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화평의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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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에드워드 데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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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십니까? 사랑하는 독자여, 이 질문은 나이든 사람이든 젊은 사람이든,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이 숙고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애정 어린 진지한 마음으로 당신이 이 질문에 진실 되고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을 때까지 절대로 안식을 취하지 말 것을 청하는 바입니다. 죽음과 영원의 관점에서 모든 것이 이 질문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옵게도 당신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당신은 지금 행복한 사람이며,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당신을 죽음으로 부르시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차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임을 알기에, 죽음 너머 당신 앞에 놓여 있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당신이 지금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못한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면, 당신은 지금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으며(요 3:36), 사망이 임할 때,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아래에서 죽음이 당신을 영원한 비참함과 화(禍)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즉시 하나님과의 화평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들이 제거되었으며,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로부터 다시 일으키심으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사역을 영원히 만족하심을 보여주셨고, 이제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신 증거를 믿는 자는 누구나 용서해 주실 뿐 아니라, 그를 의롭게 하시고 의로운 자로 여기신다는 사실을 아는 지식으로부터 유래한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는 누구나 자신의 죄가 영원히 제거되었고, 하나님의 영원한 은혜 안에 서 있으며, 장차 하나님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 복된 지식을 누리며 사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이 지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독자여, 이 질문이 바로 지금 당신이 주의를 기울어야 할 질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왜 모든 사람이 다 화평을 소유하지 못하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바르게 만드셨습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유혹자의 말을 듣기 전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방문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죄를 범하자마자 그는 두려워했고, 동산 나무들 가운데 자신을 숨기고자 했습니다(창세기 3장). 그때까지 아담은 무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담은 죄인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들 가운데 있는 죄인들 사이에는 화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의 뜻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롬 8:7), 이러한 자들은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났던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골 1:21). 바로 이것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마디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사실을 시인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화평의 길을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합니까?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할지라도, 그 고백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이 당신의 입술에 있는 동안에도, 당신은 자신을 개선하거나 하나님의 마음을 끌려고 하거나, 삶의 성격을 바꾸어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는 소망을 품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필자는 당신에게 다른 질문을 하고자 합니다. 당신은 자신이 잃어버린 죄임임을 아십니까? 이 질문이 의미하는 바는 지금 당신은 절망적인 상태에 있으며, 자신을 그대로 내버려 둘 경우, 회복할 가능성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필히 영원히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당신이 잃어버린 죄인이라는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 있었을 때, 그는 선과 악을 아는 나무를 만지지 말라는 명령에 복종할 때만이 자신을 둘러싼 축복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었습니다(창 2:16, 17). 그는 범죄하여 모든 것을 잃었으며, 그로 인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창세기 3장).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사람이 그분의 요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보셨습니다. 아담과 같이 노아도 실패했습니다(창 9:20,21). 이스라엘은 율법의 계약을 어겼습니다. 그들은 제사장 직분을 잃었습니다. 왕국체제 아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권위를 거부하고 우상숭배자들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분의 옛 백성에게 그리스도가 나타났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신 그분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시험의 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온 세상에 심판이 내려졌으며, 사람이 하나님께 가망 없는 대적임을 그리스도의 죽음이 증명하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사람은 집행유예(執行猶豫)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사람은 잃어버린 자로 밝히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을 잃어버린 죄인이라고 말할 때, 이는 지금 당신이 집행유예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는 지금 당신이 그분을 섬길 것인가의 여부를 알기 위하여 당신을 기다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단번에 영원히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십자가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다루시는데 있어서 새로운 태도를 취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서 무엇을 기대하시는 대신에,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잃어버린 바 되었으며,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육체가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의를 죄인에게 가져 오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이라고 선언하십니다(롬 3:24-26).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하신 그분의 길에서 오래 참으시는 가운데, 사람이 그분을 위해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으며 아무 것도 그분께 가져올 수 없음을 보여주셨을 때, 친히 개입하셔서 독생자를 주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인을 구원하는 의로운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의 죄로 인하여 이미 잃어버린바 되었고 정죄 아래 있음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독자여, 이해하십니까? 당신은 자신이 단지 불쌍한 잃어버린 죄인임을 시인하십니까? 독자에게 계속해서 도움을 주기 위하여 믿는 이가 된 자들의 과거의 상태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한 말씀, 즉 모든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의 상태를 기술한 말씀으로 자신을 살펴보기를 요구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자, 로마서 5장을 봅시다. 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이 구절에는 "연약할 때"와 "경건치 않은 자"라는 두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 "경건치 않은 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독자여, 당신은 "경건치 않은 자"라는 용어를 당신에 관한 사실로 받아들이십니까? 자신은 그같이 나쁘지 않다고 말하십니까? 그렇다면 함께 그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단어가 외적 행위에 대해 적용되어서 단어의 참된 중요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용례에서 보듯이 그 단어는 행위 뿐 아니라 마음의 상태에 적용됩니다. 그 단어는 하나님이 없이 지내는 것(godless) 즉,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뜻에 상관하지 않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 내가 당신을 따라 당신의 집으로 들어가서 당신이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 그분께 감사하지 않고 테이블에 앉는 것을 본다고 합시다. 또는 당신을 따라 방에 들어가서 밤에 당신이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거나 보호하심과 돌보심을 구하지 않은 채 안식을 취하는 것을 본다고 합시다. 나는 즉시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며, 하나님 없이 지내는 경건치 아니한 자의 삶입니다." 당신은 이 판단이 사실임을 인정합니까? 다음에 살펴볼 단어는 "연약할 때", 즉 "무력하다(helpless)"입니다. 당신은 경건치 아니할 뿐 아니라 악한 상태에서 벗어나는데 있어서 무력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실족하는 것이 바로 이점에서 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무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독자가 잠깐만 생각해보면 자신 안에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 자신이 잃어버린 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즉시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경건치 아니할 뿐 아니라 절대적으로 무능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때야 비로소 자기 밖에서 구원의 방법을 찾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8절로 가서 우리는 "죄인들"이라는 용어를 보게 됩니다. 이미 앞에서 이 용어를 살펴보았듯이, 10절에서 즉시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는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구원받지 못한 영혼은 하나님께 원수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강한 단어가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사도는 다른 곳에서 육신적인 생각, 즉, 육신의 생각 -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인 자연인의 생각 - 은 하나님께 대적이 된다고 말합니다(롬 8:7). 죄인의 생각과 의지가 항상 하나님과 반대된다는 사실은 무서운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입증되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고, 다시 "그들이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18-25). 이 증오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십자가에서 완전히 표현되었습니다(행 2:23). 필자는 독자들이 이러한 말씀으로 자신을 살펴 볼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이 사실인 것은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말씀들은 오류 없는 펜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말씀들을 사실로 받아들이는가 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이 사실로 받아드려질 때 비로소 실제적인 진보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 안에 계시된 은혜의 특성은 하나님 앞에서 먼저 인간의 상태에 관한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까? 이러한 사실들이 정직한 사람과 도덕적인 사람과 중죄인과 범죄자를 차별하지 않고 모두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하나요? 성경은 이 질문을 예견했습니다. 성경은 명확하게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19,22,23). 어떤 이는 다른 사람보다 외견상 더 죄를 짓지만,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상태에 대한 심판의 근거는 그의 행위뿐 아니라 마음, 뜻, 감정, 생각의 상태입니다. 다시 한 번 독자에게 자신에 관한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였는지를 묻겠습니다.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순간, 화평의 길은 알려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죄인의 상태를 드러내시기 위하여 그러한 수고를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만 그가 절망적인 죄인이며 무능한 자임을 깨닫게 하셔서, 죄인의 시선을 그분 자신에게로 와 그분의 은혜 안에서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으로 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한편으로는 사람이 만약 자신이 불쌍한 잃어버린 죄인임을 깨닫는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능하신 구주로 나타나십니다. 이제 우리가 독자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것은 주제의 이 두 번째 부분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화평의 길의 단순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두 구절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골로새서 1:20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이 구절은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화평은 사람이나 믿는 이와의 화평이 아닙니다. 화평은 그리스도께서 죽음 안에서 우리의 모든 책임을 짊어지시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와 죄들에 관한 모든 문제와 우리의 어떠함과 우리의 행함에 관한 모든 문제를 아셨고 완전히 해결하셔서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사역으로 무한히 영광을 받으셨으며, 그 결과로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께서 이제 불쌍한 죄인을 값없이 자신에게로 데려오시는 의로운 기초가 되었으며, 죄로 인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켰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이 화평은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이 화평은 하나님의 왕좌의 화평으로서 대속죄일에 긍휼자리(시은좌)에 뿌려진 피에 의해 예표로 제시되었습니다(레위기 16장). 그리스도의 피가 화해물로 드려졌을 때까지 하나님의 왕좌는 죄인을 대적하였습니다. 이제 그 피가 하나님을 위해 이루신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왕좌로 나아가는 길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은혜의 태도를 취하셔서, 죄인들로 하여금 복음을 통하여 자신과 화해하기를 요청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나오는 사악하고 극악한 죄인들을 받아주시되, 의롭게 받아주시도록 합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진 화평은 복음을 위한 하나님 자신의 기초입니다. 즉, 이 화평은 하나님의 모든 의로우신 요구를 만족하는 근거로서, 그분의 전(全) 본성(本性)이 영광을 받으셨으며,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은혜의 메시지를 보내심으로 만족해하십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다음 구절을 보면 더욱 더 분명해집니다. 에베소서 2:17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종들을 통하여 완성된 속죄 사역의 기쁜 소식을 받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피로 이룬 화평을 선포하십니다. 독자들은 "평안을 전한다"는 말씀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화평(평안)은 돈이나 대가없이 메시지를 듣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화평은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주어집니다. 이것은 주님 자신이 친히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 첫날에 제자들이 함께 모였을 때,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첫 말씀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이었습니다(요 20:19). 자신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지금 오셔서 속죄 사역의 열매로서 화평, 즉 하나님과의 화평을 제자들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까? 화평을 이룬 사역은 그리스도께서 홀로 이루신 사역이었습니다. 그 사역은 그분과 하나님 사이의 거래였습니다. 그 사역은 하나님께서 부활에 의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시고 하늘에서 자신의 오른 편에 앉히심으로 증거하신 사역의 효력에 대한 거래였습니다. 이 사역에는 아무도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역은 이미 잃어버린 바 된 죄인들을 위하여 성취된 사역이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앞에서 보았듯이, 사역이 성취되었고, 그분께서 오셔서 먼저는 제자들에게 화평을 선포하셨으며, 이제는 복음을 통하여 듣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의 화평의 길은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통하여 은혜 안에서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화평은 돈으로 사거나 어떠한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으며, 다만 값없이 주는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계속해서 복음 안에서 전 세계에 두루 선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에게 화평을 선포하는 자, 그분은 섞이지 않은 충만한 은혜에 관해 말씀하시네. 높은 자와 비천한 자에게 - 부르심을 듣는 자들에게 늙거나 젊은 모든 아담의 후손에게 그분은 화평을 선포하시네. 그리고 신성한 사랑은 그분의 얼굴에서 빛나네. 독자는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십니까? 첫째,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향해 화평을 이루셨으며, 그분의 보배로운 피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요구를 모두 영원히 만족시키셨습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행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화평을 주시며,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의 죄가 그분의 시야에서 영원히 제거되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에 관한 증거를 받아들이는 모든 자에게 화평을 주십니다. 독자여,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다음의 성경 구절을 보십시오. 로마서 5:1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이 구절은 두 가지를 보여줍니다. 첫째, 하나님의 칭의의 방법은 믿음에 의해서 입니다. 둘째, 의롭게 된 자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립니다. 이제 이 두 가지 점을 각각 다루고자 합니다. 독자는 단지 성경을 펴고 따라 오기만 하면 됩니다. 먼저, 칭의는 믿음에 의해서입니다. 이것은 행위에 의한 칭의와 대조를 이룹니다. 율법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레위기 18:5)(로마서 10:5를 볼 것). 그러나 사도는 서신서(로마서)를 시작하자마자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죄인이며,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유죄라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그러므로 행위의 길은 영원히 닫혀 있습니다. 사람이 어떠한 상태에 있든지 스스로의 행위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헛된 것입니다. 행위의 길은 닫혀 있을 뿐 아니라 분명하고 확실한 멸망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독자여, 행위, 행함, 감정에 의해 구원을 찾은 결과는 필히 영원한 멸망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롬 4:5)(갈라디아서 3:10을 볼 것.) 다른 점을 살펴보면 이 사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사람으로부터 의(義)를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사실상 사람은 이미 잃어버린 죄인이며, 따라서 하나님을 위한 어떠한 의(義)도 만들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육체는 아무도 없음을 밝히 드러내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고, 그 의(義)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이에게 임했다고 말합니다. 의(義)는 결코 행위로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오직 그분의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를 의롭다고 간주하는데서 드러납니다. 믿는 이를 의롭게 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기초 위에 자신의 어떠하심의 모든 것과 조화를 이루며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의(義)의 길은 믿음이지 행위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칭의를 위하여 또는 의로운 자로 간주되기 위하여 무엇을 믿어야 하나요? 이것은 로마서 4장 마지막 부분에 완전히 제시되어 있습니다. 사도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를 의(義)로 간주케 하였다고 지적하였습니다(20-22절). 그리고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23-25절). 얼마나 복되고 단순한지요! 3장에서 읽은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그분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해물로 제시하셨고, 이제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신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신 분으로 드러나시며, 죽은 자로부터 그분을 일으키신 그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들이 영원히 제거되었음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이같이 하심으로 친히 자신을 은혜의 하나님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주신 분으로, 그리하여 우리 믿음의 대상이 되신 분으로 제시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에게 주신 증거를 받아드릴 때 의롭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 의(義)로 간주되며, 하나님은 우리의 죄들을 깨끗케 하실 뿐 아니라, 모든 믿는 이를 의로운 사람으로 단정하십니다. 이것이 칭의(稱義)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실 것임을 믿었을 때 의롭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시며 성취하신 바를 믿을 때 의롭게 됩니다. 둘째로 의롭게 된 모든 자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갖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화평은 칭의의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권능으로 개입하셔서 우리의 범죄를 짊어진 자를 죽은 자로부터 일으키신 하나님을 믿으며, 일으켜진 분은 우리의 죄들이 제거되었다는 영원한 증거이시고, 유일한 참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그것을 행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립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해 말소되었습니다. 죄짐을 벗은 우리의 마음은 구주 하나님을 압니다." 독자여, 잠시 멈추고 이 중요한 사실을 심사숙고하십시오. 왜냐하면 일단 이 말들의 의미를 깨달으면, 하나님께서 친히 그분과 믿는 이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하셨으며,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믿는 이의 죄들은 그분 앞에서 영원히 사라졌으며, 따라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모든 자들을 위하여 굳건한 화평의 기초를 놓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두려워 떨며 이 화평을 누리지 못한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화평을 누리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평을 소유하였음을 확신하기 전에 반드시 행복한 감정을 느껴야만 하나요? 이것은 하나님의 질서를 뒤집는 것이며, 사람의 일들 가운데서 겪는 경험과도 모순이 됩니다. 축복이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 때까지 그 축복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당신이 많은 재산을 상속받는 상속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합시다. 당신은 자신이 행복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그 재산이 당신의 것이 될 수 없다고 대답하겠습니까? 당신은 마음에 끼치는 영향이 전적으로 당신의 믿음이나 당신이 접한 소식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범죄로 인하여 넘겨지셨으며 칭의를 위하여 다시 일으켜지셨다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의롭게 여기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당신을 의롭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하나님과의 화평이 이루어지고, 그 화평이 당신에게 확신이 되며 그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 때까지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과 당신 사이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십자가의 사역에 기초하여 불변하며 결코 빼앗길 수 없는 화평을 이루셨다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복된 누림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화평은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습니까? 의심할 여지없이 이 화평을 누리는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만약 믿는 이가 타락하여 날마다 죄에 빠지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판단하지 않고 이 세상의 자녀와 같이 걸으며, 베드로가 가르치듯이 그리스도인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그의 옛 죄를 깨끗케" 된 것조차 잊을지도 모릅니다(벧후 1:9). 이 모든 것은 사실이기에 항상 강조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는 이가 부주의하게 걸으며 죄 가운데 사는 것보다 더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거나 하나님의 징계의 손을 확실하게 보증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사역의 영원한 가치가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성경 구절의 기초 위에 (로마서 5장에 더하여 히브리서 10:1-18을 보십시오.) 하나님과의 화평은 영원한 소유이며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의롭게 된 사람은 그의 칭의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의한 것이기에, 자신의 실제적인 상태가 어떠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실로 믿는 이의 영원한 안전이 여기에 있습니다. 곧 의롭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시는 기초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시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나 사역은 모두 그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의롭게 될 때 우리의 것이 되는 하나님과의 화평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칭의 위에 수반되는 하나님의 화평은 많은 다른 축복들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서 임재한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립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옛 사람의 모든 열매들은 파기되었습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죄들에 관해서 어떠한 문제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나에게 돌리시지 않으십니다. 그 문제는 모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해결되었습니다. 현재 나는 그분의 은혜를 누리는 가운데 그분의 임재 안으로 인도되었습니다. 은혜는 하나님과의 현재의 관계를 특징짓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요구에 따라 나의 모든 죄는 제거되었으며, 죽은 자로부터 일어나신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영광을 만족하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합니다. 그것은 충분한 근거가 있는 소망이며, 결코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자신과 우리의 소망을 위한 그분의 완전하심, 은혜, 영광과 연관되어 있으며, 이것들에 따른 것입니다. 영원히 지속될 하나님과의 화평, 하나님의 현재의 은혜, 영광의 소망 등, 모든 것은 부활 안에 있는 그분의 권능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독자여, 끝으로 애정 어린 마음으로 묻겠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십니까? 만약 화평을 누린다면, 그분의 은혜가 이미 당신의 마음을 찾아왔기 때문에, 장차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듯, 지금 그분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만약 화평을 누리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눈을 열어주셔서 이 소책자에 제시된 진리를 보게 하시고, 당신의 마음을 열어주셔서 받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이 소책자를 반복해서 읽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의 긍휼로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가지 안식하지 말 것을 간청하는 바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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