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충만한 자의 담력 (행4:13-22)
어느 교회에 신실한 여자 집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의 남편은 교회에 나오질 아니해서 아내로서 그 남편을 위해서 늘 기도하며 꾸준히 권면을 하고 늘 교회에 함께 나가기를 독려했습니다만은 그렇게 쉽게 따라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런 어느 주일날 아침에 남편이 느닷없이 하시는 말씀이 "나 오늘 당신과 함께 교회에 가려는데"라고 하더랍니다. 깜짝 놀라서 이제 하나님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시는가 보다 하고 서둘러서 남편과 함께 교회에 가게 됩니다. 가면서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오늘 어느 목사님이 설교하시나? 모처럼 가는데 좋은 목사님이 설교하셔야겠고 무슨 제목으로 하실까? 어떤 본문을 보실까? 이 첫 번 교회에 나가서 바로 은혜를 받아야 하겠는데 이거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궁금하게 생각하며 교회에 나갔는데 주보를 딱 받아보니까 본문이 뭐냐하면 창세기 5장이더라구요. 찾아보려고는 하지 마세요. 창세기 5장에는 사람의 이름만 나옵니다. 이 계보라고 하는 족보가 쭉 나오는데 사람의 이름만 나와요. 아, 이거 큰일났거든요. '어떡하나 이거' 거기에 보면 대체로 요약하면 그래요. 아담은 930세를 살고 죽었다. 셋은 912세, 에노스는 905세, 게난은 910세, 마할랄렐은 895세, 야렛은 960세, 그리고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고 죽었다, 뭐 그런 얘기예요. 이 집사님은 깜짝 놀랐어요. 이거 어떡하나? 모처럼 제 남편이 교회에 처음으로 나왔는데, 좀 낙심이 되지만은 여호수아 6장 1절을 생각했답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스스로 자기를 위로하면서 조심스럽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는데 마치고 나올 때에 남편이 "여보 등록합시다" 그러더랍니다. 그리고 가서 등록용지를 찾아서 다음 주일부터 교회에 나오겠다고 등록을 했어요. 참 이거는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래 집에 돌아가서 음식을 잘 차려서 남편에게 대접을 하고 조용히 물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오늘 특별한 말씀을 들은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떤 말씀을 들었기에 이렇게 결심을 하게 되었느냐"고. 남편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아무개도 죽었더라, 아무개도 죽었더라, 아무개도 죽었더라. 이거 대체로 많이 살기는 했드만." 그러나 죽었더라,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너도 죽어' 그러더랍니다. 나는 죽을 준비가 되어있질 않다. 내게는 구세주가 필요하다. 그래서 믿기로 했노라 그러더랍니다.
참 용기의 근본이 어디에 있습니까? 심리학자들이 심층분석해서 연구해 보면 사람은 두 가지 걱정밖에는 없답니다. 하나는 죽을까 하는 걱정이요. 죽음이라고 하는 엄연한 사실이 내게 다가오고 있어요. 그게 첫째고, 두 번째는 죄 문제입니다. 죄에 대한 가책이올시다. 사업이 안돼서 고민하는 게 아니에요. 죄가 생각나서 그래요. 자녀가 공부를 못한다고 할 때도 자녀를 나무라는 게 아니에요. 내 죄 때문에 얘가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 고민이에요. 감기만 걸려도 벌벌 떠는 것이 다 죄 때문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에요. 비가 안 오는 것도 뭐 여러 가지로 얘기하지만은 이것도 다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하늘이 문을 닫지 않았나, 그래 고민이에요. 죄 문제, 죽음과 죄 문제, 이것이 근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를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가치관을 배우고 세계관을 배우고 많은 귀한 교훈을 예수로부터 배우겠다 하고 예수를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로부터 복도 받고, 출세도 되고, 성공도 얻고, 무엇인가 예수로부터 권력도 얻고, 예수로 인해서 무언가 내 소원을 이루어보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에요. 예수를 따릅니다. 그러나 이 두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몇십 년을 교회에 나왔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중생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사람의 특징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가지게 되고, 특별히 중요한 것은 이제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면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성령을 믿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설교말씀을 들을 때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중생하여 순간순간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리고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다. 한 단 더 나아가서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하게 될 때 이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만이 아니라, 좀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의 영에 이끌리어 살아가게 되는 것이올시다.
톨스토이는 이런 말을 합니다. '인생 존재의 참 비결은 살아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아는 데 있는 것이다.' 성령이 나와 함께 있을 때, 이제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올시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의 속성을 아주 단면적으로 확실하게 말해주는 그런 내용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제자, 대표적인 그리스도 인이 지금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섰습니다. 이 산헤드린 공회라고 하는 것은 당시 유대 나라의 종교정치를 통합한 그런 귀한 국회와 같은 공회입니다. 여기서 생사를 결정합니다.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까지 여기서 재판을 해버립니다. 예수님도 사실은 여기서 사형선고를 받고 빌라도의 손을 의지해서 빌라도를 통해서 사형집행을 한 것뿐입니다. 사형판결은 여기서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이 자리에서 재판 받으실 때, 베드로가 저 뒷전에서 벌벌 떨다가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그 현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섰습니다. 오늘 그들의 특징은 담대합니다. 용기가 있습니다. 현대인의 결정적인 약점이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돈은 있으나 용기가 없어요. 지식은 있으나 용기가 없어요. 여건도 그만하면 괜찮은데 용기가 없어요. 왜 이렇게 쫄아들고 있느냐? 왜 이렇게 비겁해졌느냐? 한번 생각해보세요.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로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 충만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의 의식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대답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라고 말합니다. 자기 눈 앞에는 지금 공회의 회원들 71명이 즐비하게 앉아서 아주 무서운 눈초리로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아주 저 사람들을 아예 다 말살해 버리려고 하는 그런,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를 또 죽이려고 하는 바로 그 자리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는 하나님을 본 거예요. 하나님 앞에 있다고 하는 의식을 가진 거예요. 사람 앞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는 존재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받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건, 어떤 말, 어떤 일을 보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의식이 더 충만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질 않습니다. 그 옛날 마틴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보름스 라고 하는 의회 앞에서 재판을 받습니다. 역시 생사권을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거기서 현장에 서서 스튜트가르트에 가면 그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요만한 표식이 있는데, 그는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Oh, God. Here I stand." 이건 유명한 말입니다. '하나님이여, 나 여기 서있습니다.' 딱 한마디입니다. 사람 앞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내가 섰습니다. 바로 이 의식, 그 정체 의식, 그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생각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스데반이 순교할 때만 해도 헬라파 유대인들, 왕년의 동료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를 갈며 돌을 던집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을 바라봅니다. 거기에 보좌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보았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 앞에 내가 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에 저 사람들이 돌을 던지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바로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항상 초점을 하늘에 두고 삽니다.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그 의식이 그 충만함이올시다.
독일의 신학자인 '몰트만'이라고 하는 분이 '생명의 샘'이라고 하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의 영에 사로잡히게 되면 개인의 모든 삶은 카리스마적 체험이 된다.' 성령에 사는 사람의 경험, 지식, 모든 사건이 전부 카리스마적 의미를 가지게 되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의 문제가 되요. 카리스마적 체험으로 의미가 바꾸어지는 거예요.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이요. 모든 일에 하나님과 나와의 은사적 관계, 카리스마적 관계가 되더라는 얘기입니다.
또한 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그대로 체험하고 있는 겁니다. 역사적인 예수, 세상에 오셨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고 멀리 가버린 분이 아니에요. 이제 영으로 우리 가운데 계셔요. Exalted Christ라고 그럽니다. 영광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Living Christ로 살아 계신 그리스도로 지금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의식했어요. 그런고로 표적이 나타나는 것이에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 성전 문에 앉아있는 사람, 하루 이틀 본 게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따라 그 성전에 올라가면서 딱 만나는 순간, 그리스도의 영이 그를 감동해서 '넌 왜 보고 지나가느냐?' 이거예요. 그래서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이 40세 된 이 사람을 향해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 했더니 벌떡 일어났어요. 모든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을 우러러보며 하고 있지만은 그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나와 함께 있다고 하는 증거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서 역사하신 거예요. 그것 뿐이요. "어찌하여 나를 쳐다보느냐? 난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 살아 계신 그리스도가 이 자리에 나타나셨느니라"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이것이 충만함입니다. 내 손으로 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요. 다 주님이 직접 나를 통해 역사하는 것뿐이에요. 그리스도께서 지금 살아 역사하고 있다. 그것을 의식하고 그렇게 순종하게 됩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이제 나를 지명했다는 데 대한 감격으로 삽니다. 하필이면 왜 나 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어째서 나 같은 사람입니까?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고용하시고 나를 사용하시고 나와 함께 역사하느냐 말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필이면 허물 많은 나 같은 사람, 나약한 나 같은 사람, 어지러운 과거를 가지고 사는 왜 나 같은 사람입니까? 사도바울은 생각합니다. 나는 예수를 핍박했고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다. 죄인의 괴수다. 그러나 내가 직분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충성되이 여기셨기 때문이다. 나를 사로잡고 나를 포로해서 나를 통해 역사한다는 거죠. 너무 감격스러운 거예요. 어찌해서 주는 나를 사용하시는 겁니까? 그런고로 이런 사람에게는 원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용서하셨는데 누구를 용서 못합니까? 주님이 나를 사랑하셨는데 바울의 고백대로 보면 내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그가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내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그는 나를 사랑하셨는데 이제 내가 누구를 미워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이올시다.
저는 좀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게 되고 자기의 어두운 과거로부터 완전히 출애굽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목사이기 때문에 아마 이 문제에 더 신경을 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난 베드로의 용기가 가상해요. 왜냐하면, 보세요. 베드로의 과거를 다 알고 있잖아요. 이게 오래 전 된 얘기도 아니고 불과 몇 일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베드로가 도망갔던 사람 아닙니까?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사람 아닙니까? 다 알고있어요. 모두가 알고 있어요. "저 사람이 수제자라고 하면서 도망갔댔다며?" 다 아는 그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가 지금 담대하게 설교를 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그것이, 그것이 알고 싶어요. 보통문제가 아니거든요.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그게. 그의 어두운 과거를 다 알고 있는 바로 그 사람. 불학 무식한 것까지 알고 있고 그가 갈릴리 물고기 잡던 어부라는 것까지 다 알고 있어요. 형편없는 인간이다 이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담대하게 나의 모든 부끄러운 과거로부터 완전히 출애굽을 했습니다. 여기에 새로운 용기가 있는 거예요. 과거가 아무리 그의 발목을 잡아도 상관없습니다. 지난날에 내가 누구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기억이 없습니다. 깨끗이 지워버리고 오직 주의 사람으로 주님이나를 쓰신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그거만 가지고 역사합니다. 이 얼마나 굉장한 일 입니까? 자기를 부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자기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할 수 있다는 게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더구나 인간관계에 있어서. 그러나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이것이 가능했습니다.
찬송가 20장을 보면 "다 감사드리세" 하는 가사입니다. 우리가 주일 아침마다 자주 부르는 찬송입니다. "다함께 감사드리세"하는 찬송인데 이 찬송가의 역사가 너무 아름답습니다. 이 작사자인 마르틴 린카르트라고 하는 분은 독일의 목사님입니다. 17세기에 독일과 그 모든 구라파에 흑사병이 유행했습니다. 참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좌우간 기록에 보는 대로 이 목사님에게도 하루에 수십 명씩 죽고요, 하루에 오십번 장례식을 했답니다. 자기 아들도 흑사병으로 죽었습니다. 기록대로 보면은 이 수도원에 있는 수도사들이 흑사병 걸린 사람들을 돕는다고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돕는다고 하다가 다 전염 되가지고 수도원에 거미줄을 치게 되었습니다. 흑사병으로 막 죽어갈 때입니다. 거기에 대한 얘기가 많이 있잖아요. 영화도 많고. 이때에 자기 아들도 죽었는데요 목사님은 "다 감사드리세" 라고 하는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다 감사드리세 온 몸과 정성 다하여 다 감사드리세. 본 회퍼 라고 하는 독일의 신학자는 말합니다. 기독교인과 비 기독교인은 간단하게 구별이 된다. 그것은 기독교인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원망과 불평하는 것은 세상사람이요 오로지 감사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표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도 그럴 것은 죽음을 넘어서는 아름다운 세계를 전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저들이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예수부활, 머지 않아서 곧 나 자신이 부활이라고 믿고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을 향해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들은 만족한 감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죽음을 초월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일에도 두 가지 걱정을 하면 안됩니다. 하나는 '죽을까' 하는 걱정이요 또 하나는 '벌 받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 두 가지 걱정은 없습니다.
그리고 충만합니다. 충만한 체험. 그리고 성경적으로 이성적으로 사건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충만한 감성, 충만한 의지,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런고로 만족합니다. 여기에 충만함이 있고 능력이 있는 것이올시다. 여기에 새로운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불학무식했다고 합니다. 아그람마타, 글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거죠. 그러나 여러분 아시는 대로 용기는 지식으로 오는 게 아닙니다. 지탄 없이 말하더라. 용기는 환경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충만한 가운데, 오직 충만함이 사랑으로 향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로마를 가면 한 번씩 다 보게 되는 원형극장이라고 있지요. 원형경기장. 그 옛날 우리 기독교인들이 거기서 수십만 죽어갔습니다. 거기서 순교한 순교자들의 기록 속에 이러한 유작이 있습니다. 들어보세요. "나를 저주하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저주하면 할수록 나는 더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내게 침을 뱉으십시오. 나는 사랑의 숨결을 불어낼 것입니다. 나를 찌르십시오. 나는 사랑한다고 절규할 것입니다. 나를 짐승의 먹이로 던져버리십시오. 나는 사랑의 재물이 될 것입니다. 나를 불태워 주십시오. 나는 사랑의 열기로 당신의 증오로 가득한 마음을 녹일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웃으면서 그들은 죽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충만함입니다. 근심, 걱정, 모호함과 두려움, 다 사라집니다. 깨끗한 영혼, 밝은 미래, 오직 사랑으로. 그래서 여유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담력이 있습니다. 여기에 진실한 용기가 있습니다. 성령 충만으로 인한 이 위대한 용기와 담력이 오늘 우리가운데 또한 충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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