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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성경 교육 지침

십자가 복음의 능력

by 【고동엽】 2022. 3. 5.

십자가 복음의 능력



 

소재열 목사

 

머 리 말

 

우리가 보통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을 때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개념 정립이 왜 그토록 다양한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 놓고 하나님의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고 처음서부터 인간을 위한, 인간에 관한 말씀을 전달하기에 분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성경에 나타난 여러 인물들을 통하여, 각종 사건을 통하여, 역사를 통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신에 관해서 어떻게 드러내어 보여 주시는지를 확인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차적인 우리들의 관심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인물들이나 사건 자체에 멎어져 버린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구약성경에서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이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한 왕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메시아, 즉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는 날에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증거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베풀어 주신다고 합니다. 흑암의 결박에서 놓임을 받을 것입니다. 그 메시아가 오시는 날에는 이스라엘에게 소망이 되며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신약은 그 약속하신 메시아가 왔다고 합니다. 예수 스리스도가 구약에 예언된 그 메시아라고 합니다. 더 정확히 표현해서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는 사실을 계시하고 선포한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신약 성경은 취급되어져야 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도들이나 제자들의 심리적인 마음을 분석해서 거기에 최종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신약성경의 의미를 추적하면 신약 성경의 정확한 의미가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자신을 그렇게 나타내어 보여주고 있느냐에 대한 질문부터 해야 할 것입니다.
본서는 이런 질문에 충실히 답변하는데 노력하였습니다. 본서가 출판되도록 까지 많은 분들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성령의 충만함으로 수고하신 분들과 독자님들께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1998.10.
저자 소재열목사

 

목차


1. 예언 성취자로 오신 그 그리스도 (마 2:1-12) 7
2.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선포와 권위 (마 5:1-11) 15
3. 백부장을 구원하신 예수님 (마 8:5-13) 27
4.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인가? (마 9:35) 37
5. 인자로 오신 예수님 (마 14:22-33) 47
6. 하늘과 땅을 통일케 하신 예수님 (마 18:15-20) 63
7. 포도원 품꾼 비유를 통한 천국 복음 (마 20:1-16) 71
8. 인자, 그 영광의 재림과 심판 (마 25:31-46) 79
9.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5-49) 89
10.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 (막 1:1) 97
11. 세례 요한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 (막 1:1-8) 107
12.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 복음(막1:29-39)
13.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막 8:27-34) 123
14.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 (눅 2:15-20) 133
15. 죄사함을 선포하신 예수님 (눅 7:36-50) 143
16. 회개의 기회를 말씀하신 예수님 (눅 13:6-9) 151
17. 부자와 거지 나사를 통한 천국 복음 (눅 16:19-31)
18. 새 언약의 피 (눅 22:14-23) 165
19. 세례 요한이 증거한 그리스도 (요 1:19-34)
20.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오신 예수님 (요 4:7-14)
21. 내가 그 메시아다 (요 4:23-26)
22. 유월절 어린양으로 입성하신 예수님 (요 12;12-19)
23.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 14:25-28) 207
24. 예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 (요 17:1-9) 215
25. 예수님의 중보기도 (요 17:11-19) 223
26. 내 양을 먹이라 하신 예수님 (요 21:15-23) 231
27. 성령강림과 방언을 통해 증거된 그리스도 (행 2:1-4) 239
28.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의 (롬 1:14-17) 247
29. 그리스도 부활 그 이후 (고전 15:20-28) 255
30. 바울을 통해 증거된 영광의 복음 (고후 4:1-6) 263
31. 예수님은 어떤 메시아로 오셨는가? (고후 5:11-21) 271
32. 연보의 정신과 예수 그리스도 (고후 8:1-15) 279
33. 바울을 변화시킨 예수 그리스도 (빌 3:7-14) 287
34. 선진들을 통해 증거된 그리스도 (히 11:1-12) 297
35.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벧전 3:18-22) 309
36. 그리스도 영광과 증거 (벧후 1:16-22) 345
37. 사단을 이긴 어린 양의 피 (계 12:7-12)

예언 성취자로 오신 그 그리스도

마 2:1-12

 

올해도 우리들에게 어김없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다가왔습니다. 이날은 우리들에게 축제의 날이요, 성도들에게 있어서 기쁨의 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성탄의 기쁨과 축복을 우리가 진정으로 누리고 있는가 우리 자신들을 향하여 물어야 합니다.
또한 그 성탄의 축복을 누리고 있는 성도들의 생활 모습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느냐를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금년 성탄절을 맞이하여 오늘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을 한번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잉태되어 출생하게 되었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출생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성취된 계시적 사건임을 증거해 주고 있다는 것으로 1장은 우리들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2장 역시 구약의 예언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출생하게 되었음을 증거하므로 그 아기 예수야말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우리들에게 전하므로 그 예수님을 믿을 것을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 2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들을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 예수의 출생과 관련된 주변 사람들의 미묘한 감정과 그 배경이 자세하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일들이 구약 성경에 이미 예언된 사실들로써 그같은 예언을 이루심으로 아기 예수에 대한 메시아 됨을 증거하고 확증해 주고 있는 말씀이 바로 2장의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미가 선지자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2:1-6절)

기록자 마태는 미가 선지자의 예언된 대로 성취되어 탄생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면서 그 예수 그리스도가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 탄생하게 되었는가를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아기 예수를 찾아온 동방 박사들(1-2절)
본문 1절과 2절 말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출생하게 되자 제일 먼저 찾아온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이야기를 진술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동방에서 박사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의 소식을 듣고 찾아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2절)라고 말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도 막연히 찾아온 것도 아니라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별을 보고 찾아 왔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동방박사들이 그 아기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왕은 헤롯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지금 로마의 속국이며 그 로마의 속국으로 있는 유대의 분봉왕으로 헤롯을 왕으로 지칭한 것이 아니라 당시 아기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왕은 헤롯으로 둔갑당하고 있는 그런 상황 속에서 헤롯이 왕이 아니라 아기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은 정치적인 반란으로서 고소감에 해당됩니다. 정치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자는 무조건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9장 15절에 보면 빌라도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랴?”고 물었을 때 대제사장들이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고 한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같은 상황 속에서 헤롯이 왕으로 둔갑당하고 있는 그러한 상황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2:1은 “헤롯 왕 때”라고 합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과 같은 대등한 권력의 권좌에서 신으로 둔갑당하고 있는 헤롯이 우리들의 주인도 아니요, 왕도 아니라 아기 예수께서 우리들의 구주이시며 메시아이심을 가장 함축적으로 본문은 증거하기를 동방박사들을 삽입시킴으로써 바로 아기 예수를 유대인의 왕, 즉 메시아로 찾고 있다는 것은 아주 충격적인 사건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 가운데 가장 위협을 느끼고 있는 자는 바로 헤롯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로마로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유대인의 지배권을 아기 예수께 빼앗길까바 3절 이후에서는 그 헤롯 왕의 음모가 시작됩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본문 말씀이 동방박사들의 위대한 신앙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아기 예수가 태어날 때부터 그분이 바로 유대인의 진정한 왕으로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됨을 증거하고 싶은 것이 기록자 마태의 의도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이 예수야 말로 구약성경에 장차 그토록 오시리라고 예언한 왕이심을 증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야말로 우리들의 구주이시며 평안과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분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이라고 했을 때 ‘박사’라는 말은 ‘점성술’을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그 박사들은 점성학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점성술의 원리에 따라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그 별”을 쫓아 예루살렘으로 왔다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동방의 예언자였던 발람의 메시아 예언(민24:17)을 알고 있었던 동일 문화권 내지 동일 생활권에 있었던 그 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왔던 것은 구약성경의 예언에 대한 말씀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결국 동방박사들로부터 왕이신 아기 예수를 찾을 수 있도록 안내했던 것은 어떤 자연적인 빛이 아니요, 자신들의 점성술의 지혜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의 길을 인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동방의 이방인들로부터 만왕이신 아기 예수를 찾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던 그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도 우리들의 구주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찾게 해 주셔서 우리들이 그를 믿고 구원을 얻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당시에 스스로 지혜있다고 자고하는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에게 숨기시고 그들이 보기에 천시해 온 이방인들에게는 그 아기 예수를 찾게 해 주셨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까? 이같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경륜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영향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을 기록한 기록자 마태는 11:2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는 우리들은 그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아기 예수의 나심에 대한 헤롯 왕의 질문(3-4절)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아기 예수를 찾아 경배하러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헤롯왕과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소동했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소동의 와중에서 헤롯왕은 모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모아 놓고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라고 질문합니다.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의 나신 이”를 찾을 때 당시 유대인들의 왕으로 유대 땅을 다스리던 헤롯 왕이 이미 그 마음 속에 소용돌이가 일어난 것입니다. “소동한지라”라는 말은 “강한 감정의 격함을 나타낸다”는 말입니다. 즉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잠시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 지상 왕과의 긴장과 대결이 일어난 것입니다.
헤롯왕은 단순한 왕이 아니라 하나에 신격화 되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하늘의 신의 대리자가 지상의 왕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왕의 말은 곧 신의 말이었습니다. 신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헤롯과 만왕의 왕으로 나신 예수 그리스도와 긴장 관계가 있었음을 본문은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헤롯왕은 유대인들을 통치하고 있었지만 유대인에 대한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열등의식을 극복하기 위하여 정통 유대인의 왕가인 하스모네안 공주 마리안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가 결혼을 하고 난 후에 자기 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숙청을 자행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내까지 처형했습니다. 본래 아내인 마리안 외에도 헤롯의 아내는 9명이나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 사이에 서로 갈등과 반목과 음모가 대단했습니다. 그가 마지막 죽기 5일 전에 그동안 가장 신임하고 자기 후계자로서 유언장까지 남겨 놓았던 안티파터를 처형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악한 자요, 이런 상황 속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묻는 동방박사들의 얘기를 들은 헤롯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불안해서 처형하고 또 처형하는 피의 숙청을 계속하고 있는데 저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찾아와서 헤롯의 뒤통수를 때린 격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헤롯왕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자기의 정권을 탈취할 것으로 생각하여 이미 그 마음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아기 예수를 접하게 되자 헤롯왕의 마음이 격함을 나타내듯이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이야기하면 먼저 격한 감정부터 내며 화를 냅니다. 이것은 어찌보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인 것 같습니다. 자신들이 스스로 주인의 자리에 앉아 있다가 주인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격분한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우리들에게 우리가 주인이 아니며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내보이는 것은 오히려 인간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인간 소외현상을 가져옵니다. 이러한 인간은 자신의 소외와 고독을 극복하기 위하여 자신의 아성을 구축합니다. 돈에 노예가 되고 자식이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심각하게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오신 예수 - 예수님은 왜 오셔야만 했습니까?

마 20:28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2처년 전에 오신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섬기며 많은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습니다.
롬 5: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까지 우리들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기회를 주실 때 우리들은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성탄절 아침에 우리들은 이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믿음을 다시한번 점검하는 계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회개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벧전 2:21절에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성탄절에 예수 십자가 보혈로 구원을 받은 우리들은 어떠한 고난도 달게 받을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의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도 기쁜 마음으로 잘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빌 1:29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딤후 1:8절에서는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던 것입니다.

3. 오실 예수 - 심판주

성탄절 이 아침에 2천년 전에 오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신 예수님 뿐만 아니라 앞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예수님은 심판주로 오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심판주로 오실 예수님을 늘 생각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아야 합니다.
살전 5:3절에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선포와 권위

 

마 5:1-11

거북이는 참 약해 보이는 온순한 동물입니다. 그러나 거북이의 목을 강제로 뺄 수 있는 그런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이 없을 정도로 무서운 힘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거북이의 체중은 12-18㎏밖에 되지 않지만 70-90㎏ 나가는 사람도 목을 움츠린 거북이의 목을 결코 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거북이의 목을 빼는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북이를 따뜻한 화롯불 가까이에 놓아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북이는 목은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 중에 나그네의 외투를 벗긴 태양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센 바람이 못 벗긴 나그네의 옷을 태양이 계속 빛과 열을 내리니까 그 나그네가 자연스럽게 외투를 벗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같은 이야기는 우리들의 마음을 여는 비결은 강압적인 태도가 아니라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사랑의 힘, 즉 동기부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강압적으로 명령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해서 순종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십니다. 그 동기를 부여해 주는 힘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권위를 갖고 있는가를 본문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보편적으로 본문 말씀을 메시아의 사역과 연결시켜서 생각하지 않고 곧바로 우리들에게로 가지고 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무조건 우리들 더러 복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같은 복을 받으려면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까? 첫째 둘째 하면서 8가지를 내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 8가지를 충족시켜 내가 복을 얻기는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이라는 표현이 있듯이 나와 거리가 너무나 먼 말씀인 듯한 인상을 깊게 심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은 특별한 종교인들이나 지키는 말씀 쯤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들을 황홀경으로 빠져들게 하는 감격적인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삶을 송두리째 휘감는 생명의 말씀이요, 능력과 권세가 있는 말씀입니다. 이같은 말씀이 우리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생명의 길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본문의 앞 뒤 전후 문맥과 마태복음이라는 상황

우리들은 본문 마태복음5:1-11절 말씀이 어떤 앞 뒤 전후 문맥 속에서 주어진 말씀입니까? 특별히 마태복음이라는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말씀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이같은 사실을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아버지로부터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면 아버지는 어떤 의도를 가지시고 이 편지를 나에게 보내 주셨는지를 살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하여 주시고자 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분명히 알아야 우리들은 그분이 기뻐하신 뜻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살펴보기로 한 본문 말씀은 산상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설교를 하셨다는 의미에서 산상설교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오늘 우리들은 예수님의 한편의 설교를 들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산상 설교는 5:1절에서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셔서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설교는 7:28절에서 마치십니다. 7:28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말씀을 마치시고 8:1절에서는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5:1-7:29절까지 이어지는 한편의 설교라는 점입니다. 이같은 한편의 설교 초반부를 장식한 말씀이 우리들이 오늘 살펴보기로 한 본문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마태복음이라는 상황을 살펴보면 마태복음의 일차 독자는 유대인들입니다. 그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였습니다. 거부할 뿐만 아니라 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였습니다.
마태라는 기록자는 그 유대인들을 상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 예언되어 있는 그 메시아 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구약이 예언하고 있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합니다. 자신들이 생각할 때 메시아란 바로 정치적인 메시아였습니다. 모세와 같이 자기 민족을 구원한 위대한 선지자, 혹은 다윗과 같은 경제적인 평화와 부를 가져다주는 그런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이 이런 일을 했습니까? 예수님이 모세와 같이 로마의 지배하에 있는 자기 민족을 정치적으로 해방시켜 주었습니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의 아들로서 다윗과 같은 경제적인 풍요를 가져다 주었습니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메시아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거부했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지고 오는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정치적인 해방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이 땅에서 경제적인 부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메시아를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교정시켜 주셨습니다. 자신은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의 개념도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의 그런 복이 아닙니다. 오직 진정한 복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이해하고 믿는 것입니다.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회하고 자복하여 회개하므로 구원의 반열에 서있는 사람이 복에 사람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보통 신앙생활을 할 때 예수님은 우리 가정의 건강을 지켜 주실 때에만 그분은 마치 우리들의 구원자인 듯한 생각들은 분명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우리들의 생각 속에 가두어 믿으려고 하는 어리석음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그 회개가 우리들을 진정한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으로 거듭나게 합니다. 유대인들은 모세 외에는 없었습니다. 애굽에 종으로 있던 자기 민족을 구출해 주는 지도자가 바로 모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모세는 영웅입니다. 모세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 심지어 예수님도 모세 밑에 놓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모세보다 우월한 분이심을 증거하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아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산에서 자신이 직접 말씀을 선포합니다. 진정한 복이 무엇인가를 누구로부터 받아 선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선포합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위의 선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권위의 상징으로 산에서 올라가 앉으셔서 가르치셨다고 1절에서 말씀합니다. 당시 랍비들은 권위의 상징으로 앉아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우월한 말씀의 선포자, 혹은 자신이 말씀을 계시하는 계시자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원칙에 볼 것 같은 예수님은 모세와는 전혀 다른 분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본문 말씀 속에서 예수님의 권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끝날 때 마태는 이런 말씀으로 산상설교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7:29) 아멘.

2. 심령이 가난한 자와 애통하는 자의 복(3-4절)

본문 3-4절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한가지 원칙을 확인해야 합니다. 천국을 소유하는 조건을 “심령의 가난”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심령의 가난”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천국을 소유하는 조건이 됩니까? 천국을 소유한다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해야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은 오직 예수님 외에는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원칙을 본문에 적용해 보면 심령이 가난해야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 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의 고백과 연결 됩니다.
유대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 모세의 법을 잘 지켜야 구원이 있고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의 율법이 구원의 유일한 조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만 그 율법을 주었다고 생각한 그들은 자신들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과 천국은 그런식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을 고백한 심령의 가난한 자들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심령이 가난하고 부족하고, 죄인이라고 고백한 자들에게 천국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를 회개하고 통회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임합니다. 이 위로는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런 믿음과 신앙고백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사랑과 구원을 베푸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들은 종교적인 어떤 열심만 있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착각입니다.
이런 착각 때문에 우리들은 얼마나 교만했으며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일하게 되었습니까?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양보가 없고 회개가 없습니다. 돌이키지 않으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반열에서 제외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의 분명한 말씀의 의도를 읽어야 합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임할 것입니다.

3.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5-6절)

본문 5-6절에 보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온유하다는 말은 우리가 보통 마음씨가 착하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겸손한 태도를 가리킨다. 왜 겸손한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았기에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들은 할말이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들을 구원하지 않아도 할말이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저주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저주를 대신 받으시게 하셨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들을 살려주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됩니다. 이런 자를 가리켜 온유한 자라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을 구원하시는 그것을 성경은 “의”라고 합니다. 의에 대한 개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 역시 오직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아니었던들 우리들이 어떻게 빛 가운데 살아갈 수 있었던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바로 이런 구원을 기대하며 바라며 간구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복이 임합니다. 배부른다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한 생활을 말합니다. 불평이 아니라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여 만족한 상태를 “배부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4. 긍휼이 여기는 자와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7-8절)

계속해서 7-8절에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합니다.
여기 “긍휼히 여기는 자”란 용서하는 정신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6:14-15절에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합니다.
또한 마가복음 11:25절에서도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고 했습니다.
내가 상대를 용서해 주었다는 그 조건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남을 용서해 주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느냐면 “내가 하나님께 죄용서 받았다”는 그 감격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상대를 용서하지 못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용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판단하고 심판하는 심판자가 되겠다는 말과 같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께 용서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긍휼히 여기는 자들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들입니다. 고전6:11절에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자들을 마음이 청결한 자라고 합니다.
또한 디도서 3:5절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들이야말로 마음이 청결한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이런 자들은 이미 복받은 사람들입니다.

5. 화평케 하는 자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의 복(9-10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9-10)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예수님께서 화목케 해 주셨습니다. 화평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들은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화평케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고후 5:18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머무는 곳이 분쟁일지라도 화평케 됩니다. 하나님과 원수져 있는 자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증거해서 하나님과 화평케 하는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에게 복이 임합니다. 그런 복음을 증거하는 자, 즉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에게 복이 임합니다.
벧전2:19-21에 보면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핍박과 고난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고난과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결론적으로 11-12절 말씀을 읽고 끝 마치겠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11-12절) 아멘.

 

백부장을 구원하신 예수님

 

마 8:5-13

어느 선생님이 자기가 가장 아끼는 귀한 시계를 아이들에게 주고 싶었습니다. 제일 키가 큰 아이에게 먼저 시계를 꺼내 보이면서 “네가 이것을 갖고 싶으면 내가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어린이는 선생님이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생글생글 웃기만 했습니다. 선생님은 다른 어린이에게도 똑같이 말했습니다. 그 아이도 손을 내밀며 웃음거리가 될 것 같아 웃기만 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제일 키가 작은 아이에게 똑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어린이는 얼른 그 시계를 받아 제 주머니에 넣으면서 꾸벅 인사를 했습니다.
선생님은 그 시계를 받아든 어린이에게 “참 고맙다. 네가 내 말을 믿어 주었구나. 이제 그 시계는 네 것이니 잘 보관해라. 태엽 감는 것 잊지 말라”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제야 두 아이는 “정말 주는 거예요? 그럴 줄 알았으면 진작 내가 가졌을 것을….”이라며 후회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불신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서로 믿지 못해 의심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자신 안에 가두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평안이 없습니다. 행복이 없습니다. 그러나 서로를 믿고 신뢰하면 마음이 평안합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또한 상대가 나를 믿어 주었다는 것 때문에 기분이 뿌듯합니다. 상대방이 자신을 인정하고 믿고 일을 맡긴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기분 좋은 일입니까?
이렇게 사람 사는 세계에서도 서로를 믿고 신뢰한 생활 그 자체가 좋은데 하물며 우리들의 영혼의 문제를 다루는 신앙세계에서야 오죽하겠습니까? 우리들의 영혼을 책임지시고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실 주님을 믿고 신뢰한다는 것은 우리들을 행복하게 해줍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우리들을 구원하십니다. 우리들을 위로하십니다. 우리들의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해 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 말씀은 우리들에게 큰 희망과 우리들의 생명을 일으켜 주기에 충분합니다. 우리들에게 구원을 선포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을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그같은 예수님의 사역의 결과로 어떠한 자들이 그 구원의 감격 속에서 기뻐했는지를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들도 그런 구원의 감격 속에서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백부장에게 찾아오신 예수님 (5절)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어떤 분이 어떠한 사람들에게 무슨 내용으로 주신 말씀입니까? 또한 무슨 목적으로 이 성경 말씀을 주셨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 주셨습니까? 이것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우리들의 생명을 얻게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사랑과 구원을 베푸셨다는 것을 알리는 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우리들에게 증거해 주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구약의 예언된 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들이 요구하기 전에 그분이 알아서 먼저 오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9-10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했기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들을 사랑하사 예수님을 우리들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이 땅에 나타내고 실현시키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외롭고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들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들을 위로했습니다. 위로할 뿐만 아니라 희망과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믿고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위인들이 못되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등졌던 사람들입니다.
죄를 범한 아담에게 “아담아 아담아”라고 부르시면서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여러 모양과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선지자들을 열심히 보내셔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치게 했습니다.
이제 사람을 시켜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내 주셔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외치게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받아 외쳤지만 예수님은 직접 하나님의 법을 외쳤습니다. 선포했습니다.
그 선포에는 모세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5절)라는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이방 사람인 로마의 백부장을 만났다는 사실을 본문은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백부장이 예수님께 먼저 나아왔다고 5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문제될 것 없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그 백부장에게 찾아오니까 그가 예수님께 왔을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이방인 가운데 로마 백부장을 만나 구원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사역을 진행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마태복음 4:12-16절 말씀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가버나움에 가서 사신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이미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 예언이 무슨 예언인가? 가버나움에 있는 백성들이 큰 빛을 보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마태복음 4:16절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곳에 큰 빛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서 지금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의 그늘진 곳에 있던 백부장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구약 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그 빛되신 메시아이심을 유대인들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이 의도하고 있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에게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그 주님께서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지금도 천상에서 이 지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외롭고 고달플 때 우리 주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들과 함께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셔서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우리들에게 생명의 빛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어깨를 토닥거리면서 “내가 너와 함께 해 주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래도 불평할 것입니까? 그래도 계속 하나님께 죄를 짓겠습니까? 그래도 교회를 등한시 여기고 예배에 빠지겠습니까? 그래도 기도하지 못한다면 우리들은 하나님께 부끄럼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빛으로 찾아오신 주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2. 백부장의 믿음에 나타난 구원사의 파노라마(6-10절)

우리들은 성경을 읽을 때 참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은 “백부장의 믿음”이 부각되면서 백부장을 자서전적으로 묘사하면 안됩니다. 물론 백부장의 믿음은 칭찬해야 되고 우리들이 그런 백부장의 믿음을 본받아야 할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혹은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단순히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려고 이 말씀을 선포했습니까? 또한 마태로 하여금 기록하게 했는가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백부장은 로마군인입니다. 유대인들의 눈으로 볼 때는 이방인입니다. 더더군다나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지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 이방인이며 로마군인 백부장은 유대인들이 볼 때 절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위 그들을 개와 돼지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1차적으로 그런 유대인들을 상대로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또한 마태로 하여금 그런 유대인들을 상대로 마태복음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되었던 유대인들이 그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기를 포기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유대인들이 개 돼지처럼 생각되었던 이방인 가운데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 한 행위는 유대인을 거부한 행위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주의 종인 목사님을 존경하고 좋아한다면 목사님의 자녀들을 좋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목사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목사님의 자녀를 미워한다면 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미워한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일 수 있습니까? 성경은 이 부분을 이야기합니다. 이제 더 이상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고백한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도로 본문 10절에서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했습니다. 백부장의 구원얻는 믿음을 칭찬하신 예수님께서 백부장과 같은 믿음을 이스라엘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서 아직 구원 얻는 백성을 만나보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이방이든 유대인들이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 예수님을 믿어야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모세의 법을 지켰다고 구원 얻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의 생각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이제 구약의 예언된 대로 예수님이 이방인의 빛으로 오신 분입니다. 이분을 믿는 자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분을 포기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성도라고 한다면 그 성도라는 이름대로 살았습니까? 교회를 섬겼고 이웃을 섬겼습니까? 시간을 투자하고 물질을 투자했습니까? 물질가는 곳에 마음도 가기 마련입니다.
처녀 총각이 자기 애인을 사랑한다면 선물을 사주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하는 우리들이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어떤 봉사든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3. 구원을 선포하신 예수님 (11-13절)

본문 11,12절 말씀을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충격입니다. 충격보다 혁명입니다. 유대인들의 사상이 완전히 무너진다. 아직도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그들은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야 말로 구약이 예언한 그 메시아로 오셔서 구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것을 오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11-12절에서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런 이야기 때문에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더욱 시기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이 예언한 구원자로서 오신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구원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가진자 못가진자 상관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구원을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자들은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들의 종교적인 노력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자신이 구원의 기준임을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구원이 결정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여전히 모세의 법을 소유하고 그 법을 지킨 자들만이 구원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이방 로마 군인인 백부장, 100명 정도 거느리고 있는 백부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믿었습니다.
자신도 병사를 거느린 사람입니다. 자신의 말 한마디면 병사들이 움직이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자신보다 더 월등한 권세를 가지고 계신분으로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의 병든 하인을 방문하지 않더라도 말씀만 하시면 병고침을 받을 줄 믿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과 권세를 믿었습니다.
이런 백부장의 모습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찾아볼 수 있는 특징들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만나 구원을 체험한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위치를 아는 자들입니다.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습니다. 자신의 무능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예수님의 능력 많으심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 속에서 이런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 보여 지고 있습니까?

4. 말씀에로 초청

요한복음 3:17-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심판과 정죄가 없습니다. 영생이 우리와 함께 합니다. 그 어느 누구도 이 영생의 축복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사탄 마귀가 이것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 어두운 사망의 그늘이 우리들을 침범하지 못합니다. 이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힘은 이 영생으로부터 옵니다. 왜 낙심합니까?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가 그렇게 나약하다는 말입니까? 힘을 냅시다. 우리 앞에는 세상이 무섭지 않습니다. 세상이 우리들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하신 일


마 9: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우리는 사람들을 판단할 때 그 사람이 어떠한 일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을 기억하고 그 사람을 판단하게 됩니다. 하는 일을 통해 그 사람을 판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의 하는 일을 정확히 알지 못함으로써 그 사람을 정확히 알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눈에 비친 아버지의 이미지는 ‘돈 벌어 오는 사람’으로만 생각하는 것과 같이 왜곡된 현상이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일을 하셨는가’라는 그 분의 사역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 예수님에 대한 왜곡된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성경과 예수님을 오해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에서 어떠한 일을 하셨습니까? 즉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통해서 그 분의 속성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넌 사건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분을 보여주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을 하셨는가를 정확히 확인하는 일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어떠한 일을 하셨는가를 확인해 봄으로써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 라는 이런 문제는 알 것 없고 “우리가 열심이 살면 그만이다”라는 생각을 가지면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살고, 무엇을 하고, 무엇을 했느냐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들의 신앙을 가능하게 해 주신 예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이러한 바른 믿음이 있을 때에 바른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 봉사 그 자체를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정신으로 봉사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자신을 자랑하는 봉사가 있을 것이고 하나님을 자랑하는 봉사가 있을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이 어떠한 일을 하셨는가를 살펴 봄으로써 예수님의 주님 되심과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믿음 위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본문의 배경

먼저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마태라는 성경 기자는 어떠한 시각으로 마태복음을 기록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물론 마태라는 성경 기자는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인간적인 시각으로 이 성경을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마태를 통하여 강권적으로 역사 하셔서 기록하도록 하셨습니다.
성경의 본래의 의도에 충실하도록 역사해 주셨기 때문에 이 성경을 기록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사랑이 구원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구원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지고 있습니다. 이같은 일을 위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 특히 유대인들은 그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예수님이기를 원했느냐면 자신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고 로마로부터 억압받고 있는 그 고통으로 해방시켜주는 슈퍼맨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지금 특히 유대인들을 1차 독자로 해서 그들의 그릇된 시각을 교정시키고 있습니다. 그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 예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 예언된 대로 오신 이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들의 진정한 구원자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마태를 통해 주신 이 말씀의 외침에 귀를 기울려야 합니다. 내가 지금 신앙을 어떻게 오해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신앙을 오해하면 생활 그 자체가 위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만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신 그 일을 오해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만 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길이 하나님의 원하신 길이라고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런 교만을 부리면서 교회에 다닙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무엇을 믿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인데 교회에 다니고 직분을 맡았다는 것으로 교만을 부린다면 그것은 안됩니다. 그런 사람들의 말로를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고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외쳐진 말씀에 관심을 갖고 주시해 보십시오. 예화나 간증의 이야기가 없어서 은혜가 없다고 투정부리지 마시고 진정으로 성경이 말씀한 은혜가 무엇인지를 확인 해서 참으로 하나님이 원하신 신앙생활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자들이 바로 복의 사람들입니다.

2. 가르치는 사역입니다.

오늘 본문 35절 상반 절에 보면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는 사역은 예수님의 중요한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가르치셨고 백성들은 그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 두 관계는 매우 중요한 관계입니다. 가르침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치시는 능력을 소유한 분이셨습니다.
우리는 정직하게 “주님 말씀 하시옵소서. 저가 배우겠나이다”라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목사인 저 자신도 가르친다는 개념은 어떤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배우는 자세로 임합니다. 교회에서 성경 공부를 할 때나 목사님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 하면 그 권면과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말세의 징조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 성경을 통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우리들은 가르침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고백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무리들에게 가르치시므로서 선생된 자로서 메시아 이심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마26:18에 “가라사대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고 하시므로서 예수님 자신이 선생이라고 말씀합니다.
마23:8에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고 합니다.
우리들의 진정한 선생님은 예수님이십니다. 그 선생님의 가르침 목적은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그 선생님 되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 28:20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지켜야 합니다. 지키지 않고 배웠다고만 자랑하면 하나님께서 징계하십니다. 꼭 그대로 지켜야 합니다. 말세의 징조는 가르침 대로 지키지를 않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딤후3:14에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3.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본문 35절 중반절에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라고 하십니다. “천국 복음”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 복음”입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나라 복음”이라고 하지 않고 “천국 복음”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신성모독 죄에 해당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유대인들과의 접촉점을 생각해서 “하나님”이라는 말을 “하늘”이라는 말로 대치해서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 하면 하나님을 연상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합니다.
우리들도 여기서 어떤 지혜를 받습니다. 복음을 증거할 때도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 접촉점을 잘 생각해서 복음을 증거하면 좋습니다. 다른 이야기에 시선을 끌게 해서 결국 복음에로 집중할 수 있도록 우리들의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 복음의 핵심은 자신이 바로 “구원의 주”라고 선포합니다.
마4:17에서는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으로 말미암아 왔으니 회개하고 그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기 때문에 주님의 임재의 체험을 못 느낍니다. 주님과 동행한 임재의 체험을 못느끼기 때문에 죄를 범합니다.
내 곁에 계신 주님을 못느끼기 때문에 쉽게 좌절하고 쉽게 토라지고 교만과 자기의 아집을 내세웁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목사인 저 자신 역시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자가 아니라 회개해야 하는 자입니다.
여러분 역시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거룩한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회개라는 것은 말로만 “회개합니다”라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돌이키는 것입니다. 사기쳤으면 그것을 갚아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죄를 범하고 나서 회개한다고 한다면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회개의 생활입니다. 회개의 열매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회개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마 7:20-21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회개하는 자는 회개의 열매, 혹은 믿음의 열매로서 하나님 뜻대로 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이 어떻게 우리들의 행위와 연결해서, 믿음의 표현으로서 행위로 인하여 심판을 받게 되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때의 행위는 그 행위 자체가 문제이기 보다는 그런 행위는 불신앙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 행위대로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4. 모든 병을 고치셨습니다(치유의 사역)

본문 35절 하반절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합니다.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메시아의 권세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이같은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신 사건에 대해서 마태는 마8:16-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합니다.
병을 고친 이유가 무엇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구약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서 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병고친 사건은 바로 우리들의 연약함을 짊어지시고 우리들을 구원하시는 구원자로서의 메시아를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런 이적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들의 연약함을 도와 주실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를 치유해 주실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그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남들은 다 나를 버려도 그분은 우리들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딤후4:16-17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아멘
바울은 말년에 자신의 곁을 다 떠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떠나버린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울 곁에 계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우리와 늘 동행하십니다. 우리들의 연약함을 체험 하시고 느끼셔서 우리들의 사정을 잘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분을 의지하고 섬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병을 치료하시는 일을 통하여 그분이 분명히 구약에 예언된 그 메시아임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틀림없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인자(人子)로 오신 예수님

 

마14:22-33


오늘은 1998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입니다. 그 아기 예수의 탄생을 거룩한 탄생으로 보고 “성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은 그 날을 기념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기념 예배”라고 하는데 무엇을 기념할 해야 하겠습니까? 아기 예수의 탄생 자체를 기념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 탄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의미를 기념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같은 문제가 정확히 정리되지 않으면 우리는 보통 12월 25일이 성탄절이라고 하는 그 날짜를 기념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성탄절과 아무런 의미가 없는 불신자들도 성탄절을 자신들의 축제로 삼으려고 하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결국 그 축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죄를 더 많이 짓는 날로 변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서인지 성탄절은 단순한 신앙적인 의미보다 흥을 돋구고 육체적인 쾌락과 즐기기 위한 날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이런 모순들을 극복해야 하는 교회는 오히려 그런 분위기를 조장하기 까지 하였습니다.
아기 예수의 성탄을 통한 종말론적인 의미인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이 외쳐져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산타클로스”를 외치고 교회의 십자가는 휘황 찬란한 오색 불꽃으로 사람들을 더욱 술렁거리게 했습니다. 세상의 뒷골목의 찬란한 네온싸인과 교회의 네온싸인과 무엇이 다릅니까?
이런 휘황 찬란한 네온싸인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한다고 합니다. 그 ‘축하’라는 말은 ’기뻐하고 즐거워 한다’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 의미와 방법들이 성경적이지를 못합니다. 아기 예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 해야 할 교회는 오히려 교회가 진열해 놓은 잔치상을 놓고 즐거워 하고 기뻐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에는 굶주림과 어려운 고통으로 인하여 한숨 쉬고 있는 우리들의 이웃이 많이 있는데, 또한 우리들의 복음전도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기 예수 때문에 진수성찬으로 펼쳐진 교회의 잔치상을 바라보면서 한탄하시는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인자로 오신 예수님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세상에 오셨습니까? 교회로 하여금 풍성한 잔치상을 받으려고 오신 것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남의 말 밥통을 빌려서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니까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 오셨다고 합니다. 또한 죽으려고 오셨다고 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축하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 했더라면 우리들은 오늘의 성탄절 보다 훨씬 더 의미있는 성탄절을 보냈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 동방박사들이 많은 예물을 가지고 와서 경배하고 축하 했지 않느냐 할지 모르지만 그 사건은 그 아기 예수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한 계시적인 사건, 혹은 표적적 사건이었지 오늘날 우리들이 축하하고 예물을 드리는 그런 사건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주”라고 하기도 하고 “그리스도”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할 때 이런 칭호를 붙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이런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을 별명처럼 붙인 칭호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인자”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한문식 표현입니다. 말 그대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더 정확히 표현해서 “그 사람의 아들”이었습니다.
본문 말씀에 볼 것 같으면 “인자의 온 것은”이라는 말로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록자 마가는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상야릇하게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로 자신을 표현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 “인자”라는 말은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왔기 때문에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인자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틀렸습니다. 오히려 이런 말의 정 반대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인자라 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오해해서 듣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차라리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의 다른 이름인 “인자”, 즉 “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로 자신을 지칭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려서 이 인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에 해당된 칭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어떤 오해 때문에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아들에 해당된 인자를 말을 사용했으며 또한 그 인자라는 말을 사용하시므로 유대인들에게 어떤 효과를 보기 위해서(계시하시기 위해서) 인자라고 했습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느냐면 자신들을 정치적으로 해방시켜 주는 그런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에서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 혹은 메시아(왕)을 보내주실 것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를 어떻게 이해했느냐면 자기 민족을 위해서 정치적, 경제적 안정과 풍요를 가져다 줄 그런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조상과 약속해 주신 그런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다고 한다면 다른 민족에게 고통과 억압을 받고 있는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것이요, 다윗에게 주었던 그런 풍요를 다시 주실 것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로마의 식민지로 지내고 있는 그들을 해방시켜주실 그런 하나님의 아들을 기대하고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그런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에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풍요와 경제적인 안정, 로마로부터의 정치적인 해방을 시켜 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오해할 것이기 때문에 그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또다른 구약성경의 의미인 “인자”라고 했던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그 인자라는 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말씀에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의 의미인 인자라고 했던 것입니다.


다니엘서의 인자(그 사람의 아들)

다니엘서 7:13-14에 보면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영원한 권세가 구름을 타고 온 인자 같은 이에게 주어집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사람과 같은 분이 구름을 타고 왔다는 것은 그분이 인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구름이 나타난 현상은 하나님이 나타난 현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영원한 권세를 가지고 이 땅에 하나님의 계시자로 오셨습니다. 그 계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속하셔서 하나님의 저주의 형벌로 부터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였느니라.”(롬 5:8)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한 구속으로 우리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구속주로 오심 - 구속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죄인은 언제나 죽어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한 죄를(선악과 열매를 따먹는 행위가 왜 죄가 되습니까?)범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 심판을 받습니다. 저주의 형벌를 받습니다.
그런 죄인인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 대신 누군가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그것을 구속이라고 합니다.
내 대신 하나님의 저주의 형벌을 받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부터 저주의 형벌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느냐고 하나님께 기도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대신 희생을 당하셨습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 마가복음 10:45절 말씀입니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희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희생을 우리가 축하해야 합니까? 아니면 그런 희생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의 오심을 기념할 때 우리가 통회 자복해야 하겠습니까?

유대인 처럼 하나님의 아들을 오해한 한국교회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마치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경제적인 풍요와 축복으로 연결시켜 설명하려고 하는 우리는 통회 자복해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은 우리들의 병을 고쳐 주시고 경제적인 안정과 정치적인 안정만을 위해서 희생하러 오신 메시아(왕)처럼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아니라고 하면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이 가난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라고 하면서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의미를 호도하려는 사탄의 장난이 우리에게 많이 있습니다.
출 40:34에 모세가 회막을 하나님께서 주신 설계도 대로 짓고 나자 그 위에 구름이 임합니다.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라고 합니다.
회막에 구름이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했다는 말은 장차 오실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위에 여호와의 영광이 임할 것을 예언적으로 약속해 주신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임하시고 나타납니다. 그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성탄절은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로 부터 구원을 받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계시해 주었던 사실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 예수님이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고 우리 자신을 자랑하거나 의지하지 말아야 하고 우리들을 위한 잔치가 되어서는 않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찬송가 404장인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다 형용 못하네”라는 가사대로 하나님의 사랑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마는 그 중에서도 우리들에게 주신 소중한 사랑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언어라는 형태로 주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을 늘 위로하고 위안을 주곤합니다. 이 고통 많은 세상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큰 위로와 등불이 되어 줍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 역시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우리들 역시 이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통해서 위로를 받을 뿐만 아니라 우리 후손들 역시 동일한 이 말씀을 통하여 인생의 방향을 설정받고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보통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을 때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개념 정립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 놓고 하나님의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고 처음서부터 인간을 위한, 인간에 관한 말씀으로 전달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성경을 볼 것 같으면, 구약성경에 나타난 여러 인물들을 통하여, 각종 사건을 통하여,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 여호와 자신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인물들이나 사건 자체에 멎어져 버린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구약성경에서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이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한 왕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메시아, 즉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는 날에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증거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베풀어 주신다고 합니다. 흑암의 결박에서 놓임을 받을 것입니다. 그 메시아가 오시는 날에는 이스라엘에게 소망이 되며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신약은 그 약속하신 메시아가 왔다고 합니다. 마태라는 기자는 여기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 스리스도가 구약에 예언된 그 메시아라고 합니다. 더 정확히 표현해서 마태를 통하여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는 사실을 계시하고 선포한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보려고 한 본문 말씀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취급되어져야 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하여 베드로나 제자들의 심리적인 마음을 분석해서 거기에 최종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본문을 추적하면 본문의 의미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자신을 그렇게 나타내어 보여주고 있느냐에 대한 질문부터 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 줄거리

예수님께서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다음 그 많은 군중들을 보내는 동안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먼저 건너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따로 산에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제자들을 태운 배가 얼마쯤 갔을 때 풍랑이 거슬러 불어 왔습니다. 그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제자들이 고난을 당하더라.”
고난을 당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가까이 오신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무어라고 했습니까? 26절에 보시면 “유령이라”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지 못한 그들은 유령이라고 할 정도이고 보면 아직도 그들은 무엇인가 정리되어 있지 않는 믿음약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령인줄 알고 무서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하십니다. 이때 베드로는 만일 당신이 주님이시라면 나를 명령해서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오라고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간청대로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지 않고 바람이 부는 물결을 보자 그만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소리지르며 살려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게 되고 바람은 그쳤습니다. 그때 제자들과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리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 말씀의 내용 줄거리입니다.

표적으로 증거된 하나님의 아들

물위을 걸으신 예수님의 이같은 사건은 놀라운 기적 혹은 표적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이 표적적 사건을 우리가 바르게 이해하려고 한다면 이 사건이 기록되기 전에 행해졌던 오병이어의 기적적인 사건을 확인해 봄으로서 오늘의 본문 사건과 더불어 이해될 수 있겠습니다.
마14:13-21절의 오병이어의 사건을 동일하게 취급한 요한복음에서는 그 의미가 좀 자세히 확대되어 기록되고 있습니다.
다같이 요한복음6:1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선지자라 하더라.”
계속해서 6:26을 보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오병이어 사건은 예수님이야 말로 구약이 예언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심을 알게 하기 위한 표적적인 사건이라고 합니다. 표적이란 그 사건이 지시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것을 지시해 주고 알게 해 준 사건이라고 합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표적적 사건으로서 이분이야 말로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양식이요, 참 만나이신 예수님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군중들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때문에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자기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고 예수님께서 지금 책망하고 계십니다.
동일하게 오늘 우리가 택한 본문 역시 이런 동일선상에서 놓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구약이 예언하고 있는 그 선지자였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였습니다. 이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들의 유일한 소망이요, 위로자이시며 하나님의 저주의 형벌과 저주로부터 구원을 받게 하신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들의 기대이시며 위로자이시며 생명의 구주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생명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시려고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풍랑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제자들을 설득시키고 베드로를 설득시키시는 그 자상하심을 보십시오.
유령이라고 말할 정도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그래도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그들과 함께 하셔서 믿음을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혹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내가 하나님을 잘 믿었는데 왜 나에게 이런 고통과 환난이 닥쳐 오느냐고 불평하며 좌절하는 성도님들이 안계십니까? 근심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믿음 없는 행동입니다.
우리들에게 어떻게 믿음을 주시고 신뢰를 주시고 우리들과 동행해 주시고 평강을 주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보십시오. 이런 훈련을 잘 받은 베드로는 이런 일이 있는 다음에 어떻게 그의 믿음이 성장되고 변화되어가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다같이 마16:15-17을 보시겠습니다.
“가라시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습니다. 베드로를 끝까지 설득시키시고 인도하시고 섭리하셔서 우리 주님이 요구하신 수준까지 끌어 올리시고야 마는 주님의 주님되심이 잘 증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아이심을 표적적인 사건을 통하여 알게 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 사건은 다른 사건이 아니라 계시적 사건이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나타나셔서 다시 바다위를 걸으시고 풍랑을 잠잠케 하지 않아도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자신을 나타내어 보여 주시고 마태로 하여금 기록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오늘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읽고 믿게 해 주셨습니다. 내가 그 당시의 그 사건을 두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확실히 믿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는 말씀대로 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서야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사실을 믿도록 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된 백성임을 확실히 믿습니다.

말씀에로 초대

이제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된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으로 돌아가 보시겠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고난을 당하더라.”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는 고난을 당할 수 밖에 없는 현실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실은 현실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현실적인 고난의 현장속에서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그러시면서 손을 내밀어 우리들을 붙잡아 주십니다. 내가 주님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우리를 붙잡아 주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우리들의 과거를 되돌아 볼 때 우리들은 과연 주님을 주님으로 믿는 자였습니까?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믿지 못해 불신하는 공범자들이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을 그냥 버리시지 아니하시고 우리들과 동행해 주셔서 임마누엘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주님을 잘 섬겼고 교회를 잘 봉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느냐고 하소연 하는 성도님들은 안계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감사하십시오. 하나님께 나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며 훈련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오늘 말씀속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곳으로 우리들을 몰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 당시에는 우리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들의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에 비해서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먼 후날 왜 그때 그런 고통 가운데서 나를 훈련시켜 주셨는지 분명히 깨닫게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모진 고난과 풍랑속에서 훈련을 받고 난 이후에 예수님의 제자들의 입속에서 터져 나왔던 고백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였습니다.

 

 


하늘과 땅을 통일케 하신 예수님

 

마 18:15-20

하나님의 교회는 죄 용서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곳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죄 용서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교회 일원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신 죄를 싫어해야 합니다. 죄에 대한 통탄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가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긴박함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죄를 범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죄에 대해 책망을 하면 “너는 전혀 죄를 짓지 않았느냐”고 합니다.
그래서 피차 암묵적으로 상대방의 일에 관여하지 말자 라고 합니다. 물론 비난의 목적으로 상대방의 죄에 관여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름에 야외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독사가 접근했습니다. 독사가 접근하는지도 모르고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았다면 소리를 지르며 잠자는 사람을 깨워야 합니다. 그것도 늦을 것 같으면 뱀의 접근을 막아 주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죄의 잠을 자고 있는 이 시대를 향하여 소리를 질러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 함께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용서를 받으면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하늘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19절에 보면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고 했습니다.
하늘과 땅이 하나 되어 통일되게 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로 이 땅에서 생명을 얻어 구원을 받으면 하늘에서도 생명과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이 땅에서 정죄를 받으면 하늘에서도 정죄를 받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을 살펴보시겠습니다.

1. 죄를 범하는 형제가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권징)

교회 안에 어떤 성도가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을 소문을 내면 안됩니다. 소문을 내면 물론 죄를 범했던 당사자 뿐만 아니라 소문을 내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가 임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첫째, 소문내지 말고 단 둘이만 만나 권고하라(15절 上).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죄를 범했을지라도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준다는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권면하기를 그 죄에서 떠나라고 해야 합니다. 그를 비난의 목적으로 하면 안됩니다. 그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혼자만 알고 하나님께 그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때로 상대방의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상대방을 권고할 때 먼저 권고하는 자신도 죄인임을 자각하고 권고에 임해야 합니다. 또한 권고할 때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야 합니다. 자신의 인생 경험이나 상식적인 이야기로 상대를 설득하고 권고하면 안됩니다. 거기에는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의 십자가만이 우리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는 구원이 있습니다.

둘째, 만일 그 권고의 말을 듣고 회개하면 형제를 얻게 될 것이다(15절 下).
만약이 상대가 회개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반대로 권면했던 그 당사자는 옳은 대로 인도하는 사람에게 허락하시겠다는 약속의 복을 얻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8:13절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고 했습니다.

셋째, 그러나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의 증인을 세우라(16절 下).
이것은 사탄의 유혹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 자존심 때문에 인정하지 않는다 고백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에 증인을 세워야 합니다. 그 증인을 세운 목적 자신의 죄를 인정하여 자신의 죄를 회개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회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함으로 시작합니다. 증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강퍅한 자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넷째, 그래도 회개하지 않을 때 교회에 말하라(17절 上).
교회에 말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칼빈은 교회 치리회인 당회를 말한 것이라고 합니다.

다섯째, 교회의 말을 듣지 않거든 출교하라(17절).
더 이상 교회의 최종적인 권위로 권면해도 듣지 않겠다는 것은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교회 공동체로서 함께 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합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공동체에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이런 말씀을 통하여 누구든지 죄에 대해서 방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눅17:3)고 했습니다.

2. 하늘과 땅이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되어 있다(18-20절).

지금까지 우리들은 누구든지 드러난 죄가 있거든 권면해서 어떻게 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두 번째로 이 땅에서 이루어진 문제가 어떻게 해서 하늘 나라, 즉 천국에서도 동일하게 그 효력을 나타나게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에베소서 1:10절에 보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먼저 우리들이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 땅에서 해결된 문제가 하늘나라에서도 그 효력을 발휘하게 되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땅과 하늘을 통일시키는 분이십니다.
매이고 풀리는 열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18절 上) 라고 했습니다.
②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8절 下)고 했습니다. 매이고 풀리는 열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내 이름으로”(20)이십니다.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회개하면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용서하십니다.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자꾸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을 죽어서 가는 문제로만 국한시키는 잘못을 범합니다. 그러다 보니 죽어서는 그런 천국은 지금 당장 심각하게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명심해야 할 원칙이 있습니다. 죽어서 가는 저 천국은 언제 결정되었습니까? 즉 죽으면 천국 아니면 지옥입니다. 그 중간은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결정은 우리가 죽은 이후에 결정된 것은 아닙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서 결정되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결정은 지금 여기서 내가 예수를 믿으면 천국이요, 안 믿으면 지옥입니다. 지금 예수를 믿으면 죽어서 가는 그 천국은 지금 현재 나에게 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천국의 영생이 오늘 나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죽어서 가는 지옥이 오늘을 살아가는 그 사람에게 이미 멸망으로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살았으나 죽은 자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바로 본문 18절 말씀인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말씀입니다.

3. 하나님께서 죄 용서와 기도 응답을 예수 이름으로 주신다(19-20절)

하늘과 땅을 통일시키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분은 천국의 열쇠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이미 이 땅에 살지만 천국의 영생을 소유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첫째, 람이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응답해 주신다(19절)는 약속을 굳게 믿고 나가야 합니다.
19절 말씀에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 성령으로 하나 되지 않고는 ‘합심’이 안됩니다. 두 사람이 성령으로 하나 될 때 ‘합심’할 수 있습니다. 그때 응답이 주어집니다. 우리들은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고 서로에게 적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세 사람일지라도 예수님 이름으로 모인 자리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20절).
20절 말씀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15:16)는 말씀을 기억합시다.

4. 말씀에로 초대

누가복음 2:14절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과 평화를 가져다주는 분이십니다. 왜 그런가. 이 예수님이야말로 땅과 하늘을 통일시키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 어려움을 하나님께 호소해서 응답 받고 문제 해결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무슨 어려움이 있습니까? 남에게 말못할 고통이 나를 괴롭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또한 누가 나의 드러난 잘못을 권면해 오면 오히려 감사하십시오. 그리할 때 풀리는 하나님의 복이 임할 것입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를 통한 천국 복음

 

마 20:1-16

절망으로 가득한 세상에 예수님이 희망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사탄의 세력에 의해서 고통을 당하는 자들을 위하여 자유와 해방을 주셨습니다.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을 향하여 함께 슬퍼했고 고통을 친히 겪으셨습니다. 그러시면서도 “네가 겪은 것 이상으로 고통을 겪어봤다. 그래서 내가 너를 이해한다”고 말하시면서 위로 하셨습니다.
죄와 저주의 형벌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또한 죄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이 소식은 우리들에게 희망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복음을 우리들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 등장한 포도원과 품꾼들의 이야기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예수님은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 비유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1절에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라고 합니다. 포도원 주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천국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비유에만 멎어져서는 안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복음을 이야기 해야 하고 여기에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1. 본문의 전후 문맥과 배경

포도원 품꾼 비유는 마19:16-30절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첫째,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마 19:16)라고 한 유대 관원인 청년이 질문합니다.
이같은 질문 배후에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그 청년은 마치 자신들의 의로운 행위로 구원을 쟁취한 줄 그렇게 착각했습니다. 따라서 이 구원은 인간의 행위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시면 우리들은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19:26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둘째, 이방인과 유대인의 관계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9:30)는 말씀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유대인이 거부하므로 이방인에게로 옮겨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이 유대인보다 앞서고 있습니다.
행 13:46절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는 말씀의 원리입니다.

2. 본문의 비유는 포도원 주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1-7절)

주인은 놀고 있는 자를 불러 주셨습니다.

첫째, 천국은 이른 아침에 일꾼을 부르러 나간 집 주인과 같습니다(1절).
일거리가 없어서 길거리에서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하루 일을 해서 하루 일당을 벌어 와야 집에 있는 가족을 먹여 살립니다. 오늘 하루도 길거리를 헤매다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집에 있는 어린 자녀가 “아빠 돈 벌어서 빵 사 왔어”라고 아빠의 바지를 붙잡습니다. 그러나 그 어린 자녀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는 아빠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런 실의와 절망 가운데 길거리를 서성거리고 있는 날품팔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렇고 오늘날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이 와서 나를 불러 줍니다. “내 농장에 와서 일하라”고 합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둘째, 주인이 이른 아침에 품꾼을 구하러 나가서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일을 시켰습니다(2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일할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래서 또 우리 가족이 생계를 유지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일거리를 주셨다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섬길 수 있는 교회를 주셨습니다. 교회에서 봉사할 수 있는 일을 주셨다는 것은 복입니다. 불평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감사하십시오. 기쁨으로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제 삼시(오전 9시)에 장터에 나가 놀고 있는 사람을 불러 일을 시켰습니다(3-4절).

넷째, 제 육시(낮 12시), 제 구시(오후 3시), 제 십일시(오후 5시)에도 그렇게 하였다(6-7절).
혹시나 하면서 허루 종일 길거리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길 저쪽 모퉁이에서 나를 부르는 주인이 없나 하면서 그 쪽을 주시면서 하루 종일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주인이 나타나서 나를 부르고 있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퇴근인데 가서 일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루 품삯을 주겠다고 합니다. 뛸 듯이 기쁩니다. 집에 처 자식이 기뻐할 모습이 눈에 아른 거립니다. 당시에 이런 호의를 베풀어 주는 주인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를 불러 준 주인은 달랐습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일을 마친 품꾼들에게 어떻게 품삯을 나누어 주었습니까?(8절)
첫째, 마지막 퇴근 무렵에 일한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의 하루 품삯을 주었습니다(8-9절).

둘째, 아침 일찍 일한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의 하루 품삯을 주었습니다(8절). 주인의 뜻대로 품삯을 결정했습니다. 즉 주인의 마음씨 착한 성품의 결과였습니다. 이 마음이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3. 주인의 결정에 불편하는 품꾼들이다(10-12절)

이들은 누구인가? 유대인들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입니다. 늦게 부름 받은 이방인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보다 훨씬 일찍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합니다. 왜 차별 없이 구원을 베푸냐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어떻게 이방인들과 똑같이 취급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미 구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들은 잊어버렸다. 이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거부했다는 말입니다.
① 주인의 약속을 망각했다(10절).
② 원망하였다(11절).
③ 주인의 은혜에 항의했다(12절).
그들은 하나님의 거저 주신 은혜로 받은 구원을 자신의 공로로 받은 줄 착각했습니다.
혹 이런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나는 교회 개척 때부터 봉사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나같은 사람이나 지금 교회 나온 사람이나 똑같이 대우한다는 것입니다. 차별 없이 사랑과 관심을 보인 목사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런 실수를 범하면 안됩니다.

4. 품꾼들의 항의와 불평에 주인은 답변하다(13-15절)

① 주인은 잘못이 없다고 합니다. 이유는 오직 약속대로 행했기 때문이다(13절).
② 자격 미달인 나중 품꾼들에게 은혜를 베푼 것은 “내 뜻이라”했다(14절).
③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고 했다(15절). 바울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롬 9:20절에서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그저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해야 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면 해야 합니다. 가지 말라고 하면 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절대로 흥정하면 안됩니다.

5. 이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결론 - 천국 복음을 선포하십니다(16절).

①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로 옮겨옵니다. 이같은 말씀이 바로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② 섬기는 자가 높임을 받고 스스로 높임을 받은 자는 낮아지게 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7) 이것이 바로 기독교 진리입니다. 성경의 신비입니다. 모 기도원에서 무보수로 식당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찬송을 부르면 설거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존귀한 자들입니다. 섬길 때 행복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을 높이 세워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예수님도 섬기러 오셨는데 감히 우리들이 섬김을 받으려 한다면 그런 사람을 어찌 구원 받은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내가 섬겨야 할 곳은 많습니다.
교회에서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이 너무나 많습니다. 교회에서 할 일이 없다고 하신 분은 화장실이라고 한 번 가보십시오. 어떤 대학 교수님이 교회 화장실 청소를 하며 봉사했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곧 나의 복음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인자, 그 영광의 재림과 심판

 

마 25:31-46

어떤 교회 목사님이 일년 내내 남에게 사랑를 베풀라는 사랑에 관한 설교만 했습니다. 교인들은 퍽 지루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 크리스마스가 다가왔습니다. 목사님은 사모님과 함께 거지로 변장하여 교인들의 집을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교인들이 과연 말씀대로 실천하고 사는지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제일 먼저 교회 장로님 집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성탄 준비를 하고 있던 장로님 사모님이 구걸을 부탁하는 거지 내외를 보고는 문을 도로 닫고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번에는 권사님의 집으로 갔습니다. 역시 마찬가지의 반응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집사님의 집으로 갔습니다. 문도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실망한 목사님 내외분은 지난 주일에 처음으로 등록을 한 새 신자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 집 부인이 얼른 들어가더니 따뜻한 음식을 갖다 주었습니다. 그 다음 주일 목사님은 설교 시간에 그같은 사실을 교인들에게 말하고는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성경은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 역시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준엄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같은 비유를 통하여 무엇을 의도하고 계신지를 깨달아 그대로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인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재림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31절에서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라는 말씀으로 비유를 시작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말씀합니다. 이 ‘인자’(人子)라는 말씀 속에는 적대자들의 손에 팔려가 십자가를 지신 유월절 이틀 전에(마26:1-2) 예수님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는지를 함축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서 7:13절에 다니엘이 환상 가운데 보았던 “인자 같은 이”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7:13-14)
예수님은 자신이 다니엘이 환상 가운데 보았던 “그 인자”라고 하십니다. 인자에 대한 예언의 성취자로 오셨기에 자신을 가리켜 “그 인자”라고 본문 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다니엘서에서 인자 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왔다는 것은 신(神)적인 존재입니다. 성경에서 구름은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께서 그 인자에게 영원한 영광의 권세와 왕권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인자로서 다니엘서에 예언되고 약속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언약의 백성들인 성도들에게 천국의 기업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니엘 7:18에서 보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영원한 권세를 가지신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대신해서 저주의 고통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죽으시고 다시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승천하셔서 하나님 영광의 보좌 우편에 높임 받으셨습니다.
천상에서 지금도 성령님을 통하여 지상을 다스리시고 계십니다. 우리들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우리가 보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들을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벅찬 감격입니까? 이 얼마나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한 영광의 메시지입니까? 이제는 내 혼자라는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들을 버리시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완성될 때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영광 가운데 재림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20% 이루어졌다면 20%만큼 재림의 종말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 계획이 30% 완성되었으면 30%만큼 재림의 종말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하시는 종말은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곧 종말이 온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통하여 종말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도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진행될수록 종말은 가까워집니다. 그 재림의 종말을 위해서 우리들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긴장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방탕하며 살면 안됩니다. 우리의 생애가 이런 가치와 의미로 충만해야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4:7)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때를 기다리며 준비해야 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과 그 심판에 대한 기준은 무엇인가?

2천년 전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재림주로서 오신 예수님은 심판주로 오십니다. 심판주로 오시는데 마치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구분하셔서 심판하십니다.
당시 목장에서 양과 염소를 함께 방목하여 키우는데 양과 염소는 같은 초식동물이면서도 습성이 다릅니다. 그래서 서로 어울리지를 못합니다. 염소는 사나운데 반해 양은 온순합니다. 염소는 자기 멋대로 다니기를 좋아하지만 양은 주로 모여 다닙니다. 목자는 양과 염소를 함께 치지만 따로따로 무리 지어 다니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염소가 양을 마구 받으며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고 행패를 부리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질서를 바로잡고 염소들로부터 양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양과 염소를 떼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양과 염소가 구분되듯이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심판의 때에 구원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구분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본문의 비유에서 그 심판의 기준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심판 때 무엇에 따라 구분하시고 심판하시습니까?
양으로 비유된 사람들을 살펴보자. 35-36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내가 주릴 때, 목마를 때, 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었던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37절에 보면 “의인들”인데 이들에게 무엇이 주어지습니까? 34절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진다. 34절에 보면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하십니다.
반면에 염소로 비유된 사람들에 관해서는 42-4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염소로 비유된 자들은 내가 주릴 때, 목마를 때, 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에 관심도 보이지 않는 자들이며 도와주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어떤 판결이 떨어지겠습니까?
41절에 보면 “저주를 받은 자들”이라고 판단합니다. 41절에 보면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염소의 비유에 해당된 자들은 저주를 받은 자들로써 최후 심판이 주어집니다. 마귀의 사자들이 받게 되는 영원한 파멸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주를 잘 섬겼는가의 여부가 양들로 상징된 의인들과 염소로 상징된 저주받은 자들의 차이점으로 나타납니다. 최후의 마지막 심판의 기준은 얼마만큼 주님께서 신실하게 순종하고 섬겼습니까? 섬기지 못했는가로 심판을 내린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주를 섬긴다는 뜻은 무엇인가?
주를 섬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 순종하고 진실하게 섬긴다는 것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가난한 자, 나그네, 병든 자, 갇힌 자들을 돌본다는 뜻입니다. 즉 이웃을 구체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 비유에서도 그 이웃이 누구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들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본문에서는 주리고, 목마르고, 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자들입니다. 이런 지극히 작은 자들의 이웃을 어떻게 대했느냐에 따라 심판하신다고 합니다. 이런 약한 자들을 40절에 보면 “내 형제”라고 합니다. 이런 자들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취했느냐에 따라 심판이 주어집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한 심판의 기준을 우리들의 믿음을 전혀 염두 하지 않고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심판이 진행되는 소위 인과응보의 원리로 본문을 설명하면 안됩니다. 즉 윤리와 행위만이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3. 적용 - 성도의 열매

그렇다면 본문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깨닫고 우리들의 삶에 적용해야 할 것입니까?

첫째, 주님께서 “내 형제들”로 묘사된 주리고 목마르고 병들고 옥에 갇힌 자들은 당시 복음을 선포하는 제자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 10:40-42의 본문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유 때문에, 혹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라는 이유 때문에 그들을 섬기고 영접했다는 것은 그들은 결국 예수님과 하나님을 영접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순회 복음을 선포하는 약한 자들에게 헌신적으로 돕고 섬기는 것은 곧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 때 주님을 믿는 고백의 표현인 섬김은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증거 하는 자들은 의인들이요,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심판 때에 양으로 비유된 자들로서 축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생활과 행동들은 믿음의 고백, 혹은 표현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특징입니다. 믿음의 특징은 반드시 섬김의 행동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믿음의 특징과 표현인 섬김의 행위가 없다는 것은 그의 믿음이 구원받게 하는 믿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들은 심각해집니다. 정말로 심각해 져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15-21) 거짓 선지자의 특징을 말씀해 줍니다. 나무와 그 열매의 비유를 통해서 가르쳐 준 내용입니다. 원칙은 이렇습니다. 좋은 나무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따라서 좋은 나무에서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또한 반대로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결국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이 원칙이라면 우리들은 열매를 통해서 그 나무를 알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는 심판이 있습니다(마7:20).
그러므로 나쁜 열매를 맺으면서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런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 이름에 합당한 열매, 즉 구체적인 순종과 섬김의 모습이 우리들에게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들은 과연 구원받은 성도로서 그 이름에 합당한 생활의 모습이 보이고 있습니까? 그런 모습이 전혀 없으면서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더 이상 속여서는 안됩니다.

둘째, 예수님은 양과 염소의 비유를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알곡과 가라지 비유에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안에는 언제나 알곡과 가라지가 있기 마련입니다. 알곡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으면서 그 믿음대로 실천하고 순종하고 섬기며 사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어떤 자들인가? 말로만 믿는 자들입니다. 전혀 믿음에 따른 순종과 희생이 없습니다. 봉사와 섬김이 없습니다.
이런 자들이 과연 구원받은 알곡교인입니까? 이들은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영광 가운데 재림하실 때 불에 태우는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알곡교인입니까? 가라지 교인입니까? 우리는 한 번쯤 나는 과연 알곡교인이어서 구원받은 감격적인 성도인지 묵상해 봅시다.

셋째 이 비유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과 심판을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불신하고 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기 질투했습니다. 그들의 이같은 행위는 결국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큰 충격입니까? 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했고 그의 제자들을 거부했고 이방인들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심판 받아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볼 때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어야 했던 이방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심판을 면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말한 대로 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 자로 알고 있었는데 구원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반대로 유대인들은 구원받은 자로 알고 있었는데 구원이 아니라 심판이라고 선언합니다. 얼마나 큰 지각변동입니까? 마태복음 자체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이 말씀들을 우리들에게 구체적으로 적용해 보십시오. 내가 과연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 이웃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므로 하나님을 소개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27:45-49

지난 3월 1일 전북 김제시 용지면의 모 교회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직회원 20여명이 교회에 모여 제직회를 하던 중에 서로 견해 차이로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그 교회 75세 드신 장로님이 재정 문제로 목사님을 나무라자 한 집사가 그것을 보고 격분하여 성경책을 그 장로님에게 던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성경책이 장로님의 머리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사건입니다. 그 죽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 죽음을 결코 순교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 분쟁의 결과로 생긴 아픈 사연들 입니다.
전철에서 생긴 일입니다. 어떤 젊은 두 사람이 말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어떤 할아버지가 큰 소리로 그 젊은 두 사람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기가 교회인줄 아느냐!” 그 할아버지의 뇌리 속에는 교회에서 분쟁에 대한 아픈 기억들이 자리잡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런 아픔과 분쟁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현상들은 말세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들이 죄인임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 앞에서 별수 없는 인간임을 보여 줍니다.
우리들은 지금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순절 기간에는 우리 모든 교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을 겪으셨야만 했는가를 살펴보는 그런 시간입니다.

1. 성경 전체를 흐르고 있는 거대한 줄기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께 반기를 들었고 불순종했던 인간의 죄를 폭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죄를 지적합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사람과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한 사람과의 전쟁의 역사입니다. 이것을 보통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전쟁에서 언제나 저주와 진멸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한 자입니다. 죄 용서함을 받지 못한 죄인들입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제사를 통하여 죄 용서를 받지 못한 자들은 가차없이 심판을 당했습니다. 제거를 당했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근처에 죄인들은 얼씬거리지도 못합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 용서를 받으려면 자기 대신 흠없는 어린양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의 저주에서 구원과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절대로 그냥 용서해 주는 법이 없습니다. 당사자가 죄에 대한 저주를 받든지 아니면 대신 다른 제물이 저주를 받든지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신 해서 하나님께 희생의 제물을 드려 그 제물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붓게 하는 것이 바로 구약의 제사였습니다. 그 제사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구원의 진리가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은 흠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된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에베소서 5:2절에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을 대신해서 제물로서 드려진 현장이 십자가에서 못박혀 피를 흘리는 장면입니다. 본문에 보면 피를 흘리며 하나님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즉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노하시고 저주하셔야 마땅했습니다. 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의 저주가 따릅니다. 이와 같은 저주의 진노를 우리들에게 묻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에게 쏟으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의 형벌을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고통은 곧 우리들이 받아야 할 고통이었습니다. 그 고통은 우리들이 넘볼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그 고통을 우리들에게 돌리지 않고 하나님은 그의 아들에게 돌렸습니다.
누가 이 사랑을 값없다 하겠습니까? 우리들은 죄 용서를 거져, 은혜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은혜로 죄 용서를 받기까지는 하나님의 아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엄청난 대가가 지불되었습니다. 이같은 구원의 도리를 마음 속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직장에서 사고를 냈습니다. 무려 천 오백 만원의 손해를 끼쳤습니다. 이 사람이 이 돈을 물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돈을 물어줄 형편이 안되었습니다. 그때 회사 사장님이 아무런 조건 없이 천오백만원을 대치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열심히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 때 사고를 낸 사람은 너무나 미안해서 사직서를 써서 사장님에게 갔습니다. 책임을 지고 사표를 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사장님은 화를 내면서 “당신 사표 내게 하려고 내가 천오백만원을 아무런 조건 없이 갚아 준 줄 아느냐”고 했습니다. 미안하면 더 열심히 일하라고 하면서 돌려보냈습니다.
우리들이 마치 이 직장인과 같은 사람이 아닙니까? 대신 갚아 준 사장님을 가리켜 동정할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사장님이 좀 부족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동정하고 있지나 않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정도 되는 분이 무엇 때문에 그런 고난을 받았을까 하고 말하는 사람이 혹 없습니까?
우리들을 대신해서, 우리들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받으시는 고통을 생각하면서 우리 자신의 주제를 파악해야 합니다. 사장님이 “열심히 일이나 하라”하듯이 우리들은 하나님의 이런 은혜를 생각하면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사기 치지 말아야 합니다. 시기 질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잘못을 뉘우쳐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순절 기간에 예수님의 고난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각성해야 할 것들입니다.

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로 하나님께 드려질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로 하나님께 드려질 때 주변에서는 어떤 현상들이 일어났습니까?

첫째, 온 땅이 어두움으로 가득했습니다.
45절에 보시면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흘리실 때 대 자연의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장난치고 즐겼던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어느 죽음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 어두움은 심판과 비극의 표징이었습니다.
아모스 8:9-10절에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해로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케 하며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며 모든 사람으로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을 인하여 애통하듯 하게 하며 그 결국으로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했습니다.
출애굽기 10:21절에서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들어서 애굽 땅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 만한 흑암이리라”했습니다. 한결같이 어두움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백성들에게는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흘리실 때 어두움이 임했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사망의 권세가 그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무너졌습니다.

둘째,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오해했고 무지했습니다.
이미 시편 기자를 통하여, 혹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메시아의 고난받으심을 예언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자신이 어떻게 죽으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말씀대로, 성경대로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무지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예수님이 엘리야를 부른 줄 알았습니다. 신 포도주로 더욱 예수님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들의 무지는 결코 그들의 멸망을 합리화시켜 주지 못할 것입니다. 몰라서 그랬다는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핑계할 수 없습니다. 핑계를 조건으로 하나님께 하소연 할 수 없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께서 그리고 제자들이 얼마나 많이 외쳤습니까? 우리들 역시 무식을 조건으로 핑계하면 안됩니다. 바르게 알고 믿어야 합니다.

말씀에로 초대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를 위하여”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① 나를 위하여(개인) ② 우리 모두를 대표해서(전체) 라는 뜻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함과 동시에 우리 모두를 대표해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한 번 죽으심으로 우리 모두에게 효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죄 때문에 자기 욕심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원치 않고 자기네 나라를 원합니다. 자기들의 나라에서 노력한 것만큼 인정받고 수고한 만큼 땀의 대가만큼 영광을 받는 나라를 원합니다. 그런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성경은 죄인이라고 합니다. 그런 우리 인간들의 수고와 노력은 모두 죄의 방출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들의 정치, 종교, 경제, 사회, 문화 활동을 통해서 끊임없이 이 땅을 더럽혀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로지 자기 공로와 자기 영광, 자기 자랑이 드러나지 아니하면 살맛과 인생의 보람을 못 느끼는 중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이런 죄악에 대해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원하시는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

 

막 1:1

1. 마가복음의 상황과 그 배경

때는 주후 64년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대 구속의 과업을 마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 근 30년 정도 세월이 흘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막히실때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어떤 예수님이시기를 바라고 따랐기에 마지막에 가서 그 예수님을 떠나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무지해서 자신들의 욕심들을 채우기 위해서 따랐지만 그 욕심이 채워지지 아니할 때 그들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면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그들이 그동안 예수를 잘못 알고 따라다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신 말씀을 이제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습니다.
로마에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비록 로마의 식민지로 살고 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주(主)가 로마 왕제가 아니라 예수가 주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핍박이 있었습니다.
주후 64년경이었습니다. 로마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전 도시로 불길이 번저갔습니다. 아예 3구역은 완전히 잿더미로 변해버렸습니다. 나머지 구역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네로 황제가 로마시에 불을 질러 놓고 그 불꽃으로 술잔의 축배를 들었다고 합 니다. 이러한 풍문이 로마시에 번지기 시작합니다. 네로가 직접 불을 지르도록 명령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이같은 소문이 확산되자 그것을 막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눈에 가시처럼 생각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그 박해를 피해 카다콤의 동굴은 우리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들입니다. 고통받고, 박해받고 있는 상황속에서 로마시 안에서 조그만한 소책자가 만들어졌습니다. 그 책 이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하고 있는 그들의 환경에 대한 복음의 메세지였습니다.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책을 읽을 때 바로 자신들의 상황을 두고 말씀하신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과 박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박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복음서에 계시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는 네로에 의해 박해 받고 있는 그 상황속에서도 자신들을 향해 주님으로 계셨습니다.
이러한 상황과 배경 때문에 마가복음은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 처럼 족보나 예수의 출생 사건을 취급하고 있지 않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기록자 마가는 이 복음을 읽게 될 독자들이 이 복음서의 의미나 사건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마가복음은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마가복음을 읽으실 때 고난과 박해 가운데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이 복음이 증거되고 있느냐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외쳐진 복음이라는 것은 당장 그 박해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 정부를 뒤엎을 것으로 증거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으로 이 세상에 오셨는가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분을 따르려면 그런 고난과 박해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외면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의 신앙을 점검합시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교회에 나오고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좀 신사적인 사람이 될 것 같고 교양있는 사람으로 행세할 것 같아서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인가를 이 마가복음을 통하여 드러날 것입니다.
심지어 구약시대에 등장했던 풍요의 신으로 바알을 섬겼듯이 이런 풍요의 신으로 바알과 같은 차원으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고 있지나 않습니까? 그런 자들은 진정한 복음이 증거될 때 그 복음의 알맹이인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복음을 증거할 때 떠나고 말 것입니다. 떠나려고 하는 그들을 불러 교회에 묶어 넣기 위해 그들의 원하고 좋아하는 이야기만을 외쳐댑니다. 참으로 무서운 세상입니다. 말세입니다. 복음이 비복음으로 인하여 서자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정말 여러분들은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2.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이란 무엇이냐”라고 했을 때 우리들은 싶게 “기쁜소식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적어도 이런 수준 밖에 안됩니다. 기쁜소식이라는 것은 복음이라는 의미에 나타난 어떤 결과의 한 부분을 기쁜소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 중심으로, 나에게 오는 어떤 좋은 결과만을 가지고 그것을 복음의 전체 의미로 설명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지를 않고 우선 우리 인간에게 오는 좋은 유익이 무엇인가라는 관점으로부터 이 복음을 정리하다보니까 그야말로 좋은소식인 복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에베소서 3:9절에 기록된 것과 같이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우리들에게 나타난 그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 비밀의 경륜이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에 사랑과 구원을 나타내려는 그것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같은 복음을 이방인에게 드러내게 하시려고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셨다고 말씀합니다(엡3:8). 그래서 그는 고전2:2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복음입니다.
고전15:2-4에 복음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대로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이 곧 복음인데 이것을 믿으면 우리에게 구원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복음의 내용이 마가복음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가 열심히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이같은 복음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살게 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날마다 죽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막 8:34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합니다.

3.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특히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있습니까?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자들을 향해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했기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오해한 유대인들에게 어떠한 메시아임을 역설하셨습니까? 마가복음에서는 이 문제를 상당히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우리들로 하여금 어떠한 메시아로 믿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즉 어떠한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왜 그토록 중요하느냐면 우리가 이 문제를 상당히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방법과 목적이 성경과 다르더라는 겁니다. 오늘 우리들은 조용히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믿고 있습니까? 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잘못 믿어서 책망받고 심지어 사탄이라고까지 책망받을 정도로 잘못 믿고 있지나 않습니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에 의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이용하고 있지나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가정에 축복과 행복을 가져다 줄 때라야만 그분은 메시아입니까? 그러한 분이시기를 요구하면서 그분을 따르고 있지나 않습니까?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린 자녀가 아버지를 생각하기를 아버지는 나에게 용돈 주는 그런 아버지로만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가복음의 기록자 마가는 이미 30년 전 이땅에서 복음을 전하시던 예수님의 사역을 친히 목격하고 그 사실에 관해서 마가복음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기록을 분석하여 종합해 보면 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막은 유대인들이나 예수님을 따라 다닌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상당히 오해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메시아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가르치므로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즉 신성모독죄로 예수님을 고소하였습니다. 그러면 유대인과 많은 제자들은 어떤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습니까?
유대인들의 메시아 사상을 볼 것 같으면 과거 자기 민족을 애굽에서 애굽을 극복하고 자기 민족을 해방시킨 모세와 같은 메시아가 나타나서 로마의 식민지로 살고 있는 자기 민족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다윗이 주변 강대한 나라를 정복하여 이스라엘을 강한 나라가 되게 한 것처럼 이제 오실 메시아는 로마와 같은 이방민족들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주고 번창시켜 줄 새로운 다윗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메시아, 즉 왕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삼하 7:12-14을 그 예로 들고 있습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이 말씀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다윗의 생애 말년에 한 아들을 주어서 그를 왕위에 세우고 그 왕의 나라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신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왕가를 영원한 나라로 세우시겠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그 한 나라”에 대한 예언으로 재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실제로 자기 유대민족을 견고한 나라로 일으켜 줄 다윗 왕가의 자손 중에 오실 강한 왕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왕, 메시아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아들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메시아, 즉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개념으로 놓고 볼 때 예수가 그런 분이셨느냐는 것입니다. 그 예수가 정치적인 해방과 다윗왕과 같은 경제적인 부흥을 가져왔느냐는 것입니다. 가져오기는 커념 오히려 많은 고난을 받고 비참하게 당시 가장 잔혹한 십자가의 형틀에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 제자들도 결국 다 떠나고 그를 버렸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가 메시아가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제자들의 오해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수석 베드로도 그것을 오했습니다.
막8:31-35절을 보시겠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가라 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잘못 오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오해를 용납해 주지 않았습니다. 진리를 오해하고 있는 것을 용납해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왜곡하는 것으로서 말씀을 혼잡케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기독교의 역설적인 진리를 얘기합니다.
우리는 지금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어떠한 예수님으로 이해하고, 믿고 있습니까? 또한 예수님을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막10:35-45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 정부를 뒤 엎고 예수님이 왕이 될 줄 알았나 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새로운 국가를 형성할 때 그 나라의 중요 요직을 탐내고 있는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43-45절에서,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을 오해하니까 직접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니, 왕이니 하는 말로 자신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자라고 합니다. 인자라는 말은 구약 다니엘서에 있는 말씀을 염두하시면서 자신이 바로 구약 다니엘서에 예언된 그 인자로서 그런 의미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단7:13-14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 이니라.”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이야말로 구약 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그 메시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막 1:1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세례 요한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

 

막 1:1-8

마가복음의 기록 목적 자체가 1:1절에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같은 복음을 우리들이 어떻게 할 때 우리들에게 구원이 오는가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신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세례 요한이 증거하고 있는 메시아가 어떠한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세례 요한의 증거를 중요하게 취급하는 이유는 그는 구약이 예언하고 있는 메시아의 출현에 대한 징조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우리들에게 보여줌으로서 세례요한 처럼 본받아서 우리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려고 본문이 세례 요한에게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같은 이야기가 정확히 정리되지 아니하면 성경의 기록 의도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우리들은 우리들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주인이 지시한 작업 지시서 대로 종은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은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기록 의도대로만 순종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펴보고자 한 본문 말씀을 통하여 보여주시고자 원하신 의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거부하고 우선 우리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작업지시서를 변경하고 위조하면 안됩니다. 그 행동은 분명히 주인으로부터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심지어 추방당하는 아픔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1. 왜 선지자 이사야 글이 등장합니까?

막1:1절 첫 줄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해 놓고 곧바로 이사야 글을 이야기하면서 세례 요한을 언급합니다. 그러니까 이사야 글과 세례 요한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세례 요한의 자서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세례 요한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의 중심이 우리 자신입니까? 예수님이십니까? 우리 자신이 새 역사를 창조하는 주역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들이 주역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주역입니다. 새 역사를 창조하는 원동력입니다. 단지 우리들은 엑스트라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모든 시선을 우리들에게 집중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삿6:21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매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드온과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제사의 장면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를 반석위에 놓여 있는 제물에 댈때 불이 어디에서 나왔다고 합니까? 지팡이에서 불이 나왔습니까? 반석에서 나왔습니까?
우리들이 생각하기로 지팡이에서 불이 나왔을 것 같은데 오히려 불은 반석에서 나왔습니다. 지팡이가 능력이 있어서 불이 되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팡이는 시선을 반석에게로 지시하게 하는 역할입니다.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고전10:4에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바로 지팡이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집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같은 일을 위해서 세례 요한이 등장하고 이사야서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증거하고 있는 그 복음의 정당성을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통하여 확고하게 해 줍니다. 세례 요한의 예수 증거가 진리이고 참됨을 어떻게 보장해 줍니까?
그것은 이미 세례 요한의 사역이 구약이 예언하고 있는 메시아의 출현에 대한 징조였다는 것입니다. 장차 메시아가 나타나게 될 징조로서 세례 요한이 먼저 나타나서 메시아의 길을 평탄하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미 700-8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미리 예언해 준 것입니다.
마가는 마가복음을 기록할 때 구약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면서 그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세례요한이 먼저 나타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그리스도였다는 사실입니다. 미리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수님에 관해서 예언해 주고 나서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이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믿으라는 것입니다.
요 13:19에 미리 예고하고 나서 실행하신 이유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 이해되십니까?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의심하지 말고 믿어야 합니다. 로마의 박해에 의해서 핍박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이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들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로마의 황제가 주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핍박 때문에 로마 황제로 주님을 바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위로해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주님은 누구십니까? 여러분들은 과연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습니까? 단지 성인군자 정도로 오해하고 있지나 않습니까? 그분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들의 죄 때문에 받아야 될 형벌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랑의 대사였습니다.

2. 세례 요한은 무엇을 증거했습니까?(설교의 내용)

첫째, 죄사함을 받는 회개를 증거했습니다.
4절에 보면 “세례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라고 합니다. 세례 요한이 어디에서 외치는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광야에서 외쳤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이 많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없는 광야로 간 것은 광야에서 그의 길을 평탄케 하시리라는 예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구약 예언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 예언대로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사명을 감당하는 모습을 볼 때 지금 세례 요한이 증거한 메시아가 구약에 예언된 그 메시아임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주된 선포의 내용은 죄사함을 받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할 때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죄사함을 받게 하는 복음입니다. 우리들에게 세례를 허락하신 이유는 죄사함을 받게 하는 진리를 주시기 위한 연극입니다.
그런데 그 세례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자꾸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고 하면서 서로 분파가 일어납니다. 초대교회 고린도교회가 그랬습니다.
고전1:17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전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자신보다 능력 많으신 분으로 증거했습니다.
막1:7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세례 요한은 자신이 드러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 증거했습니다.
행3: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셋째,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증거했습니다.
막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는 자였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준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3. 증거의 결과(설교의 반응)

막 1:5에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죄사함을 받는 회개의 세례를 증거하게 되자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요한에게로 왔습니다. 와서 자신들의 죄를 자복했습니다. 또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죄를 회개하고 자백하면 용서를 받습니다. 바로 구원입니다.

4. 증거자 요한의 상황배경 (설교자 요한의 모습)

막 1:6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이 상황 배경은 요한이 얼마나 청빈하게 살았느냐가 아닙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로서 예언이 세례 요한으로 인하여 성취되어 메시아를 증거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말씀에로 초대

우리들에게 말씀으로 알게 하신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그 세례 요한이 증거하고 있는 그 예수님을 나는 믿고 있습니까? 우리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증거해야 하겠습니까? 복음의 전도자는 어떤 기쁨과 평강과 확신속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고 열심히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

 

막 1:29-39

오늘날 우리들은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갑니다. 수없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오히려 짜증이 날 정도입니다. 귀찮을 정도로 많이 배달된 각종 광고물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런 모든 정보 가운데는 무조건 우리들을 짜증나게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들에게 유익한 정보, 기쁜 소식이 되기도 합니다. 경제가 좋아지고, 실향민들에게 금강산에 갈 수 있다는 것도 그렇게 기쁘고 좋아들 합니다.
어떤 실향민은 자신의 집을 팔아서라도 관광을 다녀와야겠다고 할 정도입니다. 이 땅에서의 이런 소식도 기쁜 소식이 되거늘 하물며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서 온 소식이 어찌 기쁨이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복음은, 짜증나고 고달픈 이 세상에서 우리들에게 큰 힘이 되며 위로가 될 줄 믿습니다.
마가복음 1:15절에서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이 복음을 본문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열병을 고치신 예수님(29-31절)

예수님께서 열병을 고쳐 주시므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찾아가 만나 주셨습니다(29절)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과 안드레 집에 들어가시니”(29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찾아가 만나 주셨습니다. 고달프고 병들고 고통 당하는 연약한 사람들을 찾아가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위로하시고 힘을 주셨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을 때 감히 누가 나를 찾아와 주겠습니까? 인간이란 상대에게서 무엇인가 받아낼 것이 없을 것 같으면 찾아가지 않습니다.
옛 말에 ‘정승(政丞)이 죽으면 찾아온 사람이 많지 않아도 정승의 개가 죽으면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을 가리켜 “세리와 죄인의 친구”(마11:19)라고 했겠습니까? 모두가 싫어하는 사람을 예수님은 찾아가 주셔서 병을 고쳐 주셨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가정에 우리 주님이 찾아오신 줄로 믿습니다. 직장을 잃고 있는 우리들에게 찾아와 주셔서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다. 병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찾아오실 줄 믿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 주셨습니다(31절 상).
31절 상반절에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병으로 고생하는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셨습니다. 어떻게 고쳐 주셨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손을 잡아 주시므로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손을 잡아 주실 때 능력이 있었습니다.
안양에 장애 어린이들을 위한 특수훈련원이 있습니다. 여기서 수고하신 김일권 목사님의 딸 역시 뇌성마비 장애자였으나 지금은 많은 치료로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런 그 딸이 “손 잡아 주소서”라는 제목의 김승이 시집을 내 놓았습니다. “손 잡아 주소서”라는 시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주여!
저의 손 잡아 주소서.
세상이 싫어하는 이 손을

주여!
저의 손 잡아 주소서.
세상에서 찢기고
세상이 짓밟아
손 안에 뼈가 뒤엉켜 부서진
힘없는 이 손을

주여! 저의 손이 너무 멀어 보이지 않으신다면
저에게 남은 힘 다해
아파하는 이 손 주님께 뻗겠사오니
주여! 저의 손 비록 아름다움 없이 못 생겼지만
주여! 저의 손 사양 마시고
주여! 저의 손 저의 손 잡아 주소서.

주님께 나의 연약한 손을 붙잡아 달라는 시인의 간절한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찾아와 주셔서 따뜻한 능력의 손으로 우리들을 붙들어 주십니다. 시몬의 장모는 그 주님께서 손을 붙들어 주실 때 열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고 하셨습니다.

셋째, 고침 받은 시몬의 장모는 예수님을 수종들었습니다.(31절 하)
고침 받은 여인은 예수님과 그 일행을 위해 수종들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그 여인이 완전히 고침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고침을 받은 후에 감사해서 그 여인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모습이 곧 우리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봉사의 생활입니다. 감사의 생활입니다.

2. 모든 병과 귀신을 쫓으신 예수님 (32-34절)

32-34절 말씀에서 예수님께 가지고 온 ‘모든’ 병과 귀신을 쫓으므로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증거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병고침과 귀신 축출을 예수님의 표적이라고 합니다.

첫째,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32절).
모든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병과 귀신으로 인하여 고통을 겪고 있다는 말입니다. 고통과 환난을 당하는 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올 때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14:23)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할 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둘째, 예수님은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34절 상).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라고 했습니다. 가지 각색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께 가지고 온 모든 병은 다 고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의 공급을 스스로 차단한 범죄한 인간에게 병과 죽음이라는 죄의 삯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죽음과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질병을 정복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그 질병을 이길 수 있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셨습니다(34절 중).
모든 병 뿐만 아니라 귀신을 쫓으셨습니다. 귀신보다 더 강한 자가 아니면 그 귀신을 쫓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보다 더 강한자이십니다. 사탄 마귀는 귀신이라는 자기 부하를 거느리고 이 세상을 정복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만왕의 왕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결박당했습니다. 정복을 당했습니다. 머리에 대 일격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발작하고 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들까지 넘어지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리는 곧 우리들의 승리입니다.

넷째, 예수님은 귀신이 자신에 관해 말하는 것을 허락치 않았습니다(34절 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결박하고 쫓아낼 때 그 귀신들이 예수님을 알아봤습니다. 그러나 그 귀신이 예수님에 관해서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거룩하지 못한 귀신의 입에 어떻게 예수님의 이야기가 오르내리게 할 수 있겠습니까? 두 번째는 ‘메시아 은닉 사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 예수님은 할 일이 많으셔서 일찍 적대자들의 손에 잡혀 십자가를 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조용하라 했습니다. 아직 할 일이 계셨으며 십자가를 지실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그 때를 위해서 3년이라는 공생애 기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기간이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증거 하는 기간이었습니다.

3. 복음을 증거 하신 예수님(35-39절)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을 고쳐 주시고 귀신을 쫓아 주실 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을 다니시면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증거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세력들을 차단하고 결박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이를 선포하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복음을 증거 하기 전에 새벽기도를 하셨습니다(35절)
예수님은 언제나 복음을 증거 하시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35절)라고 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여러 지역을 다니시면서 복음을 증거 하셨습니다(36-39절).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시자 새벽 미명에 기도하는 곳에 제자들이 찾아와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고 있다고 전해 줍니다. 그들이 왜 예수님을 찾았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눈 앞에 보는 신기한 기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시고 다른 지역에 가셔서 복음을 증거 하셨습니다. 다른 지역에도 하나님의 복음으로 인한 택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찾아 다니셨습니다. 우리들도 복음 증거를 위해 찾아 나서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대상자들을 예비해 놓으십니다. 출발하기 전에 꼭 기도하는 것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10:7-8).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막 8:27-34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커다란 줄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해 주신 것은 바로 메시아 약속이었습니다. 이 땅의 축복을 이야기할 때에도 그것은 언제나 메시아 약속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메시아를 약속해 주시므로 하나님의 구원이 그 메시아를 통하여 이땅에 어떻게 나타나게 되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메시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타내어 보여주실 것을 예언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의 종으로 우리 죄를 대신해서 희생을 당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합니다.
그같은 구약의 하나님의 약속대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그의 사역은 희생과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십자가에서 우리들의 죄 때문에 희생을 당하시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을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이후 예수님의 영인 성령님을 이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예수 그리스를 통한 구원이 우리 개개인의 마음 속에서 발생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섬김과 희생을 통하여 우리들을 구원하셨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어두움의 그늘 속에서 우리들에게 희망과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은 당시에 제자들은 어떻게 이해했습니까? 또한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자신을 어떻게 소개해 주셨습니까? 이런 말씀을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우리들의 신앙의 위치를 확인해 볼 수 있어야 하겠다.
벧전3:15절에 보면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들에게 무엇 때문에 우리들에게 소망이 있는지 그 이유를 물을 때 항상 대답할 말을 준비하고 있으라고 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에게는 온유한 마음으로 하고 하나님에게 대해서는 두려운 마음으로 준비하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다음 한가지 질문에 답변해야 합니다. 언제나 답변할 수 있도록 우리들은 준비해야 합니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이같은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우리들의 신앙이 설명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1. 본문 말씀의 배경

예수님께서 여러 지역을 다니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자신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구약이 예언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즉 왕이라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하루는 가이사랴 빌립보를 비롯하여 여러 지역을 거닐으시면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한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세례 요한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변 상황을 예수님께 얘기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재차 질문하셨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은 골몰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질문을 통해서 자신이 어떠한 분으로 이 세상에 오셨는가를 알려주고 싶어하신 그 마음을 우리들은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지 않고는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구원도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요 17: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입니다”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우리들에게 어떻게 보여주고 계신가를 확인해야 될 줄 믿습니다.

2.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께 대해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주’라는 말은 예수님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主)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의 칭호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신약적으로 표현했을 때는 그리스도십니다. 구약적으로 표현해서는 메시아라고 합니다. 메시아라는 말은 왕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리들의 주인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지금 누구를 주님으로 믿고 있습니까? 혹 자녀가 나의 주님으로 바뀌지나 않았습니까? 돈이 나의 주님으로 바꾸지나 않았습니까? 예수님을 우리들의 주님이시라고 하지 않고 돈이 나의 주님으로 둔갑당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 돈을 다 거두워 가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므로 우리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신앙인은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거기에 구원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물질의 풍성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이같은 고백을 더 풀어서 설명한 것이 바로 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말씀합니다. 이제 내가 곧 죽는다는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자신이 우리들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받아야 할 저주의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모르면서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이웃집 아저씨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그를 믿고 많은 돈을 빌려 줄 수 있겠습니까? 알지도 못하는데 무슨 신뢰가 가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잘 모르면서 그 예수님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이 과연 누구이신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 예수님은 누구이시며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와 우리 모두를 위해서 고난과 고통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희생을 당하셨습니다. 그런 희생이 없으면 우리들은 하나님께 희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그 어느 누구가 우리를 이렇게까지 사랑해 주겠습니까? 단 돈 몇 푼도 거져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자신의 목숨까지 우리들을 위해 주셨습니다. 우리들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들을 대신해서 그런 희생해 줄 사람은 없습니다.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서 희생을 당해 우리들을 구원해 줄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이 땅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자격을 갖추고 계신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들의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그분을 믿어야 하고 의지할 때 우리들에게 영생의 구원이 있게 됩니다.

3. 무엇이 하나님의 일이고 사람의 일인가?

예수님께서 이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는다고 말씀하자 베드로가 어떤 행동을 취하고 있습니까? 32절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죽는다고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죽어서는 안됩니다”라고 예수님을 말리고 있습니다. 이같은 베드로의 태도 속에는 그가 지금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면 안된다고 만류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열심인가? 이런 베드로의 열심에 예수님은 어떻게 판결하겼습니까? 33절에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합니다. 방금 전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은 사탄이라는 저주에 가까운 심판을 받고 맙니다. 아! 얼마나 무서우 말씀입니까? 그처럼 예수님을 따랐고 수제자라고 하는데 그가 어떻게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이라는 사형선고와 같은 판결을 받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하나님의 일이고 사람의 일인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은 하나님께 대접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의 일은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들이 비록 직장생활을 해도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기에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슨 목적을 위해서 직장생활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구제를 해도 내 영광을 위해서 구제하느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구제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로 구분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고전10:31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기만 하면 농사짓는 것도 복이요, 축복입니다. 그것은 결국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이렇게 놓고 볼 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참외 따는 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제 우리가 비롯소 땀을 흘려야 하고 열심히 일해야 하는 이유를 여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할렐루야! 아멘.

4. 베드로의 관심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는다는 사실을 만류한 베드로의 행동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우리는 그 베드로가 생각하고 있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을 이용해서 어떤 한 자리를 넘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의 식민지로 있는 유대 나라를 구원시켜 줄 정치적인 메시아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대다수 제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생각 때문에 제자들끼리 서로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하여 싸웠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예수님이 죽는다고 하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까바 예수님께서 죽으시면 안된다고 합니다.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목적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속죄의 제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들 곁에 계속 머무르면서 떡이나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의 생각은 사탄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합니다. 자신들의 생존에만 관심이 있었지 생명과 구원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는 자들입니다. 떡을 줄 때에는 예수님을 따랐지만 하나님의 구원을 이야기할 때는 어렵다고 다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습니까? 떡이 먼저입니까?? 생명의 구원이 먼저입니까? 답변해 보십시오.
단 3:17-18에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신앙고백입니다. 이 세 청년이 이런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하나님을 정확히 믿는 힘입니다. 우리들도 이런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을 때 세상이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본문 38절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아멘.

말씀에로 초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을 당합니다. 일들이 잘 풀리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하지만 전혀 응답이 없습니다. 하루하루 살기가 힘들고 의욕을 잃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 있는 우리들에게 오늘 본문 말씀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전혀 상관이 없는 것 같이 보이십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좌절과 낙심 가운데 있는 우리들에게 우리 주님은 오늘도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 고통과 희생을 당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땅에서 당하는 우리들의 고통이 다가 아닙니다. 그런 고통은 우리들에게 더 좋은 축복을 주시려고 허락하신 훈련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들을 이해하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베드로는 수석 제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믿고 알고 있었는지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혹 우리가 그런 모습은 아닙니까? 교회에 열심으로 봉사합니다. 그런 열심이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들은 불행한 자가 됩니다. 늘 자신을 쳐 복종시키고 교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겸손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온 교회 성도님들에게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물음에 답변을 잘 하셔서 답안지를 잘 작성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인생 답안지, 교회 봉사의 답안지가 있을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의 믿음을 고백하여 기록하는 답안지에 무엇을 기록하고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그 답안지를 채점하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

 

눅 2:15-20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에 있었던 일입니다. 만삭의 가난한 여인이 해산할 곳을 찾아 눈길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해산의 도움을 청할 곳을 찾지 못한 여인은 그만 어느 다리 밑에서 혼자 아이를 낳았습니다.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 밤이었습니다. 산모에게는 아이를 덮어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옷에서 솜을 모조리 뽑아 아기의 몸을 싸주고, 자신의 옷을 벗어 아기를 꼭 싸주었습니다. 그리고 기진맥진한 자신은 길에 버려진 마대를 주워 덮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한 행인이 우연히 그들을 발견했습니다. 아기는 동상에 걸려 있었고, 여인은 아이를 안은 채 얼어죽어 있었습니다. 마음씨 착한 행인은 그 아이를 구해 데려다 길렀다. 그후로부터 10년 후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날, 그 소년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를 데려다 키운 양부모는 10년 전의 일을 사실대로 알려 주었습니다.
소년은 어머니의 무덤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무덤에 이른 소년은 갑자기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은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 어머니의 무덤을 덮었습니다. 그리고는 벌 벌 떨면서 큰 소리로 “어머니! 저 때문에 얼마나 추우셨어요”라고 슬피 울었습니다.
어린 자녀를 살리기 위해 죽음을 부른 추위를 무릅쓰고 어린 자녀를 살렸던 어머니의 사랑, 이 얼마나 숭고합니까? 이같은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깊고 높은 사랑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들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했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성탄절에 우리들에게 외쳐져야 하는 복음입니다.

1. 예언의 성취

성탄절은 무슨 날입니까? 말 그대로 성스러운 탄생입니다. 누가 태어났기에 성스러운 탄생입니까? 그래서 그날을 기념합니까? 그 성스러운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아기 예수로 태어났습니다. 그 날을 우리들은 성탄절로 기념하면서 경배하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미 2천년 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2천년 전에 아기 예수로 태어난 예수님을 기념하면서 아울러 앞으로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기대와 소망이 성탄절날 이 아침에 우리가 생각하고 기억해야 할 것들입니다.
2천년 전에 태어나신 그 아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어떤 근거로 알 수 있습니까? 이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이 아기 예수는 구약의 예언을 성취한 분으로 오셨기에 이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들의 구주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3:15절에서는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서로 투쟁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여인의 후손은 생명의 계열입니다. 그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뱀의 후손으로 지칭된 사탄이 대립하지만 결국 생명이 사탄을 이길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이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약속대로(창49:10) 유다 민족 가운데 오셨을 때 유다 민족은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 아구스도의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가 유다를 통치할 때 헤롯을 유다의 왕으로 세워 다스렸습니다. 이 헤롯은 구약 성경에서 언약에서 제외된 뱀의 후손으로 상징된 에서의 후손입니다. 이 에서의 후손이 이두매의 군주인 헤롯은 구약성경에 사탄의 상징으로 등장한 아말렉과 같은 종족입니다.
심지어 에스더서에 등장한 하만 역시 같은 종족들로서 하나같이 이들은 뱀의 후손, 내지는 사탄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이런 뱀의 후손이 유다를 일시 통치하고 있을 때 여인의 후손이시며 생명이신 예수님이 구약성경의 약속을 따라 출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는 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출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섭리였습니다(미 5:2).
이같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음을 알게 하시려고 베들레헴에서 출생케 하십니다. 베들레헴에서 출생하도록 하기 위해서 당시 자신의 출생지에서 호적을 해야 한다는 호적령을 이용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것이 2:1절에 말씀한 내용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출생한 장소를 통하여 이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했습니까? 또한 지금 우리들은 얼마나 장차 오실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까?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21:34)

2. 천사가 목자들에게 증거한 기쁜소식

목자들에게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실제로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천사가 양치는 목자들에게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증거는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10절에서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합니다. 그 좋은 소식은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눅2:14)라고 합니다.
아기 예수님은 하나님의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죄로 범하여 하나님의 저주의 형벌을 받고 있는 우리들에게 구원의 빛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이야말로 좋은 소식입니다. 그분이 이땅에 오신 것 자체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님 뿐이십니다.
요한복음 14:13절에 보면 하나님은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이 이땅에 임하는 순간이 바로 아기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그 예수님을 믿고 맞이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평화가 임합니다. 이 평화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화목을 의미합니다. 그 화목은 결국 우리들의 불안한 마음, 불평의 마음을 감사하는 마음, 기쁨과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변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성탄절 이 아침에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하나님과 화목케 해 주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평강과 평화를 주셨습니다. 이 평화와 평강을 우리 이웃에게 증거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나만 누릴 것이 아니라 함께 누릴 수 있도록 우리 이웃을 생각하여 전도하므로 함께 누려야 합니다.
골 1:20에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18절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성탄절에 이 직책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분쟁 지역에, 불신 사회에서 우리들은 화목케 하신 복음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들도 그렇게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천사들로 인하여 기쁜 소식을 전해들은 목자들의 행동을 보십시오. 눅2:15에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 이루어진 일”, 즉 아기 예수님을 보고자 아기 예수를 찾았고(16), 보았고(17절), 전했다(17절). 그랬더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기이히 여겼다(18절). 이 기이한 일은 다른 이야기가 아닌 하나님의 구원의 기쁜소식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서 목자들은 기쁜소식이 아기 예수님에 관해 들었고, 찾았고, 보았고, 전했다고 했습니다. 이같은 목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들이 믿고 있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 구약의 예언대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분명히 해 두기 위해입니다. 이렇게 까지 정확하게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들의 구주이심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같은 정확한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우리들도 그 성경을 통해 예수님에 관해 들었고 직접 구원을 체험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고해야 합니다. 즉 전해야 합니다. 전도의 사명은 구원의 체험에서 나옵니다.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만이 전도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전도할 수 있는 구원의 은혜와 감격을 체험하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사실을 오늘 성탄절 아침에 우리들이 다짐하고 체험해야 할 내용들입니다.

3.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본문 20절에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고 합니다. 아기 예수를 친히 보고 목격했던 목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을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로 하여금 복음을 간직한 자들에게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 어떠해야 함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 때문에 하나님께 찬양을 돌려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사명입니다.
오늘날 왜 문제가 발생합니까? 교회이든 가정이든 왜 분쟁과 아픔이 오습니까? 그것은 내가 영광을 받으려고 할 때 생기는 병폐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최고라고 합니다. 자기 아니면 안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내가 아니요, 하나님이시요, 나보다 상대를 더 생각하며 아끼는 생활입니다. 언제나 희생을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손해를 볼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그 손해도 기쁜 마음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고 성공하면 그것은 부모님께 영광이 됩니다. 그러나 자녀가 문제만 일으키고 사고만 내고 다닐 때 부모님에게는 모욕거리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대로 순종하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말로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먼저 시인하라고 한 것은 먼저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그 마음이 진실인지는 뒤따라오는 그의 행동이 진실하느냐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진실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을 돌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46절에서는 마리아가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라고 했고 누가복음 18:43절에서는 앞을 보지 못한 사람이 예수님께서 고쳐주셨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고 했습니다.
고침 받은 당사자 뿐만 아니라 그 고침 받은 은총을 보고 목격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찬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생각할 때마다 그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상처를 받게 된다면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겠습니까? 도리어 원망과 분을 쏟을 것입니다. 그 통곡이 하나님께 기도로 상달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판단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빌1:3-5)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고 했습니다(롬15:11).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했습니다(골3:16).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자신이 그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교만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시94:2절에서 시편 기자는 “세계를 판단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에게 상당한 형벌을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으로 인하여 평강의 은총을 받은 목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들의 모습 속에서도 그런 신앙인의 자세와 태도가 보여야 합니다.

말씀에로 초청

오늘 이 기쁜 성탄절 아침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구원하시려고 이땅에 보내신 아기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날에 기념해야 합니까? 우리들의 구원을 말하기 전에 우리들이 어떠한 사람들이었기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야만 했는가를 묵상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이 죄인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성탄절은 기쁘고 즐거운 날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들이 어떤 상태에 있었는데 오늘은 어떤 자가 되었습니까? 이런 생각을 해 보면 우리들은 더 감격적인 성탄절, 희망과 소망으로 넘치는 성탄절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을 구원하시려고 2천년 전에 오셨던 아기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동시적으로 앞으로 오실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늘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절에 동시적으로 가져야 하는 우리들의 관점이어야 합니다. 또한 이런 복음, 이런 신앙을 우리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우리 이웃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충만히 느끼며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신앙생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들을 구원하시고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이 성탄절 아침에 앞으로 오실 예수님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며 경건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죄사함을 선포하신 예수님

 

눅 7:36-50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들의 마음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일이 잘 풀리기를 바라는 마음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복을 소유하기 위해서 분주한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 모든 복과 생명을 주관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잃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외면하면서 자신들의 노력과 힘으로 복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지막 열매는 저주요, 죽음과 죄악에 대한 심판 뿐입니다. 그들은 복과 생명을 맞바꾼 셈입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들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같은 사랑을 아는 자가 바로 참된 구원의 백성입니다. 죄많은 가냘픈 한 여인이 본문이 등장합니다. 이 여인은 세상적으로 볼 때 지지리도 복이 없는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생명을 얻었습니다. 죄 용서함을 받는 복된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누리는 최대의 복과 행복을 소유한 여인이었습니다.
이같은 여인에게 희망과 소망을 주신 분이 누구셨습니까? 그분은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를 받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희망이셨고 비전이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언제나 죄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오해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눅7:34-35)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본문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어떤 면을 소개받아야 할 것인지를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계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1. 한 바리새인에 의해 초청 받으신 예수님(36절)

본문 36절에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바리새인으로부터 초청을 받으셨습니다.
① 바리새인이라는 유대인이었습니다.
② 유대인들이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③ 예수님은 유대인의 초청을 받을 때마다 잘못된 그들을 시정해 주셨습니눅11:37,14:1).
한결 같이 바리새인들로부터 초청을 받을 때마다 예수님은 자신의 어떤 의도를 드러내기 위하여 초청에 응하셨던 것을 복음서를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기에 초청한 초청은 아니었습니다. 호기심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단순한 어떤 존경심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예수님에게서 어떤 약점을 캐기 위한 목적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같은 사실을 다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잘못을 시정하시고 책망하시기도 하시고 경고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내 마음속에 예수님을 믿기로 했습니다. 영접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 주님을 초청하기도 했습니다. “오, 주님 내 마음속에 오시옵소서”라고 결단과 헌신을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런 다짐들이 단순히 순간적인 어떤 감정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주님을 마음속에 초청해 놓고 우리들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으면 안됩니다. 초청에 응하신 주님은 우리들과 동행하십니다. 우리 주님이 원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늘 묵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딴 마음을 갖고 있으면 안됩니다.

2. 죄인인 한 여인과 예수님과의 만남(37-39절)

예수님에게 한 여인이 찾아 왔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은 누구입니까?
① 죄가 많은 여인이었습니다(37절上).
② 향유을 담은 옥합을 가져왔습니다(37절下).
③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실 정도로 많이 울었습니다(38절上).
④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고 그 발에 입맞추며 향유를 부었습니다(38절下).
예수님을 사랑하는 한 여인의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을 보라.
여인의 이같은 행동을 그대로 방치하신 예수님을 바리새인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① 예수님은 참 선지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고 합니다(39절).
② 그 이유는 자신에게 향유를 붓는 여인이 죄 많은 여인인줄 몰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39절).
③ 예수님이 참 선지자였다면 이런 죄인과 함께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그 당시 죄많은 사람들과 자리를 합석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죄인들이 많이 사는 이방인의 지역을 통과한 다음 자신들의 발에 먼저를 떨어버립니다. 더러운 지역을 지나왔다는 것입니다. 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한 것은 예수님은 고상한 분이라고 생각해서였습니다. 혹은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이 곧 고상한 사람임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많은 여인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죄인과 함께 하는 것을 보니 예수님은 더 이상 선지자일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예수님을 의심했던 것입니다.
혹 우리들이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나에게 어려움을 주시면 나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겠다고 합니다. 나에게 어려움이 없도록 해 주실 때만 나는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들은 우리들의 머리로 하나님을 만들어 믿으면 안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그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3. 탕감 받는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는 예수님(40-46절)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기 위해 비유를 듭니다.
① 빚진 자 둘이 있는데 하 사람은 5백 데나리온, 다른 한 사람은 5십 데나리온을 졌습니다(41절).
② 그런데 이 둘이 갚을 능력이 없어서 주인은 두 사람의 빚을 다 탕감해 주었습니다(42절 上).
③ 그렇다면 이 둘 중에 누가 탕감해 주는 주인을 더 사랑하겠습니까?(42절 下).
④ 이같은 예수님의 비유에 바리새인 시몬은 많이 탕감 받은 자라고 답변합니다(43절).
비유를 통해 가르치시려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①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습니다(44절 上).
②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내 발을 씻어 주었습니다(44절 下).
③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 발에 입맞추었습니다(45절).
④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했지만 이 여자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습니다(46절).
이 비유는 많은 빚을 탕감받은 자는 여인이고 적게 탕감받은 자는 바리새인으로서 많이 탕감받은 여인이 주인이신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스스로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나 나는 전혀 죄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감격이 없을 것입니다. 죄가 전혀 없는데 억지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말이 아닙니다. 원래 우리들은 죄인 중에 괴수라고 표현해도 할 말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런 죄를 인정하고, 시인하면서 그 죄 가운데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감격이 넘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그 어느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할 것입니다. 마치 본문에서 등장한 죄많은 여인처럼 말입니다.

4. 죄 많은 여인을 구원하신 예수님(47-50절)

결국 한 바리새인의 초청에 응한 것도, 비유를 든 것도 예수님 자신이 누구신지를 알려 주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르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약이 예언하고 있는 그 메시아이심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자신이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오신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어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당시 유대인들로부터 멸시와 천대와 정죄를 받았던 죄만은 여인이 용서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의 대열에 끼었다는 점입니다. 유대인들이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① 예수님을 많이 사랑한 여인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47절)고 하셨습니다.
② 죄 사함을 선언하신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 바리새인(49절)들은 마음 속으로 우왕좌왕 할 뿐이었습니다.
③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시면서 평안의 복음을 허락하셨습니다(50).
우리들은 보통 마음 편할 날이 없다고 합니다. 골치 아픈 날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늘 그렇게 부족하게 산다는 말입니다. 불안전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간직한 사람들은 이제 무엇인가 달라졌습니다. 행복을 압니다. 마음의 평강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것은 오직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에게 임하게 하는 비결입니다. 자신을 비관했고 상대방을 정죄했던 내가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이제 달라졌습니다. 변화되었습니다. 오직 예수 승리, 내 승리였습니다.

5. 말씀에로 초대

참으로 어려운 시대입니다. 이 어려움은 하나님의 저주의 형벌이라기 보다 우리들을 훈련시키시는 훈련의 도구임을 명심하십시오. 어렵다고 회피하고 낙심하면 그는 영원히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상실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사함과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비전과 꿈이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부여받은 우리들이 언제까지 움츠리면 살겠습니까? 깨어나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열심히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눅7:50절).


회개의 기회를 말씀하신 예수님

 

본문 눅 13:6-9

오늘 주일은 1995년도를 마지막 보내는 주일임과 동시에 금년도 마지막 날입니다. 한해를 보내면서 우리는 다시한번 지난 1년동안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를 드리는 동시에 우리들의 지난 1년 동안의 과거를 회고해 보면서 우리 자신들을 반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또한 반성과 회개는 물로 또다른 한 해를 맞이하게 될 때 새로운 각오로 앞으로의 1년을 주님 앞에서 충성스럽게 보낼 수 있도록 결심하며 각오하는 그런 시간이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지난 1년 동안 많은 문제 앞에서 안타까워 하고 괴로워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음을 회고해 봅니다. 많은 재난이 닥쳐왔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의 교회는 더 크신 은혜을 주셨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그러한 시대에 우리들의 연약함이 우리들을 낙심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넘어지지 않는 것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들을 항상 지켜 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됩니다.
1년을 회개해 보면서 우리가 어떠한 자세와 태도로 이 한해를 보내야 하는지를 말씀을 통하여 한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열매를 맺지 않는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13:1-5).

한 번는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빌라도 잔악상을 고발했습니다(눅13:1-5). 그 고발 내용이 무엇이었느냐면 빌라도가 이스라엘의 갈릴리 사람을 학살했는데 그 피가 자신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과 뒤섞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 알려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희생당한 갈리리 사람들이 희생당하지 않는 갈릴리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 희생당하는 줄 생각하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그러시면서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4절에서 실로암 있는 탑이 무너졌을 때 치어죽은 18명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반문 합니다. 그러시면서 너희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망할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사실을 더 강조하시면서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이 되겠습니다.

2.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의 비유(6-9)

6절부터 기록된 본문 말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다가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습니다. 얼마후에 있다가 그 주인이 그 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해서 찾아 갔습니다. 그러나 열매는 없었습니다. 그때 주인은 포도원에서 일하고 있는 포도원지기에게 말하기를 이 나무에게서 열매를 얻을까하고 3년동안 기다렸는데 헛수고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무를 없애 버리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괜히 땅과 차지하면 손해라는 것입니다. 그때 포도원지기가 말하기를 1년동안만 좀 더 참아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거름을 주어서 잘 가꾸어 보겠다고 합니다. 그때가서 그래도 열매가 없으면 그때가서 찍어버리십시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의 비유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를 통한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회개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회개한다는 말은 돌이킨다는 말입니다. 생각과 마음만 돌이켜서는 안됩니다. 행동까지 돌이켜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믿어야 하는데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막2:17)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원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한 자들만이 하나님께 회개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 합니다.
(마9:13)에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그동안 1년 동안 우리들의 과거를 회고해 볼 때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이 있으면 회개합시다. 회개할 때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을 구약적으로 표현했을 때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백성들에게 돌아오라, 즉 회개하라고 말씀합니다.

둘째로, 기회를 주실 때 최선을 다합시다.
주인이 3년 동안 열매맺지 않는 나무를 뽑아 버리라고 합니다. 즉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포도원지기가 간청합니다. 1년만 더 기회를 달라고 합니다. 그 1년 동안을 기회를 주었는데도 열매를 맺지 않으면 그때는 이제 더이상 기회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기회를 주실 때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충성할 수 있는 건강 주실 때 충성합시다. 기회는 우리들에게 계속 주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로, 구원자로 오셨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오히려 그 예수님을 오함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이라고 합니다.
(고후6:2)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셋째, 참고 심판을 보류하시며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들에게 임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그 하나님을 웃습게 여깁니다. 그렇고 그런 하나님이라고 착각합니다. 내가 죄를 짓는데도 지금 당장 그 벌이 나에게 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자기 멋대로 행동합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길이 인내하심을 시험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그 기회는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때가 올 것입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6:25-26)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통한 천국 복음

 

눅 16:19-31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통해서 천국과 지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자가 천국에 가고 어떠한 자가 지옥에 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천국의 모습과 지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분명하게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 자들이 가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옥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러나 대다수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의 장소인 지옥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심지어 신앙인들 까지라도 지옥의 존재를 잘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두렵고 무섭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옥의 이야기를 하면 기분이 상하거나 불쾌하게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외면하여 저주의 형벌에 떨어지는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들은 천국과 지옥의 존재에 대해서 말해야 합니다. 천국은 부자라고 해서 가는 것도 아닙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가는 것도 아닙니다. 마치 부자가 가는 곳인 줄 착각하는 자들에게 눅18:25절에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이 천국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천국은 재물의 많고 적음 때문에 가는 곳이 아니라 믿음으로 가는 곳임을 말씀해 줍니다.

1. 성경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들에 대해 어떻게 평가합니까?

첫째, 부자에 관해서,
① 돈이 많은 부자라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은 아니요, 못 가는 것도 아닙니다.
② 돈으로 천국과 성령을 사려고 한다면 저주를 받습니다.
행 8:20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③ 돈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부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④ 재물은 우리들에게 잠시 맡긴 것으로 하나님의 축복이기도 합니다. 선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잠14:24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그 미련한 것이니라.”
⑤ 때로는 재물이 하나님 믿는 것을 방해하는 수도 있습니다. 마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가난한 자에 대하여,
① 가난하다고 해서 천국 못 가는 것은 아니요, 그렇다고 천국 가는 것도 아닙니다.
② 가난이 게으름의 표지일 수가 있습니다.
잠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시 17:14-15절에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 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공동번역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흥청거리며 사는 자들의 손에서 이 몸을 구하소서. 나는 떳떳하게 당신 얼굴을 뵈오리이다. 이 밤이 새어 당신을 뵙는 일, 이 몸은 그것만으로 만족합니다.”

2.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통한 천국과 지옥 (19-31절)

사람의 대조된 삶의 방식은 어떠했습니까?
① 부자는 이 세상에서 호화롭게 연락하며 살았습니다(19절).
19절에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배옷은 금값에 10배에 해당된 사치품이었습니다.
② 거지는 이 세상에서 비참하게 살았습니다(20-21절).
물론 비참한 삶이 천국가는 조건은 아닙니다. 거지의 이름은 ‘나사로’입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이 도우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이 땅에서 비극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죽었습니다.
① 죽음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합니다.
히 9: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억하면 괴롭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망각하면서 삽니다. 그러나 그에게 죽음과 심판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② 거지는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 품에 들어갔습니다(22절).
여기 아브라함의 품이란 표현은 하나님이 계신 천국을 의미하는 유대적인 표현입니다.
③ 부자도 죽어 음부의 불꽃 가운데로 들어갔습니다(23절).
여기 음부란 영원한 고통의 장소인 지옥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분명히 죽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죽음 이후에는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살한다고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 죽음 이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를 영접한 우리들은 이 세상을 떠나 죽으면 반드시 천국에 간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불신자들은 지옥에 간다는 것도 확신해야 합니다.

부자가 음부의 고통 속에서 간청합니다.
① 간청의 시기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 시기는 이 세상에 있을 때입니다.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 때입니다. 죽으면 그 기회는 없습니다. 차단됩니다. 기회가 주어질 때 우리들은 하나님을 잘 믿고 봉사해야 합니다. 그 기회가 다하는 그날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② 부자는 음부의 불꽃 가운데서 도움을 호소하지만 거절됩니다.
24절에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입니다.”
③ 거절 이유는 그가 이 세상에 살았을 때 이미 좋은 것을 다 받았습니다.
눅 16:25에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④ 영원한 고통의 형벌 속에 있어야 합니다.
26절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한 번은 윌리암 뿌리 대장이 구세군 사관 졸업식에서 학생들에게 설교하면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신학 훈련을 마음대로 시킬 수 있다면 이곳에서 4년 동안 공부하도록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 지옥에 단 10분 간이라도 고통을 맛볼 수 있게 한다면 여러분들은 열광적인 전도자가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지옥에서 영원토록 고통 가운데 빠져 몸부림칠 영혼들을 보아야 합니다.

음부에서 부자가 아직 세상에 있는 자기 형제들을 위해 간청합니다.
① 성경(기독교 종교)은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위해,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② 나사로를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어 음부에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합니다(27-28절).
③ 그러나 그 요구는 거절됩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다고 합니다(29절).
④ 죽은 자가 그들에게 가면 회개할 것이라고 부자가 말합니다(30절).
⑤ 그러나 말씀을 듣지 않는 그들이 죽은 자가 살아난다고 해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31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에 등장한 거지 나사로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인 나사로와 이름이 같습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말을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오히려 패역한 사람들은 나사로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뜻을 성경을 통하여 나타내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말씀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복음을 무시한 자들은 결코 핑계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종들을 부지런히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인줄 알아야 합니다.

3. 부자와 거지 나사로는 누구를 위한 비유이며, 무엇을 말씀한 비유입니까?

① 부자란 당시 예수님을 거부한 유대인들입니다.
눅 16:14절에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인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오늘날 나는 교회에 다니지만 유대인들과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에 다닌 사람이 교회 다닌 사람을 조롱합니다. 주의 종을 비난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런 행동을 한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② 거짓 나사로는 유대인들에 의해 거부되었던 천하고 죄인들로 취급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의미합니다.
③ 그러나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④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란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는 자입니다.
⑤ 반드시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말씀해 줍니다.

말씀에로 초대

어떤 사람이 사형 판결을 받아 내일 아침에 교수대에 서야 할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교도소 교도관이 와서 “당신을 위하여 사면령이 떨어졌소”하면 그 사람은 거스릴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내 문제를 생각할 10분만 주시오”라고 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는 펄쩍펄쩍 뒤면서 기뻐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바로 이런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지체하지 마십시오. 나중으로 미루지 마십시오. 지금 결단해야 합니다. 지옥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면서 지옥 가도 좋다는 말을 함부로 합니까? 하나님의 품에서 결코 떨어져 나가지 마십시오. 실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7:21절에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많은 무리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으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는 말은 예수님 자신이 천국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새 언약의 피


본문 눅 22:14-23

오늘 우리는 성찬식을 거행하려고 합니다. 성찬이란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하시고 명령하신 바 떡과 포도즙을 주고 받음으로써, 그의 죽음을 증거하는 성례, 즉 거룩한 예식입니다. 이 성찬에 합당하게 참여하는 자는 영적으로 주의 살과 피를 마심으로 은혜가 됩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연합과 교통이 확고해지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자녀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 세상을 힘있게, 복음을 증거 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본문 말씀을 통하여 이것이 의미한 바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12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는 장면으로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십자가를 짊어 지시는 일을 앞에 두시고 그 제자들에게 자신이 바로 어떤 존재로 이 세상에 오셨음을 미리 시청각적으로 알려주신 말씀입니다.

1. 구약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 

구약 출애굽기서에서 유월절을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 하고 난 이후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이스라엘을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애굽에서 그 구원하시는 마지막 날 밤에 애굽의 모든 장자나 첫 열매 첫새끼를 심판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설주에 뿌린 어린양의 피 때문에 죽음의 사자가 그냥 지나가는 그런 여호와의 심판과 구원의 밤을 기억한 절기가 바로 유월절입니다.
그래서 출12:13에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계속해서 출12:14절에는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지니라”고 합니다.
이 절기 때는 누룩 없는 무교병을 먹기 때문에 무교절이라고도 합니다.  이같은 절기는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 성경에 어떻게 예언되어 있는가를 말씀해 주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5-16절을 보시면,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구약의 유월절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자신이 유월절 어린 양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기 전, 즉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이 유월절에 참여하시므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2. 흠없는 어린양 되신 예수님

구약 성경에 보면 어린 양은 흠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흠이 없다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생겼던 결함이나 후에 외형적으로 생기는 상처나 흠집이 있으면 안됩니다. 오직 깨끗한 양을 준비해야 합니다.
벧전1:18-19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유월절 흠없는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요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 받게 하는 마지막 밤을 여호와의 밤은 우리들에게 무슨 진리를 보여주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순히 애굽에서 구출 받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유일한 목적이라면 무엇 때문에 죽음의 천사가 와야 하고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발라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어린 양의 희생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원받게 하여 주시므로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진정한 구원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역시 죽어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여호와의 능력이 어린 양을 통하여 죽음을 극복하게 되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이든지 타국백성이든지 구별이 없습니다.

3. 선택된 약속의 백성

유월절에 희생된 어린양의 고난의 떡을 먹기로 작정된 자들은  이제 모두가 여호와의 약속 안으로 들어온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요, 바로 구원의 백성입니다. 이들의 한결 같은 경험은 죽음 속에서 살아난 자들입니다. 이들은 어린 양의 희생의 피를 결코 그들의 기억 속에서 잊으면 안됩니다. 그 사실을 망각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됩니다. 또한 새롭게 전개될 이스라엘에게서 제거되는 아픔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에서 어떻게 성취되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된다는 진리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이 죽음을 경험했어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어린 양은 곧 그들이 살아 남을 수 있는 있는 절대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실체는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개입되지 않아야 합니다.
오직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에 놓여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힘으로서도 아니요, 인간적인 방식으로도 아닌 하나님의 힘, 혹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형성되고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교회라고 하는 건물 안에 일정하게 주기적인 날짜를 정해 놓고 출입한다고 해서 구원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장소의 이동이 우리들의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그가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피를 절대적으로 의지했느냐는 것입니다. 처절한 멸망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영생과 구원을 체험한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한 “새 언약”입니다.
이제 우리는 구약의 짐승의 피를 통한 그림자 적인 언약이 아니라 실제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언약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4. 기념하라.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용서 해 주시기 위해서 어린양으로 하나님께 드려졌음을 항상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위해서 오늘 본문 19절에 보시면,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합니다.
기념하는 일입니다. 무엇을 기념합니까? 이 성찬식을 통하여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흠없는 어린 양으로 하나님께 드려졌음을 기억하면서 그 구속의 은총과 하나님의 사랑을 늘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념하는 일”입니다.

열매맺는 신앙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예식에 거룩하심과 경외하심으로 동참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신앙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요12:24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제 우리도 예수님의 정신으로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헌신하고 충성하여 봉사할 때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요15:7-8)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예수님의 제자도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세례요한이 증거한 그리스도

 

요 1:19-34

원님이 한 번은 나귀를 타고 한 동네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나귀등에 타고 가신 원님을 보자 모두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습니다. 그때 나귀는 자신에게 절을 하는 줄 알고 교만을 떨다가 매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무엇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까? 종이 주인의 영광을 가로챌 때 주인으로부터 그 종은 제재를 당합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설교자만큼 불쌍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강단에서 자기 말을 내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강단에서 나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증거 하는 사람입니다. 즉 자신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만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상적으로 보면 불행한 사람일지 모르지만 신앙으로 보면 이것만큼 영광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참으로 불행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용한다고 생각해 보라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종은 주인의 영광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들은 하나의 종들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 영광을 우리가 가로챈다면 거기에는 응분의 대가가 있을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은 세례요한이 어떻게 쓰임을 받았습니까? 무엇을 증거 하기 위하여 세례요한이라는 사람의 생애를 허락하셨습니까? 또한 세례요한이 증거한 내용이 우리들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런 문제에 관해서 살펴보면서 우리들도 무엇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는지에 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무엇을 우리들에게 소개해 주시기를 원하시는가에 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19-23절).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몸부림칩니다. 그 욕심 때문에 끊임없이 죄를 짓다가 이 세상을 떠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죄로 말미암아 나오게 된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잘못인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께 잘못을 범해 놓고도 잘못한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란 자신의 욕심들이 자기 죄에서 나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폭로되어야만 우리들은 비로소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증거 하는 자가 됩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처음부터 예수님에 대해서 드러내 놓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그 첫 번째 증인입니다. 그 증인에 의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합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을 온전히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들리는 말씀, 볼 수 있는 말씀으로 나타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세례요한이었습니다. 그 요한은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그는 약대 털옷을 입고 음식은 석청과 메뚜기를 먹었다고 합니다(마3:4).
또한 그는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선지자로 생각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파견해서 조사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1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요한에게 묻기를 “네가 누구냐”라고 했습니다.  이런 질문이 왜 나왔습니까? 누가복음3:15절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누가복음 3:15절에 보시면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15) 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구약에서 예언하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지만 결국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요한이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물어 보게 된 것입니다. 요한은 즉각적으로 ”나는 메시아(그리스도)가 아니다”(20절)라고 밝혔습니다. “네가 엘리야냐?” “나는 아닙니다.” “그러면 네가 그 선지자냐?”라고 또 질문했습니다(21절).
신명기 18:18절에 예언된 “그 선지자”인지 물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세례요한은 분명히 답변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단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합니다(23절). “광야의 소리”라는 말은 요한이 메시아가 아니라는 말이 담겨져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구약 이사야 40장의 상황으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분명히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소리라고 합니다. 소리는 우리들에게 보이는 모습이 아닙니다. 소리는 소리로써 사명을 감당할 뿐입니다.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모습으로 보이는 말씀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모든 관심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리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들은 여기서 세례요한이 이런 정신을 갖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반대로 세례요한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했기에 그런 겸손한 행동을 취했습니까? 우리가 관심을 갖고 보아야 하는 부분입니다.

2. 그리스도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증거함(24-31절)

세례요한은 이사야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사야 40:3-5절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이 볼 것이라고 했는데 그 여호와의 영광이 지금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여기서 말한 어린 양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제물로서 드려진 어린 양입니다. 또한 우리들의 죄를 위해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사53:7)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린 양은 구약성경에 보면 제사를 드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희생의 재물로 드려진다. 예수님이 어린 양으로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것은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하나님께 재물로 드려지면서 하나님께 희생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했습니다.
여기 죄를 ‘지고 가다’는 말은 ‘덜어주다’,‘벗겨 주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죄를 지고 멀리 우리 눈에 보이지 않도록 치워 버렸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의 죄를 멀리 치워 버리셨습니다. 다시는 기억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의 죄를 해결해 주시는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이같은 어린 양의 재물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먼저 선언했던 것입니다. 세상은 어두움에 속해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누군가가 조금 위대하게 보이면 제각기 자기가 원하고 기다리는 모습으로 메시아가 온 것으로 착각하고 메시아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무엇이 복음인지 알았더라면 그렇게 헤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도 “그동안 내가 찾는 진짜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무엇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을 못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죄를 대속해 주신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에 관해서 혹은 자기 자신에 관해서 알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정죄 했던 어두움의 세상을 알고, 우리 자신을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어두움의 세상을 알고 있다면 우리들은 그 세상을 멀리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하면서 우리가 과연 예수님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세상이 요구하는 것을 부정해야 합니다. 세상은 언제나 죄 짓는데는 정보가 빠릅니다. 그런 죄된 세상을 부정하려면 우리 자신들부터 부정해야 합니다.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우리들은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분은 ‘나보다 앞서 계시다’라고 했습니다.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을 증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성부 하나님께서 증거하신 그리스도(32-34절)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이 음성을 들었습니다.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요1:32-34)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예수님 위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다”고 합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다는 것은 성령이 비둘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비둘기 같이 임하셨다는 것은 이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화평하게 하시려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비둘기는 거룩의 상징입니다. 또한 좋은 소식을 제공해 줍니다. 하나님 쪽에서 제공한 좋은 사랑의 선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8장에 보면 노아는 비둘기를 사람들보다 앞서 보내어 좋은 소식을 가져오기를 기대했습니다.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이와 같은 일을 하실 것을 증거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예수님 위에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성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증거하고 계십니다. 고전12:3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에게 성령께서 역사 하셔야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구주이심을 믿게 됩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도록 증거해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한다면 이미 내 안에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해 주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임이 분명해 졌습니다. 의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해 주셔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보다 더큰 복이 있겠습니까? 천하를 얻고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멸망받아 지옥간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말씀에도 초청

오늘 우리들은 세례요한을 배우기 위해서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 세례요한을 통하여 우리가 누구를 소개 받고 있습니까? 더 정확히 표현해서 하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통하여 무엇을 보여 주시기를 원하시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들도 그 세례요한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았을 때 어떤 삶의 모습을 보였습니까? 우리들이 관심을 가지고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그토록 예언해 주셨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말씀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린 사람들이 메시아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거부한 자들에게 세례요한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오시리라고 예언했던 그 메시아라고 합니다. 우리들의 죄에서 구원하신 어린 양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세례요한의 외침을 통하여 기록된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들을 뿐만 아니라 이분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원래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들의 죄를 담당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들의 죄 때문에 마치 어린 양과 같이 희생을 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였습니다. 이같은 사랑으로 우리들을 부르셔서 사명을 주셨습니다.
요15:16-17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을 택한 이유를 두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들에게 항상 신앙의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우리들에게 떠나지 않게 하려고 우리들을 택하셨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그 열매들이 있습니까? 둘째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위해서든지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려고 우리들을 택해 주셨다고 합니다. 아울러 이 말씀을 우리들에게 하신 것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그렇게 살 뿐만 아니라 우리 이웃과 더불어 서로 사랑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우리 이 말씀 안에서 승리하며 삽시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오신 예수님

 

요4:7-14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천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가진 자나 높은 사람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 일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높은 사람이나 가진 사람이 가난하고 천한 사람을 찾아가는 것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세상이 각박해 졌다. 내가 가진 것이 없고 힘이 없다면 나를 친구 삼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권력과 재력을 많이 가지고 있다면 서로 가까이하려고 할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상대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된다면 냉정하리만큼 외면하는 것을 보았고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은 “없는 척하지 말고 있는 척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없는 척한다거나 불행하게 보이면 동정해 주고 도움을 줄 것 같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상대에게서 무엇인가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한다면 관계를 맺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비정한 원리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절대로 상대에게서 무슨 도움을 받기 위해서 접근한 일은 없습니다. 도움을 받기 위해서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아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시대 천하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셔서 함께 해 주셨습니다. 위로해 주셨습니다. 눈물을 닦아주시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소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시므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들의 구원자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 주님이 2천년 전에 이 땅에 무엇 때문에 오셨는가를 살펴봄으로 오늘 우리들에게 주신 복음의 기쁜소식을 누시기를 원합니다.

1.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오신 예수님(4-5절)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여러 지역을 다니시면서 복음을 증거하셨던 사실을 살펴보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아무렇게나 계획도 없이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떤 분명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시고 다니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반드시 사마리아를 통행하셨습니다.
본문 4절에 보시면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시면서 “(반드시)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시기 위하여 다른 길로도 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를 통과하시는 것이 필히 되어져야 할 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사마리아에서 반드시 자신을 나타내어야(계시해야) 할 뜻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로 가셨고 그곳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수가라는 동네에 야곱의 우물이 있는 곳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기다리셨습니다. 여인을 만나자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유를 본문 9절에서는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둘째, 본문의 사건이 기록된 당시의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이같은 말씀을 이해하려면 그 시대 상황을 좀 이해해야 합니다. 즉 이 본문이 기록될 당시의 배경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함 때에 와서 나라가 둘로 갈라섰습니다. 북쪽은 이스라엘이라 했고 수도는 사마리아였습니다. 남쪽은 유다라고 했고 수도는 예루살렘이라 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경에 앗수르의 포로로 잡혀가 돌아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사마리아 성에 앗수르 사람들을 이주시켜 당시 잡혀가지 않고 남아 있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함께 살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북쪽 이스라엘은 원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순수한 유대 혈통을 보존할 수 없었습니다. 혼혈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남쪽 유다 사람들은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신약 시대 유대인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 돼지 처럼 취급했습니다. 또한 반대로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적대시하였습니다. 이런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접근하자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9절)고 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이유 때문에 당시 유대인들로부터 사마리아 인들은 무시를 당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 대제사장, 장로들, 사두개인들, 그리고 서기관들은 귀족층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정치적 권력을 배경으로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누리고 살았습니다. 이들은 613개조항에 달하는 방대한 생활 규제법을 만들었습니다. 안식일 법만 해도 꼭 지켜야 할 39개 조항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규례들을 다 준수하려면 어느 정도의 생활 수준이 있는 기득권 층이 아니면 불가능하였습니다.
포도원 비유 등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인 하루벌이 품팔이꾼, 목동, 어부, 떠돌이 장사꾼, 창기, 그리고 세리 등의 사람들은 도저히 지키기 어려운 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과 규례 자체가 일반 사람들의 삶을 전혀 무시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죄의식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처절한 상황이었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본문에 등장한 수가성 우물가에 등장한 여인도 이런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만족과 향락을 위해서 여섯 번이나 결혼을 해야 하는 여인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 여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혼할 수 있는 권한은 없고 이혼을 당할 수밖에 없는 여인, 그래서 먹고살기 위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여인의 가련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 여인에게 예수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그 여인이 안고 있는 상징성은 무엇입니까? 그 시대 비참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종교적 기득권에 있는 자들이 613개의 조항을 만들어 죄인으로 매장되어 있는 그들에게 우리 예수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버렸고 외면했던 그 죄인들을 예수님은 말없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진정한 죄가 무엇이고 그 죄에서 구원을 받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희망과 소망의 길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님 자신을 믿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우리들의 위로와 소망이 있습니다. 여기 수가성 여인에게 찾아오셨던 우리 주님은 그 여인과 같은 그런 천한 자리에 있는 우리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오셔서 우리들의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말동무가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들은 얼마든지 그분과 기도를 통해서 만나고 대화를 합니다. 그래서 늘 기도해야 합니다. 그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소망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2. 영원한 생수로 자신을 나타내신(계시)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수가성 우물 가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이 때 사마리아 여인은 달라는 물은 주지 않고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 여인은 자신을 물을 달라고 하는 예수님이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살펴 본 대로 유대인은 사마리아 여인과 상종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절)고 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에 의해서 죄인 취급을 당했던 가냘픈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영원한 생수”로 나타내셨습니다.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으로 “영원한 생수”를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수를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을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살기 위해 몸부림쳤을 것입니다. 또한 반대로 여섯명의 남편을 둘 정도로 쾌락의 만족을 위해서 몸부림쳤을지도 모릅니다. 갈증을 느끼며 만족을 누리지 못하며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갈증과 불만족 속에서도 유대인들의 괄시와 천대에 회의를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여인에게 우리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오셔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생의 말씀, 영생의 생수를 주셨습니다. 
저는 어떤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의 잦은 싸움으로 불안한 정서를 갖고 성장기를 보냈다. 불안한 정서는 그 사람의 성격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친구의 소개로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자 교회 중직의 직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자란 불행한 환경들은 그 사람을 불평과 불만의 사람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교회에서 그는 언제나 부정적인 시각이었고 가슴 속에 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른 성도들과 어울리지를 못했습니다.
저는 그런 그를 치료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있는 대로 대화를 했습니다. 개인 상담을 했습니다. 그의 과거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를 위로하면서 어려서부터 그의 가슴 속에 있는 응어리를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당시에 그 사회에서 가장 천하다고 생각되었던 그런 사람에게도 찾아오셔서 위로해 주시고 영혼의 만족을 주신 예수님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동안 형식적으로 자신의 약점에 대해 보상을 받기 위해 교회 다녔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큰 소리 치는 것이 자신의 자존심을 세워 주는 유일한 길이었고 그것이 삶의 숨통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영혼의 만족과 위로를 받았습니다. 부정적인 시각에서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위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함께 더불어 다른 지체들과 연합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 교회 없어서는 안될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샘물로 오신 우리 주님은 모든 문제의 해답이십니다.

3. 위로와 소망과 희망을 주신 예수님(6-14절)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큰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한 순간의 만남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쓰라린 아픔과 고통은 그 여인을 불행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예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받으면서부터 그의 의식은 깨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 미래에 대한 소망과 희망을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과연 미래에 대한 소망과 희망이 있습니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함 가운데 우리들은 방황하고 있지나 않습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은 필연적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실적 위주입니다. 실적을 내지 못하면서 사회에서 도태되고 맙니다. 낙오됩니다. 그래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실적을 위해 몸부림을 칩니다. 정서적으로 불안합니다. 언제 직장에서 쫓겨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을 얻게 되고 희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형태로든지 나를 붙들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 믿음은 우리들을 담대하게 만들어 줍니다. 꿈이 있고 소망이 있는 자들에게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우리에게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들의 소망과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절대로 우리들을 낙심케 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승리하십시오.

말씀에로 초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멸시와 조롱과 천대를 받고 있는 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위로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제 더이상 희망이 없고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들에게 찾아오셔서 희망과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들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내가 너와 함께 해 주리라”고 하십니다.
왜 우리가 불안합니까? 그분을 진정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믿는 자녀는 마음이 든든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모시고 사는 우리들의 마음은 든든합니다. 희망이 보입니다. 모든 일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나누어주고 싶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이제 그들의 영혼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과 눈이 띄어졌습니다. 죄인에게 찾아오신 우리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내가 그 메시아다

 

본문 요 4:23-26절(4:1-42)

오늘은 요한복음 가운데 특별히 4장 말씀을 통해서 “내가 그 메시아다”라는 제목으로 살펴보면서 우리들의 영원한 생수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이신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그분을 바르게 믿고 있습니까?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과 구원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확인해 보는 그러한 시간이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무엇을 했느냐라는 그분의 활동 보다는 그분이 과연 누구이시며 무슨 목적으로 이 세상에 오셨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 충만한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전체는 이 독생자이신 예수님의 영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섬기고 낮아지고 겸손하신 영광을 우리들로 하여금 발견하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땅에 있는 교회는 어떠합니까? 교회의 모든 제도나 행사가 이 영광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들의 영광을 내세우지나 않았습니까? 상당한 부분에서 삐걱거리고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서 분명한 진리를 깨닫고 분명한 기독교와 구원의 진리를 터득하는 시간이기를 원합니다.

1.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하루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습니다.
예수님: 물을 좀 달라(4:7)
여인: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4:9)
예수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 었으리라(10절)
여인: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11-12절)
예수님: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절).
여인: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절).
예수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16절)여 인:나는 남편이 없나이다(17절).
예수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7,18절).
여인: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19,20절)
예수님: 21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23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21-24).
여인: 여자가 가로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25절).
예수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26절).

3. 사마리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솔로몬’이후 그 아들 대에 와서 나라가 둘로 나뉘어 졌습니다. 그래서 남쪽은 유다,북쪽은 이스라엘이라고 했습니다. 그후 약 250년이 흘러 북쪽 이스라엘이 앗수르 나라에게 멸망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약 2만7천명이 다른 지방으로 쫓겨 가고,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이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을 사마리아인이라고 했습니다. 그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점령해서 마케도니아인들이 거주하게 되어 혼혈이 더욱 더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이방인 취급을 하고 천대시 했습니다.
역대하34장에 보면,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성전을 재건할 때 사마리아인들이 협력할려고 했지만 이방인-혼혈족이라는 이유로 거절 당했습니다. 그 때부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관계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 이교적인 신전을 세우고 거기서 예배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개같이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과 상종하지를 않았습니다.그리고 유대인들의 정결법에는 사마리아인들이 사용하는 그릇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습니다.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어째서 당신들이 상종치도 않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라고 하면서 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결국 이 대화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이신가를 보여줍니다.

4. 지역감정의 벽을 넘어서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대단했습니다.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마리아를 비롯해 이방인들에게는 구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건전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구원이 있을찌라도 그들은 유대인들을 수종들기 위해서 구원시켜 주었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이고 보면 그 유대인들의 오만함이 어찌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거주하는 지역까지 불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 지역을 지나가다가 그 지역을 벗어날 때는 언제나 자신들의 발의 먼지를 터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질문하기를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라고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오히려 자신에게 호의적인 예수님을 의아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 안에서 지역감정의 벽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이제 구원과 거룩이 단순히 유대 지역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구원이 성립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보이지 않는 벽을 예수님은 지금 허무고 게십니다.
지금 우리 교계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이 지역감정의 골이 너무나 깊습니다. 신앙안에서 경상도면 어떻고 전라도면 어떻고 충청도면 어떻고 강원도면 어떻습니까? 일반 세상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야망과 지배욕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지역감정을 마치 교회가 그것을 차용하는 꼴이 되어져 버렸습니다.
광주사태을 지역감정으로 끌고 가는 정치가들의 수작에 몰고가면 안됩니다. 교회가 보는 광주사태는 지역감정으로 볼 것이 아니라 지배욕에 어두워 하나님이 주신 생명까지라도 자신들의 지배욕에 장애가 될 때는 제거하고야 말겠다는 사탄의 음모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에 교회 특정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지역감정으로 교단이 갈라지고 교회 분쟁을 조장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종도 아니요, 그것은 교회라고 볼 수 없습니다. 과거 유태인 학살때 독일교회가 침묵했습니다. 이제와서 그 침묵을 회개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차별당하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동일한 복음의 소식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유대인의 예루살렘에서도 아니요, 사마리인들의 그리심산도 아닙니다.전라도도 아니요,경상도도 아니요, 충청도도 아니요, 강원도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믿음 안에서 모두가 하나 되었습니다. 마귀는 이 하나됨을 파괴하기 위해서 지역감정으로 시험하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고후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5. 메시아 곧 그리스도

우물가에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알아봤습니다. 어떻게 알아보았습니까?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통해서였습니다. 19절에서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입니다”라고 합니다.
25절에 “여자가 가로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입니다”라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27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39절에 보면 사마리아인들이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리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말씀에로 초대

예수님께서 14절에서 자신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생하도록 솟아는 샘물을 주신다고 하자 사마리아 여인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여인이 15절에서 이렇게 답변합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다음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니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예수님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혹 이러한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당장 우리들의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치신 의도대로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요4:41-42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예수님의 의도대로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 은헤와 역사를 35-38절까지의 비유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38절에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사마리아인들에게 구원을 베푸심으로 유대인들이 노력한 것 위에 거져 참여하는 구원의 축복을 이방인들이 누리게 되었다는 은혜의 말씀입니다. 이 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 위에 임한 은혜의 축복입니다. 이 은혜를 늘 간직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유월절 어린양으로
입성하신 예수님

 

요12:12-19

시골에서 아들을 서울에 있는 대학에 보냈습니다. 어려운 시골 살림에 아들을 대학에 보낸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농사를 지어서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노동일을 하고 남의 일을 도와주면서 번 하루하루의 품삯을 모아 아들을 가르쳤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아들이 다니는 대학교로 찾아왔습니다. 아들은 여러 친구들과 함께 아버지를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말 그대로 남루한 옷을 입고 등장한 전형적인 시골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친구가 물었습니다. “이분은 누구시냐.” 그 때 아들이 당황하면서 “시골에서 오신 동네 아저씨야”라고 답변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어리둥절했습니다. 이 참담한 광경에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한 아들의 무지와 허세는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무지와 허세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가 이 땅에 사랑의 징표로 보낸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자존심을 지켜 주기에 예수님은 너무나 초라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초라한 분은 자신들을 책임져 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화려한 정복자도 아니었고 그런 모습으로 오지도 않았습니다.

1. 본문의 배경

요한복음 12:1절은 유월절 엿새 전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려고 한 말씀은 그같은 사건이 있는 다음날 일어난 일입니다(12:12절). 그러니까 유월절 5일전에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들었다”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한 명절이란 유월절입니다. 그 유월절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게 됩니다. 그래서 유월절이라는 절기를 맞이하여 많은 사람들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모여 들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유대인들의 구원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구원이라고 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명절에는 타지역에 흩어져 있던 모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절기에 동참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절기 때 예루살렘을 향하여 성지순례 길에 오릅니다. 그들은 성지인 예루살렘을 순례해야 구원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제 우리는 성지순례라는 말을 사용하면 안됩니다. 그 용어는 구원관에 대한 문제가 생깁니다. 그냥 현지답사 내지는 관광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월절 절기가 지난 후  49일째가 지난 50일째에 오순절의 절기까지 지키고 가려고 유월절에 예루살렘에는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유월절에 참석하고 약 50일 정도를 기다리면 두 번의 절기에 동참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구원은 더욱 확실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독 유월절 절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이같은 유월절 명절 때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처럼 절기에 동참해야 구원이 있기에 다른 유대인들처럼 절기에 동참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오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오신 목적 그 자체가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 것인가를 살펴보는 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2.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스가랴 9:9절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은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새끼”를 타고 오실 것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을 위해서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지금 유월절 어린양으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복음 12장에서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신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을 위해서 오신 메시아, 즉 왕이라고 합니다. 메시아란 구약의 표현이고 그리스도란 신약의 표현입니다.
왕인 메시아는 구약성경에서 어떤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까? 유월절 어린양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 그리고 “겸손”한 분으로 오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려고 한 본문은 이같은 예언대로 오신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린양 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희생을 드림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을 이루시는 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 때문에 예수님은 유월절 절기에 맞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결국 예루살렘 입성은 십자가에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희생을 당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마지막 밤을 보내면서 유월절 절기를 지켰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애굽의 장자를 다 죽일 때 이스라엘의 장자는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 때문에 살아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어린양의 피 때문에 우리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처럼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유월절의 성취자로 오신 예수님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 많은 군중들이 유월절 절기를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했다는 것은 아직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유월절을 지킴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아파트를 건축할 때 먼저 모델 하우스를 짓습니다. 모델 하우스를 통해 장차 건축할 아파트의 본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본 아파트가 다 건축하면 모델하우스는 헐어버립니다. 이제 모델 하우스는 본 아파트로 흡수 통합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약의 유월절은 모델하우스에 해당됩니다. 그 유월절이 보여주고자 하는 본 모습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면 이제 그 유월절을 지킨 것이 아닙니다. 그 유월절 절기의 의미는 이제 예수님 안으로 흡수 통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절기에 자신이야말로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을 위해서 오셨음을 알게 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3.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며 겸손한 왕으로 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처럼 애굽에서 430년 동안 억압받는 자기 민족을 구출해 준 지도자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리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13절)라고 소리칩니다. 유대인들의 군중들이 기대한 메시아는 힘으로 로마 정부를 전복시키는 능력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메시아이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왕이요, 메시아라고 한다면 모세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유대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정으로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의 의도를 몰랐습니다. 제자들 조차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알게 되었다(16절)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야말로 세상을 정복하는 그런 힘을 가지고 오신 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나귀는 고귀한 동물로 분류된 것은 사람들의 짐을 운반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복자가 자신의 권위를 내세울 때 종마를 타고 도시에 입성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구약이 예언한 그 분이라는 점입니다. 또다른 의미는 예수님은 그런 힘의 정복자도 아니요,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그런 거창하고 화려한 왕으로 오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평화의 왕, 겸손한 왕으로 오셨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겸손한 왕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해 시켜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들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비롯됩니다. 그 단절과 파괴는 우리들의 삶을 파괴합니다. 불안하게 합니다. 우울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예수님께서 좋은 관계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하나님과 우리들과의 관계가 장상적이지 못할 때 나타납니다. 하나님과 우리와 관계가 좋다면 우리들의 삶의 모습은 달라지게 됩니다. 좋은 신앙의 열매가 있게 됩니다.
나의 신앙생활의 열매들이 무슨 열매인가를 확인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육신의 열매, 나쁜열매가 맺어지고 있다면 그는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정상적인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회개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4. 예수님의 주변에는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 군중들 속에는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구경꾼들도 있었습니다. 따르기는 따르는데 예수님을 오해하고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거부하는 바리새파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이들은 종교적인 특권을 누리고 살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많은 군중을 거느리고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자신들의 기득권의 침해를 받을까 염려하는 세력들이었습니다(19절).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47-50절에서 고기를 잡는 그물 비유에서 그물 안에는 온갖 고기들이 있지만 육지로 가져가서 그 고기들을 분류하듯이 마지막 종말에도 그런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주변에 다양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자들은 분류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면서 믿지 않고 있다거나, 오해한 자들은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모른다는 무식이 핑계될 수 있는 조건이 전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어떠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자들입니까?
우리들의 삶의 모습들과 신앙생활의 반응들을 보면 전혀 예수 믿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다는 것이 두렵습니다. 여전히 싸웁니다. 여전히 상대의 수치와 상처를 공개하고 폭로합니다. 시기합니다. 여전히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과연 예수 믿는 자들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들은 지금 알곡과 가리지가 함께 공존하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알곡입니까 가라지입니까? 알곡의 반응들이 나의 모습 속에서 나타나고 있습니까?

말씀에로 초대

이상과 같은 말씀이 오늘 나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나와 상관없는 먼 이야기 정도로 생각한다면 나에게 그 어떠한 변화의 모습도 없을 것입니다. 나의 신앙생활의 열매들이 나의 믿음에 따른 반응인지 아닌지를 묵상하면서 문제의 원인을 진단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14:25-28

조그만한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장님이 있었습니다. 요즈음 어려운 경제현실 속에서 사업하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입니까? 직원 가운데 한 사람이 뇌졸증으로 쓰러졌습니다. 사장의 마음은 더욱 편할 날이 없습니다. 끝내 그 사장은 정신 이상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 사장은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는 불행한 일을 맞이했습니다. 일을 해 주고 돈을 수금해야 하는데 할 수가 없습니다. 아내가 돈을 받으려 가면 다 주었다는 것입니다. 경리를 두지 않고 남편이 모든 것을 관리했기에 모두가 오리발을 내민 것입니다. 장부를 보여주어도 그것은 이미 갚았다는 것입니다.
IMF상황 속에서 우리들이 받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건전한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 우리들을 병들게 합니다. 정신 이상자가 되게 합니다. 그래서 정신병원의 신세를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온 가족이 함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마음의 평안은 이미 사라진지 오랩니다.
가정이 무너지고 사업체가 무너집니다. 얼마나 불안합니까? 불안, 근심, 걱정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모든 의욕이 사라집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본문 말씀은 우리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힘이 됩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1.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25-26절)

본문 25,26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이 말씀 속에서 우리들은 다음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는 제자들과 늘 함께 하셨습니다(25절).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과 늘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약하고 가난하고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는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많은 기적들을 통하여 인간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을 보여 주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믿는 당신의 제자들을 부르셔서 함께 해 주셨습니다. 직분을 맡길 때에는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셨습니다. 특별히 요한복음 14장에 와서는 이 땅에서 마지막 고별사를 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4:1)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 시점에서 마치 아버지가 운명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식들에게 유언을 남긴것처럼 예수님은 이제 마지막 유언과 같은 고별사를 하고 계십니다.

둘째,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26절).
예수님께서 그동안 제자들과 함께 할 때에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그 제자들 곁을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런 말을 듣고 있던 제자들은 걱정했을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들과 늘 함께 계셨던 예수님이 떠나신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하지” 이런 걱정과 근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불안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떠나가시면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제자들을 지켜 보호해 주실 보혜사를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보혜사는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비록 이 땅을 떠나가도 우리들을 고아처럼 버리시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약속이 오늘 우리들에게 이미 성취된 줄로 믿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말씀합니다. 보혜사를 ‘파라클레토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우리말로 번역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우리 개역성경에서는 한문을 써서 ‘보혜사’라고 합니다. 이 말은 은혜로 우리들을 보호해 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파라클레토스’는 법정에서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혼자서 검사와 변호사의 역할을 감당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검사이신 성령께서 그들의 죄악대로 정죄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죄 용서를 위해서 변호해 주시는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복음 사역은 예수님이 비록 이 세상을 떠날지라도 예수님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셔서 계속 예수님의 복음 사역을 진행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오늘 우리 곁에서 우리들을 도우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게 하십니다. 비록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들과 늘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셋째,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십니다(26절).
17절에 보시면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합니다.
성령을 보혜사라고 하는데 그 보혜사란 진리의 영이라고 합니다. 세상은 그 영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 영은 세상을 향해서 정죄의 기능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그 성령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거하심”이라고 합니다. 또한 “우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의 마음 속에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이 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 영으로 함께 한 자들과 세상 영으로 함께 한 자들은 다릅니다.
로마서 8:9절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또한 성령님께서는 우리들이 이미 들었던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우리들이 말씀을 듣고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어려움에 빠져있을 때 이미 들었던 말씀이 생각나 위로를 받습니다. 이미 들었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신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2.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27절)

본문 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첫째, 우리들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27上).
여기서 평안이라는 말은 ‘에이레네’라는 말입니다. 당시 이 말은 어떤 물건 두 개를 함께 묶을 때 사용된 용어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같은 용어의 세상적인 의미를 다 제거합니다. 그리고 나서 어떻게 새롭게 사용하고 있느냐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회복되기 위해서 예수님과 우리들과의 연합된 상태에서 느끼는 감정을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평안이라고 합니다.
이 ‘평안’은 구약적인 용어로 ‘샬롬’입니다. 즉 ‘평강’입니다. ‘살롬의 평강’이 곧 ‘평안’인데 이 평강을 누가 주시냐면 예수님께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도 여전히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주십니다.

둘째, 그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릅니다(27절 中).
세상적인 평안은 어떻게 오습니까? 물질로, 명예로, 권력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이런 물질과 명예와 권력이 사라지면 평안은 사라집니다. 또한 그런 물질과 명예와 권력을 소유했다고 할지라도 참 평안은 없습니다. 오히려 불안합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그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더 많은 고통과 근심은 필연적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주신 평안, 성령님을 통해 주신 평안은 영원합니다. 물질과 명예와 권력과 상관 없이 옵니다.

셋째, 주님의 평안을 받은 자들은 마음에 근신하지 않고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27절 下).
성령님을 통해 주신 주님의 평강이 우리들에게 임할 때 우리들은 마음에 근심이 사라집니다.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평강이 나의 마음 속에서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경제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들을 시험하고 있지는 않은지 묵상해 보십시오.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계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찌 우리가 어렵다고 교회를 무관심할 수 있습니까? 어려워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 시험만 잘 치르면 우리 주님이 많은 복으로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세상과 다른 평안을 주십니다. 그 평안을 받은 자들은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감당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복이 여러분의 가정에, 사업장에, 직장에, 우리 교회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3.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28절)

28절을 보시면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에게 주님의 평안이 임할 때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기쁨과 평안은 신앙의 열매입니다. 믿노라 하면서 기쁨이 없다면 그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잘 영접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반드시 기쁨이 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쁨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살펴봅시다.
구약 시대에 성도들이 장차 오실 메시아를 믿었습니다. 이것이 구약 성도들에게 구원 받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은 이미 구약의 예언대로 오신 예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장차 오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다시 오실 재림주로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들의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낙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것입니까? 술을 마시며 즐길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들은 오직 장차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에 즐거워 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지금 비록 고통 스러울지라도 만왕의 왕으로 오실 예수님은 심판주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계시록 22:20절에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멘.

말씀에로 초대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했습니다. 또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고 했습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하셨습니다. 이같은 평안의 복을 받으십시오. 이세상이 제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

 

요 17:1-9

얼마전에 한 젊은이가 간암을 앓고 있던 있던 30억원대 부자인 아버지가 사망하면 계모와 이복동생이 재산을 독차지할 것을 우려해 아버지와 계모를 청부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물론 아버지로부터 냉대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재산을 노려 아버지를 청부 살해한 파렴치한 아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왜 이렇게 미워하고 사람을 죽이는 비극적인 일들이 벌어지습니까? 세계 각처에서 벌어지는 테러와 그 테러를 보복하기 위해서 감행하는 미국의 폭격으로 피를 흘려 죽어 가는 사람들의 형제들은 피의 보복을 결의하며 미국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암담한 현실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품을 떠나 타락한 인간이 받은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저주의 형벌들은 무서운 지옥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지 않고는 그 어떠한 인간도 고통과 피의 보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살인하는 악한 마음에서 돌이키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구주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을 화해시키신 중보자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고 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의 형벌을 받고 있는 우리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는지를 살펴 봅시다.

1. 영광스러운 일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신 예수님 (1-5절)

첫째, 아버지의 때가 가까이 왔으니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사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옵소서-미래-(1-3)
아버지의 때란 어느 때를 말합니까?
① 십자가를 통한 영광의 때입니다.
② 복음서는 이 때를 지향해 왔습니다.
③ 예수님의 죽음은 영광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로 가기 직전에 하신 기도에서 예수님의 가장 깊은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성도들의 기도를 보면 그 기도 속에는 여러분들의 관심사가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기도에도 예수님의 관심사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오직 아버지의 영광이었습니다.
요한복음 초두에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인간이 범죄함으로 아버지의 영광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이름,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습니다. 어떠한 인간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이 일을 이루고자 하신 것입니다. 아들의 십자가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원하신 바가 십자가였습니다.

아들은 어떻게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습니까? (2절)
①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들에게 생명을 주심으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②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권세를 행사하시므로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버지의 영광이 이 땅에 나타나는데 그 십자가는 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생명을 제공합니다. 예수님께서 이같은 생명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사탄을 결박할 권세를 주셨습니다.
사탄의 세력들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십자가의 피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 십자가는 곧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이 표현된 현장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사탄의 세력을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언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탄 마귀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 때 승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전도해서 사탄의 노예에 있는 자들을 해방시켜 구원의 길로 인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영광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어떻게 얻습니까? (3절)
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②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③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곧 구원입니다.
잠 3:6에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직역:‘그를 알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잠 11:9에 “사특한 자는 입으로 그 이웃을 망하게 하여도 의인은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합 2:14에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고 했습니다.
호 4:6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고 했습니다.

둘째, 이 세상에서 하라고 하신 일을 완성함으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사옵니다 -과거-(4절)
①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지시하신 일을 완성함으로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② 그 일이란 “심판하는 일”과 “생명을 주는 일”입니다.
요 5:21-22절에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요 5: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시점으로 해서 그 이전에 줄곳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다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는 사역이었습니다. 그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자들에게는 심판이 선언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원 얻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영생이 선언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이었습니다.
복음이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이요, 믿는 자들에게 영생입니다. 심판과 영생은 복음의 양면성입니다. 우리들이 복음만 증거하면 심판 받을 자와 구원 얻는 자가 자연스럽게 결정되어 나타납니다. 그 결과를 하나님께만 맡기고 말씀만 전하자. 그리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입니다.

셋째, 지금 나를 영광스럽게 해 주옵소서 -현재-(5절)
① 아들은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영광스러운 분이셨습니다(5절 上).
요 1: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②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영광스럽게 하옵소서(5절 下).
부활 승천에 대한 기도, 십자가를 지신 이후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실 것입니다.

2.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기 위해 하나님과 예수님,제자들과의 관계를 말씀한다(6-8).

①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습니다. 아버지의 사람인 그들을 내게 주셨습니다. 그들은 아버지 말씀을 순종했습니다(6절).
② 내게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왔음을 알았습니다(7절).
③ “∼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아버지께로부터 오셨음을 알았기 때문에 믿었습니다(8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허락한 하나님의 자녀들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얻는 제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았기에 믿었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예수님에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십니다. 우리들을 위한 예수님의 중보기도가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천상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들을 다스리십니다. 어떻게 다스리시고 인도하시습니까? 그것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들을 인도하십니다. 우리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우리들을 인도해 주십니다.
어떤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경찰서장이 있었습니다. 곧잘 헌금도 잘하고 목사님께 기도도 부탁하고 교회 행사에도 잘 참석했습니다. 그에게 까닭 없이 경찰병원 과장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위해 충성을 다했는데도 좌천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실망했습니다.
“교회 충성해 봐야 별 수 없더라”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야말로 시험에 들었습니다. 교회도 외면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 후에 그 사람이 목사님에게 찾아왔습니다. 찾아와서는 “목사님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좌천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고 하면서 100만원을 헌금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알고 보았더니 그가 경찰서장으로 있던 지역에 탈옥수 신창원이 나타났는데 그를 잡지 못해서 자신의 후임 서장이 파면조치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계속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파면을 당했을 것을 생각하니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간증들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원망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공로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우리들에게 형통의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3.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중보기도 (9절)

이 기도는 19절까지 이어집니다.
① 내가 그들을 위해 구하옵니다.
②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해서
③ 그들은 모두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
9절부터는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구체적인 기도가 시작됩니다. 우리들의 구체적인 기도는 무엇입니까?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입니다.”(요17:25)


예수님의 중보기도

 

요17:11-19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임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수 없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만이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영생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인 멸망 가운데 빠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유월절을 기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유월절 의식에 참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직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의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요한복음 18장-19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죽으시기 전에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위해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 기도 중에 일부가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기로 한 본문인 요한복음 17:9-19절 말씀입니다.

1. 중보자이신 에수님의 중보기도

딤전2:5절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13절에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이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영광을 얻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들은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까?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제가 다른 교회 장로님에게 “장로님, 백만원만 빌려주세요.  얼마 있다가 갚아 드리겠습니다”라고 부탁했다고 합시다.  그때 장로님은 “목사님, 그러면 교회 집사님을 보내세요”라고 합니다. 이 때 제가 우리교회 집사님에게 “아무개 장로님에게 가셔서 제가 보내서 왔다고 하십시오. 그러면 무엇을 줄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그 심부름을 하는 집사님은 장로님에게 가서 뭐라고 해야 합니까?
“우리 교회 목사님께서 보내서 왔습니다”고 하면 다 안다. 그런데 심부름하는 집사님이 장로님에게 가서 자기 자랑해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목사님이 보내서 왔습니다”라고 하기만 하면 장로님은 두말하지 않고 돈을 주십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의 이름으로 갑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간다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내 이름으로, 내 종교적 열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우리들의 죄악의 모습을 보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십니다. 이 이야기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드러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면 들어주신다는 기도의 신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행위와 우리들의 기도행위와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중보자의 기도라고 한다면 우리들의 기도는 죄로 가득한 피조물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가득한 인간의 기도를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 용서함을 받고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나를 대신하고”, “우리를 대표”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죽으심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저주의 형벌을 예수님이 친히 지불하셔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하셨습니다.
중보자의 자격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라야 하며 인간을 대표하고 대신할 수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우리를 대신하고 대표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저주와 형벌을 대신 짊어지는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2.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9-11上)

본문 9-11절 상반절에 보면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입니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입니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입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하나님께 가시기 전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한 내용입니다.
기도를 하시는데 누구를 위해서 기도합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내게 주신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예수님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께 속한 백성들은 곧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왜냐하면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의 신분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들의 신분은 곧 하나님의 백성된 신분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6:37절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또한 39절에 보면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를 내어쫓지 아니하고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소유이기에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십니다.

3.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여 지키었나이다”(11下-12)

본문 11절 하반절에서부터 12절 말씀을 보시면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입니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입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이신 자신이 하나이듯이 제자들도 서로 하나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서로 하나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지켜 보호해 주셔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저희를 보전하사”(11下)라고 합니다.
1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켜 보호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백성들을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멸망하지 않도록 보호하십니다. 오직 멸망 받은 자들은 이미 구약성경의 예언대로 멸망을 받은 자들 뿐이었습니다. 그들을 제외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한 사람도 실족하지 않고 지켜 보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인 복음서를 통해서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기 죄에서 구원하시고 그들을 치료하시고 위로하시고 보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셨지만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면서도 성령님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십니다. 지상에서도, 천상에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한 사람도 멸망치 않고 보호하십니다.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어떠한 환경 속에 있을지라도 우리들을 지켜 보호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들을 지켜 보호하십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육신의 병 때문에 고통 가운데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자녀 때문에 고민하고 걱정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우리가 그같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좌절이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을 보호하시고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걱정하지 마십시오. 동서남북은 다 막혔어도 하늘은 뚫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13-14절)

본문 13,14절을 보시겠습니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이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죽음의 십자가를 짊어지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 엄숙한 순간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곁을 떠난다고 할지라도 제자들이 낙심하지 않고 예수님의 기쁨이 제자들에게 차고 넘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었는데 그 말씀 때문에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한다고 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했던 것과 같다.
제자들 역시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기에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합니다.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제자들을 지켜 보호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들을 미워합니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타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세상이 우리들을 핍박하고 미워해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힘을 내야 합니다. 결국은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지키지 않는다면 세상은 우리들을 친구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결코 세상의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5.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15-19)

다같이 본문 15-19절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입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입니다.” 아멘.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들이 악과 세상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악한 자들에게서 지켜 보호해 달라고 합니다.  다음으로 진리로 제자들을 거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이기에 아버지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제자들을 거룩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예수님도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파송받은 제자들로 하여금 세상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로 거룩하게 해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여기서 거룩이란 세상의 악으로부터 구별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실 때 기뻐하시는 것을 거룩이라 합니다. 우리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묵상해 봅시다.

 


내 양을 먹이라 하신 예수님

 

요 21:15-23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세상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는 오직 영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것, 즉 믿음과 사랑과 소망입니다. 특별히 이런 것들이 지도자들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그 사명의 막중함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명자들은 항상 말씀으로 무장하고 자신의 신앙고백을 하나님께 고백하며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에 중직을 맡은 모든 직분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께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연약하며, 어떤 자는 경솔하고 미덥지 못하며, 또 어떤 사람은 고집불통이라서 가르칠 수 없습니다. 여기에다 사단은 온갖 거침돌을 가지고 공격해 오면서 선량한 목사의 용기를 꺽어 놓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직분을 잘 감당하려면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한 나머지 모든 것을 바치는 가운데 온갖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고 말했습니다.
교회 안과 밖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한 거짓된 것들을 우리는 극복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 안에 움트고 있는 거짓된 욕망들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가 본받지 말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꼭 본받아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가 위대해서 본받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을 우리 주위에 늘 배치하므로서 우리들로 하여금 판단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을 고백케 하시고 중대한 결단을 내리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의도를 가지고 베드로에게 무엇인가 신앙을 고백하게 하시고 어떤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은 낙심 가운데 있는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십자가에 죽으신 후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목격한 제자들은 기뻐했습니다(요20:20). 그러나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이 자신들의 곁을 떠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들의 명예을 소유할 수 없었습니다.
그토록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셨건만 제자들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여전히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한 정치적인 회복과 경제적인 회복의 왕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 무엇인가 얻을 수 있고 한 자리를 넘보았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자신들의 곁에 자신들의 욕망을 체워줄 예수님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지금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는 주를 보았노라”(요20:25절)고 하십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 기뻐했지만 제자들은 이제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처음 부르심을 받기 전의 상태로 돌아간 것입니다.
제자들이 디베랴 바닷가에 모였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노라”(요21:3)고 떠났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다시 고기잡이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농사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하면서 도시로 갔습니다. 사업을 해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 영화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완전히 망해버렸습니다. 그는 다시 농촌으로 내려왔다 농사나 짓자는 것입니다. 마치 베드로와 같은 자들입니다. 베드로는 과거 예수님과 함께 했던 그 영화를 접어 두고 다시 고기를 잡이에 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베드로에게 부활의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들이 무슨 일을 하다가 잘 안되었습니다. 실패를 보았습니다. 낙심 가운데 있을 때 우리 주님은 우리 곁에 찾아오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해 주신다고 하시면서 우리들을 축 쳐진 어깨를 어루만져 주십니다. 직장을 잃었습니다. 사업이 망했습니다.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합니다. 소망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좀 나아질 것 같이 않습니다. 내가 언제 직장에서 쫓겨날지 모릅니다.
앞으로 사업과 자녀들이 아무 문제와 탈 없이 성장해 줄지 걱정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낙심과 불안 속에 있는 우리들에게 우리 주님은 찾아오셨다는 점입니다.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들은 이제 두려워 해서는 안됩니다.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2. 예수님은 시몬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하십니다.

본문 15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베드로라고 하지 않고 시몬이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부름받기 이전에 사용했던 이름을 부름으로 시작하신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베드로에게 과거 어떤 상태로부터 부름을 받았는지를 상기 시키고 있습니다. 그물을 던져 많은 물고기를 잡는 일,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과거 상황으로 되돌려 놓고 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닐 때 그의 행동 속에서 보여졌던 그의 실수를 기억나게 합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시면서 하신 말씀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8:33) 또한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입니다”(마 26:33)라는 말로 호헌장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잡혀 가실 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던 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나를 사랑하느냐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번 질문하면서 세번 답변을 요구하셨습니다.
“이 사람들보다”라는 말은 베드로가 이전에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라고 장담했던 것에 비추어 볼 수 있습니다.
즉 다른 제자, 즉 다른 사람들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는 물음이었습니다. 또한 “이 사람들보다”라는 말은 지시대명사 복수로써 “이것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냐 라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것들이란 베드로가 지금 잡아온 많은 물고기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네가 가진 이 직업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물질적인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같은 예수님의 질문 의도는 베드로가 주님께 대해 얼마만큼의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그 척도를 재고자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에게 너 자신에 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느냐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이런 질문은 얼마 전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는 그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기세 등등한 베드로, 마치 자신이 모든 일을 다 해낼 줄 착각했던 베드로, 그 베드로 안에는 그 전에 이미 사람의 일로 일컬어지는 사탄적인 사고방식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막8:33). 이런 베드로에게 과연 자기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답변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첫 질문에서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했을 때는 보다 높은 숭고한 헌신적인 사랑의 용어인 ‘아가파오’라는 개념으로 질문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그런 사랑을 친구로서 사랑을 나타내는 애정적인 사랑의 단어인 ‘필레오’란 용어 개념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러나 두번째 셋번째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수준인 “필레오”의 사랑으로 질문하셨습니다. 이것을 무엇을 말씀합니까?바로 베드로의 한계를 지적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질문한 첫 질문의 사랑에는 베드로가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그 동안 주님을 따른다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에게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알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한계는 예수님의 질문 앞에 드러났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자신을 제대로 본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제대로 답변하고 있습니다.
본문 15,16,17절에 “내거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입니다.” 이 말은 내가 나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주님께서 나에 대해서 더 잘 아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부활 하신 주님 앞에서 자신을 제데로 보았습니다. 자신의 한계와 죄 가운데서 보여지는 주님이라야 제대로 본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들은 지금 어떠합니까? 죄인의 눈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자신의 욕망과 허세와 탐심으로 주님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자신을 포장하고 있는 위선으로는 주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정직하게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너무나 관대한 나머지 죄짓는 일에 바빴습니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라고 하는 겸손한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3.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 하십니다.

못난 인간,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 그런 베드로에게 이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동안 아무 할 일도 없다고 생각한 베드로에게 이제 진정으로 하나님의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사명자들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것에 충실하도록 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주님의 양이지 내 양은 아닙니다. 우리는 철저히 관리자입니다. 청지기입니다. 즉 머슴입니다. 심부름꾼입니다. 말씀을 전달하는 전달자입니다.  봉사자입니다. 목사님에게 말씀의 권위가 사라지면 교회와 성도들은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의 권위에 상처를 입히면 안됩니다.
목회자 스스로가 아니 교회가 목회자의 말씀의 권위가 침해당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말씀의 권위로 권면하면 순종해야 합니다. 그 말씀의 권위에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의 권위에 불복종하고 불순종하면 다른 길은 없습니다.
말씀의 권위로 권면해도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데 무엇 때문에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순종이 열매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자기 편 만들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지역감정으로 편 가르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끼리끼리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모두가 주님께서 인도한 주님의 양으로서 서로 사랑하며 하나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양들로서 하나님의 양, 즉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심각하게 반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왜 교회가 분쟁이 생기겠습니까? 교회와 성도들을 자기 소유로 취급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마저도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기 자존심 때문에 회개하지 않겠다는 것은 저주 받아 마땅한 사탄적 사고방식입니다.

말씀에로 초대

요 21:18-19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베드로가 앞으로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결코 자신들의 뜻에 의해 움직인 자여서는 안됩니다. 내 형편, 내 주장을 펴거나 관철시키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요구대로 순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베드로가 주님을 따르며 살아가야 하듯이 우리들도 주님을 따르며 순종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성령강림과 방언을
통해 증거된 그리스도

 

행2:1-4

처음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은 문제가 하두 가지가 아닙니다. 또한 궁금한 점도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했다가도 어느날 또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끝나지 않습니다. 또한 성령님이라는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분도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세 분의 하나님을 믿어야 하느냐고 질문하면 세 분의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의 유일한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참으로 헷갈립니다.
그래서 이해가 가도록 쉽게 설명하는 것이 아버지가 있었는데 집에서는 아빠요, 교회에서는 목사님이요, 학교에 가면 교수님이듯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마치 이와 같다고 합니다. 한 분은 한 분이신데 그 하시는 일의 성격 따라 다른 세 양태로 나타나는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런 삼위일체 하나님 설명은 이미 교리사에서 “양태론적 단일신론”이라 해서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사도행전을 통하여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님은 무엇 때문에 강림하셨는지를 살펴보십시오.

1. 성령은 약속대로 이미 오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복음을 위하여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해 주신 일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성령이 오셔서 제자들에게 임하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땅끝까지 증거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오순절 성령 강림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오셨습니다. 둘째,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승천의 복음을 증거합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죄인입니다. 죄인에게 오는 죄의 대가는 하나님으로부터 형벌과 저주입니다. 그 형벌과 저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으려면 성령께서 역사해 주셔야 합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게 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증거 하게 합니다.
사도행전의 핵심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 전편인 누가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고 합니다. 이같은 구원의 사건은 우리들의 참여 없이 하나님의 단독적 사건이기에 객관적 구원의 사건이라고 합니다.
이런 객관적 구원의 사건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역사하도록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을 제자들과 그의 택한 백성 개개인에게 적용하시는 계시자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계시하신다고 본다면 계시자로서의 성령께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성자 하나님과 그 본질과 능력 면에서 동등하십니다. 이런 계시자로서의 성령께서 무엇을 계시해 주고 있느냐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계시를 사도행전을 통하여 기록하고 신약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성령께서는 성경을 제쳐놓고(무용지물로 만들고) 별도로 우리들에게 특별계시를 주시므로 역사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주어진 특별계시인 성경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의 체험이 결코 성경을 앞서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 줌과 동시에 체험이 절대적이지 못함을 말해 줍니다.
그렇다고 체험을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결론적으로 오순절 성령강림은 이미 약속된 성령님이신데 그 성령님이 오신 사건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증거 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약속된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2. 오순절의 성령강림과 방언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제 1장에서 약속하신 성령이 2장에서 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 같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의 성도들에게 약속된 성령이 임하게 됩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며 사람 위에 임하더니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경험들은 첫째, 오늘날에도 우리들에게 와야 되는 실제적인 경험들인가, 둘째, 아니면 특수한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에게만 임하는 것인가, 셋째, 아니면 이런 경험들은 특별한 어떤 목적 때문에 나타난 반응들로서 그 목적이 무엇이냐 라는 문제가 늘 제기되어 왔습니다.
오순절에 약속하신 성령이 오셨을 때 그 표시가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기에 방언을 강조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주장한 사람들을 오순절파라고 합니다. 뜨거운 열심과 어떤 체험들과 은사들을 강조한 사람들이 바로 오순절파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오순절파는 순복음에도 있고 장로교에도 있고 천주교에도 있고 감리교, 성결교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성령을 받으면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현상과 더불어 방언이 꼭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꼭 성령이 임하시면 이런 현상이 필수적으로 나타나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 라고 하는 사람들이 바로 오순절파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보기에는 좀 아쉬운 점이 많다. 방언은 앞으로 성령께서 어떤 일을 하실 것인가에 대한 증거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방언입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에게 시키시려고 하는 어떤 일 때문에 나타난 현상들일 뿐입니다. 따라서 방언을 해야만 성령이 오셨다는 것에 대한 증거라고 말한 것은 성경의 원리에 맞지 않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셔서 방언을 하게 하신 것은 성령이 임하면 방언을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셔서 방언을 주신 것은 앞으로 예수의 증인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방언의 목적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 방언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지를 살펴 봅시다.
창세기에 보면 바벨탑 이후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의 언어’가 혼잡 되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 11:7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라고 했습니다. 바벨탑 이후 언어가 갈라졌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세상의 모든 언어는 사투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이 영어를 배우지 못하면 할 줄 모릅니다. 미국 사람도 우리 나라 말을 할 줄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다른 사투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신 “그 때에 예루살렘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2:5)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로 이제 무엇인가를 이루시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각처에 가서 살다가도 명절 때가 되면 순례차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 명절 때 제사에 참여해야 그들에게 구원이 임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구원관에 볼 것 같으면 예루살렘에 얼마나 가깝게 살고 있느냐에 따라 구원이 결정됩니다. 유대인들이 본국으로 돌아왔는데 그 중에는 유대의 말을 잃어버린 자들도 있을 것이고 또한 유대인들이 아닌 다양한 외국 이방인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2:9-11).
그런 자들에게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하여 임시방편으로 제자들에게 외국말인 방언을 하도록 하여 그 순례객들에게 예수를 증거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양한 외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오순절에 방언으로 예수의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다양한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자신들의 나라 말로 제자들이 외치고 있는 말을 듣게 되었으니 얼마나 이상하고 놀랐겠습니까? 그렇다고 제자들이 원래 외국어를 잘 할 줄 아는 사람 같으면 몰라도 그동안 전혀 외국어를 할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역사로 방언이라고 하는 언어를 통해 복음을 증거하자 다양한 나라에서 온 이방 나그네들은 자신들의 나라 말로 알아듣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기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2:6-8)
계속해서 11절 하반절부터 보시면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저희가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11-13)고 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 방언이 있었던 것은 성령께서 그 방언을 통해서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이미 사도행전 1:8에 대한 약속의 성취입니다. 이런 사건은 계시적 사건입니다. 방언이라고 하는 외국말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때문에 복음이 제한을 받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방언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했습니다. 그것이 성경에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이제 방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 말씀을 읽는 가운데 성령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을 감동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로 하여금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받고 증거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 예수가 우리들의 생명이시요, 모든 문제의 해답이십니다. 방언 타령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방언이 아니면 복음을 접하지 못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데 앞장서는 것이야말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3. 성령께서 불의 혀같이 임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어떤 형체를 지니는 것은 앞으로 성령께서 하실 일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때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불의 혀같은 분이시다”라고 한다든지 성령은 “비둘기 같은 분이시다”라는 말은 사실 틀린 말입니다.
성령은 원래 형체가 없는 분이십니다. 영이십니다. 비둘기 같은 분으로 오셨다는 것은 성령이 비둘기와 같은 분이시다 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화평을 위해 오셨음을 상징해 주는 그림 언어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하나님과 화목시키고 화평케 하시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비둘기는 거룩이 상징입니다. 성령님은 거룩한 분이십니다. 하나님 쪽에서 제공한 좋은 사랑의 선물을 가지고 오신 분이십니다.
 창세기 8장에 보면 노아가 비둘기를 사람들 보다 앞서 보내어 좋은 소식을 가져오기를 기대합니다. 예수님께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사명을 지니고 예수님께서 비둘기 같이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불과 같이 오셨다는 것은 불과 같은 심판을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령께서 불의 혀같이 오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이제 끝났다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더러 긴장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심판하시기 위해서 말세에 불에 혀같은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이 불같이 오셔서 방언을 하는데 그 방언의 심판의 기준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방언 타령하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의

 

본문 롬 1:14-17절

오늘 주일은 종교개혁 478주년 기념주일입니다. 비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잡고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습니다.  당시 교회 성직자들이 권력과 결탁하고 사치스런 생활이 만연되어 교회는 그 본질적인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수도원의 성직자는 농지를 세주고 사냥이나 다니며 여자를 즐기고 수녀원은 일하기 싫은 돈 있는 사람들의 도피처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성직자들이 면죄부를 알선해 주기도 해서 성직자들의 비리가 극에 달했습니다.
당시 주교나 신부가 교권과 정권에 결탁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와 성직을 타락하게 했습니다.  이런 모순과 성경에도 없는 면죄부 판매로 야기된 미사(예배)는 돈을 버는 수단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교회는 내리막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모습을 그냥 두시지 않았습니다.
루터와 칼빈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복되어야 하고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져야 한다는 구호로 교회 청소운동이 벌어졌는데 그 운동을 토대로 생겨난 것이 우리 개신교입니다.
그래서 우리 개신교회는 그 개혁을 기념하기 위하여 “종교개혁기념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당시의 교회나 지금의 교회가 상당한 부분에서 비슷한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의 교회와 그 교회의 성직자들이 상당한 부분에서 그 위험수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같은 상황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 인한 잘못과 그 말씀대로 실천하지 못한 잘못에서 야기된 불행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운동을 할 때 그 정신적인 뼈대를 롬 1:17절 말씀에 두었습니다.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죄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의 어떤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 용서를 받는 것이 하나님께서 거져 주시는 선물이라고 하지 않고 내가 돈으로 천당 갈 티켓을 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거짓말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신앙이 돈으로 연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부 가운데 루터는 성경을 자세히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롬 1:17절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돈으로 천국을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루터가 이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바울이 발견한 복음, 루터가 발견한 이 복음을 우리들 역시 발견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 바울의 빚진 자로서의 자기이해(14절)

본문 14절에 보면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합니다. 빚이라는 것은 당연히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갚아도 되고 안 갚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금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다메섹을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바울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해서 그들을 구원시키기 위해서 바울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방인의 사도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를 구원시켜 주셨습니다. 실로 바울은 이방인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생각하기를 이방인들 때문에 내가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언제나 그 이방인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 때문에 나를 구원시켜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됩니까? 무엇을 위해서 나를 불러 주셨느냐는 것입니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스더4:14)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네가 왕후가 된 것은 유다인이 어려움에 빠져있을 때 그들을 구원해 내는 일을 위해 에스더 네가 왕후가 되었는지 어떻게 아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 역시 무엇인가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는 그 일에 대해서 우리는 빚져 있는 것입니다. 꼭 그 빚을 갚아야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될 수 있는 대로 이방인들인 로마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15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1:15)

2. 우리가 왜 복음을 부끄러워 하면 안되습니까?(16절)

본문 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바울은 이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이 복음은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그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든지 믿는 자는 구원을 갖게 하는 것이 복음이기 때문에 그 복음을 위해서 일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복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 즉 그리스인나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어느 지역을 불문하고, 또한 어떤 인간이든지를 불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는 찬양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신앙생활 하다가 상대편이 나의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무어라고 말합니까?
“저 사람은 전라도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혹은 “저 사람은 경상도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고 시기하고 비난합니다.  아니면 “저 사람은 나보다 못 배웠기 때문에 그렇습니다”는 등 하나님의 교회를 허는 이리와 같은 사람이 있다고 성경은 지적합니다. 초가집에서 태어났든 아파트에서 태어났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농촌에서 태어났든 도시에서 태어났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누구를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들은 다 한 형제입니다. 서로 미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미워하고 흉보고 불평 불만하다가 예수 믿지 않고 죽으면 그 사람은 지옥에 갑니다. 명심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의로 믿음으로 살게 하는 복음 (17절)

본문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첫째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다는 말입니다.  둘째로 그 복음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셋째, 구약성경에도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입니다”라는 말씀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합2:4).
합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첫째,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의란 무슨 뜻입니까? 옳은 의(義)를 써서 죄와 반대 개념으로서 거룩하고 의로운 일이라는 보편개념을 가리켜 “하나님의 의”라고 하지 않습니다.
6:33절에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보통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행위 자체를 “하나님의 의”라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말 안에 담겨진 뜻이라고 합니다.
복음이란 무엇이냐 단순히 “기쁜 소식입니다.” 그래서 집을 사도 기쁜 소식이니까 그것은 복된 소식 즉 복음이다 라고 성경은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그 행동 자체를 가리켜 기쁜 소식이요, 곧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 복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거져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감사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 복음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믿음에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들에게 구원이 발생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무엇을 했기 때문에 나에게 구원이 임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이 임했습니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무엇을 하는 것이지 무엇을 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 무슨 일을 하나님께 하고 있습니까? 그 일이 없다고 한다면 나에게 그 일을 하도록 가능하게 하신 믿음이 없다는 이야기와도 같습니다.  셋째, 구약성경에도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입니다”라는 말씀한 것과 같습니다(합2:4).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이후

 

고전 15:20-28

오늘은 모든 교회가 부활절 기념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면서 부활하신 주님의 위로와 은총이 우리 성도들 가운데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들이 부활절 기념 축하 예배를 드린 것은 부활의 가능성의 여부를 따지기 위해서 모인 것은 아닙니다. 오직 다시 사신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고 증거 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우리들이 이렇게 모였습니다. 우리들은 부활의 환희와 감격 속에, 나 혼자만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이웃에게 이 기쁜 소식을 증거 하기 위하여 여기 모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망을 정복하셨습니다. 죄로 어두워진 우리 인생에게 그의 부활을 통하여 소망을 주셨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비진리에 대한 진리의 승리”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신앙에 대한 신앙의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은 기독교의 중심인 동시에 구원의 중요한 요건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라고 하셨습니다. 이 물음은 2천년이 지난 이후 오늘에도 우리들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믿지 않는다면 나에게 무슨 기쁨과 생명의 축복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본문 말씀을 통하여 부활의 첫 열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장차 어떤 부활의 축복이 있는가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서의 그리스도의 부활

본문 20절을 보시면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합니다. 사도 베드로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합니다. 여기서 “잠잔다”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을 일컬어 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1:23절에서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더욱 좋다고 합니다. 왜 그럽니까? 이 세상을 떠난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므로 안식(쉼)을 누리는 상태를 잠잔다고 표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는데 그 부활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 즉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합니다. 첫 열매를 이해하려면 구약성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출23:19절에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고 했습니다. 그 첫 열매는 하나님의 것이니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나머지도 거룩하게 하나님께 구별되어 드리는 것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를 믿은 후 이 세상을 떠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해서 첫 열매로 드려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첫 열매로서 부활은 이후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부활도 이와 같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본문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그의 재림 때 있을 그리스도인들의 부활까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로 부활하셨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다음 두 가지를 확신해야 합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그 부활은 우리들을 대표해서 첫 열매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부활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기독교 모든 진리는 미신에 불과할 것입니다. 또 교회가 증거 하는 복음은 허황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모든 복음의 증거와 선포의 중심을 보면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증거한 내용도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증거였습니다.
초대교회 모든 성도들이 환난과 핍박 속에서 순교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찬송을 불렀던 것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신앙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자들의 입에서 살이 찢기고 고통을 맛보면서도 그들의 얼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광채로 가득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운명하셨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영원한 어두움도 아니요, 사망의 끝도 아닙니다. 이제 새로운 생명이 찬란한 꽃으로 피우는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운명하신 후 무덤 속에 계속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을 열고 일어나셔서 영원한 생명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이 빈 무덤의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비를 더욱 확증시켜 줍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부활의 신비를 믿어야 합니다. 신비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 비밀 속에 감추어진 진리는 바로 우리들의 첫 열매로 하나님께 드려진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이었습니다. 그 찬란한 영광 앞에 그 어떠한 사망의 그림자도 침범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들도 부활한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죽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교통사고로 죽고, 병으로 죽고, 늙어서 죽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표현한다면 “영원한 생명과 안식에로의 참여”입니다.
우리들이 죽으면 당장 부활하지는 않습니다. 죽으면 우리들은 천국에 갑니다. 그 천국에서 우리들은 “잠잔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죽음과 사망과 고통이 없는 천국에서 안식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을 하실 때 이미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 죽은 자들이나 살아 있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던 것처럼 그 때 모두 다 부활합니다.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 부활은 우리들의 소망입니다. 희망입니다.
이런 희망과 소망이 있기에 이 세상에서의 모든 고통과 환난을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들의 부활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무덤에 묻고 절망적인 현실에서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들이 소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같은 소망을 간직했기에 당돌했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21-24) 이런 소망 가운데 이 세상을 힘차게 살자.

2.그리스도의 재림에서 그의 주권이 하나님께 이양될 때 까지

본문 24절에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셔서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7절에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받은 권세로 철장으로 질그릇을 깨뜨리듯 모든 세력들을 깨뜨릴 것입니다. 심판하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2:9-10절에도 보면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 땅을 평정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권세를 하나님께 이양하시기 전 예수님께서 사탄의 권세를 최종적으로 무저갱으로 결박하십니다. 그의 주권은 이 땅의 사망의 권세를 깨뜨릴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2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26절)고 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예수님께서 모든 권세와 주권을 하나님께 이양하시기 전에 이루어질 일들임을 보여줍니다.
사단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까지라도 삼키려고 합니다. 넘어지게 하려고 합니다. 시험 들게 하려고 합니다. 낙심과 좌절하게 하려고 합니다. 시기 질투하게 하려고 합니다. 가라지들이 우리들 가운데 섞여 있습니다.
그런 가라지는 지금 이 땅에서 우리들과 함께 공존합니다. 그러나 그런 가라지 때문에 절망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최후 심판 때 그들을 풀무불 속에 집어넣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결코 좌절하면 안됩니다.

3. 하나님 아버지의 우주적인 통치 -샬롬과 구원의 완성

본문 28절에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만물을 예수님께 복종케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제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이양한 예수님 역시 하나님께 복종합니다. 이 복종은 이 세상에서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종하는 그런 복종의 개념이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로서 만유를 통치하십니다. 이제 진정한 구원이 완성되어 샬롬의 평화가 임합니다.
지금 우리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원을 받았다고는 하나 아직은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들은 늘 불안전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구원이 완성될 그때 우리들의 구원도 완전하게 완성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 이후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을 부활시키시고 사단의 세력을 결박시킬 것입니다. 모든 정사와 권세를 평정하시고 만물을 자신의 발 아래 두실 것입니다.
그같은 일이 끝나면 모든 권세와 주권을 성부 하나님께 이양시키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가 시작됩니다. 이제 진정한 구원의 완성을 보게 됩니다. 이 땅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나라, 샬롬의 평화가 임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들의 희망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 희망과 소망을 간직하려면 지금 우리들의 삶의 현장 속에서 그분이 제시하신 기준에 미달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고 그 믿음에 따른 아름다운 열매와 반응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즉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열매를 보이고 있습니까? 성령의 열매입니까? 육신의 열매입니까?

말씀에로 초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우리들의 구주임을 보여줍니다. 그는 “성경대로 죽으셨다”가 “성경대로”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들의 소망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들의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그가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승리는 나의 승리입니다. 그 부활의 신앙 때문에 2천년 기독교 역사에 우리 많은 선배들이 핍박과 순교를 당하면서까지 부활의 복음을 증거 하셨습니다. 우리들도 그 부활의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첫 열매로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말씀대로 반드시 재림하실 것입니다. 재림하실 때 이 땅의 사단의 세력과 모든 악한 세력들을 풀무불 속에 결박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들의 구원이 완성될 것이고 하나님의 샬롬의 평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 구원을 바라보면 이 땅위에서 힘있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바울을 통해 증거된 영광의 복음

 

고후 4:1-6

사람이란 언제나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생활을 추구합니다. 자신의 입장에서 선과 악의 기준을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상대방을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결정에 움직여 주기를 원합니다.
만약에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면 모두가 적이 되고 맙니다. 나 아닌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거나 교회와 신앙이 과연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서 그 신앙의 원리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 믿음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갖고 있는 타락된 죄의 욕망입니다.
자신의 입장에서, 혹은 자신의 욕망이 추구하는 대로 살지 않고 늘 교회를 생각하고 그 교회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관심을 갖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들 보다 무엇이 남다른 특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바울 입장에서는 그렇게 쓰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을 통해서 바울은 어떻게 쓰임을 받았고 하나님은 그를 무엇 때문에 사용하셨는지를 살펴 보시겠습니다.

1. 본문의 전후 문맥

본문 말씀은 어떠한 앞뒤 전후 문맥속에서 말씀하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본문 4:1-6 말씀을 하기 위해서 이미 어떠한 이야기를 앞에서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들의 영광의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지 않고 믿지 아니하면 그 영광의 소망을 소유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 예를 구약 출애굽기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에 모세를 불러 올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근처에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가까이 가면 죽게 됩니다.
그래서 모세만 특별히 불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이스라엘에게로 돌아온 모세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의 얼굴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백성들로 하여금 보지 못하도록 얼굴에 수건을 가렸습니다(출34:34).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고 있는 수건을 제거할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래서 3:16에 보시면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할 때 가로막는 어두운 세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그 세력은 더이상 방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해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이제 우리가 그 수건을 벗은 얼굴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은 물론 그 영광에 이르도록 인도하신 분은 성령으로 말미암았음을 이야기 합니다. 이것이 3장 후반부에서 말씀한 내용입니다.

2. 자신의 사도직을 돌아본 바울(1-2절)

이제 바울은 4장에 와서 ”이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라고함으로써 그 영광스러운 일을 위해 직분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영광스러운 일은 이미 3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가능하게 된 사실을 볼 것 같으면 그 영광스러운 일을 위한 직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돌아봅니다.

첫째, 긍휼하심을 입은대로 낙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둘째,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넷째, 오직 진리를 나타내는데 힘썼다고 합니다.
이상과 같은 말씀은 오늘날 우리들이 직분을 어떤 정신으로 감당 할 것인가에 대한 힌트가 나와 있습니다.

3. 복음의 적대자들(3-4절)

본문 3-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첫째,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입니다.
바울은 순수한 마음으로 복음을 증거할 때 모두가 바울을 환영하고 기쁘게 맞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오늘날 교회도 보면 사사로운 개인 감정 때문에 목회자의 복음 선포를 환영하지 않고 거부한 자들이 많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자들이 바로 바울의 적대자들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 자들에게는 복음이 가리워져 있습니다. 어떤 자들에게 복음이 가리워집니까? 바로 망하는 자들입니다.

둘째,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였습니다.
망하는 자들에게 왜 복음이 가리워집니까? 그들은 믿지 아니하기 때문에 세상 신이 그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세상 신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했습니다.
결국 혼미케 한 세상 신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를 비취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그들은 믿지 아니했을 뿐만 아니라 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넷째,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합니까? 그것은 죄를 범했기에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와 형벌을 받고 있는 자들은 누가 지배합니까? 세상 신인 마귀입니다. 그 마귀에게서 벗어나려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지 아니하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비춰야 합니다.

4. 바울이 증거한 예수(5절)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증거하는 바울의 모습이 5절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5절에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 합니다.
두 가지를 전파합니다.

첫째, 그리스도 예수가 주 되신 것
둘째, 예수를 위하여 성도 섬기는 일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것은 복음 전하는 자들이 범할 수 있는 큰 실 수 입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가 주”되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직 그 예수를 위해서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주님의 피값으로 사신 교회의 지체인 성도들을 위해서 섬기는 일을 기쁘게 감당한다는 말입니다.
직분자들이 오히려 성도들에게 상처를 준다거나 주장하려는 자세나 섬김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직분의 의미는 종이요, 섬기는 일입니다. 명예직이거나 계급이 아닙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장로교 헌법은 성도들이 자신들의 부족한 부분 때문에 대신 직분자(장로 집사,권사)를 세워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봉사하고 섬기고 목회자를 잘 받들어 봉사하라고 선출해서 하나님 앞에서 직분을 임명합니다. 따라서 그 직분자가 잘못하면 그 책임은 그를 뽑아준 성도들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직분자들을 감시합니다. 그런데 이런 성도들에게 직분자가 상처를 준다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장로나 집사나 권사라는 직분자의 투표는 교회 성도들의 ⅔이상의 찬성 투표를 요구합니다.
직분의 영원함, 즉 항존직이라 함은 어떤 개인에게 종신토록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항존직이라 함은 교회가 존속하는 한 없어서는 안되는 영원한 직분이라는 의미에서 항존직이라 합니다.
따라서 장로, 집사, 권사는 자신을 뽑아준 교회 성도들의 곁을 떠나 다른 교회로 가면 그 사람의 직분은 인정을 받지 못하고 그냥 일반 성도일 뿐입니다. 다른 교회에 가서 다시 장로, 집사, 권사가 되고 싶으면 다시 처음부터 투표를 해서 전체 ⅔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어떤 메시아인가

 

고후 5:11-21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베푸시기 위한 구원자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2천년 전에 오신 예수님은 심판 주로서 오신 것이 아니라 그의 자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던 것입니다. 이 다음 재림 주로서 이 땅에 오실 그 때는 구원자로서가 아니라 이제 심판하시려고 오신다고 했습니다.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구원자로 오셨다면 그분은 고난을 받고 죽으려고 오셨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구약성경에 그렇게 예언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그렇게 예언하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또한 초대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심지어 바울도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를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나중에 그 사실을 고백하면서 자신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말씀 따라 그의 생애를 이 바른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을 위해서 바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이 오해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오해하고나 있지 않습니까? 우리 집에 어린 자녀들이 부모님을 어떠한 부모님으로 이해하고 있느냐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거짓 이단자들, 기독교 이름으로 가장한 숱한 많은 지도자들은 이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을 혼란하게 하였습니다. 기독교 종교를 한낱 인간적인 종교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이단자들은 이 복음의 본질을 훼손시키는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우리들 역시 바른 신앙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손해를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용만 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까지 이용하고 교회까지 이용하려고 합니다. 도대체 그들은 어떠한 하나님을 믿고 있고 어떠한 예수님으로 믿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이 초대교회의 싸움이었습니다. 초대교회가 하나님을 모르는 로마와의 싸움이 아니라 자칭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의 종이라는 일꾼들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참으로 그러한 불행한 일들이 오늘날에도 우리 교회들에게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세상에 모진 풍파를 인내하며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며 사는, 그런 무게 중심을 가지고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바울의 고민

바울이 선포한 복음인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바울의 사상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사도직이 예루살렘의 12사도들과 같은 그런 사도가 아니라고 의심을 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는 언제나 그의 사도직을 변호합니다.
고린도교회가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교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고전1:1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이라고 하고, 고후1:1에서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고후 10-13장에서 가장 격렬한 어조로 자기 사도직을 변호합니다. 자기 사도직을 의심하는 자들을 거짓 사도들이고 사단의 사자라고 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진정한 사도와 주의 종이 누구라는 것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고린도후서는 아주 감동적인 말씀입니다.
어느 세대를 불문하고 진정한 그리스도의 종이 되고자 하는 자들은 이 말씀의 깊은 의미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막연하게 돈만 많이 내면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의 종들은 교회의 살림을 전혀 무시하고 무관심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바울의 사도직 변호의 심경을 16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고후5: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바울이 말하는 거짓 사도들이 예루살렘 총회의 사도인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의 추천 편지를 보이면서 자신들이 진정한 성지 출신의 사도들이라고 하면서 바울에게 그런 추천장이 없는 것을 보니 바울더러 가짜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식으로 이해하면 안된다는 사상이 16절 말씀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고후 3장에서 그 이야기에 답변하고 있습니다.
고후 3:1-3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 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이 말씀은 고린도교회 성도들, 너희들이 내가 사도로서 처음 복음을 증거할 때 성령을 받고 구원을 받았는데 그것이 곧 나의 사도직이 옳고 내가 증거한 복음이 정당함을 증명하는 나의 추천서가 아니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종이 쪼가리 써 가지고 다니면서 행세하는 그런 시대는 지났다는 것입니다.

2. 바울의 인식변화

고후 5:16-17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바울은 자신이 과거에는 예수를 지정한 메시아로 인식하지 않고 그를 적대하고 그를 믿는 자를 핍박했던 것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때는 육신적인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이라고 인정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로 인식의 대 변화입니다. 그 인식의 변화는 5:14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바울은 다메섹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러 가는 순간까지 예수님의 죽음이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예수님을 메시아,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를 믿는 자들을 죽이려는 헛된 열심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시고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나타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고 방금 읽은 14절 말씀 따라 모든 사람의 죄 때문에 죽는 대속의 죽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식과 믿음의 변화입니다. 이같은 깨달음을 더 5:21에서 정확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은 죄가 전혀 없는 예수님에게 우리의 죄를 담당하도록 하고 우리의 죄에 대해 속제의 제사가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인들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떠한 메시아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러나 유대인들, 혹은 거짓 사도들은 어떤 메시아, 즉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까?
구약 성경 삼하 7:12-13에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다윗의 자손가운데 한 가지를 일으켜서 그 나라를 견고케 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예언하고 있고 그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를 예언해 주고 있는데 그들은 이 말씀을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당시 이방민족을 다 정복하고 다윗 왕조를 세웠듯이 로마와 같은 이방 압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다윗과 같은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시대와 같은 경제적인 풍요와 사회적인 정의, 평화를 이루는 그런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즉 다윗왕가를 재건하여 이방민족들을 굴복시킬 그런 군사적인 영웅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소위 그런 메시아, 왕을 기다렸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관점에 볼것 같으면 예수님이 이런 일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출시키는 커녕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로마의 일개 지방관인 빌라도에게 처참하게 죽음을 당한 자가 어떻게 모세와 같은 선지자이며, 건고한 다윗왕조를 재건할 메시아이겠습니까? 정치적인 자유, 경제적인 풍요,사회적인 정의를 가져오기는 커녕 도리어 처형당했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고난과 죽음을 당하게 했지 않습니까?
따라서 유대교의 메시아의 사상에 볼것 같으면 예수님은 메시아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예수님을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을 전혀 다르게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도 저 유대인들 처럼의 메시아관을 가지고 잇는 자들은 혹 없습니까? 그분이 우리들에게 경제적인 풍요를 가져다 줄 때에만이 그분은 메시아입니까? 그분을 우리 집의 평화만을 가져다 주는 예수님으로 생각하고 있지나 않습니까? 나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는 그런 식의 예수님으로 인식하고 있다면 그것은 고쳐야 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바울의 복음 선포 바울은 유대교의 그런 메시아관은 가짜라고 합니다. 진짜 메시아가 하는 일은 그런 풍요와 정치적인 해방과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그런 일이 아니라 죄 많은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는 그런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의 핵심을 고전15:3-4에서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 분은 우리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요 6장에 유월절 무렵에 5천명을 먹이는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적은 무엇을 표징(표적)하고 있느냐면 이 세상에서 우리들에게 잘먹고 잘 살게 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표징으로 드러난 것이 아닙니다. 밥은 생명을 주는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적은 예수님이 생명을 주는 자임을 표징(표적)하고 있는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기적은 단순히 우리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수단으로서 예수님을 들먹거려서는 안됩니다.
요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6: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믿고 있습니까? 어찌보면 기독교가 유대교의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지나 않습니까? 우리 다시 한번 우리들의 믿음과 생활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연보의 정신과 예수 그리스도

 

고후 8:1-15

우리들은 언제나 돈을 움켜쥐고는 그 돈이 자신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우리들은 돈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돈의 지배를 받습니다. 우리들은 돈을 얻기 위해서 죽는 것 말고는 무엇이든지 하려고 합니다. 돈이 없으면 한 순간도 세상을 살아갈 수 없어 보입니다.
물론 돈에게는 어떤 생명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 돈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인격을 무시하기도 합니다. 사랑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합니다. 인간에게 욕망이 없으면 어쩌면 그 돈이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돈은 좋은 일을 하기도 합니다.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을 돕는 선한 일을 하기도 합니다. 그 돈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그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들은 그 돈을 현명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돈이 없다는 것은 부끄러워 할 것은 못됩니다. 좀 힘들뿐입니다. 그러나 그 돈은 열심히 일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려는 충성스러운 성도들에게 축복으로 주어지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문제는 그 돈을 어떻게 관리하고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판단은 달라집니다.
오늘은 교회 내에서의 헌금에 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공식적으로 1년에 한 번 행한 이 헌금 설교 때문에 시험받은 성도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 모처럼 교회에 나왔는데 헌금 설교한다고 시험받으면 안됩니다.
사도 바울께서는 본문 고린도후서 8장 9장 말씀을 헌금을 연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 바울은 헌금을 연보라고 했습니까? 또한 그 연보에 어떤 정신을 담고자 했습니까? 이와 같은 말씀을 살펴보면서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성도들의 구체적인 모습에 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연보를 통해 성도 섬기는 일을 보여준 마게도냐 교회(1-5절)

바울께서는 먼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연보에 대한 권면을 하기 전에 마궤도냐교회 성도들의 아름다운 연보의 모범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모범입니까?
1-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요약하면,
①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풍성한 연보를 하게 했습니다.
②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풍성한 연보를 하게 했습니다.
③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궤도냐 지역에 있는 교회가 어떤 형편에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면 이런 그들의 헌금이 얼마나 값진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마게도냐 지방은 로마의 식민지로 있는 지역입니다. 마게도냐 지역은 풍부한 천연자원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황폐화되어졌습니다.
로마는 마게도냐 지역의 자원들을 약탈해 갔습니다. 이런 일로 인해 이 지역의 교회들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 성도들은 그 어려움 속에서도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간직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옛 속담에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의 심정을 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에도 어떤 자들이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고 헌금생활을 하는지를 보십시오. 비록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구원을 간직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언제나 열심이었습니다.
경제가 어렵다는 것이 헌금하는 일을 중단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더욱 풍성한 헌금을 하게 하는 힘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하나님의 은혜와 어려움에 빠져 있는 같은 성도들을 구제하는 성도 섬기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아멘.
이 말씀은 무슨 뜻이냐면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바울에게 다른 교회 성도들을 구제하는 일에 동참해 달라고 바울에게 간절히 청했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그런 좋은 일이라면 나도 헌금에 동참하겠으니 꼭 허락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바울은 마게도냐교회 성도들의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를 고린도교회에 자랑삼아 하고 있습니다.
또한 5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이 말씀은 마게도냐 교회가 바울의 기대 이상으로 헌금에 동참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돈만 바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들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헌금을 바쳤다는 것입니다. 돈이 있는 곳에 우리들의 마음이 따라갑니다. 하나님께 헌금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마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적어도 이런 모습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 교회에도 있어야 하겠습니다.

2. 바울께서 고린도교회에 연보를 권면합니(6-11절).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연보를 하라고 이야기하면서 미리 마게도냐교회 성도들의 연보에 대한 열심과 열정을 이야기한 것은 서로 경쟁심을 유발시키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8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마게도냐교회의 열심을 이야기한 것은 그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 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사랑 역시 진실하다는 것을 확인한 것 뿐이라고 합니다.
이미 1년 전에 고린도 교회가 연보를 약속했습니다. 즉 구제 헌금을 약속했다는 말입니다. 그때 그 약속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했습니다. 그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은 그 약속한 구제헌금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을 받아서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갖고 나면 당장 다른 마음이 접근해 옵니다. 그래서 갈등하게 됩니다. 내가 해야 합니까? 하지 말아야 합니까?
그러나 언제나 처음 생각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 번 마음에 작정하였으면 그 감동과 은혜와 믿음으로 밀고 나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바울께서는 1년 전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하기로 했던 그 헌금을 지금 실행하므로 그들의 사랑과 진실과 은혜를 확인해 보라고 합니다. 우리들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한다면 우리들은 실천해야 합니다. 행동으로 실행에 옮김으로 우리 마음속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진실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3. 연보의 정신 (9-15절)

연보는 한문으로 버릴 연(捐), 보탤 보(補) 해서 ‘연보’라고 합니다. 내가 헌금을 하는 것만큼 나에게는 없어진다. 나에게는 없어지지만 그 없어진 것만큼 다른 사람에게 보태어진다. 이 말은 내가 희생을 하는 것만큼 그 희망을 덧입고 덕을 볼 우리 이웃 형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연보의 정신입니다. 이같은 정신을 다음과 같이 신약의 원리와 구약의 원리로 살펴봅시다.

첫째, 신약의 원리(9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9절)
바울은 언제나 무슨 이야기를 통해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했습니다. 결혼 이야기를 통해서도 오직 예수 복음을 증거합니다. 또한 돈 이야기를 통해서도 오직 예수 복음을 증거합니다. 이런 복음 때문에 연보와 헌금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연보란 내가 희생해서 다른 우리 이웃 형제에게 보탬이 되게 한다는 이 연보의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합니다. 어떤 복음입니까?
예수님은 원래 높고 높은 영광의 보좌에 계셨던 부요하신 분이셨는데 우리들을 위하여 이 예수님이 가난하게 되셔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가난하고 죄 많은 우리들을 부요케 하려고 즉 구원하려고 오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곧 연보의 원리입니다.
우리들은 연보를 통해서 이런 예수님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단순히 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돈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고 싶어하신 것입니다.

둘째, 구약의 원리입니다(12-15절).
본문 12절에서 바울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자기 형편에 맞게 바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쁘게 받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을 억지로 바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또한 우리들이 없는데 헌금을 하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할만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것을 기쁘시게 받으시면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께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연보를 강조한 것이 자칫 오해하면 우리들만 힘들고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려운 형제들을 지금 도와주면 그 어려운 형제들은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어려움에 빠진다면 우리들의 도움을 받았던 그들이 또 우리들을 도와 줄 것이라는 것이다(14절). 서로 돕고 힘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을 서로 “평균케 하려 함”(14절)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주시는 것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날 그날의 일용할 양식을 주셨습니다. 그날 많은 만나를 거둔 자나 적게 거둔 자나 하루 식량밖에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많이 거두어도 하루 식량, 적게 거두어도 그것은 하루 식량이었다(15절).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헌금을 했다고 해서 결국 하루 세끼 먹는 것은 똑같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하루하루 일용할 양식을 책임지십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욕심을 부리지 말고 서로 돕고 지내야 합니다. 헌금할 때는 우리가 다같이 동참하자는 말입니다. 돈 욕심과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더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물질을 필요하다고 하신다면 우리들이 기꺼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우리들에게 물질을 주셨다면 우리들은 그 물질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드릴 때는 드려야 하고 남을 도울 때는 도와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사해 바다가 있습니다. 사해 바다란 죽음의 바다라는 뜻입니다. 왜 죽음의 바다입니까? 사해 바다에 물이 들어오는데 나가는 통로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강은 고이게 됩니다. 혹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물질을 주시는데 우리가 그 물질을 내보내지 않으면 죽음의 바다와 같이 되고 말 것입니다. 퍼내면 다시 들어오게 되는 이치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바울을 변화시킨 예수 그리스도

 

빌 3:7-14

택시를 운전하는 사람들은 아침 첫 손님이 안경을 낀 사람이면 그날은 재수가 없다는 미신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쩌다가 아침 첫 손님이 안경을 낀 사람일 것 같으면 하루 종일 마음이 편하지가 않습니다. 또한 집 이사를 할 때에도 마음대로 못합니다. 결혼 날짜도 마음대로 정하지 못합니다.
사업을 시작할 때에도 그냥 시작하면 왠지 불안합니다. 그래서 시작하기 전에 고사를 지냅니다. 이렇듯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다른 신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결 같이 신에게 공덕을 쌓고 자신들의 의로움을 통해서 그 신에게 나아갑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는 말로 인간이 신을 움직이려고 합니다.
인간적인 모든 방법과 수단을 다 동원해서 신에게 나아가면 그 신은 자신을 도와주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자기 행위의 종교입니다. 자신의 노력과 수고를 통해 신에게 나아가는 종교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종교일 수가 없습니다. 이런 종교에는 마음이 편할 리가 없습니다. 자유롭지 못합니다. 불안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방종교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자신의 수고와 노력과 자신의 의로움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믿어 보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총 동원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보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현대인의 종교성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의 그런 노력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한 하나님, 즉 우리들이 믿고 있는 그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우리들을 만나 주시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께서 이 사실을 깨닫고 그가 변화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를 변화되게 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에 바울을 변화시켰고 오늘 우리들을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소망을 우리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이같은 변화와 소망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1. 바울은 육신을 신뢰하는 것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대조시키고 있다(1-8절).

바울은 먼저 빌립보서 1-6절 말씀을 통하여 육체를 신뢰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육체를 신뢰한다는 말은 세상적인 것을 더 좋아하고 거기에 모든 가치를 부여한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통해서 얼마나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했는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배경, 즉 가문은 대단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흠이 없을 정도로 완벽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나 이후 그런 세상적인 것이나 가문의 배경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께서는 7절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 얼마나 좋았으면 이제 과거에 내가 그토록 집착했던 것들이 이제는 자신에게 해가 될 뿐이라고 고백합니다.
사실 세상에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은 우리들에게 소중한 것들입니다. 그런 세상적인 모든 것들도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셨던 것들입니다. 가문도 그렇고 부모님을 만나고 좋은 스승을 만나서 공부하는 것들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복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활동을 위해서 주신 물질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그런 것들은 좋은 것이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나에게 해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이냐면 그런 세상적인 것들이 우상이 될 때입니다.
예를 들어 돈을 놓고 생각해 봅시다. 그 돈이 우리들에게 우상이 될 때 그 돈은 우리들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패망하게 합니다. 마치 그 돈이 우리들을 구원해 주는 줄 착각합니다. 마치 그 돈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고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가져다주는 양 생각합니다. 그 돈을 우리 인생의 최대 목표로 삼습니다.
그래서 그 돈이 우리들에게 절대화 되면서 우상이 되었습니다. 이제 믿고 신뢰하는 것은 돈밖에 없습니다. 자기 명예 밖에 없습니다. 권력 밖에 없습니다. 이런 돈과 명예와 권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오히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해가 되고 방해가 될 뿐입니다. 그 돈이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합니다.
또한 자기가 자기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것은 해가 됩니다. 선행과 공로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한다거나 종교적인 자신의 열심도 그리스도를 믿는데 해가 될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고 그분이 누구이신지 몰랐을 때는 우리들도 세상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발견하고 믿음과 구원의 감격을 깨달았을 때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8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 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위대한 가치입니다. 그래서 이제 세상 모든 것은 나에게 더 이상 소중한 가치가 아니라 오히려 나에게 해가 될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고백이 우리들에게 있습니까? 이런 고백은 어떤 신앙을 소유한 자들의 입에서 터전 나온 환희의 소리입니까? 아무 입에서 그냥 나오는 감격의 눈물과 목소리가 아닙니다.
오직 죽었던 나를 살려주신 그 은혜와 사랑의 복음 때문에 나오는 감격입니다. 이런 감격의 눈물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이런 감격의 눈물을 넘치게 할 수 있는 신앙과 믿음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이런 간증들이 있습니까?
주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없다고 생각하고 그 어떠한 일이 있더라고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세상을 배설물로 여기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조그만한 무슨 일이 있어도 교회 예배 시간에 빠진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이 그리스도가 나의 생애에 가장 소중한 분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나를 저주의 어두운 그늘에서 벗어나게 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생명이십니다. 내가 넘어졌을 때 일으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나를 변호해 주시는 변호사이십니다. 모든 문제의 유일한 해답이시며 해결자이십니다. 그분이 아니면 나는 죽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을 믿는 믿음에서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우리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2. 왜 세상을 버렸고 배설물로 여겼습니까?(9-11절)

바울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차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중심 사상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기뻐하라고 합니다.
빌립보라는 도시는 로마의 식민지입니다. 로마 제대 군인들을 빌립보 도시에서 살게 했습니다. 빌립보에 살면서 로마 시민권으로 사는 로마의 제대 군인들은 로마인이라는 특혜와 혜택 속에서 살았습니다. 여기에 자연스럽게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그들을 얼마나 부러워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빌립보인들이 로마의 식민지로 살고 있듯이 빌립보 성도들은 비록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로 살아야 합니다. 그들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 시민으로, 즉 하늘나라의 식민지로 살라는 말씀이 1:27절인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씀과 3:20절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비록 고통 많은 이 세상에 살지만 우리들은 이 세상 시민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시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시민이라면 하나님 나라 시민답게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 시민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능했습니다.
바울은 그 그리스도 때문에 가치관이 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치관이 변하게 되자 생활까지 변했습니다. 겉과 속이 함께 동일하게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을 배설물을 버리는 것과 같이 버렸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무엇 때문이라고 말씀합니까?

첫째, 그리스도를 얻기 위함이라고 합니다(9절).
이제 우리는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충만하게 얻기 위해서는 세상을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세상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을 버리라고 했다고 해서 세상을 포기하고 산속으로 들어간다거나 죽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이 우리들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지 못하기에 그 세상을 신뢰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세상을 벗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가치 기준을 세상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약4:4절에 보시면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정죄하여 적으로 생각하시면 우리들도 그 세상을 정죄하고 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정죄하고 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상을 우리가 친구로 삼게 된다면 자동적으로 우리와 하나님과는 원수가 될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과 타협하는 사람들은 올바른 믿음, 구원받게 하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니면 믿음이 어려서 세상에 유혹에 빠진 자일 것입니다. 세상과 친구로 삼고 있는 자들은 이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세상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 친구 없어도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과감하게 세상을 배설물로 여겨야 합니다.
어떤 분이 술을 아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친구가 함께 교회에 가자고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하는 말이 “나는 술을 너무나 좋아해서 교회에 못다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전도한 친구는 그래도 교회에 나가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부흥에 참석한 이후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그렇게 좋다던 술이 오히려 썩은 냄새가 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변화의 역사가 예수 생명 안에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계속 일어나고 역사합니다.

둘째,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고 세상을 버렸다고 합니다(9절).
이 말은 최후 심판을 염두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최후 심판 때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고 세상을 버렸다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최후 심판 때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숨어 있는 자들은 이미 범죄한 자들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범죄한 이후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죄의 특성은 숨게 합니다. 언제나 마귀는 어두운 뒷골목에서 숨어서 죄를 짓게 합니다.
그러나 죄를 범하여 숨어 있는 아담에게 “아담아! 아담아!”하고 부르시면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찾아오시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들을 부르시고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 가운데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죄 가운데 숨어 있는 우리들이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 믿음 안에서 발견되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어떤 두 친구가 큰 회사에 입사 시험을 보았습니다. 합격자가 발표되었습니다. 불합격자는 돌려보내고 합격자만 따로 남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함께 시험을 본 친구의 모습이 발견된 것입니다. 합격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의 시험 답안지가 언젠가는 하나님 손에 들려져 채점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합격이냐 불합격이냐를 기다리고 있는 수험생의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지금 우리들의 각자 인생 시험지의 답안지에 어떤 흔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까? 반드시 합격자만이 별도로 모이게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고난에 참예함을 알기 위하여(10절), 또한 넷째, 부활의 소망에 이르려고(11절) 세상을 버린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버릴 때 우리들에게 평안이 옵니다. 기쁨이 옵니다. 그러나 세상에 노예가 되어 살아간 사람들을 보십시오. 돈과 명예와 권력에 눈이 어두워 있는 자들을 보라 평안할 날이 없습니다. 우리들에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영생이 있다는 말입니다.

3. 그래서 바울은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간절히 좇아갑니다(12-14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합니다.
교만하지 않고 게으르지 않고 마지막 결승점을 두고 절력질주는 운동 선수처럼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직 최종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목표를 잡으려고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합니까? 몸을 앞으로 빼고 전방을 주시합니다.
13,14절에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합니다.
“오직 한 일”, 즉 오직 한가지 일이 남아 있습니다. 남아 있는 한 가지 일을 위해서 뒤에 것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자신의 과거의 아픈 기억들, 상처들을 완전히 잊어 버려야 합니다. 좋은 일만 생각해야 합니다. 마라톤 선수가 중간에 너무나 고통스러울 때 1등으로 골인할 때 주변에서 환호하는 모습만을 생각하고 연상하고 뛴다고 합니다. 좋은 일만 생각합시다. 그 다음에 자신의 과거 실적들을 잊어야 합니다. 자신의 과거 실적들로 교만하고 자만하면 안됩니다.
다같이 14절을 읽자.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아멘.


선진들을 통해 증거된 그리스도

 

히11:1-12
1963년 10월 19일 새벽 2시. 강원도 인제군 남면 어론리에서 이덕주 중령 일가족 6명을 도끼로 몰살시킨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른바 고재봉 사건입니다. 각 신문들은 대문짝만한 기사를 냈고, 이 충격적 보도에 세상 사람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는 사형을 언도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도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는 회개하고 거듭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교도소에서 고재봉의 방에서 큰소리로 울었다고 합니다. “어렸을 적 우리 동네에도 교회가 있었는데 교회가 나에게 예수를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게 된 것이 아니냐! 교회가, 교회가….” 라고 고재봉은 안타까운듯 흐느껴 울었다고 합니다. 울면서 “이제 나도 좋은 일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교도소 안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주님의 놀라운 능력이 서울 구치소에 강하게 역사했다고 합니다.
이제 사형집행일이 다가왔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고재봉은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요3:16)고 했습니다.
 “또 할 말 있습니까?”
“검찰관님, 제가 웃을 때 방아쇠를 당겨 주세요.”
고재봉은 침착했습니다. 그리고는 소리를 높여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차마 총의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습니다. 그가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총을 겨눈 헌병들에게 죽어 가는 순간까지 ‘예수’를 전하던 그가 “주여 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후렴을 부를 때 그는 웃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웃음으로…. 방아쇠가 당겨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살인마 고재봉이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끔직한 살인죄를 졌던 고재봉이 변한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기에 이런 끔직한 살인자가 변하게 된 것입니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그를 영접하면 이런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 곧 구원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들은 본문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복음의 능력이 어떻게 믿음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는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특히 구약의 선진들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었는가를 살펴보면서 우리들도 그런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아야겠습니다.

1.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신 예수 그리스도(1-3절)

히브리서 11장을 우리들은 믿음의 장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구약 성경에 등장한 많은 인물들의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해서 믿음의 장이라고들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을 영웅적으로 묘사하곤 했습니다. 우리들도 그런 믿음의 사람을 본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1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믿음의 영웅들을 자서전적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택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의 이야기를 다 한 다음에 히브리서 12:1-2절은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1절에서 말한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은 이미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한 구약의 인물들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증인하고 있습니까? 2절에서 그 답을 제시해 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많은 구약의 인물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날 하나님의 구원에 관해서 증거해 준 증인들입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11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우리들의 구원자이시며 모든 문제의 해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면 히브리서를 통해 주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의도에서 벗어난 것이라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1:1절은 우선 믿음의 정의부터 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1,2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①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②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입니다.
③ 선진들이 증거를 얻어 바라본 대상이었습니다.
이같은 믿음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구약 성도들이 어떻게 믿음을 가졌느냐면 ‘바라는 것들의 실상’으로 믿었습니다. 장차 메시아가 오시리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지만 그 약속이 현재에 그대로 이루어진 실상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를 보지는 못했지만 자신들 곁에 계신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잘못 가르치기를 “장차 집 한 채를 갖고 싶으면 그 집이 지금 현재 나에게 있는 것처럼으로 믿으라 이것이 믿음이라”는 아주 이상한 믿음을 설명합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신념(信念)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은 이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믿는 자들입니다. 어떤 일입니까? 그것은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3절에 보면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보이는 이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지 어떤 물질 세계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이와 같은 믿음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2. 믿음으로 드려진 아벨의 제사 속에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4절)

본문 4절을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믿음으로 제사를 드린 아벨을 의로운 자라고 증거해 주셨습니다. 인정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증거와 인정은 바로 아벨이 드린 제물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제물이 어떤 제물이기에 그 제물을 드린 아벨을 의로운 자라 증거하셨습니까? 또한 그 제물을 하나님께서 각별하게 여기시겠습니까?
아벨은 죽었지만 아벨이 믿음으로 드린 제물은 구약 성경을 관통하고 하고 우리들의 믿음을 가능하도록 해 줍니다. 구약 성경이든 신약 성경이든 믿음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됩니다. 아벨이 드린 제물은 아벨의 믿음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무슨 믿음입니까?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믿음입니다. 따라서 아벨이 드린 제물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는 자비와 희생과 긍휼의 정신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제사란 거룩하지 못한 속된 것이 거룩한 것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따라서 이 제사 제도에 이스라엘의 삶과 죽음이 결정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이스라엘에게는 언제나 그 중심에 제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또한 그 제사에는 ‘기름부음 받은 자’가 동원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와 거룩케 하신 제사와 기름부음 받은 자를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란 구약적으로 표현해서 메시아인데 이 말은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는 말은 기름부음 부음 받은 당사자가 바로 예수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 볼 것 같으면 ‘기름’이란 제사에서 나온 용어 개념입니다. 아벨이 어떻게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느냐면 창세기 4:4에 보면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열납해 주셨습니다. 여기 양의 첫 새끼는 아벨의 직업에 따른 소산물입니다. 그러나 기름을 따로 구분해서 드리는 것은 자신의 직업과 상관없는 일입니다. 이같은 행위는 아벨의 하나님께 대한 제사 정신을 고백하는 고백 방식입니다.
왜 하필 기름을 따로 떼어서 드렸을까? 그 이유를 본문 히브리서 11:4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아벨이 이런 식의 예물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11:6). 그 믿음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죄용서와 자비와 긍휼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을 통해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5-6절)

본문 5말씀에 보면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에녹에 대한 기록은 창세기 5:24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난 것은 이미 그가 이 땅에 있을 때 하나님과 동행하였기 때문입니다. 동행했다는 말은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하나님께서 증거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에녹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상태를 두고 말합니다.
창세기 5장의 족보는 결국 “죽었더라”는 족보였습니다. 그런 죽음의 족보 속에서 죽지 않는 족보인 에녹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이런 삶(생명)과 죽음의 족보를 통해서 심판주이신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그 심판은 죄용서 함을 받아 하나님과 동행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분하십니다.
그래서 유다서 1:1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 말씀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삶을 통하여 참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을 보여준 예언자로 나타납니다. 그 예언은 결국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자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거룩해 지습니까? 구약은 제사를 통해서 신약은 그 제사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용서를 받아 하나님의 저주의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은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바로 거룩한 자들입니다. 거룩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래서 본문 히브리서 11:6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어떠한 자들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거룩한 자들입니다. 어떤 자들이 거룩한 자들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죄 용서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습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예언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4. 노아 방주를 통해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7절)

하나님께서 에녹과 동행하시므로 거룩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심판하듯이 하나님께서 노아와 동행하시므로(창6:9)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을 자와 구원받을 자를 구분하십니다.
본문 7절에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고 합니다.
방주 없이도 노아를 구원할 수가 있지 않았을까요? 우리들은 왜 여기서 방주가 필요하며 중요한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방주는 곧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대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방주 이외에 그 어떤 기구나 도구로도 구원받을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심판을 계획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방주 안에는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이 함께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창7:2). 즉 하나님께서는 어디서부터 어디로의 구원인가를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정결한 것으로부터 정결하지 못한 것이 구원을 받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더러운 것으로부터 깨끗한 것을 구분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신약 성경과 오늘날에 이 방주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왜 꼭 그리스도가 필요하는지를 알려면 우리가 왜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 이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왜 필요하게 되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이냐면 우리들이 죄 때문에 심판과 저주가 옵니다. 그러나 그 죄에서 구원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를 통해서 보여준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임을 알려 줍니다. 이 경고를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5.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8-12절)

지금까지 열거한 아벨이나 에녹이나 아브라함,이삭, 야곱 등은 다 믿음을 갖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13절 말씀에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라고 합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았지만 그 약 속의 실체이신 메시아를 직접 보지는 못하고 죽었습니다.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면서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 말은 그 언젠가는 본향에 이르게 될 것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 역시 이들의 긴 여정, 즉 나그네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신 메시아를 증거했던 자들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구원의 반열에 서서 그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했던 자입니다. 그 증거들인 구약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나타났는가가를 통해서 우리들 역시 그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믿음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게 됩니다.

말씀에로 초대

구약의 선진들, 즉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증인하고 증거 했던 자들입니다. 그들의 삶 속에서 우리들이 찾아야 하고 좇아가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어떻게 이루어진다고 예언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또한 우리들은 그 약속과 예언의 성취인 신약 성경을 통하여 구약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들은 앞으로 오실 재림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재 오늘 나에게 오신 것 같은 실체로 믿고 우리들의 믿음과 그 믿음에 따른 순종과 감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자들은 오직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우리들의 죄용서를 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활은 어떠해야 합니까? 각각 자신들의 생활과 직장과 가정과 사업장에서 살펴보자. 나는 과연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벧전 3:18-22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해결되어져야 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져야 합니다. 인간 그 누구이든지간에 죄악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용서치 아니하시고 심판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 부터 이런 죄를 용서받고 해결받기 위해서는 어떠한 길이 우리들에게 제시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에서는 그런 길을 찾기에 심혈을 기울여 왔고 공을 들여 왔습니다. 소위 말해서 인간쪽에서 신을 찾아 나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절대적인 신은 인간의 그런 열망으로 찾아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더욱 몸부림쳤고 인간 자신을 학대하면서 고행의 길을 통해 그 신을 만나 구원을 얻으려고 하지만 그 또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어떠한 인간도 신을 찾아 나서 보아도 그 신은 발견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구원은 영원히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변을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신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자기 가정의 우환을 제거해 보겠다고 공을 들여 왔습니까? 그러나 그런 행동들은 더많은 함정으로 몰아가는 요인으로 등장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불가능하지만 오직 한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이 직접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길입니다. 찾아와 주셔서 우리들을 구원해 주시는 방법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직접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이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밝히고 그 하나님께서 제시한 그 길을 우리가 따를 때 구원이 있음을 알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 분을 믿을 때 우리들에게 구원이 있다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 우리들에게 구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믿고 있는 그 믿음을 내 가슴 속에서만 고백할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시인함으로 우리들의 믿음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믿는 자가 되었다고 문서적으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하여 나의 옛사람이 죽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내가 확실히 믿는 자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없는 세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세례의 선결 조건은 우리들의 믿음입니다. 이런 의미 때문에 오늘 본문은 세례를 물과 접촉시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우리가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1. 세례를 왜 물과 접촉시킵니까?

벧전 3:21에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고 하는데 물은 구원의 표라고 합니다. 이것이 곧 세례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란 사람을 물과 접촉시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과 접촉시키므로 과연 우리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구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구원을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이런 그림으로 우리들의 구원을 설명하고 계신 하나님의 의도를 읽어야 합니다.
물이란 오늘 본문에 보면 심판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심판은 노아시대 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지 않고 범죄할 때 그들을 이 땅에서 심판하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심판하였느냐면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노아 홍수 때 물은 그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이 다 죽었습니다. 땅에 사는 것은 다 죽었습니다. 죄악으로 인하여 이 땅이 더렵혀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나 노아 8명의 식구만이 살아났습니다. 어떻게 살아났습니까? 그들이 물을 피해서 살아남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방주 때문에 물 속에서 건져지게 되었습니다.
(벧전3:20)에 이 사실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명이라.” 모아 가족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물 속과 방주 속 이 두가지를 다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2. 오늘 우리들의 세례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노아 때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물세례로 그 노아 시대 때 노아 홍수의 심판과 구원의 체험을 오늘 나의 체험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물세례를 통해서 지금 우리가 물속에 있다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런 체험을 통해서 우리는 날마다 자신을 물 속에 빠뜨려 죽여야 됨을 뜻합니다. 우리들의 구원 받기 이전의 예사람, 옛성품은 물속에 사장시켜 심판하는 것이 우리들의 세례입니다.
이제 우리가 사는 길과 방법이 있다면 그 심판의 물 속에서 우리의 방주 되시는 예수님 안에서 살아남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심판의 상태에 있는 우리들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차단 되었지만 우리들을 그곳으로 부터 건져 주시는 분이 계시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구원의 방주를 통해 우리들을 건져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이제 노아시대에 노아가 물 속과 방주 둘 다 경험을 가지고 살았던 것 같이 우리들도 심판 받아 마땅한 이 세상과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깨끗한 세상 이 둘 다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세례를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경이로움으로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세례는 복음을 증거합니다.

이 세례란 우리들의 옛사람이 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그림언어라고 했습니다. 이때의 세례란 우리들의 구원을 중심으로 설명한 부분이지만 이 세례를 하나님의 입장에서 어떠한 복음을 우리들에게 제시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인지를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벧전3:18)에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고 합니다.
세례란 어떤 복음을 설명해 주고 있느냐면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죄가 없으신 의인이셨는데 그 의인이 우리들의 죄인을 위해서 죽으셔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심판의 형벌로부터 구원하시고 다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살아나셨음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죽음과 부활을 이 세례라는 것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1절에서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기 전에 “장사 지낸바 되었습니다”라는 사실을 우리가 신앙고백으로 예배 때마다 낭독합니다. 이 사실을 19절에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벧전3: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이 말씀은 천주교와 우리 개신교가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본문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예수 믿지 않고 죽은 사람들이 지옥 가기 전에 연옥이라는 곳에 머물게 된다고 합니다. 그 연옥에 있을 때 예수 믿어 구원 얻는 길이 한번 더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 후에도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하므로서 성경의 전체적인 사상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로 이 본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본문을 이상하게 해석합니다. 이렇게 해석한 이유는 이런 사상이 성경 이외에 외경이라는 곳에 보면 이런 유사한 사상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경으로 인정 받지 못한 유대인의 역사책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는 말씀은 지옥가기 전에 연옥이라는 곳이 있다는 말도 아니요, 그렇다고 예수를 믿지 않고 죽은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해서 구원시키려고 한다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처럼 낮아지셨다는 사실을 언급해 주고 있는 본문입니다. 또한 복음 증거가 구원 얻게 하는데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더욱 가중케 하려는 예수님의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도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다시 사셨음을 세례를 통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말씀에로 초대

우리는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고 그 복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포하는 것이 세례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과 증거

 

벧후 1:16-22

갈릴리 해변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갔던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최대 꿈과 행복은 오늘도 고기를 많이 잡아 풍족한 물질을 소유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변함없이 자신의 경험에 의지해서 갈릴리 해변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지만 한 마리 고기도 잡지 못하고 절망과 낙심 가운데 빠져 있었습니다. 이제 날이 밝았습니다. 막연한 내일을 기약하면서 그물을 손질했습니다. 다음 고기잡이를 위해서 그물을 고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시몬인 베드로에게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상식으로는 맞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고기를 잡는 때가 아니라 마치는 때였습니다. 또한 자신의 경험으로는 깊은 곳에는 고기가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그 때 엄청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상식과 경험이 통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많은 고기도 문제이지만 그 시간 그곳에서 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일 이후 주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더 정확히 표현해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부르셔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위해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를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라고 분명히 자신을 소개합니다(벧후1:1). 그런 사도인 베드로가 본문 말씀을 통하여 무엇을 증거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 증거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삶의 초석이 되고 생명이 될 것입니다.

1. 베드로 사도는 친히 목격했던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16절).

본문 16절을 보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아멘.
사도는 이미 베드로전서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유일한 생명과 구원이심을 증거했습니다. 그 예수의 생명을 간직한 성도들의 구체적인 생활의 모습이 어떠해야 함을 소개했습니다. 그의 메시지 중심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의 영광스러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능력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같은 복음에 관하여 자신이 친히 목격했다고 합니다. 목격했던 사실을 증거합니다.
그의 목격은 이미 변화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모습은 이 땅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영광스러움으로 가득했습니다. 사도는 이 사실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알게 해 주려는 베드로의 열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믿음을 많이 강조합니다. 물론 믿음이 많이 강조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앎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앎이 전제되지 않는 믿음은 맹목적 믿음이 될 확률이 많습니다. 우리들이 얼마나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들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앎이 전제된 믿음, 믿음이 전제된 앎이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알고 그를 믿고 있습니까?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믿는다고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바르게 알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믿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 바른 믿음입니다. 우리가 큰 믿음을 가져야 하고 그 믿음이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의 성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모르면서 성장하지 않습니다.
사도는 지금 자신이 죽기 전에 이 사실을 알게 하고 생각나게 하려고 자신이 친히 목격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벧후1:12-15). 자신이 증거한 이 복음은 결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고 합니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친히 목격한 생명 그 자체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결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하여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닙니다. 홍해를 가르고 요단강을 가르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한 역사의 토대 위해서 주어진 말씀들입니다. 그 사실을 친히 목격하고 경험했던 하나님의 사람들이 전해준 이야기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예수님의 기적을 친히 목격한 자들이 기록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이요, 예수님의 기적이기에 우리들이 이해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분의 능력은 여전히 살아서 역사하십니다. 우리들은 더 이상 강퍅하면 안됩니다. 교만하여 하나님을 외면하고 등을 돌리면 안됩니다.

2.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증거하심(17-18절).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신약의 사도들이 친히 목격하고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먼저 계시로 선지자나 사도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비밀, 즉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보여주셨기에 그들은 친히 목격했고 경험했습니다.
사도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어떤 계시가 임했습니까? 사도는 본문에서 변화산에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크신 영광 중에 변형되셨습니다. 그때 하늘로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마 17:5에 보면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야고보와 요한도 함께 목격했습니다. 이들에게 구름이 덮었고 그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구름은 하나님 영광이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실 때 구름이 동반합니다. 즉 하나님이 나타날 때는 언제나 구름이 나타났습니다.
하늘에 구름 가운데 하나님이 영광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나타나셔서 직접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기뻐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이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이 보다 더 정확한 증거가 있을까?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의 내용을 듣고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우리가 어떤 신앙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우리들에게 축복하신지를 보여줍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외모를 봅니다. 외형을 중요시합니다. 권력과 재물을 많이 소유한 사람들을 좋아하고 따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온전한 믿음을 갖고 있을 때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존귀하게 여겨 주십니다.

둘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 있을 때 우리들을 기쁘게 받아 주십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때 우리들에게 형통의 복이 임합니다.
우리가 부모님께 기쁨을 드리면 부모님은 흐뭇해 하십니다. 신앙 역시 우리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때 하나님은 흐뭇해 하십니다. 어떻게 기쁨을 드릴 것입니까?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 안에 있으면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셋째,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로만 믿고 사랑한다고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말씀을 지키는 일입니다. 순종하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이 순종의 깊으신 뜻을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됩시다. 순종하는 자가 됩시다. 말씀대로 그대로 살아가야겠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증거가 이렇게 정확하게 우리 앞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다른 길이 있을 수 없습니다. 너무나도 확실합니다.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한 예언의 증거(19-21절)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의 뜻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 예언의 말씀을 주의하라고 합니다.
사도가 말씀한 예언의 말씀은 구약 성경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같은 말씀은 읽기만 해도 우리들에게 구원의 말씀으로써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들이 깊이 연구하고 살펴야 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다”(벧전1:10)고 합니다.
그래서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또한 벧후3:16에서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성경을 자의적으로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단자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런 이단자들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주의해야 합니다. 새로운 진리를 발견했다고 자랑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전혀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었고 그 말씀이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소개되고 있을 뿐입니다. 자신만이 진리를 말하고 자신이 해석한 성경 해석이 최고라고 말하는 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말씀 앞에서 두려움을 갖고 겸손해야 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권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인간 저자로 하여금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대할 때 우리들은 겸손한 가운데 읽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된 성경은 성령의 도우심 없이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성령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나 말씀이 선포될 때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너무나 안일하게 대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도리가 아닙니다.

말씀에로 초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록에 의하면 베드로 역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합니다. 죽으면서 자신은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바르게 죽을 수 없다고 하면서 거꾸로 못박혀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 베드로가 죽기 전에 베드로전후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들에게 남겨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말씀을 주실 때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보여주시고 베드로는 목격한 사실을 우리들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목격했던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 중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능력으로 강림하신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위엄스러웠습니다.
우리들은 그분에 관해서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역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믿었습니다. 또한 감격스러운 신앙을 체험했습니다.
이 사실에 관해서 우리들도 전해야 합니다. 이 기쁜소식을 우리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크신 영광과 위엄 가운데 재림하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그때는 심판의 권세를 가지고 강림하실 것입니다. 때가 늦기 전에 우리들은 준비해야 합니다. 지금은 자다가 깰 때가 되었습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의 사람인지 깨닫고 축복 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단을 이긴 어린 양의 피

 

계 12:7-12

우리 신앙인들을 가리켜 전쟁터에서 싸우는 군사로 표현하곤 합니다. 무엇인가를 위해서 싸운다는 말입니다. 그 싸움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그런 싸움입니다. 또한 그 싸움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라고 한다면 그 싸움에서 승리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 싸움은 어떤 싸움입니까? 그 싸움은 결국 영적이 싸움입니다.
에베소서 6:12절에 보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악한 영들인 사단 마귀들과 싸우는 군사들입니다. 그 싸움에서 우리들은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본문 말씀을 통한 사단을 이긴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알아봅시다. 또한 우리들이 어떻게 사단과 싸움에서 승리하게 되는지를 살펴봅시다.


1. 적대자 사단과 미가엘 천사와의 전쟁(7-9절)

본문 7절에 보면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는 말씀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미가엘과 그의 사자”라는 말은 “미가엘과 그 군대”를 말합니다.
또한 “용과 그의 사자”라고 하는데 여기서 용이란 9절에서 말씀한 사단을 의미합니다. 그 사단의 사자라고 했으니 사단과 그 군대를 가리킵니다. 결국 미가엘 군대와 사단의 군대가 하늘에서 전쟁을 펼친 것입니다.

첫째, 전쟁에 가담한 미가엘과 그 군대는 누구입니까?
전쟁의 장소는 하늘입니다. 그 하늘에서 사단 마귀와 싸운 천사는 미가엘입니다. 미가엘은 천사장으로 호칭되었습니다(유다서9절). 그는 사단과 싸우는 천군(天軍)들의 군대 지휘관이었습니다(본문 7절). 이 천사장은 사단과 싸우고 전쟁을 하는 수호천사입니다(겔28:14-16)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키고 하나님의 원수들을 대적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부여받았습니다.
천사는 언제나 사단의 악한 세력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합니다. 다니엘 10:13절에 보면 미가엘 천사가 와서 다니엘을 도와 준 사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천사는 우리들의 경배의 대상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천사들을 보내셔서 보호했다면 그 천사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입니다. 따라서 그 천사들이란 하나님께서 부리는 영물입니다. 결코 우리들의 경배의 대상이 된다거나 기도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천사는 결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중보자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되신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중보자는 피조물이 아닙니다. 천사가 우리들의 중보자가 될 수 없는 것은 천사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하나님께서 부리는 영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봉사하는 봉사자일 뿐입니다.
오늘날은 천사가 우리들을 보호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들을 보호하십니다. 우리들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천상에서 지금도 이 지상을 성령님을 통해서 다스리시고 지배하십니다. 이제는 그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들을 보호하십니다. 그 성령님이 우리들을 보호하십니다.

둘째, 사단과 그 군대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대행자인 미가엘 천사와 그 군대에게 대 일격을 당해 패해 쫓겨났던 큰 용은 옛뱀이라고도 하고 마귀, 사단이라고 합니다. ‘사단’은 대적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같은 대적자는 욥을 참소했습니다(욥1:6). 또한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참소했습니다(슥3:1). 이 사단은 하나님의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했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대적자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왕상11;14, 삼상29:4).
히브리어로 ‘사단’이라고 한다면 헬라어로 ‘마귀’라고 합니다. 이 마귀는 ‘온 천하를 꾀하는 자’(계12:9), ‘공중의 권세 잡는 자’(엡2:2), ‘거짓의 아비’(요8:44)로 지칭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 부하들은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엡6:12)로 이야기합니다.
고후 11:3절에는 그는 온 세상을 속이는 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단의 ‘역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장난’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단의 올바른 정체를 인식하고 대적해야 합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이 사단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 “하늘의 큰 음성”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10절)

이 사단이 미가엘과 전쟁에서 패하여 쫓겨났습니다. 마귀는 패배했습니다. 마가엘과 그 군대가 사단 마귀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쫓겨났습니다. 미가엘 군대가 무엇으로 사단 마귀와 싸워 승리했습니까? 이것을 알려면 본문 10-12절에서 기록하고 있는 “하늘에 큰 음성”(10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하늘에서 들려 오는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순교당한 자들의 음성입니다. 그 순교당한 자들을 “여러 형제들”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계시록 6:9-11절에 기록된 순교자들의 음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미가엘 군대가 사단의 군대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때 들려 왔던 음성은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로 하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과 권세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을 구원해 주신 구원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저주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을 피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이제 죄를 범한 인간은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종이 되어 버렸습니다. 마귀의 종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피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으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어떻게 구원하시습니까?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단 마귀를 결정적으로 격퇴했습니다.
창세기 3;15절의 말씀의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옛뱀이요, 마귀의 머리를 강타했습니다. 그 마귀 소굴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제 사단 마귀는 자신의 머리에 대 일격을 당했습니다. 이제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칩니다.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까지도 넘어지게 하려고 몸부림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인하여 마귀는 결정적으로 패배했습니다. 이제 살아남기 위해 발작하면서 쫓겨났습니다. 이제 자기 때가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의 머리에 대 일격을 가하셨습니다. 그래서 비틀거리면서 쫓겨났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힘이요, 구원의 능력입니다. 권세입니다. 이같은 예수 그리스도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큰 음성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 음성은 다른 음성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능력과 권세를 증거하는 음성입니다. 이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소리가 요한의 귓가에 들려 왔고 그 요한이 다시 요한계시록을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요한이 들었던 그 음성을 동일하게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지금도 사망의 권세, 사단의 권세에 눌려 방황하고 있는 자들에게 이 기쁜소식인 예수님을 소개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해방과 자유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누릴 수 있도록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얼마나 이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3.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11-12절)

사단 마귀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순교당한 하나님의 종들을 참소했던 사단이 하늘에서 쫓겨났습니다. 미가엘 천사 뿐만 아니라 “여러 형제” 역시 승리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능력과 권세로 인하여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사단 마귀는 패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여 승리하였습니까? 승리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첫째, 어린 양의 피로 승리했습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여기 상반절에 보면 “어린 양의 피로 인하여 저를 이기었다고 합니다. 어린 양의 피를 힘입고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할 때 승리가 있었습니다.
믿음의 형제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정결케 하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그들에게 뿌려졌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그들의 마음에 평안을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그들의 죄를 씻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눈처럼 희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빛이 임했습니다. 그들은 사단의 공격을 십자가의 피로 격퇴했습니다. 그들은 보혈의 능력으로 승리한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사단과 싸워 승리하는 방법은 그들과 동일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에게 임하면 큰 붉은 용, 옛뱀의 머리가 깨질 것입니다. 그 깨어진 머리에 박혀진 그리스도의 발꿈치 자국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도 그리스도의 보혈의 깃발을 들고 나갈 때에 옛뱀의 이마에 우리의 발꿈치 자국을 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보혈이 나의 속에 나의 생명으로 흐르고 있습니까? 우리들은 더 이상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면 안됩니다.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 등을 돌리지나 않았는지 자문해 보십시오. 사단 마귀에게 넘어가면 안됩니다. 그것은 죄의 소굴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731부대의 한 군의관은 마루타 생체 실험을 하면서도 죽어가는 마루타를 수술하는 자신이 덤덤하다는 사실을 놀랬다고 했습니다. 마귀에 유혹되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의 성품이 얼마나 악랄합니까? 이런 죄와 마귀로부터 승리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습니까? 그 예수의 생명과 보혈의 피가 사단과 싸워 승리하게 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둘째, 증거하는 말, 즉 보혈의 말씀으로 승리했습니다.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사단과 싸워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사단을 이긴 형제들은 자신들이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사단을 이겼습니다. 사회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는 사단의 작전에 저항하되 말씀의 원리로서 저항해야 합니다. 어린 양의 보혈을 전할 때 사단을 이깁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중단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을 증거할 때 사단은 우리에게 침범하지 못합니다. 복음증거는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복음을 증거할 때 성령이 함께 하시므로 사단이 침범하지 못합니다. 혹 침범한다고 할지라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복음을 증거한 하나님의 종들에게 능력이 나타납니다. 마귀가 접근할 수 없다 방해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이런 경험들을 갖고 있습니까?

셋째, 죽기까지 생명을 아끼지 않는 헌신으로 승리하게 됩니다.
사단을 이긴 ‘형제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희생과 헌신입니다. 아무나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예수의 보혈로 인하여 구원을 받은 자들만이 참된 희생과 헌신을 합니다. 이런 희생과 헌신은 사단을 이기게 합니다. 이미 그 헌신에는 보혈의 힘이 있고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10:44)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한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눅17:33) 고 했습니다.

말씀에로 초대

우리들은 붉은 용의 정체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또한 그 붉은 용의 정체와 싸워 승리하는 길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붉은 용과 싸워 승리를 확신하면서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증거해야 합니다.
복음을 증거하면서 말씀을 실천하고 거짓을 폭로하며 말씀을 사수해야 합니다. 이 일에 우리들의 생명을 걸고 헌신하는 것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이며 사단의 머리를 짓밟는 길입니다. 이것이 바로 승리의 길입니다.
부패한 사회 개혁을 부르짖지만 말고 그 부패한 사회의 배후 조종자는 붉은 용과 싸워야 합니다. 그들의 정체를 폭로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어린 양의 피로 대결해야 합니다. 보혈의 깃발을 들고 보혈의 말씀을 전파하는 붉은 용을 잡는 어린 양의 용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 복음의 능력 끝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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