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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하는 데 전부를 투자 하는 자가 되자 /본문: 누가복음 15장 1절∼7절

by 【고동엽】 2022.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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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하는 데 전부를 투자 하는 자가 되자

본문: 누가복음 15장 1절∼7절

 
I. 절대주권과 예정성취

여기에 바리새인들은 아주 신앙에 독실한 사람들이요 또 서기관은 성경을 잘 알고 성경 가르치는 선생님들입니다.

이들은 믿는 사람들 중에 특별히 잘 믿는 사람으로 자타가 인정을 하고 또 이 서기관은 자기들이 성경을 잘 아는 아주 성경에 능한 성경 선생님들인 줄로 그렇게 자타들이 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이 하나님 말씀 들으러 오는 것을 영접하고 같이 하나님의 도리를 전하고 그 진진하게 서로 신앙 교제와 전도하는 것을 보고 조롱을 했습니다.

어떻게 저 거룩하다고 하는 선생님이 저 죄인들하고 세리하고 저렇게 마구잡이 교제를 하고 또 먹고 마시는 저런 일을 하느냐 그렇게 말을 했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한 심정이며 또 예수님은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하는 것을 여기에 비유로 나타냈습니다.

여기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에게 나아온 것이나 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거게 대해서 논평한 것이나 이런 것이 우연히 이렇게 만나져서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그때에 된 것이 아니고 영원 전 택한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정하실 때에 이 예정 순서에 들어간 것이 때가 되매 예정하신 그대로 이런 사람들이 있게 됐고 그런 분위기가 생겨지게 됐고 이렇게 그런 형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이루어진 것을 영원 전 하나님의 예정에서 시작되고 또 예정에서 시작된 것이 하나님이 창조로 이런 역사가 존재하게 됐고 또 하나님의 섭리로 이런 모든 운동들과 순서들이 이루어지게 된 것인 것을 우리는 성경으로 알고 믿습니다.

사람들이 요새도 뭐, 이제 우리 양성원에도 차차 차차 이제 조금 장성해 가고 조금 범위가 넓어져 가는 것 같습니다.

이래 놓으니까 이제 하나씩 둘씩 신학이 자꾸 이제 들쳐 나옵니다.

신학은 몰라 그렇지 수백 신학입니다, 수백 신학. 신학은 수백 신학입니다.

그래서 이 일방적으로 일면만 보고 자꾸 이렇게 말을 해 가지고서 하나님의 도를 방해하는 일들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 예정이요 절대 은혜라, 이걸 가리켜서 궁극적 은혜라, 하나님이 예정하신 은혜는 완전 은혜라, 이래서 완전주의라는 그런 것이 또 일찍부터 나돌고 있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이니 오늘 뭐 사람이 뭐 열심히 하라 말아라, 행해라 하지 말아라 이렇게 할 것이 없이 중생된 자들은 다 성화가 되기 마련이고 구원이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이런 말을 해 가지고서 미혹을 줍니다. 그거 일방적 지식입니다.

그러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서 죽도록 충성하라 하는 그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이 아니냐?

그것은 하나님의 궁극이 아니냐?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이 아니냐?

이 모든 것이 합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그 구원을 완성시키는 그 과정들이요 모든 조건들인 것입니다.

이걸 모르고 일방적 지식을 가지고 이래 하니 이 학자는 이 구석에 파묻혀 가지고 죽고 저 학자는 저 구석에 파묻혀 죽고 이래 가지고 자꾸 이렇게 하는데 그런 것을 총괄해서 발 아래 밟아야 됩니다.

이런 것을 전부를 다 파악해 가지고 모든 지식을, 전체의 지식을 알아야 되지 전체 지식을 모르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좀 배울 기회는 가졌는데 정신 안 차리면 안 됩니다.

여기에 이것도 중요한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거게서 나타나서 세리와 죄인들을 훼방하고 ‘주님이 저와같이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영접한다’

이런 분위기 조성된 것이 이것이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영원 전 하나님이 예정하신 그대로 이 사람들을 하나님이 만드셨고 또 그때에 회집을 했고 또 그때에 죄인들과 세리들이 주님 앞에 나아오게 하셨고 또 그것 보고서 바리새 교인들과 서기관들은 조롱을 하고 훼방을 했고 이게 전부 다 하나님의 절대 예정대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 역사입니다.

그것 알고, 예수님께서 그 다음에 작정하신 대로 요런 분위기를 조성하시고 그 분위기에 또 당신이 요렇게 잃은 양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잃은 양 비유 말씀하신 것은 이것은 그때에 그 형편 사정을 보고 거게 따라서 적당한 적응으로 잃은 양 비유를 하셨는가?

이것도 만세 전부터 하나님이 딱 예정하신 거게서 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고 예수님은 또 요렇게 말씀하셔서 잃은 양 비유를 하시도록 이렇게 딱 돼 가지고 있어 그 순서대로 된 것입니다.

칼빈이 궁극적 구원이라, 칼빈이 말한 것 가운데에 제일 유력한 깨달음은 하나님의 주권을 깨달은 것이 그것이 제일 유력한 깨달음입니다.

주권 깨달으면 또 궁극적 은혜라.

주권이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다 구원을 전부 당신이 혼자 주권하지 안하면은 주권이 깨져버리지, 주권 하나만 알면 다 돼요.

이런데, 여게서 모순돼 가지고 지금 모두 뒤죽박죽 해 쌓는 것은 그 지식이 전체 지식이 되지 안하고 총괄 지식이 되지 안하고 다 기형적 지식이기 때문에 이리 저리 모순이 되어서 날뛰고 있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은 전부 모순이오. 모순이나 신구약 성경은 하나입니다.

단일성의 일체요. 그것은 여러분들이 이 도리를 믿는 데에서 상식으로 말하고, 이제 여게서 잃은 양 찾는 이 비유가 우리에게 구원 이루는 이치를 가르치는 것이요 또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들과 계약을 선포하는 계약입니다.

이게 바로 선포하시는 계약이요 또 이것이 구원을 이루는 이치요 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우리 생애 법칙을 가르친 것입니다.

이런데 혹 이런 것을 하나 오다가다 그런 형편 되니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그렇게 그런 권능을 가지고서 뭐 그런 능력 있는 말씀을 하셨다,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런 형편이 지나갔다 이렇게만 보고 이것이 전부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실물 교제를 가지고서 우리에게 가르친 이 사실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도 절대 예정이요, 절대 주권이오.

이러니까, 이런 것을 알면 죽도록 충성하라는 그것도, 죽도록 충성하라, ‘하나님이 중생된 사람이면 다 구원 얻기로 다 완전주의, 궁극적 구원이요 완전구원으로 돼 가지고 있는 건데 뭐 죽도록 충성하라고 그런 말을 하고 있느냐?’ 하면 그 사람이 진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그것도 하나님의 완전 구원 속에 들어 있는 요소이기 때문에 그 요소에서 빠져나가 버리면 완전 구원이 안 된다 그것입니다.

이해가 돼요?

양성원 학생들 이해가 돼,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이해가 돼요?
 

II. 주님과 동행하는 삶
 
i.  관심은 잃어버린 양에게 집중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것은 백 마리 양이 있는데 한 마리를 잊어버리니까 한 마리 그거 찾도록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서 한 마리 찾도록 찾기까지 노력했다,

열심히 노력했다 하는 이것이 여게서 예수님의 그 심정과 당신의 활동을 여기에 보이고 있습니다.

당신의 심정은 아흔아홉 마리 있고 한 마리 하는 그까짓 거야 뭐 아흔아홉 마리 있으니까 한 마리 그거야 있으나 없으나 이렇게 여기지 안하고 잃은 양 한 마리에 대한 관심이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아흔아홉 마리에 대한 관심보다도 관심이 더 뜨겁고 크다 하는 요것을 여기에서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그러면 잃은 양은 어떤 사람이 잃은 양이냐 하면은 예수 믿다가 낙심한 사람이 잃은 양이 아니고 잃은 양은, 이것도 낙심한 사람만 잃은 양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잃은 그것만이 아니고 잃은 양은 예수님의 양이 됐는데 예수님의 양이 그만 딴 데로 가서 없어진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택한 자들은 예수님의 대속의 피공로로 다 값주고 사서 완전히 주님의 것이 돼서 주님의 양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잃은 양은 택함을 받은 자로서 아직까지 중생되지 못한 그 모든 사람이 다 잃은 양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잃은 양입니다.

믿다가서 낙심해서 돌아간 사람들은 그다음에 잃어버린 드라크마로 거게 말씀해 놨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여게서 예수님은 어떤 심정을 가지고 계시느냐?

의인 아흔아홉 사람보다 아직까지 구출하지 못한, 아직까지 이 복음을 그가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해서 주님을 믿지 못함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 그 한 사람에게 대한 관심이 아흔아홉 사람에게 대한 관심보다 더 크다, 관심이 더 크고 더 뜨겁다 하는 요것을 여기에서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미 믿는 사람만이 상대하고 안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은 그 잃어 버린 양인데, 왜 잃어버린 양인가? 주님이 피로 값주고 샀는데 그게 있기는 지금 마귀에게 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잃어버린 양이오. 믿다가 낙심한 자를 잃어버린 양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고 그것은 잃어버린 드라크마라, 드라크마고 여게는 예수님의 택한 백성이 아직까지 주님을 찾지 못하고 악령의 사망의 감옥 속에 들어 가지고 있는 그 모든, 주님을 자기의 구주로 알아서 영접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그 모든 사람을 가리켜서 잃어버린 양이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주님은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이제 이러니까, 물론 예수 믿는 사람들 중요하지마는 믿는 모든 사람 그보다도 택한 자로서 아직까지 주님을 찾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대한 관심이 이미 믿는 사람의 모든 전부에 대한 관심보다 그 한 사람의 관심이 크다 하는 요것을 여게서 아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첫째 진리입니다.


ii.  전도하기 위해 다 투자

보면 사람이 자꾸 이렇게 복음을 전해서 안 믿는 사람을 믿도록 이래 전도하는 사람, 전도하는 사람이 전도해 놓고 깨뜨리고 전도해 놓고 깨뜨리고 뭐, 전도해 놓고 뒤에 전도받은 사람이 보면은 그만 그 전도 받은 것을 다 내버릴 만큼 아주 뭐 엉망 행위를 하고 이런 사람도 하나님이 그 복음 전한 것을 인해서 긍휼히 여기는 것을 볼 수 있고, 만일 그런 큰 실수가 없다고 하면 복음을 전하는 이 사람보다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종종 이렇게 봅니다,

우리 가운데서. 그저 밤낮 믿지 않는 사람들을 예수님 믿구로 만들어야 되겠다. 저 사람을 어쩌든지 전도해서 회개시켜 예수 믿구로 만들어야 되겠다 하는 그 심정을 가진 그 사람, 그 심정을 가진 그것이 자기의 심정입니까?

그 사람의 심정이요? 그 사람의 심정 아닙니다.

요 분명히 지금 양을 찾는 이는 목자인데 목자는 예수님이십니다.

목자는 예수님이시요. 그러면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 그 관심이 바로 예수님의 관심이오. 바로 예수님의 관심. 자기 속에 예수님이 내주하셔 가지고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사람들이 제가 전도해 놓고 박살내고 전도해 놓고 박살내고 하는 그런 사람이 만일 그렇게 전도하고, 무능하게 전도해도 자꾸 전도하고 그 일을 계속하고 자기가 전도해 놓은 것을 다른 사람이 오해할 만큼 그렇게 박살내지 안하고 그저 근근히 예수 믿는 신앙 행위를 한다고 하면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동행은 항상 같이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같이 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특별히 은혜 주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대개 건강합니다. 대개 건강하요. 그런 사람의 심령에 또 평강이 늘 계속합니다.

이래서 그것을 여게서 우리가 깨닫고, 찾으면 어깨에 메고 돌아온다. 어깨에 메고 돌아온다. 이것은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건 예수님이 어깨에 메고 돌아오지 않습니까? 그 찾은 양을 귀중히 여겨서 찾은 양을 위해서 자기의 노력이나 희생이나 그런 것이 생각되지 안하고서 찾은 양, 한 사람이 예수 믿게 될 때에 그 믿는 그 사람을 위해서 자기의 수고나 모든 것이나 아끼지 안하고 뭐 그때는,

자존심도 아끼지 안하고 교만도 아끼지 안하고 무슨 자기의 이해 문제 그런 것도 생각지 안하고 자기가 평소에 생각지 못할 만큼 그 사람이 얻은 양 하나를 위해서 자기의 마음이나 몸이나 정신이나 자기의 물질이나 아낌없이 기울여지고 투자되는 그것을 볼 것입니다.

여러분들 그런 느낌을 많이 가졌습니까, 그런 경험이 있습니까? 바로 그것이 주님과 동행이오.

껍데기는 내지마는 내 속에 주님이 내주하셔 가지고서 내 안에 내주하셔 가지고서 나를 통해서 그 역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주님과 동행입니다.

이 심정을 가진 것이 주님이 자기 안에 계셔서 자기 심정이 아니라 주님의 심정이오. 자기 마음 안에 주님이 계셔서 주님과 자기와의 마음으로 동행합니다.

또 그럴 때에 자기의 모든 것이 아껴지지 안하고 투자하고 싶고 그를 위해서 봉사하고 싶고 뭐 수고도 쩔뚝쩔뚝하면서도 그것도 생각지 안하고 그를 위해서 있는 전부를 기울여서 분발돼지는 그것을 여러분들이 많이 겪었을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냐? 그것이 네가 아니다.

껍데기는 네지마는, 껍데기는 네지마는 껍데기는 네나 네가 아니고 그 속에 일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 사람이 주님하고 동행하는 사람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성전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지체요 그것이 하나님의 몸이요 하나님과 동행인 것입니다.


iii.  미친듯이 기뻐함

어깨에 메고 와서 모든 이웃 사람과 벗들을 불러 가지고서, 벗들을 불러 가지고 ‘야, 오너라. 내가 잃은 양을 찾았다. 같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하면서 부른다 하는 요 비유가 뭐인가?

요것은 자기가 잃은 양을 찾아서 구원했을 때에 그때에 자기에게 솟아오르는 그 기쁨은 다른 사람이 좋아할지도 안 할지도 모르면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기뻐하는 그 기쁨이, 이 기쁨은 다른 사람도 기뻐할 것이라,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 모든 사람이 내게 대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라 하는 것이 믿어진다 그말입니다.

그런 경험 있습니까?

그런 경험이 있어요? 이거 자기가 실지로 느끼지 못하고 이래 하면 이거 다 헛돼.

한 양을 찾아 가지고 자기의 아낌없이 어깨에 메고 온다. 자기 것을 투자해, 자기 것을 다 투자하고 희생하면서 그저 아까운 줄도 모르고 어찌 됐든간에 그것만 구원하기 위해서 뭐 앞뒤도 모르고 전후도 모르고 뒤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그것만 구원하기 위해서 내 전력이 기울여지는 그것이 네가 아니라 네 속에 주님이 계셔서 하는 것입니다. 그게 주님이 하시는 것이요, 그게 주님과 동행이오.

그라면서, 누가 다른 사람 기뻐할지 모르는데 기쁘고 좋아서 벙긋벙긋하며 그 기뻐하는 것 보면 다른 사람이 보고 저거 미쳤나?

무엇이 저거 나한테 뭐 내가 기뻐할 것이 뭐 있다고 나를 보고 뭐 기쁘고 즐거워 벙긋거려 쌓고 저래 쌓는가?

다른 사람이 미쳤다고 할 만큼 기쁘나 제 속에는 기쁨이 충만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기뻐하리라 하는 것이 믿어지고 제 기쁨이 모든 사람의 기쁨이 되리라 하는 그 기쁨을 점령하게 됩니다.

기쁨을 가지게 됩니다.

기쁨 가지는 그것도 제 기쁨이 아니오. 주님이 자기 속에 와 가지고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 기쁨이 자기 속에 와서 역사했기 때문에 독사와 시랑이 같은, 다른 사람 망하는 거나 좋아하고 복받으면 배가 아픈 그런 흉측한 살인자가 어찌 그리 다른 사람이 구원얻는데 기쁘고 즐거운가? 저만 기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품습니다.

뭐 기뻐해 쌓으니까 ‘이 사람 자네 왜 그래 웃어 쌓고 기뻐 쌓노? 이 미쳤나, 이거? 요새 정신병이 걸렸나 미쳤는가보다.’ 미쳤는갑다 할 만큼 그 기쁘고 즐거움이 다른 사람에게 토하게 됩니다. 품어 내게 됩니다.

그것도 주님이 그 속에 내주하셔서 주님의 기쁨에 자기가 그게 나타내고 있고 같이 동행하는 것입니다.


가.  산다씽의 전도

그래 여게서 세 가지, 자기 같으나 자기 속에 자기 아닌 주님이 계셔서 주님과 자기와 하나가 된 이 비밀을 여게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소원의 비밀, 소원의 비밀. 하나를 전도,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서 마음이 간절해서 산다싱은 언제 그 무인지경인데 보니까 사람이 간 그 발자욱이 있어서 발자욱이 있는 것 보니까 발자욱 찾아가면 여기 사람 있을 것 아니겠는가 해 가지고 발자욱을 찾아 갈라고 시작해 보니까 어떻게 높은 산이고 길이 없고 험한 데든지 발자욱만 보고 자꾸 이래 자꾸 찾아 가다 보니까 막 손으로 그러니까 손이 전부 다 이거 다 벗겨져서 피가 나오고 이라는데 가니까 단지 그 산맥에 한 집이 있더래요. 한 집 있어. 한 집이 있는데 식구가 서이 살아. 서이 사는데 거기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그 사람들이 그래 믿기로 작정하고, 복음을 전하고 그래 온 것을 자기 일생의 전기에다 그걸 써 놨읍디다.

그때에 그 발자욱이 있으니까 여기에 사람이 있지 않겠는가?

이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복음을 전했겠나?

복음을 전하지 못했으니까 이 사람 하나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내가 아무래도 찾아 가지 안하면 여기 다 그만 이 사람 복음 못 듣고 죽을 것 아니가?

그 마음이 자꾸 불이 타 가지고서 된 줄도 가파른 줄도 모르고 가다 보니까 뭐 그만 밤은 거석하니까 뭐 먹지도 못하고 이래 가지고 자꾸 기어 올라가고 이래 가지고서 그 이튿날 가서 찾았는데 이 손에 피가 다 터지고 이라는데 그래 가지고 그 사람을 만나 가지고서 만난, 그 만나고 나니까 기뻐서, 만나고 나니까 그 사람을 전도해서 그 사람이 이래 복음을 듣고 믿기로 작정한 그 기쁨, 찾아 갈 때에 그 간절한 간절함, 만나 가지고서 기쁜 그 기쁨. 그것이 자기의 일생 동안 사는 가운데에 기쁨 중에 큰 기쁨이 됐기 때문에 내가 여게서 갈 때에 간절한 그 심정을 기록해 놨고 또 그 세 사람 만나 가지고서 전도한 그 기쁨을 기록해 놓고, 그것이 주님과 동행이요 주님의 심정입니다. 그게 주님과 동행입니다.

여기에 그것을 지금 여기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잃어버린 양, 이렇게 주님이 사죄, 칭의, 화친의 대형 대행 대화친으로써 이와같이 지금 생명의 도를 완전히 이 대속을 설정해 놨는데 대속을 지금 택한 자는 이 대속의 소식을 들어야, 이 복음을 들어야 믿겠는데 이거 듣지 못하고 죽으면 안 되니 이 산골에 이와같이 가는 데는 이 복음을 들었겠나?

이러니까 아무래도 이 사람 찾아가야 되겠다. 그래 찾아가고 싶어서 그걸 뭐 참 고난을 무릅쓰고 그렇게 어려움을 겪어서 찾아가게 된 그 심정이 그것이 예수님이 자기 속에서 역사해 가지고서 예수님의 심정이었습니다.

만나니까 기쁜 것도 그러했습니다.

이러니까 여게서 안타까운, 마음에 구원을 얻지 못하고 멸망 가운데 빠져 있는 거게 대해서 안타까운 그 마음, 또 이렇게 하나 얻고 보니까 자기의 있는 것 이런 저런 것을 아낌 없이 막 아낌없이 투자가 되는 이거, 투자되는 요 사람, 안타까와지는 요 사람, 또 얻고 나니까 기뻐 즐거워서 기뻐 즐거운 그 사람 요 세 가지 사람 나타났는데세 가지 사람. 요것이 주님과 동행이라, 요것이 자기가 주님과 동행한 것이요 요것이 주님이 자기 안에 내주하셔 가지고 역사했다는 요것을 깨닫는 요것이 여기에서 제일 중요합니다. 알겠습니까?

우리가 다 그런 경험 있지요. 유별스럽게 ‘이거 아무래도 이 사람을 복음을 전해야 되지 안 전하면 안 되겠다.

이거 안 전하면 이 복음 듣지 못하면 멸망하겠다.’ 하는 그 구원 얻지 못하고 멸망 가운데 거게서 빠져 있는 거게 대해서 안타까와 하는 그런 심정을 더러 겪어 봤어, 경험해 봤습니까?

그런 심정이 여러분들 속에 있을 때가 있었습니까?

또 얻어 놓으니까, 얻어 놓으니까, 얻어봤자 그거 뭐 돈도 나오는 것도 아니고 지위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까짓 것 얻어봤자 뭐 이용물도 되지도 안하고 뭐 그거 아무 덕볼 것도 하나도 없는데 얻어 놓으니까 그렇게 기뻐서 자기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이와같이 지금 마구 어깨에 메고 아듬고 좋아서 이렇게 투자하는 것,

또, 얻은 그 기쁨에 대해서 기뻐서 그 이웃 다른 사람까지 다 기뻐, 그 사람 뭐 내 양 찾았는데 그 사람이 기뻐할 것이 뭐 있겠소? 내 양 찾았는데, ‘하, 이거 찾았네. 와서 기뻐하세.’ 이거 오라고 이래 쌓으면 다른 사람이 있다가 ‘양 찾으면 제 양 찾았지 뭐 제 양 찾았는데 그렇게 큰 것같이 떠들어 쌓네. 그 사람 좀 돈 사람이다, 아마.’ 이렇게 할 만큼, 그렇지 않겠소? 이렇게 얻었을 때에 내 마음이 기쁘고 즐거운 그런 것을 겪었는가?

그것이 바로 자기 안에 주님이 오셔 가지고서 내주해 가지고서 역사하시는 그 주님이시라 하는 요것을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하고 그 주님을 잊어버리지 말고 놓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주님을 잊어버리지 말아요.

그 주님을 괄시하면 안 돼요. 그 내나 주님이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다 그렇게 모두 다 이래 동행하는 것이지 제 욕심대로 하, 주님 나와 동행하옵소서 뭐 이래 가지고서 기도하면 주님 나와 동행하옵소서 어데든지 동행하옵소서 막 떠들어 쌓는 그것은 거짓말쟁이오. 그 생각지도 안하고 속에 깊이 느끼지도 안하고 하는 거라.

이래서,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아흔아홉 마리 양에 대한 관심보다도 한 양의 관심이 더 크게 기울어졌던 그 심정, 또 그것을 찾아 가지고서 만나고 나니까 자기의 모든 것의 희생 투자에 대해서, 그것은 뭐 끝이 없습니다.

그때 제가 할 수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할 거라, 이거. 그 심정. 또 그라고 나니까 기뻐 즐거워 못 견디는 그 심정. 그것이 바로 주님이시요, 그것이 네가 아니라 주님이라. 그것이 네가 아니고 주님이라.

그러니까 너는 주님이 내주해 역사하시는 것이 너를 통해서 나타나고 계시는 것을 우리에게 여기에 비유로 가르쳐서 말씀하셨습니다.
 

 
 /글: 백영희

 http://choys0000.blog.me/10180157452

 

 

 

 

 

 

 

출처 : 브니엘
글쓴이 : noemisuh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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