다른 식구들이 다 잠들 때까지도 안 자다가 결국 밤이 깊어지면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게 된다.

그러다 꿈에 소변이 마려워 요강에 가서 소변을 보게 된다. 꿈속에서 소변을 시원스럽게 보는데 갑자기 밑이 뜨뜻해서 깜짝 놀라 깨어보면 또 오줌을 싼 것이다.

그 때 그 낭패감과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만 옷이 젖고 끝났으면 좋겠는데, 통 요때기와 통 이불을 여섯 식구가 함께 깔고, 덮고 자다보니 나 때문에 한 겨울 물난리를 당하게 된다.

형에게 놀림 당하고 온 식구의 눈총을 받고 급기야는 키를 쓰고 소금을 얻으러 이웃집으로 가기까지 했던 것이다. 말할 수 없는 모멸감과 굴욕감을 느끼며 심한 열등의식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식구들 중에 유일하게 교회를 열심히 다니게 된 것이리라. 그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확실한 믿음과 뜨거운 은혜를 받게 된 것이다. 얼마나 감사하고 복된 일인가? 지금은 얼굴이 못생겼다고 생각지 않고 ■■미남은 아니지만 씩씩한 생긴 생김 어쩐지 맘에 들고 독특하게 생겼구나.■■라고 긍지를 갖고 활동을 하고 있다.

몇천 명의 교인들 앞에서 부흥회를 인도함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게 됐고, 수백 명의 목회자들 앞에서 세미나를 진행하는 데도 자신감을 가지고 힘있게 감당하게 된 것이다.

예수는 나를 완전히 변화시켜 벼락출세를 하게 한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만나고 예수 안에 들어오면, 어떤 처지에 있든지 새롭게 만들어 영광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마귀의 종에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지옥 백성이 천국 백성으로 완전히 달라진다. 너무나 존귀한 자가 되었으니 어찌 열등감에 눌려 살겠는가? 영적인 긍지를 가지고 어떤 처지, 어떤 환경에서도 당당하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영적인 막가파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잔인하게 사람을 죽인 자들이 스스로 이름하여 ■■막가파■■라 했다. 그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사정없이 악행을 일삼고 살인을 저지르기를 결심하여 함부로 막 살아가는 자라는 뜻으로 ■■막가파■■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전율을 느끼며 기가 막혀하면서 ■■막가파■■의 살인사건 뉴스를 들었던 것이다. ■■어찌 사람이 저렇게 악하고 잔인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막가파■■가 그들만의 이름이고 그들만의 모습인가? 그렇지 않다. 막가파는 언제든지 생겨날 수 있고 막가파의 이름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에게 붙여질 이름인 것이다.

오늘날 인간들 중에는 아주 교양있게 인격적으로 살아가는 이가 있고, 열심히 사회와 가정을 위해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도 있다. 또는 남에게 크고 작게 이익을 주며 살아가는 이도 있고 아무렇게나 살아가므로 남에게 크고 작게 해를 끼치면서 살아가는 이도 많다.

그렇다면 이들은 ■■막가파■■와 전혀 관계가 없는 자들이고 ■■막가파■■라는 이름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교양인, 인격자, 성실한 사회인이라는 사람들 가운데도 ■■막가파■■라는 이름을 들어야 할 존재가 많은 것이다. ■■막가파■■라는 본래의 말뜻은 ■■막 가는 자들■■이라는 말이요, ■■아무 생각없이 가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더 자세히 말한다면 ■■어디 가는지 모르고 가는 자■■라는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인생의 마지막 목적지가 어딘지 모르고 살아간다. 그러나 성경에 분명히 인생은 마지막 목적지가 있다고 했다. 사람이 죽어 묻히는 무덤이 마지막 목적지가 아닌 것이다. 짐승이 아닌 인간은 죽어 영원한 내세인 천국과 지옥의 목적지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지막 목적지가 천국과 지옥인데도 그것을 모르고 그냥 사는 자가 ■■막가파■■인 것이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온 자는 천국의 목적지를 알고 확실한 인생을 살아가는 현명한 자이지만,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여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지옥의 목적지를 향해 살아가는 ■■막가파■■인 것이다.

자기의 마지막 목적지를 모르고 열심히 살아가는 자가 ■■막가파■■요, 마지막 목적지가 지옥인데도 그냥 막 살아가는 자가 ■■막가파■■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예수를 믿고 영생의 길, 천국길로 들어서기를 원하신다. 나 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원하신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대로, 자기 욕심대로 막 살아가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교양인, 도덕인은 될 수 있어도 마지막 목적지를 모르고 살아간다면 영적으로 ■■막가파■■요,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지옥의 목적지를 모르고 열심히 살아간다면 확실한 ■■막가파■■인 것이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영적 막가파■■에서 하나님의 복된 자녀가 되기를 소원하신다. 지금도 …….

 

땅의 도적, 하늘의 도적

 

옛날부터 남의 것을 부당하게 자기의 소유로 만드는 것을 도적이라 하여 큰 벌을 내렸다. 빵 한 조각을 훔치고 오랜 세월 감옥에서 세월을 보낸 장발쟌의 이야기가 있듯이 작은 욕심 때문에 일생을 망친 사람들도 많다. 불완전한 이 세상에서는 보이는 작은 도적들은 처벌하고 보이지 않는 큰 도적들은 높여 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우리 나라 공직자들은 수억을 부당하게 도적질하고도 국민들 위에 군림하여 권세를 휘두르기도 하고 선한 정치인 행세도 하여 왔다. 그러다가 이번 개혁의 바람에 들통이 나서 크게 망신을 당하고 감옥에도 들어가지만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그동안 수억을 도적질한 고위 공직자들이 작은 도적을 잡아넣기 위해 법을 만들고 권세를 휘둘러왔던 것이다. 아니 이 세상에서는 앞으로도 큰 도적들이 작은 도적들을 잡아 처벌하면서 권세를 누리며 사는 것이 계속될 것이다.

이 땅의 도적이 일단 발각되면 처벌을 받게 된다. 작은 도적, 큰 도적으로 구분하여 벌을 주지만 불공평한 경우가 허다하다.

칸트라는 철학자는 ■■이 세상이 불공평하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 내세 즉,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숨겨지고 감춰졌던 도적이 반드시 하나님 앞에 가서 드러날 것이다. 성경에 기록되기를 하나도 남김없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양심을 지키며 살아야 세상도 좋아지고 하나님 앞에서도 칭찬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땅의 도적보다 더 악한 도적은 하늘의 도적이다. 하늘의 도적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은 자기 목숨부터 시작해서 다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임시로 맡긴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의 것인 줄로 알고 자기 쾌락과 욕심을 위해 자기 마음대로 사용한다.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의 뜻대로 이웃을 위해, 가족을 위해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하는데 제멋대로 사용하니 얼마나 큰 도적인가? 땅의 도적이 감옥에 들어가듯 하늘의 도적이 지옥의 감옥에 들어감이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모든 인간은 하늘의 도적인 것이다.

예수님을 마음 속에 영접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자.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나?

 

지금부터 30년, 40년전만 해도 된장에 구더기가 드문드문 눈에 보일 정도로 섞여 있었다. 상추쌈을 된장에 싸 먹을 때 구더기 없는 된장을 숟갈로 뜨느라고 신경을 많이 썼었다. 된장 찌개에 들어 있는 구더기는 아예 영양가 높은 육식으로 알고 눈 딱 감고 먹어 치웠다.

참으로 된장을 먹기가 큰 고역이었지만 그래도 한국인 입에 길들여진 된장은 중요한 밑반찬이기에 집집마다 된장 담그는 일은 대사에 속하는 행사였다.

지금이야 인조 된장, 화학 된장도 많이 나오고 색다른 맛을 내는 조미료도 많이 나와 된장의 용도가 적게 됐지만 그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된장을 꼭 담가야 하는데 구더기가 끼게 되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요즈음은 파리가 된장에 닿지 못하게 모기망이나 망사를 장독 주둥이에 씌워 구더기가 생기지 않지만 옛날에는 그런 지혜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구더기가 생길지라도 장을 담는 것은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집집마다 큰 행사 중에 하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생겨난 속담이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나?■■라는 것이다.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하는데 작은 손해나 방해가 있다고 할지라도 밀고 나가야 한다는 뜻인 것이다.

얼마전 극성을 부리며 사회를 혼란케 하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포교 때문에 정상적이고 윤리적이며, 사회정화에 앞장서서 기여하며, 사람의 심성과 인격을 고상하게 승화시켜 참다운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 기독교 복음 전파자들이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취급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떤 이들은 시한부 종말론에 빠질까 염려하여 아예 교회를 거부하고 가족까지 교회출석을 막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구더기 무서워 장을 못 담는가?

시한부 종말론이 극성을 부린다고 인생의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인 인간의 죽음 문제, 내세 문제, 왜 사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예수님을 거부하고 교회 출석을 거부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세 종류의 사람, 당신은?

 

과학자이며 수학자이고 철학자였던 파스칼이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첫째 종류의 사람은 자기 자신이 무엇 때문에 태어났으며, 무엇 때문에 살고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먹고 마시는데 정신을 쏟는 사람이다. 육체의 만족과 이 세상 즐거움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 허무하게 죽어 버리는 사람들이 첫째 부류의 사람이요, 이 세상 사람들 중에 제일 많은 종류의 사람인 것이다.

두 번째 종류의 사람은 인간이 무엇 때문에 태어났을까? 무엇 때문에 살고 있을까?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를 생각하며, 고민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철학자들과 철학적인 생각을 하며 사는 자들이다. 인간의 머리로 인생의 목적과 내세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고민하다가 미치기도(니이체 같이)하며 자살하는 것이 최선이라고(쇼펜하우워) 가르치기도 한다. 결국 고민하다 죽고 마는 인생이 두 번째 종류의 인간모습이다. 종교를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도 이런 종류의 사람이다. 머리가 좋다고 하며 자기 지혜와 지식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따지다가 죽고 마는 인생은 얼마나 비참한 사람들인가?

세 번째 종류의 사람은 인간의 연약함과 죄인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항복하고 엎드리는 자다. 인간의 머리로 인생의 근본문제인 내세와 인생의 목적을 알 수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사는 사람이다. 인생의 목적을 확실히 깨닫고 내세의 소망이 확실한 자가 세 번째 종류의 사람이다. 무엇 때문에 사는지도 모르고 그냥 그저 그렇게 산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를 머리로 연구하고 고민하다가 죽고 마는 인생은 얼마나 불쌍한가? 겸손히 하나님 앞에 항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예수 이름으로 구원의 복을 받고 사는 인생은 얼마나 행복한가? 누구든지 이 세 가지 종류의 사람 중에 속할 것이다. 당신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당신은? 당신은? 당신의 결단과 선택에 따라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저주가 기다리고 있다.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을 기다리고 계신다.

 

참되게 사는 길은?

 

사람은 겉으로는 누구나 착하고 선한 것을 좋아하는 것같이 보인다. 또 착하고 선한 사람인 것 같은 외모를 가진 사람도 많다. 그러나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상태이기에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인간이 모여 사는 곳에는 미움과 시기가 있고 다툼과 폭행과 살인이 일어난다. 세월이 흐를수록, 지식과 문명이 발달할수록 범죄가 극심해지는 것이다.

선하고 착한 것 같지만 자신에게 손해가 되면 악한 본성이 드러난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칭찬듣는 사람들도 속에는 미움과 시기가 있는데 다만 남보다 밖으로 안 나타나는 것 뿐이다. 어떤 사람은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고 자기의 재물을 나누어주면서 좋은 일을 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으로 인해 사회가 밝아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선행도 인간이 볼 때 선한 것이지 하나님이 보실 때 그것을 착하게 보시지 않는다. 부모를 배반하고 집을 나간 불효자식이 다른 사람에게 인심을 쓰며 좋은 일을 한다고 하면 오히려 부모의 마음이 아프고 괴로운 것과 마찬가지 이치가 아닌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하나님이 계신 것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존경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는 인간이 남을 도와주고 남을 위해 희생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어찌 착한 일로 보겠는가?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과 생각대로, 자기 욕심대로 사는 자가 아무리 좋은 일과 착한 일을 할지라도 그것은 악한 선행이요, 선한 것처럼 보이는 악행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오히려 불쌍한 인간의 모습일 뿐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선을 행할 수가 없다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다. 먼저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이 급한 것이요, 선의 시작이다. 마치 집 나간 자식이 집에 돌아오는 것이 먼저요, 효의 시작인 것처럼 인간은 먼저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을 위해 열심을 내는 하나님의 참 자녀를 만들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신 형벌과 심판을 받으신 것이다. 하나님께 돌아와서 그의 뜻대로 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이 진정한 선행이요, 착한 일이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을 행하는 착한 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

 

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가?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하나님께서 만드셨다. 해와 지구가 일정한 괘도를 따라 돌며 공전과 자전을 하여 1년과 1일을 계산하고 계절도 변하는 모든 법칙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것이다.

물질들이 뭉쳐져 저절로 생명이 생기고 점점 진화해서 원숭이가 사람이 됐다고 하는 무식한 과학자들도 많다. 자기 할아버지가 원숭이라고 고집하며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공산주의자들은 결국 망하여 없어지게 됐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남아 있는 것이다.

책 한 권이 저절로 진화해서 만들어졌다고 하면 믿을 수 없듯이, 책과는 비교가 안 되는 인간이 저절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얼마나 무식하고 어리석은 생각인가.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지금도 우주만물을 인간의 이해를 뛰어 넘어 다스리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고 하는데 왜 안 계신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볼 수도 없는가? 그것은 인간이 죄를 범하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죄의 담으로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처음 조상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죄를 지어 하나님을 떠나 버렸고, 모든 인간들은 조상의 피를 이어 받아 죄인으로 태어나서 어린 아기 때부터 죄를 안 가르쳐 줘도 미움, 질투 등의 감정을 갖게 된다. 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죄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도, 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생각까지도 어둡게 되어 하루하루 죽어가면서도 죽음 후의 문제와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깊이 생각지 않고 죽기 전에 박사, 장관, 부자가 되어 보려는 욕심만 부리다가 마귀를 위해 준비된 지옥에 가게 된다.

자기 마음대로 욕심대로 사는 것은 마귀를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죄와 심판을 해결하고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시려고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찾아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신 형벌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내 대신 죄의 형벌을 받으신 예수님만 믿으면 죄 용서 받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천국에 가게 된다.

진심으로 자기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을 확실히 믿으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며 살 수 있다.

 

자살하면 안 되는 사람

 

오늘 이 시대는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고도의 문명시대요, 풍요로운 시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하는 사람은 날로 늘어가고 있다. 오히려 선진국일수록 자살율이 높은 것이 오늘의 현상이다. 더구나 요즘은 청소년의 자살 또한 늘어가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물질의 풍요나 문명의 발달이 사람을 평안하게 해줄 수 있지만 행복하게는 해줄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살을 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지막 소망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가장 큰 희망이 끊어졌거나 무너졌기에 자살을 택하는 것이다. 사업가가 사업을 더 이상 지탱할 희망이 끊어졌을 때, 돈을 최고로 알던 사람이 큰 돈을 잃었을 때, 대학 입학이 최고의 꿈이었던 자가 낙방했을 때, 명예를 최고로 여기던 사람이 명예를 손상 당했을 때 자살을 하는 것이다.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사람이 자살을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쇼펜하우워 같은 철학자는 ■■모든 인간은 자살하는 것이 당연하며 또한 지혜로운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모든 인간은 실제로 자살을 안 할 무슨 희망이 있는가? 더욱 한심한 것은 인간은 지금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지 않는가?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돼지가 자살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무 생각없이 사는 사람은 자살을 꿈에도 생각지 못하나, 인생을 조금만 깊이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자살을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자살을 할 수 없는 사람, 자살을 하면 안 되는 사람, 자살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있다. 아무리 환경이 나쁘고 큰 어려움과 실패가 있어도 자살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물질이나 문명이 가져다 줄 수 없는 참 행복과 참 기쁨이 있기 때문이요, 영원히 끊어지거나 무너질 수 없는 천국의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큰 일이 생겨도 천국의 소망은 변하는 게 아니고 마음속에 있는 예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망해봐야 천국이요, 영생이다. 아니 망할 수가 없는 자다. 오히려 희망도 없이 죽음과 무덤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자살하려는 사람을 말리는 것이 믿는 사람이 해야할 일이다.

 

모르는 것 세 가지

 

우리에게는 모르는 것이 세 가지 있다.

첫째, 아무리 지혜자라도 자기가 언제 죽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은 하루를 살면서도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도 부리고 다투기도 하게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늘 저녁에 신발을 벗고 내일 다시 신는다는 보장을 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그러므로 지혜있는 자는 시작보다는 항상 끝을 생각하며 살아간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전 7:4).

둘째, 당신의 죽음 후에 심판이 있다는 사실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심판이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죄의 값은 심판이다. 그것은 죄에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 당신의 진노의 형벌을 대신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하는 당신을 건지기 위해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주셨고 그가 당신의 모든 죄에 대한 심판을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셨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었고■■(히 9:28). 이것이 바로 예수의 사랑이요, 이 사랑을 의지함으로 죄사함 받고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친구가 나를 위해 차표를 내 주었다면 또 낼 필요가 없는 것처럼 이제 이 예수를 믿고 당신 속에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만 남은 것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환경이 좋은 사람은 책임도 크다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는 감정과 지식과 의지를 주어 매사에 무엇을 하든지 지식을 가지고 자기 감정으로 자기 의지로 행동하도록 하게 했다. 그러므로 그 행동과 삶을 다른 것이나 타인에게 책임을 미룰 수가 없는 것이다. 자신의 행동에는 자신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짐승과 다르게 인간만은 죽은 후에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살게 하신 만큼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았는지 심판하신다.

특히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주시면서 살게 하셨다. 건강, 돈, 지능, 재능을 주어서 그것으로 인격을 가지고 잘 사용하면서 살도록 하셨다. 어떤 사람에게는 남다른 건강을 주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남달리 많은 돈을 주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뛰어난 지능과 재능을 주었다.

인격을 가지고 즉 지식, 감정, 의지를 가지고 그 주신 것들을 잘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드리는 것이 인생을 바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애자보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책임이 큰 것이요,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책임이 큰 것이며, 무식하고 재주가 없는 사람보다 똑똑하고 재주가 많은 사람은 책임이 큰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책임이 크고 심판 또한 크다는 것을 모르고 더 많이 갖고 더 좋은 환경만 바라고 살아가고 있다.

많이 가진 부자, 지식인, 권세자, 유명한 사람은 인생에 있어 책임이 큰 사람이요 심판이 큰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성경은 많이 가지려고 하지 말고 주신 것을 감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웃의 죽어가는 영혼을 위해 사용하라고 하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귀에게 홀려서 많이, 크게, 좋게 되는 것만 바라고 그만큼 책임과 심판이 크다는 것을 모르고 산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면 이 깊은 뜻을 알게 된다. 예수를 진짜 만나면 돈, 권세, 명예를 다스리며 감사로 살게 된다.

 

왜 예수를 믿어야 사나?

 

인간은 하나님께서 사랑을 가지고 만드셨다. 짐승하고 다르게 생각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영혼을 주셨다.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라고 주신 지능을 자기 욕심을 위해 사용하고 죄를 짓는데 사용하여 결국 하나님을 떠나고 말았다. 바로 쫓겨난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자기 마음대로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고 있다. 엔진 고장을 일으킨 배가 물결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세상 조류, 풍속을 따라서 먹고 마시는 것, 남보다 좀 더 잘 살고 출세하는 것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암초에 부딪쳐 바다 속에 침몰하는 것처럼 망할 것인데도 욕심을 위해 다투고 싸우며 살아가고 있다.

가장 큰 죄, 악한 죄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을 만드신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떠난 것이요, 자기 생각대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다. 얼마나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습게 여기면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대로 사는 것인가? 그러므로 인간은 100년도 못 살고 죽게 되고 죽은 후에는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누구도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생각대로 사는 악한 죄를 품고 결국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착하고 좋은 일을 많이 했다고 할지라도 자기 생각,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요, 우습게 여기는 것으로 결국 지옥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지옥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우리 인간을 구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죄 없으신 그의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 주셨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대신 잔인한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시고 지옥의 형벌을 받으시게 하신 것이다.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형벌을 당하신 예수를 믿게 되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길이요, 생명이시다. 죄와 죽음과 형벌의 문제를 해결받는 길은 오직 예수를 믿는 길 뿐인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다.

예수를 믿어야 산다. 예수를 …….

 

당신도 오늘 죽을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잊어버리고 산다. 누구든지 반드시 죽게 되는 데 그런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현실에만 매달려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가 가까운 사람이 죽게 되면 그때서야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숙연하게 인생을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곧, 죽음을 잊어버리고 욕심을 이루기 위해 달려간다. 마치 자신은 죽음과 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인 것처럼 열심히 살아간다. 그러다가 어느날 예고없이 찾아오는 죽음 앞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게 된다.

누구든지 오늘 죽을 수 있다. 죽음은 인간의 의지대로 피하거나 막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위대하다고 하는 권력자도, 영웅도, 비상한 머리를 자랑하는 박사도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요,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생각없이 사는 사람은 죽음을 전혀 생각지 않고 그저 욕심과 본능적 쾌락과 즐거움을 소유하려고 애쓰다 죽는 것이다. 생각이 깊은 사람은 죽음을 깊이 생각해 보다가 해결책이 전혀 없다는 결론을 자신의 머리로 판단하고 죽음을 고의로 생각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목표를 정하고 살다가 죽어 간다.

당신도 오늘 죽을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이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죽음은 모든 욕심, 야망, 행복을 송두리째 빼앗아 땅 속에 묻어 버린다.

당신도 오늘 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죽음을 해결해야 되지 않는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고 급하지 않은가? 모든 것을 송두리째 땅 속에 묻어 버리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되지 않는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인간의 머리로 해결할 수 없는 죽음의 문제를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 값으로 형벌을 받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그 분을 믿는 자는 죽어도 천국에 가고 살아서 믿는 자는 천국을 누리다가 천국에 간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음을 이기고 소망을 바라보며 힘있게 산다.

당신도 오늘 죽을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주 예수를 믿으라!

 

지옥 불벼락의 피뢰침

 

하늘에서 우뢰와 함께 벼락이 떨어져 변압기가 타버려 정전이 되고 암흑 세상이 되거나 공장이 멎어 버리는 일은 도시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시골에서는 큰 나무들이 부러지고 타 버리거나 농부가 시커멓게 타 죽기도 하는 일들이 발생한다.

아주 옛날에는 벼락을 막을 길이 없고 피할 길이 없어 속수무책으로 많은 사람이 타 죽었고 큰 재산 피해도 감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므로 벼락을 피하기 위해 피뢰침이라는 것을 만들게 되었다. 높은 빌딩에 피뢰침을 설치하여 벼락을 끌어 들여 땅 속으로 들어가게 하므로 피뢰침이 있는 주변에는 아무 피해도 당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벼락의 무서운 위력으로 공포를 느끼며 두려워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기에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신도 모르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 많고 포악한 네로 황제는 천둥과 벼락에 놀라 침대 밑에 들어가 벌벌 떨므로 시종들의 비웃음을 샀다고 한다.

천둥과 벼락이 무섭지만 하나님을 떠나 자기의 뜻과 생각대로 사는 모든 인간에게 예외 없이 내려치시는 하나님의 지옥불의 심판, 지옥불의 벼락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영원한 고통과 괴로움을 주는 무서운 것이다. 영원히 계속되는 유황불 속에 떨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짐승이 아닌 영혼을 가진 인격체로서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된다. 그것은 과학으로도, 도덕으로도 막을 수 없고 선행과, 돈으로 피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 지옥 불벼락에서 피할 수 있는 영혼의 피뢰침을 주셨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죄를 죄 없으신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여 모든 형벌과 지옥 벼락을 대신 당하게 하신 것이다.

지옥의 벼락을 대신 당하신 예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믿고 그 안에 가면, 우리는 죄를 용서 받고 영생을 얻게 된다. 지옥 불벼락의 피뢰침이 되시는 예수님을 믿어 보라. 지옥 불벼락을 피할 길은 예수 피뢰침뿐이다.

 

나의 죽음, 세상의 끝, 아무도 모른다

 

얼마전까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유별나게 큰 소리로 외쳐대는 휴거 종말론 전도자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 휴거 종말론 자들로 말미암아 가출, 학업 중단, 이혼하는 자들이 속출하여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었었다.

이런 현상은 세상 사람들로 모든 종교인을 이상한 눈으로 보게 하고 더우기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확실히 믿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도하는 기독교인들까지 아예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정상적인 교회에 출석하여 성실한 생활을 하는 자녀나 부인까지 교회 출석을 아예 못하게 하는 일까지 생기고 있으니 이 모두가 사탄의 역사가 아닌가? 성경 말씀에는 생명이 끊어지는 개인적 종말이나, 세상이 끝나는 우주적 종말이 언제인지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다. 자기가 죽는 날짜가 언제인지 모르는 게 인간에게 유익하고, 세상이 끝나는 날이 언제인지 모르는 게 사회적으로 유익하기 때문에 모르게 하신 것이다.

인간들 중에는 자기의 죽음에 대해서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고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에만 전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극단적으로 종말에 대해서 과민하게 반응하며 날짜를 안다고 큰 소리치며 사회를 혼란케 하는 무리가 있으니 대조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성경 말씀대로 나의 죽음과 세상 끝이 언제올지 모르는 것이니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알려고 하는 것은 월권이요,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자신의 죽음과 세상의 끝은 반드시 있기 때문에 세상 정욕과 쾌락과 자기 욕심에만 전념하지 말고 인생의 본래 목적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반드시 찾아오는 자기의 죽음, 또 세상의 끝, 죽음 후에 하나님 앞에서 받는 심판에 대비하여 이 세상에서 잠깐 사는동안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에게 헌신하며 사는 것이다. 맹목적으로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며 살다가 주 앞에 설 때 칭찬을 받자.

 

죄가 있는 자는 지옥간다

 

죄가 있느냐고 물어보면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대답한다. 거의 모든 사람이 죄가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죄를 범하며 살 뿐 아니라 죄를 범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죄인이기에 죄를 안 지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린 아기는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젖을 깨물고 신경질과 앙탈을 부리고 질투를 한다. 나면서부터 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죄의 뿌리인 원죄를 가진 인간이기에 모든 인간은 죄인이요, 아울러 태어난 순간부터 죄를 지으며 살기에 죄인인 것이다.

사람은 짐승이 아니고 인격을 가진 존재이기에 자기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 왜냐하면 죽은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를 조금도 그냥 넘길 수 없는 정결하시고 거룩하신 분이기에 인간은 죄값으로 심판을 받아 마귀를 위해 만든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작든 크든 죄있는 자는 예외 없이 지옥에 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왕의 명령을 어겨도 능지처참을 당하는 데 하물며 하나님께 죄를 지은 인간이 지옥에 가지 않겠는가? 영원히 고통당하는 불 못, 구더기도 죽지 않고 고통만 영원히 계속되는 유황불 못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모든 인간들은 눈 앞에 있는 욕심과 즐거움 때문에 지옥의 낭떠러지를 모르고 눈 뜬 소경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박사, 부자, 권력자가 되도 결국 지옥불에 떨어지는 것이 인간의 운명인데도 태평하게 살고 있는 것은 제 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살길을 만들어 놓으셨다. 인간의 모든 죄 값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형벌을 당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마음에 받아들이면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가게 되는 것이다. 오직 사는 길은 내 대신 심판을 당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당신의 마지막 종착지는?

 

기어 가거나, 굴러 가거나, 걸어 가거나, 뛰어 가거나, 날아 가거나 어떤 형태든지 마지막 목적지가 있다. 배의 목적지, 버스의 목적지, 기차의 목적지, 비행기의 목적지가 있다는 말이다. 사람이 걸어 갈 때나 뛰어 갈 때 반드시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학교를 향해 가는 사람, 병원에 가는 사람이 있다. 직장의 일을 끝내고 편안히 쉴 수 있는 자기 집으로 가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인생이란 열차도 반드시 목적지가 있지 않겠는가? 자신이 알고 있든지 모르든지 인생의 마지막 목적지를 향해 세월이라는 열차를 타고 지금도 가고 있다. 모를 뿐 아니라 생각도 않고 살아 간다. 인생의 마지막 목적지가 어디냐고 질문을 하면 그때 가서 생각을 하면서 한참 후에 대답하기를 ■■무덤■■이라고 한다. 인생의 목적지가 무덤이라고 할 때 인생이 얼마나 비참한가? 공부를 하는 이유도 결국 무덤이라는 목적지를 위해서 인가? 직장 생활을 하는 것도 결국 죽음을 위해 무덤이라는 목적지를 향해서 가는 과정이라는 말인가? 돈을 벌기 위해 거짓과 사기를 일삼는 것도 결국 무덤 속을 향해 가는 과정인 것이고, 우리의 모든 움직임도 결국 무덤 속을 향해 가는 한 과정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생각해 봐야 한다. 과연 인간의 마지막 목적지가 죽음과 함께 무덤 속인가? 그렇다면 인간만큼 불쌍한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 돼지는 고민도 없이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만 사람은 얼마나 고난이, 걱정이 많은가? 사람은 짐승이 아니기에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무덤이 마지막 목적지가 아니다. 짐승은 죽고 끝나지만 사람은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위로 올라간다. 반드시 내세가 있다. 천국과 지옥이 있기 때문에 인생의 마지막 목적지가 무덤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을 끝까지 거부하고 제멋대로 자기 생각대로 사는 사람의 마지막 목적지는 지옥이다. 반대로 자기가 죄인이요, 피조물임을 인정하고 예수를 영접한 사람의 마지막 목적지는 천국인 것이다.

당신의 마지막 목적지는 어디인가? 천국인가? 아니면 지옥인가?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서양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사람은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짐승과 다른 것 중에 하나는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돼지나 소는 100년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아무데서나 먹고 배설하고 또 그곳에서 누워 자는 생활을 계속한다.

그러나 인간은 세월이 갈수록 집과 옷, 입는 것과 먹는 것이 발전하고 여러 가지 편리함과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 가며 앞으로도 발전은 계속될 것이다. 이는 사람에게만 있는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의 결과이다. 짐승은 본능만 의식할 수 있기에 본능 충족을 위해서만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생각이 있는 영적인 존재이기에 본능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 고민하며 심지어 자살까지 하게 된다. 짐승은 자살이라는 게 없지만 사람은 생각이 있기에 바라는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끊어지면 자살을 한다.

그러나 인간이 가장 근본적으로 생각할 것이 무엇인가? 눈 앞의 이익과 본능의 만족이 아니다. 자신이 태어난 목적, 인간의 죽음과 죽음 후의 세계와 영생 문제가 가장 급하고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그러나 박사도, 교수도, 지능 지수가 높은 사람도 이것을 깊이 생각지 않고 살다가 죽는다. 왜 이런 가장 귀하고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이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살다가 죽고 마는가? 이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근본적으로 영혼이 죽어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를 생각할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악한 영, 귀신의 영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본능적인 문제와 이 세상 욕심의 문제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본능과 이 세상 욕심만을 생각하다 죽는 인간을 구하시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를 믿게 되면 죽은 영혼이 살아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되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살아나 인생의 목적을 깨닫고 영생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게 되면 근본적으로 삶이 변화되고 기쁨과 감사로 확실한 인생을 살게 된다. 지금이 바로 결단을 내릴 때가 아닌가?

 

/세계제일교회 카페에서 퍼옴

 

 

 

출처 : 브니엘
글쓴이 : noemisuh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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