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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필요한 한 사람 (왕상 17:1)

by 【고동엽】 2022. 2. 24.

이 시대의 필요한 한 사람 (왕상 17:1)


어떤 교회에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하여 열심히 사역을 하시다가 그만 신장 기능이 약화되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하여 진찰을 받은 결과 건강한 사람의 신장을 이식해야 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누가 신장을 기증하느냐?”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 그 교단에 유명한 목사님이 오셔서 임시로 강단을 맡아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담임 목사님의 전후 사정을 설명한 후 아무래도 이 교회 성도들 가운데서 신장기증자가 나와야 될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리고는 신장 기증 조건을 이야기 한 후에 “고통 받는 주의 종을 위해 신장을 기증 뜻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잠시 후 여기저기서 손을 들기 시작하더니 거기 모인 수 백 명의 성도들이 거의 다 손을 드는 것이었습니다. 고통 받는 주의 종을 위해 자신의 신장을 떼어주겠다고 거의 다 손을 들었으니 얼마나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 모습을 본 설교를 맡은 목사님은 너무나 감격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평생에 오늘처럼 감격스런 날이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놀라울 뿐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한사람을 지적하는 것은 덕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저는 오늘 이런 방법으로 신장 기증자를 결정하겠습니다.”하며 주머니에서 오리털 하나를 꺼내 입으로 훅 불었습니다. “이 오리털이 머리위에 내려 않은 사람을 선정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기다리기 위해 조용히 기도하며 기다립시다.” 드리어 오리털이 강단을 떠나 회중석으로 날아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오리털이 저 앞에 앉아 있던 김 집사 머리 위에 내려앉으려고 하니까 그것을 본 김 집사가 “주여! 할렐루야 아멘”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입 바람에 의해 오리털이 옆에 있는 이 집사에게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 이 집사도 자기 머리 위로 내려오는 오리털을 향하여 “주여! 할렐루야, 아멘” 하며 소리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리털이 자신에게 날아오면 “주여! 할렐루야 아멘” 소리가 입 바람과 함께 나와 다시 위로 오르곤 하여 그날 오리털은 어느 누구에게도 내려앉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웃자고 만들어내 이야기이지만 입술로는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헌신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 아닌가요? 오늘 헌신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은 어떤가요? 오늘 이 헌신 예배가 예배로만 끝나지 말기를 바랍니다. 예배마치고 나가는 순간 언제 헌신예배를 드렸느냐? 는 듯이 사라지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단 하루라도 주님이 주신 은혜와 감동을 가지고 주님께 충성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고 일생을 하나님을 위해 살아간 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엘리야입니다. 여러분 엘리야 선지자가 살았던 시대가 어떤 때였습니까? 엘리야 선지자가 살았던 시대는 우상숭배가 극심하여 북왕국 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물론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들을 보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을 섬겼던 좋은 왕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중에 아합 왕이 7대 왕이었는데 왕상16:30절을 보면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라는 말씀이 증거 하듯이 영적으로 가장 암울하고 흑암의 시대였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하나님으로 섬기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 무너져 버렸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인 영적인 것이 다 무너져 버리니까 따라서 도덕도 무너지고 윤리도 다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반복되는 이런 악행을 보고 살았던 사람들은 영적으로도 무디어질 대로 무뎌진 상태였습니다. 마치 백화점에가 보면 움직이는 계단인 에스콸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듯이 모든 사람들이 타락의 에스콸레이터를 타고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마치 외롭게 타오르는 하나의 횃불처럼 어둠을 밝히는 불꽃으로 타오르는 인물이 엘리야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 어둠을 밝히는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등장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절-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길르앗에 디셉사람 엘리야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언하기를 “수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실제로 비가 내리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보면 엘리야를 소개하는데 단 한구절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이 말씀이 비록 짧은 한 구절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귀중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메시지입니까? 하나님이 찾으셔서 쓰시는 일꾼이 어떤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엘리야를 소개하는 이 짧은 구절 단 한절이지만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서 어떻게 쓰실 일군을 찾으시는 지를 함께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경과구: 그러면 오늘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일군을 찾으시는데 어떻게 일군을 찾으시나요?)


1.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지 못한 사람을 하나님의 일군으로 부르신다.
우리가 위대한 일을 한 사람들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 사람에 대해 소개할 때 좋은 것은 다 갖다 붙여서 소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잉태할 때 태몽을 아주 웅장한 꿈을 꿨다든지 어릴 때, 남들보다 특출했다든지 하는 등의 좋은 말을 다 동원해서 기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보면 대부분의 경우 아주 중요한 인물이 등장할 때도 상당부분 “그 사람이 어떻게 태어났으며, 어떻게 자랐는가?”를 드라마처럼 소개합니다. 예를 들면 사무엘의 경우 어머니인 한나가 자녀가 없어 무시당했던 일로 시작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으로 사무엘이 태어난 것과 성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이야기들을 아주 상세하게 기록합니다. 어디 사무엘뿐이겠습니까? 침례요한, 요셉, 다윗, 다니엘, 사도 바울, 등도 등장하는 과정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엘리야는 아무런 소개가 없습니다. 출생이라든지, 아니면 가정환경이라든지 아니면 성장과정에 대해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그저 단한마디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 길르앗이라고 하는 시골마을에 불과한 지역에다 그 지역에서도 완전 시골인 디셉 출신이라는 것이 전부입니다. 엘리야에 대한 어떤 추측도 할 만한 기록이 없어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느낌입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야는 모세처럼 왕궁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도 아닙니다. 바울처럼 학문적인 수련도 없었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시골 촌부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시에 화려한 배경을 자랑하는 사람,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을 쓰신 것이 아니라 어디서 어떻게 낳는지도, 어떻게 자랐는지, 무엇을 배웠는지도 모르는 시골 촌부에 불과한 사람을 예비하셨고 때가 되니까 쓰셨다는 사실입니다. 당시에 세상적인 학문으로 볼 때 엘리야보다 더 많이 배우고 똑똑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아합 왕만 해도 하나님의 관점이 아닌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부국강병을 이룬 아주 뛰어난 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화려한 배경을 가진 사람이 아닌 실골 촌부에 지나지 않는 엘리야를 예비하셨고 때가 되니까 쓰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 못하는 인물을 우리가 생각지 못한 때에 부르시고 또 예비하시고 세우셔서 쓰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의 상식과 너무나 다릅니다. 우리는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배경도 보고 얼굴 생김새도 보고, “부자인가 가난한 사람인가?”도 보고 공부는 어디까지 했나? 하는 것으로 평가하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평가하고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을 향하고 있는가?” 라는 기준으로 평가하시고 판단하셔서 중심이 하나님께로 향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일군으로 부르시고 쓰시는 것입니다. 예)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한낱 어린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왕이었던 사울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국가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때, 사울을 폐위시켜 버리고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여 이스라엘을 통일할 수 있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한 인물을 찾으셨습니다.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의 집에 가서 이새의 아들들을 한사람씩 심사를 합니다. 한사람씩 심사를 할 때마다 하나님의 대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들이 다냐고 물었더니 막내아들 다윗은 양을 친다는 것입니다. 이새는 다른 아들들 중에 왕의 재목은 있어도 다윗을 절대로 왕의 재목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베들레헴 촌구석에서 양들과 함께 뒹굴면서 철모르고 뛰어 노는 것처럼 보이던 그 아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아들,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위대한 일군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아니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기대하는 마음 소망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가정에서 하나님이 준비하고 계신 인물이 자라고 있을지 모릅니다. 철모르고 뛰어다니는 아이들 가운데 그런 일꾼이 자라고 있을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지도하고 있는 학생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려고 준비하고 계실지 누가 알겠습니까? 교사되신 여러분이 볼 때 “저 아이는 변화되기 어려운 것 같아!” 라는 생각이 드는 학생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변화시켜 쓰실 수 있는 귀한 영혼임을 기억하십시오. 저에게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신앙적으로 참 감사하게 생각하는 두 목사님이 계십니다. 한 분은 고2때 제가 다니던 공도 침례교회 담임목사님이셨던 박채용 목사님이시고 또 한 분은 고 이리표 선교사님이십니다. 박채용 목사님은 제가 고2때 저에게 주일 학교 설교를 맡기셨던 분입니다. 그때가지 저는 보조 교사였어요. 제가 중3때 주일학교 부장선생님이 동화를 맡겨 주셔서 하는데 얼마나 못했던지 6학년 여자아이가 “야! 아예 책을 읽어라 읽어!” 그러는 것예요. 얼마나 창피했던지 그날부터 주일학교 보조 교사를 그만뒀습니다. 그런데 고2때 새로 오신 박 목사님이 저를 교사로 세워주시고 설교까지 시켜주셨습니다. 그래서 했는데 잘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잘해야 얼마나 잘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때 자신감을 가졌고 그때부터 주일학교 설교를 계속해서 나중에는 목사가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되어 지금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목사님이 그 당시 제가 목사가 되라고 설교를 맡겼겠습니까? 아닙니다. 그 목사님께서는 일군을 키워야 하니까 저에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들이 저를 하나님의 사역자로 세우시는데 필요한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훗날 몇 년 전에 기도원에서 우연히 그 목사님을 뵈었습니다. 그때 저를 보시던 그 목사님이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시고 기뻐하셨는지 모릅니다. 그 목사님도 제가 목사가 될 줄은 전혀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키운 조그만 남학생이 훗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자신의 사역이 헛되지 않았구나 하고 기뻐하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일군을 불러서 세우시는 것은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사람들을 세울 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이가 얼마 만큼이냐? 가 문제가 아닙니다. 또 “얼마나 많이 배웠느냐?”도 문제가 아닙니다. “돈이 많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인물을 준비하시고 세우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교사를 하는 내 자신이 다른 사람에 비해 부족하고 초라하다고 해서 기죽지 마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사람이 아니다.” 라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비록 지금 나의 상태가 부족하고 능력이 없어 보인다 해도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지도하고 있는 학생들 가운데서도 미래에 하나님이 쓰시는 일군이 자라고 있음을 믿고 교사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경과구: 하나님은 우리가 전혀 생각지 못한 사람을 일군으로 쓴다. 또 어떤 사람을 쓰시나요?)


2.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신뢰하는 확고한 믿음의 소유자를 일군으로 부르십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흔들림이 없는 확고한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비록 짧은 고백이지만 이 고백은 아주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아합 왕과 이세벨을 비롯한 온 나라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바알 우상을 섬기며 여호와 하나님을 마치 죽은 신으로 여기며 조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18:13절에 의하면 아합 왕의 왕비 이세벨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찾아내어 한 사람 한 사람씩 모조리 죽이던 바로 그런 때였습니다. 그런 때에 엘리야가 나타나서 아합과 이세벨 앞에서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신앙고백에는 아주 중요한 세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둘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십니다. 그냥 사람들의 지식과 생각 속에만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실제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나는 오직 이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엘리야의 신앙고백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귀중한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일군을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일군을 필요로 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일군을 찾으시며 부르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부르시나요?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그 하나님을 내 신앙의 주인으로 그리고 내 삶의 주인으로 온전히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죄와 타협하여 죄를 지으며 사는 사람, 세상 풍속을 좇아가는 사람, 한쪽 발은 교회에 있지만 마음과 중심은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고 세상과 아주 친한 사람, 이런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일군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나의 주인으로 섬기는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 전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나의 사람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시며 그런 사람을 쓰십니다. 예)저는 얼마 전 어떤 목사님이 쓴 간증을 읽어보았습니다. 그 목사님이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려고 집을 나섰는데, 택시가 나타나질 않는 것입니다. 새벽기도회 시간은 바짝바짝 다가오고, 택시는 안 오고... 그래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하나님 제발 택시 좀 보내주세요.”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에 응답이 와서 가까스로 택시를 잡아탔는데 20분밖에 여유가 없었답니다. 집이 서울 역촌동이었는데 교회가 있는 지역까지 20분 동안에 간다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신호등만 없어도 새벽길이니까 어떻게 될 수 있으련만, 집에서 교회까지 아마 신호등이 30개 정도 있는 거예요. 더구나 신호등은 자동으로 꺼지고 켜지기 때문에, 아무도 건너는 사람이 없지만 푸른 등이 켜질 때까지는 마냥 기다려야 하잖아요. 새벽기도 인도할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신호등은 자꾸 걸리니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엉겁결에 택시 운전사한테 “기사님 비록 빨간 불이 켜져 있지만 건너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냥 갑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택시 운전기사가 이러는 겁니다. "손님, 사람은 보지 않지만 하나님은 보고 계시는데요...." 그때 그 목사님의 마음은 커다란 몽둥이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답니다. 마치 예리한 비수로 심장이 찔리는 것 같았습니다. 새벽기도회를 인도한답시고 교회에 가는 목사가 개인택시 운전사한테 엄청난 설교를 들은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은 속일 수가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은 결코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분명히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변사람들이 여러분 곁에서 어떻게 살든 거기에 신경 쓰지 마세요. 그 사람들 삶을 좇아가려고 하지 마세요.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자 힘쓰십시오. 온전히 하나님 편에 서는 사람이 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어떤 취미생활이나 아니면 친목회나 계모임 정도가 아닙니다. 내 전 생애를 하나님께 바치기를 원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가 예수 믿는 목적이요,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조금 복주시면 얼굴이 환해졌다가도 조금 어려우면 원망하는 감정의 파도타기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한쪽은 하나님, 한쪽은 세상에 발을 담그는 왔다 갔다 하는 신앙이 아닌 엘리야처럼 오직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시며 그래서 다른 사람이 뭐라 해도 나는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확고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셔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하나님이 쓰시는 일군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께서는 온전히 헌신되어진 사람을 쓰십니다.
확고한 신앙으로 무장되어진 엘리야는 이제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합 왕 앞에 섰습니다. 그는 당당하게 왕 앞에 서서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라고 선포했습니다. 자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나라처럼 비가 잘 내리는 지역에서도 3개월만 비가 안 오면 흉년든다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팔레스타인과 같은 황막한 지역에서 3년간 비가 내리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엘리야의 이 선포는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선전 포고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겼던 바알 신은 비를 몰아다 주는 신으로서 바알이 풍년을 가져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엘리야는 바알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비와 이슬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선포합니다. 이것은 한마다로 말해 저들이 섬기고 있던 바알 신의 권위를 완전히 실추시키고 바알 숭배의 우두머리인 아합과 이세벨의 머리를 쇠망치로 내리치는 것과 같은 선전 포고입니다. 엘리야가 절대 권력을 가진 아합과 이세벨과 온 백성들을 향해 이런 선포를 할 때 주변에는 함께 도와줄 동역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외로이 혼자서 왕을 비롯한 전 국민을 상대로 선전 포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외로이 혼자서 이런 어려운 일을 합니까? 엘리야가 하나님 편에 서있고 하나님께 헌신되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편에 섰고 헌신되어졌기 때문에 수백만의 군사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선포하고 싸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는 헌신되지 않은 수백 만 명의 사람보다 헌신되어진 단 한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래서 그 헌신되어진 단 한사람을 통해서 큰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삿7장에 보면 기도온이 미디안과 싸울 때, 애국심에 불타는 청년3만2천명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 사람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중에 300명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래서 그 300명에다가 무기는 없이 항아리와 횃불하나가지고 미디안 군대를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온전히 헌신되어진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고 쓰임받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그래서 감리교를 세운 요한 웨슬레는 87세가 되었을 때 알렉산더 메즈어라고 하는 분에게 편지를 썼는데 이런 말이 적혀있었답니다. “죄 말고는 두려워 할 것 없는 하나님 말고는 전혀 원하는 것이 없는 전도자 100명만 주십시오. 그 사람이 성직자든 평신도든 관계없습니다. 그런 사람이라야 지옥문을 부술 수 있고 지상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께 완전히 드려진 사람 백 명만 있다면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빌리 그레이엄 목사도 이런 말을 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 700명만 주십시오. 700명만 있다면 미국을 구원할 수 있다.” 스펄전 목사님도 “주님을 향해서 뜨거운 가슴을 가진 사람 12명만 있다면 삭막하고 고독한 도시인 런던을 기쁨이 충만한 도시로 바꿀 수 있다.” 고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 정말로 하나님께 드려진 헌신된 사람 이런 사람에 의해서 가정도 살고 교회도 살고 이 나라도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헌신된 엘리야를 쓰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헌신되어진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한 사람의 헌신이 나라를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을 찾고 계신다면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요? 우리도 엘리야처럼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확고한 신앙으로 무장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 믿음으로 “주여, 내가 여기 있으니 나를 써주소서!” 하고 헌신하는 성도, 교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엘리야처럼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드려진 나의 헌신이 나의 가장을 살리고 나의 교회를 살리고 이 나라를 살리는 귀중한 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는 수준에 머물지 말고 믿음대로 하나님께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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