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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3권 <구원받은 자는 이렇게 산다> 91쪽에 있는 글입니다.
40. 그리스도인과 정치적 책임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로마서 13장 1-7절
본문을 읽으면서 전체 내용이 어떤 것이라는 감을 잡으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13장 1절에서 하나님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고 일종의 정치적인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바로 앞까지만 해도 겸손한 자가 되고, 마음을 주는 자가 되고, 축복하는 자가 되고, 원수를 위해서 먹을 것, 마실 것을 주는 사랑의 이웃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앞의 내용과 이 말씀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고 우리는 의아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로마서 13장 1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은 바울이 쓴 것이 아니라 누가 갖다 붙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성경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악평했습니다. 그 사람의 논리대로 하자면 앞에 있는 12장 21절이 건너뛰어 13장 8절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 사람들에게 원수 갚지 말고 사랑을 공급하라는 12장 말씀이 13장 8절의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씀과 직접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일곱 절의 말씀은 무시하고 지나가도 될까요? 아닙니다. 일점일획도 거짓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렇게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을 놓고 누가 갖다 붙였다느니, 각색을 했다느니 하는 소리를 하는 것은 성경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왜 갑자기 정치적인 이야기가 나올까요? 두 가지 초점을 놓고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당시에 바울로부터 이 서신을 받아 읽게 될 로마 교인들은 대부분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 정부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식민지 백성으로 어렵게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항시 로마 정부에 대해서 반감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는 극단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 극렬분자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황제를 자기들의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의 지도자는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세상의 왕은 아예 인정하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더 나아가서 로마 정부에 세금 바치는 일을 거부했습니다. 고분고분 세금을 바치는 자가 있으면 암암리에 그 집에 불을 지르거나 아니면 당자를 죽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로마 정부를 뒤집어엎겠다는 일념으로 어떤 폭력도 마음대로 행사했습니다. 이런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로마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애매한 처지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 정부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매우 난감한 위치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그들의 처지를 염두에 두고 바울은 13장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필요한 이상, 국가에 대해서 백성들이 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웃에게 원수 갚지 말라는 원리는 국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합니다. 원수 갚지 말라는 원칙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유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로마 정부를 뒤집어엎으려는 생각도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편 우리는 또 다른 면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12장에서 가르쳐 주는 말씀대로만 살면 우리 모두는 성자가 되어버립니다. 이웃을 향해 겸손하고, 축복하고, 늘 마음을 주고, 원수를 갚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국가 지도자는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선한 사람들이 사는데 무슨 통치자가 필요합니까? 이상주의적인 신앙생활을 추구하다 보면 세상 국가에 대해서 경멸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 쉽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왕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백성이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하고 마치 세상의 지도자들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 쉽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이런 이상론자들이 가끔 있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것처럼 지상 국가에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비록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이 세상 국가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본문의 흐름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서 복잡한 현실 정치에 대해 백과사전적인 대답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의도는 대원칙을 가르치자는 데 있습니다.
원칙이 왜 중요합니까? 무엇이나 원칙에서 벗어나면 다 잘못되기 때문입니다. 가령 부모를 모시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이런저런 구실을 늘어놓으면서 부모 모시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꼭 필요한 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는 기본 원칙입니다. 지도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정치에 대해 염증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도 지도자를 대하는 원칙이라는 것은 분명히 있습니다. 지금 본문이 그 원칙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이 가르쳐 주는 진리의 골자는 무엇입니까?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1절).
바로 이것입니다. 그 나머지 내용은 이 말씀을 해석하는 내용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대략 네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세 가지는 이미 본문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내용들이고 다른 하나는 이 본문을 중심으로 얻은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을 한 가지씩 검토해 보고자 합니다.
국가의 법에 순종하라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는 두 번째 의미는 국가의 법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3절).
'관원들'은 법을 집행하는 공직자들을 가리킵니다. '선을 행하라'는 말은 법을 지키라는 의미입니다. 법을 지키기만 하면 공직자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도리어 칭찬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국가의 통치자와 공직자들은 국민의 안녕과 평화를 지켜 주고 공평과 정의를 시행하기 위해서 세움받은 하나님의 일꾼들입니다. 나라마다 백성이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그들을 보호해 주는 법이 있습니다. 악한 자들의 행동을 억제하고 그들의 죄를 징계하고 다스리는 법이 있습니다. 통치자와 공직자들은 이 법을 바로 보호하고 바로 집행할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칼뱅은 "법은 강력한 힘줄이며 나라의 혼이다. 법은 말없는 공직자요, 공직자는 살아 있는 법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법이 있는 국민은 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국가란 원래 서로 법을 준수하기로 서약하고 결속한 사람들의 집단입니다. 그러므로 법을 지키겠다는 상호간의 약속이 무너져버리면 무질서만 남게 됩니다. 이 약속이 무너지면 악하고 이기적인 사람만이 살아남는, 그야말로 정글의 법칙만이 통하는 무서운 사회가 되어버립니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은 국가를 주셨고, 통치자를 주셨고, 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법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질서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 인간은 악하고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본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본능을 통제하시기 위해서 질서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질서를 세우는 것은 법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4절).
공직자는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우리 중에 공무원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가끔 못된 짓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직자들에게 법을 집행할 수 있는 권리를 주셨습니다. 이것을 칼에 비유했습니다.
그런데 통치자가 마음에 안 드는 마당에 법은 무슨 법이냐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아예 조그마한 교통 법규도 안 지키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히려 안 지키는 것을 용감한 행동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담배꽁초를 길가의 재떨이에 버리든지 아니면 포켓에 넣고 가야 하는데 지하철 환기통에 탁 던져 넣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끔씩 환기통 청소를 하면 꽁초가 몇 십 포대 나온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상한 사람이 많다는 증거입니다.
사소한 법 하나도 안 지키면서 오히려 자기가 영웅이 된 것처럼 생각한다면 얼마나 비뚤어진 시민 정신입니까? 우리에게는 이렇게 비뚤어진 국민 정신을 바로잡아 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하고 가르침으로써, 법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국민의 의무를 다하라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는 세 번째 의미는 국민의 의무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6, 7절).
한마디로 세금을 바치라는 이야기입니다. 납세는 국민의 의무입니다. 대통령이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서, 정치가 잘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우리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서 세금을 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우리가 국가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까? 나라가 없다면 우리가 존재할 수 있습니까? 국가가 없이 내 가정이 안전할 수 있습니까? 무질서가 판을 치는 세상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범죄가 판을 치는 세상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폭력 때문에 문을 열고 나오지 못하는 세상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외부로부터 침입자가 쳐들어올 때 누가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습니까? 이 나라가 없다면 우리의 행복은 보장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나라에 빚을 지고 살면서도 세금 내기를 싫어한다면 이 땅에 살 자격이 없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제가 시무하는 교회 당회원 중에 서울 수도권의 치안 담당자로서는 제일 높은 지위에 계신 분이 있는데, 제가 그의 사무실을 들러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 취임한 후 연일 야간 근무를 했다고 합니다. 치안을 담당하는 총수가 왜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워 가며 밤을 세워야 합니까? 우리 사회가 그만큼 타락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긴장을 풀면 시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없는 지경이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치안을 잘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수고하는 공직자가 있기에 우리가 이만큼 안전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는 나라에 빚진 사람들입니다. 개인의 힘으로 도무지 누릴 수 없는 공공 서비스를 우리가 얼마나 많이 받고 있습니까? 교육이라든지 수도라든지 도로라든지 화장실 청소하는 것이라든지 심지어 쓰레기 내버리는 것까지 우리는 국가의 도움을 받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급적이면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이 궁리 저 궁리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납세자는 정직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 사회에 구조적인 악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성실하게 국민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몇 년 전에 로스렌젤레스에서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폭동으로 인해 우리 교포들이 수십 년 동안 힘들게 쌓아 놓은 공든 탑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비극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막대한 손해를 입었습니다. 다행히 미국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해 주기로 했습니다. 상세한 피해 상황을 보고서로 제출하면 보상을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고서를 정직하게 작성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부끄럽게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것은 자타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보상을 받아 낼 목적으로 쓰는 보고서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미국 정부는 피해자들이 내놓은 보고서만 믿고 돈을 내 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낸 세금 실적을 참고로 하여 보상을 했다고 합니다. 그동안 세금을 정직하게 낸 사람들은 이 같은 정책을 환영했을 것입니다. 보상을 많이 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포 피해자들 가운데 상당수의 사람들이 매우 난감한 처지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평소에 수입을 속여서 세금을 적게 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피해가 대단해도 그동안 세금을 적게 냈었다면 보상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정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금은 반드시 내야 합니다. 세금을 안 내려고 속임수를 쓰지 마십시오. 우리 중에 세무 공무원이 있습니까? 정직하게 납부하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지기 바랍니다. 정직하게 세금 내는 사람을 도리어 의심하는 비뚤어진 시각을 갖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 중에 공인회계사가 있습니까? 세금을 적게 내려고 재주 피우는 사람에게 동조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행동입니다.
국민의 권리를 책임 있게 행사하라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는 네 번째 의미는 국민의 권리를 책임 있게 행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결론적인 내용입니다. 바울이 살던 시대에는 국민이 자기 권리를 행사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때는 왕위가 세습제였기 때문에 평민 계급에서 정치 지도자가 나온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이 많게도 오늘날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이 자유민주주의도 하나님이 주신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회에서는 통치자의 권리가 국민에게서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지도자를 세울 때 국민의 손을 통해서 뽑는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국정을 맡은 지도자를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행사하는 선거권을 이용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우리의 선거권을 어떻게 이행해야 할 것이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지금까지 우리는 지도자 복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동안 너무 많은 피해를 당해 왔습니다. 지역 간의 대립이 일어난 이유도, 계층 간의 갈등이 생긴 것도 지도자들의 잘못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왜 정치 불신이 생겼습니까? 왜 사회가 도덕적으로 문란해지며 정신적으로 해이해집니까? 정치 지도자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지역 사람들은 너무 오랫동안 피해를 당한 나머지 지금은 감정밖에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지도자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강단에서 이런 정치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대단히 조심스럽습니다. 공정하게 말씀드려야 하겠지만 어느 정도 공정할 수 있을지 그것도 사실은 의문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가르쳐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나라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가만히 있는 것은 자기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배웠습니다. 또한 지도자를 그 자리에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가 대통령이 되든 일단 통치권을 잡으면 그 사람에게 존경을 표해야 하고 의무를 다해야 하고 법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나 우리 마음이나 좋은 지도자를 세워야 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잠언 14장 34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잠 14:34).
의로운 통치자가 세워져서 의롭게 정치하면 우리 모두가 영화로운 백성이 되지만 죄를 함부로 짓는 통치자가 세워지면 백성이 욕을 당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좋은 지도자를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좋은 지도자를 세우는 데 정성을 기울여서 하나님의 뜻에 협력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대단히 무거운 책임을 느낍니다. 우리 국민의 4분의 1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신교나 구교를 망라해서 네 사람 중에 한 명이 예수 믿는다는 말입니다. 4분의 1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선거에서 당선과 패배를 좌우할 수 있는 힘을 교회가 갖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를 바꿔 말하면, 우리가 잘 뽑아도 책임을 져야 하고 잘못 뽑아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학 박사인 충북대 안 모 교수의 말은 대단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분의 견해를 따른다면 가독교인들이 그렇게 많았지만 지난 반 세기 동안 정치적인 변수가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정치를 좌우할 만한 세력이 못 되었다는 말입니다. 천만 기독교 신자가 똘똘 뭉쳐서 한 후보자를 밀었더라면 나라가 달라졌을 거라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인해서 대통령이 되었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기독교적인 정치관, 기독교적인 윤리관을 가지고 이 나라를 다스리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정치적인 변수로서 힘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통령이 된 사람도 기독교인들을 오합지졸로 보고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성경적인 정치 이론과 윤리 이론이 통할 수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정치인들이 우리를 무시하게 내버려둘 것입니까? 안 됩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좋은 정치, 깨끗한 정치, 정직한 정치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의 권리를 바로 행사하는 믿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정치적 책임은 신앙 양심의 문제다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니라"(5절).
정치적인 책임은 신앙 양심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서 양심에 가책이 없도록 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투표도 신앙 양심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피보다 더 진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신앙입니다. 예수 위해서 부부 사이도 끊어질 수 있고, 처자도 떠날 수 있고, 혈연 관계를 끊고 목숨을 바칠 수도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대통령 후보로 나온 사람이 자기의 친척이기 때문에 찍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는 양심을 팔아먹은 사람입니다. 신앙 양심이 잘못된 사람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친척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쉽게 결정합니까? 그러고서는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면 기도가 나오겠습니까?
앞에서 소개했던 안 교수의 글 중에 재미있는 말이 있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대권 후보자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띄우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다음은 그가 말하는 편지 내용입니다. "나는 오늘날 이 시점에서 이 나라를 이끌어 갈 훌륭한 지도자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부족한 지도자라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신앙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에게 기대를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연말에 있을 대통령 선거 때까지 다음 몇 가지에 대해서 가시적 변화나 구체적인 정책을 보여 준다면 대선에서 한 분을 지지할 생각입니다. '지역 감정을 어떻게 해소하겠습니까?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를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정치 자금에 대한 솔직한 입장을 말하십시오. 금융실명제는 어떻게 실시하려고 합니까? 공명 선거에 대한 귀하의 의견은 무엇입니까?' 이런 것들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해 주십시오."
우리는 이와 같이 일치단결한 마음을 가지고 통치자가 되려는 사람에게 결단을 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정정당당하게 투표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나라 정치를 보고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 경제가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흑자만 계속되는 나라였다면 사랑의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서초동 유흥가는 더욱더 요지경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경제가 어려우니까 술집에 들어오는 발걸음이 점점 줄어들어서 요즘에는 노래방밖에 안 보이는 것이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됩니다. 정치나 경제나 사회의 여러 가지 면에서 실망스러운 점이 많지만 절망하지 맙시다. 이 나라의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누가 지도가가 되든 간에 그를 세우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정치적 책임을 다하도록 노력합시다. 우리나라 천만 기독교인들이 나라를 위해 기도한다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안 들어 주실 리가 없습니다. 통일을 위해서 이 나라를 준비시키실 것입니다. 세계 선교를 위해서 이 나라 교회를 준비시키실 것입니다. 이 나라의 미래가 하나님의 손에 있고, 믿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출처] 40. 그리스도인과 정치적 책임|작성자 나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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