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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전파의 책임! (롬 10:13-15)

by 【고동엽】 2022.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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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전파의 책임! (롬 10:13-15)

 

  이 세상에서 사람이 남기는 가장 의미 있는 말은 유언입니다. 평소에 부모님의 말씀을 거스르던 불량아도 부모의 마지막 유언만큼은 지키려고 노력을 합니다. 왜냐하면 유언은 그만큼 의미가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사역을 마치고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 즉 유언이 있습니다. 그것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냥 말씀이 아니고 명령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지상 명령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 복음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새롭게 인식하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복음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복음은 이 땅에 주어진 오직 한 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은 오직 이 복음밖에는 없습니다.
  지금 한창 다원주의 신학이 말썽을 일으키고 있지만 이것은 말이 안 도는 주장입니다. 다원주의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에도 구원이 있고, 유교에도 구원이 있고, 심지어는 통일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신학입니다.
  정말 그렇다면 우리가 기독교를 고집하고 강조하고 예수만을 강조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도 모두 구원이 있다면 이 땅에 굳이 기독교가 있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다원주의에서는 심지어 동학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최재우를 최메시야라고 부릅니다. 최재우가 동학을 일으켜서 농민을 해방했다고 해서 그를 최메시아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요즘 말썽을 일으키고 있는 다원주의 신학이고 포스트모던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이 복음에 대해서만은 절대성을 지녀야 합니다. 복음이 아니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절대성 말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전도를 하니까 말하기를 "우리나라에도 귀신이 많은데 꼭 서양 귀신을 믿어야 하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그렇게 값싼 것이라면 우리가 이렇게 고집을 부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에 대해서 절대성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로 복음은 긴박한 것입니다.

 

  전도의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문은 열려 있는 때가 있습니다. 열려 있을 때에는 언제나, 누구나 들어와도 좋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활짝 열려 있던 문이 언젠가는 굳게 닫힐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누가 와서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사에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을 때가 있고 멸망을 받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문이 활짝 열려 있을 때가 있고 문이 굳게 닫힐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복음의 긴박성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때가 중요합니다. 그때가 지나가 버리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디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는 일생에서 씻을 수 없는 큰 과오를 저질렀던 때가 있었다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가 시카고에서 대전도 집회를 했습니다. 수많은 청중이 모인 운동장에서 설교를 하는데 자꾸만 성령이 감동해 오기를 이 시간에 심판에 대해서, 종말에 대해서, 영혼 구원에 대해서, 설교하라고 자꾸만 감동이 옵니다.
  그 설교는 내일 저녁에 하려고 하는데 자꾸만 오늘밤에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감동하기를 "내일은 네 날이 아니다."고 그러십니다. 그런 것을 억누르고 "내일 저녁에 하면 되겠지"하고 하던 설교를 마치고 그 날은 집회를 끝냈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역사에 기록될 시카고 대화재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 밤에 시카고 전 시내가 불바다가 되었고 수많은 시민들이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무디는 전날 밤에 인생의 종말에 대해서 설교를 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면서 죄인 된 심정으로 살았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긴박성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일은 내 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내일을 아무도 모릅니다. 내일 아침에 내가 오늘처럼 또 일어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말입니다.
  미국에서 어떤 장로님은 두 내외분이 평상시처럼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옆자리에 누워 잠자던 장로님이 이미 숨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장로님이었으니 망정이지 믿지 않는 사람이었더라면 어떻게 되는 거냐 그 말입니다. 그분이 다름 아닌 믿지 않는 나의 아버지고, 나의 형제이고, 나의 남편이라면 이것이 적은 문제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긴박한 것입니다.

 

셋째로 복음은 확실한 것입니다.

 

  전도하는 사람은 희미한 태도를 가지면 안 됩니다. 확신 있고 확실한 태도를 가지고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말도 확신 있게 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 답니다."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공산주의자가 친구인 기독교인을 향해서 말하기를 "우리는 거짓말을 가지고는 참말인 것처럼 믿고 자신 있게 살아가고 있는데 너희는 역사적인 부활의 진리를 믿으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힘이 없느냐"하고 흉을 보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복음은 확실한 것입니다. 이 확실한 복음을 확신 있게 전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넷째로 복음은 반드시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은 누군가 전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말씀하시기를 "저희가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이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복음을 전하는 이의 발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전도는 기도만 하고 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물론 기도도 해야 하지만 기도하고는 나가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름진 옥토도 있어야 하지만 누군가가 밭에 씨를 뿌려 주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맛을 내듯이 복음 전도는 누군가 전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발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나서서 전도를 하시면 잘 하시겠지만 절대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직접 나서서 스스로 전도하지 않습니다. 무지하고 연약하고 더디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하시고 우리들을 통해서 전도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들도 오늘 이 자리에 나오기까지에는 누군가의 전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랬듯이 여러분도 누군가를 그렇게 전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전해 주지 않으면 들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반드시 누군가 전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복음은 잘 받아 들이는 사람부터 전해야 합니다.

 

  너무 쉽게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분은 신앙 생활을 해도 아주 깨끗하고 순전하게 잘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아주 힘이 드는 분이 있습니다. 아주 안 받아들입니다. 10년, 20년을 두고 기도를 했는데도 변화의 조짐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때는 그 한사람에 매여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해가면서 꾸준히 노력은 하되 듣는 사람부터 우선 전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 되는 것을 되도록 한다고 끝까지 우기며 고집을 부리다가는 시간과 정열만 낭비하고 맙니다. 그래서 지혜롭게 일해 나가야 합니다.
  마치 시험을 볼 때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뒤로 미루어 놓고 쉬운 것부터 먼저 품고 어려운 문제는 나중에 시간이 되는 대로 풀어 나가야지 어려운 문제 하나에 매달려 있다가는 한 문제도 풀지 못하고 그 시험은 망쳐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전도는 잘 받아들이는 사람부터 우선해서 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복음 전도는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열정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전도 학에서는 "전도를 하려거든 먼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다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이 말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전도를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분은 아버지가 고집스럽게도 믿지 않으려고 하는데 저러다가 어느 날 그냥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느냐고 큰 걱정을 합니다. 사실 그러다가 어느 날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아버지가, 내 어머니가" 그냥 돌아가신다면 이것은 큰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도 별 생각이 없다면 이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이보다 더 큰일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이렇게 큰일을 놓고도 별 감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먼저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성 다미앵이라는 사람은 하와이 몰로카이 서에서 문둥이들을 상대로 해서 전도를 했는데 너무 깨끗한 얼굴을 가지고 전도를 아니까 잘 먹혀 들어가지가 않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하나님께 "나도 저 사람들처럼 문둥병을 주십시오."하고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사람들과 살을 비비고 함께 살고 해서 나중에는 자신도 문둥병자가 되어서 그 사람들과 똑같은 처지가 되어서 효과 있게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바울도 전도를 하기 위해서 이방 땅에 가서는 이방인처럼 살면서 전도를 했고, 유대인에게 가서는 유대인처럼 살면서 전도를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전도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자니까 자기 희생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여러 모양의 불쌍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다리 하나 잘린 사람에게 가서 전도하기를 "두 다리를 몽땅 잃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하고 위로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해서는 그 사람을 전도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고약한 데가 있습니다.
  한쪽 다리를 잃은 사람에게 가서 전도를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 주려면 두 다리를 잃어버린 사람이 가야 말이 통합니다. 두 다리를 잃은 사람에게는 팔도 잘린 사람이 가서 하나님을 찾아야 받아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가서 전도하려면 역시 병든 사람이 찾아가야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가서 전도를 하려면 역시 가난한 사람이 가서 전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 병든 그리스도인을 만들어 놓으셨고, 가난한 그리스도인을 두셨고, 불구의 그리스도인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가난하고, 병들고, 불구자로 이 모양일까 하고 탄식하지만 그게 모두 하나님이 뜻이 있으셔서 주신 사명입니다. 모두 사람에게 효과 있게 전도하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다음 주일은 모두 전도해서 함께 주님 앞에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시고 마음먹고 전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도를 하는 데는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는 가족입니다. 남들이 다 구원을 받고 내 가족이 구원을 받지 못하면 그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러고는 친척이고 다음이 이웃이고 기타입니다.
  성경에서는 말씀합니다. "아름답도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이제 여러분들은 이 설교를 들으시고 이번 한 주간은 고민을 하면서 돌아다니실 것입니다. 그렇게 고민을 하면서 전도하기 위해서 돌아 다니는 여러분들의 그 발걸음이 주께서 보실 때 아름다운 발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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