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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을 일으키는 복음전도에 대해서
박래구 목사
25년 전쯤에 광주에서 전도폭발훈련이라 하는 세미나를 참석한 적이 있다. 거기서 인상 깊은 것은 전도할 때 마주칠 수 있는 모든 사례들을 정리해서 대응방식을 만들어 두었다는 점이다.
내 기억에 전도할 때, 타종교인들, 특히 유교를 숭상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윤리적 삶에 자부심을 갖고 또 상대적으로 그 속에서 종교적 희망을 강하게 집착한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1980년대 초반만 해도 기독교인들이 도덕적으로 그렇게 나쁜 평가를 받지 않았던 것 같았다. 반면에 지금은 기독교인들이란 후안무치하고 탐욕적인 이기심으로 가득 찬 그런 집단광기의 사람들인 양 여겨진다. 특히 젊은이들에게서 그런 인식은 엄청난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죄나 지옥을 강조하며 전도하는 것이 과연 효력적일까? 성경적으로 복음전할 때 구체적인 죄를 문제 삼거나 지옥을 말하지 않고 전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이른 바 나도 죄인이고 나도 잘못하는 일이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죄책감과 지옥을 강조해야만 솔직한 전도가 될 것이라 생각하는가?
그러면 요새 젊은이들이 하는 말이 무엇인가? ‘너나 잘하세요?’ 하는 투의 말들을 들어보았는가? 그런 반응은 단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인가? 심지어 나는 개독교인들보다 훨씬 죄가 적다고 하는 그런 대답을 들어보지는 않았는가?
물론 나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전도하려고 할 때 죄책감과 지옥을 말하기가 너무 안 좋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전략을 바꿔야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전도하려할 때 지옥을 말하지 않거나 도덕적인 죄를 문제 삼지 않고는 회심을 촉구하는 전도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무언가 그런 복음전도는 치우친 것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복음전도가 독특한 배경을 갖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한다. 처음에 사도들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 때 사도들은 유대인들이 언약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죄를 드러내었다.
그와 함께 구약이 약속한 언약의 메시아를 믿고 돌이키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유일한 길임을 선포하였다.
이것은 사도행전과 서신서가 증거하는 이방인들에 대한 전도와는 다른 어떤 측면이 포함돼 있지 않는가? 이방에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만들었다는 그런 식의 도전을 던지지는 않았음이 분명하다.
오히려 이방인에게 십자가는, 죄인인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 증거 된 것을 알아야한다. 그것은 도덕적 죄책감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죄아래 가두는 훨씬 본질적인 그런 죄의 문제를 말하고 있다.
복음전도는 거기서 그와 같이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인 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나타나심으로 증거되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본질적인 죄가 구체적인 죄를 통해 인식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인간에게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죄의식이 결코 미약하다거나 단지 논리적인 그런 죄인식이 될 것이라고 미리 예단할 필요가 없다. 개별죄에 치중할 때 그것은 구원의 복음이 자칫 율법과 대결하는 것 같은 불필요한 죄책감만 일으키게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완전주의같은 또 다른 욕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 거룩하지 않은 그 문제는 회심한 자가 부딪히게 되는 문제이고 또 실제로 부딪혀야할 문제이다. 복음전도에 있어 회심은 도덕적인 돌이킴과 직접 관계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바리새인이나 종교적 경건을 주의하는 그들이 오히려 회심하지 못한 것은 그들이 도덕적 관점에서 자기들을 의롭다고 여겼기 때문이고 그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이와 같은 도덕적 의로움에의 관심은 여기서 회심을 위한 복음전도에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도덕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기 의와 율법적 의를 붙잡았기에 회심하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의 도덕적 의가 복음과 상관이 없다면 죄인들의 도덕적 죄도 회심을 일으키는 바 복음전도에 있어 어떤 결정적 변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중생에 대한 논쟁에서조차 회심을 도덕적으로 설명하는 시도들이 있기에 이 걱정을 남겨둔다.
나는 전도하려면 구체적인 죄책감과 지옥에 대한 공포감을 불러 일으켜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 말을 비중을 두고 말하고자 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복음이, 죄에서의 회심을 촉구하는 내용을 포함하지 않아도 된다고 내가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가 어찌 죄와 상관없이 증거되겠는가? 부활이 어찌 영원한 심판(지옥)과 상관없이 증거되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전할 복음의 핵심은 은혜의 십자가와 부활의 소망임을 잊지 말아야한다. 그것이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복음의 핵심이 돼야만 한다.
아무래도 조금 더 첨언해야 될 것 같다. 조셉 얼라인의 '회개에의 경종'(40년전에 그렇게 번역됐다)은 훌륭한 복음(회심)설교의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 같다. 내용은 기억이 안 난다. 나는 그와 같은 회심전도가 잘못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심을 요청하는 죄의 경고와 책망은 복음서와 서신들을 통해 볼 때 많은 부분 죄인들을 도덕적인 죄책감과 지옥형벌에 대한 공포감으로 몰아가기보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의 소망에로 그들을 몰아가는 그런 선포가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 없이 자기 의로, 자기 행위로 무엇이든 살아가는 것에서 자기의 태도와 삶을 돌이켜야만 한다. 그들은 부활의 소망이 아닌 세상의 소욕을 위해 살아가는 모든 정욕에서 돌이켜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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