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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갈 1:6-10)

by 【고동엽】 2022. 3. 18.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갈 1:6-10)

 

  본문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찌어다/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좋게 하랴 내가 사람의 기쁨을 구하였더라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아주 복음 관이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이런 사람은 그 삶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은 어디서 주어지느냐 하면 살아가는 삶의 분명한 목적을 발견했을 때입니다. 그것을 사명이라 고도하고 목적이라고도 하고 뜻이라고도 말합니다.
  사람들이 행복을 말하지만 모두 피상적인 것들을 말합니다. 얼마 있으면 시들어버릴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얻었는가 싶은데 얼마가지 못해 허탈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에는 필수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①예수가 목적이어야 합니다.
  예수 없는 행복은 그 생명이 짧습니다, 얼마 가지 못합니다. 이것이 필수입니다. 바울은 바울 되기 이전에는 여러 조건들을 우상처럼 여기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늘 자랑했습니다. 우월감을 가졌습니다. 사실 조건들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참 유용한 것입니다. 좋은 가문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엄청난 프리미엄을 선사합니다.
  케네디가, 록펠러가, 카네기가 하면 미국의 3대 가문입니다. 그 가문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프리미엄이 주어져 있습니다. 좋은 학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학벌은 세상에서 알아줍니다. 그래서 학벌은 오늘 사람들의 우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조건들을 가지고 있으면 남들은 운동장 처음부터 뛰어야 하지만 중간에서 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조건들은 이렇게 좋은 역할을 합니다. /할/
  바울은 그에게 주어졌던 조건들을 그렇게 자랑하고 좋아했지만 그가 예수를 만난 후 그것을 미련 없이 버리고 전도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 그의 겉모습은 초라하게 보였지만 내심 그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은 그가 새로운 목적을 발견하고 그 목적을 소지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예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복은 예수가 내 안에 함께 하는 삶입니다. /믿/
  ▶15세기 이태리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42세 때 밀라노의 로드비치 공이 와서 예수의 최후의 만찬 모습을 그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다빈치는 혼신을 다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예수를 중심에 놓고 제자들을 좌우로 여섯 사람 씩 배열했습니다. 
  그림이 완성되자 친구에게 평가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친구가 그림을 보더니 아주 감탄했습니다. 제자들을 예수님 좌우로 잘 배치했고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면서 무엇보다도 예수님 손에 든 은잔이 가장 아름답다고 칭찬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다빈치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버렸습니다. 그리고 붓으로 그림을 X자로 지워버렸습니다. 이에 놀란 친구가 '왜 아깝게 그림을 망쳐놓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때 이 다빈치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그림은 예수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중심이 은잔이 되어버렸으니 실패작이다, 폐기 처분할 수밖에 없다.' /이해가 되십니까?/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생애, 마음, 정신, 예술 혼, 삶의 목적이 예수가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자신만만한 태도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할/
  그렇습니다. 우리 생애에서 예수가 중심이 될 때 진정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중심이 아니고 은잔이 중심이 되니까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은잔이 중심이 되어 살면 예수는 액세서리로 전락합니다. 그러니까 10년 20년 예수를 믿었으면서도 그 예수가 내 인생에 별로 뜨겁게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행복은 예수를 중심으로 살아갈 때 주어지고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믿/

 

  ②예수님을 내 삶에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예수는 주일날만 만나고 믿는 대상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주일날 와서 예배드리는 동안만 예수를 부르고 일주일 동안 잊고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그 예수가 내 삶에 구체적으로 관여를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예수가 언제나 관여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언제나 앞세우고 예수가 언제나 내 생활의 중심부에 있어야 합니다. 그 삶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어느 권사님이 교회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새 집을 짓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 권사님은 문을 열면 곧 바로 교회가 보이도록 지었습니다. 집의 방향이나 조건은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지었다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 마음, 생각, 생활 속에 예수가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게 살면 말이나 마음 그리고 생각과 언어에 예수가 흠뻑 들어있게 됩니다. 그것이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할/
  ▶1623년 청교도들이 드디어 미국 땅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하자 제일 먼저 교회를 건축했습니다. 이곳까지 온 목적이 진정 하나님께 예배하고 마음껏 신앙생활 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학교를 세웠습니다. 자신들도 중요하지만 이곳에서 영원히 살아갈 후손들을 길러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교를 건축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은 자기 집을 지었습니다.
  집을 짓는데도 3가지 법칙을 고수해서 지었습니다. 하나는 교회를 중심으로 돌려가며 짓는 일이었고 창문은 문만 열면 교회가 한눈에 들어오도록 짓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길을 닦을 때는 모든 길은 교회로 통하도록 길을 내었습니다. 그러니 그 삶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하겠습니까?
  그 정신, 그 마음, 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 예수와 함께 살아가는 삶이요, 행복한 삶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아멘!/

 

  ③신앙생활은 모험과 용기와 결단입니다.
  신앙생활은 깨달음의 생활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양종교에서 강조하는 말입니다. 수양종교에서는 아침에 도를 닦으면 저녁에는 죽어도 좋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깨달았으면 곧 바로 행동하라고 강조합니다. 깨달았으면 행동해야 하고 희생해야 하고 모험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앙은 아는 신앙수준을 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알기는 많이 아는데 결단을 못하고 희생을 주저하고 모험을 못합니다. 그래서 그 신앙이 힘이 없고, 변화가 없습니다. 영적인 체험이 없고, 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20-30년씩 신앙생활 했는데도 변화가 없습니다. 그저 늘 그 타령입니다. 
  당시 사도바울의 라이벌은 아볼로였습니다. 그는 그 시대의 대 웅변가였고 가는 곳마다 화려한 박수와 환호를 받았습니다. 그에 비하면 바울은 너무나 초라하고 가난하고 빈약한 전도자입니다.
  또 바울이 사울 때 동료였던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은 지금 모두 출세해서 당당한 자리에 올라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아주 초라한 거리의 전도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의 이 선언은 너무나 깊이 있는 선언이기 때문에 그 말속에 담겨진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바울의 그 고백 속에는 진정한 만족과 행복과 즐거움이 묻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삶에 예수가 완전히 정복한 결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삶에 예수가 완전히 점령하고 지배하고 붙잡고 있기에 가능한 고백입니다. /아멘!/
  이것이 행복한 삶입니다. 행복은 이렇게 정복당하는 것입니다. 덜 정복당하면 용기도 힘도 자신감도 없습니다. 완전히 잡히고 정복되고 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순전히 용기이고 확신이고 자신감이고 결단의 생활입니다. 그런 모험이 주어질 때 그 사람에 신앙적인 기적이 일어나고 체험이 수반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
  어떤 분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고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일날 일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때문입니다. 어떤 직업은 주일날 매상이 갑절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주일을 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갈등을 했습니다. 이 단계가 갈등의 단계요, 시험의 단계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때 '이렇게 하라'고 결정하도록 힘으로 밀어주시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스스로 결단 내릴 때까지 고민을 감당하도록 놓아두십니다. 그 고민과 갈등은 나의 몫입니다.
  이분이 고민하다가 과감하게 주일날은 문을 닫기로 했습니다. 주일에 주문이 오면 다른 곳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문에 '주일은 쉽니다'라는 문구도 써 붙였습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은 쉽게 결정 내리지 못하는 일입니다. 이분은 과감하게 손해 볼 것을 각오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용기요 자신감이요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결단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결정하고 나니까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마음이 아주 홀가분해졌습니다. '나도 예수 때문에 손해를 감수했다'는 승리감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이 예수와 함께 하는 삶입니다.
  바울은 복음 전도하는 일에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단들이 들어와 복음을 흐려놓고 있습니다. 그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하늘로부터 온 천사라 할지라도 우리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할/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를 이단이라고 부르고 경계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⑴다른 복음을 좇는 것은 곧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가 됩니다.
  ⑵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은 참된 교회에 대한 최대의 위험입니다.
  ⑶다른 복음을 믿는 자는 멸망의 저주에 빠지게 됩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야말로 서릿발처럼, 조금도 사정없이 무섭게 선언했습니다. 여기서 두 번 사용된 저주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저주의 대상을 가리킬 때 쓴 말입니다. 완전히 진멸을 당해 그야말로 저주의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지도록 된 대상을 가리킬 때 특별하게 쓰인 단어입니다.
  예를 들면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 죽게 되었던 아간 이라든지,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의 칼날 아래 멸망당해 갔던 가나안의 여러 이방 민족들이 바로 그와 같은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었습니다.
  행4: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아멘!/ 오직 예수입니다! /할/ 이런 확신이 복음이 주는 기쁨과 행복을 주는 원천입니다. 이런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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