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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눅 4:31-44)

by 【고동엽】 2022.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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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눅 4:31-44)

 

 

만났다가 떠나게 되는 사람을 어떻게 해서라도 좀더 붙잡아 두고 싶은 경우를 우리는 자주 겪게 됩니다. 정말 찾아보기 드물게 일손 좋고 성실한 종업원이 개인 사정으로 가게를 떠나야겠다고 말해 올 때라든지, 절친한 친구와 오랜 만에 만나서 정겨운 대화를 나누다가 헤어질 시간이 될 때와 같은 경우입니다. 사람은 이처럼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믿음직한 사람을 만나게 될 때나 혹은 따뜻한 인정을 맛보게 해 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을 때, 어찌 하든지 그 만남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하고 싶어 안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을 방문하신 후 그곳을 떠나시게 되었을 때에 그 동네 사람들의 심정이 꼭 그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본문 누가복음 4장 42절에 보면 그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을 꼭 떠나셔야만 했습니다. 가버나움 사람들이 예수님이 떠나지 못하시도록 말린 것이나 예수님께서 부득이 떠나셔야만 했던 것이나 다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들이야말로 바로 오늘의 우리 역시 예수님을 반갑게 영접하고 영원히 모시고 살고 싶어지게 만드는 이유들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이유들이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이란 사람은 한번 바로 알고 제대로 만나기만 하면 결코 놓치려야 놓치고 싶지 않은 분이 되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 주일 아침에 주어진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그 이유들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영적 세계를 휘어잡으시는 그 권위와 능력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직한 주님으로 영접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가버나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체험했던 사실이었습니다. 본문 누가복음 4장 31절로 37절에 기록하기를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 /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고 했습니다.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을 당하신 예수님께서는 같은 갈릴리 지방의 큰 동네였던 가버나움에 가셔서 사역하고 계셨습니다. 그 곳 회당에서 안식일에 또 말씀을 전하게 되셨는데 무리들은 그 말씀에 「권세가 있음」 즉 권위 있게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 놀라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회중 가운데서 큰 소리가 났습니다. 귀신들린 사람 속에 있던 귀신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고서는 “아이구, 나사렛 예수님, 우리를 죽이러 왔습니까?”하고 비명을 질렀던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설교하는 도중에 회중석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여느 사람 같으면 무척이나 당황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귀신을 향해 즉각 꾸짖어 말씀하셨습니다.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당장 그 사람 속에서 나오라.”고 아주 권위 있게 명령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그 귀신은 그처럼 권위 있는 명령을 자기에게 내리는 사람은 평생 처음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권위에 꼼짝 못하고서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야만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발악으로, 그 사람을 넘어뜨려서 다치게 하려 했지만 예수님의 능력은 그것마저 압도하여 그 사람이 상하지 않게 했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가버나움 사람들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라고 감탄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사람이 귀신 들린 일은 본인에게나 주위의 사람들에게나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악령이 하는 짓인 줄 알고는 있었지만 그저 괴롭히는 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또 그것을 곁에서 보며 안타까워할 뿐 다른 무슨 뾰족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은 그들이 듣지도 보지도, 아니 상상해 보지도 못한 기상천외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대처할 길이 없어 보였던 그 귀신을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압도하고 굴복시키는 놀라운 권위와 능력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가버나움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 오래 붙잡으려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처럼 이 영계에 대하여 완벽한 권위와 능력을 쥐고 계신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얼마나 든든한 모습입니까?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면서도 귀신이라는 존재 앞에서는 한심하고도 비참하리만큼 무력한 존재가 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달걀귀신을 무서워해 왔고 어른이 되어서도 밤에 공동묘지를 지나가는 것을 여전히 겁을 냅니다. 옛날 사람들은 불길한 잡신을 쫓아낸답시고 온갖 부적을 붙이곤 했지만, 오늘날 개명했다는 현대인들 역시 세상의 온갖 종류의 악령들을 다 모아 놓은 ‘뉴 에이지’라는 종교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사탄의 지휘 아래 마귀가 날뛰는 세계는 이처럼 예로부터 지금까지 사람에게 공포와 혼란을 조성해 왔던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지 않으셨더라면, 이 세상은 여전히 이런 귀신들의 장난 아래 꼭두각시처럼 놀림당하고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 악령들을 권위롭고도 힘 있게 다스려 주시는 실로 믿음직하기 그지없는 주님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사업을 하다가 무슨 골치 아픈 법적 문제가 생겼을 때, 그런 문제에 대하여 잘 알고 있고 또 영향력까지 있는 어떤 법조계의 전문가가 여러분을 도와준다면 그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특히 이 영계에 있어서는 최고의 능력 있는 전문가요 최고의 권위 있는 실무자이십니다. 그러니 일단 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기만 하면 우리는 귀신 때문에 더 이상 왔다 갔다 할 필요도 없고 악령이 설치는 세계를 상상하면서 겁에 질려 살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고 있는 보혜사의 영은 너무나도 깨끗하고 거룩한 영이 아닙니까? 이 더럽고 어두운 악령들이 판을 치는 세상 가운데 우리에게 비춰지는 성령은 실로 순수하고 밝은 영이 아닙니까? 영적 세계에 대하여 그 필적할 대상 없는 권위와 능력을 우리를 위하여 발휘해 주시는 예수님,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에 악마의 계교를 즉시 물리치사 날 지켜 주시는’ 이 예수님을 나의 믿음직한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육신 문제까지 자상하게 돌보아 주시는 그 사랑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께 더욱 가까워지게 됩니다.

 

가버나움 사람들은 이것 역시 경험했기에 예수님을 놓아 보내지 않으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본문 누가복음 4장 38절로부터 41절에 기록하기를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줄 앎이러라」고 했습니다.

회당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 주신 후 예수님은 이어서 여러 병자들을 하루 종일 고쳐 주시게 되었습니다. 그 첫째가 시몬 즉 베드로의 장모였는데 심한 열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미 결혼했었다는 것은 여기 나타나는 ‘장모’라는 말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방금 회당에서 예수님의 능력을 직접 목격했든지 아니면 전해 들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누군가가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 걸려 있으니 고쳐 주십사고 예수님께 구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곧 그 열병을 고쳐 주셨고 그 시몬의 장모는 즉시 건강을 얻고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이미 회당에서의 사건 때문에 예수님의 소문이 파다하게 전해지고 있었는데, 이제 연이어서 시몬의 집에서 또 이런 기적적인 치유의 능력을 보여 주시자, 그 가버나움뿐 아니라 인근 동네까지 그 뉴스가 단숨에 퍼져나갔습니다. 그 결과 ‘해 질 적에’ 그 주변 지역에 있는 모든 병자들이 다 예수님께 꾸역꾸역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해 질 적에 찾아온 것은 퇴근한 후에 왔다는 뜻이 아니라, 31절에 기록된 대로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루를 해 질 때부터 다음날 해 질 때까지로 계산했기 때문에, 여기 ‘해 질 때’란 바로 안식일이 막 끝난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영향으로, 안식일에는 일정한 거리 이상 여행을 못한다든지, 혹은 병자를 부축하거나 침상에 들고 가는 것도 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저녁까지 기다렸을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 예수님으로서는 아침부터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등 바쁜 하루의 일과를 마치시고 막 쉬시려는 참에 그 병자들이 모여 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어느 목사에게 이와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새벽부터 밤예배까지 바쁘게 주일을 보내고 이제 겨우 한숨 돌리려는 참인데, 어느 교인이 ‘아이구, 목사님, 좀 어려운 부탁이 있는데요.’ 하면서 밤늦게 사택을 찾아온다면 아무리 목사라 해도 짜증날 법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전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육신을 입으신 몸이셨으니 분명히 피곤하셨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날 밤 늦게까지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쳐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즉 찾아오는 대로 한 사람 한 사람 빠짐없이 그 모든 병자를 다 친히 안수하여 고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또 귀신 들린 자들도 많이 고쳐 주셨는데, 그 귀신들이 쫓겨 나가면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소리를 지르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귀신들을 꾸짖으시면서 그런 말을 하지 못하도록 명하셨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귀신 따위들로부터 성자 하나님으로 인정받아야 할 위치에 계신 분이 결코 아니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여튼 예수님께서 그처럼 자상하게 한 사람씩 일일이 안수하시며 고쳐 주시는 모습은 그 앞에 찾아왔던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어떤 능력이 있다는 것과 그 능력을 자상하게 베풀어 준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전자는 도움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직한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이지만, 후자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형용할 수 없는 따뜻함을 느끼게 해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현실적으로는, 능력 있는 사람은 남을 자상하게 돌보아 주는 마음이 부족하고, 인정 많은 사람은 그 마음만큼 남을 도와 줄 힘은 정작 부족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만은 이 양면에 있어서 공히 완벽하신 분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만 권위자이신 것이 아닙니다.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과 같이 사시면서, 이 인생의 고달프고 힘들고 외로운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직접 겪어 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우리의 일용할 양식에서부터 시작하여, 우리 육신 생활의 희로애락 간의 모든 대소사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돌보아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런 예수님의 자상하고도 따뜻한 손길을 매일 매사에 체험하고 계십니까? 그 손길을 맛보지 못하고서는 예수님이 사랑스러워질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이 가게나 집에 심방 오게 되면 여러분은 ‘목사님이 날 생각해 주시는구나.’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 것입니다. 교우들이 자신의 병상에 위문하러 찾아오거나 애사를 당했을 때 조의를 표해 주면 그 때마다 더욱 따뜻한 정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친히 날 돌보아 주시는 것에는 그런 것들이 어디 비교라도 될 수 있겠습니까? 목사는 교회 잘 출석하고 봉사 잘하는 ‘아흔 아홉’ 양들조차 제대로 돌보아 주지 못할 때가 부지기수이지만, 그럴 동안에도 우리 주님은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안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무리 마음 좋은 교우라도 어려움을 당한 교우에게 겨우 전화 한번 하고 방문 한번 정도 할 수 있을 뿐이지만,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우리 주님은 밤낮 가리지 않고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을 내려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 모든 육신의 문제들과 형편들을 극진히 살펴 주시면서 ‘내 몸의 모든 염려 이 세상 고락 간 나와 항상 같이 하여 주시는’ 이 자상하신 예수님을 매사에 몸소 체험함으로써, 날마다 주님 더 사랑하고 더 가까이 다가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그 무엇보다도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이 전해 주시는 그 천국 복음 때문에 평생토록 그 주님을 붙잡게 됩니다.

 

그 능력과 사랑으로 우리의 영적, 육신적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시고 도와주시는 것만 해도 우리로서는 정말 반갑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우리 주님의 일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누가복음 4장 42절로부터 44절에 기록하기를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아마 그 날 예수님께서는 밤늦게까지 병자들을 고쳐 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일찍 예수님은 “한적한 곳”에 가 계셨습니다. 틀림없이 평소의 하시던 그대로 기도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가버나움 사람들은 아침 일찍부터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드디어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제발 자기네 동네를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물론 예수님께서 계속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어 주셨으면 하는 바램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청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야 하니까 떠나야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기 때문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진짜 목적이라고 천명하셨던 것입니다.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 동네에 계속 사시면서 그저 귀신이나 쫓아내어 주고 병자나 안수해 주시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당사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으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비록 예수님께로부터 귀신 쫓아냄을 받고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역시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지만, 이 ‘복음’을 받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있어서는, 일시적인 기적이나 치유보다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이야말로 사람들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이요 기적이요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 사실을 깨달아야 만이 예수님을 정말 진실로 반가이 영접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기쁜 소식을 어느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전해 줄 때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박수홍의 러브 하우스’라는 프로그램에 보면, 가난한 사람의 집 하나를 골라서 새로 깨끗하게 인테리어를 해 줍니다. 원래는 아주 꾀죄죄하게 살던 사람들이, 그처럼 예쁘고 새롭게 단장된 자기 집에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행복해 하게 됩니다. 그러니, 만약 누군가가 우리를 찾아와서, “당신네 집이 ‘박수홍의 러브 하우스’의 다음 대상으로 뽑혔습니다.”라고 알려 준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누구라도 그 소식 전해 준 사람을 부둥켜안고 고마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야말로 정말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정말 놀랍고도 감사하기 짝이 없는 ‘기쁨의 좋은 소식’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도 좀 예수님 비슷하게 흉내 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전에는 불치의 병으로 알려졌던 것들까지 세상의 의학의 힘이 하나씩 점령해 나가고 있습니다. 천재지변을 당한 이웃이 생기면 온정 어린 성금이 곳곳에서 몰려듭니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 복음’이라는 선물을 가져다 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것만은 오직 예수님께서만이 독점하고 계시는 최고의 귀중품이며,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시는 너무나도 고마운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하늘 아버지의 집,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이 기가 막히는 복음을 우리에게 손수 전달해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까지, 우리 집까지, 내 마음 문 앞까지 친히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 기쁜 소식 듣고서야 어떻게 그 소식 전해 주신 예수님을 지극히 반가이 영접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옥 갈 수밖에 없던 죄인들에게 이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 주심으로써, 금세에서 ‘내 영혼 먹이시는 그 은혜’를 누리게 해 주시고 ‘나 친히 주를 뵙기 원하는’ 그 자리에까지 인도해 주시는 이 예수님을 진정한 구세주로 영접하고 끝까지 붙드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아가서 3장 1절로 4절의 말씀에 보면 「내가 사랑하는 자를 찾아서, 만나서, 붙잡고, 놓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부된 성도는 이 신랑을 ‘찾고’ 일단 ‘만나게’ 되면 확실히 ‘붙잡고’ 다시는 ‘놓지 아니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혼탁하고 두려운 악령의 세계를 권위 있는 능력으로 깨끗하게 물리치시는 이 믿음직한 주님, 이 어렵고 힘든 인생살이 가운데서 매사에 자상하기 이를 데 없이 돌보아 주시는 이 사랑스러운 주님, 그 무엇보다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초청해 주는 이 놀라운 복음을 전해 주시는 실로 고마운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이런 예수님을 한번 직접 만나고 그 능력과 인격의 맛을 본 사람은, 다시는 그 주님을 놓치려 해야 놓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번 사귀어 보면 그 능력과 선하심이 한이 없으신 이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날마다 친구로 가까이 교제하고, 그 약속해 주신 천국에 이르도록 끝까지 붙잡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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