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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사무엘상 8장 4절~9절)

by 【고동엽】 2024.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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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사무엘상 8장 4절~9절)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김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여러분도 이미 아시다시피, 작년 8월에 중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북경에서 북쪽으로 조금 더 가면 그 유명한 만리장성이 있습니다. 가히 이름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장대한 규모의 성벽(城壁)입니다. 성벽 위로 자동차가 왕래할 수 있을 정도로 폭넓은 성벽이 산 속으로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실제의 길이는 만 리(萬里)가 넘는다고 합니다. 중국사람들은 그저 장성(長城)이라고만 부릅디다. 2천 년도 훨씬 전의 옛날에 순전히 사람들의 힘만 가지고 이 성을 쌓았다고 생각해봅시다. 그 고생들이 어떠했겠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성을 축조해놓고 이룩될 부강한 나라의 태평성대를 꿈꾸었을 것입니다. 외침(外侵)이 없는 강성한 나라의 안녕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의 역사는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동행한 북경 대학생들은 성을 보고 감탄하는 저에게 말합디다. "참 어리석은 짓이지요." 그렇습니다. 나라가 그것으로 서는 것입니까? 성을 쌓기만 하면 나라가 튼튼해집니까? 나라는 의(義)로 인하여 서는 것이며, 죄로 인하여 망하는 것입니다. 만리장성을 구경하고 내려오는 길에 십삼릉(十三陵)이라는 곳에 들렀습니다. 왕릉 13기(基) 중 한 기를 공개하고 있었습니다. 지하 30미터에 묘실을 만들고 갖은 보화로 내부를 꾸며놓았습니다. 지금에야 유물(遺物)뿐입니다마는 그 엄청난 형세를 짐작하게 할만합디다. 벽에 붙여놓은 안내문을 보고는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묘역은 6년에 걸쳐 축조되었다. 연인원 6천5백만 명이 동원되었으며 매일 3만 명 이상이 사역하였다. 이것을 축조하기 위하여 백 명이 16년 동안 먹을 수 있는 분량의 식량이 인부들의 식량으로 제공되었다'---어차피 다 썩어 없어질 사람의 주검 하나에 이토록 무모한 일을 벌인 것입니다. 이 무슨 어리석음입니까? 어느 나라고 간에 흔히 우리가 문화재다, 민족 유산이다 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왕의 문화가 빚어낸 산물입니다. 왕이 중심이 되는 문화, 왕을 위한 문화---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노예의 문화입니다. 무수한 사람들의 희생과 죽음이 토대가 된 어리석은 문화입니다. 결국 이러한 어리석음은 마침내 그 어리석음으로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물의 본질이 가시적(可視的)인 것에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참본질은 육안으로 볼 수 없으며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입니다. 참능력, 참힘, 참권력이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깊은 곳에 감취어 있습니다. 마음의 눈으로라야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깊은 세계를 보며, 본질적인 것을 깨닫고, 영원하고 위대한 것을 마음으로 볼 줄 아는 영적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며 사고하는 사람이 지성인입니다. 다른 사람이 느낄 수 없는 것을 느끼고 다른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세계를 생각하면서 신앙적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것이 경건입니다. 이러한 자각으로 오늘을 살아갈 때, 이러한 믿음으로 현실을 살 때, 비로소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일례(一例)로 부모의 유산에 대한 생각을 지적해봅시다. 현대의 많은 젊은이들이 물질적 유산만을 크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재벌 2세를 바라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부모가 좀더 많은 몫의 재산을 남겨주기를 은근히 바랍니다. 그러나 유산으로 받는 것이 어찌 그것뿐이겠습니까? 우선 생(生) 자체가 유산입니다. 건전한 육체와 정신이 유산이며 신앙, 명예와 덕, 교훈, 사랑이 모두 귀중한 유산입니다. 이것을 망각하는 것은 그 가치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유산을 바로 볼 줄 알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가히 효자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 선지자 앞에 모여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들이신 후, 하나님은 그때까지도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케이스 바이 케이스(case by case)로, 때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셔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써만 평안히 살도록 하셨습니다. 이웃나라의 침략에는 사사(士師)를 세워 막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사는 또 삶에서 빚어지는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하나님 앞에서 판단해줍니다. 우매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법을 가르쳐 누구나 그대로 살게 해줍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법도 없고 질서도 없는 것 같은 중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질서와 법이 되어, 누구에게도 억눌리지 않고 누구에게서도 빼앗지 않고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렇듯 왕을 구하는 까닭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첫째로, 저들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사사를 구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나이 많아 늙었고 그 뒤를 이어야 할 그의 아들들은 공의를 세우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합니다. 그러니 '당신이 죽은 후에도 우리를 공평하게 다스릴 왕을 세워주시오'하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의 본래적인 경륜을 잊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무엇을 의도하셨는가, 하나님이 본래적으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만을 왕으로 섬기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만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법으로 인식하고, 공의와 진리와 사랑을 베풀면서 모두가 신앙적으로 평등할 것을 의도하셨습니다. 경건한 신정국가(神政國家)를 구상하셨습니다. 중간 계층, 하부 조직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왕이나 귀족이 있어서 존경과 섬김을 받거나, 누구를 억압하고 빼앗고…… 이러한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모든 백성이 동일하게, 평등하게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향유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나를 왕으로 섬기고 아버지로 받들고, 내가 말하는 계시와 질서와 법에 따라서 살기만 하면 자유와 평등과 번영과 안정은 내가 보장하마. 군사를 세울 필요가 없다.

내가 막아 주마. 법관이나 경찰도 필요 없다. 내가 판단해주마.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질 터이니 오로지 이 말씀과 계명을 지켜라.

내가 친히 너희의 왕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불평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군주제도를 바라게 됩니다. 사회학적으로 정의해보면 실제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호해주신다는데 눈에 보이지 않으니 믿을 수가 있습니까? 성을 높이 쌓고 성문을 만들고 왕을 세우고 왕궁을 짓고 군사를 훈련하고…… 이렇게 해야 믿음이 가고 안심이 됩니다.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무엇, 가시적(可視的)인 것, 실제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들의 요구는 이방왕국과 같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봅시다.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20절)"---'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왕을 세워주소서.' 열방의 왕들을 보니 굉장한 존재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높은 용상에 앉아 신인듯이 행세하며 백성을 부립니다. 이런 허세와 세속적인 영광, 세속적인 권세에 그들은 매력을 느꼈습니다. 자신들은 상대적으로 매우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이러한 거짓된 영광에 매료되어, 자신들이 그 영광의 노예가 되리라는 생각을 조금도 떠올리지 못합니다. 또한, 본문을 좀더 깊이 상고해보면, 이 같은 요구는 선민(選民)된 영적 권세와 특권을 망각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세우사 이들을 통하여 만방에 하나님의 살아 계신 권세를 선전하고자 하십니다. 왕도 없고 무기도 없고 군사도 없지만, 이 백성은 강성을 누리고 화평 즉 샬롬을 구가합니다. 누구도 쳐들어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누구도 넘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들로 하여금 선교의 귀한 역사를 감당케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외형적으로 눈에 보이는 권세가 없어야 합니다. 화평의 사람, 평화의 사람들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들은 이 영적인 사명, 특별한 백성으로서의 사명을 못마땅히 생각합니다. 하찮은 것으로 여깁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을 믿고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좀더 굉장한 것, 좀더 그럴듯한 것을 추구합니다. 애굽에서 나올 당시를 생각해봅시다. 모세가 잠시 보이지 않는다고 저들이 시내산 밑에서 무슨 일을 했습니까?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섬기면서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춤추지 않았습니까? 고대 사회에서는 왕을 높이기 위한 행사로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서 축제를 벌이는 일이 많았습니다. 요샛말로 카니발(carnival)을 즐깁니다. 그들은 이것이 못내 부러웠습니다. 조용한 평화가 못마땅하고 안정된 질서가 불만이었습니다. 전쟁도 치르고, 약탈도 자행하고, 나라를 확장해 가고, 권세도 누리고---현대의 용어로 표현하면 제국주의적인 욕망을 가졌던 것입니다.

전쟁을 통한 승리와 영광을 구합니다.

그러나 그실 승리란 평화에 있는 것입니다. 기권승이야말로 최대의 승리입니다. 전쟁의 필요조차 없는 승리야말로 최상의 승리가 아니겠습니까? 아무도 감히 넘보지 못한다면 거기에 진정한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저들은 이러한 승리를 못마땅한 것으로 여기고 왕을 구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왕의 문화는 노예의 문화입니다. 화려한 왕궁, 많은 성곽, 왕의 유물들이 모두 백성들의 희생과 죽음으로 유지되었던 문화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강한 왕권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노예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왕(王) 주도적인 권력 아래에서 백성은 노예가 됩니다.

강한 권력에는 독재가 수반되고 독재에는 부패가 뒤따르지 않습니까? 절대 주권은 절대 부패합니다. 이러한 절대 부패를 체험하고 나서야 민주사회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비단 우리뿐만이 아닙니다. 과거에 독일이 그러했고 일본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독재는 막았지만 혼란과 무질서를 야기시킵니다. 모두들 저마다의 주장과 의견을 굽히지 않는 데서 빚어지는 문제입니다. 그러고 보면 민주주의 또한 최선의 것은 아닙니다. 어찌 보면 독재를 막기 위한 최선의 수단일 뿐입니다. 독재는 견제했지만 질서는 무너집니다. 간혹 민(民) 주도라고 하는 것이 때로 혼란과 타락을 낳는 것은 모두가 자신이 민중을 대표한다고 견강부회(牽强附會)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 하나님의 법이 주관하는 세계, 하나님의 주권이 완전히 행사될 때에만 참평화와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강한 제도는 온 백성을 노예로 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백성들은 어리석게도 왕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17절 말씀을 읽어봅시다.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왕을 세우라? 좋다, 그리하면 너희는 그 왕의 종이 될 것이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왕은 백성의 대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일뿐입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사환으로서의 의식을 가져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십니다. 구약성경을 죽 읽어가느라면 하나님께서 열방을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겸손할 때에 사울을 왕으로 세우시고, 교만할 때에 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죄악에 처했을 때에 느부갓네살 왕을 시켜 그들을 진멸해버리십니다. 느부갓네살이 교만할 때에 그를 다시 폐하시고 바사 국(國)을 일으키십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회개할 때에 그들을 돌아오게 하십니다. 여러분, 나라가 무엇으로 세워집니까?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 되셔서 나라와 제도와 왕을 세우시기도 하고 폐하시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과 그 왕권을 확실히 믿고 그 앞에서 모두가 겸손한 마음으로 온유하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스리는 자는 그 권력 위에 있는 권력을 인식해야 합니다. 재판하는 자는 위에 계시는 재판장을 알아야 합니다. 가르치는 자는 성실과 부지런함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8절이 이 모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혹 권위(勸慰)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하나님 앞에서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을 깨달아 겸손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하여 국가와 민족과 사회 질서라고 하는 제도를 가지고 그를 섬겨나가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모두가 사환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제도에 대해서 불평하고 사람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제도나 사람의 문제가 아님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느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문제요,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것이 해결될 때에 참다운 평화가 있습니다. 백성들이 왕을 구했을 때에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왕 제도를 인정하시고 허용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제도를 통하여 자기 백성을 다스려 나가십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3․1운동의 의미를 재조명해볼 수 있습니다. 3․1운동은 신앙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특별히「독립선언서」에 나타나 있는 정신을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자유정신이 대두되어 있습니다. 자유를 누릴 자격과 권리가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창조주가 주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두 번째는 비폭력, 무저항 정신입니다. 절대로 폭력을 행사하지 말라, 무기를 들지 말라, 폭력은 반드시 또다른 폭력을 낳고 폭력으로 세운 나라는 반드시 폭력으로 망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비폭력적으로 국가를 지키겠다고 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 같으나, 이 정신은 고귀하게 평가받아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그 선언서에는 일본사람들을 미워하지 말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미워함도 아니요, 증오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다만 그들을 권고할 뿐이요, 우리의 주체성을 자각하라고 요구할 뿐입니다. 융화 단결하라고 부탁할 뿐입니다. 이 3․1운동의 주역의 한 분인 월남 이상재(李商在) 선생을 잡아들여 고문을 했습니다. 배후를 대라고 하자 시종여일 웃으며 조용히 대답합니다. "나를 조종한 배후자는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이 이 일을 시키셨소. 이 일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오." 선생은 하나님의 주권을 알고, 하나님이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행하신 일임을 굳게 믿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이 운동에 참가한 총인원은 2백2만3천 명이었으며 시위 건수는 1,541회나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수감된 자가 46,948명,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운동을 끝까지 지속한 사람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만세를 부른 곳은 교회뿐이었으며, 일제 말기에 순국한 사람의 태반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이러한 결과가 어떻게 빚어지는 것입니까? 운동의 시작은 애국의 마음이었다해도 이것을 신앙적으로 승화시킬 때에라야 끝까지 지속 할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신앙으로 승화할 때에 순교와 순국이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일부가 됩니다. 이때에 비로소 즐거이 순교하는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죽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죽어갔던 것입니다. 제1차세계대전 때에 영국 간호원 에디스 캐벌(Edith L, Cavell)이 간첩으로 몰려 총살당했습니다. 그는 양쪽 진영의 부상병들을 모두 치료해주다가 간첩으로 오인 받았던 것입니다.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있습니다. "나는 애국심만으로는 충분치 못함을 알았다. 어떤 사람에게도 증오나 원한을 가져서는 안 된다." 런던의 플루타크 광장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여러분, 애국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위에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참으로 진정한 애국심이 될 수 있습니다. 언제나 더 높은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주보 속에 나누어드린 인쇄물을 살펴보십시다. 한 면에는 '애국가'가, 한 면에는 '찬미가 14장'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구한말에 한국교회가 사용하던 찬송가의 14장입니다. 그 14장의 곡이 바로 애국가입니다. 이 애국가를 찬송가와 함께 부르면서 우리 선조들은 '독립만세'를 불렀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유산입니다. 애국가 4절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이 기상과 이 맘으로 님군을 섬기며……"---이것이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지녔던 생각입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이 나라가 굳게 설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이렇게 부르며 생명을 바쳤던 것입니다.

이 깊은 뜻을 오늘을 사는 우리가 이어가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왕이십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만족하고 그에 충성할 것입니다. 그의 말씀이 질서요, 그의 법이 곧 우리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이 나라와 이 질서를 통하여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사무엘상 8장 4절~9절)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김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여러분도 이미 아시다시피, 작년 8월에 중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북경에서 북쪽으로 조금 더 가면 그 유명한 만리장성이 있습니다. 가히 이름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장대한 규모의 성벽(城壁)입니다. 성벽 위로 자동차가 왕래할 수 있을 정도로 폭넓은 성벽이 산 속으로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실제의 길이는 만 리(萬里)가 넘는다고 합니다. 중국사람들은 그저 장성(長城)이라고만 부릅디다. 2천 년도 훨씬 전의 옛날에 순전히 사람들의 힘만 가지고 이 성을 쌓았다고 생각해봅시다. 그 고생들이 어떠했겠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성을 축조해놓고 이룩될 부강한 나라의 태평성대를 꿈꾸었을 것입니다. 외침(外侵)이 없는 강성한 나라의 안녕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의 역사는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동행한 북경 대학생들은 성을 보고 감탄하는 저에게 말합디다. "참 어리석은 짓이지요." 그렇습니다. 나라가 그것으로 서는 것입니까? 성을 쌓기만 하면 나라가 튼튼해집니까? 나라는 의(義)로 인하여 서는 것이며, 죄로 인하여 망하는 것입니다. 만리장성을 구경하고 내려오는 길에 십삼릉(十三陵)이라는 곳에 들렀습니다. 왕릉 13기(基) 중 한 기를 공개하고 있었습니다. 지하 30미터에 묘실을 만들고 갖은 보화로 내부를 꾸며놓았습니다. 지금에야 유물(遺物)뿐입니다마는 그 엄청난 형세를 짐작하게 할만합디다. 벽에 붙여놓은 안내문을 보고는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묘역은 6년에 걸쳐 축조되었다. 연인원 6천5백만 명이 동원되었으며 매일 3만 명 이상이 사역하였다. 이것을 축조하기 위하여 백 명이 16년 동안 먹을 수 있는 분량의 식량이 인부들의 식량으로 제공되었다'---어차피 다 썩어 없어질 사람의 주검 하나에 이토록 무모한 일을 벌인 것입니다. 이 무슨 어리석음입니까? 어느 나라고 간에 흔히 우리가 문화재다, 민족 유산이다 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왕의 문화가 빚어낸 산물입니다. 왕이 중심이 되는 문화, 왕을 위한 문화---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노예의 문화입니다. 무수한 사람들의 희생과 죽음이 토대가 된 어리석은 문화입니다. 결국 이러한 어리석음은 마침내 그 어리석음으로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물의 본질이 가시적(可視的)인 것에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참본질은 육안으로 볼 수 없으며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입니다. 참능력, 참힘, 참권력이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깊은 곳에 감취어 있습니다. 마음의 눈으로라야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깊은 세계를 보며, 본질적인 것을 깨닫고, 영원하고 위대한 것을 마음으로 볼 줄 아는 영적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며 사고하는 사람이 지성인입니다. 다른 사람이 느낄 수 없는 것을 느끼고 다른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세계를 생각하면서 신앙적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것이 경건입니다. 이러한 자각으로 오늘을 살아갈 때, 이러한 믿음으로 현실을 살 때, 비로소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일례(一例)로 부모의 유산에 대한 생각을 지적해봅시다. 현대의 많은 젊은이들이 물질적 유산만을 크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재벌 2세를 바라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부모가 좀더 많은 몫의 재산을 남겨주기를 은근히 바랍니다. 그러나 유산으로 받는 것이 어찌 그것뿐이겠습니까? 우선 생(生) 자체가 유산입니다. 건전한 육체와 정신이 유산이며 신앙, 명예와 덕, 교훈, 사랑이 모두 귀중한 유산입니다. 이것을 망각하는 것은 그 가치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유산을 바로 볼 줄 알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가히 효자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 선지자 앞에 모여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들이신 후, 하나님은 그때까지도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케이스 바이 케이스(case by case)로, 때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셔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써만 평안히 살도록 하셨습니다. 이웃나라의 침략에는 사사(士師)를 세워 막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사는 또 삶에서 빚어지는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하나님 앞에서 판단해줍니다. 우매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법을 가르쳐 누구나 그대로 살게 해줍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법도 없고 질서도 없는 것 같은 중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질서와 법이 되어, 누구에게도 억눌리지 않고 누구에게서도 빼앗지 않고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렇듯 왕을 구하는 까닭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첫째로, 저들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사사를 구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나이 많아 늙었고 그 뒤를 이어야 할 그의 아들들은 공의를 세우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합니다. 그러니 '당신이 죽은 후에도 우리를 공평하게 다스릴 왕을 세워주시오'하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의 본래적인 경륜을 잊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무엇을 의도하셨는가, 하나님이 본래적으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만을 왕으로 섬기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만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법으로 인식하고, 공의와 진리와 사랑을 베풀면서 모두가 신앙적으로 평등할 것을 의도하셨습니다. 경건한 신정국가(神政國家)를 구상하셨습니다. 중간 계층, 하부 조직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왕이나 귀족이 있어서 존경과 섬김을 받거나, 누구를 억압하고 빼앗고…… 이러한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모든 백성이 동일하게, 평등하게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향유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나를 왕으로 섬기고 아버지로 받들고, 내가 말하는 계시와 질서와 법에 따라서 살기만 하면 자유와 평등과 번영과 안정은 내가 보장하마. 군사를 세울 필요가 없다.

내가 막아 주마. 법관이나 경찰도 필요 없다. 내가 판단해주마.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질 터이니 오로지 이 말씀과 계명을 지켜라.

내가 친히 너희의 왕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불평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군주제도를 바라게 됩니다. 사회학적으로 정의해보면 실제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호해주신다는데 눈에 보이지 않으니 믿을 수가 있습니까? 성을 높이 쌓고 성문을 만들고 왕을 세우고 왕궁을 짓고 군사를 훈련하고…… 이렇게 해야 믿음이 가고 안심이 됩니다.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무엇, 가시적(可視的)인 것, 실제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들의 요구는 이방왕국과 같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봅시다.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20절)"---'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왕을 세워주소서.' 열방의 왕들을 보니 굉장한 존재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높은 용상에 앉아 신인듯이 행세하며 백성을 부립니다. 이런 허세와 세속적인 영광, 세속적인 권세에 그들은 매력을 느꼈습니다. 자신들은 상대적으로 매우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이러한 거짓된 영광에 매료되어, 자신들이 그 영광의 노예가 되리라는 생각을 조금도 떠올리지 못합니다. 또한, 본문을 좀더 깊이 상고해보면, 이 같은 요구는 선민(選民)된 영적 권세와 특권을 망각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세우사 이들을 통하여 만방에 하나님의 살아 계신 권세를 선전하고자 하십니다. 왕도 없고 무기도 없고 군사도 없지만, 이 백성은 강성을 누리고 화평 즉 샬롬을 구가합니다. 누구도 쳐들어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누구도 넘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들로 하여금 선교의 귀한 역사를 감당케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외형적으로 눈에 보이는 권세가 없어야 합니다. 화평의 사람, 평화의 사람들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들은 이 영적인 사명, 특별한 백성으로서의 사명을 못마땅히 생각합니다. 하찮은 것으로 여깁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을 믿고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좀더 굉장한 것, 좀더 그럴듯한 것을 추구합니다. 애굽에서 나올 당시를 생각해봅시다. 모세가 잠시 보이지 않는다고 저들이 시내산 밑에서 무슨 일을 했습니까?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섬기면서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춤추지 않았습니까? 고대 사회에서는 왕을 높이기 위한 행사로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서 축제를 벌이는 일이 많았습니다. 요샛말로 카니발(carnival)을 즐깁니다. 그들은 이것이 못내 부러웠습니다. 조용한 평화가 못마땅하고 안정된 질서가 불만이었습니다. 전쟁도 치르고, 약탈도 자행하고, 나라를 확장해 가고, 권세도 누리고---현대의 용어로 표현하면 제국주의적인 욕망을 가졌던 것입니다.

전쟁을 통한 승리와 영광을 구합니다.

그러나 그실 승리란 평화에 있는 것입니다. 기권승이야말로 최대의 승리입니다. 전쟁의 필요조차 없는 승리야말로 최상의 승리가 아니겠습니까? 아무도 감히 넘보지 못한다면 거기에 진정한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저들은 이러한 승리를 못마땅한 것으로 여기고 왕을 구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왕의 문화는 노예의 문화입니다. 화려한 왕궁, 많은 성곽, 왕의 유물들이 모두 백성들의 희생과 죽음으로 유지되었던 문화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강한 왕권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노예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왕(王) 주도적인 권력 아래에서 백성은 노예가 됩니다.

강한 권력에는 독재가 수반되고 독재에는 부패가 뒤따르지 않습니까? 절대 주권은 절대 부패합니다. 이러한 절대 부패를 체험하고 나서야 민주사회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비단 우리뿐만이 아닙니다. 과거에 독일이 그러했고 일본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독재는 막았지만 혼란과 무질서를 야기시킵니다. 모두들 저마다의 주장과 의견을 굽히지 않는 데서 빚어지는 문제입니다. 그러고 보면 민주주의 또한 최선의 것은 아닙니다. 어찌 보면 독재를 막기 위한 최선의 수단일 뿐입니다. 독재는 견제했지만 질서는 무너집니다. 간혹 민(民) 주도라고 하는 것이 때로 혼란과 타락을 낳는 것은 모두가 자신이 민중을 대표한다고 견강부회(牽强附會)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 하나님의 법이 주관하는 세계, 하나님의 주권이 완전히 행사될 때에만 참평화와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강한 제도는 온 백성을 노예로 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백성들은 어리석게도 왕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17절 말씀을 읽어봅시다.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왕을 세우라? 좋다, 그리하면 너희는 그 왕의 종이 될 것이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왕은 백성의 대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일뿐입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사환으로서의 의식을 가져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십니다. 구약성경을 죽 읽어가느라면 하나님께서 열방을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겸손할 때에 사울을 왕으로 세우시고, 교만할 때에 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죄악에 처했을 때에 느부갓네살 왕을 시켜 그들을 진멸해버리십니다. 느부갓네살이 교만할 때에 그를 다시 폐하시고 바사 국(國)을 일으키십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회개할 때에 그들을 돌아오게 하십니다. 여러분, 나라가 무엇으로 세워집니까?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 되셔서 나라와 제도와 왕을 세우시기도 하고 폐하시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과 그 왕권을 확실히 믿고 그 앞에서 모두가 겸손한 마음으로 온유하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스리는 자는 그 권력 위에 있는 권력을 인식해야 합니다. 재판하는 자는 위에 계시는 재판장을 알아야 합니다. 가르치는 자는 성실과 부지런함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8절이 이 모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혹 권위(勸慰)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하나님 앞에서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을 깨달아 겸손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하여 국가와 민족과 사회 질서라고 하는 제도를 가지고 그를 섬겨나가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모두가 사환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제도에 대해서 불평하고 사람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제도나 사람의 문제가 아님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느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문제요,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것이 해결될 때에 참다운 평화가 있습니다. 백성들이 왕을 구했을 때에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왕 제도를 인정하시고 허용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제도를 통하여 자기 백성을 다스려 나가십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3․1운동의 의미를 재조명해볼 수 있습니다. 3․1운동은 신앙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특별히「독립선언서」에 나타나 있는 정신을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자유정신이 대두되어 있습니다. 자유를 누릴 자격과 권리가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창조주가 주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두 번째는 비폭력, 무저항 정신입니다. 절대로 폭력을 행사하지 말라, 무기를 들지 말라, 폭력은 반드시 또다른 폭력을 낳고 폭력으로 세운 나라는 반드시 폭력으로 망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비폭력적으로 국가를 지키겠다고 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 같으나, 이 정신은 고귀하게 평가받아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그 선언서에는 일본사람들을 미워하지 말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미워함도 아니요, 증오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다만 그들을 권고할 뿐이요, 우리의 주체성을 자각하라고 요구할 뿐입니다. 융화 단결하라고 부탁할 뿐입니다. 이 3․1운동의 주역의 한 분인 월남 이상재(李商在) 선생을 잡아들여 고문을 했습니다. 배후를 대라고 하자 시종여일 웃으며 조용히 대답합니다. "나를 조종한 배후자는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이 이 일을 시키셨소. 이 일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오." 선생은 하나님의 주권을 알고, 하나님이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행하신 일임을 굳게 믿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이 운동에 참가한 총인원은 2백2만3천 명이었으며 시위 건수는 1,541회나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수감된 자가 46,948명,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운동을 끝까지 지속한 사람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만세를 부른 곳은 교회뿐이었으며, 일제 말기에 순국한 사람의 태반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이러한 결과가 어떻게 빚어지는 것입니까? 운동의 시작은 애국의 마음이었다해도 이것을 신앙적으로 승화시킬 때에라야 끝까지 지속 할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신앙으로 승화할 때에 순교와 순국이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일부가 됩니다. 이때에 비로소 즐거이 순교하는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죽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죽어갔던 것입니다. 제1차세계대전 때에 영국 간호원 에디스 캐벌(Edith L, Cavell)이 간첩으로 몰려 총살당했습니다. 그는 양쪽 진영의 부상병들을 모두 치료해주다가 간첩으로 오인 받았던 것입니다.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있습니다. "나는 애국심만으로는 충분치 못함을 알았다. 어떤 사람에게도 증오나 원한을 가져서는 안 된다." 런던의 플루타크 광장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여러분, 애국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위에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참으로 진정한 애국심이 될 수 있습니다. 언제나 더 높은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주보 속에 나누어드린 인쇄물을 살펴보십시다. 한 면에는 '애국가'가, 한 면에는 '찬미가 14장'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구한말에 한국교회가 사용하던 찬송가의 14장입니다. 그 14장의 곡이 바로 애국가입니다. 이 애국가를 찬송가와 함께 부르면서 우리 선조들은 '독립만세'를 불렀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유산입니다. 애국가 4절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이 기상과 이 맘으로 님군을 섬기며……"---이것이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지녔던 생각입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이 나라가 굳게 설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이렇게 부르며 생명을 바쳤던 것입니다.

이 깊은 뜻을 오늘을 사는 우리가 이어가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왕이십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만족하고 그에 충성할 것입니다. 그의 말씀이 질서요, 그의 법이 곧 우리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이 나라와 이 질서를 통하여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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