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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소산을 여호와께 드리라 (신명기 26:1~11)

by 【고동엽】 2022. 3. 10.

토지소산을 여호와께 드리라  (신명기 26:1~11)

신명기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 생활을 거의 끝내고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가나안 땅 맞은편으로 왔을 때 모세를 통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 섬기는 법을 선포한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중 오늘 말씀은 추수감사에 대한 규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추수감사절은 두 가지 유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렇게 구약 성경에 나타나있는 추수 감사 규례이고, 또 하나는 청교도 추수감사의 유례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농사를 지으며 추수 때가 되면 제일 먼저 수확되는 첫 곡식을 광주리에 담아 제사장 앞으로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10절에 보면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토지소산 맏물을 드리면서 말하라는 내용이 나와 있는데, 이것은 제사장 앞에서 말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내가 오늘날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고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리라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취하여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 앞에 놓을 것이며" 이렇게 추수감사 예배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정착된 땅에서 농사를 지어 먹을 양식이 생겼을 때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주신 복이라는 신앙적 고백이 추수감사 규례로 오늘 말씀의 중심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 정착 후에 말씀대로 실천하면서 살았습니다. 누구나 다 똑같이 했습니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너희 중에서 끊어질 것이요." 그래서 모두 다 하나님 앞에 나와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좀 간사한 데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의 감사 생활은 가난했을 때 더 잘 합니다. 통계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풍성하여질수록 하나님께는 인색해집니다. 이상합니다. 한국 교회는 옛날에 비하면 요즘에 대단히 좋아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30~4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는 가난한 사람들의 종교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특히 농촌교회들은 그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다녔고 동네에서 좀 부자소리를 듣는 사람들 중에 교회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렇게 가난했던 교회들은 추수감사절을 1년에 2번을 지켰습니다. 가을 추수 때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여름 보리 추수 때 맥추감사절이라고 해서 지켰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고 먹을 것 없던 시절에 이 감사절을 2번 지켰다면 지금은 일 년에 4~5번, 아니면 매달 감사절을 늘려야 하는데 줄었습니다. 지금은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교회는 거의 없습니다. 또, 과거에는 이 감사절을 어떻게 지켰느냐 하면 집사님이라든가 권사님이라든가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사람들은 한주일 먼저 감사절 예물을 평신도보다 먼저 드립니다. 왜 그랬느냐 하면 "직분자들이 이렇게 본을 보였으니 이것을 보시고 교인들은 따라서 감사절을 잘 지키시오!" 그런 교육적 효과를 바라고 먼저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어떻게 드린 내용을 다 보이고 "보십시오. 금년 예산이 얼마인데 이렇게 드렸으니 여러분들도 이렇게 재직들의 본을 받아서 감사절을 지킵시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게 다 없어졌습니다. 지금의 교회 철학은 분명합니다. 최대한 교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아니하는 수준의 목회를 철학으로 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잘하는 것인가? 서구의 교인들이 그렇게 하다가 다 몰락했습니다.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오늘 교회 오시면 바깥에나 안에나 십자가는 어디서나 눈에 띄게 저렇게 걸어놨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교회는 죽으러 오는 곳입니다. 자존심도 죽이고 '내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것을 생각하기 위해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죽지 않고 삽니다. 이것을 패러독스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다고 했습니다. 말씀대로 따르면 되는데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인색하게 살고 풍성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보시면 매우 거추장스러운 추수감사예배가 규례로 정해지고 있습니다. 농사지은 토지소산의 맏물을 거두어서 광주리에 담아와야 됩니다. 제사장 앞에 갖다놓고 서야 됩니다. 제사장과 얼굴을 마주보면서 말해야 됩니다. "당신의 하나님께 고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리라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그러면 제사장이 그 광주리를 받아서 여호와의 방 앞에 갖다놓을 것이요" 그리고 나서 하는 말이 출애굽 과정을 말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내 조상은 유리하는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여 필경은 거기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더니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중역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라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과거 가장 고난스러웠던 때를 말하면서 오늘을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토지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라고 말하고 경배하라고 했습니다. 누구나 다 똑같이 의무적으로 반 강제적으로 그렇게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또 하나는 청교도의 추수감사 역사입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핍박하다가 주후 313년에 밀라노칙령을 통해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세계 모든 교회는 로마 교황청의 명령과 지시에 따라 발전했고 지금도 운영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국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헨리 8세가 왕이 되었을 때 결혼 문제가 로마 교황청과 마찰을 가져왔습니다. 헨리 8세는 사실 왕이 될 수 없는데 형이 일찍 죽는 바람에 대를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형이 죽자 형수인 캐서린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메리라는 딸을 낳고 아들이 없었습니다. 아들이 없는 것을 한탄하다가 궁녀인 앤 볼레인과 다시 결혼하게 되는데, 그것도 또 못마땅해서 사실상 6명의 부인을 데리고 살았습니다. 교회가 "헨리왕의 결혼은 불법이다. 낳은 아이는 다 사생아다." 왕실과 교회가 마찰이 생겼습니다. 더군다나 가톨릭교회의 신앙 노선과도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영국에서는 이때 독자적인 교회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성공회라고 하는 Anglican Communion입니다. 그래서 이 성공회가 영국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영국 안에서 이 국교에 반기를 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왕실이 도대체 뭐하는 거냐?" 그중에 대표적으로 나섰던 사람들이 바로 청교도입니다. 이때부터 칼빈 신학을 따르는 청교도들은 왕실의 박해를 받기 시작했는데 헨리로부터 메리여왕, 엘리자베스, 제임스1세, 찰스1세로 연결되는 권력에 의해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스미스필드(Smithfield)라고 하는 성지에 끌려가서 순교를 당했는데 지도자 288명이 처형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믿는 나라에서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계속되는 국교주의의 박해 때문에 청교도들은 영국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가장 많이 간 곳이 네덜란드입니다. 미국으로 찾아온 사람들을 '필그림파더스'라고 하는데,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에 가면 기념비가 서있습니다. "이곳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순례자들의 도착 지점이다. 굶주림과 추위, 황무지와 싸우며 많은 개척자들이 죽었는데 인디언들에게 사망자의 수를 알리지 않기 위해 한 구덩이에 매장하였다. 그들은 이 땅 위에 새 나라의 기초를 세웠고 이 땅을 찾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을 심었다. 이 바위를 본 자마다 순례자 조상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이 땅에서 살도록 헌신하는 결심이 있기를 바란다."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러면 청교도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들의 신앙은 훌륭했던가? 청교도 신앙의 특징을 이해하는 데는 개신교 신자들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청교도는 칼빈 신학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배 모범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취급하는 하나는 말씀선포입니다. "예배드리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교회는 의식 중심의 예배를 드렸고, 회중이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로 성직자들이 몇 마디 하는 것으로 설교를 대신하니까 "이게 뭔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교하라! 그래서 회중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매주일 강단에서 예배의 절반 정도는 강단 메시지로 설교 말씀을 알아듣게 하라!" 이것이 청교도 예배의 모범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개신교가 다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구원이란 뭐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다. 인간의 공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안에서 무효다." 그때만 해도 인간의 공로를 많이 내세웠습니다. 그래서 고행주의, 금욕주의, 수도원이 발전했습니다. "이것은 다 무효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안에서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이다." 이것이 청교도 신학이고, 개신교 신학에서 주장하는 것과 차이가 없습니다.
그들은 인류와 삶에 대한 정의를 뚜렷하게 세 가지로 실천했습니다. 그 첫째가 근로정신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왜 태어났으며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되는가? 일하기 위한 존재라고 규정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할 일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나고 그 맡겨진 일이 비록 작고 보잘것없는 일일지라도 나는 그것 때문에 세상에 태어났다고 인간의 삶을 정의했습니다. 그래서 일을 열심히 하는 삶의 철학을 널리 보급했습니다. 보십시오. 청교도의 신학을 따르는 나라들은 세계 어디를 가나 다 잘 삽니다. 세상을 다녀보면 금방 알게 됩니다. 잘 사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을 많이 합니다. 일을 신성시 하는 국민 철학! 이것이 바로 청교도 유산입니다. "일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은 매일 매일 신성한 노동 속에서 표현되어져야 한다." 저같이 목사가 된 사람을 성직자라고 합니다. 그러면 농사짓는 사람은 뭡니까? 개신교 신학에서 좁은 의미의 성직자는 목사, 신부 같은 사람을 의미하고 넓은 의미의 성직자는 죄가 되지 아니하는 모든 일에 몸을 바쳐 일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농사를 지어도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일이요, 장사를 해도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하게 됩니다. 그러한 신학 사상에 하나님의 복이 들어갔기 때문에 서구 사회는 세상에서 가장 잘 살게 되었습니다. 신학의 기초는 자기의 할 일을 하지 않는 게으름을 죄라고 합니다.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 두 달란트 받았던 자는 그것을 가지고 나가서 열심히 장사하여 배로 남겼더니 주인이 "네가 남긴 열매를 네가 가져라!" 그에게 다 도로 주었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그것만 가지고 왔을 때 아마 우리 상식으로는 자비로운 주님이라면 "야! 너는 하나 밖에 없구나! 그거나 먹고 살아라!" 이래야 될 거 아닙니까? 뺏었습니다. "내놔라! 많은 자에게 주어라!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그러면 나는 어떡합니까?"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것이 주님의 수학입니다.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아니한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남이 다 하는 것을 너는 왜 안하느냐? 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것 밖에 할 수 없었느냐? 너희 교회는 내가 줄만큼 주었는데 그것밖에 할 수 없었느냐? 내가 너를 줄 만큼 주었는데."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을 최대한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결과가 오늘의 서구 사회를 건설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일본이 왜 우리나라보다 조금 앞서가는 나라가 되었는지 아십니까? 이유는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서구 문명을 우리보다 먼저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서구 문명이 곧 기독교 문명입니다.
둘째로, 이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삶을 순례자(pilgrim)로 정의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 5절에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이라." 성경 전체에 순례자 신학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합니다. "너는 너의 친척 본토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가 됩니다. 순례자들의 삶의 정의는 무엇인가? 이 세상을 영원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하고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한 필요에 따라서 인도하시는 대로 사는 나그네 신학을 기초로 합니다. 이것이 순례자입니다. 오늘은 내가 여기서 살고 있습니다. 내일은 하나님이 또 어디로 나를 인도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도하는 그곳을 찾아가야 합니다. 마지막에 내 머리를 어디다 묻을지 모르면서 끝없이 끝없이 가는 이것이 바로 서구 사회 개척정신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례자 정신의 유산은 개척 정신으로 축복을 받습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쉬지 않고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서구 사람들을 보세요. 이 세상은 더 갈 곳이 없어졌을 때 달나라를 정복했습니다. 화성까지 지금 인간의 손이 가 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끊임없이 진행이 됩니다. 저는 휴스턴에서 살았습니다. 달나라에 갔다 온 유품들이 거기 다 있습니다. 국가에서 가장 많은 예산을 들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미지의 세계에 인간의 손이 닿는 곳이라면 우리는 순례자로 어디든지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이 순례자 신학의 개척 정신으로 연결되어 미국 사회가 그렇게 발전한 것입니다. 청교도들이 처음 온 해가 1620년이요, 추수감사예배 드린 것이 1621년인데 그때부터 계산해도 386년 밖에 되지 아니한 나라가 지구를 움직여가는 국가를 이루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삶의 철학입니다. 성경에 기초한 순례자요 근로정신에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온 세계에 가장 훌륭한 삶의 철학으로 보급이 되는 그런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삶의 경건성입니다. 이것은 나를 중심해서 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바울 신학을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사실 그 땅으로 떠날 때 성공하려고 찾아간 사람은 한명도 없었습니다. 편하게 먹고 살기 위해서 이민 간 사람 아닙니다.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을 어떻게 훌륭하게 섬길 것인가를 생각해서 떠난 것입니다. 많이 죽었습니다. 바울 신학에 뭐라고 그랬습니까?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행동한 사람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백성이 세계에서 제일 잘 삽니다. 죽고자 하면 삽니다. 청교도 추수감사절 열매에 뚜렷한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했다는 점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의 시급성 때문에 그 땅을 떠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훌륭한 신앙의 터전 건설 하나를 위해서 떠났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신앙뿐만 아니라 다른 것을 함께 얻는 열매를 주셨습니다. 이 말씀이 그대로 실천되어진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들은 가장 고난스러운 시간에 가장 큰 감사를 풍성히 했다는 점입니다. 사실 우리가 '감사도 마음의 여유가 좀 있어야 하는 것이지 먹고 살기도 힘든데 추위와 굶주림에 떨면서 무슨 감사를 할 것인가?' 이렇게 생각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생각하면 청교도들 위치와 똑같은 사람은 우리 갈보리 교회에 한명도 없습니다. 그때 그들에게 주어진 식량이 두 가지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감자와 옥수수입니다. 1620년에 와서 야생동물과 같은 생활을 하면서 그 이듬해인 1621년에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렸습니다. 일 년 만에 그 황무지에서 무슨 생활 여건이 좋아졌겠습니까? 굶어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면서 추수감사를 풍성하게 드렸다는 점이 축복을 받아서 온 세계 추수감사절의 새로운 기원을 만들어준 것입니다.
그 다음에 청교도들이 공헌한 놀라운 역사 중 하나는 종교와 정치를 분리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유럽을 관광해보시면 왕실 옆이나 맞은편에 성당이 있습니다. 권력과 교회가 함께 갔습니다. 이것을 청교도들이 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부패했다." 권력을 깨버린 것입니다. "핍박 속에서도 우리 신앙을 지켜나가자." 청교도들이 종교 분리의 신학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신학에 의해 개신교가 온 세계에서 똑같은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는데 사람들은 누구나 다 행운을 찾아서 일평생 헤매고 삽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4H클럽'이라는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시골에서 주로 많이 했습니다. 저도 경기도 광주에서 '4H클럽'에 굉장히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청소년들이 신나게 활동했습니다. 그런데 그 '4H클럽' 깃발이 네잎 클로버입니다. 그래서 노래도 있습니다. "네 잎 다리 클로버의 우리 깃발은 순결스런 청춘들의 행운의 표정 지덕노체 네 향기를 담뿍 싣고서 살기 좋은 우리농촌 우리 힘으로 빛나는 흙의 문화 우리 손으로" 반주 없이도 제가 부를 정도입니다. 사실 제가 이 활동을 하도 잘해서 박정희 대통령한테 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말하는 네 잎 클로버의 뜻이 행운입니다. 클로버는 전부 세 잎입니다. 어쩌다가 수천 개 가운데 하나 네 잎 클로버를 찾은 사람에겐 행운이 온다는 뜻입니다. 하루 종일 찾아보아도 네 잎 클로버 한 개를 못 찾습니다. 그래서 행운 찾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 잎 클로버는 무슨 뜻인가?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행운을 찾기 위하여 행복을 하루 종일 짓밟고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외부적인 조건을 생각해서 20세기에 지구상에서 가장 큰 행운을 잡은 두 여인이 있습니다. 한 명은 영국의 왕세자비 다이애나였고, 또 한 명은 일본의 왕세자비 마사코 여인입니다. 이 두 사람은 20세기에 가장 큰 행운을 잡은 여인들입니다. 그들은 세계 최대 강대국이요 경제대국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자기 남편이 왕이 되고 자기 아들도 또 왕이 됩니다. 몇 년 하다가 그만 두는 것이 아니고 죽을 때까지 자자손손 다 왕이 되는 자리에 그 두 여인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다이애나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습니다. 그리고 비참한 최후로 죽었는데 왜 그랬을까? 행복하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마사코는 지금 극심한 우울증 환자가 되었습니다. 행운은 소유했는데 행복은 없어진 것입니다. 이 감사절에 우리가 '감사는 그 다이애나 같은 여자나 마사코 같은 사람이 하는 것이지 우리 같은 사람이 무슨 감사를 하고 감사헌금을 내?' 그렇게 생각하시면 평생 불행하게 삽니다. 우리가 객관적으로 사도 바울을 볼 때 바울은 감사의 조건이 하나도 없습니다. 기다리는 가족도 없습니다. 소유도 없습니다. 매 맞고 배고프고 헐벗고 감옥에 가고 쫓겨나고…. 바울서신을 읽어보세요.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그래서 그러한 삶의 철학을 가지고 사는 그 하나를 로마가 이기지 못했습니다. 로마가 꺾였습니다. 세계 기독교 중심지인 로마의 가장 복판 바티칸 광장에 가보세요. 사도 바울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행복을 밟고 다니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을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풍성하여질수록 인색해 갑니다. 하나님 앞의 헌금 생활도 퍼센트로 따지자면 가난할 때 제일 많이 드렸고 풍성하여질수록 점점 더 줄고 있습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어디 교회나 똑같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이했습니다. 우리 영혼을 새롭게 해서 복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 왜 이 감사절이 있으며 우리는 이것을 왜 지키는가 영적 의미를 옛날 구약의 추수 감사 규례의 역사와 청교도의 감사절 유래 역사를 저희들이 생각하면서, 오늘날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이 세대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오늘의 교회는 과연 감사 생활을 하고 있는가, 우리가 회개하고 더 훌륭한 감사 생활을 하는 풍부한 영적 청지기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출처/이필재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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