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스승, 성령(2)
요 14:25-31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
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세주이시고 주님이시고 스승이십니다. 주님이 죽으시고 이 세상에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 성령은 우리에게 또 다른 스승이고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에 성령을 보내주신 것은 인류에게 은혜이고 복입니다. 성령은 세상에 오셔서 많은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 사역 중 변화를 일으키시는 사역이 가장 강한 사역입니다. 성령은 오셔서 마음에, 질로, 내용으로, 모양으로, 외적으로 내적으로 변화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렇게 변화하게 하셔서 할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성령은 조용히 돌보시고 인도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때로 소나기 같이 역사하시기도, 기적같이 개입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아주 조용하게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다녀가셔도 대부분은 모릅니다. 얼마 후에 생각해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다락방 강화”라고 부르는 말씀입니다. 일명 “예수님의 고별설교”라고도 부릅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과 이별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내가 가면 너희에게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이 떠나시면 낙심할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시고 희망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영적상태를 각성시키면서 이제 오시는 성령이 어떤 사역을 하시는 가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을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깨닫게 하시는 영
성령의 사역 중 가장 중요한 기능은 가르치는 기능입니다. 26절을 보면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가르치는 내용 중 하나는 26절에 나온 것처럼 “생각나게 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은 늘 듣고 배워도 잊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하면 이 잊는 것이 축복입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면 곧 잊게 됩니다. 그것도 은혜입니다. 그대로 다 기억해 둔다면 설교자들은 참 죽을 맛일 것입니다. 그런데 적당하게 잊어주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말씀이 필요할 때는 성령께서 다 기억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성령의 사역입니다.
또 하나는 “깨닫게 하시는 사역”입니다. 기억하게 하실 뿐 아니라 필요할 때 하나님의 영이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시고 분별하게 하시고 적용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인간적인 생각과 사고 범위 내에서만 분별합니다. 그래서 인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깊으신 생각, 섭리, 뜻의 차원은 성령이 깨닫게 하시고 분별하게 하십니다. 본문 28절을 보면 “너희가 나를 진정 사랑하였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하였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았더라면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실 때 “결코 죽을 수 없습니다” 하고 만류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뜻을 미리 알고 비장한 마음으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런 깊으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받습니다. 그리고 곧 바로 예수께서 이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겠다고 할 때 “결코 그러면 안 됩니다”하고 만류하다가 사탄으로 몰립니다. 모르니까 매달리고 만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그런 깊으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제는 천국의 열쇠를 받고 오늘은 사탄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이 오신 목적입니다. 오셔서 분별하고 깨닫고 알게 하십니다.
여러분, 모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모르면 우리에게 주어진 본분을 망각하게 됩니다. 본분을 망각하면 판단이나 처신을 망치게 됩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자기에게 주어진 본분을 망각했습니다. 그 망각이 얼마나 큰 오류를 범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아담 부부에게 에덴을 관리하도록 맡기셨습니다. 아담부부는 에덴을 잘 다스리고 관리하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본분이었습니다. 그때 사탄이 그 부부를 유혹합니다. 그리고 주어진 본분에서 이탈하게 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에 회의감을 가집니다. 그러니까 주어진 책임에 대해서 해석을 잘못하게 되고 이상한 길을 가게 됩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보니까 전처럼 보이질 않고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보였는데 오늘 보니까 먹음직하게 보였고 탐스럽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다 먹으라고 해 놓고 왜 저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하셨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그때 그는 마음으로 스스로 유혹에 넘어갑니다. "뱀의 말이 맞아, 하나님처럼 될까봐 먹지 말라고 한거야“ 그 욕망이 결국 아담 부부로 하여금 그 열매를 먹게 만든 것입니다.
본분을 망각한 결과입니다. 그 사탄이 오늘도 그 작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열심히 돌아다니며 사람들로 하여금 본분을 망각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이 분별을 잘못하고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면 하나님이 나를 목회하라고 실패하게 하셨다고 해석합니다. 성경에 그런 사례가 어디 있습니까. 모세가 구스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자 누이 미리암이 모세를 아주 심하게 비방했습니다. 미리암이 “하나님이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않으셨느냐”(민 12:2)면서 심하게 비방했습니다. 그 말은 “너만 선지자냐, 너만 하나님의 종이냐, 나에게도 계시를 주시지 않았느냐“는 말입니다. 이것이 자기의 본분을 망각한 사례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미리암을 부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느냐,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눈과 같이 희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미리암은 나병이 걸린 채 죽습니다. 성령은 이런 무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헤아려 알게 하십니다.
긍정의 안목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건강한 생각은 긍정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좋은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 좋은 생각을 갖게 하시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건강한 생각, 긍정의 생각은 민수기 13장에 나오는 12두 명의 정탐꾼의 보고 내용에서 잘 나타납니다. 12명중 2사람의 보고내용은 가장 건강한 정신, 생각, 판단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말을 듣고 희망과 소망과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던 길을 힘 있게 걸어가게 만들었습니다. 요셉이 자기를 팔아먹은 형들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했던 말도 소망의 말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팔았다고 생각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뜻이 있어 당신들 보다 먼저 이 땅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얼마나 건강한 생각이고 올바른 판단입니까.
이 건강한 생각과 판단이 기적을 불러옵니다. 어느 어머니가 피부가 노래지고 몸무게가 자꾸 줄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 보았더니 진단결과 몇 주밖에 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이 어머니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나는 죽지 않는다, 주님이 지키신다, 나는 반드시 살아서 주의 은혜를 선포할 것이다”하고 단단히 다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때부터 식욕이 솟더라고 합니다. 그리고 살이 붙기 시작하고 피부색이 회복되어 그 후 25년을 더 살았다고 합니다. 이 생각은 분명 성령이 주시는 생각입니다.
또 이 생각이 최악의 상황에서도 소망을 갖게 합니다. 생각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어느 시골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가서 보니까 전도사 가족 부부와 아이까지 3명만 모여 있었습니다. 그때 낙심해 있던 전도사에게 언더우드 선교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도사님은 오직 희망만 있습니다, 지금은 세 명 밖에 없으니 여기서 더 줄어들 걱정은 없고 앞으로 오직 늘어날 일만 남았으니 얼마나 소망스럽습니까.” 이 생각이 성령이 주시는 생각입니다. 대부분은 현재 보이는 3명만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낙심되고 용기를 잃게 됩니다. 신앙의 안목은 현재 나타나 보이는 것만 보는 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인의 삶은 오늘의 현실 저 너머에 존재해 있는 실제를 보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 생각이 육체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칩니다. 기분 좋을 때 음식을 먹으면 맛도, 소화도, 만족함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상했을 때 음식을 먹으면 맛도, 소화도 안 되고 탈이 날 수 있습니다. 커피 마시면 잠이 안온다고 하는데 그런 분은 카페인을 뺀 커피를 줘도 잠이 안 옵니다. 잠이 오지 않는 사람에게 우유에다 커피를 넣어 주었더니 마시고 잠만 잘 잤습니다. 카페인이 잠을 안 들게 하는 것 아니고 “커피를 마시면 잠이 않온다”하는 그 생각 때문에 잠이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 말은 생각이 내 육체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말입니다.
또 이 생각이 대인관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히틀러는 여자와 유대인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외로움에 견디지 못해서 유대인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는 것을 목격한 후 그때부터 마음에 상처를 받고 유대인과 여자를 경멸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장성한 후 권력을 잡게 되자 유대인 600만 명을 죽이는 동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생각이 곧 열쇠입니다. 교회에서, 생활에서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살고 반대만 일삼고 매사 불평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이 불행입니다. 사탄이 주는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따뜻하고 소망 적이고 희망을 주는 말과 생각과 판단을 주십니다.
평안을 주심
27절을 보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안은 “에이레네”라는 영적 평안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이 평안을 “샬롬”이라고 했습니다. 이 샬롬은 “평강의 왕이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평안을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평안은 하나님께 기원이 되는 죽음까지 초월되는 평안입니다. 이 영적 평안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곳에 나타납니다. 여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곳”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곳에는 평안대신 심판이 주어집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벨탑 사건입니다. 바벨탑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대명사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평안의 반대개념인 심판이 주어졌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심판하고 흩어놓고 파괴하고 죽이는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리고 모으고 조화를 이루시는 영이십니다. 그런데 창세기 11장 바벨탑을 보면 하나님이 그 탑을 아주 철저하게 흩어 놓으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악한 의도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탑을 하늘까지 쌓아 우리의 이름을 남기자” 거기에 인간의 교만과 하늘을 향한 도전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을 하나님이 아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는 바벨탑과 반대 개념인 은혜와 복이 주어집니다. 창세기 11장은 바벨탑 사건의 불행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면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성령이 강림하시는 축복의 모습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바벨탑 사건 때 흩어졌던 것이 다시 원상으로 회복되는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복은 봉합으로, 하나 됨으로, 일치를 이루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거기서 평안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하신 후에 나타난 결과는 하나 되는 일이었습니다. 흩어지고 갈라졌던 14개의 언어가 하나의 통일된 방언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또 마음이 하나 되어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모두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흩어졌던 것이 하나 되는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하나 되는 것이 하나님의 바라시는 뜻이고 바람이고 복이고 은혜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내가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했습니다. 이 평안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곳에 나타나고 주어지는 은혜이고 복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사역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살면서 하나 되고 일치를 이루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 뜻 이루게
31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도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하고 기도했습니다. 또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주님은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에 알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사명이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세상에 하나님을 전하는 일이고 이 세상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고 또 나누고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대해서 이런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제자들이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고 제일 먼저 한 일이 나누는 일이었습니다. 2장43절을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사람들의 체질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래서 의식을 활짝 열게 하시고 가치관을 획기적으로 변화하게 하시고 세상에 대해서 함께 하려는 열린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그래서 고난당하고 어려움 당하는 사람과 함께 하려하고 내가 가진 것 나누려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입니다. 그 삶을 성령이 하도록 유도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신앙인들이 이 세상을 무책임하게 살고 이기주의로 살아가는 것도 성령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교회 안에서만 열심내고 봉사하게 하는 그런 소극적인 영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책임 있게 살아가는 성숙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함께 하시는 곳 마다 나눔이 있고 실천이 있고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령이 내게 감동하실 때 곧 바로 순종하게 되면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얼마든지 실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끊어야 할 것들이 참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끊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때로 우리들이 소유 때문에 신앙의 깊은 바다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습관 때문에 들어가지 못 할 때도 있습니다. 고루한 생각 때문에 못 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불신의 마음 때문에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이상한 편견 때문에 들어가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들이 과감하게 끊어야 할 것들입니다. 그래야 내가 자유해지고 하나님 뜻에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성령이 그런 것을 과감하게 끊을 수 있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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