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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권-5 한경직 목사 설교 예화 121-150

by 【고동엽】 2022. 3. 3.
[처음 목차 돌아가기]
 
 

121.수술하기 전에 기도하는 민게이 박사

병을 치료하는 것도 그래요. 미국의 저명한 외과 의사 가운데 민게이 박사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이 분이 늘 하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수술은 사람이 하지마는 병은 하나님이 고치신다”물론 약도 사람이 주고 수술도 사람이 하지요, 그러나 고치는 것은 하나님께서만 고치십니다.
이 분은 늘 수술하기 전에 꼭 기도를 하는데 어떻게 되어서 기도를 하게되었냐고 물어보니까 자기의 경험을 이야기하더랍니다. 그는 본래 캐나다의 어떤 가난한 농촌에서 자라면서 참 가까스로 고학을 해서 의학을 공부하고 이제 외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어렸을 적에야 물론 주일 학교에 다녔지만 대학에 다니는 동안 교회에 가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의사가 된 다음에도 교회에 가는 것은 거이 다 잊어버렸습니다. 기도도 오래 안 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멀리 있는 자기 동생에게서 장거리 전화가 왔습니다.
“아! 형님, 빨리 오셔야 되겠습니다. 어머니가 밭에서 일 하시다가 황소에게 받혀서 중상을 입었습니다. 인사 불성이 되었는데 여기 가까운데 있는 의사를 청해서 보이니까 그 이상 수술을 못하겠다고 하며 살 희망이 없다고 그럽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의사가 급히 비행기 세를 내서 간호원과 보조하는 의사를 데리고 특별기로 달려왔습니다. 자기 집이 워낙 시골이라 비행장에 내려서도 여러 시간을 또 자동차로 달려서 집에 도착해보니 아니나 다를 까 연로하신 어머니가 황소에 받혀서 중상을 입었는데 갈비뼈가 여러 개 상한 체 인사 불성이 되어 누워있었습니다.
수술을 해야 되었습니다. 얼른 수술 준비를 하고 자기가 수술을 하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손이 자꾸 떨립니다. 아마 너무 흥분되어서 그렇겠지요, 자기가 의학을 했다고 하면 이런 때 어머니를 위해서 의술을 발휘해야 하겠는데 수술을 하려고 하니까 손이 떨려서 집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진정하려고 해도 진정이 안 됩니다. 그래서 수술을 시작하지 못하고 그 주방 의자에 앉아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얼마쯤 기도한 다음에는 마음이 진정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시간 걸리는 어려운 수술을 다 마치고 그 어머니가 위험한 가운데서 소생을 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부터 이 분이 자기 신앙을 회복하고 언제 어느 때 무슨 수술을 하든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서야 하는 그런 습관이 자기에게 생겼다고 하였습니다.
병을 고치는 것도 하나님과 동역 해야 합니다. 사람의 할 부분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동역 해 주셔야 병이 낮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나, 상점에서 장사를 하는 것이나, 공장에서 물건을 만드는 것이나, 관청에서 공무원 노릇 하는 것이나, 군대에서 군인 노릇 하는 것이나. 전쟁터에 나가서 전쟁을 하는 것이나. 무엇이나 하나님과 동역 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에서

 

 
 




122.마음에 숨은 사람

스티븐슨이라 하는 유명한 소설 가운데 《지킬 박사와 하이드》 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지킬 박사는 유명한 과학자로서 아주 점잖은 분입니다. 자선 사업도 하는 신사올시다. 그러나 그 박사의 마음속에는 숨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하이드라고 했습니다. 하이드란 말은 영어로 숨는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 하이드라는 사람이 그 사람 가운데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그 박사로 나타나지만 날이 어두워지면 이 숨은 사람이 나타납니다. 어두운 거리를 다니면서 나쁜 일을 합니다. 야비합니다. 음란하고 포악합니다. 사람은 하나인데, 겉은 이렇게 점잖은 신사요 박사인데, 그의 마음속에 숨은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보통으로 자기 자신도 자기 마음속에 숨은 사람을 모릅니다.

 

 
 



123.다윗·솔로몬·네로의 숨은 사람

여러분! 다윗의 생활을 한 번 기억해 보십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좋은 아이였습니다. 착실한 목동으로 자라서 훌륭한 군인이 되었습니다. 좋은 정치가로서 칭송을 받든 사람이올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의 마음에도 음행하고, 억울하게 우리야를 죽인 숨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마 다윗이 젊을 때에 그의 마음속에 그런 숨은 사람이 있을 줄 생각 못했을 것입니다.
솔로몬의 생활을 보아도 역시 그렇습니다. 청년 시대에 무엇을 할지. 부귀를 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습니다. 지혜를 많이 받아서 모든 정치와 재판을 지혜를 가지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짓고 봉헌식을 거행하며 경건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 솔로몬인데 그 후에 보면 이방 여인들을 사랑하기 시작했고 그들을 위해서 심지어 예루살렘에 우상 숭배하는 신당을 짓기 시작했고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자기까지 우상을 숭배한 적이 있습니다. 솔로몬의 마음에 이런 숨은 사람이 있을 줄 아마 자기 자신도 몰랐을 것입니다.
로마의 역대 황제 중에 가장 악하기로 이름난 네로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학살했습니다. 전설에 의하건대 시흥(詩興)을 돋우기 위해서 심지어 로마성에 불을 질렀습니다. 많은 사람을 죽였고, 지기 아내, 어머니까지도 죽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십니까? 이 사람의 생활의 한 페이지 가운데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맨 처음에 황제가 된 다음에 한 번은 결재서류가 올라왔는데 어떤 사람이 사형을 보고 받아서 황제의 인준을 얻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때 네로가 탄식하며 말하기를“내가 어떻게 이 사람을 죽이라고 시인을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내가 글을 몰랐다면 좋지 않았겠느냐?”고 탄식을 했다고 합니다. 아마 그때에 자신도 그 후에 역사상에 나타난 흉악한 숨은 사람이 있을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제가 몇 주간 전에‘세브란스’병원에서 종합진단을 한 번 해보았습니다. 엑스광선도 여러 번 찌고 혈액 검사도 여러 번 하고 그 밖에 또 다른 검사를 여러 번했습니다. 물론 귀찮기도 하고 괴롭기도 했지만 이런 진단이 필요합니다. 우리 몸에 어떤 때에 병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미리 진단하지 않으면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혹 병을 치르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숨은 사람이 어떠합니까? 숨은 사람의 건강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빛은 엑스광선보다도 더 빛납니다. 더 밝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나 지신을 내어놓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로 날선 검보다도 더 예리해서 사람의 신혼골수를 쪼갠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시편 139편을 저술한 시인은 마지막에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시옵소서 내가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옵소서”
내 속의 악한 행위를 내 스스로 모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살펴서 이것을 알고 회개할 것은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와 같은 질문을 자문자답해 보세요.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사람이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고 하셨는데 과연 마음속에 숨은 사람이 거듭났습니까? 과연 내 마음속에 숨은 옛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온전히 못 박혀서 죽고 새 사람으로 변화하였습니까? 과연 내가 과거의 나를 청산하고 새로운 방향을 잡았습니까? 과연 내 속에 숨은 사람이 세상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까? 돈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까? 내 뜻보다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까? 스스로 물어 봅시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는 그 눈으로 내가 나를 볼 줄 알아야합니다. <마음에 숨은 사람>에서

 

 
 



124. 뿌린 대로 거두리라

이조 역사 가운데에 당쟁(黨爭)사를 주의해 읽어보세요. 어떤 사람들은 작당을 해서 다른 사람을 모함합니다. 그 사람이 피를 흘립니다. 몇 해 후에 또 역시 그들이 모함을 받아서 지기의 피를 흘리고 넘어집니다.
전에 어떤 사람이 무고한 자기 아내를 다만 공부 못했다고 이유로 내쫓아 버리고, 알뜰한 공부한 여자를 새 아내로 맞아 왔습니다. 세월이 지나갑니다. 모든 것이 바뀝니다. 돈 있던 것도 다 없어졌습니다. 병까지 났습니다. 그런 때에 그 알뜰하게 맞아 왔던 그 아내가 남편도 버리고 아이도 버리고 다른 데로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사람을 천대하면 자기가 천대를 받습니다.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하면 자기 가슴이 아플 때가 옵니다. 남을 속이면 내가 속임을 당합니다.‘남젭이 제젭이’라고 하는 말이 그 말입니다.‘출어이자 반어이자’(出於爾者 反於爾者)라고 네게서 나온 것이 내게로 돌아간다고 하는 옛 말이 그 뜻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어제 신문에 월남에 혁명이 일어나서 고 딘 디엠 대통령과 그의 동생이 자살했다고 하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반면에, 성령으로 심으면 영생을 거둡니다. 선으로 심으면 선을 거둡니다. 덕으로 심으면 덕을 거둡니다. 의를 심으면 의를 거둡니다. 사랑을 심으면 사랑을 거둡니다. 친절을 심으면 친절을 거둡니다. 자비를 심으면 자비를 거둡니다. 화평(和平)으로 심어야 화평을 거둡니다

 

 
 



125. 어느 의사 이야기

전에 어떤 의사에게 어떤 가난한 여인이 자기의 심히 앓는 아이를 데리고 가서 이 아이 병을 좀 봐달라고 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병은 중합니다. 이 부인이 돈은 없지마는 이 아이를 그냥 두면 죽을 수박에 없으니 어떻게 이 아이를 불쌍히 여겨서 고쳐 달라고 간절히 부탁합니다. 그 의사가 불쌍히 여겨서 돈 받지 못하고 약값 못 받고 라도 그 아이를 며칠 동안 정성을 들여서 고쳐주었습니다. 그 후 며칠 후에 6·25가 났습니다. 그만 이 의사가 공산당에게 잡혀갔습니다. 꼭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어떤 알지 못할 사람이 나서서 그 의사를 위해서 말을 하면서 이 의사는 이북에서 오긴 했지만 참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가난한 아이들 병을 거저 고쳐 주었다고 말을 합니다. 알고 보니 얼마 전에 자기가 돈 안 받고 고쳐준 그 아이의 아버지더라고요. 그래서 살았다고 합니다.

 

 
 



126.‘적선지가에 필유여경’

나치스 독일 사람들이 유대 사람은 수백 수천 수만을 학살하던 떼입니다. 어떤 비행조종사가 자기 비행기 속에서 무엇을 만지고 있는데 어떤 젊은 사람이 상기가 되어서 다짜고짜로 비행기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나는 당신이 살려 주지 않으면 죽겠는데 어서 이 비행기를 띄워서 독일 국경 밖으로 좀 데려다 달라”고 간절히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유대 사람이올시다. 이 사람의 뒤를 지금 비밀 경찰대가 추격해 왔던 것입니다. 불쌍히 여겨서 얼른 비행기를 띄워 멀리 국경 밖으로 데려다 주고 왔다고 합니다. 물론 그 후에 다 잊어버렸지요. 얼마 후에 제 2차 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람 역시 독일에 있을 수 없습니다. 영국으로 가서 연합군의 공군으로 종군하면서 전쟁에 가담해 싸웠습니다. 한 번은 전쟁에 나갔다가 큰 사고가 나서 그만 자기가 탔던 비행기가 떨어지면서 중상을 입었습니다. 뇌를 상해서 도무지 의식이 하나도 없고 중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수술을 잘하는 이를 청해서 수술을 하고 두어 주일 후에야 의식을 회복하고 수술해준 의사를 만나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는 가운데 그 의사가 바로 여러 해 전에 자기가 독일 비행장에서 건져준 그 유대사람인 것을 알았습니다.
덕으로 심어야 덕으로 거둡니다.‘유음덕이면 필유양보’(有陰德必有讓)라고 하는 말이 그 말입니다. 숨은 덕이 있어야 양보가 있다고‘적선지가에 필유여경’( 積善之家必有慶) 이라는 글귀 역시 그 뜻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127.많이 심어야 많이 거둔다

성령을 쫓아 심어야 영생을 거둡니다. 또 양에 따라서 거둡니다. 영적 세계에 있어서도 이 원리가 변치 아니합니다. 고린도 후서 6장 9절에 사도 바울이 헌금하는 이야기를 하다가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이런 말을 했습니다. 많이 심어야 많이 거둡니다. 적게 심으면 적게 밖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좋은 씨를 많이 뿌리도록 우리가 사(思)언(言)행(行)에 있어서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또 그리고 언제든지 종자보다는 수확을 많이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 님께서도 옥토에 떨어진 씨는 30배, 60배, 100배가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선을 조금이라도 뿌리면 하나님께서는 많이 우리에게 선으로 갚아 주십니다. 그러나 아십니까? 악을 조금이라도 뿌리면 그 악은 많이 거두게 됩니다. 그러기에 호세아 8장7절에 보면“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말이 있습니다. 작은 바람으로 심었더니 회오리바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악도 역시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종류를 심든지 항상 조심해서 바로 심도록 힘을 써야 될 것입니다. <추수의 원칙>에서

 

 
 



128.아버지와 아들 목사 이야기

이런 얘기가 있지요. 전에 미국에 어떤 부자 목사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아들도 각각 교회 일을 맡아봅니다. 어느 주일 날 아버지는 차를 타고 자기 교회로 가고 아들은 자기 차를 타고 자기 교회로 갔습니다. 날이 다 저물 때에 아버지가 먼저 돌아오고 조금 후에 아들이 돌아오더니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하는 말이“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제가 은혜를 참 많이 받았습니다. 예배를 보고 올 때 어떤 운전사가 차를 몰고 앞으로 달러오기에 그것을 피하려다가 차가 뒤집어 졌지만 저는 그저 핸들만 꼭 잡고 있었습니다. 별로 다치지 않았고 차도 상한 데가 없이 이렇게 돌아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그 말을 듣고“정말 감사하다”고 하면서 잠시 생각하더니“너만 감사한 것이 아니라 나도 감사하다 나는 아무런 사고 없이 예배를 보고 돌아왔으니 이거 얼마나 감사하느냐!”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큰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으면 물론 감사할 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런 환난 없이 평범한 가운데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가도 깨닫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129.두 노인의 간증

어떤 분이 감사일 전날 꿈을 꾸었는데 꿈에 천당에 가보았다고 합니다.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다운지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구경을 합니다. 그런데 한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서서 마치 서로 싸우듯이 큰 소리로 변론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천당에도 싸움하는 사람이 있는가 싶어 곁에 가서 그 에기를 들어보았습니다. 두 노인들이 서로 은혜를 더 많이 받았다고 변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노인이 말하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성질이 나빠서 부모에게도 순종치 않고 학교에도 잘 가지 않아서 나중에는 깡패가 되고 도둑놈이 되어서 나쁜 짓을 하고 살인 강도죄를 짓고도 교도소에서 종신 징역을 받게 되어서 소망이 없었는데 그 교도소에 어떤 분이 들어와서 성경을 전해 주어 그것을 읽는 가운데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우리 죄인을 구원하려 오셨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해서 예수 님을 믿고 천당에 오게 되었다”하면서 하는 말이“내가 세상에서 갖은 죄를 지었는데 이렇게 죄 사함을 받고 천당에 오게 되었으니 나 보다 큰 은혜 받은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요”라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듣고 있던 다른 노인이 말하기를“그것도 큰 은혜이긴 하지만 내 얘기를 좀 들어보십시오. 나는 어릴 적부터 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유아 세례를 받고 주일학교에도 빠지지 않았고, 열 대여섯 살 났을 때 입교문답을 하고, 주일학교도 가르쳤고, 성가대도 하고 그러다가 집사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렇게 일하다보니 또 장로 투표에서 장로로 피택 되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작은 죄도 지었지만 남처럼 큰 죄는 짖지 않았고. 교회에 봉사하고, 선교사업을 하고, 봉사사업도하고, 교육사업도 하면서 일생을 평안히 살다가 이 천당까지 왔으니 나보다 더 큰 은혜가 뉘게 있단 말이요?”하고 변론한단 말입니다. 여러분도 어느 분이 더 큰 은혜를 받았는지 스스로 판단해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명백히 알 것은 이 두 분이 다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환난 가운데서 은혜를 받는 것만 큰 은혜인줄 생각합니다. 혹은 많은 죄를 짓고 회개함으로써 은혜를 받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렸을 적부터 평범한 가운데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크다고 하는 것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꼬!”
앞으로의 생활은 은혜를 보답하는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기 시편을 기록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물을 드리고, 봉사의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되겠습니다.
이 은혜를 깨달은 이후에 우리의 생활은 무엇을 하든지 은혜에 대한 보답의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에서

 

 
 



129.스스로 만족하는 생활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의 생활을 할 줄 아는 비결을 배우면 이야말로 큰 보배가 될 것입니다. 디모데 후서 6자에서도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 편지 할 때에 그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자족한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큰 유익이 되는데 우리 사람이 세상에 올 때에 가지고 온 것이 없고 또 세상에서 갈 때에도 가지고 갈 것이 없다고, 그저 사람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어떤 형편에 있든지 자족할 생각을 하는 이 은혜를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 줄 생각합니다. 이 자족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만 이렇게 말한 거이 아니고 이 편지를 쓸 때에 헬라의 많은 철학자들 가운데도 이 자족에 대해서 교훈 한 분들이 있습니다.

 

 
 



130.디오게네스와 알렉산더 대왕

특별히 그 당시에 스토익파에 속하는 철학자들은 자족을 그들이 윤리의 최고 표준으로 삼은 것입니다. 모든 행동의 가장 높은 덕은 이 자족에 이르는 것이라고, 이 철학자들은 가르쳤습니다. 보통 우리 동양식으로 말한다면,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는 그런 심경에 있는 것이 가장 귀하다고 항상 가르친 것입니다.

그리해서 이 철학자들은 이 자족의 심경에 이르는 길을 간단히 두 가지로 가르친 것입니다.
하나는 모든 욕망을 더는 것입니다. 그들이 늘 하는 말대로 물건을 더 할 것이 아니고 욕망을 덜음으로서 사람은 자족한 생각에 이를 수 있다 이렇게 늘 가르쳤습니다. 이 말씀은 일리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 십만 원 돈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자족의 마음을 기진 사람이 있고 백 만원 돈 가진 사람도 항상 부족하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까닭은 한 사람은 돈은 많지마는 그보다 욕망에 더 큰 까닭이이고 그래서 이 사람들은 어떻게든 욕망을 주리는 것이 이 자족의 생활에 들어가는 첩경이라고 항상 가르쳤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불교의 소위 욕심을 금하여 온전한 자리에 나간다고 하는 교훈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해서 그들은 어떤 물건도 원하지 말고 아무 사람도 원하지 말라. 그런 지경에 이르게 되면 그 지경이야말로 온전한 자족의 지경이라고, 심지어 내 생명에 대한 욕망까지도 버리라고, 그래야 온전한 그 자족의 자리에 이른다고 이들은 가르쳤습니다. 그런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는 그 대표적 인물이 말하자면 디오게네스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아주 간단한 생활을 했습니다. 밤에는 무슨 퉁 나무 위에서 잤다고 랍니다.
한 번은 아침에 일어나서 통나무 위에 앉아 있노라니까, 그 때에 큰 세력을 가졌던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하는 이가 유명한 철학자를 찾아보려 왔습니다. 와서 그 대왕이 하는 말이 “선생님께서 무엇을 원하든지 다 드릴 수 있는데 무엇을 원하는가?” 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대답이“나는 원하는 것이 하나도 없소, 당신이 내 앞에 서서 햇빛을 가리우니 좀 비켜 서 주시기를 바랍니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 이르러야 자족의 자리에 이른 것이라고 이 분들이 가르쳤습니다. 또 이 사람들은 자족의 자리에 이르려면 감정을 말살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좋아하고, 슬퍼하고, 아파하고. 이런 감정 때문에 우리 마음에 자족이 깨지고 안심이 깨지니까 이런 모든 감정을 할 수 있는 데로 말살해서 감정을 초월하는 생활을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가령 쓰던 그릇 같은 것이 깨졌을 때 어떤 부인들은 그것 때문에 마음을 쓴단 말입니다. 아예 마음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그릇 깨진 것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나 이렇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더 큰그릇이 깨져도 그렇게 생각하고 혹, 내가 사랑하며 기르는 고양이 같은 것이 그만 다리가 부러져도 그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지 말고, 그것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나 이렇게 감정을 초월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내 다리가 부러져도 그것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나 이렇게 생각하라고 그들은 가르쳤습니다.

 

 
 



131.에피크레터스의 일화

여기 그런 방면으로 힘을 쓴 에피크레터스라는 사람은, 본래 종으로서 이 철학을 연구한 사람인데 그 사람에 대한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이 분이 어떤 자리에 있든지 자족한 마음을 가지고 살며 감정을 초월한다고 하는 말을 듣고 나쁜 사람들이 얼마나 초월하나 보자고 하여 그 사람의 다리를 막 비틀었습니다. 그러니 앞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아프다는 소리 한 마디도 안 했습니다.
그래도 자꾸 비트니까 이 사람이 하는 말이“당신들이 내 다리를 비틀면 아마 내 다리가 부러질 것 같소”그렇게 말하더랍니다. 아 그래도 이 악한 사람들이 그냥 비틀어서 결국은 다리가 뚝 부러졌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 아프다고 하는 말은 한 마디도 안하고“그렇게 자꾸 비틀면 부러지겠다고 내가 그러지 않았습니까?”그 말만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 생각에는 이렇게 감정을 순전히 초월하는 가운데서 큰 자족의 경지에 이른다고 믿고 이렇게 하려고 애썼고 가르쳤습니다. 순전히 인간의 의지의 힘으로써 이런 방면에 이르기까지 성취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줄 생각합니다. 몇 사람 안 되는 모양입니다. 또 혹 이런 자리에 이르렀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마음이 아파도 아픈 줄도 모르게 되어 버린다면 그게 목석이지 어디 사람입니까? 사실 우리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들은 이 스토익 학자들이 사람의 마음을 광야로 만들어 놓고는 이것이 평화라고, 이것이 자족이라 말한다고 비평한 것입니다.

 

 
 



132.바울의 자족 비결

여기 사도 바울이“내가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자족을 배웠노라”고 하였는데 어떤 길을 통해서 자족을 배웠습니까? 욕망을 말살해서 배웠습니까? 감정을 말살해서 배웠습니까? 그런 것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모든 서신을 연구해 보면 사도 바울은 요망을 말살하지 않고 보다 더 고귀한 욕망을 가지고 그 욕망을 성취함으로 자족을 얻은 것입니다.
빌립보 3장7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깨닫고, 그리스도를 사실 알고 보니 그 지식이 얼마나 고상한지 그 지식을 알고 그리스도와 서로 동행하고 그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된 다음부터는 다른 모든 세상의 욕망은 자연히 봄 동산의 눈처럼 쓰러졌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보니,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보니 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즐겁고, 얼마나 만족한지 세상의 욕망은 자연히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자족의 생활에 들어간 비결입니다. <일체의 비결>에서

 

 
 



133.작은 일이라도 성실히

작은 것들을 조심해야 됩니다. 작은 일을 크게 알아서 작은 일을 바로 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작은 일에 충성한 자가 큰 일에도 충성하고, 작은 일에 충성하지 못 한자는 큰 일에도 충성 못한다고 말씀했습니다.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니 내가 큰일도 맡기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작은 일에 부지런한 사람이 큰 일에도 부지런합니다. 작은 일에 양심적으로 하는 사람이 큰 일에도 양심적으로 합니다. 좋은 생각은 아무리 작아도 어떻든지 우리 마음 가운데 품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진, 선, 미의 모든 생각은 아무리 작아도 항상 우리 마음가운데 품도록 힘은 써야 합니다. 작은 핑계는 아무리 작을 지라도 어떻든지 우리가 안 하도록 힘을 써야합니다.

 

 
 



134.와나메이커의 친절

여기 지금 YMCA를 재건하느라고 굉장히 힘을 쓰는 중에 있지마는 저는 이 YMCA일을 늘 볼 때마다 본래 이 YMCA에 기부해서 지어주었던 미국의 유명한 기독교 실업가 와나메이커(Warnermaker)라고 하는 사람을 기억합니다. 그 사람의 일화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그이가 젊어서 어떤 상점에 가서 물건을 하나 샀는데 사 가지고 와서 보니까 자기가 꼭 원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상점에 도로 가지고 가서“이거 내가 꼭 원하는 물건이 아니니 이걸 좀 바꿔 주시요”부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상점 주인이 대단히 성이 나서“아, 한번 사간 것을 뭘 다시 가지고 왔는가?”고 하면서 불친절하게 거절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천년 은 대단히 섭섭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 때에 이 청년은 그것 때문에 반발하지 않고 왜 장사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손님에게 불친절하나? 나는 앞으로 친절하게 장사를 해보겠다. 어떤 사람이 물건을 샀다가 다시 바꿔 달라고 해도 기쁜 마음으로 친절히 바꿔주겠다 하는 결심을 하고 작은 상점을 경영하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문자 그대로 친절 본위로 사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사업이 잘 되어서 지금 필라델피아 나 뉴욕에 가 보아도 굉장한 와나메이커 빌딩이 있고 큰 상점이 그냥 있습니다.
작은 친절을 우리가 힘 쓸 줄 알아야 됩니다. 선은 아무리 작을 지라도 하도록 힘을 써야합니다. 그러기에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기를“냉수 한 그릇을 목마른 사람에게 주어도 내 이름으로 주면 상을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작은 의무를 바로 하도록 힘을 써야합니다.

 

 
 



135.미국의 한 철도회사 사장

내가 전에 어렸을 때에 어떤 신문을 보니 미국의 큰 철도회사 사장이 죽었는데, 본래 사장이 그 회사에 들어갈 때는 사환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사환으로 들어가서 자기의 맡은 바 책임을 얼마나 잘 했던지 점점 올라가서 마지막에는 그 회사의 사장으로 있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작은 책임을 바로 하는 사람이 큰 책임도 바로 합니다.
여러분은 다 큰 전도자가 될 수 있을지 그건 모르겠어요. 여기 빌리그래함 목사처럼 한꺼번에 수백 명 수천 명을 회개시킬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 하나가 개인적으로 내 친구, 나 아는 사람에게 권면해서 그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는 개인 전도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역사를 본다면 큰 부흥회를 통해서 그 때의 교회가 발전된 것은 아닙니다. 이 믿는 사람 하나 하나가 개인적으로 권면해서 이 작은 개인 전도를 통해서 마지막에 온 로마 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든 것입니다. 작은 의무, 작은 전도를 우리가 힘 쓸 때에 큰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36.스파르타의 교훈

옛날 헬라의 스파르타 나라에서는 항상 그 국민들에게 외쳤던 말이 있습니다.“너희 하나 하나가 벽돌이 되라 산 벽돌이 되라”그것은 그 때 스파르타 사람들이 벽돌로 성을 쌓고 있었는데 너희 하나 하나가 산 벽돌이 되어서 나라를 지키라고 한 뜻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군인은 하나 하나가 민주주의를 지키는 산 벽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교우는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보키 위해 하나 하나가 벽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 하나 하나가 땅에 떨어지는 밀 알이 되면 얼마나 많은 수확을 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 하나 하나가 큰 등불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 하나가 작은 촛불이 되어서 여러분이 사는 그 곳을 밝힌다고 한다면 온 한국이 아마 거이 밝아 질 것입니다. 찬송가에 있는 말씀과 같이“천사 같이 말못하고 바울 같이 못하나 네 집 근처 다니면서 건질 죄인 많도다”우리 하나 하나가 개인적인 한 사람의 영혼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이 개인 전도를 통해서 온 국민을 구원하고 온 민족의 대부분이 기독교로 돌아오게 될 때에 자연히 우리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방면에 큰 변화가 생길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큰 문제는 아직까지 교회가 많다고 하지만 서울의 전 인구로 보면 아직도 열 사람에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백 명에 일곱 정도입니다. 아이들까지 전부 다해서 백 명에 일곱 명 정도입니다 <작은 일의 날>에서

 

 
 



137. 진리의 책 성경

성경을 주신 목적은 인간을 죄악 가운데서 구속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 성경이 지금 까지 많이 읽히고 보급되나요? 이에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씌어졌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구주 되시는 그리스도를 그려주십니다. 성경의 목적은 인간을 죄악 가운데서 구속하여서 새 사람이 되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고자 하는 데에 있는 까닭입니다.
이제 성경과 인간과의 관계를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어떤 축복을 받게 됩니까? 물론 여러 가지 고대의 역사와 문화도 배우게 되지만 그러나 제일 큰 축복은 누구든지 읽으면 이 가운데서 구주를 발견해서 죄를 깨닫고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악인이 변해서 선한 사람이 됩니다. 음란한 사람은 성결한 사람으로, 거짓된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 됩니다. 살인 강도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그대로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138.위대한 책

세상에 위대한 서적이 물론 많이 잇습니다. 미국의 어떠한 대학에서는 소위 위대한 책에 대한 과목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동서고금을 통하여 위대한 책을 골라 통독을 시키는 그런 학과가 생겼습니다. 플라톤이니, 단테니, 혹은 동양의 논어, 맹자, 도덕경 같은 책들을 한 번 읽어보도록 힘을 쓴다고 합니다. 세상에 위대한 책들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책을 읽어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알고 구주를 만나서 새 사람이 되는 책은 성경 하나밖에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 됩니다. 새 사람이 되었지만 아직 어립니다. 이 어린이가 자라기 위해서는 도덕의 젖이 필요합니다. 말씀의 젖이 필요합니다. 이 성경은 생명의 양식, 도덕의 젖입니다. 성장을 계속해서 읽을 때 심령이 자라고, 건강하고, 힘을 얻습니다. 성경을 읽으므로 모든 유혹과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슬픈 일을 당할 때에도 위로를 받고, 사업에 실패하고 낙심할 때에도 새로운 용기를 얻고, 성경을 통해서 새로운 능력을 얻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성경을 읽는 사람은 매일 매일 좋은 음식을 먹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 신앙의 유일한 표준입니다. 전통도, 이성도, 어떤 감정도 신앙의 표준일 수는 없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 신앙의 표준입니다. 이단과 사설이 횡행하는 이러한 때에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신앙의 정로(正路)를 밟아갈 수 있는가 ? 성경을 읽고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행위의 정확한 표준입니다. 성경에는 지고의 윤리가 있습니다. 최고의 도덕적 법칙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십계명을 비롯해서 산상보훈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서 행해야 할 모든 구례를 분명하게, 똑똑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은 우리에게 새 사람이 되게 하고, 생명의 양식이 되고, 신앙과 모든 행위의 표준이 됩니다.

 

 
 



139.《벤허》에 얽힌 이야기
전에 허다벌스 잉그설이라고 하는 무신론자가 역시 무신론자의 친구 류 윌리스라는 대장에게 기독교를 반대하는 책을 쓰라고 권면했습니다. 그 권면을 듣고 그런 책을 쓰기 위해서 우선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려고 성경부터 읽어보았다고 합니다.
성경을 읽어 가는 가운데 생각이 점점 변했습니다. 나중에는 회개하고 오히려 성경에 감화를 받았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분이 예수의 생활을 그 유명한 《벤허》라는 책으로 썼던 것입니다.

 

 
 



140.짐 윌슨 박사 이야기

성경의 감화력은 이렇습니다.
성경을 반대하는 사람의 내면을 살펴보면 거의가 성경을 읽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전에 프린스턴에 짐 윌슨 박사라는 유명한 구약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때에 프린스턴 대학의 학생들이 성경토론을 하려 왔습니다. 이 늙은 박사는 웃으면서 “성경토론 하는 것은 좋은데 그래 성경을 몇 번이나 읽어 봤나 요?”하고 물었습니다. 학생들은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다고 솔직히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박사가 정색을 하면서 하는 말이“나는 적어도 40년을 밤잠 안 자고 몇 백 번 읽고 연구해서 믿지 못할 것이 없으니 우선 몇 번 읽고 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보통 성경을 읽지도 않고 반대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묵상해 보면 어려운 문제는 성경 자체가 모두 대답해 줍니다.

 

 
 



141.성경은 가난한 자의 대헌장

성경이 우리 사회에 주는 영향은 어떠합니까? 바로 내일 모래 12월 10일이 세계 인권 선언일 이고 이 주간이 인격 옹호주간입니다. 한국에 있어서 얼마나 적절한 주간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인권 평등의 사상의 원천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이 가는 곳마다 인간의 죄와 무지와 정치적, 사회적 모든 구속에서 해방됐습니다. 노예제도는 없어졌고, 남존여비의 사상이 타파되었으며, 만인 평등의 사상이 사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민주주의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전에 토마스 헉슬리의 말과 같이 성경은 가난한자와 피압박자의 대헌장입니다. 인간은 성경 없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142.성경은 자유의 대헌장

성경은 자유의 대헌장인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성경은 박애와 자선사업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사회에는 병원이 생기고, 고아원이 생기고, 양로원이 생기고, 적십자사 운동이 생기고, 모든 인도주의 운동이 이러 납니다. 성경이 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도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성경이 가는 곳에는 미신을 타파하고 학문의 연구를 권장케 되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누구나 성경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게 된 이후 자연과학도 발전되었다고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최고의 문학과, 미술과, 음악과 같은 예술은 성경의 감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사실도 우리는 압니다.
성경이 가는 곳에 그 사회의 도덕이 향상됩니다. 이렇게 성경은 국가 사회 도덕의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전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때에 어떤 외국 사절이 와서“영국이 이와 같이 흥왕(興旺)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고 물어보니까, 여왕은 책상 위에 놓인 성경책을 가리키면서“저 책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143.성경은 항상 새로운 책

성경은 오래 된 책 같지만 항상 새로운 책입니다. 성경 가운데 새로운 진리가 무진장으로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성경 가운데 우리 인류가 찾아내지 못한 진리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16세기에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새로운 진리가 발견되어서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고 18, 19 세기에는“온 세상에 가서 진리를 전파하라”고 하는 새로운 말씀이 발견되어서 세계 선교운동이 일어났습니다. 20세기에는‘교회는 하나라고 하는 이 진리가 발견되어서 신 구교를 막론하고 이른바‘에큐메니칼’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오래된 책 같지만 항상 새로운 책입니다. 교회는 성경을 중심 하여 부흥합니다.
성경을 상고하는 교회가 성공합니다.
교회는 언제든지 성경을 중심 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의 뜻이 여기 있습니다.
지난주간에 로마에서 제2차 바티칸 회의가 폐회되면서, 미사 때에 라틴어를 쓰지 않고 자기 나라 말을 쓰는 것이 하락되었고, 다른 교회와 결혼하는 것도 허락되었다고 하는 이런 좋은 소식을 듣고 우리가 다 환영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성서의 바깥만 본 것에 불과합니다. 혼상(婚喪)문제, 마리아 예배, 미사문제, 교황 전제정치, 이런 것이 좀더 성경에 가까이 와야 비로소 신구 교회의 합동문제는 선언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 중심으로 교회가 돌아와야 합니다.
개인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이웃 사람이나. 감정에, 또는 행동에 너무 따라가지 마세요. 언제나 성경 중심의 신앙 생활을 해야 실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고, 성경을 전파하고, 성경대로 살고 죽어야만 합니다. <성경은 어떠한 책인가?>에서

 

 
 



144.주님을 닮자

예수 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고, 그 갈대를 회복하시고, 그 희미한 불을 돋우어서 큰 등대를 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정신입니다. 우리가 어느 때에 이와 같은 정신 가운데서 살지 아니 하리 오 마는 특별히 이와 같은 계절을 맞아서 주님의 이 정신을, 이 성품을 우리는 좀 배워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이와 같은 계절에 병난 사람들을 위해서, 그 가난한 형제를 위해서, 모든 죄인들을 주님 앞으로 구원해 내기 위해서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것도 이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쌀을 모으는 것도 이러한 목적이 있기 까닭입니다. 이 계절에 작은 믿음 잇는 이들을 북돋워 주어야 되겠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솔선수범해서 상한 갈대, 스치고 밟힌 불쌍한 이들을 함께 붙들어 주어야 됩니다.

 

 
 



145.펄벅의《살아 잇는 갈대》

미국의 유명한 여류 소설가 펄벅 여사가 한국에 대한 소설을 쓰셨지요. 펄벅 여사는 더 리빙 리드(The Living Read), 《살아 있는 갈대》에서 우리 민족을 갈대로 보았습니다. 갈대도 살아 있다고 하니 소망은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상한 갈대입니다. 38선으로, 6·25로, 거듭되는 혁명으로, 거듭되는 실정으로, 경제파탄으로 상했습니다. 그 상처가 깊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낙심하고, 어떤 이는 절망하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범죄는 더욱더 격증해 갑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해외로 피하려는 사람도 많이 잇습니다. 이 상한 갈대를 구할 이는 누구이며, 이 꺼지는 민족의 혼을 다시 북돋을 이가 누구입니까? 오직 예수 님뿐이며 우리 주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 님만이 우리 민족을 다시 살려 밝은 빛을 비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다 주님께 나와서 새 사람이 되어야, 주님의 정신을 가지게 되어야, 제3공화국도 바로 건설될 수 있을 것입니다. <상한 갈대>에서

 

 
 



146. 빛의 생활

빛 가운데서 행하는 사람들이 사귐은 무너질 때가 없습니다. 영원히 계속할 것입니다.
우리가 또한 그런 사귐에 대해서 생각할 것은 언제든지 죄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나뉘게 합니다. 부부간에 죄가 들어올 때에 부부도 서로 이혼하는 수가 잇습니다. 부자간에 죄가 들어올 때에 부자도 서로 불상견(不相見)하게 되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친구 사이에도 죄가 들어올 때에는 그 친구가 나뉘어지게 됩니다. 빛 가운데서 행하는 사람들의 사귐만이 참으로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성도의 교제, 성도의 사귐이 매우 필요합니다. 이것은 피차에 도움이 됩니다. 또 한 가지로 힘을 합해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어두운 세력과 싸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147.썸바디’와 ‘노바디’

제가 전에도 이런 말을 한 줄로 생각하는데 여기 우리말로는 적절한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지만 영어에‘썸바디’(Somebody)라는 말이 있고, ‘노바디’( Nobody)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썸바디 라고 하는 말은‘좀 아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아무개가 우리동네 썸바디하면 좀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노바디’라는 말은‘누군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자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되 어떤 교회의 교인이 되었으면 그 교회 안에서 썸바디가 되어야합니다. 좀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교회에 와서 같이 예배는 보지만 다른 사람이 전연 모르는 노바디가 되면 그것은 성도의 교재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와 같이 좀 큰 교회에서 그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148. 사귐의 필요성

우리가 이 성도의 교재를 가지는 게 필요한데 성도의 교재를 가지려고 한다면 여러분이 여러 단체에 가입해서 함께 활동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 여러분이 들어오실 때에 주보를 다 받으신 줄 압니다. 여기 각 성경 공부반의 장소와 시간을 연령에 따라서 참여 할 수 있게 안내해 놓았습니다. 성경공부 시간에 들어가서 같이 성경도 공부하고, 피차에 서로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빛 가운데서 행하는 이들에게 빛의 사귐이 있습니다. 이 사귐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내게도 필요하지만 피차에 사귐을 통해서 힘을 합해 이 세상에서 어두움의 세력과 싸워 이기는 떼도 아주 중요합니다. <빛 가운데 행하라>에서

 

 
 



149 심령의 진공 상태

자연계나 영계에서는 진공 상태를 오래 용납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물병에 물이 하나 가득한 것을 쏟아보세요. 물이 나올 때 콜록 콜록 하는 소리가 드립니다. 왜 그런 소리가 들리는지 압니까? 물병에 물이 가득했는데 물을 쏟으니까 그 병 속에 진공 상태가 됩니다. 비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밖에 있는 공기가 얼른 그 곳에 들어가 차지하려고 파고 들어가는 소리가 그렇게 납니다.
이 세상에 진공상태가 오래 용납될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의 심령이 그렇습니다. 사람의 심령에 진공상태가 오래 갈 수 없습니다. 빈집에 흔히 도적이 들기 쉬운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소극적으로 죄를 떠나는 것만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여야 그 신앙생활이 건전한 신앙생활이 됩니다.

 

 
 



150.지옥의 행랑방

단테의《신곡》을 읽어보면 단테가 유명한 시인 붜질이라 하는 사람의 인도를 받아서 지옥 구경을 갑니다. 얼마쯤 내림 길로 가다가 보니까 조그만 문이 있는 데 그 문 위에는 이 문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은 소망을 버리라는 글귀가 씌어 있습니다. 지옥 속에는 소망이 없는 모양입니다. 안내자의 뒤를 따라서 그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제일 첫 방에 어떤 무리들이 있는데 그들은 슬픈 눈물을 흘리며 탄식을 하고, 원망을 하고, 근심을 하고, 걱정을 하고, 심음을 하고 있었습니다.
단테가 자기 안내자 붜질에게 물었습니다.“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그 때에 안내자가 대답하는 말이“이 사람들은 전에 세상에서 살 때에 소위 중립주의자들인데 하나님을 배반해서 나쁜 일을 별로 한 것은 없지마는 하나님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한 적도 없습니다. 그저 세상에서 살 때 꼭 자기만 위해서 산 이기주의자들입니다. 그래서 물론 천국이 이런 사람을 용납할 수 없어 지옥에 부득이 오게되었는데 지옥에서까지 이런 사람들은 멸시를 받아 이렇게 첫 방에 있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아마 지옥에도 행랑방이 있는 모양입니다. 우tm운 이야기 같지마는 우리에게 큰 경고를 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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