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보지 못하고 믿는 자(요한복음 20:24-29)

by 【고동엽】 2024. 6. 9.
처음 목차로 돌아가기
 
 

보지 못하고 믿는 자(요한복음 20:24-29)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며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수술을 받아야 하는 환자가 있었습니다. 이 환자는 의사의 손을 잡고 "나는 돈과 명예와 지위 등 남이 부러워하는 것을 고루 갖고 있습니다. 또한 단란한 가정도 있습니다. 하지만 건강에 늘 자신이 없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나의 건강만 회복하여 주신다면 얼마든지 사례해 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라고 하며 거듭거듭 간청하였습니다. 이때 의사는 그 환자에게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당신은 건강이 없으므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는 것입니다.

건강은 그 모든 것들의 기본입니다. 재물의 부유함도 자신이 불치의 병으로 죽는다면 그것들은 한낱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들을 무효로 만들고 모든 것의 가치를 부정하고 모든 것의 존재 의미를 말소시켜 버립니다. 동시에 죽음이란 지금 당장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지극히 현재적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세상에 늦게 왔기 때문에 세상을 늦게 떠날 것이라는 말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나와 가장 밀접하게 붙어다니는 문제이며, 우리가 반드시 긍정해야 할 현실적이고 절대적이며 또한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문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인간들은 차츰 생명이라는 대전제에 용감하게 도전하였습니다. 특히 예 성현들과 뛰어난 인물들이 이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중국을 제패한 진시 왕은 영원한 향락을 위하여 불사약을 구하고자 하였으며, 인도 가비라성의 왕자 석가는 인간의 생노병사(生老病死)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출가하였습니다. 또한 자손들이 자기 생명의 연장이라는 동양 문화의 아집은 종족 보존이라는 강한 본능을 인간의 의식 속에 으뜸으로 인식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철따라 피고 지는 식물과 무수한 곤충들의 생태 변화를 보면서 윤회라는 개념의 단어를 창출해내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문제, 영생의 문제는 쉽사리 해결할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이 문제는 오로지 부활만이 해답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에 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만일 부활이 없다면"이란 가정을 8번이나 사용하였습니다. 기독교인에게 부활이 없다면 그가 말한 것처럼 먹고 마시는데만 힘썼을 것입니다. 어느 수필에서 "먹고 마시는 것과 같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남보다 더 많이 먹고 마시는 것이 나에게 일시적인 기쁨은 줄지 몰라도 그것은 다만 몇 그릇 더 마시고 죽는 것에 불과합니다.

 

집집마다 괘종 시계를 달지 않는 가정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똑딱거리는 그 시계 소리, 그것은 하나의 죽음을 재촉하는 장송곡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 말하였습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 기독교인은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리라고….옳은 말씀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마음껏 먹고 마시며 즐기는 사람이 가장 현명한 사람일 것입니다.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의롭게 살려고 애쓰며, 더욱이 순교까지 감수하는 기독교인의 삶에 확고한 부활의 믿음이 없다면 참으로 비참한 죽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그의 「실천 이성 비판」에서 그 결론 부분에 이세상의 모든 윤리와 도덕을 합리적으로 설명해 나가다 비약하여 내세가 있음을 인정하였습니다. 이것은 그의 「순수 이성 비판」의 논리에 비추어볼 때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윤리와 도덕을 내세와 결부시키지 않고서는 도저히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었기에 그는 그렇게라도 논리를 비약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의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날마다 죽는(daily died) 삶"만이 인간의 죽음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최고선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신앙입니다. 오직 부활의 신앙만이 해답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만일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진실과 희생, 사랑, 인내와 겸손, 거룩함의 기초에는 반드시 이 부활 신앙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신앙은 1년에 한 번 정도 행하는 설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기독교 복음의 기초가 부활 신앙에 근거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 부활 신앙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는 역사적 사건에 속하는 부활의 사건 (Historical Event)입니다. 우리는 '부활'하면 제일 먼저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합니다.

둘째는 종말론적인 사건입니다. 이 세상의 종국에 가서는 우리 모두가 함께 부활하게 된다는 신앙입니다.

셋째는 실존적 사건, 신앙 사건 (Faith Event)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날마다 새롭게 변화해 가는 부활, 곧 체험 신앙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셋은 절대로 분리해서 해석될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이 셋을 각기 달리 생각하고 한 차원만을 더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성주의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역사적 사건으로 다루려 합니다. 반면에 신비주의자들은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처리하려 하며, 자유주의자들은 이것을 현재적 사건으로 보고 부활의 체험만을 중점적으로 역설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 차원의 삼각 관계를 부활의 의미로 상고해 볼 때 비로소 건전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 말씀도 모두 이 세 차원에서 설명되고 해석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성경 말씀 자체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를 믿음으로써 우리가 현실의 역경을 종말론적 의미로 승화시켜 극복하는 믿음의 자리에까지 이르러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마다 "부활에 동참해야 합니다"란 설교를 들었습니다. 이 말은 바로 위의 세 가지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던 사람인 제자 도마의 반박을 기록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한 사실을 증거할 때 도마는 "내 손으로 만지고 내 눈으로 보아야 믿겠다"라고 강경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말을 나누었던 그들까지도 의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그만큼 있을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단회적이고 일회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모든 사건은 두 번 이상 거듭 일어나야만 비로소 그것을 인정해 줍니다.

저의 경험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몸이 공중으로 들어 올려지며 황홀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나의 황홀했던 체험을 아무리 열심히 설파(說破)한다 하더라도 제 몸이 공중으로 또 다시 들어 올려지지 않는 한 증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일회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인간의 인식론적인 입장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건이었고 당시 예수님을 흠모하며 따르던 제자들조차도 "내가 직접 보아야 믿을 수 있겠다"라고 말한 것을 인간적인 입장에서 볼 때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이 사건을 곧바로 긍정하지 못했던 요인으로서 인간은 자기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일수록 쉽게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소설을 읽을 때 공감하고 감명받는다는 것은 소설 속의 사건과 나의 경험이 비슷하거나 거의 같았을 때일 것입니다. 전혀 그런 경험이 없었을 때는 소설이나 극중의 사건을 쉽사리 이해하지 못하며 공감도 받지 못합니다. 하물며 예수님의 사건이 어떻게 나의 경험과 결부시켜 동일시(identity)할 수 있는 사건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그 당시에도 또 우리에게도 여전히 믿기 어려운 사건입니다.

다음으로는 서로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도 자연과학을 다루던 눈으로 인문과학을 연구할 수 없듯이, 혹은 동물만을 상대하던 지식과 기술로 인간의 정신을 인도할 수 없듯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인간의 차원으로 이해하기는 힘든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권에 속하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엄청난 사건을 오늘의 현실적이고 육감적으로 타락된 인간의 차원에서 납득하려고 하는 그 자체가 얼마나 큰 모순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실을 경험하고 믿는 데 있어서 그 매개체가 되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이는 무엇을 보고 들어도 믿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결여되었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이 신앙의 올바른 개념조차 모르는 현대인들이 전무후무한 이 사건을 의심 없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믿을 수 없다는 말, 내가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 확인해 보아야 믿을 수 있겠다라는 도마의 말은 인간적인 측면으로 볼 때 너무나 당연하고 이치에 맞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당연한 의심, 우리의 신앙은 여기서부터 출발하여야 합니다. 그 당시 도마는 진실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동료들이 자신있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었지만 도마는 줄곧 자기 손으로 확인해야 믿겠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도마는 무척이나 철저하고 타산적이며 현실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도마 앞에 나타나 그의 의심을 모두 풀어 주셨습니다.

"자, 이제 네 손을 들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고 내 손과 발의 못자국을 만져 보아라." 예수님께서 도마의 의심하던 말을 그대로 들어 말씀하실 때 그만 도마는 두 무릎을 꿇고 "주여, 나의 하나님이시여!"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갈등을 아시고 그것을 채워주시려 함을 안 그 순간 그는 예수님의 부활과 그가 우리의 주 되심을 고백하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이때 무척 섭섭해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가 자기를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라고 부인했을 때 비록 직접 나타나 그의 의심을 해소시켜 주셨지만 서운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진정 너에게 말하노니,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의 뜻은 진정한 신앙이란 내가 경험하기보다는 나보다 더 온전한 이의 경험한 바를 그대로 믿고 나의 삶을 위탁하는 가운데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만큼 진실한 믿음을 가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눈은 인간적인 감정과 여러 가지 모양의 편견과 죄악으로 인하여 올바른 것을 온전하게 볼 수도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러한 상태를 인정하고 우리보다 온전한 이의 경험을 전적으로 믿으면서 그를 통하여 그가 경험한 바에 이르고자 노력하는 자세가 참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경험이란 때로는 무척 어리석기까지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청년이 선배로부터 술이란 유익한 것이 못 된다라는 충고를 들었다고 합시다. 그렇지만 이 청년은 자신이 실제로 경험해 본 후에 충고를 믿겠다라는 생각으로 술을 가까이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으로 느끼는 술 기분에 이끌리어 자주 마시다 보니 중독이 되어 급기야 패가망신하게 될 지경에 이르러서야 청년은 술은 유해무익하다라고 깨닫게 되었고 선배의 충고를 이해하게 되었다면 이 청년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보아야 믿겠다는 것은 때로는 무척 어리석고 쓸데 없는 생각입니다. 적어도 나보다 온전하고 위대한 분이라면, 내 상상을 초월한 분의 말씀과 경험이라면, 보지 않고서도 믿을 수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할 줄로 압니다.

계시록 1장에 보면 세상에 종말이 올 때 예수를 창끝으로 찌르던 사람도, 십자가에 그를 매달아 죽이던 사람도 구름을 타고 오시는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며 통곡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죽은 후에 확인하고서야 믿겠다는 고집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그 때에는 이미 때가 늦은 것입니다. 몸소 경험해 보지 않고서도 부활의 사건이 참임을 깨닫고 믿는 사람은 복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살펴보면 한 가지 귀중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베드로와 그외 일곱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서도 갈릴리 바다로 고기 잡으러 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생활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진실로 놀라운 사건이었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라고 생각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은 후부터는 비로소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폭탄처럼 터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사실을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역사적 사건(Historical Event)이요, 다른 하나는 신앙 사건(Faith Event)입니다.

역사적 사건은 부활적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제자들의 마음 속에 솟아나는 그런 생명적인 부활은 오순절에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2천년전 유대 땅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부활을 믿는 신앙 사건은 오늘의 우리 가운데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에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 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고 만져보지 못하였으나 믿고 그에게 나의 전부를 위탁하는 것, 이것이 참된 부활의 신앙입니다. 이러한 부활의 신앙사건이 현대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도마는 비록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의심의 장벽은 힘없이 무너지고, 가장 심하게 의심하던 그가 가장 높은 신앙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후 도마는 인도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증거 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가죽을 벗기어 죽임을 당하는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인도에 가면 도마의 무덤을 볼 수 있습니다.

의심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완전히 무너질 때 부활 신앙을 체험하는 진정한 증인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체험을 하는 부활절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기도:아버지 하나님,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그리고 다시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에 그 놀라운 부활의 진리를 의심하는 저희를 용서하옵시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성령의 역사를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어 참다운 부활 신앙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죽음과 생명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여, 오늘날 생명의 증인이 되어 사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보지 못하고 믿는 자(요한복음 20:24-29)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며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수술을 받아야 하는 환자가 있었습니다. 이 환자는 의사의 손을 잡고 "나는 돈과 명예와 지위 등 남이 부러워하는 것을 고루 갖고 있습니다. 또한 단란한 가정도 있습니다. 하지만 건강에 늘 자신이 없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나의 건강만 회복하여 주신다면 얼마든지 사례해 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라고 하며 거듭거듭 간청하였습니다. 이때 의사는 그 환자에게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당신은 건강이 없으므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는 것입니다.

건강은 그 모든 것들의 기본입니다. 재물의 부유함도 자신이 불치의 병으로 죽는다면 그것들은 한낱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들을 무효로 만들고 모든 것의 가치를 부정하고 모든 것의 존재 의미를 말소시켜 버립니다. 동시에 죽음이란 지금 당장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지극히 현재적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세상에 늦게 왔기 때문에 세상을 늦게 떠날 것이라는 말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나와 가장 밀접하게 붙어다니는 문제이며, 우리가 반드시 긍정해야 할 현실적이고 절대적이며 또한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문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인간들은 차츰 생명이라는 대전제에 용감하게 도전하였습니다. 특히 예 성현들과 뛰어난 인물들이 이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중국을 제패한 진시 왕은 영원한 향락을 위하여 불사약을 구하고자 하였으며, 인도 가비라성의 왕자 석가는 인간의 생노병사(生老病死)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출가하였습니다. 또한 자손들이 자기 생명의 연장이라는 동양 문화의 아집은 종족 보존이라는 강한 본능을 인간의 의식 속에 으뜸으로 인식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철따라 피고 지는 식물과 무수한 곤충들의 생태 변화를 보면서 윤회라는 개념의 단어를 창출해내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문제, 영생의 문제는 쉽사리 해결할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이 문제는 오로지 부활만이 해답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에 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만일 부활이 없다면"이란 가정을 8번이나 사용하였습니다. 기독교인에게 부활이 없다면 그가 말한 것처럼 먹고 마시는데만 힘썼을 것입니다. 어느 수필에서 "먹고 마시는 것과 같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남보다 더 많이 먹고 마시는 것이 나에게 일시적인 기쁨은 줄지 몰라도 그것은 다만 몇 그릇 더 마시고 죽는 것에 불과합니다.

 

집집마다 괘종 시계를 달지 않는 가정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똑딱거리는 그 시계 소리, 그것은 하나의 죽음을 재촉하는 장송곡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 말하였습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 기독교인은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리라고….옳은 말씀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마음껏 먹고 마시며 즐기는 사람이 가장 현명한 사람일 것입니다.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의롭게 살려고 애쓰며, 더욱이 순교까지 감수하는 기독교인의 삶에 확고한 부활의 믿음이 없다면 참으로 비참한 죽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그의 「실천 이성 비판」에서 그 결론 부분에 이세상의 모든 윤리와 도덕을 합리적으로 설명해 나가다 비약하여 내세가 있음을 인정하였습니다. 이것은 그의 「순수 이성 비판」의 논리에 비추어볼 때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윤리와 도덕을 내세와 결부시키지 않고서는 도저히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었기에 그는 그렇게라도 논리를 비약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의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날마다 죽는(daily died) 삶"만이 인간의 죽음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최고선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신앙입니다. 오직 부활의 신앙만이 해답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만일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진실과 희생, 사랑, 인내와 겸손, 거룩함의 기초에는 반드시 이 부활 신앙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신앙은 1년에 한 번 정도 행하는 설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기독교 복음의 기초가 부활 신앙에 근거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 부활 신앙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는 역사적 사건에 속하는 부활의 사건 (Historical Event)입니다. 우리는 '부활'하면 제일 먼저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합니다.

둘째는 종말론적인 사건입니다. 이 세상의 종국에 가서는 우리 모두가 함께 부활하게 된다는 신앙입니다.

셋째는 실존적 사건, 신앙 사건 (Faith Event)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날마다 새롭게 변화해 가는 부활, 곧 체험 신앙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셋은 절대로 분리해서 해석될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이 셋을 각기 달리 생각하고 한 차원만을 더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성주의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역사적 사건으로 다루려 합니다. 반면에 신비주의자들은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처리하려 하며, 자유주의자들은 이것을 현재적 사건으로 보고 부활의 체험만을 중점적으로 역설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 차원의 삼각 관계를 부활의 의미로 상고해 볼 때 비로소 건전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 말씀도 모두 이 세 차원에서 설명되고 해석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성경 말씀 자체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를 믿음으로써 우리가 현실의 역경을 종말론적 의미로 승화시켜 극복하는 믿음의 자리에까지 이르러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마다 "부활에 동참해야 합니다"란 설교를 들었습니다. 이 말은 바로 위의 세 가지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던 사람인 제자 도마의 반박을 기록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한 사실을 증거할 때 도마는 "내 손으로 만지고 내 눈으로 보아야 믿겠다"라고 강경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말을 나누었던 그들까지도 의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그만큼 있을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단회적이고 일회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모든 사건은 두 번 이상 거듭 일어나야만 비로소 그것을 인정해 줍니다.

저의 경험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몸이 공중으로 들어 올려지며 황홀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나의 황홀했던 체험을 아무리 열심히 설파(說破)한다 하더라도 제 몸이 공중으로 또 다시 들어 올려지지 않는 한 증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일회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인간의 인식론적인 입장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건이었고 당시 예수님을 흠모하며 따르던 제자들조차도 "내가 직접 보아야 믿을 수 있겠다"라고 말한 것을 인간적인 입장에서 볼 때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이 사건을 곧바로 긍정하지 못했던 요인으로서 인간은 자기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일수록 쉽게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소설을 읽을 때 공감하고 감명받는다는 것은 소설 속의 사건과 나의 경험이 비슷하거나 거의 같았을 때일 것입니다. 전혀 그런 경험이 없었을 때는 소설이나 극중의 사건을 쉽사리 이해하지 못하며 공감도 받지 못합니다. 하물며 예수님의 사건이 어떻게 나의 경험과 결부시켜 동일시(identity)할 수 있는 사건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그 당시에도 또 우리에게도 여전히 믿기 어려운 사건입니다.

다음으로는 서로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도 자연과학을 다루던 눈으로 인문과학을 연구할 수 없듯이, 혹은 동물만을 상대하던 지식과 기술로 인간의 정신을 인도할 수 없듯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인간의 차원으로 이해하기는 힘든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권에 속하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엄청난 사건을 오늘의 현실적이고 육감적으로 타락된 인간의 차원에서 납득하려고 하는 그 자체가 얼마나 큰 모순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실을 경험하고 믿는 데 있어서 그 매개체가 되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이는 무엇을 보고 들어도 믿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결여되었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이 신앙의 올바른 개념조차 모르는 현대인들이 전무후무한 이 사건을 의심 없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믿을 수 없다는 말, 내가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 확인해 보아야 믿을 수 있겠다라는 도마의 말은 인간적인 측면으로 볼 때 너무나 당연하고 이치에 맞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당연한 의심, 우리의 신앙은 여기서부터 출발하여야 합니다. 그 당시 도마는 진실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동료들이 자신있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었지만 도마는 줄곧 자기 손으로 확인해야 믿겠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도마는 무척이나 철저하고 타산적이며 현실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도마 앞에 나타나 그의 의심을 모두 풀어 주셨습니다.

"자, 이제 네 손을 들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고 내 손과 발의 못자국을 만져 보아라." 예수님께서 도마의 의심하던 말을 그대로 들어 말씀하실 때 그만 도마는 두 무릎을 꿇고 "주여, 나의 하나님이시여!"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갈등을 아시고 그것을 채워주시려 함을 안 그 순간 그는 예수님의 부활과 그가 우리의 주 되심을 고백하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이때 무척 섭섭해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가 자기를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라고 부인했을 때 비록 직접 나타나 그의 의심을 해소시켜 주셨지만 서운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진정 너에게 말하노니,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의 뜻은 진정한 신앙이란 내가 경험하기보다는 나보다 더 온전한 이의 경험한 바를 그대로 믿고 나의 삶을 위탁하는 가운데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만큼 진실한 믿음을 가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눈은 인간적인 감정과 여러 가지 모양의 편견과 죄악으로 인하여 올바른 것을 온전하게 볼 수도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러한 상태를 인정하고 우리보다 온전한 이의 경험을 전적으로 믿으면서 그를 통하여 그가 경험한 바에 이르고자 노력하는 자세가 참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경험이란 때로는 무척 어리석기까지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청년이 선배로부터 술이란 유익한 것이 못 된다라는 충고를 들었다고 합시다. 그렇지만 이 청년은 자신이 실제로 경험해 본 후에 충고를 믿겠다라는 생각으로 술을 가까이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으로 느끼는 술 기분에 이끌리어 자주 마시다 보니 중독이 되어 급기야 패가망신하게 될 지경에 이르러서야 청년은 술은 유해무익하다라고 깨닫게 되었고 선배의 충고를 이해하게 되었다면 이 청년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보아야 믿겠다는 것은 때로는 무척 어리석고 쓸데 없는 생각입니다. 적어도 나보다 온전하고 위대한 분이라면, 내 상상을 초월한 분의 말씀과 경험이라면, 보지 않고서도 믿을 수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할 줄로 압니다.

계시록 1장에 보면 세상에 종말이 올 때 예수를 창끝으로 찌르던 사람도, 십자가에 그를 매달아 죽이던 사람도 구름을 타고 오시는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며 통곡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죽은 후에 확인하고서야 믿겠다는 고집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그 때에는 이미 때가 늦은 것입니다. 몸소 경험해 보지 않고서도 부활의 사건이 참임을 깨닫고 믿는 사람은 복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살펴보면 한 가지 귀중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베드로와 그외 일곱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서도 갈릴리 바다로 고기 잡으러 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생활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진실로 놀라운 사건이었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라고 생각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은 후부터는 비로소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폭탄처럼 터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사실을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역사적 사건(Historical Event)이요, 다른 하나는 신앙 사건(Faith Event)입니다.

역사적 사건은 부활적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제자들의 마음 속에 솟아나는 그런 생명적인 부활은 오순절에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2천년전 유대 땅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부활을 믿는 신앙 사건은 오늘의 우리 가운데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에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 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고 만져보지 못하였으나 믿고 그에게 나의 전부를 위탁하는 것, 이것이 참된 부활의 신앙입니다. 이러한 부활의 신앙사건이 현대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도마는 비록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의심의 장벽은 힘없이 무너지고, 가장 심하게 의심하던 그가 가장 높은 신앙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후 도마는 인도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증거 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가죽을 벗기어 죽임을 당하는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인도에 가면 도마의 무덤을 볼 수 있습니다.

의심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완전히 무너질 때 부활 신앙을 체험하는 진정한 증인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체험을 하는 부활절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기도:아버지 하나님,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그리고 다시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에 그 놀라운 부활의 진리를 의심하는 저희를 용서하옵시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성령의 역사를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어 참다운 부활 신앙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죽음과 생명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여, 오늘날 생명의 증인이 되어 사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