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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존스와 구약 전도설교의 중요성
이안 머레이(lain H. Murray)/서창원 역
1981년 로이드존스 목사가 세상을 떠난 이후 그의 목회사역에 관한 많은 글들이 발표되거나 논의되었다. 그가 했던 사역의 특성들은 비교적 잘 알려졌으며 또한 잘 이해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에 대한 기억은 강해설교의 실제, 교리적 기독교회복의 필요성, 에큐메니즘의 위험성 및 성령의 권능의 회복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한 인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일반적 인상은 사실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평가가 로이드 존스 목사 자신이 설교자로서의 제일 되는 자신의 소명의식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간과하기 때문이다.
Ⅰ. 로이드존스는 무엇보다도 '전도자'였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무엇보다 자신을 복음전도자로서 인식하였다. 그를 정말 잘 아는 사람들도 그를 복음전도자로 보았다. 사실 그의 설교 가운데 절반은 전도설교였음에도, 그가 한 설교의 극히 일부분만이 책으로 출판되었기에 복음전도자로서의 로이드 존스 목사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어떤 면에서는 출판인들이 이런 잘못된 인식들을 갖게 한 데 대한 비난의 일부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로이드 존스 목사를 전도자로 파악하지 못했던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현대 전도집회의 요소들에 대하여 반대한 것으로 알려진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러한 요소들에 동의하는 자들과 로이드 존스의 혹평에 대해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선생이지 전도자는 아니다”라고 비난하게 만들었다. 그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 있을 만큼 폭넓게 인식되어 있었다.
이 같은 견해를 가진 한대변인이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그의 복음전도에 대한 헌신을 물은 적이 있다: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마지막으로 전도집회를 가진 때가 언제죠?” 그의 대답은 “나는 매 주일마다 가집니다”였다. 이것은 농담 섞인 담변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신학생들에게 목회사역을 말하면서 로이드 존스 목사는 “매 주일마다 개교회에서 적어도 한번의 전도집회를 가져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며 촉구 합니다”라고 말하였다.1 그에게 주일 저녁예배는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예배였다. 그는 이 일을 그의 목회 초기인 1927년부터 은퇴한 1968년까지 계속했다.
일찍이 휫필드의 타버나클처럼 웨스트민스터 채플도 실로 영혼을 낚는 곳(soul-trab)이었다. 그러나 정반대의 의견이 일어난 것은 분명히 로이드 존스가 자신의 목회사역기간에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전혀 발표하지 않았던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실로 자신을 위하여 숫자를 세는 그 어떤 시도도 의도적으로 회피하였다. 그는 신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으로 그에게 나아오는 한 단계를 인위적으로 촉구하는 어떤 공개적 행동도 취할 수 없다고 굳게 확신했다.
II. 로이드존스와 전도설교
나는 무엇보다 먼저 복음전도 설교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과 이것은 설교의 한 독특한 유형임을 분명히 하고 싶다.
왜냐하면 오늘날 그의 메시지가 우선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청중이 누구인지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없이 강단에서 외쳐지는 메시지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스펄전 목사는 그가 쓴 목사 후보생들에게 주는 “영혼을 건지기 위한 설교들”이라는 글에서 이 같은 점을 경고하였다. 그는 “성령 하나님은 성경의 어떤 부분을 통해서도 영혼을 회심시킬 수 있으시다. 그러나 당신들이 알다시피 죄인들의 마음에 적절한 최선의 본문 말씀들이 성경 안에 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택한 본문이 그러한 본문이라면 당신들의 설교에서 사람들의 심령을 더욱 더 흔들어 놓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을 현대교회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애석한 일이다. 우리 사이에서 전도설교가 이미 믿는 자들에게 설교하는 것과는 다른, 믿지 않는 자들에게 설교하는 굉장히 효과적 설교법임을 널리 인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모든 설교에는 그런 공통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논리정연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훈계를 포함하며, 청중들을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인도해야한다. 그러나 준비된 설교가 성경적이라면, 설교자는 그 말씀이 회심자들이나 비회심자들을 도우시려는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한지 아닌지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도 설교자가 불신자들에게 설교할 때는 반드시 다른 접근방식을 사용해야 한다고 믿었다. 설교가 신자들을 겨냥한 것이라면, 청중들 가운데 말씀을 들으려는 어떤 기대감이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불신자들이나 회심치 않은 자들을 깨우고 주의를 집중시키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것도 기대할 수 없다. 어쩌면 전혀 메시지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이는 설교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고 무심히 앉아 있을 것이다. 비판적인 이야기에만 약간의 주의를 주는 이들도 있다. 우리는 마치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메시지를 준비해서는 안된다. 그들의 실제적인 관심도는 모두 다른데 있는 것이다.
전도설교는 그들이 있는 이 세상을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로이드 존스 목사는 설교자에게 다른 설교보다 전도설교를 준비하는 일에 더욱 세심한 주의를 요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도설교란 신자들을 향하여 설교하는 것보다 그 방향이 더욱 좁은 설교라는 점이다. 신자들을 겨냥한 설교는 신자들의 다양한 필요들을 다루어 줄 수 있다. 예를 들면 믿음, 사랑, 용기, 힘, 인내 등을 다룰 수 있다. 크리스천들은 폭넓은 교훈과 가르침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오직 한 가지만 필요하다. 그들은 죄책감이 필요하며, 겸손해져야하고, 자신의 옛 삶을 마감하는 자리로 이끌려 와야 한다. 모든 설교는 가르침 그 이상이어야 하지만 전도설교는 더욱 더 그렇다.
전도설교는 무엇보다 심령과 양심을 두들겨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설교는 실패인 것이다.
전도설교는 개인을 지목해야 하며, 지적을 해야 하고, 일깨워야한다. 죄인들을 깨우치는 어떤 경고가 있어야 한다. 청중들은 자신들이 직면하고 있는 영적 상태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직시하게 되어야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보면 이 설교의 초점은 “그들의 눈을 열어서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예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행 26:18)하는데 있다.
필자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로이드 존스 목사의 사역 가운데 전도설교 측면이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에 그의 전도설교사역은 특별한 비중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사역 가운데 구약설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다는 것은 어쩌면 놀랄 일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의 구약설교는 대부분 전도설교였다. 남부 웨일즈의 포르트 탈보트(Port Talbot)에서 한 그의 첫 목회사역(1927∼1938)을 살펴볼 때, 그가 한 설교본문의 3분의 1이 구약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는 그 비율이 약간 밑돌긴 했지만 430여 구약본문을 설교했던 것이다. 이 본문들은 구약전체에서 뽑은 것들이다.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로이드 존스 목사는 다른 여러 지역에서도 설교를 계속했고, 그럴 때마다 그는 여전히 구약성경을 본문으로 사용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943년에 그가 옥스퍼드에서 전도집회를 가졌을 때 그의 주된 본문은 예레미야 6장14∼16절이었다. 1953년에 프랑스에서 개최된 “개혁주의 신앙과 삶을 위한 국제회의”(International Congress for Reformed Faith and Action)에 초청되어 한 그의 설교는 사무엘상5장 1∼4절이었고. 제목은 “블레셋 신전 바닥에 엎어진 다곤 신상”이었다.
그가 했던 가장 거룩한 전도설교 가운데 하나는 1957년 카디프(Cardiff)에서 가진 공무원들을 위한 예배였다. 본문은 이사야22장 8~14절이었고, 12절 말씀인 “그 날에 만군의 주 여호와께서 명하사 통곡하며, 애호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을 설교한 것이었다.
또 그의 마지막 스코틀란드 여행에서와 그가 죽기 1년 전인 웨일즈 중부지역에서 했던 설교는 참으로 전도설교였으며 . 이것은 시편2편을 기초로 증거 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례들은 그가 구약을 통하여 복음을 전한 충분한 증거들인 것이다
Ill. 왜 구약 설교가 그토록 거절되고 있는가
그럼에도 19세기의 고등비평은 오늘날 목회자들로 하여금 구약을 복음전도적으로 사용하는 데 대하여 거의 침묵하도록 만들고 있다. 심지어 현대의 복음주의적인 교회들조차도 구약성경이 불신자들을 위한 진리의 말씀으로 사용되는 것을 거의 금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은 아담과 하와에 대하여 거의 말하려 하지 않으며, 노아홍수나 홍해를 건너는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변증적인 목적 외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으려는 유혹 앞에 놓여있다.
그러나 복음주의적인 교회조차도 구약성경을 거의 설교하지 않는 또 다른 주요한 이유들이 있다. 우리들은 한결같이 현상적이고 현대 세계와 관련된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현대인들의 삶의 모든 문제들은 이전 세대에서 느끼고 경험한 모든 것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고 느끼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케케묵고 딱딱한 옛날 것처럼 여겨지는 구약을 설교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4
그러나 이런 이유도 우리를 단념시키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복음주의자들이 내부적으로 “구약성경은 성도들과는 무관하며, 또 구약에는 은혜가 없다”는 등의 첫소리들에 의하여 집요한 공격을 받고 있는 점이다. 즉 그들은 구약 없이도 충분히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과 관련하여 한번은 로이드 존스 목사가 “복음주의자들이 무의식적으로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고 있는가”라는 설교를 했다. 그의 대지 중하나는 '지나치게 신 ․ 구약을 분리하는 것이다'였다. 그는 '구약이 현대인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느낌과 ‘오직 한 언약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실수' 에 대하여 설교했다. 또 그는 그러한 자세가 구약성경을 단순히 경건서적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고 지적하였다.
우리는 구약을 설교하지 않는 실제적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하여 구약의 특별한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그렇게 오랫동안 계시의 말씀이 주어졌는가? 왜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 이후, 구속의 역사를 위하여 이 세상에 그의 아들을 보내실 때까지 그토록 오랫동안 지체하셔야했는가?
구약성경은 인간이 오직 구세주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있는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그토록 상세히 그리고 긴 분량을 할애하여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구약은 죄의 광야에서 울부짖는 소리이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사40:3). 구약의 목적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다”(롬3:19)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실로 분명한 한 교훈을 얻어낼 수 있다. 사람들이 구약의 메시지를 모른다할지라도 기독교를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지혜롭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인간은 구약의 하나님이 창조주시며, 열방의 왕이시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다른 신이 아니라 바로 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분이심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B.B. 워필드는 “기독교를 어떻게 없애버릴 것인가”라는 글을 썼다.6 그 방법은 바로 이것이다: 성경으로부터 실제 사건들을 다 빼버리는 것이다. 역사적 서술들을 한쪽으로 밀어붙이고 무시하는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기독교의 필요성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W.G.T. 쉐드(Shedd)목사는 "기독교에서 경외심의 사용”이라는 설교문에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모든 위대한 종교적 대각성들은 대중들의 마음속에 신성에 대한 준엄하고도 무서운 모습들이 더욱 분명하게 인식될 때 시작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최고의 극치에 달한 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위한 경외심이 준비되는 것이다.
같은 주제를 가지고 로이드 존스 목사도 이렇게 기록했다: “구약성경에 주목해야하는 중요한 이유는 복음전도와 부흥의 전 주제 속에서 발생한다.”
IV. 로이드존스는 구약설교의 중요성을 어떻게 인식했는가
그럼 과연 로이드 존스 목사는 구약을 설교하는 일이 중요함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그 당시의 시대 상황 속에서 어떻게 로이드 존스는 그의 사역 초기부터 구약을 설교하는 일이 중요함을 알았을까?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설교 스타일에서부터 배웠던 것일까? 분명히 말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그가 성장한 교단과 그가 일찌기 성찬 참예자가 된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면 신자로 간주하던 교회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선 무엇보다 로이드 존스 그 자신이 “그것은 나의 상태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아니다. 내게 필요했던 것은 죄에 대한 자각과 나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설교였으며, 회개의 자리에 이르게 하며 그리고 중생에 대하여 말해주는 설교였다. 그러나 나는 그런 설교를 들은 적이 없다. 우리가 들은 설교는 언제나 우리 모두가 다 크리스천이라는 가정하에 들은 설교뿐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젊은 시절에 그가 들었던 구약설교는 감상적이고 도덕적인 설교에 불과했다. 그가 했던 설교는 그가 들었던 설교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읽은 옛날서적이나 현대의 책들로부터 전도설교에 구약을 활용하는데 대한 통찰력을 얻었는가? 1925년 로이드 존스 목사가 자신의 소명의식에 대하여 씨름하고 있을 때 O.T.알리스(Allis)박사가 “프린스톤 신학 리뷰”에 기고한 두 편의 논문이 있었다.
알리스 박사는 “구약의 강조점과 현대사상”이라는 논고에서 구약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구약성경에 대한 참으로 놀랄만한 일은 구약이 심지어 성도라고 자처하는 자들에 의해서도 무시당하고 또는 부인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현실은 말씀의 사역자들이 현대인들의 신앙과 삶속에서 상실된 이러한 중요한 가르침을 제자리에 가져다놓기 위해 전심전력해야 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현대인들은 과거에 앞서간 수많은 사람들처럼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자각해야 될 사람들인 것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알리스 박사가 쓴 이 두 편의 논문을 읽고서 영향을 받았던 것인가? 다시 말하지만 그것도 분명히 아니다. 그 시점에 그가 “프린스톤 신학리뷰”를 읽었다든지, 또는 그 잡지에 대하여 아는 것은 전혀 없었다. 더 나아가서 그는 그가 가졌던 그 확신에 관한 어떤 글도 읽은 적이 없었다. 장차 그의 사역에서 책들이 주요한 도구가 된 것은 틀림없지만, 필자는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서 그에게 도움을 준 책은 전혀 없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로이드 존스 목사가 구약이 불신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임을 배운 출처는 전혀 다른 것에 있으며, 그 출처가 무엇인지는 명백하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그는 1920년대 초 런던에서 구약의 역사가 반복되고 있음을 보았다.
그 당시에 그는 의학계에서 아주 장래가 촉망되는 탁월한 인물로 막 진출하려는 기로에 서 있었다. 그는 당시에 이미 의료계의 저명인사들, 상류층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교제하였다. 그의 상사인 토마스 호더경을 통해서 그는 호더 경의 진료기록과 왕들이나 수상들에 대한 상류층의 대화들을 접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과 정보들이 그에게 무엇을 나타내 주었는가?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묘사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인간의 본성이 그대로 있었다 - 교만, 거만함, 불행, 탐욕, 욕망 및 불만족 등. 이른바 최고 엘리트들의 삶 속에 그와 같은 모습들이 있음을 본 로이드 존스는 자신의 경험 속에 구약성경의 증거가 아주 강력히 다가왔다.
자신의 마음 역시 모든 것들보다 더 위선적이고 참으로 악한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한 어리석은 존재였다. 그는 '광야에서 홀로 방황하는' 정처 없는 불신자였고, '거처할 곳을 찾지 못한'자였다. 이제 그는 고통 중에 그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셨고, 그를 어둠에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인도하여 주셨다.
우리는 로이드 존스 목사의 회심에 관하여 아는바가 별로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중생의 체험과 목회사역에로의 부름이 동시에 일어난 것임을 안다. 그는 자신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발견하자마자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도 본 것이다.
그가 의사의 길에서 즉시 교회 강단으로 나아갔을 때 구약성경이 기록된 이래 인간의 본성은 전혀 변화된 것이 없음이 그에게 분명히 부각되었다. 인간의 속성은 다른 이름으로 여전히 그의 포르트 탈보트(Port Talbot)마을에 기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을 하나의 거울처럼 부여잡아야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본모습을 보고 구세주가 필요함을 발견해야 했다. 로이드 존스 목사가 분명한 확신과 권위를 가지고 구약을 설교한 것은 그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얻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을 하나의 거울처럼 부여잡아야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본모습을 보고 구세주가 필요함을 발견해야 했다. 로이드 존스 목사가 분명한 확신과 권위를 가지고 구약을 설교한 것은 그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얻은 것이었다.
강단에서 자신에 대하여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 것이 로이드 존스 목사의 전형적인 설교관이었다. 포르트 탈보트에서 한 그의 구약 전도설교들을 보면 전혀 개인적인 언급이 없으며, 본문의 특성들과 자신의 삶 사이에 병행하는 그 어떤 요소도 찾아낼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기 전에 먼저 본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 분명하다.
이 같은 습관은 1960년 말에 그가 설교한 두 편의 전도설교로부터 그의 생애 동안 이루어진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의 주제는 열왕기하 5장 1~l4절에 기록된 시리아 군대장관인 나아만이었다.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이며… 큰 용사였으나 문둥병자”였다. 그것은 로이드 존스가 어떻게 설교했는가를 예기할 수 있는 본문이다.
그는 인간의 경험 속에 언제나 '그러나'가 있음을 입증함으로 설교를 시작하였다. 인간의 삶 속에는 고통이 있으며 불만족과 아픈 상처가 있는 것이다. 온전한 인생은 하나도 없다. 행복과 평강이 망가지지 않고 지속되는 인생은 하나도 없다. 죄는 우주적인 문제거리이며, 가장 위대하고 성공적인 사람들조차도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다. 죄는 인간이 치료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 두 왕이 있다. 시리아 왕과 이스라엘 왕이 있다. 둘 다 나아나만의 질병을 치료할 대책을 찾을 수 있는 역량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문제는 그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힘겨운 것이었다. 너무나 미묘한 것이었다. 그 질병은 너무나 불결한 것이었다. 약물들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인간의 불행 한가운데에 한 이스라엘의 하녀로부터 복된 소식이 날아왔다. 즉 사마리아에 엘리사라는 한 선지자가 있는데 그를 통해서 하나님은 심지어 문둥병조차도 고칠 수 있으심을 안 이 하녀는 그 소식을 전하여 주었다.
그래서 나아만은 엘리사 선지자에게 나아왔으나 그를 홀대하는 선지자에 의하여 몹시 화가 치밀었다. 나아만은 선지자가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선지자가 제안하는 겸손한 측면에서는 치유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의 두 번째 설교에서 가장 경험적이고 번뜩이는 설교자가 된 것이다. 나아만은 자신이 특별한 대우를 받지 못한 점에 대하여 기분을 잡쳤던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오늘 모인 여러분들 중에도 그러한 자리에 있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복음이 인간을 다루는 방식을 아주 싫어한다. 복음이 인간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거나 존중해 주지 않는 것에 대하여 몹시 불쾌해 한다.
'나아만은 다른 문둥병자와 마찬가지로 문둥병자였다. 그런데 어째서 그가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 선지자의 메시지가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에 그에게 제공된 치료를 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나아만을 보십시오. 여기에 자신의 힘으로는 전혀 치료받을 수 없는 문둥병자가 있습니다. 의사도 현인들도, 점성술자들도, 그를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의 임금도, 이스라엘의 왕도 그를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어리석은 사람을 보십시오. 자신이 문둥병자로서 절망적이고 전혀 소망이 없는 자이며 따라서 그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줄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음에도, 엘리사 선지자가 한 말을 비판하고 논쟁을 삼고 반대와 항의를 퍼붓는 어리석은 자인 것입니다. 그가 어리석고 미친 녀석이라는 것 외에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로이드 존스는 그 점을 나아만과 불신자 청중들에게 적용함으로써 설교를 더 분명히 진전시켰다. 그는 모든 인간들이 불쌍하기 그지없는 실패자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구원의 메시지를 비판하는 어리석음을 지닌 자들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같은 몇 말씀을 더 전한 후에 로이드 존스는 전혀 뜻밖의 개인적인 언급을 간단히 하였다. “여러분들은 제가 이 나아만에 대하여 너무 가혹히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나는 그를 잘 이해하기 때문에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저도 여러분들이 보다시피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나아만의 입장에 있었습니다.”
이 설교 말씀에서 우리는 구약성경으로부터 그의 전도설교에 대한 열쇠를 볼 수 있다. 그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존 번연처럼 로이드 존스 목사는 ‘빈틈없이 그가 느끼는 것’을 설교한 것이다.
V. 무엇이 구약 전도설교의 주요 강조점이었나
로이드 존스 목사가 구약에 대한 전도설교를 왜 강조했는지에 대한 중요한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1. 성경은 그 특성상 죄를 들추어 낸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구약에 대한 도덕적 설교는 죄를, 그 증상이나 부차적인 문제의 차원에서 취급하기 때문에 ‘참된 복음적 설교’와 차이가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죄의 본질과 죄의 진정한 심각성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잘못된 태도 차원에서 설명될 때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을 향한 반항이요 반역이다. 성경은 인간을 참 하나님을 대적하는 진노의 상태에 있는 존재로 말하고 있다.
“진실로 사람의 노는 장차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시 76:10)라는 말씀을 설교하면서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여 등을 돌렸습니다. 인간은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으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 삶을 영위하려고 노력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간섭하고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드는 존재로 간주합니다… 이것이 시편 기자가 '인간의 노'라는 말을 사용한 의미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이 같은 이야기를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 역사를 이해하는 주요한 열쇠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싸우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하게 하는 것을 거절하며, 거만하기 그지 없고, 하나님의 뜻과는 정확하게 반대되는 행동을 자행하는 교만한 자들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과 죄 가운데 있는 인간들 사이의 투쟁의 역사입니다.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전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인간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불신자 청중들과의 접촉점을 위해 로이스 존스 목사는 종종 세상살이에서 일어나는 인생의 다양한 문제들을 언급하면서 설교를 시작했다. 그는 이 사회 속에 뿌리 깊은 어떤 오류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그러한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인간의 불행은 자신이 가진 문제의 참된 속성에 대하여 너무도 모른 채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의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님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없는 것이다.
1947년 전 서구사회가 원자폭탄 문제와 전쟁도발의 가능성에 대하여 야단법석이 되었을 때, 로이드 존스 목사는 브니엘에서 야곱의 회심에 대하여 설교하였다. 형 에서의 진노를 받기에 합당하게 행동했던 야곱이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형을 두려워하며 가나안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그는 에서의 위협을 보며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았다. 에서의 사람400명이 몰려오는 것을 본 그는 그가 원하는 대로 모종의 조치를 다양하게 취하였다. 그러나 야곱은 보다 근본적인 무엇을 더 많이 보아야만했다 :
야곱은 브니엘에서 자신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았습니다. 보다 엄숙히 말하자면 그의 문제는 에서와의 문제가 아니라, 그와 하나님과의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근본적인 관심은 "내가 어떻게 에서를 달랠 수 있을까"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의 사랑하는 야곱아! 네게 필요한 것은 형 에서와의 화해가 아니라 나와 화목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바로 이것이 현대인들의 문제의 핵심이요 현대사회의 고통거리의 본질이라고 봅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지음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다가와, 하나님을 떠나서 그리고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는 인생은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보지 못한채 변장해서 사는 삶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복음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욕되게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원자폭탄의 위험이 있습니다. 저는 위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원자폭탄에 의하여 단 몇 년 사이에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살해되는 것보다 더 크고 더욱 중요한 문제는, 나의 영원한 생명이 지옥으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영혼이 지옥에서 고통과 슬픔 속에서 보내게 됨은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 때문입니다. 에서나 원자폭탄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당신 자신과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나의 불멸의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로이드 존스 목사의 출발점이다. 단 한번의 역사적인 타락에 의하여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소원(疏遠)해진 것이다. 이 강조점이 로이드 존스 목사의 전사역을 통해서 정확히 흐르고 있다.
그는 그의 청중들을 계속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직면하도록 이끌었다: “당신은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자세가 가진 문제를 직시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나는 당신이 지금 무엇 때문에 고통 중에 있는지를 말씀드립니다. 모든 질병과 고통의 근원은 바로 이것입니다. 유일한 소망은 그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요 직시하는 것이며, 전적으로 애통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뿐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가 이 같은 출발점으로부터 계속적으로 만든 두 가지 추론이 있다: "첫째, 죄가 우선적으로 행위의 문제인 것처럼 설교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죄성은 죄악들보다 더 중대한 문제이다. 둘째, 인간은 자신에 대한 진실을 보지 않는 한 바른 정신으로 복음에 도달할 수 없다. 참된 자의식이 없이도 인간은 탐구하고 논의하며 사고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모든 것들이 전혀 선하게 역사하지 않는다. 진정한 필요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이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에게 복종하는 자리에 이르지 않는 한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는 것이다."
필자는 로이드 존스 목사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언급한 수없이 많은 사례들 중 한 가지를 소개한다. 그의 본문은 불타는 가시덤불 앞에 선 모세의 이야기였다. 모세는 가시덤불이 불에 타고 있으나 타서 없어져 버리지 않는 초자연적 현상에 직면 했을 때, 목자로서 그의 일상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일종의 호기심을 가지고 그 광경을 보려고 다가왔을 때 그는 하나님의 경고를 접하게 되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 광경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하나님은 모세를 가시덤불 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부르시는 하나님께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답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호기심을 포기하라. 여기로 가까이 나오지 말라. 너의 신발을 벗어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곳이기 때문이니라.' 즉 '모세야 연구하고 점검하려는 자세를 떨쳐버려라, 사물을 떨쳐버려라, 너의 신발을 벗어라. 네 자신을 복종시키고, 네가 있는 곳에 머물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성경은 하나님 없는 삶이 절대적으로 황폐함을 보여준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복음 자체가 진정한 전도설교에 있어서 반드시 중심 주제여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인간으로 하여금 복음의 필요성을 보도록 이끄는 것이 중심 주제여야만 한다고 확신했다. 이것은 구약성경 역사가 보여주는 목적 대부분이 그와 같음을 정확히 본 것이었다. 구약성경은 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인간은 유약한 존재이며 황폐된 피조물로서, 그의 내적 열정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도저히 만족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성령이 바로 이것을 성경 안에서 입증하고 계시므로, 설교자의 소명이란 이 같은 사실을 증명하도록 부름 받은 것임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구약의 다양한 특성들을 현대 상황으로 유입하는 데 결코 실패해보지 않았다. 예를 들면 열왕기상 1장41절의 아도니야에 대한 설교를 했을 때 “아도니야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겪는 삶과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그의 전형적인 사고방법이었다.
때때로 그는 구약에서 열국들의 역사를 취하여 동일한 교훈을 주곤 하였다.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다를 수가 없는 것이다. 애굽의 권능과 가나안 족속들의 힘, 바벨론 제국의 위용 등 모든 위대한 제국들의 힘은 영구한 것이 아니며 얼마 되지 않아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자체도 최고의 특권을 지니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주제에 대하여 남부 웨일즈에서 그의 목회 초기에 한 설교를 보면 런던에서 한 목회 후반기의 설교와 단한가지 차이가 있을뿐이다. 후반기 목회사역에서 로이드 존스 목사는 현대 불신자들의 증거들을 더욱 더 많이 사용하여, 모든 인간의 기대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입증한 것이다.
그는 구약성경이 현대세계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라고 믿는 세대의 흐름과는 전적으로 의견을 달리했다.
1961년 러시아의 우주비행사인 마조 유리 가가린이 최초로 우주여행을 한 사건이 온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을 때, 그가 했던 기억할 만한 설교는 욥기 38장이었다: "지혜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지식의 처소는 어디인가?…그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보라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이니라, 악에서 떠나는 것이 지식이니라”고하였다.
청중들의 흥미를 더욱 진전시키기 위해 그는 수세기에 걸쳐 인류는 더 많은 정보를 축적했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그리고 러시아 우주 비행사의 모험을 언급하면서 말하기를 “욥은 한번도 가가린 장군의 말을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지혜란 단순히 지식이나 정보하고는 다른 차원의 것임을 확증해 나갔다. 현대인의 모든 지식들이 산출해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만일 인간이 뉴욕에 도착해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모른다면, 런던에서 뉴욕까지 5시간만에 간다는 사실이 무슨 유익이 있는가? 현대인의 인간론은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입고 성관계를 즐기는 동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베개 위에 내 머리를 어떻게 올려놓고 잠을 잘 것이며 평강 가운데 지낼 수 있을까? 갑자기 죽어도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 미지의 영원한 세계를 어떻게 들여다 볼 수 있을까?'등의 질문은 지혜의 한 측면들이다.
그는 긴 설교시간의 마지막에 와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무지를 입증하면서 다음과 같은 확실한 결론으로 청중들의 입을 다물게 하였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이니라.’ 이 말씀은 무엇을 뜻합니까?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이 말씀의 의미는 아주 간단합니다. 여러분은 온 마음을 기울여서, 그리고 절대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길에 복종하십시오. 하나님을 떠나서는 지혜가 없습니다. 돈으로 지혜를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값없이 지혜를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3. 이 모든 것들 위에 구약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책이다
구약성경에 대한 현대 신학자들의 견해와 그의 생각이 다른 모습은 이 부분에서 더 명확히 드러난다. 현대 신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구약은 인간의 종교적 발전에 대한 이야기, 유대인들의 종교적 발전에 대한 기록에 불과하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런 견해들은 확실히 무지의 증거라고 믿었다. 성경은 계시이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욥 11:7)란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주강력하다.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 년수를 계산할 수 없느니라"(욥36:26).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셨다. 그의 말씀인 성경 속에서 하나님 자신과 자신의 뜻을 나타내셨다.
설교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러한 모습과 직면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 개개인을 지으시고 아시는 하나님. 그러면서도 그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붙드시고 계시는 하나님, 우리의 모든 호흡이 그의 손안에 있는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 우리가 잃어버린 형상을 지니고 장차 우리의 모든 행한 일대로 판단하실 우리의 거룩한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보게 하는 것이 설교의 목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과 결단들 위에 좌정하고 계신 전능자로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시오 그분의 의지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마10:28)이라는 사실 위에서 두려워하라고 가르치셨다.
현대 종교인들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경고와 위협으로 다가오는 메시지에 대하여 무시하도록 만들어가고 있다. 우리가 도의적으로 마땅히 받으셔야 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는다면 우리는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없다.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의 진노가 명확히 증거되지 않는 곳에서는 복음적인 참된 전도설교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한 설교는 어떤 것이든지 성경적이 아니다. “구약성경에서만 거의 20개의 단어로 하나님의 진노를 묘사하고 있다. 이 단어들의 다양한 형태로 구약에서만 580회 사용되었다.…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개념을 성경으로부터 제거해 버린다면 성경에 남는 것은 아주 적을 것이다.”
이 진리를 사람들에게 숨기면 하나님과 인간의 현재 상태가 잘못되어 있고, 만일 우리가 멸망되지 않기를 원한다면 이 관계개선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숨기는 것이 되고 만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잘못된 견해는 필연적으로 성경이 계시한 것을 잘못 알게 만든다. 따라서 인간은 구약을 단지 인간의 윤리 도덕적 규범으로, 우리의 도덕적 수고와 노력을 위한 규범서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구속역사 가운데 행하신 하나님의 일에 대한 신적 증거이다. 따라서 로이드 존스 목사는 구약을 설교하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복음과 복음의 모든 증거들이 우선적으로 사람편에서 무엇인가를 행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편에서 행하신 일이라는 사실을 직시하는데 실패하면 복음을 이해하는 일은 전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인간은 구원의 계획 속에서 행할 많은 무엇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이 먼저 행동하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행동할 수 있도록 하신 후에 뭔가를 시작할 수 있다. 성경은 무엇보다도 인류의 구원 역사 가운데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도록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 선포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선언하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에게 있어서 구약에 있는 심판에 관한 기록을 거절한다는 것은 구속적 사랑에 대한 참된 영광을 억압하는 것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창세기 3장 이후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하에 심판으로부터 구원의 역사를 잘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의 약속된 대속자가 있다. 대속제물과 '피 뿌림' 등은 엄청난 값을 지불하면서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목되는 수단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삭을 구원시키신 방법은 우리 모두를 구원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내 아들아 하나님이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22:8)
이 주제에 관하여 20세기 초에 로푸트하우스(Lofthouse)교수는 이렇게 기록했다 “요즈음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생제사적 가르침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 ‘구원의 계획’에 대한 복음적인 가르침은 귀찮고 부자연스러운 것 일 뿐이다.”
물론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에 대하여 반박하였다. 죄책감이 없는 인간은 복음에 무관심하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쓸데없으나 병든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한 것이다(마9:12).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참된 모습이 어떠한지를 바르게 인식할 때 비로소 인간의 상태는 변한다. 인간 스스로가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할 때, 그리고 나아만장군 처럼 문둥병이 자신을 파멸에 빠뜨리고 있다고 느낄 때 상황은 변하게 될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알게 해야 한다. 의로우시고 자비를 베풀기를 즐겨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야말로 영생을 얻는 길임을 알려야한다. 나아만 장군에 대한 로이드 존스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자:
오늘 밤에 이 강단에서 제가 전하고 싶은 것은 교회의 임무가 세상이 사람들과 더불어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인식하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증거 하는 것입니다. 전능한 힘이 있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권능이 있습니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라는 이 메시지에는 역동적인 힘이 있습니다. 죄를 깨끗이 하는 비결을 말씀합니다. 인간을 정결케 함이 있습니다. 죄 사함이 있습니다. 인간의 더럽혀진 피부를 원래의 피부로 변경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간청합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당신을 치료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의 피를 의지하십시오. 나아만이 경험한 것을 당신도 똑같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순간, 오늘밤, 이 예배시간에 하나님께 당신의 죄를 고백하십시오. 당신의 무능함을 고백하십시오. 당신의 교만과 어리석음을 고백하십시오. 주님에게 말하십시오. "나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당신의 한 작은 종의 입을 통해서 내게 명령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아들임을 믿습니다. 그가 나를 위하여 죽으셨음을 믿습니다. 오 주님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당신의 영으로 내 눈을 비취소서. 이해하도록 도우소서."
주님에게 이처럼 말하십시오. 그리하면 나는 주님이 반드시 당신의 죄를 사해주실 것임을 단언합니다. 당신의 검은 구름 같은 죄악들이 싹 물러갈 것이며 새 생명이 주어질 것입니다. 새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성령이 당신의 마음에 부은바 될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에게 있어서 복음의 근본적인 요소들은 구약성경 계시에 잘 나타나있는 것이다. 그는 거듭남에 대한 개념이 오직 신약성경의 가르침이라는 생각을 '철저히 비성경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의 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크고 엄청난 것이요 '전적으로 우리를 완전하게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게 하는 신비한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선포할 때는 그와 같은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야곱, 다윗, 전지자들 및 수많은 신약의 성도들을 놀라게 하셨다.”
필자는 이것을 그가 1930년대에 한 아주 기억될 만한설교 가운데서 인용한 것이다. 그때 본문은 예레미야30장 18∼19이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포로 된 야곱의 장막을 돌이키고 그 거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성읍은 자기 산에 중건될 것이요 그 궁궐은 본래대로 거하는 곳이 될 것이며 감사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자의 목소리가 그중에서 나오리라 내가 그들을 번성케 하리니 쇠잔치 아니하겠고 내가 그들을 영화롭게 하리니 비판하지 아니하겠으며."
이 본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대지를 잡았다:
1)복음이 직면하게 된 임무, 마치 예루살렘이 예레미야 당시에 철저히 파괴된 것처럼 인간의 상태도 황폐한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폐허가 되었고 파괴된 존재라는 것이다.
2) 복음만이 다룰 수 있는 임무. 이스라엘 자녀들은 그들의 멸망된 도성과 함께 바벨론으로 잡혀갔고 전혀 무기력한 존재들이 되어버렸다.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다 실패한자들이요 자신들이 저지른 과거를 해결할 수없고 완전히 패배한 무능력한 존재들이다.
3) 복음만이 동일하게 할 수 있는 임무. 본문의 말씀은 실제로 성취되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귀환시켰고, 옛 성읍이 무너진 그 장소에 새 성읍을 건설하였다:
하나님은 불가능한 일을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불가능을 행하십니다. 그는 우리의 가장 깊은 고통과 재난 속에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패배를 당하고 소망이 없으며, 비참한 가운데 있을 때에 찾아오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무슨 짓을 했는지, 우리가 절실히 도움이 필요함을 깨우쳐주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오셔서 그가 목적하시는 바를 하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때가 그의 시간이요 그가 행동하는 때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한 기적을 일으키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성읍은 자기 산에 중건될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즐거움을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가장 불행하고 고독할 때 놀라운 위로의 말씀이 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임합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서 찾아옵니다. 그가 어떻게 그 일을 하십니까? 우리의 그림은 이것을 완벽하게 설명해줍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선 제일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과거의 파괴되고 황폐된 성읍을 깨끗이 정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일 되는 문제입니다. 우리 과거의 죄악, 우리의 삶의 파편들을 깨끗이 씻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제거될 수 있습니까? 양심의 가책이나 슬퍼함이 그 모든 것을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우리의 노력이나 미래의 우리의 수고들이 그 모든 것을 대속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유일한 답변입니다: 피로 물든 샘물이 있도다/ 임마누엘의 현관에서 나온 것일세/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우리의 모든/ 죄악들이 정하게 되됐네(찬송가 109장, 역자 주).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황폐되고 조각 난 우리의 삶을 깨끗하게 정리해주신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셨으며 우리의 죽음을 대신 죽으셨습니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나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여러분은 여러분의 과거지사를 다룰 수 없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하실 수 있으시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거기서 멈추시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고 기초적인 작업에 불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악을 위하여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셔서 하늘에 승천하셨으며,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거듭남과 새 생명을 가져다주시는 성령 하나님을 보내셨습니다. 여러분은 단순히 죄 사함과 용서함을 제공받은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과 새 생명을 수여받은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이 옛 성터에 재건축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동일한 개성과 성품을 지닌 여러분 자신에게 새로운 욕구와 관심과 소망 및 가능성들과 함께 새 생명, 새 성품이 제공되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오염되고 하나님과 소원해진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 하나님과 교통하며 그렇게 하므로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자리에 이르게 된 것보다 더 불가능한 일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처럼 불가능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 기적인 것입니다… “그 도성은 다시 옛 터전 위에 중건되리라.”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섰던 그 자리에, 여러분이 파멸된 그 장소에 다시 건축됨으로 승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에 의하여 죄인들에게 제공되는 축복입니다. 여러분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을 주님이 제공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 상태가 어떤지를 인식하는 자들은 모두 복음의 축복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는 그의 시대에 런던의 유명사 삼총사 설교자 중 한사람이었다. 이 세 사람을 기술해 놓은 아주 예리한 표현이 있다. “소포(Soper)목사는 사랑을 설교하고, 웨더해드(Weaterhead)목사는 예수를 설교하며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설교자는 하나님을 설교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로이드 존스 목사의 믿음이었는데, 모든 목사들은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사역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복음전도적 설교에는 늘 균형이 있었다. 하나님은 “영원한 곳에 거주하시는 높고 위엄 있으신 그 이름이 여호와라는 분이시며” 동시에 심령에 애통해 하는 자들과 더불어 동행하시고 겸손한자들의 영을 소생시키시고 마음이 상한 자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이시다. 공의의 우뢰를 발하시는 하나님. 그러면서도 더욱 자애로우신 사랑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이시다.
지적인 비평가들은 로이드 존스 목사의 설교에 모순 되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이 무능력하며 절대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되어 있음을 설교하고 동시에 모든 영혼에게 열려진 하나님의 자애로운 팔과, 모든 사람들의 품을 준비가 된 것처럼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모든 사람들을 위한 선물로서 값 없이 제공되는 구속을 말하고 있으니 모순 되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같은 '불일치성'은 성경 안에 있는 것이니 어찌하라! 분명히 성경에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그것의 경이로움은 축소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하시는 사랑은 자신들의 잃어버린 상태와 전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자임을 듣고서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받을 준비된 자에게 알려진 사랑인 것이다.
한쪽은 본성적으로 교만한 겸손치 못한 인간들에게 속한 강조점이고, 다른 한쪽은 자신이 "이제는 끝장이로구나"하는 자리에 이른자들에게 주어지는 메시지인 것이다.
이론가들은 그 같은 설교를 분석하고 따지겠지만 그러한 메시지를 듣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오는 역사를 보는 것은 최고로 놀라운 것이다.
필자는 어느 날 주일 저녁에 회중석에 앉아서 동일한 경험을 나눈 한 성도를 결코 잊을 수없다. 그의 심령 깊은 곳에 부어주셔서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에 즐거움의 눈물을 흘리던 그를 잊을 수없다. 그는 그러한 설교를 전혀 들어보지 못한 지역에서 왔다고 했다.
바른 복음전도적 설교는 "나 같은 곤고한 자를 어떻게 주님이 사랑해 주시는지요, 당신은 하나님이시니이다. 내 지성은 어두워졌으나 내 마음은 빛나나이다"라는 말을 남기게 된다. 토마스 찰스는 다니엘 롤란드가 설교하는 것을 들었을 때, “나는 새 하늘과 새땅에서 살았다.… 내 마음은 놀라움으로 가득 찼고 압도되었다. 내 심령에 펼쳐진 진리는 믿기에 너무나 은혜스러운 것이었다"라고 고백하였다. 그와 같은 고백이 웨스터 채플에 참석한 성도들에게서도 나왔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것을 성령의 능력에 대한 증거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간주하였다. 설교자들은 나아만 장군의 집에서 일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답변을 지니고 있는 부엌데기 소녀에 지나지 않는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현대설교가 약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엡 6:17)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는 데 원인이 있다고 믿었다. 성경이 올바르게 사용되지 않고, 종종 사람들은 효과적인 복음전도가 이루어지려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데서부터 출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설교의 힘이 약한 것이다. "재난은 바울사도가 한 것처럼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믿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인들이 이 교리를 좋아할 것인가? 나는 그들이 이것이 나의 메시지라는 것을 알때 그들은 멀리 달아나지 않을까'라고 묻지 않았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은 오직 성령의 능력에 달려 있음을 알았다.”
현대교회의 증상에 대한 해결책은 설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세움을 입게 된 사람들과 회중들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 같은 축복을 위해 간청할 때, 우리의 손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4∼25 ).
주(註)
1. “목사와 설교”(London: Hodder & Stoughton, 1971)p.151.63를 보라.
2. 로이드 존스는 공적 '결단'을 촉구하는 부름이 너무나 쉽게 회심과 혼돈되고 있음을 알았다. 그것은 참된 회심을 확인하는 수단으로서 전적으로 불완전하다. 이 방면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처럼 그의 생각은 ‘급속히 일어난 신자들’ (mushroom Christians)에 대하여 또 '그토록 빨리 회심을 일구어 내는 일'에 대하여 그 위험성을 경고한 휫 필드 목사와 같은 것이었다. “나는 잠시 기다려서 사람들이 열매 맺는지를 보기 원합니다. 왜냐하면 봄바람이 불어와 많은 꽃들을 떨어뜨리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들이 열매 맺는 것을 보기까지는 회심했다고 믿을 수 없습니다. 그들을 잠시 머물러 서도록 놔두는 것이 결코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신실한 영혼에게 어떤 해로움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Sermons on Important Subject by G. Whitefield, London, 1825. p.603).
3. The SouI-Winner, London, 1895, p.92.
4. A. W. Tozer 는 “요즈음 가장 대중적인 오류들 가운데 하나요, 복음주의적인 교회 안에서 거세게 몰아치는 시끌벅적한 종교적인 활동에서부터 솟아나는 것 중의 하나는 시대가 변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도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변화되어야만 한다는 것과… 할리우드를 예루살렘으로 혼돈하고 있는 그 같은 정서는 하나님의 성령을 대적하는 무례한 죄를 범한 기독교 신자들에게 찾아온 천벌에 의한 미친 것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심각한 타락의 길인 것이다”라고 기록하였다(Renewed Day by Day; a Daily Devotional, 기독교 출판사, Camp Hill, Pa.,1980, 2월 7일).
5. The Fight of Faith, p.388.
6. Seleted Shorter Writings of B.B Warfield, ed. John E. Meeter, Nutley, N.J.,1970, Vol.1,pp.51∼60.
7. W.G.D. Shedd, Sermons to the Natural Man, 1876, Banner of Truth, 1977. p.331
8. Romans. Exposition of Chapter 1, p.95
1. “목사와 설교”(London: Hodder & Stoughton, 1971)p.151.63를 보라.
2. 로이드 존스는 공적 '결단'을 촉구하는 부름이 너무나 쉽게 회심과 혼돈되고 있음을 알았다. 그것은 참된 회심을 확인하는 수단으로서 전적으로 불완전하다. 이 방면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처럼 그의 생각은 ‘급속히 일어난 신자들’ (mushroom Christians)에 대하여 또 '그토록 빨리 회심을 일구어 내는 일'에 대하여 그 위험성을 경고한 휫 필드 목사와 같은 것이었다. “나는 잠시 기다려서 사람들이 열매 맺는지를 보기 원합니다. 왜냐하면 봄바람이 불어와 많은 꽃들을 떨어뜨리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들이 열매 맺는 것을 보기까지는 회심했다고 믿을 수 없습니다. 그들을 잠시 머물러 서도록 놔두는 것이 결코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신실한 영혼에게 어떤 해로움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Sermons on Important Subject by G. Whitefield, London, 1825. p.603).
3. The SouI-Winner, London, 1895, p.92.
4. A. W. Tozer 는 “요즈음 가장 대중적인 오류들 가운데 하나요, 복음주의적인 교회 안에서 거세게 몰아치는 시끌벅적한 종교적인 활동에서부터 솟아나는 것 중의 하나는 시대가 변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도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변화되어야만 한다는 것과… 할리우드를 예루살렘으로 혼돈하고 있는 그 같은 정서는 하나님의 성령을 대적하는 무례한 죄를 범한 기독교 신자들에게 찾아온 천벌에 의한 미친 것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심각한 타락의 길인 것이다”라고 기록하였다(Renewed Day by Day; a Daily Devotional, 기독교 출판사, Camp Hill, Pa.,1980, 2월 7일).
5. The Fight of Faith, p.388.
6. Seleted Shorter Writings of B.B Warfield, ed. John E. Meeter, Nutley, N.J.,1970, Vol.1,pp.51∼60.
7. W.G.D. Shedd, Sermons to the Natural Man, 1876, Banner of Truth, 1977. p.331
8. Romans. Exposition of Chapter 1,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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