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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커뮤니케이션의 본질과 열린 교회

by 【고동엽】 2022. 2. 23.

기독교 커뮤니케이션의 본질과 열린 교회

 

<기윤실 목회자포럼/2010.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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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송(청어람아카데미 대표기획자)

 

1.

 

한국사회의 현재상황을 분석하는 여러 가지 키워드들이 있겠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은 아마 ?소통(疏通)?이 아닐까 싶다. 최고 권력자로부터 유치원 아이들까지 한국사회는 소통의 부재를 호소한다. 진심이 전달되지 않고 오해를 받는다거나, 선의를 구조적으로 왜곡하는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고 질타한다. 언론도 신뢰를 얻지 못하고, 종교인 특히 개신교인의 말은 그 값을 잘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 글은 기독교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을 살펴보고, 한국 개신교가 사회와 소통하고, 교회 내부에서 소통을 하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제안을 해보고자 한다.

 

2.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란 원래 ?대화하다?란 의미의 라틴어 comunis 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이 단어는 공동체(communitas)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어서, 사람들 사이에 대화하고, 소통하는 문제는 단순한 개인의 욕구발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공동체이든 그것이 건강하게 유지, 발전하기 위해서 필수적 요소란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반인들이 직관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정의하고 이해하는 것과는 달리 학자들은 커뮤니케이션 현상이 매우 복합적인 물음을 일으키는 분야임을 잘 인식하고 있다. 이 분야의 연구서를 잠시만 들춰보아도 수십 개의 전문적인 개념정의들을 만날 수 있다. 차배근 교수는 이를 포괄하여 커뮤니케이션이란 ?생물체들이 기호를 통하여 서로 정보나 메시지를 전달하고 수신해서 공통된 의미를 수립하고, 서로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 및 행동?으로 정의하고 있다.[1] 다양한 논의를 가능한 종합적으로 담아내어 본다면,아래의 그림과 같은 커뮤니케이션 모델을 얻을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의 발원지(source)가 되는 ?커뮤니케이터(communicator)?를 다루는 분야에서는 그것이 개인인지, 집단인지에 따라서, 또한 내부적으로 어떤 동기와 규칙들에 따라 커뮤니케이션을 시작하게 되는지를 연구하는 세부적 영역이 기다리고 있다. ?메시지(message)?를 구성하고, 이를 어떤 ?매체(channel, media)?로 실어 보내는지에 따라 전체 커뮤니케이션 구조는 크게 다른 결과를 낳게 되고, 고려해야 할 지점이 바뀐다. 개인간의 대화에 적용되는 원리와 매스미디어를 통한 소통에는 고려할 요소와 고민할 범위가 크게 달라지는 것이다. 메시지는 ?수용자(receiver)?에게 전달되고, 최초의 커뮤니케이터가 기대한 어떤 ?효과(effects)?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피드백(feedback)?을 통해 최초의 커뮤니케이터에게 전달됨으로써 전체 과정에 제대로 수행되었는지를 평가하고 필요한 교정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한다.

 

 

 

물론 이것은 이상적인 모델이다. 실제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전달과정에서 흔히 ?잡음(noise)?이라고 하는 것이 끼어들어서 원래의 메시지를 훼손하기도 하고,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었더라도 수용자에 의해서 ?거부(reject)?되기도 한다. 혹은 전체 과정에서 각 단위마다 필요한 최소한의 요건을 충족시켜주지 못함으로써 커뮤니케이션 자체의 ?실패(failure)?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이 커뮤니케이션 모델은 우리가 경험하는 커뮤니케이션 현상이 매우 포괄적인 사건임을 잘 보여주고 있고, 특히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히 일어나지 않을 때 어느 단계에서 어떤 이유로 문제가 발생하는지를 짚어볼 수 있도록 해준다.

 

3.

 

?기독교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할 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를 놓고 말하는지에 따라 논의의 구조는 상당히 달라질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모델 자체를 신학적 논의의 선상에 올려놓고 파악하는 작업도 가능하다. 예를 들면, 성경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은 어떤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가를 살펴볼 수도 있다.

 

1) 하나님의 ?자기 계시?

 

때로 하나님은 직접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거나, 말씀을 들려주신다. 이것은 아마도 가장 직접적인 형태의 소통일 것이다. 커뮤니케이터이신 하나님이 자신의 ?메시지?를 다른 매체를 거치지 않고 직접 수용자에게 말씀하시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우리는 창세기1장의 천지창조 기록을 꼽을 수 있다. 이 본문은 ?하나님이 이르시되***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구조를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는 커뮤니케이터가 자신의 뜻을 발하였을 때, 어떤 왜곡이나 부족함이 없이 창조질서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그 결과를 돌아보니(feedback) 만족스러웠다는 완벽한 커뮤니케이션의 한 사례로 꼽을만하다.

 

2) 하나님과 인간의 소통

 

창조사건의 경우와는 달리, 하나님이 인간과 만날 때에는 비록 그것이 직접적 대면일지라도 완벽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커뮤니케이터가 다른 매개 없이 직접 자신을 드러내거나, 분명한 음성을 들려주었을지라도, ?수용자?인 인간의 한계가 소통의 질을 결정한다. 인간은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들은 것이 무엇인지를 미처 다 깨닫지 못하는 제한된 존재이다. 종종 성경의 영웅들은 자신들이 본 것이 무슨 뜻인지를 깨우치는 데에 오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라. 그들은 자신들이 왜 그런 말씀을 전해야 하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혹은 선명한 메시지에 반발하거나, 거절하기도 하였고(요나의 경우), 때로는 하나님의 음성이나 환상을 보았다고 참칭하기도 하였다(거짓 선지자들은 ?본 것 없이,들은 것 없이? 예언하는 자들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소통은 언제나 예외 없이 ?해석?의 문제, ?순종?의 문제를 동반하고 나타난다.

 

신과 인간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는 커뮤니케이션 행위에 근본적 층위에서 즉각적으로 완벽한 소통이 불가능함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이는 기독교 신학에 ?시간?의 개념, ?종말론적 완성?을 요청하게 되고, 인간은 ?시간 속을 사는 존재?, 즉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인간에게 점진적으로 드러난다는 입장을 자연스럽게 형성하게 된다. 기독교 역사에는 때때로 하나님과의 즉각적 소통을 주장하거나, 이를 승인하는 경험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만, 언제나 그것을 완결된 것으로 여기기 보다는 시간 속에서 제한된 것으로 인식했다. 어느 한 시대, 어떤 한 경험은 본질적으로 초시간적인 진리를 온전히 담거나 표현할 수 없고, 카이로스적 유효기간을 갖는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3) 인간과 인간의 소통

 

성경 전체를 휘감는 드라마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간의 어긋남을 지켜보고, 화해와 소통의 어려움을 실감할 수 있다.인간과 인간의 만남이 언제나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성경은 그런 점에서는 인간 세계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는 ?현실론?의 관점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 속임과 오해가 진정성을 통해 극복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성경은 곳곳에서 보여준다. 사도 바울과 예루살렘 사도들은 어쩌면 끝까지 동질의 ?하나님 나라? 이해에 도달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서로를 인정하고, 각자의 길을 존중해주는 선에서 합의에 도달한 것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초대교회의 현실이었다. 유대인과 헬라인 성도들 사이, 남자와 여자 사이, 종과 노예 사이에도 행복한 결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바울 서신의 몇몇 구절들은 성도들 간에 발생한 갈등과 이견이 참을 수 없는 수준으로 증폭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인간사이의 소통이 지극히 난제(難題)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를 풀어가는 방식은 여러 모양으로 등장할 수 있다. 가장 단순한 방법은 힘의 논리를 따라, 우세한 입장을 일방적으로 강압하는 것이다. 근대주의(modernism)는 그것이 종종 이성과 자유의 이름으로 행해지기는 하지만, 사실상 하나의 권력 아래 세상을 통제하는 획일화의 폭력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 소위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 제기한 비판이었다. 하나의 목소리가 권위적으로 다른 모든 목소리를 잠재우는 방식(one voice over all)의 반대편에는 가능한 모든 목소리들이 자기 소리를 낼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방법(liberating the different voices)이 기다리고 있다. 심지어는 자신의 소리를 내지 못했던 이들에게 목소리를 찾아주는 일(voice for the voiceless)도 근대주의적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중요한 과제가 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어찌 보면 주도적 목소리(dominant voice)가 상실되고, 권위가 무너지는 위태로운 시기로 보일 수도 있으나, 그것은 한 극단의 시대가 반대편으로 진자(振子)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필연적 현상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쪽 극단이 진리는 아니었던 것처럼, 저쪽 극단도 진리는 아닐 것이다. 과거에 너무 미련을 가질 필요도 없고, 미래에 지나친 낙관을 할 이유도 없다. 다만, 우리는 그 사이에서 우리의 시간대에 주어진 카이로스적 동적 균형(dynamic balance)을 잘 발휘하는 임무를 부여 받았을 뿐이다.

 

4)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하나님의 백성?

 

요한복음1장에서 대단히 의미심장하게 창세기1장을 연상시키는 문체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또 한번의 가장 완벽한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신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그는 말씀(message)이자, 하나님(communicator)였고, 하나님의 백성의 계보를 따라(channel), 성육신(incarnation)을 통해 수용자(receiver) 가운데 한 사람으로 동일시되셨고, 구원의 사역을 성취한(effects) 존재로 나타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에서 결코 도달하지 못한 완전한 소통의 모습(해석과 순종)?성부와 성자의 관계? 속에서 보여주고, 인간들을 향하여서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낮추고, 적용시키는 ?수용자 중심적 모습(receiver-oriented)?을 대표하고 있다. 그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들의 간난신고(艱難辛苦)를 몸소 겪으며, 눈물과 웃음을 함께함으로써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는 고백은 실재가 된다.

 

커뮤니케이션적 관점에서라면 참된 구원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knowing Christ)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following Christ)이 분리되지 않는 상황을 의미할 것이다. 이 작업은 우리가 그리스도에 얼마나 집중하고, 그의 장성한 분량에 도달하기까지 그를 닮아갈 것인가(imitation of Christ)에 달려있다. 그리고, 이 작업은 그리스도인 개인에 의해 수행될 뿐 아니라, 공동체적으로도 추구되어야 한다. 교회의 본질을 커뮤니케이션의 측면에서 볼 때, 한편으로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온전한 소통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이해와 순종?의 제자도를 수행해야 할 것이며, 동시에 이런 작업은 시공간의 제한과 인간 자신의 한계로 인해 제약 받을 수밖에 없는 ?세계 내적 존재(sein in der welt)?로서의 추구임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온전한 커뮤니케이션을 훼방하는 요인들을 끊임없이 걷어내고, 개선하는 일이 교회 공동체의 존재방식 속에는 중요하게 아로새겨져 있어야 마땅하다.

 

4.

 

한국 개신교의 현실에서 우리가 만나는 문제들에 앞 절의 이해를 포개어 놓고 보면 취약점이 선명히 보이게 된다.

 

1) 말의 값이 떨어졌다

 

개신교인, 특히 복음주의자를 자처하는 그룹들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 조사에서 국내외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지적되는 것은 ?말의 값?이 평가절하 되었다는 점이다.[2] 말과 행동 사이에 괴리가 크고, 말을 지키려는 노력은 별로 없는 반면에, 개인의 삶이나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도덕적 비판의 강도는 더욱 강해지고 있기에 나오는 현상이다.[3] 말의 값이 떨어지면, 함량미달의 말을 수습하기 위해 또 다른 말들이 동원되는 바람에 ?말의 인플레이션?이 등장한다. 말의 겉치장을 세련되게 하던지, 화사한 언변을 구사하던지, 정말 말로 해결이 안되면 강한 비주얼로 호소하는 방법이 등장한다.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는 이런 식으로 ?메시지의 천박성을 형식미로 포장해서 효과를 극대화 하는 것?을 전형적인 ?선전선동(propaganda)? 이론들 안에서 고스란히 찾아볼 수 있다. 대중에게 진리와 진실에 의한 설복이 아니라, 거대함과 화려함과 집단의식에 호소하여 이성적 판단보다 정서적 함몰을 우선시하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구사하는 것이 대표적이고, 이것이 오늘날 대형교회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느낄 것이다.

 

이런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하는 경향의 대표적 결과가 설교표절이다. 목회자의 설교표절을 경험한 교회의 성도들이 정작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설교의 내용 자체를 출처를 밝히지 않고 어딘가에서 갖고 왔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이 아닌 경험과 예화를 스스로의 기도와 고민의 결과로 포장하고, 그것으로 감정선을 건드리는 연기를 해낸 설교자의 ??을 더 이상은 액면 그대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가장 진실한 소통의 순간으로 사람들을 초청할 때 응당 걸어야 할 ?말의 무게?에 눈금을 속인 설교자는 설교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는 것?이란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저울에 달아보아 미달한 존재가 되고 만다.

 

최근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처럼 내면을 응시하는 기도에 관심이 일거나, 지식을 집어삼키는 식의 독서가 아니라, 찬찬히 되새기는 영성적 독서법인 렉티오 디비나(lectio divina) 등이 각광받는 데에는 이렇게 ?허무한 말 잔치에 지친? 심성이 크게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단순성의 훈련(discipline of simplicity)에 대한 강조가 리차드 포스터나 로잔운동 같은 복음주의권 내에서 ?서구의 풍요와 세계의 빈곤에 대한 반성?으로 70년대에 이미 제기되었던 것을 상기하면, 오늘 우리는 ?풍요의 시대?를 누리느라 30년 전의 지혜를 까먹은 것일 수 있다. 말로는 천리를 쉽게 달릴 수 있다지만, 그리스도인은 누군가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5:41)하라는 말씀을 받았다. 성 프란시스가 그랬었던가?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여 복음을 전하라. 그리고,꼭 필요하다면 말을 하라?

 

2) 말의 길이 트이고 있다

 

교회 내의 커뮤니케이션 문제가 설교 만은 아니다. 성도와 성도 사이의 소통의 문제는 설교와는 다른 방식의 구도를 갖고 있다. 개신교 교회론은 ?사제직 독점?을 인정하지 않고, 만인사제주의(priesthood of all believers)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천주교와는 다른 상호소통의 신학을 갖고 있다. 각 교회가 선택한 교회정치 제제가 감독제(episcopalianism)이건, 회중제(congregationalism)이건, 대의제(Presbyterianism)이건 상관없이 성직자와 장로 등은 아래로부터의 ?선출(election)?과 위로부터의 ?승인(anointing)?이란 이중구조를 함께 갖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민주적 의사결정의 결과에 기름을 부으신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개방된 언로(言路)의 확보 없이는 민주적 의사결정은 불가능하며, 그것이 없다면 어떤 개신교 정치제도도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커뮤니케이션 이론은 시대의 변화를 따라 논의를 정교화하고, 보완해왔다. 고전적 이론들이 오늘날 그대로 들어맞는 경우는 많지 않다. 최근의 커뮤니케이션 환경은 더욱 촘촘하고, 공감각(共感覺)적이며,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도가 아니라 요구를 창출하기까지 한다. 개신교적 교회론이 성도들간의 소통을 근본적으로 요청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상호소통을 위한 다양한 기술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교회 내의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의 사용은 대형화된 예배의 일방향적 전달이나 중앙집중식 통제의 일사불란함을 위해 동원되기보다는, 성도들 상호간의 수평적 소통을 긴밀하게 하기 위해 집중 투입되는 것이 마땅하다.

 

초대형교회(mega-church)에 대한 논박이 새삼스럽게 등장하고 있다. 분명 크기 자체가 문제가 된다. 스스로 감당 못하는 크기는 개체의 생명을 기형적으로 만들 가능성이 크다. 나는 초대형교회의 존재 자체를 원천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그 덩치에 걸맞는 존재양식을 형성했느냐를 묻는 것은 중요하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강화된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현재 한국사회가 목격하고 있는 온라인 소셜서비스(SNS, Social Network Service)의 획기적 등장은 기존의 사회적 관계망을 새롭게 정의하게 한다.[4] 요즘은 대학 강의실에서도 교수가 설명하면, 웹으로 바로 찾아서 맞고 틀린지를 지적할 수 있는 시대이다. 서로 소통하는 것이 보편화되는 사회에서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가르칠 수 있고, 모두가 배우는 존재이다. 이런 상황은 교회 내의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에 변화를 촉발하게 된다. SNS에 대한 문제의식과 사용경험은 30-40대에서 오히려 많다. 20대 아래는 그런 환경이 일상의 조건이다. 과연 이런 변화는 예배의 구조를 어떻게 바꾸게 될 것이며, 설교자에게서 어떤 역할을 기대하게 할 것인지, 교회의 의사결정 구조를 어떤 모습으로 만들게 될지 기대된다.[5]

 

5.

 

한국 개신교의 ?말의 값?은 떨어지는데, 한국사회에서 ?말의 길?은 더욱 넓고, 깊게 터져가는 중이라면, 과연 이것은 개신교회에게는 위기인가, 기회인가? 일차적으로 위기로 느끼는 이들이 많다. 오죽하면, 개교회주의적 체질이 몸에 밴 개신교계에서 공동으로 ?언론대책위원회?를 만들고, 일반언론들이 반기독교적이란 이야기를 공공연히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홍보를 강화하고, 오해를 바로잡으면 문제가 해결될까? 문제가 그렇게 피상적인 것이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겠다. 지금이라도 문제인식의 수준을 더 근본적인 차원으로 끌고 들어가서 분석을 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낫다. 복음의 핵심 빼고는 다 바꿀 각오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목회자가 가장 폐쇄적인 집단이라고 자조하며 체념하는 한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하나의 목소리로 일사불란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더 이상 지탱되기 어렵다는 것은 명확한 현실이다. 그러나, 여러 목소리와 공존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몇 년간, 한국 개신교가 가장 치열하게 연마해야 할 자기수행의 장이 거기에 있다고 본다. 다른 의견을 ?사탄적?이라고 정죄하지 않기, 남의 이야기를 시늉이 아니라 진심으로 ?경청?하기, 모르는 것은 부끄러워 말고 누구에게나 ?배움?을 청하기, 잘못은 변명하지 말고 인정하고 고치기, 선행을 홍보하기보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기, 중앙무대에 서기보다 주변부를 돕는 숨은 손길 되기, 헌금 내라는 강조보다 선한 일에 헌금 쓰는 데 과감하고 투명하게 집행하기, 학벌, 재산, 권력으로 인한 기득권 인정 안 하기

 

커뮤니케이션은 기술(technique)이 아니라, 삶의 예술(art of living)이다. 기독교적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은 아마도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 투명한 자기헌신에 있을 것이다. 한국 개신교가 얼마나 성공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수행할 수 있느냐는 거의 전적으로 얼마나 예수를 열심히 따르느냐에 달려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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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송: 청어람아카데미 대표기획자. 블로그 http://post-evangelical.tistory.com 과 싸이월드 클럽 ?복음주의?(http://evangelical.cyworld.com)을 운영하고 있다.

 

[1] 차배근, 커뮤니케이션학 개론() (세영사, 1987), 25.

 

[2]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2008, 2009년 시행한 ?한국교회 사회적 신뢰도 조사? 결과를 보면, 개신교를 신뢰하지 않는 이유는?교회지도자, 교인들의 언행 불일치?(32.2%)을 가장 많이 꼽았다. 데이비드 키네만, 게이브 라이언, 나쁜 그리스도인(살림, 2007), 56에는 미국의 경우에도 복음주의자들이 ?위선적이고, 남을 판단하는?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강함을 보여주고 있다.

 

[3]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 미국과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이 일반인들과 이혼율, 성경험 비율 등에 별반 차이가 없더라는 통계가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기성세대의 교육실패로 봐야 할지, 젊은 세대의 표리부동의 결과로 봐야 할지 혹은 새로운 도덕율을 정립해야 할 시점이란 의미인지 논란거리이다.

 

[4] 스마트폰의 시대를 갑자기 앞당긴 아이폰(Iphone)의 등장, 140자로 전세계와 소통하는 트위터(twitter) 사용인구 증가 등이 당장 일년 내로 몰고올 사회적 행동양식과 일상생활의 변화는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5] 소셜미디어에 대한 좋은 입문서로 읽히는 송인혁, 이유진 등이 지은 <모두가 광장에 모이다: 소셜이 바꾸는 멋진 세상>(INU, 2010), 296-299에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 목사의 예를 들어 미국의 교회들이 소셜미디어에 접근하는 사례를 보여주고 있는데, 책의 저자들이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더 깊었다면 이머징 쳐치(emerging church) 그룹을 비롯해서 훨씬 전향적인 사례들을 많이 발굴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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