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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 명설교편◑/이정익목사 명설교(385편)

룻의 고백속의 신학 (3)

by 【고동엽】 2022. 2. 27.

룻의 고백속의 신학 (3)

 

 

 

 

           1:15-18,22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뭍 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나오미 가족이 하나님의 품인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모압은 이방인들이 이방신을 섬기며 사는 곳입니다. 그곳은 소돔이고 고모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모압에 가서 살면 곧 그 문화에 동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오미 가정은 생각 없이 모압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침내 다 잃었습니다. 남편도 두 아들도 잃었습니다. 그때 나오미는 정신이 뻔쩍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차분히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다시 돌아가자.” “여기에 온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결론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하였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하나님께로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원위치했다는 말입니다. 잘못된 길을 가다가 바로잡아 다시 돌아가면 다 회복되게 됩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가자 다 회복되었습니다. 잃었던 평화도, 배고픔도, 갈등도, 외로움도 다 회복되었습니다. 더구나 잃었던 아들의 지위도, 신분도 다 회복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장애물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결단하자 장애물이 발생하였습니다. 지난 시간에 그것이 자존심이고 창피함이고 체면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 보다 훨씬 더 큰 장애물이 발생하였습니다. 그것이 두 며느리의 문제입니다. 그 두 며느리는 모압 땅에 와서 얻은 며느리들입니다. 물론 두 아들만 살아있으면 데리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면 되겠지만 두 아들은 이미 다 죽었습니다. 아들도 없고 아이도 없는 두 며느리를 고향으로 데리고 돌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 두 며느리를 데리고 가면 또 베들레헴이 타향살이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네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가서 개가해서 잘 살라고 설득하였습니다. 두 며느리가 유다 땅으로 함께 가면 그들도 멸시를 받고 천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아주 불확실한 미래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차라리 모압 땅에서 재혼하여 새 삶을 시작하면 늙은 시어머니와 사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며느리는 나오미에게도 큰 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각각 집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하였습니다.

 

 

현실적 길 택함

 

 

 

 

그랬더니 큰 며느리 오르바는 친정집으로 돌아갔습니다(114). 이 며느리는 아주 현실적인 길인 가장 쉬운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남편은 이미 죽었습니다. 시동생이라도 있어야 아이를 낳으면 양자라도 받아 대를 이을 것인데 그런 소망도 없습니다. 시어머니를 보아도 소망이 없습니다. 시어머니는 다 늙었습니다. 재산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시어머니는 여기가 타향살입니다. 그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 보아도 거기서도 소망이 없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살 수 없어 여기 모압까지 온 시어머니를 또 따라가서 어쩌겠습니까. 계산해 보면 계산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큰 며느리는 친정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주 현실적인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오늘 같은 세상이면 고민할 것도 없습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라 하기도 전에 친정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는 그런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다 늙은 소망도 없는 시어머니를 두고 떠나는 것이 도리가 아니었습니다. 그 도리 때문에 큰 며느리도 상당히 망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큰 며느리는 지극히 현실적인 길을 선택하여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어려운 길 선택한 룻

 

 

 

 

 그런데 작은 며느리 룻이 문제입니다.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겠다고 우겼습니다. 고집합니다. 포기를 안 합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제발 고향 네 집으로 돌아가라고 강권합니다. 8절을 보면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랬더니 큰 며느리는 돌아갔습니다. 14절을 보면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고 하였습니다. 큰 며느리는 집으로 돌아갔는데 작은 며느리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라 붙었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15절을 보면 나오미가 룻에게 “너도 동서처럼 돌아가라”고 또 강권했습니다. 그랬더니 16절을 보면 룻이 시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나를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세요, 나는 어머니 가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가 머무는 곳에 나도 머물겠어요, 어머니 백성이 나의 백성이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묻힐 것입니다, 죽는 일 외에 누구도 어머니와 나를 갈라놓지 못합니다.”고 했습니다. 이 룻은 지혜로운 여인입니까? 미련한 여인입니까? 나오미는 룻의 결심이 굳은 것을 알고 더 이상 돌아가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나오미는 룻을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갑니다. 여기서 룻을 생각하게 됩니다. 룻은 큰 며느리와 대조적으로 어려운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모두 편한 길을 택하는 것이 상식인데 스스로 어려운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거기에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려면 룻의 고백을 분석해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룻의 고백 속에 몇 가지 생각할 것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인륜과 천륜의식”입니다. 룻의 고백을 보면 그 고백 속에 인륜이 들어 있습니다. 인륜은 늙은 시어머니를 버릴 수 없다는 의식입니다. 룻이 말하기를 “우리의 인연은 하늘이 지어준 인연이기 때문에 죽어서도 버릴 수 없다(17)”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가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가 있는 곳에 나도 있고 어머니가 머무는 곳에 나도 머물겠다(16).”고 강조합니다. 이것이 인륜의식입니다. 얼마나 진한 고백입니까. 오늘은 자기를 낳아준 부모가 늙고 힘없다고 버리는 자식들이 있는데 여기 룻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또 룻의 고백을 보면 그 고백 속에 “천륜의식”도 들어 있습니다. 룻이 말하기를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고 어머니가 죽는 곳에서 나도 죽겠다(16).”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룻기서가 주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이 고백이 룻기서의 생명이고 중심이고 룻기서가 우리 독자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룻은 그 시대에 인륜과 천륜을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분명 여기에 하늘의 뜻이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룻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지켜보기로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의 행불행을 결정짓는 갈림길에서 주저하지 않고 고난의 길을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즉 룻은 오늘의 이 상황을 하늘이 주신 상황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고난의 길을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이 부분이 룻기서가 주는 신학입니다. 중심 메시지입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를 남편에게서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또 물질이나 희망에서 찾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룻은 여기서 희미하기는 하지만 시어머니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이유를 가족관계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즉 인륜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16-17절을 보면 “어머니가 가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라고 말합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가족관계를 청산하고 떠나가라고 강권했습니다. 그런데 룻은 그 강권을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어머니와 운명을 함께 하겠다고 우겼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가는 곳에 나도 가고 머무는 곳에 나도 머물겠다.”고 말합니다. 룻은 여기서 인륜과 천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가족관계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가족관계가 너무 쉽게 파괴되고 포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가족관계는 하나님이 주시는 관계입니다. 기타 모든 관계는 내가 선택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친구도, 이웃도, 직장도 주로 내가 선택하였습니다. 그런데 가족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태어나 보니까 이미 부모는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형제도 친척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도 하나님이 짝지어주시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이 가족은 운명적인 관계이고 하늘이 맺어준 관계입니다. 쉽게 포기하면 안 되는 관계입니다. 이 관계를 오래 지속하고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하나의 연결고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순종하는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와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단호하게 강조합니다. 말하자면 그 운명 즉 인륜과 천륜의식이 연결고리입니다. 그러니까 룻이 시어머니와 헤어지지 못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또 결혼하면 빨리 아이를 낳아야 합니다. 때로 그 아이가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그 아이가 부부사이의 버팀목이 되어줍니다. 때로 부부가 헤어지고 싶은 생각이 있어도 아이들이 버팀목이 되고 연결고리가 되기 때문에 부족한 부분을 감수하고 함께 살아가므로 가정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사랑도 연결고리 역할을 해 줍니다. 고부간에 극심한 갈등이 있어도 부부가 서로 사랑하면 못 헤어집니다. 그때 사랑이 없어 보십시오. 아주 쉽게 헤어질 수 있습니다. 신앙도 연결고리가 됩니다. 살다 보면 많은 생활고, 악조건들, 시험들이 많이 발생합니다. 그때가 위기입니다. 그때 신앙에서 대부분 떨어져 나갑니다. 그런데 그때 신앙이 있으면 그것들을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이 연결고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때 만일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런 운명공동체적인 인륜과 천륜의식이 없었다면 큰 며느리처럼 돌아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연결고리가 중요합니다.

 

 

 룻은 비전 없는 삶을 기꺼이 선택합니다. 남다른 모습입니다. 룻이 시어머니를 포기하지 않고 따라가는 삶은 아주 비전 없는 비현실적인 삶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룻의 험난한 인생이 시작됩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그때부터 룻은 시어머니와 운명을 같이 합니다. 룻은 베들레헴에 돌아오자마자 시어머니를 공경하기 위해서 눈물겨운 삶을 시작됩니다. 매일같이 남의 추수하는 밭에 나가 보리이삭 줍기를 시작합니다. 시어머니를 위해 불확실한 삶을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룻은 당장의 이익을 위하거나 삶의 편리를 위해서 현실의 이익을 좆지 않습니다. 여기 보면 룻의 선택은 아주 무모하기까지 합니다. 오늘 현대인들의 시각으로 보면 룻의 선택은 아주 미련한 선택입니다. 비현실적 선택입니다. 어느 모로 보아도 비전도 없고 희망이라고는 싹도 보이지 않는 시어머니를 선택한 것은 대단한 모험입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면 땅이라도 있거나 빌딩이라도 있으면 다행일 텐데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시어머니는 어디를 보아도 가능성이 전무한 여인입니다. 다 늙었습니다. 가난뱅입니다. 무일푼입니다. 무엇 하나 의지할 부분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룻은 그 시어머니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봉양하기 위해서 매일같이 보리밭으로 돌아다니며 이삭을 주었습니다. 집으로와 보리이삭을 떨어서 시어머니를 봉양하였습니다. 언제까지인가 하면 기약이 없습니다. 룻은 눈에 보이는 비전이라고는 전무한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그것은 인륜의식과 천륜의식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개종”입니다. 룻은 모압여인입니다. 룻은 모압인들이 섬기는 그모스와 몰렉을 섬기던 이방여인입니다. 그런데 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오자 과감하게 그모스신과 몰렉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합니다. 즉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시어머니의 역사를 자신의 역사로, 시어머니의 가계를 자신의 가계로 받아들입니다. 그 선택은 룻의 인생과 색깔을 송두리 채 바꾸어 놓았습니다. 룻은 한때는 그모스 신을 섬겼습니다. 몰렉에게 인신제사를 드릴 때 그곳에 가서 머리를 조아리며 두려운 마음으로 그 앞에서 절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감하게 그모스를 버리고 몰렉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 선택은 룻의 운명과 생각과 문화를 송두리 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것은 분명 하늘이 준 복이었고 하늘이 준 지혜로운 선택이었습니다. 룻은 오늘 현대인들에게 많은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해피앤딩”입니다. 모든 영화나 연속극은 마지막에 해피앤딩으로 끝납니다. 모든 영화는 끝에 주인공이 불행하게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모든 이야기나 영화나 연속극이나 보면 주인공이 도중에 죽는 법도 없습니다. 서부영화를 보면 도중에 주인공 보안관이 한창 악당들과 싸우다가 악당들의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악당들은 웃음을 짓습니다. 있을 수 없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고 주인공아 먼지를 털면서 일어납니다. 총알이 보안관 배지를 맞고 튕겨나간 것입니다. 관객들은 의례히 그럴 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영화의 도식이기 때문입니다.

 

 룻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고집부리는 며느리 룻을 데리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아무 것도 의지할 것 없는 시모를 따라 베들레헴에 온 룻은 온갖 방법을 다하여 노모를 공양합니다. 무모한 선택을 한 룻은 한동안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연출자 하나님은 어느 날 룻을 화려하게 만들고 그의 인생을 해피앤딩으로 끝을 맺게 하십니다. 그리고 결국 나오미의 망가진 가정을 다시 일구어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아주 화려하게 해피앤딩으로 끝납니다. 룻은 결국 이전의 남편보다 훨씬 더 좋은 남편 보아스를 만나게 됩니다. 그 사이에서 오벳이라는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 아이를 안고 늙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렇게 좋아하고 행복해 하고 예전의 기쁨과 행복과 웃음을 되찾고 매우 만족해 합니다. 잃었던 가문이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아들 오벳이 후에 이새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 이새는 다윗을 낳습니다. 그러니까 룻은 후에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됩니다. 그리고 룻의 후손 중에서 마침내 예수가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룻은 후에 마침내 메시야의 조상이 되는 복을 받게 됩니다.

 

 

 일본의 쓰꾸바대학 무라카미 카오즈 교수가 “바보는 신의 선물”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책에서 그릇이 큰 바보가 되라고 말합니다. 큰 바보는 “어리숙해 보일만큼 정직하고 낙천적인 사람”을 말하고 큰 바보는 “언제나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눈앞에 장애물이 나타나도 짜증내거나 꾀부리지 않고 매사에 초조하지 않고 외부의 압력이나 조건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정답이나 선다형 문제를 잘 푸는 사람은 똑똑한 사람이나 수재들이 능력을 발휘하지만 큰 바보는 머리회전이 늦은 만큼 폭 넓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현재 주어진 장애물을 피하기보다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결국 멀리 가고 비즈니스계에나 학문의 세계에서도 두각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아이디어로 세상을 끊임없이 변화시켜온 스티브 잡스는 한때 낙오자 취급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결국 그는 스탠포드대를 졸업하고 후에 성공한 사람으로 모교 졸업식에서 축사할 때 “가난한 정신으로 살라, 어리석은 채로 있으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룻은 분명 큰 바보였습니다. 쉬운 길을 버리고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바보였습니다. 그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그 길을 주저하지 않고 인륜과 천륜을 중시하고 스스로 좁은 길을 따랐습니다. 그모스를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룻의 인생의 여정은 회복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룻은 비전 없는 길을 선택하였지만 그 길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룻이 그 길을 선택한 순간부터 복된 길로 연결되었습니다. 그 길은 룻이 계산해서 간 길이 아니고 성령에 이끌려 순종하여 걸어간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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