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목차 돌아가기] |
151떠돌이 교우들
제가 이런 말을 이따금 듣습니다. 여러분, 용서하시고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웃자는 생각으로 이런 말도 하는 줄 압니다.
제가 들은 대로 사람들은 우리 영락교회에 대해서 말하기를“아 영락교회에 가면 어째서 예배보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줄 아느냐?”고 물으니까“그거야 알기 쉽지, 왜 영락교회에 가면 사람이 많으냐 하면 이 서울 장안에는 이 교회에도 저 교회에도 속하지 않고 그저 빙빙 돌아다니는 떠돌이 교우들이 많은데, 이 교인들은 주일날 아침이 되면 오늘은 어느 예배당에 가볼까 생각하다가 가만 보니까 영락교회로 오는 사람이 많거든, 그러니까 사람 많은 데로 따라 가보자 그래서 영락교회에 예배하려 오는 사람이 많은 거야”어떤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은 좀 다른 대답을 했습니다.“그 이유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지요. 왜냐하면 영락교회에 가면 그저 예수 믿기가 제일 쉽지요. 자그마한 교회에 간다면 가서 몇 달되지 않아서 이런 일을 해주시오, 저런 일을 해주세요, 부탁이 많은데 영락 교회에 가면 몇 해 있어도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 부탁하는 게 하나도 없고, 또 자그마한 교회에 가 보면 연보 할 때에도 특별히 대표자가 와서 연보 좀 더 해주시오, 좀더 해주시오 이러는데, 영락 교회에 가면 그저 연보주머니 돌아갈 떼 십 원 짜리 하나 넣으면 그 다음엔 체면유지는 잘 된단 말이요. 그러니 이거해라 저거해라 하는 말없이 그저 공짜로 예수만 믿으려면 영락교회에 가야지요”
여러분, 이런 이야기가 얼마나 사실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우스운 이야기 가운데도 무슨 뜻이 있는 줄 압니다.
152 교회는 십자가의 군대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신앙생활에는 방관자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영적 세계에는 중립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생활에 구경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교회에서 여럿이 같이 모여서 이 예배를 들이는 것은 교회의 중대한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교회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이와 같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헤어지는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리하실 때에 성령을 이 땅에 보내어서 교회를 세우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이 땅에서 주님의 일을 계속하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 교회는 군대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천국의 군대입니다. 십자가의 군대입니다. 이 땅에 남아 있어서 악한 세력과 싸와 승리해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교회가 세워 진 것입니다
교회생활에 있어서 떠돌이 교회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입교한다는 것은 군대에 입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해야 됩니다. 교회는 악마와 죄의 쇠사슬에 얽매인 불쌍한 영혼을 구원해서 해방하는 전도의 큰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인 전도를 힘쓰는 것이고 남녀전도를 조직해서 전도를 힘쓰는 것이고 노방전도대도 조직하는 것이고, 전도 인을 파송하는 것이고, 방송전도 와 문서전도도 하는 것이고, 여러 가지로 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모으는 자냐, 헤치는 자냐?>에서
153. 인생의 아침
고요히 생각해서 하루의 생활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기에 옛날부터 일일지계는 재어신(一日之計在於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있다는 말입니다. 천년시대는 일생의 설계를 하는 때입니다. 설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일생의 성공과 실패가 달렸습니다. 그러기에 청년시대에는 요새 말로 비전(幻見)이 있어야 합니다. 이상(理想)이 있어야 합니다. 포부(抱負)가 있어야 합니다. 입지(立志)가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공자의 말씀을 들어보아도 어십오이지유학하고 삼십이립(於十五志有學 三十而立)이라 했습니다. 열 다섯 살 날 때 학에 뜻을 두고 서른에 섰다는 말입니다. 입지란 뜻입니다. 동양에 유명한 철학자 왕양명(王陽明)이 말하기를 입지가 없는 사람은 키가 없는 배와 같고 재갈이 없는 말과 같다고 했습니다. 방향이 없는 사람입니다.
154.청년 때 하나님을 찾아야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이 인생의 봄을 맞아서 일생을 그르치지 않을, 일생의 설계를 꼭 바로 하는 비결이 하나 있는데 무엇인지 압니까?
조물주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는 것입니다. 늘 하는 말이지마는 우리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만들지 못합니다. 내가 나를 지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마치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 때에 이런 그릇도 만들고, 저런 그릇도 만들고, 일정한 목적에 의해서 여러 가지 그릇을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일생을 지으실 때에도 하나님의 일정한 목적에 의해서 우리를 각각 조금씩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천년시대는 가장 원기가 왕성한 떼입니다. 가장 힘이 많은 때입니다. 이 때에 모든 정력을 집중해서 일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많은 일을 한 사람들의 역사를 보면 인생의 아침에 일찍부터 즉 소년시대, 청년기 때부터 일을 했습니다.
155. 데모스테네스 · 시세로
헬라의 유명한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같은 사람은 벌서 17세부터 웅변가로서 국가에 봉사했다고 합니다. 시세로(Cicero) 같은 사람은 스물 여섯 살 때 벌서 유명한 법률가가 되어서 국가에 대한 봉사를 했다고 합니다.
156. 모차르트 · 헨델
음악가 중 모차르트 같은 사람은 여섯 살 때부터 독일 황제 앞에서 연주를 했다고 합니다. 헨델 같은 유명한 사람은 열 살부터 작곡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157.휘트필드 · 스팔존 · 리빙스톤 · 칼빈
부흥 목사 가운데 유명한 죠지 휘트필드(George Whitefield) 같은 사람은 스물 한 살부터 유명한 부흥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유명한 설교가 스펄존 같은 사람은 벌서 스무 살에 유명한 런던의 헤본애플교회의 목사가 된 것입니다.
리빙스톤 같은 사람은 스물 네 살에 이미 아프리카 지방에 가서 흑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요한 칼빈 같은 사람은 스물 여섯 살에 이미《기독교강요》를 썼습니다. <신앙의 아침>에서
158.예수를 바라보자
봄 동산의 풀이 어떻게 자랍니까? 태양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자랍니다. 어떻게 꽃이 아름답게 핍니까? 햇빛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아름다워집니다. 어떻게 괴실 나무가 많은 열매를 맺습니까? 햇빛을 보는 가운데서 열매가 맺히고 익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심령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우리 심령이 장성합니다. 우리 심령에 꽃이 핍니다. 우리 심령에 열매가 맺습니다. 예수를 바라봅시다.
159.주님의 얼굴을 본 사람들
성 프랜시스는 젊었을 때에 성 다미안의 조그마한 예배당에서 홀로 십자가 상 앞에서 기도할 때에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온전히 변해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라비아 교회를 창설한 진젠돌프 백작 같은 사람도 젊었을 때 어떤 미술관에서 예수 님의 십자가에 못 박힌 얼굴을 보다가 신령한 주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새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19세기 영국의 제일 유명했던 스펄존 목사도 소년 시대에“땅 끝에 잇는 백성들아 나를 바라보고 구원을 얻으라”고 하는 말을 듣고 다른 것을 하라면 못하겠지마는 예수를 바라보는 거야 못할 것이 있나 하고 언제나 예수를 바라보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 후에 새 사람이 되어서 유명한 설교가 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바라봅시다
튼튼할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아야 시험에 안 듭니다. 병날 때에도 예수를 바라봅시다. 낙심하지 맙시다. 기쁠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고 슬플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고 성공할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고. 실패할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고, 학교에 입학할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고, 하교에 입학을 못 할 때에도 예수를 바라봅시다.
언제나 예수를 바라봅시다. 살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고 죽을 때에도 예수를 바라봅시다. <예수를 바라보자>에서
160.그리스도의 얼굴
누가 복음19장에 보면 삭게오라고 하는 세리장이 예수의 얼굴이 보고 싶어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 님이 지나가실 때를 기다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예수의 얼굴을 보고싶어 하는 분이 많이 계신 줄 압니다. 우리 가운데도 많이 계신 줄 압니다. 그러나 사람은 예수의 얼굴이 어떠하였는지 확실히 알 길이 없습니다.
161.‘거룩한 세마포’이야기
이태리에 큐링이라고 하는 곳에 옛날부터 예배당이 있는데 그곳에 가면 보물로서 보존되어 오는 홀리 슈라우드(Holly Shroud)즉 거룩한 세마포라고 하는 홑이불이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 세마포는 에수 님을 무덤에 장사할 때에 그 유해를 쌌던 세마포라고 합니다.
그 유해를 싸고 있던 동안에 어떠한 화학작용이 일어났는지는 모르나 그 홑이불 위에 예수 님의 모습이 사진처럼 박혀서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 예수 님의 귀가 얼마나 크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러나 그 전설이 얼마나 확실한지는 믿기가 대단히 어려운 줄 압니다.
제1세기에는 사진 만드는 법을 몰랐습니다. 예수 님을 누가 초상화를 그렸다고 한 이야기도 없습니다. 조각으로 만들어 보았다고 하는 이도 없습니다.
더욱이 1세기나 2세기에는 기독교 예술가들이 감히 예수의 얼굴을 그려볼 생각도 못했습니다. 첫째는 너무 황공했기 때문이요, 둘째는 그렇게 하면 혹 둘째 계명에 저촉이 안 될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 역사를 보면 3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기독교 예술가들이 예수 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5, 6세기에 내려오게 되면 예수 님의 얼굴을 그린 사람들이 많아져서 성화를 예배당 안에 가득히 붙여 놓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교회 안에 이렇게 성화가 너무 많은 것이 좋으냐 좋지 않으냐 이런 굉장한 논쟁이 벌어진 때도 있습니다.
지금도 특히 동방교회 즉 헬라 정통교회에 가보면 그저 천장으로부터 온 벽에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으로 장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상상화입니다. 그러나 물론 이 성화 가운데 제일 유명한 성화들은 종교개혁 이후에 그려졌습니다.
162.하나님의 형상
우리가 흔히 보는 하프만의 유명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의 얼굴이든지, 혹은 다빈치의 유명한 성 만찬식에 나타나신 주님의 얼굴, 혹은 홀맨 한트 같은 이의 세계의 빛이라고 하는 그 그림에 나타난 예수 님의 얼굴이 아마 대표적인 것이고 제일 유명한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부가 상상화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친히 볼 수 없다고 그다지 섭섭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줄 압니다. 예수께서 도마에 말씀하시기를“너는 나를 보고 믿으나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더 복이 있느니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의 외모를 보는 것보다도 우리의 마음 눈으로 그 얼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잇습니다. 가령 요한 복음 1장에 보면 사도 요한 이 주님을 보고 이렇게 기록했습니다.“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혹은 이렇게도 기록했습니다.“보라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돼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자가 나타내셨느니라”이것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 증언하는 사도 요한의 말씀입니다.
오늘 아침에 읽었지마는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163.주님 얼굴을 계속해서 바라보면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면 우리에게 구원이 있습니다.
주의 얼굴을 바라보는 중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죄인을 위해서 말할 수 없는 그 연민, 그 긍휼(矜恤), 그 자비를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물론“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고 궁창(穹蒼)이 그 손으로 만드신 것을 나타내어”보입니다. 그러나 이 굉장한 대 우주도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오직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에만 하나님의 참되고 지극한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찬송가 일 절과 같이“머리와 수족 보오니 큰 자비 나타나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 위해 쓰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우리가 이 주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다시 말하여 가시 면류관을 쓰신 그 얼굴을 앙망(仰望)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돌이켜서 나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네 죄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요, 네 죄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그리해서 우리는 겸손히 주님께 나와 죄를 회개해야 하며 그 때에 자기 죄 사함과 구원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가운데 구원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계속해서 바라보게 되면 우리의 얼굴도 점점 빛나게 됩니다. 모세가 오랫동안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대면하고 내려올 때에 그 얼굴이 빛났다고 하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스테반이 핍박을 받아 돌로 맞아서 마지막에 순교할 때,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빛났다고 하였습니다. 스테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우편 서신 예수 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그의 얼굴까지 빛나게 된 것입니다.
달빛이 어떻게 비치는지 아시지요? 태양광선에 반사되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항상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영광을 항상 앙망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또 우리 얼굴에도 어느 정도까지 반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얼굴은 우리 사람의 마음의 거울인데 우리의 마음 눈이 항상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서 우리 마음속에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기쁨이 충만하면, 아마 어느 정도까지 그 빛이 우리 얼굴에도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164.굶주린 자에게 먹이라
옛날 율법을 읽어보면 곡식을 거둘 때 전부 다 거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모퉁이 이곳 저곳에 좀 남겨 놓고 거두라고 했습니다. 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그 이삭을 주어다가 먹고 살 수 잇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감람나무를 털 때 아주 다 털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좀 남겨두어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그것을 따서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옛날 나오미와 룻이 멀리 모압 땅에서 돌아와서 베들레헴에 왔는데 자기 땅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어떻게 살았어요? 이삭 주어 먹고살았습니다.
165.사마리아인의 자세
배고픈 이가 빵을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적당한 기본 권리입니다. 그러기에 성 프랜시스는“ 가난한 이가 빵을 달라는 것은 자기 것을 달라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누구나 하나님께서 먹고살도록 낸 것인데 먹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적당한 권리라는 말입니다. 우리 동양에도 옛날부터 내러오는 말 가운데 천불생무록지인(天不生無錄之人)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녹 없는 사람은 만들지 않으셨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 비슷한 사상이 그 가운데 내포된 줄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굶주린 이들을 먹이는 것은 사회정의입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이기를 거부한다고 하면 그것은 사회정의에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한 거름 더 나아가서 굶주린 이들을 먹이는 것은 인도입니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할 일입니다.
여러분은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잘 아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불한당을 만났습니다. 돈을 다 빼앗겼습니다. 많은 매를 맞고 넘어져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었습니다. 그 때 마침 어떤 fp위 사람이 자나갔습니다. 그러나 보고만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에 제사장이 또한 지나갔습니다. 그 역시 물끄러미 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유대 사람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외국 사람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도와준 이야기를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에도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거리에 굶주려서 쓰려진 동포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사람 아닌 미국 사람들이 구호(救護)품을 가지고 오며 잉여 농산물을 보내서 이 굶주리는 사람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애를 씁니다.
바로 이런 때에 한 동포가 우리로서 더욱이 레위 사람과 제사장의 직위에 있는 한국의 교회가 이 광경을 보기만 하고 그저 지나간다고 하면 이것은 인도를 무시하는 길이고, 이웃됨을 무시하는 것이고, 정의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굶주리는 이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굶주리는 이에게 먹이는 것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할 일입니다.
또 기억하십니다. 굶주린 동포를 우리가 도와주는 것은 사실 주님을 도와드리는 것입니다. <예수와 굶주린 대중>에서
166. 기독교 가정의 기본원칙
에베소 5장 25절에“남편들아 아내 사항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디도서 2장 4절에“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 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이런 여러 교훈이 있습니다.
167.랍비의 사랑의 원리
가정 안에서의 생활 원칙을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창세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여자를 지으실 때에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지으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옛날 유대 랍비 가운데 한 사람이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다고 합니다.“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실 때에 남자의 손뼈로 만들지 않은 것은 남자가 여자를 너무 장난감으로 알까봐 그렇게 안 하셨다. 또 여자를 만드실 때에 발에 있는 뼈로 만들지 않은 것은 남자가 여자를 너무 업신여길까봐 그렇게 안 하셨다. 여자를 만드실 때에 남자 머리의 뼈로 만들지 않은 것은 여자가 남자를 너무 업신여기면 그것도 곤란함으로 여자가 남자를 주장 못하게 하기 위해서 머리뼈로는 안 만들었다. 그럼 왜 갈빗대로 만들었는가 요?
갈빗대는 몸의 중심에 있는데 남자와 여자가 꼭 평등하게 서로 살라고 갈빗대를 취하서 만들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갈빗대로 말하면 심장에 제일 가까우니까 남자가 아내를 극진히 사랑하라고 갈빗대로 만드셨다. 또 갈빗대는 팔 아래에 있어서 살로 덮여 있는데 팔이 그 갈빗대를 잘 보호해 주고 있는 것처럼 남자가 여자를 잘 보호하라고 갈빗대로 만드셨다.”이렇게 해석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옳은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평등과 사랑의 원리를 의심할 여지가 없이 꼭 옳습니다. 우리 가정에 있어서의 생활의 원칙은 평등과 사랑으로 뭉쳐서 사는 것입니다.
168.‘꾸쉴러브’ 이야기
그러면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몇 해 전에 제가 어떤 외국 신문을 보니 제목에‘꾸쉴러브’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대로 번역하면‘수풀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수풀 사이에 사는 야만이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내용이 무엇인가 알아보니 어떤 남자가 멀리 외국에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데 자기 부인이 비행장까지 마중 나왔어요. 여러 달 동안 떨어져 있다가 자기 부인을 만나니 오죽 반갑겠습니까? 또 서양 사람들은 반가울 때 흔히 행동으로 표현하니까 자기 아내를 포응하고 인사를 하는데 얼마나 힘차게 안았는지 그만 부인의 갈빗대가 다 부려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직 까지도 어떤 사람들은 그저 남녀간의 사랑은 이런 것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169.나와 결혼한 남편은 어디 갔는가?
여러 해 전에 미국의 유명한 잡지에 어떤 여기자가 글을 썼는데 그 제목이“나와 결혼한 남편은 어디 갔는가?”그런 것입니다. 간단히 보면 이 여자가 자기 남편을 잃어버렸나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마는 그 내용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아무개와 결혼할 때에는 참 성인 군자요 좋은 사람인 줄 알고 결혼했는데 몇 달 살아보니 본래 보던 남편하고는 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본래 결혼한 남편은 어디 갔는고 하는 탄식입니다. 이런 탄식은 부인들만 하는 것이 아닌 줄 압니다. 혹 어떤 남자들도 그런 글을 쓸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내가 본래 결혼한 아내는 어디 갔는고?”처음에 결혼할 때에는 그저 자기 남편은 다 영웅적으로 자기 아내는 다 천사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몇 달 동거하고 몇 해 지나게 되면 꼭 그런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옛 아담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옛 하와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점점 성질을 알게 됩니다. 점점 까다로운 사람도 있구나 하는 걸 알게됩니다. 그렇게 되면 환멸을 느끼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실 그때가 결혼 생활에 있어서 큰 위기입니다.
가정의 기본원칙 가운데 하나는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피차에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러면 사랑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성경 가운데 사랑장인 고린도 전서 13장을 잘 압니다. 4절 이하에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제일 먼저 무슨 말로 시작합니까?“오래 참고…”그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오는지 압니까? “사랑은 온유하며―”친절 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170.건강과 장수의 비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75세 난 노인이 의사에게 가서 건강 진단을 받았습니다. 나이는 75세나 되었지마는 진찰을 해 보니 조금도 병이 없습니다. 아주 건강합니다. 그래서 의사가“참 노인 님 건강하십니다. 그렇게 까지 건강하게 산 비결이라도 있습니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이 잠깐 생각하더니“비결이 있다고 할 수 있지요.“무슨 비결입니까?”그 노인이 천천히 대답했습니다.“제가 지금부터 꼭 50년 전에 결혼을 했습니다. 50년 동안을 나의 아내와 지금까지 화평한 생활을 해오는데 맨 처음 결혼한 후에 내 아내와 무슨 약속을 했는데 우리가 피차에 한 집에서 살 때에는 간혹 성이 날 때도 있겠으나 만일 내가 성이 나면 당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말고 빨리 주방으로 나가시오. 또 만일 당신이 화가 나면 나는 문 열고 문 박으로 나가서 산책을 할 터이오. 그런 약속을 하고 지금 50년을 지나고 생각해 보니 제가 참 산책을 많이 했습니다. 이렇게 밖에 나가서 산책을 많이 했더니 이처럼 건강해졌습니다. 산책하고 집에 돌아오면 집안은 화평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건강해 진 것입니다”
171.부부간의 사랑의 비결
사랑이 무엇이라고요?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성나는 일이 있어도 또 어떤 때에 분이 나도 부부간에 오래 참는 것, 참을 줄 아는 그것이 성서적 의미에서 참 사랑입니다. 사랑은 온유하며 친절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서적 교훈입니다. 보통 잘 모르는 낯선 사람을 대할 대는 아주 친절합니다. 그러나 집안에 들어가서는 친절히 안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제일 가까운 사람, 남편에 대해서, 아내에 대해서, 친절히 안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밖에 나오면 아주 참 친절한 사람 같이 보이는데 집안에 들어가서 혹 그 부인에게 하는 걸 보면 도무지 친절하지 않습니다.
자 여러분, 내놓고 말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먼 사람에게 친절하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왜 친절히 하지 않는 가 말입니다. 또 보세요, 우리가 보통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항상 예의를 갖춥니다. 예의 있게 대하고 깍듯이 합니다. 그러나 제일 가까운 사람한테 와서는 무례하게 행할 때가 많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고린도 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은“무례의 행치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예의를 왜 안 갖춥니까? 사실은 우리가 어디 가서나“고맙습니다”“수고 많이 하셨습니다”이런 말들을 많이 하지마는 그런 말을 많이 할 곳은 가정입니다. 이런 가정이 화평하고 이런 가정이 즐거움이 충만합니다. 가정생활의 기본 원칙은 사랑입니다. 성서적 의미의 사랑입니다.
172.가정제단
어떤 건축가가 저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우리 한국 건축에는 주택을 짓는데 중심이 없습니다.”서양 사람의 주택을 보면 그 주택에 중심이 있습니다.‘화이어 플레이스(fireplace) 라고 하여 불 피우는 데가 있는데 그것이 중심이 됩니다. 일본 사람이 집을 지을 때에는 '도꼬노마' 라고 하는 그림 걸어 놓은 중심이 있는데 그것이 집의 중심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주택은 도무지 중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택에도 중심이 있는 것이 좋겠지요.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가정에 중심이 꼭 있어야 합니다. 가정의 중심은 가정 제단입니다. 우리 가정은 작은 교회라고 할 수 잇는데 교회 안에는 반드시 제단이 있어야 합니다. 제단 없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제단에 항상 불이 켜져 있어야 합니다. 불 꺼진 제단은 무엇합니까?
우리 가정이 과연 기독교 가정이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려고 하면 남편과 아내가 예배당에 와서 예배보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자기 가정에 가정 제단을 쌓고 같이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같이 기도를 드려서 가정 제단에 불을 켜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옛날부터 모든 경건한 가정에는 그 주인이 이를테면 그 가정의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이를테면 전도사가 됩니다. 우리 가정의 중심은 제단입니다. 우리 가정에 가족예배를 드리는 튼튼하다고 하면 제가 이미 말한 일부일처의 원칙이니, 부부일신의 원칙이, 성결의 원칙이오니, 사랑의 원칙이니 하는 것들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가운데 다 잇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까지도 이 가정제단을 쌓지 못한 가정이 있으면 오늘부터 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73.가정의 오대 원칙
바로 제가 주간에 크리스천 센츄리(Christian Century)라고 하는 잡지를 보니까 작년(1963년)에 뉴욕시 안에서 살인사건이 549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91건이 가정관계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보세요! 5백 여 건의 살인사건 가운데 91건, 거의 5분의 1이 가정관계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우리에게 보여줍니까? 기억하십시다. 우리의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낙원과 지옥의 갈림길에 언제나 서 있습니다. 우리 가정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이 땅 위에서 지상낙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정이 타락하게 되면 인간의 지옥입니다.
우리는 어떤 가정을 만들기 원합니까? 교훈대로 가정을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성경은 이 다섯 가지 원칙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일부 일처의 원칙, 부부 일신의 원칙, 성결의 원칙, 사랑의 원칙, 제단의 원칙입니다. <기독교 가정의 기본원칙>에서
174. 네 부모를 공경하라
옛날부터 내려오는 우리 속담에 "아들 주머니에 있는 돈도 내 주머니의 돈만 못하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꼭 "사실인 줄 압니다. 아들한테 용돈 달라고 하는 말은 참 하기 어려운 줄 압니다. 용돈 달라는 말하기 전에 미리 좀 넉넉히 드리세요. 여러분, 아기 생일잔치는 잘하면서 부모님 생일은 혹 잊어버리는 분이 없습니까? 자기는 어디 가려면 조금만 바빠도 택시 타고 하면서, 부모님이 어디 가신다면 버스 값이나 드리는 분은 없습니까?
175.불효한 아버지에 불효한 아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양에서 된 이야기입니다. 어떤 이들이 자기 아버지를 모실 수박에 없습니다. 이런 일은 서양에서 매우 드물어요, 그런데 이 가정은 아버지를 모실 수박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은 아버지를 모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나이 점점 많으니까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해서 음식 잡수시다가도 음식을 자꾸 흘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한국도 그렇게 되어오지마는 서양에서는 큰상에서 온 가족이 다 앉아서 함께 먹습니다. 이 가정도 그렇게 한 상에서 식사를 하는 데 제일 높은데 앉은 할아버지가 음식을 줄줄 흘리니까 이거 참 창피하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들과 며느리가 보기가 답답합니다. 그래서 부득이“미안 하지만, 할아버지는 딴 곳에서 잡수세요”하고 딴 상에다 잡수게 했습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대접하느라고 딴 상에다 드리는 수도 있어요, 하지만 서양에서는 대접이 아닙니다. 그저 주방 한 옆에 조그마한 상에다 따로 잡수시게 했는데, 그것도 아마 떠 넣기가 어려우니까 그랬겠지요, 그릇을 들고서 잡수려고 하더니 또 그릇을 떨어뜨려서 자꾸 깨뜨립니다. 자 그러니 그 다음에는 며느리가 성이 났습니다. 그래서 이거 원 안 깨지는 그릇이 없겠나하고 돌아보니까 주방 옆에 고양이 밥 주는 주발이 있는데 그게 나무 그릇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씻어서 거기에다 밥을 담아들입니다. 아마 씻기야 잘 씻었겠지요. 그러니까 이 할아버지가 이제는 주방 옆에 앉아서 그 고양이 밥 주발에 갖다 드리는 것을 조금씩 잡수고 그렇게 지냅니다.
한 번은 그 아들과 며느리가 거리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까 너 댓 살 난 아들아이가 나무 목침 같은 것을 하나 갖다 놓고는 주머니칼로 부지런히 가운데를 파냅니다. 그래서“야, 이놈아, 너 무엇 하느냐?”하고 물어보니까“나무 그릇 만들어요, 나무그릇”한단 말입니다. “나무그릇은 만들어서 뭘 하려고 그러느냐?”하고 다시 물어보니까“아버지 늙은 다음에 밥 담아 드려야지요”우리가 웃으시는데 이것은 꼭 우리가 기억하십시다. 우리가 부모를 잘 공경하지 않으면 이 다음에 우리 자녀가 우리를 공경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동양의 옛 글에 효순환생효순자 오역황생 오역자(孝順還生孝順子 惡逆還生惡逆者)라는 말이 있습니다. 효도하고 순한 사람의 그 아들이 효도하고 순한 아들을 낳고 거스리는 아들은 이 다음에 자기를 거스리는 아들을 낳는 다는 말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부모에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176.어느 목사님 가정의 효
한 달 전에 어떤 감리교 목사님이 제게 와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하다가 “목사님한테는 특별히 감사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그 분 말이“소망의 시간을 늘 그렇게 방송을 해 쥐서, 우리 집에서는 이 소망의 시간을 열심히 듣는데 두 번씩이나 듣습니다. 토요일 저녁에도 듣고 주일 아침에도 듣습니다.”라고 합니다.“그건 왜 두 번씩 듣습니까?”그런게 아니라 제가 장모님을 모시고 있는데 그 분이 벌써 몇 해 전부터 소망의 시간을 열심히 듣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점점 많아지니까 한 1년 전부터는 귀가 먹어서 좀 적은 소리는 듣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아이구 이거 소망의 시간도 못 듣고 이젠 뭘 해야 하나? 자꾸 이렇게 탄식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다 못한 제 아내가 정 그리시면 제가 소망의 시간을 필기해서 드릴 텐데 그걸 읽어보세요 하고는 매 주일 그것을 베낍니다. 할머니 시력은 다시 밝아져서 잘 보시거든요.
그래서 딸이 소망의 시간을 다 베껴서 쓰는데 말하는 것을 다 따라 베낄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대강 베꼈다가 그 이튿날 아침에 또 베낍니다. 이렇게 한 후 다시 정서를 해서 어머니한테 바치고야 주일 날 예배당에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은 너무 민망해서 제가 아내보고 그걸 매 주일 어떻게 합니까? 이따금 이나 하구려 하였더니 아내의 대답하는 말이 이제 얼마나 더 앉아 게시겠소? 그저 앉아 계시는 동안은 내가 이걸 하려고 합니다. 하는군요, 이래서 저도 소망의 시간을 두 번씩 듣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나이 많은 부모님들 모시기에 좀 피곤한 이가 혹 게십니까? 이제 얼마나 더 앉아 계시겠습니까? 나이 많은 부모님들이 건강하다고 우리 부모님은 백 세를 사실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언제 돌아 가실지 무릅니다. <제 5계명>에서
177.주님의 손
모든 손들 가운데 특별히 우리가 어머니의 손을 생각할 때 봉사를 생각합니다. 또한 수술하는 의사의 의 손, 간호하는 간호원의 손, 봉사를 우리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떠한 손이든지 봉사의 손이 될 수 있습니다. 농부의 손도 그러하고, 의사의 손도 그러하고, 예술가의 손도 그러하고, 음악가의 손도 그러하고, 어떤 사람의 손이든지 사실 나만 위해서 쓰지 말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쓰게 될 때에 우리의 손은 봉사의 손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모든 봉사가 귀하지마는 손수 할 때 그 봉사가 더 귀합니다. 같은 음식이지마는 손수 지어서 대접할 때 그 음식이 더 맛이 있습니다. 같은 선물이지마는 손수 자기가 무엇을 만들어서 어떤 친구에게 줄 때에 더욱 마음에 감격이 있습니다. 같은 쌀이지마는 내 손으로 털어서 내 손으로 예배당에 가져오고, 내 손으로 다 같이 모아서 가난한 형제와 자매를 구할 때에 그것이 더욱 귀합니다. 같은 봉사지마는 손수 할 때에 더욱 귀합니다.
178.어머니의 손
옛날이나 오늘이나 특별히 여성들 가운데는 손을 곱게 하려고 애쓰는 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중국 여자들은 손톱을 길게 기르기도 하고 미국 여자들은 손톱을 빨갛게 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일 아름다운 손은 어떤 손인지 아십니까? 봉사하는 손입니다. 미국 어떤 가정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멀리 가 살던 아들딸들이 다 모여서 즐겁게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하다가 젊은 사람들 사이에 누구 손이 제일 고우냐 이런 토론을 하였다고 합니다. 맨 처음에는 젊은 사람의 손이 곱다 거니, 또는 아기의 손이 곱다 거니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다가 마지막에는 결국 투표해서 정하기로 하고 투표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투표의 결과는 어머니의 손이 제일 아름답다고 나왔습니다. 주름살 많이 잡힌 어머니의 손입니다. 그것은 봉사를 많이 한 손인 까닭입니다. 봉사의 손이 제일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생각할 때에는 주님의 말씀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하면 이 봉사는 더욱 아름답습니다.
179.스코틀랜드의 성 까일스의 손
다음의 주님의 손을 자세히 보면 그 손에 못 자국이 있습니다. 이것이 특별히 다른 손과 다른 점인 줄 압니다.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자로 존경을 받는 성 까일스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가 잇습니다. 그는 본래 아덴의 한 왕자로 태어났지마는 주를 믿은 다음에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깊은 산에 들어가서 수도사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하나 즉 어렸을 적부터 자기가 사랑하던 암사슴 하나만은 자기를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서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산에 가서 다닐 때도 이 암사슴과 같이 다니고 또 암사슴의 젖을 짜서 먹고 초근목피로써 생활하면서 기도생활을 했습니다. 그때에 마침 불란서의 어떤 왕이 사냥을 하기 위해서 깊은 산 속에 들러갔는데 한 골짜기에 가보니 먼 곳 바위 아래 사슴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이 사슴을 향하여 활을 겨누어 쏘았습니다. 그 때 성 까일스가 조용히 묵상 기도를 하다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얼른 눈을 떠보니까 화살이 자기의 사랑하는 암사슴을 향하여 옵니다. 이 성자는 이것을 막기 위해서 얼른 자기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화살이 성자의 손을 뚫고 나가면서 사슴을 맞혔습니다. 사슴이 맞긴 맞았지마는 손을 뚫고 지나간 살이라 힘이 없어서 사슴은 별로 상하지 않았습니다.
불란서 왕이 이런 것도 모르고 사슴이 죽었거니 하고 사슴을 얻기 위해서 헐레벌떡 뛰어왔습니다. 와 보니 난데없이 어떤 성자가 손을 들고 있는 데 그 손에서는 피가 흘립니다. 이 광경을 본 불란서 왕은 주님의 손이 연상되어서 그 자리에 꿇어앉아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님의 손은 다른 사람을 죄악 가운데서 구속하기 위하여 상한 손입니다. 그 손에 못 자국이 생긴 손입니다. 그 손에 상처가 생긴 손입니다. 주님의 이 손을 바라보아야 되겠습니다. 도마가 이 손을 바라보고 이 못 자국을 만져보고 예수 님 앞에 꿇어앉아서 하는 말이 “과연 내 주님이시오. 내 하나님입니다”하고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 가운데 아직도 예수 님이 어떠한 분인지 확실히 알지 못하는 분이 계시면 성령의 감화로서 주님의 이 피 흘리는 손을 바라보고 과연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인 것을 깨닫고 나와서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얻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손>에서
180.영원한 삶을 위하여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살기 위해서 생명을 택하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풍성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도덕적으로 고귀하고 옳게 살기 위해서, 문화적으로 빛나게 살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번영하고 화평하게 살기 위해서 생명을 택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살기 위해서”라는 말은 아마 좀더 깊은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영원히 살기 위해서”란 뜻입니다. 사람이란 간단한 육체의 일생이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시편 103편에 보면“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하는 구절이 잇습니다.
그러나 그 구절만은 아닙니다. 그 다음에 계속해서“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라고 읊었습니다.“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으리라”이것은 이 세상의 생만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르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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