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든지 차든지
계 3:14-20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
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내
가 원하노라.
본문은 참 유명한 말씀으로 신앙인들이 지침으로 삼아야 할 메시지입니다. 주님은 계시록에서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일곱 개 교회에 메시지 보내셨습니다. 로마제국은 당시 행정구역상 그 지역을 “아시아 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소아시아는 아시아 도 안에서도 3분지 1정도 밖에 안 되는 작은 반도였습니다. 그래서 소아시아라는 말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 좁은 지역에 일곱 개의 교회가 집중해 있었습니다. 그 일곱 개 교회들은 모두 장단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일곱 개 교회에 각각 편지를 보내면서 칭찬도 하시고 책망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라오디게아 교회만은 칭찬이 없이 책망만 나옵니다. 그 책망의 내용이 신앙이 “미지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망하시기를 “네가 뜨겁든지 차든지 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니면 내 입에서 내쳐 버리겠다”고 경고도 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에베소 동쪽으로 160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맞은 편 서쪽으로는 10km지점에 히에라볼리라는 온천 도시가 있습니다. 그리고 남쪽으로 약 14km지점에 골로새가 위치해 있는 곳입니다. 라오디게아 지역은 교통 중심지였고 양을 많이 사육하기 때문에 모직을 수출하는 무역도시였고 브루기아 가루라는 안약재료가 나와 안약이 생산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안약을 사서 바르라는 말은 그곳이 좋은 안약 생산지였기에 하신 말씀입니다. 또 그곳에 그 옛날인데도 의과대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14km떨어진 골로새에서 찬물을 수로로 받아 마셨고 10km떨어진 히에라볼리에서 온천수를 수로로 끌어다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그 찬물이 14km의 수로를 통하여 오는 동안 미지근하여 지고 온천수가 10km를 오는 동안 미지근하여 졌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물이 미지근하여 마시다 토하여 버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 물과 같이 생활이 풍족하니까 신앙이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 믿음이 뜨겁든지 차든지 하라, 아니면 미지근한 물을 마시면 뱉어버리고 싶듯이 너를 내 입에서 내치리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 미지근한 것이 문제입니다. 물도 미지근하면 마실 수가 없습니다. 마셔도 해갈도 안 되고 뱉어버리고 싶어집니다. 성격도 미지근하면 신뢰감이 가지 않고 일하는 모습도 미지근하면 일을 믿고 맡길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아주 미지근한 분들이 있습니다. 몇 년을 교회에 안 나옵니다. 그래서 교적을 정리하려고 카드를 뽑아들고 보면 어떤 분의 것은 한참을 만지작거리게 되는 분이 있습니다. 빼야 되나 그냥 놔두어야 하나 아주 애매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 빼냅니다. 그런데 다음 주일 보니까 와 앉아있습니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만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라오디게아교회에 하신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제발 뜨겁든지 차든지 하라, 계속 미지근하여 차지도 뜨겁지도 아니하면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15)”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이 열정입니다. 원래 신앙은 열정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데 그냥 앉아만 있을 수 있습니까. “성령의 역사”를 “데몬스트레이션 스피릿”(demonstration spirit)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성령이 내 안에서 데모를 하신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그 마음에 뜨거운 성령의 임재를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이 열정을 잃게 되면 다 잃게 됩니다.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정이 없으면 사랑도 잃게 되고 직장에서 자리도 잃게 되고 친구도 잃게 되고 사업에서도 실패하게 됩니다. 더구나 신앙인은 열정을 잃으면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토하여 내 버리겠다”고 경고 하셨습니다. 신앙의 열정을 회복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본문을 보면 라오디게아교회에 몇 가지 지적사항이 나옵니다.
미지근한 신앙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15)” 라오디게아 교회는 아주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온천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이었습니다. 안약도 생산하고 모직도 수출하는 무역중심지였고 의과대학이 있던 부한 환경이었습니다. 좋은 환경은 주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더 좋은 열정적인 신앙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의 약점이 그것입니다. 환경이 좋아지고 넉넉해지면 더 신앙이 감사하며 좋아져야 하는데 오히려 안주의식에 빠져서 마침내 미지근한 신앙으로 변질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안주의식은 신앙의 나태로 빠지고 영적 잠을 자게 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래서 책망을 받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고난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난의 시기에 기독교 신앙이 불일 듯 뜨겁게 일어났습니다. 초기 기독교에 핍박이 가해오고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환란의 때에는 지하 동굴 속에서 살면서도 신앙의 지조를 지켜왔습니다. 그러다가 기독교가 로마에서 국교로 받아들여 마침내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이제는 마음껏 신앙생활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그런 자유가 주어지고 부해지면 그 믿음의 질이 더 좋아질 것 같은데 정반대입니다. 기독교에 자유가 주어지기 시작하던 그때부터 기독교가 형식화되기 시작하고 중세에 와서 기독교는 온갖 타락의 길을 걷게 되어 마침내 종교개혁이 일어납니다.
초창기 우리나라에서도 신앙이 얼마나 뜨거웠습니까. 3•1운동 때 한국의 기독교 인구는 전체가 30만 명 정도였습니다. 그 30만 명이 3•1운동을 주도해 나갔습니다. 오늘은 천민이라는데도 이렇게 미지근합니다. 집안에서도 핍박이 있으면 그 믿음은 더 굳세게 발전하였습니다. 그래서 니체는 “세상에서 기독교를 박멸하는 한 가지 방법은 평안하게 주는 방법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소리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빌리 그래함은 가마솥 이론을 말했습니다. 가마솥에 물을 넣고 개구리를 넣은 다음 불을 서서히 붙이면 개구리는 조금도 저항하지 않고 고스란히 삶아낼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어떤 부인은 온갖 핍박을 견디며 신앙생활 유지하였습니다. 온 가족들이 신비하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남편을 전도해서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고 남편이 집사가 되었는데 그때부터 그 부인은 나태해지기 시작하여 급기야 남편은 열심히 교회에 나가는데 부인은 쉬고 있습니다. 아이러니 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도 처음 수난을 받을 때에는 그렇게 느슨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평안해지게 되니까 차지도 덥지도 않은 신앙으로 변하여 책망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점이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주는 말씀입니다.
좋은 환경 활용 못함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15).” 그 말은 “할 일은 하라”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아주 좋은 환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믿음을 발전시키고 삶을 향상시킬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좋은 환경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고 축복이고 선물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활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신 은혜의 보답이고 주신 은혜를 오래 지속시키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곧 편안함과 안주에 빠져 믿음이 미지근하여 졌습니다. 주어진 환경을 개선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 중에서 가장 좋은 은혜는 “지금, 오늘, 이 시간”입니다. 현재를 영어로 “present”라고 합니다. 선물이라는 영어 단어와 동일합니다. 이 두 단어는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 중에서 가장 좋은 선물은 “현재”라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선물”이라는 영어의 present 와 “현재”라는 영어의 present 가 어원이 같습니다. 현재에 성공한 사람이 미래에도 성공합니다. 현재 성공한 사람은 인생도 성공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탄은 어떻게 해서든지 현재의 우리의 마음에서 기쁨과 행복함을 뺏으려고 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감이 없다면 모두 사탄으로부터 공격받고 있는 중입니다. 신앙의 삶은 미래도 중요하지만 현재는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강조하십니다.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기뻐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힘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아주 좋은 환경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너무 쉽게 안주에 빠지고 맥 빠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직무유기입니다. 그래서 책망받은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다 은사가 주어져 있습니다. 사역의 은사와 직무의 은사와 나눔의 은사가 있습니다. 은사는 활용해야 더 발전하고 빛이 납니다. 그래야 주신 목적을 이룰 수 있고 활용에서 주어지는 행복이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것을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신앙도 챙기고 못하고 영적인 잠을 자고 할 일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면서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오늘 내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닌지 보아야 합니다.
자화상 망각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의 자화상의 진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17)”고 평안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현대인들을 향하여 주시는 아주 뼈아픈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영적으로 가난하고 벌거벗고 눈이 멀었는데도 자신들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17). 우리는 자신의 자화상을 찾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자화상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신앙의 영적 수준을 엄격히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나를 살펴볼 때 내 잣대로 보면 안 됩니다. 내 잣대는 너무 너그럽습니다. 그래서 공주병이 생기고 왕자병이 생기고 자기 과신과 교만이 만들어집니다. 나의 지금 영적 수준과 영적 온도가 얼마인지 정확히 보려면 내 시각이 아니고 십자가의 렌즈를 통해서 나를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렌즈로 나를 보면 내가 보지 못하던 곳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볼 때 나는 아무 죄도 없는 것 같은데 주님의 렌즈로 나를 보니까 나는 흉측한 죄인이고 십자가에서 죽으면서까지 죄 값을 치루어야 할 죄인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십자가 렌즈롤 통해서 나를 보아야 정확합니다.
사람은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엄청나게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검은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세상이 온통 검게 보입니다. 파란 안경을 쓰고 보면 온통 파랗게, 불신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믿을 것이 하나도 없게 보입니다. 편견의 안경을 쓰고 바라보면 이 세상의 것은 모두 편견에 가득 차 있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렌즈를 통해서 나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를 볼 때 대견하게 보였고 부자같이 보였고 자신들이 풍부한 것으로 보였고 자신들이 아주 건강한 신앙인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님의 렌즈로 보실 때는 라오디게아교회는 “아주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얼마나 한심하게 보일 것입니까.
오늘은 외모와 겉모습만 보는 시대입니다. 내면이나 속마음이나 속생각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속는 것입니다. 겉과 속은 다릅니다. 겉모습은 다 꾸며져 있습니다. 이력서를 보면 완벽하게 포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속을 보면 실망하게 됩니다. 어느 여성단체에서 미스터 모범남성을 선정하기로 해서 접수를 했더니 수 만 통이 접수되었습니다. 그중 이력서를 보고 가장 좋은 모범자를 선정했습니다. 자기소개서를 보니까 술도 담배도 여성문제도 여성을 구타하는 일도 없고 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고 주일날은 틀림없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나는 지금 이런 생활을 7년째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모범적이니까. 너무 괜찮아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여기는 안양교도소입니다”라고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자신의 모습을 모릅니다. 부자인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족함이 없다고 자만해 있습니다. 그때 주님이 경고하셨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17).”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 네가 만일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면 내 입에서 토하여 버리라(15-16).” 그리고 주님은 한 가지 처방을 내 놓았습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18).” 이 말씀은 오늘 이 시대에 주시는 아주 강렬한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오늘 현대인들을 향하여 주시는 따끔한 메시지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너무 풍부해서 갈급함이 없이 살아갑니다. 간절함도 없이 너무 느슨하고 형식적으로 신앙을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는 동안 내 신앙과 내 영적인 생명이 고갈되어 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내가 지금 고갈상태인 줄도 모르고 여전히 나는 부자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 자신의 자화상을 바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속 모습을 보려면 눈이 밝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안약을 사서 바르라고 했습니다. 여기 안약은 그 지역에서 안약재료가 생산되니까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나의 지금 영적 온도가 얼마인지 영적 수준은 얼마인지 내 영적 형편은 어떤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급선무입니다.
열정 회복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19).” 우리 신앙인들, 사역자들, 제자의 삶에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신앙인은 현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현재에 열정을 가지고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열정”을 영어로 “enthusiasm” 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라틴어의 “하나님”이라는 뜻의 “theos” 와 “안에” 라는 “en”이라는 두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열정이 발생 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나는 비로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목적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열정이라고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도박자들이 며칠씩 밤샘을 하는 열정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인쓔지애즘” 즉 “하나님 안에서 얻어진 열정”이어야 합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송두리째 깨서 예수의 머리위에 부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이다”라는 말 한마디에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이사야가 주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할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즉시 응답하였습니다. 제자들이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다 버려두고 따라나섰습니다. 이것이 열정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열정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영적 온도가 상승합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께서 이 열정을 불태울 심지를 주셨습니다. 성령의 불을 댕기기만 하면 내 안에서 열정의 불이 활활 타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내 안에서 성령이 주시는 열정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 부활 후에 그 열정의 불을 가지고 돌아다니며 전도자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우리는 오늘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면서 혹시 그것이 나의 형편이 아닌가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지금 영적 온도는 얼마나 됩니까.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책망이 곧 나를 향하신 책망이 아닌가를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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