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목차 돌아가기] |
고신일 목사 예화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을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활과 영생을 믿지만 여전히 여러 시험과 환난이 우리에게 닥칩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성도는… 부활과 영생을 믿는 믿음으로 시험을 이기고
승리의 삶의 간증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 주간 어느 신문 한 구석에 보니까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믿음 좋은 어느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핍박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때마다 찬송가 395장 '너 시험을 당해 범죄치 말고’를 불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서 심방 온 성도들이 시어머니에게 전도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며느님이 늘 어머님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합니다.”
그러자 시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내 며느리는 왕내숭이에요. 무서운 아이입니다.
날 위해 기도한다기에 들어보니
시어미 이기자는 노래만 부르고 있었습니다.”
다시 성도가 물었습니다. “무슨 노래를 불렀는데요?”
그러자 시어머니는 곧장 395장 찬송을 불렀습니다.
"너 시어밀 당해 범죄치 말고 너 용기를 다해 곧 물리쳐라
너 시어밀 이겨 새 힘을 얻고 주 예수를 믿어 늘 승리하라”
<국민일보 2003년 4월 15일>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때로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며느리의 찬송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미워했던 할머니처럼
우리의 찬송을, 기도를… 잘못 이해하고
우리를 향해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찬양이나 우리의 기도, 신앙이 오해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사람은
모든 시험을 이기고 범사에 평안함과 기쁨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낙심치 말고 당당히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엡3:13)
지용수 목사 예화
안식 후 첫날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이 무서워서 문을 닫아걸고 숨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그곳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있는데 문을 열지도 않으시고 그냥 들어오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뼈도 있고 살도 있지만 보통 몸이 아니라 영광의 몸입니다. 천사의 몸처럼 벽이 있어도 상관없이 왕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부활하면 그런 몸이 됩니다. 또 지금이라도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우리는 변화하여 그럼 몸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영광의 몸이 될 때는 교통사고로 잘린 다리도 다시 생기고 빠진 머리도 다시 나고 수술로 생긴 흉터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성형 수술한 것은 어떻게 될지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이 천국에 갔더니 천국 문 앞에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왜 들어가지 않고 여기에 계십니까?”
“문에 있는 글을 보시오.”
그래서 그 사람이 문을 쳐다보니 문에 ‘대조중’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형수술을 하도 많이 해서 그 사람이 맞는지 대조하느라 그렇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형수술하지 않은 사람은 바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성형 수술한 사람은 그 사람이 진짜라는 것이 확인될 때까지 기다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한 한국 여자는 지옥에 갔는데, 지옥 문 앞에도 사람들이 줄을 서 있더랍니다.
“왜 들어가지 않고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습니까?”
“저기를 보시오.”
그래서 쳐다보니 ‘보수중’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왜 지옥을 보수하느냐고 물으니 한국 여자들이 불가마에 하도 왔다갔다해서 불에 면역이 생겨 지옥에서도 잘 견디기 때문에 지옥 불을 더 뜨겁게 하는 중이라고 하더랍니다.
웃기 위해 만든 이야기일 것입니다.
성형수술을 했든 어쨌든 우리가 부활할 때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영광의 몸을 입고 부활하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김춘섭목사 예화
우리 교단에서 스스로를 ‘반쪽 목사’라 부르던 전생수 목사님이란 분이 계셨습니다. 지난해 10월14일 새벽기도를 하던 중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52세의 나이였습니다. 미리 써놓은 유서에 따라 눈과 신장 등의 장기를 모두 7명에게 기증하였습니다. 그가 죽기 1년 전인 2004년 사순절을 맞이하면서 이미 유서를 써놓았습니다. 스스로를 촌놈이라며 ‘만득이’로 불러주길 원했던 그의 유서 내용입니다.
“이 땅에 ‘아무개'라는 이름을 달고 산 지 쉰 한 해 되는 봄. 예수의 도에 입문한 지 스물여덟 번째 되는 해에 유서를 쓰노라. 나는 스물 셋 되던 해에 예수의 도에 입문하여 늦은 나이에 학문을 접하며 좋은 스승들을 만났고 좋은 길벗들을 만나 여기까지 살게 된 것에 감사하노라.
나는 오늘까지 주변인으로 살게 된 것을 감사하고 모아 놓은 재산 하나 없는 것을 감사하고 목회를 하면서 호의호식하지 않으면서도 모자라지 않게 살 수 있었음을 감사하며 이 땅에서 무슨 배경 하나 없이 살 수 있었음을 감사하고 앞으로도 더 얻을 것도 없고 더 누릴 것도 없다는 것에 또한 감사하노라.
사람들의 탐욕은 하늘 높은 줄 모르며 치솟고 사람들의 욕망은 멈출 줄 모르고 내달리며, 세상의 마음은 흉흉하기 그지없는 때에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음에 참으로 감사하노라.
이에 남은 이들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하노니,
첫째, 나는 치료하기 어려운 병에 걸리면 치료를 받지 않을 것인즉, 병원에 입원하기를 권하지 말라.
둘째, 나는 병에 걸려 회복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면 어떤 음식이든 먹지 않을 것인즉 억지로 권하지 말라. 또한 내가 의식이 있는 동안에 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 나누기를 꺼려하지 말라.
셋째, 내가 죽으면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알려 장례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넷째, 내가 죽으면 내 몸의 쓸모 있는 것들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는 내가 예배를 집례할 때 입던 옷을 입혀 화장을 하고, 현행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고향 마을에 뿌려 주기를 바란다.
다섯째, 내가 죽은 뒤에는 나에 대한 어떠한 흔적도 땅 위에 남기지 말라(푯말이나 비석 따위조차도). 와서 산만큼 신세를 졌는데 더 무슨 폐를 끼칠 까닭이 없도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나는 목회자로 살면서 목회를 위한 목회, 교회를 위한 목회를 하지 않고, 우리 모두의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그리고 우리 가운데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목회를 하였으니 여러분들이 앞으로도 계속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기를 바라며 우리 모두가 영원한 생명 안에서 어우러질 수 있으리라 확신하노라.
예수의 도에 입문한지 스물여덟 번째 되는 해 봄
2004년 2월 25일 사순절 첫 날에 虛耳(만득이) 전생수 씀”
주님과 함께 했다는 삶이었기에 아무런 미련이 없습니다. 그의 책 제목처럼 ‘더 얻을 것도 더 누릴 것도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저 모든 삶이 감사하였습니다.
요즘 연세 드신 분들이 한잔 하면서 건배할 때에 “9988, 234를 위하여”를 한다고 합니다.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이틀(2) 아프고 사흘 째(3) 사망(4)하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오래 살기를 원하고는 있지만 다 죽는다는 것도 인정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다 죽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까? 빨리 가시면 됩니다. 그러기 싫으면서 주님을 만나기 원하는 것은 욕심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안 보이면 못 믿겠습니까? 그분의 음성이 들리지 않아서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고 있습니까?
그분의 은혜를 경험하고 싶으십니까? 주님은 조용하게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찾아오십니다. 도마를 향하여 말씀하신 것을 다시 기억합니다. “내 손을 보고 믿는 자가 되라. 그러나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주님의 손이나 어떤 것을 보고서가 아니라, 주님을 보지 못하고도 이미 내게 임하고 있는 넉넉한 은혜를 깨닫는 것, 이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 모습입니까!
서금석 목사 예화
Godpeople이라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약 만 오천명정도가 설문조사에 응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죽어서 부활할 것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또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약 82%가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부활절을 어떻게 보내느냐의 질문에는 36%가 '행사를 따라 형식적으로 보내는 것 같다'라고 대답했으며, '특별히 다르게 보내지는 않는다'고 대답한 사람이 28.3%였으며, '진정 기쁜 마음으로 부활절을 보낸다'라고 대답한 사람은 불과 28.4%였습니다. 이어 부활절 문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는 '형식적으로 치러진다'고 말한 사람이 64.5%, '점차 세속 문화를 따라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 사람이 13.4%, '관심없다'는 사람이 13.4%나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무서운 마음의 질병 중의 하나가 “의심”이라는 병입니다. 금방 보기에는 의심이 별로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지만 사실 미움과 증오, 살인 같은 무서운 죄가 의심에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가정불화의 가장 큰 원인도 의심하는 마음입니다. 부부가 서로 믿지 못함으로 가정들이 깨어지고 있습니다. 의처증, 의부증이라는 정신적인 질환도 의심 때문에 오는 것이지요.
요즘 병원에서는 친자확인 검사가 유행한다고 하지요. 침이나 지문에서 DNA를 추출하여 간단한 방법으로 친자를 손쉽게 확인하는 유전자 감식방법이 개발되었기 때문입니다. 부부사이의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자녀가 어느 날 의심이 되기 시작합니다. “정말 내 자식이 맞나?” 의심이 되니까 유전자 검사를 하지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통계에 의하면 검사를 의뢰한 건수의 20%가 친자가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심이라는 것은 사단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무기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일단 의심이라는 병에 걸리면 그때부터 기도도 안 되고 말씀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의심은 신앙생활이 병들게 하는 virus와 같습니다.
맨 사람 아담과 하와가 실패한 것도 바로 이 의심 때문입니다. 사단이 여자를 유혹할 때에 쓴 전략이 바로 하나님을 의심하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사단의 이 말은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이 때 여자가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라고 하면 될텐데, 여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동산 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있지만... 동산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다.’라고 말합니다. 여자의 이 말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단지 ‘먹지 말라’고 했지 ‘만지지도 말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또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지 ‘죽을까 하노라’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잃었습니다. 그러자 사단은 이런 의심하는 마음을 곧 바로 공격합니다. ‘아니다 죽지 않는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라고 유혹합니다. 결국에는 여자가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의심하는 마음은 사단에게 노출되기 쉽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면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혹시 믿음을 잃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성도들이 믿음을 잃어버리면 제일 먼저 오는 현상은 염려와 두려움입니다. 믿음과 염려는 반대개념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염려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잃어버리면 자신도 모르게 염려하게 됩니다. 여러분 문제가 많아서 염려하는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삶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있어 왔습니다. 삶의 문제가 있던 없든, 또 크든 작든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면 모든 것이 염려거리가 됩니다.
일반 제자반 교재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항상 물질 염려로 사시는 권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재산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닌데도 언제나 “돈, 돈” 하면서 염려와 걱정으로 살았습니다. 믿음이 자라지 않고 늘 힘든 삶을 삽니다. “내가 왜 이렇게 걱정하지?” 늘 염려에 매여 있는 자신이 이상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깨달았습니다. 이 권사님이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그 때의 충격은 대단히 컸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큰일 났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사니? 돈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로부터 늘 이 말을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자신도 모르게 돈, 돈 하고 산 것입니다. 나이 50이 넘었는데도 그 마음은 아버지가 돌아 가셨을 당시 10대 때의 마음으로 사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보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육신의 아버지보다 더 좋은 아버지가 계심을 알았습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깊이 체험하고는 “아버지, 아버지”하면서 그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는 고침을 받기 시작하는데 그때부터 물질에 대한 염려가 사라졌습니다.
조재진 목사 예화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도마처럼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안 믿어진다고 말합니다. 왜 안 믿어집니까? 체험을 못해서 그렇습니다. 저는 너무 잘 믿어집니다. 왜냐하면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수박서리를 하다가 주인에게 걸린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원해서 간 것이 아니고 저보다 힘센 친구에게 억지로 끌려서 갔는데, 주인이 나타나자 다 잽싸게 도망하고 바보같이 저만 붙잡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인이 좀 악랄한 사람이었습니다. 저희 집으로 저를 끌고 가서는 수박밭 전체를 다 물어내라고 말했습니다. 부모님이 그렇게 해주기로 하고 저는 겨우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 주인은 학교에 가서 제가 수박서리해서 수박밭을 다 망쳤다고 교장선생님에게 말했습니다. 이 일 때문에 완전히 제 스타일이 구겨졌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착한 아이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공부는 좀 못하고, 힘은 좀 없어서 친구들하고 싸우면 매일 졌지만 그래도 착한 아이라는 칭찬 때문에 살았는데 그런 일을 당했으니 참 한심했습니다. 그때부터 제 안에는 죄책감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죄에 대한 눌림, 죄인이라는 의식이 저에게 있었습니다. 주눅 든 것이지요.
그런데 중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때 부흥회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제가 열심히 부흥회에 참석한 것 같습니다. 집에도 가지 않고 교회에서 잠을 자면서 어른들 틈에 끼어 기도하던 제가 그날 밤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너무 생생합니다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장면이 close-up 되어 저에게 보였습니다. 피흘리시며 고통스러워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는 순간 예수님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던 핏방울이 저에게 떨어진 것입니다. 그 순간 저는 마치 머리 위에서부터 발끝까지 마치 때를 밀듯이 깨끗하게 씻어주시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기를 “네 죄를 사했다”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순간 죄 사함의 기쁨을 맛보기 시작했습니다. 죄 사함의 감격, 예수님의 보혈로 죄를 씻김 받은 것이지요. 저는 그 때 ‘아 죄 사함이란 이런 것이구나’ 라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체험을 통해 비로소 안 것입니다.
그 때부터 저는 죄 사함 받았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단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주로 저처럼 잘 못 믿는 사람들은 체험을 해야 겨우 믿습니다.
도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부활의 주님을 직접 만나고 그의 못자국과 창자국에 손을 대는 순간 모든 불신앙과 의심이 사라졌습니다. 그때 도마가 한 고백이 바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주님의 못자국, 창자국을 만지는 것처럼 그렇게 주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이동원목사 예화
회의는 극복할 수 있지만 모든 회의가 반드시 유용하고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회의는 불필요하게 우리가 만들어 직면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도마가 회의에 빠지게 된 계기를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도마가 공동체를 소홀히 한 까닭이었습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24절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열두 제자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만일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 자신을 나타내셨을 때 거기 있었다면 다른 제자들과 달리 혼자 회의에 빠질 이유가 있었을까요? 그러나 불행하게 그때 도마는 어떤 이유인지 제자들의 모임에서 이탈해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은 공동체를 통해서만 성숙하도록 하나님은 디자인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고 말씀합니다. 예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성도의 교제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우리 교회 가장 중요한 교제의 장인 목장 교회에 꼭 참여 하십시오. 그 곳이 우리가 진정한 믿음의 가족들을 경험하며 서로가 영적으로 자라가는 성숙의 마당인 것입니다.
과거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가장 찬란한 빛을 발하던 계절인 청교도 시대에 청교도들은 이런 신앙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일 예배를 성수한다. 가능한 주간 성도의 교제 모임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가 성경적인 명령 때문이기도 했지만, 거기에는 그들 나름의 아주 실용적인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그들은 서로 서로 이렇게 모임 참석을 격려했다고 전해집니다. “당신이 빠진 그날 모임에 주님이 특별하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부흥이 일어난다면 형제 자매여, 당신의 영적 손해를 상상해 보라”고. 만일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고 주님의 기대를 성취하기 위한 거룩한 모임들을 세상에서 친구들과 약속한 모임보다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Again 1907'부흥을 기대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미국의 유명한 루스벨트 대통령 당시 그가 출석하던 워싱톤의 한 교회에 토요일 이런 전화가 걸려 왔다고 합니다. “내일 주일에 루스벨트 대통령께서 교회 예배에 참석하시겠습니까?” 이때 그 교회의 행정을 담당하던 분이 아주 기막힌 전설적인 명답을 한 것으로 전해옵니다.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참석은 불확실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는 예배에 반드시 참석하실 것입니다. 그 분을 만나러 오시면 좋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분의 충고처럼 우리의 주일 모임에 올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하고 예배를 드린다면 그리고 목장 모임에 참여한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위대한 영적 부흥을 체험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믿음의 회의는 눈 녹듯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견고하게 자라 갈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찬란한 빛을 발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곽선희 목사 설교 전문
요한복음 20 : 24 ∼ 31
여씨춘추(呂氏春秋)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귀에 익숙치 않은 책입니다 마는 이것은 중국 춘추시대에 기록된 명작입니다. 혹 여람(呂覽)이라고도 합니다. 여불위라고 하는 분이 무려 삼천 명이나 되는 지혜자들의 지혜를 모아서 편찬한 스물여섯권으로 된 중국이 자랑하는 명저서입니다. 이 여씨춘추에 보면 아주 간단하고 평범한 것 같으나 많은 진리를 담은 그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한 사람이 도끼를 잃어버렸는데 그가 생각하기를 이것은 이웃집에 있는 아이가 이 도끼를 훔쳤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걸음걸이를 보나 그의 안색을 보나 그가 말하는 것을 보나 그 행동거지를 볼 때 틀림없다고 저 어린아이가 도끼를 훔쳤다고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 뒤에 얼마 있다가 산골짜기에 나무하러 나갔다가 잃어버렸던 도끼를 찾았습니다. 이 일이 있은 다음에 그 집 아이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의심하던 아이를 보았더니 그의 행동이나 태도나 얼굴이나 어디를 보아도 도끼를 훔칠 그런 아이가 아니더라는 겁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순진한 아이인 것을 발견하게 되었답니다. 결국은 아이가 변한 것이 아니고 아이를 보는 자기 눈이 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의심은 병입니다. 의심은 불치병입니다. 의심은 나 자신의 병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건 나 자신의 병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은 믿음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못 믿고 세상도 못 믿고 누구도 못 믿고 아니 나 자신도 못 믿어요. 이건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요새 와서 인격을 평가합니다. 그의 소유에 의하여 소속에 의하여 능력에 의하여 아이큐…… 다 생각합니다마는 뺄 수 없는 절대적 평가 지수가 있습니다. 바로 신용지수입니다. 크레딧입니다. 신용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아무 쓸모 없습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은 쓸모 없는 인간입니다. 더 바랄 것도 없습니다. 자 보세요. 경제도 트러스트에 의해서 평가됩니다. 신용등급입니다. 나라도 신용등급입니다. 회사도 신용등급입니다. 신용등급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복잡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공산주의가 왜 무너졌습니까? 공산주의 사회가 무너진 이유? 간단합니다. 그들은 기술도 있고 자본도 있습니다. 능력도 있고 다 있는데 신용이 없습니다. 공산주의 사회는 믿지 않습니다. 아무도 안 믿습니다. 불신사회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비밀경찰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 스파이가 있는 거요. 서로 의심하고 결국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큰 복은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믿어지는 것, 믿어지는 것이 복이에요.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 복이요. 위대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위대한 인격의 위대한 축복의 결과입니다.
가장 큰사랑은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가정교육백서에 보니까 어떻게 하면 자녀들을 바로 가르칠 수 있을까? 이 방법 저 방법 열심히 연구해 가지고 얻은 마지막 결론, 딱 두마디입니다. 이것이면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들어보시겠어요? I still love you. 나는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 또한 두 번째, I still trust you. 나는 너를 믿는다. 두 마디면 충분합니다. 여러분 가정교육이 빗나갔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두 마디가 없었어요. 이 두 마음이 없었어요. 거기서 빗나간 거예요. 이유는 간단해요. 진단도 간단하고 해결도 간단합니다. 그러나 실천은 어렵습니다. 끝까지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너를 믿는다. 이보다 더 훌륭한 교육은 없어요. 그 누군가가 열심히 뭐 박사가 되가지고 연구를 해봐도 별 얘기 없어요. 이 두 마디뿐이에요. 이것이면 끝나는 거예요. 사랑한다는 게 뭡니까? 사랑한다는 것은 Full Understanding 입니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실대로 이해하고 그 처지대로 이해하고 충분히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이에요. 또 하나는 인내하는 것입니다. 오늘만 보는 게 아니에요. 기대하고 기다려주는 거예요. 얼마나 기다려 줄 수 있느냐 하는 거죠. 예? 얼마나 기다려 줄 수 있느냐.
우스운 얘기입니다만 제가 아는 권사님 한 분 옛날에 상하이 대학 영국계학교를 다녔는데 영어로 하는 학교요. 그때에 연예를 하던 이야기를 하는데 너무 재미있더라구요. 노총각 하나가 밤낮 따라다니면서 사랑한다고 저를 쫓아다니는 사람이 있었는데 눈이 하얗게 오는 날 문밖에 서 있는 걸 보면서 이렇게 내려다보고 그때부터 목욕을 했대요. 데이트를 하러 나간다고. 한시간을 두고보니깐 여학생들이 전부 지켜보고 내려다보는데 여전히 서있거든 한시간이 지난 다음에 "야. 야, 내려가 봐 줘라. 야. 그 사랑해 줘라. 결혼해 줘라." 그 친구들이 그랬대요. 그래 결혼했다 그래요. 세상에 콧대가 세도 좀 지나치긴 했지만 사랑이 뭡니까? 기다리는 거예요. 저분을 위해서 기다리는 거 절대 지루하지 않아요. 다 한번 해봤잖아요 옛날에. 진짜로 사랑할 때는 기다리는 것도 행복한 거야. 기다리는 게 절대로 피곤하지 않아요. 그때만 사랑한 거예요. 기다리는 마음이 피곤해지고 화가 나고 뭐 짜증이 나고 그러면 물 건너간 줄 아세요. 그건 끝난 거요. 또 하나는 믿어지는 거예요. 이상하게 그분의 말은 다 믿어져요. 또 믿을 수 있어요. 믿는 것이 Trust,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거예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랬어요. 요한복음 13장 1절에 보면,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는데 사실은 사랑 받을만한 사람들이 못됩니다. 예수님, 내일 아침 십자가에 돌아가셔야 할텐데 제자들 뭐 네가 크냐 내가 크냐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고 꿈을 꾸고 소위 세속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그 꼴이란 못 봐주겠어요. 성경을 읽다가도 화가 나요. 뭐 이따위 사람들이 있나 그러고 싶은데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사랑하셨어요. 특별히 오늘 본문을 보십시다. 예수님은 도마를 사랑하셨어요. 도마라는 사람, 특별한 사람이에요. 어찌 됐던 열 제자가 모여있는 중에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보고 그들은 감격하고 기뻐했습니다. 몇 시간이나 같이 지냈는지 모르나 이제 그 다음입니다. 이 열 제자들이 도마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 보았다. 분명히 예수님은 부활했더라"라고 했는데 '도마' 아주 고집스러운 사람입니다. "아니, 나는 못 믿어. 내가 어떻게 죽은걸 알거든. 어떻게 비참하게 죽었다는 걸 알거든. 그가 살아나다니 말도 안 된다." 열 사람이 보았다는 데도 "아니, 너희들처럼 나는 보기만 해서는 안돼. 내 손으로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고 그 다음에야 믿겠노라."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아주 특별한 사람이에요.
이렇게 옹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 예수님이 다 아셨죠. 그리고 오늘 성경말씀대로 예수님은 이 도마를 사랑했습니다. 의심하는 것 알면서도 고집부리는 것도 알고 비판이성도 알고 그의 판단도 압니다. 절대로 못 믿어, 라고 하는 이 몹쓸 인간이지만 예수님은 그를 사랑했어요. 찾아가서 "만져 보라. 만지고 싶으냐? 만져봐. 그리하여 믿는 자가 되라." 얼마나 얼마나 귀한 복음이요. 얼마나 놀라운 은총입니까? 그의 처지를 다 이해하셨습니다. 아주 알고 보면 의심받는다는 것처럼 괴로운 일이 없거든요. 엄연한 사실이 의심받을 때 참 불쾌한 것이거든요. 그러나 아무 비판 없이 만져 보라. 충족하고, 만져보고 싶으면 만져보고, 끓어 안고 싶으면 끓어 안고 그리고 믿는 자가 되라. 그의 비판적 욕구를 다 충족해 주시면서 믿어라 그랬어요.
창세기 18장 15절에 보면 아주 재미있는 복음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아시는 대로 아브라함과 그 사라가 고향을 떠날 때 아브라함 나이 75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게 자녀를 주마. 네게 땅을 주마, 약속하셨어요. 25년을 기다렸는데 아직도 자식이 없어요. 그리고 아내는 90세가 되어서 벌써 단산했어요. 단산한 지 오래됐어요.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죽은 것과 방불한 자기임을 알면서도' 생리적으로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야. 이미 생리상 생활을 다 떠났으니까. 단산했으니까. 바로 그런 때에 천사가 와서 말씀하기를 "네 아내 사라가 내년에 이때에 아들을 낳으리라" 그러거든요. 사라가 천막 뒤에서 '픽'하고 웃었습니다. '웃기누만. 내 나이 얼만데, 저 소리 들은 지가 25년인데 다 지나갔습니다. 물 건너갔습니다.' '픽'하고 웃었어요. 기가 차서 천사가 알고 네 아내가 왜 웃느냐? 사라가 너무 다급해서 "아니, 웃지 않았습니다." 거짓말이지만 거절을 합니다. 그때에 천사가 말하기를 "웃었느니라" 그랬어요. 이해하는 거요. '웃을만 하지. 안 웃겠느냐. 웃지 않을 수가 없지.' 나는 그게 그렇게 고마워요. 나 같으면 "너 왜 웃었냐. 믿음이 없냐? 약속했던 거 취소한다." 그렇잖아요? 그게 보통이지, 그게 율법적인 거죠. 그러나 '그렇지. 인간의 나약함을 아는데 어찌 안 웃겠느냐. 웃었느니라. 그러나 아들은 낳으리라.' 그 다음부터 믿음을 다시 가지는 거예요. 죽은 것과 방불함을 알고도 거기서 다시 믿음을 정비합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았어요. 너무 기뻐서 아들을 낳아놓고 '이삭'이라 그래요. 이삭이 웃음이란 뜻이요. 자 생각해보세요. 인간의 나약함, 인간의 의심, 인간의 허물, 다 아십니다. 그리고 사랑하셨습니다. 여기 복음이 있습니다.
또한 믿음을 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도마의 미래를 믿은 것입니다. 현재를 믿을 뿐 아니라 먼 미래를 믿었습니다. 믿어 주었습니다. 신뢰였습니다. 그리하여 믿는 자가 되라. 믿는 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대표적인 CEO라고 하는 잭 웰치라고 하는 분을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잭 웰치의 기록을 보면은 어렸을 때 장난이 심하고 공부를 잘 못했대요. 모든 사람으로부터 꾸중을 받고. 그러나 그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 어머니만은 늘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너는 다 할 수 있다고 나를 믿어주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니라고 할 때에도 어머니만은 나를 믿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내가 있다'고 말합니다. 단 한 사람이나를 믿어 줄 때 나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858년 뉴욕에 어느 가정에 한 어린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소아마비요 시력도 약하고 천식까지 있어서 촛불을 끌 기력도 없는 허약한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가진 장애는 장애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그리고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면 오히려 장애 때문에 모든 사람이 너를 주목하게 될 것이고 신화와 같은 기적을 낳게 될 것이다. 나는 너를 믿는다.' 이 아이가 자라서 스물세살에 뉴욕주 주의원이 되고 28세에 뉴욕 시장 출마하고 주지사와 부통령을 걸쳐서 미국 대통령이 됩니다. 휠체어를 타고 1906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이 미국 26대 대통령 데오도르 루즈벨트입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를 믿었습니다. 그런 고로 믿는 사람이 됐습니다.
예수님께서 도마를 믿어주었습니다. 도마는 믿는 사람이 됐습니다.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믿음의 주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신학자 칼 바르트의 말입니다. 본문의 특징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의심하는 자를 비판하지 아니하시고 의심하는 자를 믿어주었다는 겁니다. 의심을 심판하지 않고 의심하는 자를 만나주셨다는 겁니다. 아무 거리낌없이 그를 믿어주었습니다. 찾아오사 믿어주었고 믿음을 주셨고 믿음의 고백을 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도마는 남다른 신앙고백을 합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당신은 나의 주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고백 뒤에 그는 이 믿음대로 살아가요. 열두 제자 중에 가장 멀리멀리 인도까지 와서 설교를 했고 인도에 그의 무덤이 있습니다. 인도까지 와서 순교를 했습니다. 오늘도 도마가 세운 그 교회가 연연히 이천년 동안 이어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장 의심이 많았던 그 사람, 확 돌려놓으니까 가장 충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는 말씀이죠.
벤 부렌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예수 부활 이전에는 그리스도인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예수 부활,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믿음, 그 믿음을 가지고야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나를 믿을 수 있고 남을 믿을 수 있고 세상을 믿을 수 있고요.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믿게 됩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만이 생명의 길을 알 것입니다. 다시 주의 음성을 들어보세요. "그리하여 믿는 자가 되라."
* 기도
하나님 아버지 믿음 없는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엄연히 믿어야할 일을 믿지 않고 많은 날 의심 속에 헤매며 살아왔습니다. 불쌍히 여기어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부활신앙을 가지고 믿음의 사람이 되어 모든 사람에게 믿음을 심어주고 믿음을 나누어주고 믿음을 세워주고 믿을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할 수 있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오직 믿음의 사람들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 영헌목사 설교 예화
말기암 환자가 의사로부터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현대과학으로는 고칠 수 없다니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억울하고 불쌍했습니다. 어느 날 아들내외가 외출을 하여 혼자 집을 지키고 있는데 강도가 흉기를 들고 침입했습니다. 목에 흉기를 들이대며 “돈만 내 놓으면 목숨은 살려준다. 소리 지르지 마라, 돈만 내 놓으면 목숨을 살려 주겠다.” 위협을 했습니다. 말기암 환자인 이 할머니가 강도를 향해 욕을 퍼붓습니다. “이놈아! 의사도 못 고친다는데 네깐놈이 어떻게 날 살려. 의사도 죽는다고 했는데 네 놈이 나를 어떻게 살려.”
종교를 갖지 않은 몇 명의 과학도들이 모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무신론자들이었습니다.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Humankind no longer needed God)는 결의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대표자 한 사람을 하나님께 보내서 그들의 결정사항을 통보하도록 했습니다. 과학도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 우리는 더 이상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We no longer need you)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사람도 복사할 수 있고 여러 가지 기적적이고 불가사의한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계속하려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인내심을 갖고 친절하게 그의 얘기를 경청하였습니다. 과학도의 이야기가 끝나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좋다. 이건 어떠냐? 우리 사람 만드는 시합을 하자”(a man-making contest) 과학도가 대답합니다. “좋습니다. 대단한 시합이 될 겁니다.” 자신감을 드러내는 과학도에게 하나님은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웁니다. “자, 내가 옛날에 아담을 만들던 방식으로 할 것이다.” 과학도가 말합니다. “좋습니다. 문제없습니다.” 그리고는 허리를 굽혀 한 움큼의 흙을 쥐었습니다. 진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려는 과학도를 바라보던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안되지. 안되지. 안되지, 너는 네 자신의 흙을 가져다가 만들어야 한다.”
종종 우리는 “과학과 신앙”(Science and Faith)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문제로 극단적인 갈등을 보이는 것을 목격합니다. 특히 창조론과 진화론(evolution)의 싸움 때문에 학교에서는 어떤 이론을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 많은 논쟁을 벌려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새로운 노력이 있습니다. “지적착상” 또는 “지적설계”(Intelligent Design)이라고 부르는데, 과학의 증거는 창조주 하나님의 사상을 지지하고 있다는 연구입니다. 많은 학교에서 이 연구를 받아드려 창조론과 진화론을 대립각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서, 서로 보완하고 지지하는 시각으로 연구의 방향을 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매우 좋은 시도라고 봅니다. 그들은 몇 가지 원리를 갖고 출발합니다.
첫째로 과학은 “어떻게”(How)라는 질문을 다루는 학문이고, 신앙은 “왜”(Why)의 해답을 찾으려는 것이기 때문에 과학과 신앙은 결코 갈등이 있을 수 없다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십니다(God is a God of Truth). 만약 과학이 우주의 나이가 1400만년(14million years)이 되었다고 증명했다면 그것은 진실입니다. 또 만약 하나님이 진화를 통해서 그의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방법으로 택하셨다면 그것도 진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만 아는 작은 하나님(small God)을 믿지 않습니다. 다만 과학은 “어떻게”(How) 만들었느냐에 초점을 맞추지만, 신앙은 “왜”(Why) 만들었느냐에 초점을 맞출 뿐입니다.
극단적인 진화론자들은 모든 것들이 다 우연에 의해 일어났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연에 의해서 진화된다면 ‘아름다움’(Beauty)은 어떻게 설명합니까? 음악에서 들려오는 네 파트의 아름다운 화음은 무엇으로 설명됩니까? 그것도 우연히 생긴 일입니까? 석양의 아름다움도 우연히 생긴 일인가요? 자연의 아름다움이 모두 우연히 생긴 일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군가 우주 전체를 섭리해가는 설계사가 있습니다. 과학은 “어떻게”라는 방법만을 말하고, “신앙”은 “왜”라는 목적을 말합니다. 과학자들은 늘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잘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런 것들을 잘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 속에 깃들여져 있는 것들을 발견하고 발명하는 역할을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세계에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짧은 생각입니다. 한 발자국만 연구실에서 물러서서 더 넓은 우주를 바라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결코 우리의 신앙을 뒤흔들어 놓을만한 새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도마를 만나실 때 문이 닫혀 있는데도 예수님이 벽에 관계없이 방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요20:26). 부활의 신비입니다. 과학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의 원리는 성경에는 두 종류의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역사적 진리(historical truth)요, 다른 하나는 영적진리(Spiritual truth)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우주만물은 6일 동안에 창조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레째 되는 날 하나님은 쉬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때 역사적 연대기(historical chronology)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 연대기를 알고 싶으면 기술자나 과학자에게 물어야 합니다. 창세기는 다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또 “빛이 있으라”는 말씀처럼 모든 것을 말씀으로 만드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때문에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발견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모든 것을 만드셨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이레째 되는 날, 하나님이 쉬시면서 안식일로 삼았으니 하나님의 백성도 이 안식일을 쉬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 휴식은 히브리인들에게도 매우 중요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렇게 창세기에는 역사적 진리와 영적진리를 함께 포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1600년 경에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둘레를 돈다고 믿었습니다.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것은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돌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갈릴레오(Galileo)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돈다고 주장했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입니다. 종교인들은 놀랐습니다. 시931, 시96:10, 역대기16:30에 보면 “세계는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않는도다”(the world is firmly established, it cannot be moved)고 말씀하셨습니다. 시104:5에도 “(하나님께서)땅에 기초를 놓으사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셨도다”고 말씀하셨고, 전도서1:5에도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자기의 주장이 결코 성경과 맞서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성서에 대한 어거스틴의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즉 우리는 결코 성경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되며, 특히 시나 노래들은 결코 설명서(instruction)나 역사(history)서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말이 맞습니다. 사과와 오렌지를 비교하면 안 됩니다. 성경에는 역사적 진리가 있고 영적 진리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시도 있고, 노래도 있고, 비유도 있습니다. 이것을 역사적인 좁은 눈으로만 보려고 하면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는 깨닫지 못합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 진리, 즉 역사적 진리와 영적 진리가 서로 어우러져 있는 책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 즉 믿음생활을 하는 것이지 결코 지식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 13:12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확실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모든 것이 불완전할 뿐입니다. 우리는 도마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이만큼 강력한 말씀도 없습니다. 보고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앙은 신비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보지 못하고도 믿음을 갖게 된다면 그보다 더 복된 일은 없습니다.
유명한 코미디언인 우디 알렌(Woody Allen)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당신이 존재한다는 분명한 싸인을 주실 수 없을까요? 예를 들면 내 이름으로 스위스 은행에 수 백 만불을 저금해 놓으시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내가 분명히 알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답답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불치의 병에 걸려 병상에 누워 있을 때 그렇게도 애타게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데도 하나님은 아무런 싸인을 주시지 않을 때입니다. 왜 하나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을까요? 우리는 모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과 영성이 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신앙과 씨름을 하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사춘기에 머물고 맙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군들은 대부분이 의심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계가 여러분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않게 하십시오. 이 세계는 설계자가 있습니다. 누가 그것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과학도는 방법(How)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에게 목적(Why)을 말합니다. 성경 속에는 역사적 진리와 영적 진리가 한데 어우러져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으로 살지, 지식으로 살지 않습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이때부터 도마는 “나는 할 수 없다”(I cannot)에서 “나는 할 수 있다”(I can)로 바뀌어졌습니다. 그것이 부활의 힘입니다.
채규현목사 예화
요한복음 20장 처음부터 보면 “안식 후 첫날….” 바로 오늘입니다. 그 부활의 날을 계속해서 “제 삼일에…”라고 이야기하지 않아요. 4복음서 전체에 공통적으로 “안식 후 첫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바로 한 주가 시작하는 그 첫 시작에 예수님이 새롭게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안식 후 첫날”이라고 계속해서 강조하는 이유는, 아마도 바로 그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려고 초대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모이는 때가 바로 안식 후 첫날이었습니다. 왜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날을 주의 날-주일(主日이)라고 이름을 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일이라는 의미는 계시록 1장에도 ‘주의 날’이라고 나오는데, 구약성경에 보면 ‘여호와의 날-두렵고 떨리는 여호와의 날’이라고 나옵니다. 그 날은 심판날입니다. 이 세상이 심판받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입니다. 그것을 여호와의 날, 주의 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안식일은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이후에는, 모든 이 세상의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월, 화, 수, 목, 금, 토, 주일이 전부 안식일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시간이 안식일입니다. 그런데 주의 날, 안식 후 첫날,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 날을 고대하는 바로 그 날입니다. 바로 그 날에 주의 백성들이 모이는데, 특별히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날에 모이는 이 부활주일이 특별히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날에 우리가 흰 옷을 입습니다. 흰 옷을 입는 이유는 마지막 주님 앞에 가는 그 날에 우리가 세마포 흰 옷을 입거든요. 바로 그 것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그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의미에서 우리가 흰 옷을 입습니다. 마침 이번이 좋은 기회입니다. 앞으로 우리 부활주일이 되면 웬만하면 흰 옷을 입읍시다. 그렇게 해서 정말 그 날을 고대하는 삶으로서 우리가 함께 표시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믿지 않는 두 사람이 기차를 타고 가다가 예수님의 생애에 관해서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작가였던 다른 친구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예수에 대한 이야기는, 잘 하면 아주 기가 막힌 로맨스가 나올 것 같은데….”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당신이라면 그것을 소설로 멋있게 쓸 것 같은데. 괜히 그 예수라는 분이 무슨 하나님이라는 둥 그런 뚱딴지같은 말 말고, 거기에서 그 분이 얼마나 인간적이고 인격적이었는가를 당신이 소설로 한번 만들어보라.” 그 제안이 받아들여져서 소설이 나왔습니다. 제안을 한 사람은 잉거슬 대령이라는 사람이었고 그 제안을 받아들여서 소설을 쓴 사람은 루 월러스(Lew Wallace) 장군이라는 분이었습니다. 둘 다 당대에는 아주 소문난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월러스 장군이 예수의 인간적인 면에 대해서 소설을 쓰기 위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다른 책들도 보고, 특히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연구하면 할수록 예수님이 단순한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게 점점 마음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안 믿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예수님이 하나님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더 마음에 깊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어쩔 수없이 고백합니다. “주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고백을 하고 나온 작품이 “벤허”입니다.
우리는 지금 아무도 믿지 않는 불신과 불행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믿지 않고 사람들도 믿지 않는 불신과 불행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치가는 물론 교수들도 의사들도 종교인들도 믿지 못하는 불신과 불행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치도 기준도 법도 나라도 교회도 아무 것도 믿지 못하는 불신과 불행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 나라를 떠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제일 많은 나라가 한국이라고 합니다.
아마 불행 중 가장 큰 불행은 믿어주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식들이 부모를 믿어주지 않을 때 부모는 불행을 느낍니다. 부모는 물론 자식도 불행합니다. 학생들이 선생님을 믿어주지 않을 때 선생님은 불행을 느낍니다. 선생님은 물론 학생들도 불행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어주지 않을 때 하나님은 불행을 느낄 것입니다
극동 방송에서 나오는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를 잠시 들었습니다. 미국의 위대한 부흥사 요나단 에드워즈를 인용하면서 교회를 십년 다닌다고 다 믿는 사람도 아니고 다 구원을 얻은 사람도 아니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고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했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믿음을 가지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믿음으로 죄사함과 구원을 얻고 믿음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망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고백하고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심을 분명히 고백하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사입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맙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분명하게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고신일 목사 예화
주석가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정규적인 엄숙한 자리에(집회에) 마음대로 빠지면
언제, 무엇을 잃을 지(놓쳐 버릴지)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정규적으로 모이는 거룩한 예배의 자리에
생각없이 빠져 버린 다면… 어느 때 중요한 것을 놓쳐 버린다는 것입니다.
정말 받아야 하는 은혜를 받지 못하고, 들어야 하는 말씀을 듣지 못하고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그 기쁜 자리를 놓친 것처럼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와 복을 놓치게 된다는 뜻입니다.
도마가 얼마나 단호히 부정했으면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요20:25)
고 했습니다.
도마는 '누가 뭐래도 내가 확인해야만… 믿을 수 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봐야만… 믿겠다' .
'눈으로 확인하고, 감각으로 느껴 봐야만… 믿겠다'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본다는 것은 불완전합니다.
보는 사람마다 다르며 주관적입니다.
보아서 판단한 것이 영구적이지 못하고 일시적이고 볼 때마다 다릅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볼 때마다 다릅니다.
그런데 천국도 가봐야 믿고 지옥도 가봐야 믿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들 주변에 보면 [확인]이라는 것, [체험]이라는 것,
[경험]이라는 것만 믿겠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가 느끼고 경험하고 판단한 것만 사실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 "폭발물은 위험하다"며 '경고'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만져 봐야 알지' 하고 건드리면 죽습니다.
"마약은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약은 한번 입에 대고, 주사 맞기 시작하면
끊기가 어렵다, 나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텐데
'내가 경험해 봐야 나쁜지 아닌지 알지' 하고 마약을 경험해 본다면
"마약 중독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보아야 믿겠다", "내가 확인해야 믿겠다"는 사람은 참으로 한심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확인과 자기의 판단만 믿겠다고 했던 도마처럼…
오늘 도마와 같은 마음으로 오신 분이 계십니까?
김명혁 목사 예화
도마는 본래 충동적이고 회의적이고 불신앙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서 베다니로 가자고 했을 때 도마는 가기가 싫었지만 주님이 가자고 하시니 다 함께 가서 죽자고 충동적으로 말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 집으로 가신다고 했을 때 도마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한다고 회의적으로 말한 일도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아침 다른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보았다고 했을 때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 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20:25)고 불신앙을 고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난 다움 그의 삶은 변화되었습니다. 죽음의 세력과 죄악의 세력과 지옥의 세력을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한 평생 파르디아와 페르시아와 인도에서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다가 마지막에는 인도에서 순교를 했습니다.
김삼환 목사 예화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가 이 세상에서 때에 따라 설령 부족하고 가난하며, 어렵게 살지라도 그 사람은 부요한 삶입니다. 실패한 것같이 보여도 그 사람이 성공한 삶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믿음이 있는 자가 이 세상에 가장 큰 소유를 가진 사람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남이 갖지 아니한 것을 갖고 남보다 더 높이 올라가며, 더 좋은 학교,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집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가을철이 되면 등산계절이 오는데 산에 올라가는 사람도 그런 마음이 있다고 합니다. 남이 안 가본 곳으로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힘든 히말라야 산을 정복하려고 하고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려고 합니다. 모두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을 가고자 하는 것은 ‘내가 특별히 이런 산에 가고 싶다.’, ‘높은 데 가고 싶다.’, ‘남이 안 해본 것을 하고 싶다.’ 이런 마음이 모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낚시하는 사람도 남이 낚시질 안 한 곳에 가서 낚시하기를 원합니다. 특별한 장비와 낚시도구를 가지고 특별한 고기를 누구보다도 큰 고기를 잡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입니다.
불과 얼마 전에 가짜 명품시계가 온 나라를 진동했습니다. 하나에 1억짜리가 넘는 시계가 가짜인데도 그렇게 많이 팔렸습니다. 수많은 연예인들과 수많은 부자들이 이 가짜 명품시계를 모두 샀습니다. 그런데 이 가짜 명품을 판 그 주인은 간단한 사람의 심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든지 좋은 걸 갖고 싶어 합니다. 몇 만원짜리도 안 되는 걸 가지고 몇 천만원, 몇 억을 받은 것은 딱 하나입니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선생님! 사장님! 이 시계는 스위스에서 만들었는데 전체가 몇 개를 안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세 개밖에 안 왔습니다.’ 몇 천개 가짜를 갖다 놓고는 그렇게 말하면 전부다 홀라당 넘어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남이 안 가진 걸 갖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남이 안 가진 걸 누구나 갖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몇 억짜리를 모두 사서 가졌습니다. 또한 홍콩에서는 하룻밤 자는데 2천 4백 만원 가는 방 하나가 불티나게 지금 예약이 안 될 정도로 그렇게 팔려 나간다고 합니다.
여기는 방 하나 꾸미는데 금만 2톤이 들어갔답니다. 침대도, 소파도, 화장실 변기도 금. 금이라고 잘 내려갑니까? 그런데도 사람은 금 위에 앉아서 누면 그걸 좋게 ‘아~ 나는 금 위에서 쌌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심리를 이용합니다.
우리나라 힐튼 호텔에도 어제 신문에 패션업체에서 18억짜리 브래지어가 나왔습니다. 금만 243돈,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가지고 이 브래지어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18억이면 집이 몇 채입니까? 3억짜리 집만 해도 6채가 되는 집값이, 그 안에 하나 덮는데 뭐가 그렇게 비싼 걸 쓸 필요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18억짜리를 갖다 덮는다는 것은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욕을 하면 안되는 것은 사람은 모두 똑같기 때문입니다. 잘 살면 그런 마음이 모두 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사람, 믿음이 없는 사람의 마음은 욕심이 있고, 누구보다도 더 좋은 것을 갖기를 원하는데 왜 그런 마음이 없겠습니까?
세계가 모두 그렇습니다. 필리핀에 마르코스 부인 이멜다라고 하는 분은 신발만 3천 켤레이고 세계 좋은 것들을 가지고 있으며, 파티용 장갑이 68켤레, 가발이 30개, 스타킹 박스가 200개, 수 백개의 보석상자, 가운이 2천 벌, 드레스 옷이 수 천 벌, 검은색 브래지어만 5백 개, 이 분은 검은 걸 좋아하나 봅니다. 팬티가 3천 5백 개, 매일 갈아입어도 십년을 갈아입어야 됩니다. 무엇 할려고 팬티를 자주 갈아입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아니 나라가 잘 살면 이해를 합니다. 필리핀은 극히 가난합니다. 헐벗고 굶주린 거지같이 살아가는 사람이 수천만인데 어떻게 그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게 다 어디서 나옵니까? 믿음이 없이, 하나님이 없는 마음, 허영심에서 나옵니다. 돈 벌면 그렇게 되고 권력을 가지면 그렇게 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따라가는 것이 다 이런 길로 나갑니다. 제가 갔던 이라크의 후세인도 궁궐이 바그다드 안에만 13개가 있습니다. 전 나라에 궁궐이 38개나 있습니다. 얼마나 호화찬란한지 세계 최고를 가져다 꾸미고, 석유를 팔아 그 많은 돈을 벌지만 백성들은 그렇게 비참한 삶으로 굶주리고 동물같이 삽니다. 그런데 자기 하나는 궁궐을 38개를, 우리나라도 대통령이 계시는데 궁궐이 하나만 해도 됩니다. 그리고는 말 하는 사람을 모두 죽입니다. 설계를 한 사람도 공사가 끝나면 모두 죽여 버리고, 38개의 궁궐을 지어도 지은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핵심 건설업자를 모두 죽여 버립니다. 그래도 말을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언론을 완전히 봉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재자는 언론을 자기 언론으로 만듭니다. 언론을 자꾸 통제하면 안 됩니다. 사람이란 무한히 타락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걸 막아주는 것이 언론인데 국민이야 무엇을 알겠습니까? 언론이 그걸 철저하게 막아줘야 합니다. 그리고 잠을 잘 때나 궁궐에 들어갈 때도 후세인이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똑같은 궁궐로 벤츠가 10대씩 막 들어가니까 여기 들어갔는지 저기 들어갔는지 알 수 없게 만듭니다. 자기는 그렇게 사니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살아야 참 자유의 삶을 사는데 자기 하나만을 위해 살 때 얼마나...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자가 성도의 삶인 줄로 믿습니다.
제가 이런 나라를 보면서, 우리나라는 그래도 우리가 독재자라고 욕했던 모든 지도자들이 너무 훌륭하신 분들임을 느끼게 됩니다. 박대통령 지난 다음에 보니 시계를 국산 시계를 찼고 안경이나 모든 걸 검소하게 산 걸 보며, 모두 그 때는 전부 욕하니까 우리가 모르고 ‘독재자, 독재자’ 그랬는데 지나고 보니 진짜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별장에 가보면 검소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냥 평범한, 우리가 지금 아무도 그런 침대에 안 자는 그런 곳에 살았습니다. 그런걸 보면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모두 훌륭했습니다. 자꾸 과거에 ‘나쁘다, 나쁘다’ 그랬는데 오히려 과거의 지도자들이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세계를 놓고 보아도 괜찮은 편입니다. 지나고 보니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자꾸 남이 말할 때 돌 던지지 말고 참고 기다려 봐야 압니다. 우리 교인들은 이 세상을 하나님을 믿으며 사니, 어디 살아도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천국인 줄로 믿습니다.
저는 백두산 호랑이를 잡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냥하는 것을 비디오로 오래 걸려서 촬영을 했는데 백두산에는 호랑이가 한 3백 마리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호랑이가 없는데 백두산이 보고입니다. 우리는 백두산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이 백두산 이름을 바꾸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참 엉큼한 분들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얼마나 불렀는데 저들은 한 번도 안 부르고 지금 자기 것이라 하니 말이 됩니까? 우리는 그러니까 정신 차려야 됩니다. 잘못하면 모두 뜯겨나갑니다. 독도는 일본놈들이 자기 것이라 하고, 백두산은 중국놈들이 그러면 모두 뜯어가면 우리는 남는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지켜야 합니다. 특별히 동해물과를 많이 부르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에는 지금도 호랑이가 그렇게 많습니다. 제가 보니까 포수가 사냥개를 몇 마리를 데리고 호랑이 발자국을 따라 며칠씩 걸어갑니다. 주 욱 따라가는데 마지막에는 이 사냥개가 덮습니다. 사냥개가 호랑이를 잡는데 사냥개는 호랑이 앞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고양이 앞에 쥐만도 못합니다. 보잘 것 없습니다. 아무리 훈련을 받아야 호랑이 앞에는 개는 존재도 없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제 눈으로 많이 보았습니다. 저희 집이 산 밑에 있었는데 짐승들이 뭔지 집에 오면 이 개들이 밖에 있다가 제가 있는 부엌으로 들어오는데 부엌으로 들어와서는 아궁이 불 있는 데로 들어갑니다.
얼마나 겁을 내는지... 그래서 놀란 개는 며칠 만에 죽기도 합니다. 그게 호랑이도 아니고 표범도 아닐텐데도 산짐승한테 개는 살아나지를 못합니다. 간단하게 와서 탁 물어버리면 개는 그대로 죽습니다. 그런데 호랑이 앞에 개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개들이 호랑이한테 막 달려듭니다. 제가 보니까 막 달려듭니다. 다섯 마리가 모두 같이 막 달려듭니다. 호랑이가 잡힙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여러분! 이걸 아셔야 됩니다. 왜 개가 큰 소리 칩니까? 왜 개가 겁을 안내고 호랑이 인줄 모르고 달려듭니까? 너무 알지만 자신만만하게 달려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뒤에 포수, 주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큰 소리 칩니다. 막 달려듭니다. 호랑이가 잡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간이 이 세상을 살 때 내 힘으로 승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뭐 대단한 줄 아십니까? 내 힘으로 살다가 불행이 옵니다. 내 힘으로 살다가 실패합니다. 내 것이 제일인줄 아는 것처럼 어리석은 자가 없습니다. 창조자를 버리고 위에 계신 분을 버리며 가는 길에, 모든 불행 슬픔 좌절이 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 없어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으면, 때에 따라 큰 사고가 오고 재난이 오며, 환난이 오고 길이 캄캄하여 흑암천지가 이루어질지라도 ‘하나님이 나의 빛이 되셔서 함께하신다.’ 하나님이 나의 길이 되셔서 열어주실 것이다.’라는 믿음만 가지고 흔들리지 아니하면 길은 열려집니다. 홍해는 갈라집니다.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때에 따라 남편을 잃고 자식을 잃으며, 재산을 잃는 일이 왜 없겠습니까? 이 세상에 잃어버리는 것도 많고 슬픔 절망이 많지만 어떤 분은 건강을 잃고 엉엉 울며 저에게 찾아오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만 잃지 않으면 이건 문제가 아닙니다. 모두 잃어도 그건 크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회복이 되고 복구가 되며, 찾아낼 수 있습니다. 아니, 잃은 것보다 더 좋은 걸 얻어 낼 수 있습니다. 몇 만 배 더 귀한 자리에 나갈 수 있습니다.
믿음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믿으려고 노력을 많이 해야 합니다. 믿음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잘 믿기 위해서 기도도 하고 믿으려고 눈물도 흘리며, 예배도 빨리 참석하려고 하고 설교도 잘 들으려고 하며, 막 믿음을 갖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믿음은 내 몫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믿는 건 내가 해야 됩니다. 제가 미국 갈 때도 인천공항까지는 내가 가야 합니다. 비행기를 우리 집으로 오라고 하면 안 됩니다. 거기까지는 내가 가야 합니다. 거기만 딱 가면 미국 가는 건 비행기가 실어줍니다. 제가 미국으로 걸어간다, 헤엄쳐서 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백년 걸린들 갈 수 있겠습니까? 저는 미국에 있다가도 케네디공항에 딱 들어가면 창에 KAL이 보입니다. 우리 비행기를 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야~ 이 KAL이 와 있구나!’ 우리 비행기가 게이트에 딱 서 있으면 너무너무 반갑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믿는다 그러면 말도 믿음의 말을 여러분은 해야 됩니다. 그래야 은혜를 주십니다. 믿음은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말도 하고 행동도 해야 합니다. 믿음의 말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은 교회는 잘 나오는데 믿음의 말을 도무지 안 합니다. 불신앙의 말, 의심하는 말, 염려하는 말, 부정적인 말, 비판하는 말, 마귀가 좋아하는 말을 자꾸 하니까, 교회까지 나와서 믿음의 길을 가면서 말을 안 해가지고 여러분이 안 되는 것입니다. 망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말 들으려고 옵니다. 말씀 들으려고 와가지고 왜 믿음의 말을 안 합니까? 저는 교인들이 안수기도 받으러 오고 몸이 아파 올 때, 제가 꼭 당부하는 것이 믿음의 말을 하루에 한 50번씩 하라고 합니다. ‘나는 건강하리라!’ ‘주의 이름으로 나는 건강하리라!’ ‘우리 가정은 오늘부터 사랑하리라! 화평하리라! 행복하리라! 감사하리라!’ 말을 자꾸 하라고 해도 그걸 잘 따라서 안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되는 줄 아는데 천국은 믿음을 말로 해서 가는 나라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에 이릅니다. 여러분은 입으로 늘 믿음의 말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믿음은 여러분을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갑니다. 좋은 환경을 만들지 말고 내 앞에 전부
어두움이 있어도, 요셉은 감옥에 가 있어도 감옥을 안 보았습니다. 현실을 보지 않습니다. ‘사방으로
우겨 싸여있다. 나는 아무도 도와 줄이 없다. 나는 이제 이렇게 억울하게 죽는구나.’ 그런 마음을 안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는 곳이 어디 있는가? 주님은 내 마음을 아신다. 나를 건지신다. 내 형
편을 아신다. 나를 도와주신다.’ 그러니 감옥에서도 승리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절대로 현실을 보지
않습니다. 오늘 넘어서 역사하시는, 10년 20년 이후에 나를 들어 쓰실 능력의 하나님을 멀리 바라보십
시오. 입으로 시인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를 따라 하십시오. ‘믿음의 말을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우
리 가정에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다! 축복의 가정이 될 것이다!’ 힘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힘, 지식, 과학으로 안 됩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안 되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승리할 줄로 믿습
니다.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을 볼 때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유
혹도, 시험도 잘 이길 수 있습니다. 고난도 잘 극복할 수 있습니다. 절망도 잘 넘어설 수 있습니다. 우
리는 항상 좋을 수가 없습니다.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항상 낮같이 이렇게 좋은 날씨
만 오면 6개월이 지나면 소양댐 물도 모두 마를 거라고 합니다. 1년만 저렇게 좋은 날씨 오면 우리나
라는 사막이 되어 버립니다. 모두 죽습니다. 1년 비가 안 와 보십시오. 끝납니다. 사하라사막 되어버
립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좋은 날씨만 만나고 좋은 사람만 만나면, 여러분이 먼저 안 되고 먼저 망합
니다. 시험, 눈물, 추위, 더위도 오고 눈보라도 치니까 우리가 일어나고 살아납니다. 좋은 교회 만나
서 좋기만 하면 여러분의 믿음은 죽습니다. 말도 듣고 시험도 당하며, 오는데 어려움도 당하고 가는
데 어려움도 당하며, 주차 때문에 힘드네 하고.,.힘듭니다. 신앙생활은 힘듭니다. 힘들게 믿어야 됩니
다. 설교도 한 날 한 시 같이 항상 듣는 것 힘 드는 줄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힘들어도 감당해야 합니
다. 잘 믿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능력과 기적이 따라옵니다. 안 되는 일을 되게 하십니다. 믿음의 사람을 통하
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믿음의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믿음의 사람은 마귀 사탄과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교회에 안 나와도 잘 믿는 줄 아는 분이 있습니다. 그건 잘못된 생
각입니다. 믿음의 사람과 교회는 불과불입니다. 교회는 곡식으로 말하면 밭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말
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밭에 들어가라’ 교회에 왜 나오십니까? 우리가 이 밭에 심어져야 됩니다. 은혜
와 영양분, 내 믿음을 자라나게 하는 모든 요소가 교회를 통해서 옵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서 잘 믿
을 수 있다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물론 며칠 자기 혼자 믿는 믿음은 몰라도 그
러나 하나님과 의 관계는 끊어집니다.
제가 그전에 눈을 다쳤지 않습니까? 오른쪽 눈을 다치고 천호동 공안과에 입원해서 열흘 동안을
완전히 눈을 덮었습니다. 아무것도 볼 수 없고 이 눈을 여러 번 꿰매어서 한 열흘 지나서 눈을 뜨고 보
니까 처음에는 잘 안보였는데 차츰차츰 보니까 전부 세상만사가 둘로 보입니다. 이 눈동자가 완전히
다른 데에 가 있습니다. 눈동자가 깨어져서 전부 꿰어 매는 수술을 하였습니다. 많이 잡아 당겨가지
고 다른 쪽 눈동자하고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건 이것대로 보고 또한 이건 이것대로 보는
것입니다. 태양, 하늘, 길을 보면 전부 두 개로 보입니다. 다리를 건너면 다리가 두 개로 보이고 숟가
락 놓으면 숟가락이 두 개, 밥을 놓으면 밥이 두 개여서 어느 것이 진짜 밥인지 몰라 항상 이 눈을 감
고하고, 반찬 먹을 때도 항상 이 눈을 감고 반찬을 집었습니다. 그러니까 머리가 아픕니다. 둘이 하나
로 보여야 되는데 둘이 둘로 보이니 머리가 터지려고 합니다. 집사람도 보면 둘입니다. 집에 여자가
둘이 앉아 있습니다. 어느 여자가 진짜 여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참 기가 막힐 일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구두를 신으려고 하면 구두가 여러 켤레가 앞에 와 있습니
다. 모두가 다 둘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한 5년 정도 가니까 이 눈이 스스로 제
가 병원에 다시 안 갔는데도 자꾸 노력을 합니다. 눈이 제 위치로 끌어당깁니다. 참 신체라고 하는 것
은 신비합니다. 의사 손이 그 다음에 하나도 안됐는데도 멀리 갔던 이 렌즈가 하나로 딱 맞추어지면
서 그렇게 평안이 옵니다. 세상에 둘이 하나로 보인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줄 몰랐습니다. 여러분
은 눈 수술을 안 하니까 그걸 모르지만 저는 그걸 깨닫고 ‘아하~ 오늘 많은 사람이 하나님도 보고 세
상도 보니까 이렇게 혼란이 오는거야, 하나님에게만 영육이 하나님 한 분만 믿으면 된다는 이 믿음만
딱 가지면 절대로 혼란이 안 오는데, 온갖 세상 것 다 따라가고 안보는 게 없이 다 보니 사람의 머리
가 터질 것 같아 정신병자가 몇 백만이 나오는 것이구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청소년들, 초등학교 5, 6학년 애들이 반 이상이 비정상이라고 합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별의별 것
을 다 보니 이 속에 영의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혼란이, 무질서가 옵니다. 머리가 터질 듯이 현대인들
은 스트레스를 받고 복잡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만 믿으면 왜 스트레스가 옵니까? 하나님만 바라보
는데 왜 두려움이 옵니까? 왜 우울증이 옵니까? 왜 자살합니까? 바다이야기에 왜 빠집니까? 하나님
만 딱 보면 그런데에 안 빠집니다. 할렐루야! 주님만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저것 다 봐야 나중
에 그게 모두 헛된 것입니다. 후회합니다. 주님만 바라보면 승리합니다. 물에 빠지지 않습니다. 망하
지 않습니다. 실패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
통하리라♬ 믿음의 사람, 큰 믿음으로 도마와 같이 ‘나의 주님이십니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은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내가 가는 길을 우리 아버지가 지켜주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성도 되시길 바
랍니다.
김창인 목사 예화
틴 마틴이라고 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한창 청년 때 아리따운 아가씨와 결혼을 했습니다. 부모들도 좋아하고 본인들도 좋아하여서 결혼을 하였습니다. 결혼하고는 얼마나 좋아하는지 천하를 얻은 것보다 더 기뻐합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첫아이도 낳기 전에 병들어 손도 써볼 여유 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시신 앞에서 울고 울다가 밤이 되었을 때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가는데 아버지가 볼 때에 심상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밤새도록 몽유병 환자처럼 정신 없이 어디론가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날이 밝아왔습니다. 동이 터오기 시작하자 정신이 들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이 서있는 앞에 큰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차하는 순간에 그 강에 빠져 죽을 뻔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어서 뒤를 돌아보니 아버지가 아무 말 없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뛰쳐나갈 때 아버지가 뒤좇아 온 것입니다. 구경하려고 따라온 것입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붙잡아 주려고 한 것입니다. 무슨 말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말없이 묵묵하게 밤새도록 아들의 뒤를 따라다닌 것입니다. 이것이 아들, 딸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부모의 심정만이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돌봐 주십니다. 우리가 정신 없는 지경에 이르러도 하나님은 나도 모르게 그림자처럼 따라와서 우리를 돌봐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유머 예화
한 꼬마가 주일 학교에서 돌아왔다.
엄마가 뭘 배웠는지 물었다.
“오늘은 모세가 적들을 어떻게 이겼는지 배웠어요. 홍해에 도착하자, 모세는 다리를 건설해서 사람들을 모두 건너게 했대요.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건너자 그는 무전기로 본부에 연락해서 폭격기 지원 요청을 했죠. 폭격기는 폭탄을 떨어뜨려서 다리를 부쉈고, 애굽군인들을 모두 바다에 빠져 죽었대요”
“아가, 선생님이 정말 그렇게 얘기 하셨니?”
“사실은 아니예요, 하지만 선생님이 얘기하신 대로 말하면 엄마는 못 믿을 걸요?”
책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이 기용 집사라는 분이 있는데 노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가는 교회 목사님이 하루는 그를 불러 묻습니다.
“ 자네 장가 안가겠나? ”
“ 가야지요. 그런데 아직 사람을 못 만나 이러고 있습니다. ”
“ 그래? 그럼 내가 한 사람 소개해도 되겠나? ” “ 그러면 고맙지요.”
“ 그럼 만나 보겠나? ”“ 목사님이 소개 하시는데 뭘 만나 봅니까? 그냥 믿고 가지요.”
그 목사님이 또 처녀를 만나 묻습니다. “ 너 시집 가거라”“ 네, 그래야죠. 근데 시집은 가고 싶지만 사람이 없어요. ”“내가 한 총각 소개해도 괜찮겠나?” “그러시죠. 뭐.” “한번 만나볼래?”
그랬더니 그 처녀도 말합니다.
“ 목사님이 소개하시는데 만나 볼 필요 있겠습니까? 그냥 하겠습니다.”
그래서 진짜로 그 둘은 결혼 하는 날 처음 상대를 봤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행복하게 모범적으로 잘 산다고 합니다. 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만나보고 사귀어 봐야한다고 말합니다. 그게 확실하다는거죠. 그러나 만나보고 사귀어 보고 같이 살아 보고도 잘 안됩니다. 행복할 것 같은데 잘 안됩니다. 내가 꼭 만나보고 눈으로 확인하고 사귀어 봐야겠습니까? 목사님이 만나보고 괜찮다 하면 그런줄 알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 이 사람은 좋은 총각이다. 이 사람은 좋은 처녀다 너희 둘이 살면 잘살거다.“ 하면 그런줄 알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만나보면 어떻게 됩니까? 풍덩 빠져버립니다. 정신을 못 차려요. 그래서 만나면 만날수록 점점 더 모르게 되어서 나중에 결혼하고 후회합니다. ”당신 그럴줄 몰랐다고“ 20년을 같이 살고도 ”그럴줄 몰랐다“니 어찌된일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살아 나셨다는 말을 듣고 믿을 수 없는 일이라며 완강히 부활을 부인합니다.
다른 제자들을 무시하고 자기만의똑똑함을 내세웁니다. “내가 예수님의 못 자국을 눈으로 보며 내 손으로 못자국을 만져 보지 않으면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의심하는 도마에게 나타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라 하시며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이 복되다“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눈으로 보고 확인 하고야 믿겠다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과학적인 검증을 통해서 부모임을 확인해야하고 내 자식인가 확인해봐야 믿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보지 못했지만 남들이 본 바를 믿으며 남들의 경험한 바를 믿는 사람, 그가 복된 사람입니다. 불신의 시대에 믿음의 부활로 복된 세상을 열어가는 성도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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