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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보다 귀한 생명 (마 16:26)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한 마디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생명 존엄에 대한 위대한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는 사람을 돈 주고 사고 팔 수 있었습니다. 율법을 어겼다고 사람을 돌로 쳐 죽일 수 있었습니다. 아내나 딸이 성범죄를 저지를 경우 가문의 명예를 어겼다고 가족들이 죽일 수 있었습니다. 당시는 이렇게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던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때 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사실 오늘도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여기는 사람을 쉽게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돈 몇 푼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렵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북한 같은 곳에서는 이념적인 문제 때문에 사람이 공개 처형되는 일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인도나 이슬람권에서는 소위 ‘명예살인’이 공공연하게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여전히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 선언하신 주님의 말씀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주목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시점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의 말씀 곧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야 비로소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온 천하를 지으신 예수님께서 한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만 한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뿐 아니라 이 말씀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만이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을 위해 희생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헌신하고 있는 사람들만 한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 설 때만 한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 때만 한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 절감하게 됩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
예수님의 사역을 살펴보면 여러 곳에서 한 생명을 정말 귀하게 여기셨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막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 가셨을 때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달려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살펴보니 군대귀신이라 불릴 정도로 귀신의 수가 많았습니다.
마침 근처에 돼지 떼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군대귀신을 그 사람에게서 나오게 하시고 대신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 때 귀신이 들어간 돼지 떼가 갈릴리 바다로 뛰어들어 몰사했습니다. 그 때 죽은 돼지가 거의 이천 마리나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 돼지 이천 마리를 희생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한 생명이 그만큼 소중하기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왜 십자기를 지셔야만 했는지를 깨닫게 되면,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까지 하셔야 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관점에서 성경을 살펴보면, 두 가지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이 있고 천하가 있다는 것입니다.
눅 12장을 보면 소위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온통 재물을 모으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 해에도 농사가 풍년이 들어 거두어들인 곡식을 어떻게 보관할까를 고심합니다. 이미 창고에는 곡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창고를 더 크게 짓고 곡식을 거기에 가득 쌓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그렇습니다. 생명이 있고 천하가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고 돈이 있는 것이고, 생명이 있고 인기가 있는 것이고, 생명이 있고 권력이 있는 것이고, 생명이 있고 꿈도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점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설 때만 이 점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관점에서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둘은, 생명을 위해 천하가 있다는 것입니다.
창 1장을 보면 천지 창조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주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그 후 맨 마지막에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인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창 1:28-29)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리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그렇습니다. 생명을 위해 천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위해 천하를 만드셨습니다. 생명은 천하를 돌보고 관리하고 사용하면서 번성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생명에게 주신 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점을 잊지 마십시오. 십자가의 관점에서 이 점을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생명보다 귀한 생명
성경을 보면 우리가 말하는 생명과 다른 또 다른 차원의 생명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우리가 암송하는 말씀 요 3:16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또 다른 생명인 영생을 주시려고 아들 예수를 보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영생이란 무엇일까요? 요 17:2-3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영생에 관해 두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는 영생은 예수님을 통해서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이 땅에 태어나면서 얻게 되는데 비해서 영생은 예수를 믿으면서 얻게 됩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생이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가는데 누리는 생명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단순히 지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원어로 ‘기노스코’(Ginosko)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은 만남과 관계를 통해 서로를 전인격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부부가 부부생활을 통해 서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영생이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알면서 누리게 되는 새생명을 말합니다.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예수님을 알면서 누리게 되는 새생명을 말합니다.
요 4:13-14에서 영생을 누리는 사람의 구체적인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한 마디로 말하면 영생을 얻은 사람은 더 이상 영적인 갈증을 느끼지 않으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영생을 누리는 사람들은 그 심령 속에 샘물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계속해서 생수가 솟아납니다. 그래서 영적 갈증이 해소됩니다. 늘 만족하고 늘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다윗은 시 23:5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가 돈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그가 이 땅에서 모든 것을 다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심령 속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가 영생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빌 4:4에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리스도인이 세상적으로 늘 기뻐할 일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신 영생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생은 단지 주님과 동행하면서 이 세상을 살 동안에 누리는 새생명이 아닙니다. 저 천국으로 이어집니다. 글자 그대로 ‘영생’(永生) 영원히 이어지는 생명입니다. 죽음 이후 저 천국에서 더욱 활짝 꽃피워지는 생명입니다. 이 세상을 살 동안에는 그 생명의 존재가 희미하지만 저 천국에 가면 완전하게 드러나는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고통이 없고 다시는 슬픔이 없는 가운데 영원히 이어집니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삶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한 생명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는 점을 깊이 깨닫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무엇보다 영생이 귀하다는 점을 깊이 깨닫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선 생명을 풍성히 누리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요 10:10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 주신 영생을 누리되 풍성히 누리며 살기를 바라십니다.
허연경이라는 분이 쓴 [아! 생명이 있기에]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아! 생명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복이며 아름다운 것인가?
그 속에 생명이 있기에 소망이 있고 생명이 있기에 지금의 헐벗고 빛 바랜 모습이 결코 초라하지 않다. 나 비록 지금 연약하고 병든 몸이지만 내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기에 결코 낙망하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먼저 우리는 지금 우리 안에 영생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지금 이 영생이 우리 속에서 꿈틀거리며 역사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생있는 사람으로서 남다른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무디 선생은 한 번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어떤 날 신문에서 D.L.Moody가 죽었다는 기사를 읽으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그 말을 믿지 마시요.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지금보다 더 좋은 곳에서 잘 살게 되었다는 것 뿐이니까요."
그렇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영생 얻은 우리는 결코 죽음으로 우리의 생명이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죽음 이후 더 멋진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은 사람들은 마치 번데기가 고치 안에서 있다가 때가 되어 나방이 되어 저 하늘을 훨훨 나는 것처럼 죽음 이후 저 천국에서 참된 생명인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는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남다른 생명을 누리며 삽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 저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 생명의 소식을 전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행 26:29을 보면 우리가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바울이 지금 죄인으로 끌려와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를 변호하여 석방될 길을 찾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서조차 바울은 생명의 소식 아름다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은 물론이고 지금 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리고 있는 영생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직 영생을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생명의 소식을 전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영적 갈증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들,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들, 죽고 싶다고 절규하는 사람들 저들에게 이 생명의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눅 1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재미있는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주셨습니다. 한 부자가 한 평생을 세상재미에 푹 빠져 살았습니다. 그 집 근처에 나사로라는 거지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영생을 얻지 못했지만 나사로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러다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나게 됐습니다. 나사로는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됐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던 이 부자가 청을 하더랍니다. 눅 16:27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제발 아직 세상에 살고 있는 자기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해 달라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고 이 지옥에는 오지 말라고 전해 달라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고 저 천국에 가라고 전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런 안타까운 마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변에 세상 떠날 날이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 세상 떠나기 전에 꼭 영생을 얻어야 한다는 소식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아니 아직 살날이 많이 남은 것같은 사람들에게도 꼭 영생을 얻어야 한다는 소식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명이 귀합니다. 그러나 영생은 더 귀합니다. 우리 주변에 영생을 얻지 못한 사람들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우선 우리가 아름다운 소식을 전할 대상자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온 교회가 함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할 대상자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2월 한 달 기도하며 찾고 또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우선 가족들 가운데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가족 가운데 아직 영생을 얻지 못한 사람을 먼저 선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친구나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 가운데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웃들 가운데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내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이 3 사람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3월 3일 일제히 하나님께 그 이름들을 올려드리고자 합니다. 그 이름들을 품고 기도하고자 합니다. 모두가 함께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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