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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나님 나라인가 / 사도행전 1:3~11
선교사가 될 줄이야...
난 3주 전 네 분의 장로님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좋은 교제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은 특별히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인생의 마지막을 선교 현장에서 헌신하겠다고 다짐한 분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배순호 장로님은 국내에서 자신이 맡고 있던 외국은행 책임자 직을 내려 놓고 3년간 선교 훈련을 받으셨던 분입니다. 그 후 이들 부부는 중앙 아시아의 키르키즈스탄으로 건너가 3년이 넘도록 너무나 멋진 사역을 펼쳐오고 있습니다.
잠시 귀국하신 그분의 얼굴을 보면서 언젠가 그분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그 가정엔 두 아이들이 있는데, 한번은 둘째 아들에게서 OM선교에 소속된 둘로스 선에 얼마간 승선하여 선교를 위해 봉사하고 싶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문득 ?혹시 이 아들이 나중에 선교사가 되어 외국으로 나가려는 궁리라도 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자식이 선교사가 되는 것마저 겁내던 사람이 결국 선교사가 되어 중앙 아시아로 떠나게 된 것입니다. 물론 많은 난관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것들을 잘 극복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선교 사역에 힘쓰고자 지금도 준비에 열중하는 분입니다.
또 한 분은 최상일 장로님으로, 그분은 한국 통신의 책임급 연구원으로 통신 분야에 관한한 한국에서 으뜸가는 기술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접어두고, 50대 중반이 넘어선 나이에 선교를 하고 싶다는 열정을 억제하지 못해 지난 1년간 호주에 있는 선교학교에서 훈련을 받아왔습니다. 이제 연변과학기술대학 교수이자 자비량 선교사로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통신분야에서 교수 사역을 하게 됩니다. 게다가 20억이 넘는 IT 장비를 기증 받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또 한 분은 남창희 장로님이십니다. 그 동안 한국의 유수한 은행에 고위직으로 있다가 이제 그 일을 그만 두고,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러시아 대학에서 한국어 교수로 임명 받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한국어 교수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제자훈련과 선교훈련을 통해 러시아에 복음의 씨를 뿌리겠다는 것이 그의 포부였습니다.
그분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세계 선교를 해야 된다. 우리의 남은 인생에 꿈이 있다면 복음을 위해 사는 것이다.?라는 말을 교회 안팎에서 들을 때면, ?나는 아니겠지. 나는 아니겠지.? 하고 남의 이야기로만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아니겠지.?라는 그 말이 계속 마음속에서 맴돌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 하나님의 음성에 붙들려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났습니다. 그 학교에서 교수에게 제공하는 사택이라고는 주방도 딸리지 않은 형편 없는 방 한 칸 뿐, 이제 이들 부부가 그곳에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홍주관 장로님은 한국의 명문대 출신으로 외국계 은행의 대표 이사였습니다. 중직으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다 뒤로한 채, 부부가 함께 미국 풀러 신학교에 입학하여 3년 간 선교학을 전공하기로 했습니다. 그 과정을 마치면 멕시코로 건너가 복음 전하는 일에 한 생을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분들이 함께 모였기에 저녁 식사 분위기는 더없이 진지했습니다. ?얼마나 잘 사느냐, 얼마나 벌었느냐, 얼마나 즐기느냐?를 모임의 주제로 삼는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인 것입니다. 한 분 한 분의 얼굴을 주의깊게 들여다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이런 엉뚱한 생각을 갖도록 했을까??
한 가지 비전
그 대답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들을 미치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그들의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지금껏 교회의 장로로서 헌신할 정도라면, 그 삶이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얼마나 충성된 삶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인생을 마무리하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주님의 손에 맡겼더니 하나님께서 그 결단대로 몰고 가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시기 시작하면서부터 이 세상을 떠나시기까지 한 가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곧 하나님 나라의 주제였습니다.
그분이 대중 앞에 나타나셔서 전하신 첫 마디 역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4:17)였습니다. 천국이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유대나라 표현입니다. 곧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느니라.?는 말씀을 시작으로 3년 간 이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이 서서히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엄습해오는 마지막 순간에도 그분의 메시지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천국은 마치 손에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가는 10처녀와 같다고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가지고 생애를 마무리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맛본 후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셨고, 40일간 세상에 머무르시면서 다시금 제자들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1장 3절에 의하면 여전히 말씀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즉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마지막 승천하실 때까지 주님의 최대 관심은 하나님 나라였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의 주제도, 주님의 꿈도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모든 생각은 하나님 나라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 나라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어긋난 제자들의 관심
하지만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이 도리어 제자들에게는 불만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현실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그들의 속 마음이 1장 6절에서 표출됩니다. 그들 앞에 서신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또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은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보다 능한 자도, 강한 자도, 높은 자도 없습니다.
따라서 바로 이런 분이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당면한 현실 문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를 고대했습니다. 그래서 1장 6절과 같이 ?예수님, 이스라엘 나라가 해방될 날이 언제입니까?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질문했던 것입니다.(6절)
지금 이스라엘 나라는 수 백 년 동안 로마 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착취와 고통가운데 신음하고 있습니다. 힘만 있다면 당장 로마의 쇠사슬에서 해방시켜 주고 싶은 생각이 들만큼 처참한 환경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실에 대해서 주님은 한 말씀도 안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도 이러한 주님에 대해서 제자들처럼 불만을 가질지 모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 성경보다는 신문을 먼저 손에 집어 듭니다. 그만큼 우리의 관심이 세상에 가 있음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경건하게 살기를 작심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면 말씀 앞에 조용히 무릎 꿇어 하나님 앞에 앉는 분들도 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만큼 세상 일이 우리에게는 심각한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정치 상황만 봐도 우리의 관심의 끈을 늦출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한낮 누구를 해임하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신문지면을 메울 때면 정말 짜증스럽기만 합니다. 앞으로 이 나라가 어떻게 될는지 누구나 자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치 문제가 우리에게는 발등의 불입니다. 정치를 바르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잘못된 정치로 망국의 길을 걷는 우리의 가까운 민족이 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경제문제 또한 얼마나 시급한 문제인지 모릅니다. 온 세계가 장기 불황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탐탁치 않은 말들을 신문이나 TV를 통해 들으면서 마음의 불안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경제력을 갖춰야만 입지를 펴며 대우를 받는 것이 현실입니다. 따라서 경제가 급격히 나빠지면 우리도 남미처럼 처참한 상황에 놓일 확률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녀교육 문제도 얼마나 시급합니까? 그 밖에 부부 문제, 건강 및 사업 문제, 앞으로 내가 추구하는 목표와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성공의 문제 등 우리에게 있어서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현실 문제라고 해서 다 속되거나 신앙과 관계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하는 우리라고 해서 현실문제와 동떨어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 역시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잘 아셨습니다.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 압박 속에 신음하는 백성들의 사정을 주님은 다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관심이 현실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 합니다. 만일 제자들처럼 현실 문제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 나라를 잊어 버리게 되면 우리의 인생은 비참해질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관 안에 하나님 나라가 발붙일 자리조차 없다면, 아무리 열심히 교회에 다녀도 결국 허무로 끝맺는 비참한 인생의 결말을 맞이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없는 인생관을 가지고 신앙생활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삶이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삶입니다. 어쩌면 잘못된 인생의 마무리로 인해 일평생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진정 의미 있고 보람된 삶을 살길 원합니까? 처음보다 끝이 화려한 삶을 살길 원합니까? 영원히 남을만한 인생을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가 인생관의 최우선순위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그 나라가 내 모든 관심사 중 가장 중요한 부분에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요, 사상이요, 생각이었습니다.
각자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볼 때, 예수님께 더 가깝습니까? 아니면 제자들에게 더 가깝습니까? 만일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도록 질문을 받는다면 얼마나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대답에 따라 우리의 진정한 관심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특징
하나님 나라는 일반적으로 천국, 즉 죽어서 들어가는 나라로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쪽 진리일 뿐, 더 크고 넓고 높은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에서 부활하시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통치하시는 영역을 말합니다. 그 나라는 예수님의 통치 아래 영원히 이어질 나라입니다.
누가복음 1장 33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영원히 예수님께서 왕 노릇 하는 나라요, 영원히 이어질 나라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에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영적인 나라로 영적인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영토를 가진 나라가 아닙니다. 총칼로 정복하는 나라도 아닙니다. 지도에 표시해 두어 언제든지 들여다 볼 수 있는 나라도 아닙니다.
누가복음 17장 20절 이하에 보면 한번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그분을 시험코자 다음과 같이 질문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곧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마음, 너희 영혼에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로써 영적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흔히 세상 나라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가치관도 다르고, 그 나라의 특징도 다르고, 그 나라가 지향하는 목표도 다릅니다. 따라서 세상 나라에 푹 빠져 있는 사람은 아무리 귀가 아프도록 외쳐도 그 나라에 대한 개념조차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중생 받고 그 영혼에 눈이 열린 사람, 그 영혼에 귀가 뚫린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를 알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는 범세계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독점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수 백만의 이스라엘 백성들만 모여서 세우는 나라가 아닙니다. 1장 8절을 보면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 나라가 ?예루살렘?부터 시작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온 유다와 사마리아?를 벗어나 나중에는 ?땅끝까지? 하나님 나라가 확장됩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 나라는 협소한 민족주의가 절대로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인종의 차별도 없습니다. 국경의 차이도 없습니다. 계층간 차이도 없습니다. 남녀 성별 차이도 없습니다. 모든 백성, 모든 민족이 초청을 받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가 완성될 즘이면 요한계시록 7장 9, 10절에 나타나는 황홀한 정경이 우리 눈 앞에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내가 보니 각 나라와 백성과 족속과 방언에서 누구든지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백성 중에, 방언 중에? 이 말은 범세계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말합니다.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이 말은 예수님께서 깨끗하게 해주심으로 예수님의 의를 힘입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큰 소리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 이렇게 찬송하고 있다고 예언합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한번 그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흑인도, 백인도, 황인도,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그 나라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모두 천사와 같이 아름다운 존재인 것입니다. 소프라노와 엘토가 한 목소리로 어우러져 ?구원 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하고 우렁차게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거기에 무슨 증오, 무슨 악의, 무슨 미움과 사기가 있겠습니까?. 거기에 무슨 죽음, 아픔, 눈물이 있겠습니까?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대로 그런 범세계적인 나라가 올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 나라는 점진적으로 확장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금방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성령이 임하시면 복음이 증거되기 시작한다고 말씀합니다. 이어서 13절에는 예수님의 재림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그 두 사건이 나란히 기록되어 있는 이유를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언제 시작됩니까? 바로 성령이 임하시던 날입니다. 그래서 1장 8절에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이라고 말씀하고, 2장으로 넘어가면 성령이 임하게 됩니다. 그때가 바로 가시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태동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언제 이루어집니까? 11절에 보면 승천하시는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 하나님 나라는 완성됩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시고 이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그 중간기에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벌써 2천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보다도 훨씬 더 가까이 주님의 재림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는 전세계적으로 계속 확대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고 있는 이 중간기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성령의 권능을 받은 증인들로 인해 계속 선교로 채워져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던 그 날로 시작해서 주님이 재림하실 그날까지 오직 증인들을 통해서 복음으로 이 세계를 채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고 돌아 오도록,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모든 민족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일에 우리가 전력을 쏟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 나라에 이미 동참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나라를 위해서 정말로 중요한 직분을 소명으로 받아 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라도 희박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그 삶 자체가 빗나간 것이요, 세속화 된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악한 세상, 덧없는 인생
악의 세력이 이토록 무서울 정도로 온 세상을 짓밟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도 우리가 절망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가 점점 더 완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악이 자녀들을 미혹하고 이 세상을 지옥같이 만듦에도 불구하고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우리가 영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십자가가 얼마나 무겁습니까? 아침 저녁으로 눈물 마를 날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 ?주여? 하고 하루하루를 힘있게 살려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에 대해 주인 의식을 가져야 됩니다. 우리가 주인이요, 세상 나라만 늘 생각하는 사람은 주인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고 살면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기대하는 그 사람이 역사의 주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교회 다니는 이상 하나님 나라와 관계없는 사람처럼 생각하거나 행동해선 안됩니다. 그것은 자기 모순입니다.
저는 나이가 들어 가면서 예수님이 왜 하나님 나라만 이렇게 골똘히 생각하시고 말씀하셨는지 조금 이해할 것 같습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의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은 너무 악합니다. 우리 눈에도 그러한데 예수님 보시기에도 얼마나 악하겠습니까? 10년 전에 비해 오늘날 이 세상이 얼마나 지옥과 같이 변해 버렸습니까? 사람들은 점점 마귀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한시도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가 노력해도 세상은 갈 때까지 가다가 종말을 맞이할 것입니다. 어떤 정치가도, 어떤 과학의 발달도, 어떤 사상의 발전도 이 세상을 구제하지는 못합니다. 이 악한 세상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달려가고 말 것입니다.
또한 인생이나 세상은 덧없습니다. 우리 입으로도 인생의 덧없음을 하루에도 몇 번씩 고백하는데, 하물며 예수님은 어떻겠습니까? 덧없는 인생의 종말은 허무입니다. 이 허무한 인생을 놓고 우리가 한 생을 희생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외치라...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40:6-8)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이 풀이나 꽃이 아니라고 착각하며 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덧없음을 깨우치시고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소리를 내어 외쳐라. 인생은 풀이라고. 인생의 아름다움이 대단해도 그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아 하루 아침에 시드느니라. 하루 아침에 말라 버리느니라. 인생이 그렇다고 외쳐라.? 세상에 무슨 소망이 있어 예수님이 세상 이야기를 자꾸 하시겠습니까?
최근에 집안에 환자가 있어 중환자실을 자주 드나들곤 했습니다. 마침 그 병원에는 같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신생아실과 중환자실이 이웃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한쪽에선 시도 때도 없이 새 생명이 태어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선 생명을 잃은 시신이 실려 나오곤 했습니다. 불과 복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생명과 죽음이 교차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인생은 덧없습니다.
한번 뒤를 돌아다 보십시오. 꿈을 꾸듯 행복했던 어린 시절, 지금 어떻게 기억되고 있습니까? 그 기억이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게 만듭니까? 그 황홀했던 허니문, 돌아보니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아름답고 힘이 넘치던 2-30대의 젊음과 기력, 그것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또한 내 마음과 시간, 젊음을 쏟아 부어 힘겹게 얻은 어떤 목적들, 그로 인해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밤낮으로 브라운관에 등장해서 우리가 시선을 빼앗았던 막강한 권세와 명예를 소유했던 인물들, 그러나 5년, 10년, 20년 지난 지금 그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대부분의 인생은 풀과 같은 인생에 속고 꽃과 같은 아름다움에 속아 한 생을 살다가 벼랑 끝에 서고 맙니다. 이런 허무한 세상인데 예수님께서 무슨 기대를 가지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진정 살아갈 이유가 있다면
그러므로 비록 우리에게 현실 문제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을 적당히 다루고 넘어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관심은 세상 나라가 아닌 하나님 나라에 있어야 합니다. 그 나라가 완성 되려면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선택 받은 자들이 계속 돌아와야 합니다. 5대양 6대주에 흩어진 수많은 민족들이 회개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그들을 불러 들이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가 권능을 갖고 전도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전도하면 안 믿을 것 같은 사람이 예수 믿고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 믿읍시다.?라는 한 마디에 한 사람의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성령의 권능이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신앙생활하면서 만일 ?하나님 나라에 대해 관심이 없다. 옆에 안 믿는 사람을 봐도 전도할 생각이 없다. 예수를 안 믿던 이웃 사람이 죽어도 마음에 아픔이 없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1982년에 시작된 대각성전도집회는 20여 년 동안 사랑의교회를 건강하게 했던 원동력이었습니다. 18번의 집회를 통해 30,865명이 초대를 받아 복음을 들었고, 그 가운데서 45%에 해당하는 13,872명이 예수를 믿겠다며 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작년에는 가장 많은 결신자를 얻었는데, 4일간 2,622명이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만일 사랑의교회에 대각성전도집회가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생명력이 있는 교회로 남아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놀라운 집회를 앞두고 지금껏 3개월 동안 준비하면서 단지 535명만이 1,200명 정도의 태신자를 등록한 상태입니다. 2만 명의 출석하는 교회에 535명이라는 수는 실로 부끄러운 숫자입니다. 우리 주변에 전도 할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만히 앉아 있을 겨를이 없습니다.
이 세상 나라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인생은 덧없습니다. 아무리 호화로운 인생을 살았다 한든 허무만이 남을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모르는 인생, 그 사람은 어떤 면에서 살아갈 가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만 긍정적으로 떠벌릴 뿐, 우리가 영적으로 보면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없다면 도무지 살고 싶은 않은 세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있기에 오늘도 태산을 지나 험곡에 가도 찬송하면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나라를 위하여 무언가 소명을 갖고 하나님의 손에 쓰임받는 증인들이 되기 때문에 살 맛나는 것입니다. 가난하던 부유하던, 못 났던 잘났던 상관 없습니다. 우리 모두 그 나라를 위해 벽돌을 하나씩 옮기는 엄청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
지난 주에 재미있으면서도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이 지난 15년 가까이 목회를 한 부산 호산나교회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그 교회에 어느 여집사님 한 분이 계셨는데 믿지 않는 남편을 인도하기 위해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여보, 나 혼자 교회에 나가면 나를 과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한 번만 같이 나가서 내가 과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없어요?? 그러던 어느 주일 날 남편이 따라 나오게 되었고, 즉시 등록을 하였습니다. 이 가정은 사업을 하는 가정인데 잘 사는 집안이었습니다. 그후 이들 부부는 함께 장애인 사역을 하는 사랑부에 들어가 7년 동안 함께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아이가 성악 공부를 하기 위해 이태리에 유학 중이었는데, 몇 주 전에 그 아들이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는 비보를 받았습니다.
이들 부부는 아들의 시신과 짐을 정리하기 위해 이태리로 갔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그들은 옆에 앉은 승객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했다고 합니다. 그 승객이 가만히 보니 목사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여행을 다니는 사람 같지도 않은데, 이상하게도 자기에게 예수 믿으라고 하기에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뭘 하시는 분인데 이렇게 나에게 예수 믿으라고 하십니까?? 이러한 질문에 부부는 자초지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이 쇼크를 받았습니다. 예수 믿으면 죽었던 아들이 살아나야 될 판인데, 멀쩡하던 아들이 죽었는데도 그 예수를 욕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에게 예수 믿으라고 하니 얼마나 큰 쇼크였겠습니까? 그래서 아마 그 승객이 예수를 믿게 되었나 봅니다.
이태리에 도착해보니 사고를 낸 사람은 평소 자기 아들이 전도하려고 친하게 지내던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아들 친구의 잘못으로 사고가 났는데도 아무런 보상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장례식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 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옆에 있는 사람에게 또다시 전도 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교회에 돌아 와서 그 집사 부부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면 돌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이상한 짓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 때문입니다. 그 나라에 가면 내가 당한 이 모든 슬픔의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나에게 불행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있기에 나는 슬픔의 늪에서도 전도할 수 있었습니다.?
과연 우리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까? 삶의 최우선 순위가 하나님 나라입니까? 우리 인생의 종점이 하나님 나라입니까? 그리고 그 나라에 지금 내가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분명히 인식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세상 나라를 위해 뛰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뛰고 있습니까?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고 밤이 되어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과연 하루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내게 주신 물질과 시간과 은사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기여하는 거룩한 산 제사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주변에 믿지 않는 이웃들에게 직간접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일에, 오늘도 쓰임 받았노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 앞에 우리는 과연 어떠한 사람인지,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치우쳤는지 스스로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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