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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교회 성장과 평신도 교육

by 【고동엽】 2022. 2. 23.

. 서론

 

1.연구 목적

 

현대는 다원화되고 전문화되어 있다. 그래서 목회자 혼자 교회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데 있어서 어려움들이 많이 있다. 아무리 목회자의 역량이 유능하고 훌륭하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 교회를 성장되는 것이 아니라 그 역량과 기능을 효과적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평신도를 훈련시켜 함께 사역을 감당해 나아갈 때 부흥될 수 있다.

또한 현대의 평신도들은 전문인력들이 많이 있고, 또한 각자의 달란트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그러한 고급인력과 각기 다른 달란트들을 계발하여 적재 적소에 잘 활동하게 한다면 교회성장을 이룩하는데 큰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목회는 목회자가 평신도들을 그 목회에 참여하게 하며 교회의 사명을 위하여 그들을 얼마나 활동하게 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목회자들은 평신도가 선교의 대상만이 아니라 선교의 주체가 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선교의 주체 세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예수님의 최후 명령인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복음전파의 사명은 목회자에게만 주어진 말씀이 아니라 평신도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기 때문에 목회자는 평신도를 잘 양육하여 그들이 주의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사역의 문을 열어 주어야 한다.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두 가지 기본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을 양육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증거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대형화됨에 따라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을 양육하는 일은 목회자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평신도들 가운데 유능한 자들을 발굴하여 훈련시켜 활용하는 일이 무척 중요하며 이를 통해서 만이 교인 관리와 양육이 가능할 것이다. 또한 교회가 이 세상에 접근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도 세속 삶에 깊이 침투되어 있는 평신도들을 통하여 더욱 효과를 높일 수가 있다. 그 이유는 평신도는 실로 이 세상에 침투되어 있는 교회의 척후병이며 교회 그 자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질적, 양적 성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리중의 하나는 평신도를 훈련하여 계발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평신도의 양육과 활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평신도는 자신들도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부름 받았다는 소명을 의식함으로 교회를 성장시키는데 평신도들도 같은 동반자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자 한다.

 

2.연구의 방법 및 범위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이며 신앙공동체이다. 교회가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평신도는 결코 관람객이 아니며 교회 전체를 이루는 구성원이다. 그러기 때문에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하기에 앞서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교역자와 평신도를 계급적으로 구분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로서 어떻게 함께 교회를 섬겨갈 것인가에 대해서 깊이 인식하고자 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이 기술되고 있다.

1장 서론에서는 왜 이와 같은 연구가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 제기와 본 연구의 목적과 범위에 대해서 다루었다.

2장에서는 평신도에 관한 이해로서, 평신도라는 개념에 대한 성서적 해답과 함께 교회 역사 속에서 평신도는 어떠한 발자취를 밟아왔는지 살펴보았다.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오늘의 이상적인 평신도 상을 정립해 보고자 하는 노력이다.

3장은 교회성장에 관한 이해로서, 교회성장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며 이와 같은 교회성장에 대하여 어떠한 원리를 제시하고 있는가 살펴본다.

4장은 평신도와 교회성장의 상관성을 논하면서 교회성장에 있어서 평신도는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논하게 된다.

5장은 평신도 실제적 훈련 방안으로 평신도들에게 목회의 비젼을 함께 공유하면서 그 목적에 의해 이끌어가게 함으로 교회의 성장을 모색하고 제자훈련을 통해서 내적, 외적성장을 도모하는 구체적 훈련 방안을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제6장 결론 부분에서는 각 장을 통해 느꼈던 중요한 관건이라고 생각되는 점들을 몇 가지를 나열하면서 결론을 맺고자 한다.

 

 

. 평신도에 관한 이해

 

본 장에서는 교회 조직제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원인 평신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성서적, 그리고 교회사적 고찰을 하겠다. 그것은 성서를 통해서 전통적인 평신도상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게 될 때 현대 교회에서의 평신도의 위치와 그 직무까지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1. 성서적 고찰

평신도에 관한 어의는 영어로 라이티”(Laity)이다. 이 라이티는 희랍어의 라이코스”(Laikos), 라틴어의 라이쿠스”(Laicus)에서 유래되었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어원은 구약에 나타난 선택된 백성”(chosen people) 라오스”(Laos)에서 온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특별한 관계를 표현한 말로서 라오스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이방인과 구별하여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을 뜻하는 것이었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행위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타협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신명기 142절에 의하면 너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에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고 말씀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들의 신으로 믿게 되었고, 그 분께서 자기들을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 우선적으로 사랑해 주고 보호해 준다고 생각하였다. 곧 하나님은 자기들의 하나님이요, 자기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구약에서 라오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자신의 백성으로 삼은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이러한 사상이 변천되었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스라엘 외의 사람도 택하셔서 그에게 속한 자녀가 되게 하고 또한 자신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선민사상의 변천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이제 새로운 종류의 사람들을 의미하게 되었다. 바울 사도에 의하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여자나 남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유업을 이을 자라고 했다.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이 구약에는 아브라함의 혈육과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에 있었으나 신약의 오순절 성령의 역사 후부터는 그 표준이 예수께서 속하느냐 속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이방인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부름 받은 자라는 것이다. 성서는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는, 전체가 그리스도의 지체이므로 부름받은 자는 똑같은 책임과 소명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 책임과 소명은 하나님의 부르신 목적에 의하여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부르신 목적에 대하여서는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왕같은 제사장으로 삼기 위함이다. 제사장의 기능은 하나님을 대변하여 세상에 그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과 하나님 앞에서 세상을 변호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평신도들은 세상 안에서 이 기능을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평신도들이 이 기능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은총을 주시기도 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삼기 위함이다. 평신도를 불러모아서 교회에 모이게 하는 목적에 대해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게 함이라 고 말한다. 평신도들은 선교적 사명을 위해 부름 받고 파견된 사절이다. 이런 의미에서 평신도는 하나의 거룩한 사도적인 선민이다. 셋째, 이들로 하여금 인간 역사에 동참케 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평신도가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의 뜻을 준행하기 위해서이며 여기서는 하나님께 봉사하는 생애의 절박한 초청이 첨부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성서는 평신도를 사명을 받아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 앞과 모든 사람들 앞에 진정 신앙과 헌신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2. 교회사적 고찰

 

(1) 초대교회 시대에서의 평신도

 

유대교적 입장에서 말한다면 그리스도교는 평신도 운동으로 일어난 종교이다. 초대교회의 발달과정을 보면 세례 요한을 제외하고는 유대교의 제사장 계급 출신의 지도적 참여는 거의 없었다. 예수는 혈통적으로 제사장 계통이 아니었으며, 그의 제자들도 아니었다. 그런 뜻에서 초대교회는 교역자와 평신도의 구별 없이 출발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도행전 2장의 기록을 보면 그것은 더욱 명백한 사실이다. 2장의 내용을 간추려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 승천 후, 그를 다르던 추종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한다. 이때 하늘에서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고 그들은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변화를 받아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된다. 그들의 열심있는 전도로 인하여 자연히 예수를 믿게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고, 그들은 종교적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처럼 교회의 기원은 평신도들의 모임으로 출발했으며, 초대교인들의 열심있는 전도로 말미암아 교회 수는 많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교회가 특정한 문화 속에서 존재하게 됨에 따라 교회는 일정한 조직체를 가지게 되었다. 하나의 조직체로 형성된 교회는 직무 분담이 있어야 했으며, 그 직무에 따라 직책이 정해지게 되었다. 그 직무 분담에 대해서는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와 사도행전, 디모데전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사도, 전도자, 목사, 교사, 그리고 집사와 장로가 그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이러한 직책이 나뉘어 있다고 해서 교회 조직체 안에서의 신분적 차이가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베드로 사도의 명백한 선언대로 그들은 다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별없이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소유된 백성이다.

그러나 3세기 전반에 걸친 역사적 조건이 평신도간의 상하적 구분이 없었던 교회의 구조를 유지하기 어렵도록 만들었다. 당시 이단 사상의 도전과 박해는 정통적인 신앙의 유지 및 개체 교회의 존속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교회는 자연히 정통신앙의 수호와 개체 교회의 존속을 위해 장로나 감독의 위치를 중요시하게 되었다. 유독 그들의 위치를 중요시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다른 신자들보다 지적으로 앞섰으므로 신학연구를 하기에 용이했고 신자를 지도하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장로와 감독들은 이러한 여건에 편승하여 그 권위가 날로 굳어져 갔다. 크래머(H. Kraemer) 박사는 그들의 권위행사에 대하여 말하기를 영적인 인간으로서의 신적인 훈련상의 그리고 교리상의 권리를 행사하였으며, 또 그 집단성에서 모든 사물을 심판할 수 있었으나 그들 자신은 아무에게도 심판되지 아니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3세기 전까지는 교회 안에 여러 직책이 있었으나 그 신분적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3세기 이후에 이르러 감독과 장로 부류인 클레로스”(Kleros)와 일반 신도의 부류인 라오스”(Laos)의 구별이 명백해졌다.

 

(2) 중세교회시대에서의 평신도

 

중세시대에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현저하게 나타났다. 초대교회 말기 현상의 클레로스(Kleros)”라오스(Laos)”의 구별이 있는 상태로 중세시대로 넘어 오면서 그 구분은 상하적인 것이 되었다. 로마 천주교회의 교회에서도 교회에는 두 가지 종류의 신자가 있다고 가르쳤다. 수도사를 포함한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다. 성직자는 초자연적인 법에 따라 성역에 속한 사람이며, 언제나 성례전의 집행과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이고, 반면에 평신도는 가르침과 성례전을 받기만 하는 사람들로 규정하였다. 평신도는 자연법에 따라 속역(俗域)에 속하는 사람들로서 성직자와는 달리 그 운명과 존재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로 구분이 되었다. 한마디로 중세시대의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성직자는 우월한 계급이요, 평신도는 열등한 계급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이토록 성직자들의 권위와 우월성을 강조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구원의 은총을 계속 세상에 전달하는 권한을 로마 천주교회가 가졌고, 그 은총을 구체적으로 전달하는 직책이 바로 성직자들의 직책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3)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의 평신도

 

중세 로마교회 안에서의 고정화되었던 성직자와 평신도의 이론적 구분은 루터에 의해서 전적으로 부인되었다. 그는 독일 크리스챤 귀족에게 보내는 글에서 주장하기를 사제나 주교나 교황이나 모두는 다른 기독교인보다 나을 것이 없고 다를 것도 없다. 오직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전을 관리하는 직책상의 임무만 가졌다는 것 밖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루터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상하구분은 비성서적인 것으로 보고 성서에 입각해서 그 제도를 반대했다. 그리하여 루터는 믿음을 통하여 세례로 모두가 하나님 앞에 제사장직을 가진다는 만인제사장직을 내세웠던 것이다. 그것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동등권을 강조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직자의 무용론을 말한 것은 아니다. 그는 그 동안 교회에서 무시되어온 평신도의 위치를 회복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만인제사장이란 사상도 모든 교회에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크래머(H. Kraemer) 박사는 그 이유를 네 가지로 들어서 설명한다.

첫째, 실제에 있어서 세례를 받은 사람이 모두가 반드시 진정한 크리스챤이 아니라는 것. 둘째, 오랫동안 수동적이던 평신도들이 갑자기 제 기능을 발휘키 어려웠고, 셋째, 종교개혁이 이론적으로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간격을 제지하였지만 교회에서 설교의 기능이 강화됨으로 설교자가 비례적으로 높아졌고, 넷째, 사회가 종교개혁 때 보다 훨씬 다원화하여 교회 일은 성직자가 교회 밖의 세상일은 평신도들의 분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일 후 얼마동안은 평신도의 활동이 활발하였으나 또 다시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두 가지 종류의 교인이 생기게 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미국의 특수 사정에 의해서 평신도의 역할이 강화되고 새로 인식되었으나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을 없게 할 수는 없었다.

 

3.평신도의 위치

 

성서의 원리에 있어서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없다. 초대교회는 그들 사이의 차별 없이 다같이 교회 발전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교회의 조직과 질서를 위하여 신도를 지도할 책임을 맡은 성직자와 그 외의 여러 직책을 맡은 평신도를 구분하였다. 즉 성직자는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일과 성례전을 집행하는 일을 맡은 사도직 계승자이며 평신도는 그의 지도를 받는 자들이다. 이들의 구분은 제도상으로나 의미상으로나 구분될 수 없는 불가침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중세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교회 안에서 평신도의 위치를 새롭게 이해하려 하였다. 성직자와 평신도는 직능의 차이일 뿐 같은 것으로 보려고 하는 시도가 그것이다. 성직자는 말씀과 성례를 통하여 평신도를 준비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사역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하게 하며 평신도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은총을 가지고 부름에 따라 사역에 역사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질적인 그리스도의 직무의 수행자는 평신도들이다. 평신도는 교회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인 것이다.

 

. 교회 성장의 이해

 

1. 교회 성장의 정의

 

1960년대 미국 교회가 사신 신학과 세속화 논쟁으로 떠들썩하던 때에 복음주의 진영에서 시작된 교회 성장 운동은 1965년 이후 수년 내에 전세계에 파급되었고, 1970년대부터 한국 교회에도 소개되기 시작하였다.교회성장이란 용어가 학문화된 것은 1972년 맥가브란(Donald A. Megarvran)이 교회성장에 관심을 가지고 계속 발전시킨 데에 기인된다. 그는 20여 년 동안 연구를 계속한 결과 1955년에 하나님의 다리(The Briges God)를 출판했는데 이것이 교회 성장학의 효시가 되었다. 그 후에 출판된 어떻게 교회는 성장하는가(How Churches Grow)라는 저서에서 교회성장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회성장 운동의 개념과 원리를 체계화한 것은 1960년에서 1970년 사이이며, 이때 출판된 교회성장 이해라는 저서가 현재 교회 성장학의 고전이 되었다. 그는 처음에 전도라든지 선교라는 전통적인 언어를 사용하기를 원했으나 이러한 용어보다는 교회성장을 결합시킨 교회성장이란 독립적인 표현을 하게된 것이다.

맥가브란에 의하면 교회성장이란 제1단계로 하나님께 대한 성실성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 잃은 자를 찾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신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할 때 교회는 당연히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2단계로 교회성장은 잃은 자를 발견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양들을 우리 안에서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시키는 일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꼴을 먹이고 돌보는 일에 성실해야 한다고 한다. 3단계로 그는 건전한 교회성장이란 교인들이 그 사회에서 진실하게 살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기쁨을 돌리는 거룩하고 구별된 생활을 함으로써 교회들을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하면서 교회성장은 하나님께 대한 성실한 순종을 의미한다고 한다.

와그너(Peter C. Wagner)에 의하면 교회성장예수 그리스도와 아직 아무런 개인적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들을 주님과 더불어 교제를 갖게 해주며, 교회의 책임 있는 신자가 되도록 만들어주는 데 관련된 제반 사항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참된 의미의 교회 성장이란 사람들을 그의 제자와 교회의 책임적 교인들이 되도록 권면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교회 성장 개념에는 교회 성장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도구로 이해되고 있다. 맥가브란을 위시한 교회성장학자들에 의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의 백성들의 사명이라는 통일성 있는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맥가브란이나 글래서(Arthur F. Glasser)등의 성장학파 학자들은 성경의 통일적인 주제인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선포되었고 그의 메시지와 선교 활동 속에 이미 현존하며 장차 역사의 마지막에 종말론적으로 완성되는 초역사적이며 초월적인 왕국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 나라를 위하여 불림을 받은 교회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땅끝까지 이르러 인류의 모든 족속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소식을 전파하고 그들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도록 변화시키는 사명을 갖는다고 한다.

이와 같은 신앙적, 신학적 배경 속에서 볼 때에 이들에게 있어서 교회란 더 없는 중요성을 띤다. , 교회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불림을 받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며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도구가 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성장과 확장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며 따라서 교회는 끊임없이 성장하여야만 하고 또 이방 세계에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야 할 사명을 가진다. 사도행전의 초대 교회처럼 오늘의 교회도 날마다 구원받아야 할 신자들이 더해져야하며 이로써 성장의 기쁨이 가득 차야 하는 것이다. 와그너의 말대로 성장치 못하는 교회는 열매 맺지 못하는 교회요, 하나님 나라 확장의 사명을 수행치 못하는 죽은 교회인 것이다.

다음으로 맥가브란의 교회 성장 개념은 20세기 후반의 서구 선교 신학의 변천에 크게 영향을 받고 그 방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맥가브란은 교회 성장이란 용어를 선교, 전도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한다. 그에게 있어 교회 성장은 곧 선교 및 전도 그 자체이며 다른 것과 대치될 수 없는 선교의 목표이다. 사실 맥가브란은 그의 사상과 원리의 표현을 선교전도라는 종래의 용어들에 의존해 보고자 했다. 그러나 전통적 성경적 선교나 전도의 개념이 19세기 이후 대두되는 다양한 선교 신학의 영향 아래 지극히 포괄적이며 일반적인 개념으로 전락하였다. 그가 전도나 선교라는 용어가 가지는 의미와 같은 의미로 교회성장이란 말을 새롭게 지어 사용한 것은 바로 이러한 현대신학의 역사화의 기류에 대한 반향이었다. 이것은 선교와 전도의 본래적 의미를 회복하려는 시도였다고 평가될 수 있다.

이와 같이 교회성장을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도구로 이해한 교회성정 학자의 공헌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성장은 하나님의 뜻이며 성경적 근거가 있는 원리로서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가장 효과적인 선교 전략임을 주장함으로써 교회성장에 관심을 가지게 했다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 도래 전에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모으는 것이 교회의 절대 사명임을 자각하게 함으로써 구원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게 하였다.

셋째,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효과적인 선교 전략을 개발한 점이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데 관련된 교회의 설립, 확장, 기능, 건전성을 조사하는 학문으로서의 교회 성장학은 맥가브란이 세운 원리를 참고하여 교회 확장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의 영원한 신학적 원리와 현대 사회학과 행동 과학의 가장 좋은 점을 결합하여 효과적인 선교 전략을 개발한 것이다.

넷째, 선교가 주님의 절대 명령으로 교회 활동의 최우선 순위에 놓여야 교회가 존재하며 생명력이 넘치게 되는 것을 자각하게 하여 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한 점이다. 한편 교회 성장학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 또한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교회 성장학은 성경을 연구했다기 보다는 성경을 이용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교회 성장학은 인간 경험에서 얻어진 효과적 선교전략에 대한 마음의 결심을 가지고 성경에 접근하는데 이것은 성경을 오염시킬 뿐 아니라 성경을 얕게 해석하게 된다.

둘째, 교회 성장의 핵심 이론인 동질단위 원리는 성경적이라고 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동질 단위의 원리야말로 사회적 관찰에서 출발하여 선교 전략을 발전시킨 후에 성경적 지지를 모색한 것이라고 본다.

셋째, 동질단위 원리에서 초래되는 대중 운동 원리는 어느 동질의 그룹이 복음에 수용적이어서 예수를 믿게 될 때는 한 개인이 아닌 집단 개종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 심화가 어려워 피상적인 신자를 양산할 위험성이 있다는 점이다.

넷째, 성장 개념의 균형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교회 성장론은 질적 성장을 강조하지만, 지금까지의 연구 경향은 숫자에 비중을 두어왔다는 것이다. 성경은 숫자보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충실하느냐에 관심을 표하였으며,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들이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이와 같이 교회 성장학이 목회자에게 교회 성장의 새로운 시야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며, 주님의 대 사명을 수행하는데 효과적인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또한 교회 성장학은 그것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도 많이 있다. 그러므로 교회 성장 이론은 앞으로 더욱 발전시켜가야 할 과제를 남기고 있다.

 

2. 교회 성장의 성경적 근거

 

교회 성장의 성경적 근거를 구약과 복음서 및 사도행전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구약에 나타난 교회 성장

 

하나님이 온 세계 민족 중에서 그의 백성을 모으신다는 사상은 창세기로부터 말라기 까지 나타난다. 이러한 구원의 범위에 있어서 보편성은 구약 선교개념의 뿌리이며 또한 교회 성장 이론의 근거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보편주의 교리에서 찾을 수 있는 교회 성장의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전세계는 그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는 말씀은 선교 원리 중 가장 심오하고 기초적인 원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주님의 대 명령(The Great Commission)의 필수적인 기초가 되기도 한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것을 소유하고 계시므로 보존 자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모든 족속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다.

둘째, 하나님은 통치자이며 재판관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전세계의 창조주시라는 사실은 그가 전세계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에게는 만민이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의 대상인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라도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시고 모든 사람이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이 심판보다 구원을 더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열방의 장래가 최대의 관심사로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방 열국들도 장차 구원을 얻으리라는 주제가 구약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펼쳐져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전세계에 관계된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선교적 요소가 있으며 교회 성장의 근거가 있다.

셋째, 하나님은 이방 나라들의 왕이시며 통치자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모든 인류가 하나로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과거에 모든 나라들의 하나님이셨으므로 그는 현재에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모든 나라들의 창조자이실 뿐 아니라 천지와 인간과 짐승의 창조자이시므로 그는 장차 창조주로,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세계의 구속자로 자신을 제시한 것이다. 여기에 선교적 요소가 있으며 교회 성장의 성경적 근거가 있는 것이다.

이상의 것을 종합해 볼 때 구약은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선교의 개념을 내포하는 근본 원리들을 담고 있음이 분명하다.

선교의 개념을 내포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완성을 위해 특수주의로 인류 구원의 방편을 삼으셨다. 왜냐하면 구약은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특수한 하나의 민족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특수주의는 곧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 목적을 위한 도구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선택은 엄밀하게 열국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교의 부분이요, 단편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방 나라들이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목적을 이스라엘 뿐 아니라 전 인류에로 이루게 했다.

마지막으로 구약에서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 백성의 선교의 목표가 무엇인가가 문제인데, 그것은 곧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사상은 구약에서 명백히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이 그 백성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지배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과 또한 메시야의 약속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진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희망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세계 통치의 현재성을 믿으면서도 하나님 나라 구현을 하나님의 찾아오심과 그 심판을 통해서 이루어지리라고 믿었다. 찾아오실 하나님의 개념은 구약 성경의 하나님 나라 이해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이 구약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과 신앙을 나타내고 있으며 역사의 종국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로 모든 족속을 불러모으고 있다. 바로 이러한 구약의 선교 개념이 교회 성장 원리의 성경적 근거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복음서에 나타난 교회 성장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에서 교회성장의 근거를 찾아 볼 수 있다.

성육신한 그리스도에게서 복음의 보편성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유대 민족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믿는자를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16-17)

요한도 말하기를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낸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한다” (요일 4:14)고 했으며,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고 했다(고후 5:14). 한 걸음 더 나가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주적인 의의를 지닌 것이라고까지 선언했다(1:18). 이처럼 예수님의 생애와 활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류의 구원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또한 예수님의 교훈에서 우리는 그의 사명과 메시지의 보편성을 깨닫게 된다. 특히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사명이 범세계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요한복음에 세상”(Kosmos)이란 말이 77회 사용되었는데 대부분 예수께서 친히 사용하신 것이다.

세례요한은 그를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하였다(1:29). 사마리아인들은 그를 이스라엘의 메시아만이 아니라 세상의 구주인 것을 인정했다(4:42). 또한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메시지에서도 그 보편성을 찾을 수 있다. 그는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원리들로 말씀하셨으니 예수님은 아무도멸망되기를 원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교훈의 중심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나라개념은 유대인이나 제자들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팔레스틴에 국한된 일시적 세력에 근거한 자신의 나라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그 성격이 영적인 것으로 (14:17) 언제나 하나님의 통치와 그의 지배를 의미하며 결코 영토를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이미 들어간 한 영역이다(16:16, 1:13).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올 때 우리가 틀림없이 들어가게 될 미래의 영역이기도 하다(8:11, 벧후 1:11). 이 미래적인 하나님의 도래는 커다란 영광과 함께 올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범위는 보편적이며 (25:31 - 36), 그 구성은 범세계적이고(8:11), 그 기간은 영원한 것이다(1;33). 하나님의 나라는 권세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진리에 기초한 것이다(8:31-32).

하나님의 나라 확장은 교회 성장과 깊은 관련 속에 있다고 보는 것이 교회 성장의 신학이다. 새 결신자를 통한 교회 성장은 참다운 하나님 나라의 성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클라우니(Clowney)교회 성장은 성령의 능력이요 새로운 창조의 생명에 의한 하나님 나라의 성장이다.” 라고 말한 것은 타당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 활동과 권능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하여 오늘날 세상에서 역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의 행위는 곧 교회를 통한 복음 전파의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자체는 아니다. 따라서 교회가 성장해감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도 세상에서 성장해가며 확대되어져 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참된 신앙을 고백하는 가치적인 교회 속에서 구체화되어지는 유일한 참된 교회와 동일시될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교회를 창조한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역사하고 성장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궁극적 목표인 하나님의 나라의 성취는 우주에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며 앞으로도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 따라서 교회를 개척하고 성장시키는 것은 예수님의 교훈을 중심으로 이루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한 것이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진리에서 교회성장의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9:12) 전세계의 죄로부터 영원한 구속(요일2:2)을 이루시고 세상의 주”(요일4:14)만유의 후사”(1:2)가 되셨다. 곧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은 높은 위엄의 보좌 우편에 높아짐으로써(1:3) 우주의 엄연한 통치자가 되셨다. 따라서 만민은 지금 그의 통치 아래 있으며 만민은 그의 법에 지배를 받는다. 그는 보편적인 주님이시며 우주적 그리스도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불원간 모든 사람들(14:11)과 모든 민족들(11:15)은 그와 화해할 것이다(2:7-12). 예수님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대 명령을 하셨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 명령에서 교회성장의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부활한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는 대 명령을 하셨다. 또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고 하셨다.

 

3. 교회 성장의 역사적 유형

 

야마모리(Yamamory)와 루우슨(Lawson)이 공동 집필한 교회성장 입문이라는 책에서 초대교회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의 교회성장 유형을 여섯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 자연발생적 교회 확장: 초대교회에 있었던 교회성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 되심에 불타는 믿음, 사명환수에 대한 긴박감, 어떠한 역경에도 도전할 수 있는 자원심 등에 의하여 복음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 세계로 확장되어 나간 것을 말한다.

. 정치권력에 의한 교회확장: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외형적인 교회성장의 성격을 대하면서 성령의 열기는 식어가고 대신 의식, 행정, 정치 등이 남아서 교회성장을 떠맡는 시기였다.

. 수도회를 통한 교회성장: 교회가 국가와 결혼하게 되자 교회는 대체적으로 안일한 순응주의(順應主義)에 빠지게 되고 성직자들은 부유해졌다. 이 때에 많은 수도자들이 일어나 청빈(淸貧)과 자선(慈善)과 금욕(禁慾)의 수행을 서약하며 복음을 전파하였고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로마 국경에까지 나아가 선교사가 되었다. 이후 중세교회는 기구화된 교회로서 기독교 문화 및 교권의 확장을 통해 교회성장을 이룩하였던 땅위에 있는 교황의 지배를 받는 교회였다.

.개신교를 통한 교회성장: Philip Spencer를 원조(元祖)로한 경건주의 운동의 기후 속에서 복음선교의 새로운 관심이 태동하게 되어 로마 카톨릭 교회의 수도사회를 대신 할 만한 개신교의 선교회들이 탄생되어 세계선교를 통한 기독교 확립에 기여하게 되었다.

.19세기의 폭발적 교회성장: 강력한 개인 선교의 선구자들로 구성된 선교 기관과 성령이 충만하고 영웅적이었던 위대한 선교사들의 헌신적이고 뜨거운 선교 열정에 의하여 기독교는 명실공히 범세계적 교회로 확산되는 시기였다.

. 20세기의 혼란기 : 20세기는 대대적인 선교 개념에 큰 도전과 위협으로 등장한 사회 복음론의 대두와 득세로 인하여 매 선교 대회마다 그때 그때의 사회 역사적인 정황에 따라 신학 조류의 대립과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이 시기에 있어서 선교 신학상의 가장 뚜렷한 전환점은 1952년 빌링겐에서 있었던 제5차 국제 선교대회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대회는 현대적인 선교개념을 정립한 의미에서 선교 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계기가 되었다.

선교는 사람들의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필히 하는 것이며 선교는 많은 선교회들에 의하여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하나뿐이라고 한다. 이것은 결국 그때까지 강력했던 교회중심의 선교 의식에서 세계 중심의 선교의식으로서 전환을 뜻하는 것이다. 교회 성장학은 이와 같은 새로운 선교 신학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혼란과 그로 인한 불가피한 교회 중심의 선교단체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4. 평신도를 중심한 교회성장 이론들

 

교회성장 원리는 학자들간에 다소의 차이가 있다. 그것은 원리의 상치를 의미하기보다 원리의 다양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몇몇 학자들의 평신도를 중심한 교회성장 원리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와그너는 그의 저서에서 교회성장의 일곱 가지 기호를 말하면서 교회성장을 위한 모든 성령의 은사를 발견하고 개발하여 잘 활용하고 있는, 그리고 잘 기동화된 평신도라고 하였다.

Parher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안디옥 교회를 중심한 교회성장의 일곱 가지 특성을 열거하면서 성도들의 교화를 위한 강한 이행이라고 하였다.

Chaney Lewis는 그들의 공저 교회성장을 위한 디자인이란 저서에서 교회성장의 일곱 가지 특성을 기술하면서 성장하는 교회들은 평신도를 기동화 시킨다고 하였다.

LawsonYamamory교회는 어떻게 해서 성장하느냐?’하는 문제를 제기하여 거기에 대응하는 답변으로 교회성장의 원리를 새신자들은 즉시 활동하러 나간다고 하였다.

Peters는 교회성장의 원리에서 평신도의 동원과 평신도의 훈련이라고 하였고, 슐러는 훈련된 평신도의 봉사와 평신도의 참여가 교회 성장의 원리라고 한다.

맥가브란의 교회성장 원리는 그의 교회성장을 위한 열 단계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열 단계는 다음과 같다.

(1)성장에 대한 의식을 가져라. (2)필요와 기회를 포착하라. (3)목표를 설정하라. (4)평신도를 동원하고 훈련하라. (5)몸을 분별하라. (6)공동체를 바로 파악하라. (7)효과적 전략을 개발하라. (8)자원을 투입하라(시간,재능, ) (9)전도에 우선권을 두라. (10)영적 자원을 활용하라.

이상 10가지 전략 속에 중요한 것은 평신도 동원과 전략개발과 영적 자원의 활용이다. 맥가브란은 또 교회성장을 위하여 평신도의 참여를 고조하면서 케네드 스트라챤의 이론을 인용한다. ‘어떤 운동의 확장은 그 성공 여부가 그 신앙을 계속 전파하는데 있어서 전 회원이 동원되느냐에 달려있다

결론적으로 개혁주의 교회는 평신도 신학과 영적 은사를 중요시 않는 데 반하여 교회성장 학파들은 평신도의 참여를 중시하며 훈련과 역할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동시에 영적 은사의 개발을 중시함을 볼 수 있다.

 

5. 한국교회의 성장 배경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지속적 성장을 하여 세계 교회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영국의 부흥운동 연구가 J. Edwinorr는 한국선교 초기(1906-1910)4년간 7,922명의 새신자들은 일본의 개신교가 50년간 얻은 수의 2배가 된다고 지적했다. 한국교회의 이러한 급성장으로 기독교는 한국사회에서 저력을 발휘할 수 있는 단체가 되었다. 이러한 성장의 요인으로서 나타난 것은 사회 환경적 요인, 문화인류학적 요인, 선교 전략적 요인, 영적 요인, 신학적 요인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또한 교회가 사회에 대한 공신력의 영향과 사회참여의 영향도 있을 뿐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불안의 영향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국 교회가 성경을 그대로 가르치고 따르려는 한국 교회의 주체적 노력과,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의 경쟁적 전도율은 놀라운 성장을 초래하였고, 급격한 도시화 현상과 교회내의 일부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출현은 대 교회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교회 성장의 내적 배경

 

1907년부터 일어났던 성령운동은 양상을 달리하면서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을 체험적으로 느끼게 했으며, 그들도 전도자로서의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 맥락은 1970년 대규모의 전도대회 또 대 교회주의 철야기도회로 연결되면서 세계에서 역사를 볼 수 없으리 만큼 성장했다.

이것은 MecGavran이 이야기했던 집단 선교의 양상을 띄고 있다. 빌리그레함 전도대회, 엑스폴로 전도대회, 부활절 연합집회, 합동부흥회로 연결되면서 영적 증가가 눈에 띄게 보였다. 또 각 교단은 교회성장 계획을 수립하고 목표달성에 노력을 경주하면서 성령운동에 힘을 쏟고 기도에 전심전력했다. 이것을 기폭제로 개 교회에서는 성장운동을 개발하였다. 또 교회자체의 교파분열은 긍정적으로 교회 수를 양산하면서도 갈라진 교회들이 경쟁적으로 성장을 하려고 노력했다. 전도를 위한 자체훈련과 평신도운동, 성경공부를 심화해 나갔다. 교회지도자의 훈련이 조직적이고 체계적이 되고 그들 속에 강한 성령운동을 심어줬다. C.C.C, 네비게이토, U.B.F등을 통하여 청소년, 지식층에 성경 공부를 깊이 연구하게 하여 개인과 개인이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데 많은 교역자는 노력을 기울였다. 경쟁적인 교회 건축은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 일에 몰입할 수 있게 했으며, 자신의 것으로 교회가 채워지는 만족감과 대 교회라는 의식을 채워 주었다.

또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새벽기도는 한국교회의 내적인 산실이 되어 왔음을 무시할 수 없으며, 근년에 와서 많은 교회들이 금요철야를 통하여 교인들에게 영적인 훈련을 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원인들로 인하여 한국교회는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 왔다. 이제 교회 성장의 외적 배경을 살펴보자.

 

(2)교회 성장의 외적 배경

 

한국 교회의 성장은 내적 요인보다는 외적인 환경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원규 교수는 성장 요인을 1960년 이전과 그 이후로 분리하면서 1960년 이전에는 한국의 개화와 근대화 과정에서 도입한 서구 문물이 기독교와 함께 들어옴으로써 서구 문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기독교도 같이 생각하여 커다란 저항감 없이 받아들여졌고 개화 이후 한국이 겪어왔던 수많은 시련과 고난, 갈등이 교회의 성장을 가져왔으며 교회는 이들과 아픔을 함께 나누었던 것은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개화기의 이념의 갈등과 혼란, 열강의 식민지 정책에 시달림, 일제의 탄압, 남북의 분단, 6.25사변은 우리의 역사를 불운으로 몰아 넣었지만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이를 이겨내려고 무단히 교회는 노력했다. 또 개화기 이후 정치와 사회 엘리트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많아 은연 중에 그 영향력이 확산되었다.

1960년 이후는 이 사회 특징을 도시화, 산업화, 공업화, 경제성장, 관료적 정치체제로 대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경제 우선 정책으로 물질주의, 배금주의가 팽배하여졌고 소득분배의 불균형과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그들의 빈 마음을 교회에서 채우려고 찾아 나섰다. 또 불안한 정치상황과 무조건의 복종을 강요한 유신체제 아래서 방황하는 지성인이 소외되었고 안정을 추구하는 그들은 영적인 안정을 교회에서 찾고자 했다. 또 도시화로 인구가 집중되었고, 그 많은 군중은 정체성과 소속감은 상실한 채 의식을 찾아 교회로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반대의 측면에서 조동진 교수는 도시교회의 성장원인은 전도나 신도의 노력에 의한 성장이라기 보다는 사회변동에 따르는 교회 인구의 이동이 더 많이 차지하고 있다 고 보아야 한다고 했다. 물론 이 말에도 일리는 있다. 서울의 강남지역의 많은 교회들이 급성장하고 있다. 어쩌면 그들의 대부분은 강북지역에서 강남으로 움직인 교인 등이 대부분인 줄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그들의 주위에 사는 비기독교인들이 그들에 의해 인도되고 있고, 그들은 교회의 진정한 의미보다는 가정의 소외감과 무미건조함에서의 탈피를 위하여 그들의 청에 선뜻 따르고 있어서 강남지역의 교회성장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으로 이들 지역이 지성인을 중심으로 성경공부에 열중하여 성서대학의 개설 등은 앞으로 교회성장의 진로를 위하여 매우 바람직하다.

또한 국내적으로 어두웠던 70년대의 사회적 불안감 속에서 교회는 그들과 아픔을 같이 하려고 애썼고 그들을 대변해 갔다. 이러한 일이 사회적 공신력을 회복시켰고, 선교의 장을 사회로 본 주체적인 노력을 극도의 정치적 아노미 현상과 사회적 아노미 현상으로 의욕을 잃은 현대에게 새로운 의미를 던져 주었다. 김경서 교수는 같은 맥락에서 교회성장 요인은 관 주도의 명령경제와 성장 제일주의 개발철학의 만연, 외형적인 성장 전략으로 불안한 경제성장이 우리에게 왔고, 불안한 정치 상황과, 도시화, 산업화로 이농민이 증가되었고, 근대화로 인간이 상실되어서 인간으로서 새로운 의미를 찾기 위하여 교회로 모여들었다고 보았다.

한국교회의 폭발적 성장은 주로 근대화 물결을 타고 이루어졌다고 보겠다. 한국 사회는 과거 20년간 개발과 근대화가 가져온 특수한 근대성이 모든 제도적 생활 영역에 영향을 주었고, 특히 경제생활, 정치환경, 교육제도, 종교생활, 가정에까지 배여 들어갔다. 한국 근대화의 결과는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생활형편이 개선되었으나 빈부의 격차는 여전히 심하고, 성장의 기복은 극도의 불안한 경제성장의 실현이며, () 주도적 경제성장주의 정책은 국민의 자유와 평등의 신장을 저해 했으며 산업화, 도시화는 허다한 영세 이농민을 도시로 집중케 하였다. 이러한 근대성의 추세로 한국 사회는 불안정, 불안 등이 가득 차서 국민은 삶의 방향감각을 잃고 스트레스 해소에 급급하게 되었다. 공업화에 따른 취업 확대로 인구이동, 특히 영세민을 증대시켜 생활 공동체를 붕괴시켰고 소속된 공동체가 없는 상태에서 공허감을 더욱 느끼게 했다.

이런 혼란과 불안정, 불안과 스트레스에서 시달릴 때 인생의 방향을 잡기 위해서, 불안의 해결과 안정된 삶을 찾아서 대거 교회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의 불안정과 국민의 불안감이 중대함에 따라 교회의 급성장은 과거의 한국교회 성장 모습에서도 역력히 나타난다. 온갖 정변이 일어났고, 한일합방이 되던 시기, 3.1독립운동 전후의 쓰라린 항일 투쟁의 시기, 해방후의 혼란, 6.25동란기 모두 불안과 불안정이 지배하던 때이다.

끝으로 한국교회의 성장에 작용한 요소는 한국의 민속 신앙에 근거가 되는 샤마니즘적인 현상과 기복주의, 종말적 사상, 치병 위주의 신앙이다. 또 초기에 주로 노동계급, 부녀자를 선교 대상으로 하여, 평민 치중적인 교회로 성장하여 무산, 무식 대중의 계몽의 큰 역할을 했고, 그것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현대까지 연결되어 소외된 자에 관심을 갖고 성장했다.

한국의 기독교는 초기 인간의 해방 이념으로 천민과 소외된 양반에게 환영을 받았고 그후 3.1운동을 전후해서는 애국, 민족정신으로의 선구적 개척 운동으로 인정 되었으며 현대에 와서는 유신체제 하에서 인권운동, 억눌린 근로자의 복지와 여권 신장에 앞장서므로 그 공신력이 늘어났다. 그래서 특히 넒은 학생층, 지식인에게 기독교에 대한 신뢰감이 증대했다. 또한 기독교의 교육기관들과 병원, 고아원 등의 제도적 선교의 노력에서와 기독교가 일본인과 같은 한 만족을 착취한 자들의 손에 의해 전파되지 않고 민족해방의 유공자인 우방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들어왔고 전파되었다는 역사적 배경을 무시할 수 없다. 결국 한국 교회의 성장은 평신도를 통한 성경적 성장이기보다는 사회적 요인에 의한 성장으로 간주되어야 할 부분이 더 많은 것으로 보여진다.

 

.평신도와 교회성장의 상관성

 

1. 평신도의 기능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평신도가 지니고 있는 그 기능에 대하여 Congar선교와 사업을 위하여 필요한 기능을 말하고 이것을 교회를 위한 선교화, 세상을 위한 사업’,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평신도 기능을 이해한 구체적 역할은 그리스도의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직에 참여하는 일이다. 이 세 가지 직()을 이행하는 것을 가르쳐 평신도 사도직이라 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참여함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특권을 얻고, 성체봉헌과 그의 은총과 친교인 교회적 재물에 참가함으로 얻는 특권을 얻어서 선지자직에 참여함으로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공헌하고, 가르치는 특권을 얻는다. 그러나 이 삼직은 교회 안에서의 삼직(三職)이라기 보다는 세상을 향한 사도적 사명 이행에 강한 뜻을 가진다. 세속적 능력은 평신도에게 고유한 것이며 특정적인 것이라고 한다. 신도에게 고유한 소명은 현세사(現世史)에 종사하며 현세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향하게 함으로 현세사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도록 노력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기 때문에 평신도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현세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의도를 따라 실현되고 성장하며 세상 만사가 창조주와 구세주에 대한 찬미가 되도록 현세의 모든 것을 비추고 방향을 잡아주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평신도에게 부과된 사명(司命)이라고 한다. 평신도의 기능과 능력으로 깁스는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동결된 백성(God's Forzen people)’의 몇 가지 주제를 하나님의 생동하는 백성(God's Lively people)’에서 채택하려고 한다 고 하였고, 크레머는 말하기를 교회가 평신도를 생각할 때에 주로 동결된 재산과 같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오늘의 평신도 운동은 그 동안 하나님을 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평신도의 기능을 동결시켜 놓은 교회의 책임을 통탄하면서 그들의 기능을 개발하고 그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자유롭게 잘 감당할 수 있게 하려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충분히 발전되지 못한 유산으로 보는 종교 개혁의 귀중한 유산의 하나인 신자들의 보편적인 제사성을 개발하여 평신도의 기능과 사역을 기동화 시키고자 한다. 평신도는 베드로가 말한 대로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제사장직 사명을 감당하자는 데서 평신도의 기능과 사역을 발휘코자 하는 것이다.

평신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사역을 위하여는 자기 위치를 알기를 원한다. 깁스는 말하기를 기독교인은 세계 안에서 자기의 삶을 영위한다 라고 하였고, 크레머는 말하기를 평신도는 교회의 분산이다라고 하면서 평신도는 일정한 장소에 집합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흩어져서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그들은 교회와 세계의 관계에서 있는 존재로서 그들의 역할과 기능은 어떤 의미에서 목사보다 더 결정적인 것이라고 한다. 평신도의 위치가 교회와 세계에 관계해 있다는 것은 교회의 이중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세계에서 봉사와 화목과 혁신을 위한 특별 기회를 부여받고 있음 을 시사한다.

평신도는 삶의 열쇠인 예배를 중심한 교회생활과 일을 중심한 사회에서의 생활 을 통하여 그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며 이 기능을 발휘하기 위하여는 두 가지 대담한 결론이 필요한데, 그 첫째는 교회구조의 개혁, 즉 과거로부터 유산으로 내려오는 변화가 느린 교회의 구조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평신도의 대다수가 지니고 있는 특색이 세계 안에 있으며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조직체와 기업체가 모든 관계와 직업 속에 흩어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크레머는 평신도의 기능 발휘를 위한 새로운 방안으로 세 가지를 명시 하였다. 그 첫째는 그리스도가 지배하는 형제 관계라는 사실을 어떠한 형태의 교제와 공동체로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둘째는 평신도들이 어떻게 교회의 예배와 교육적 기능과 처리에 보다 많은 참가의 기회를 주도록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셋째는 특히 현대와 같이 기동적이고 급격한 사회 변천의 시대에 처한 교회에는 융통성과 사회 속으로 분산해 들어가는 준비가 요구되고 있다는 것이다.

 

2.평신도의 역할

 

(1)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평신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고 그의 사랑 안에서 보호하심을 받은 새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아무 관계나 의미가 없는 단순한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관계되는 백성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라는 문구의 개념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고 본다. 바울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2:19)고 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모신 동일한 시민들이 하나의 권속을 이루어 살아가는 곳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와 관계에서 볼 때에 보편적 무형교회를 의미하기도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모든 민족으로부터 선택된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시민 이다.

하나의 세계, 하나의 교회관, 한 하나님 아래서 통치를 받는 질서의 세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궁극적 목적이기도 하다. (1:10, 21-23)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고 그 모든 백성은 동일한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사명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왕 같은 제사장인 백성은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은 사명을 갖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질서와 확장의 사역을 담당할 책임이 있다. (13, 16 : 18 , 19)

루터는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에 만인 제사장직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 제사장직이란 것은 교회 성직 제도를 근본적으로 철폐하는 의미에서 주장한 것은 아니다. 로마교회의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상하 구별 또는 교회 구성에 관한 문제점들을 철폐하고 평신도의 기본적 신앙의 자유와 그에게 주어진 사역에 따른 제사장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평신도는 수동적 자세에 머물러 있는 비활동적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사명을 위하여 능동적으로 되는 자발적 활동으로 각자에게 주어진 분량의 은사를 따라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왕 같은 제사장인 백성이다.

 

(2)교회의 일원으로서의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우주적 교회의 일원이로되 현실 속에서의 구체적 생활은 유형 교회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 유형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설립과 확장을 위한 기구이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종속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형 교회가 곧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한 성격을 띤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한 수단으로 세우신 기구인 만큼 유형 교회의 일원이 되어 유형교회를 중심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마땅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공 예배와 주일학교에 참석하여 신앙을 성숙시키는 일.

신도들의 신앙 성숙은 무엇보다도 먼저 예배에서 이루어진다. 평신도의 신앙 생활은 곧 예배에 잘 참석하여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리며, 예배를 통해서 주시는 메시지에 의하여 새로운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평신도의 신앙이 성숙하는데는 예배에 이어서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인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배워야 한다. 평신도가 성경을 배울 수 있는 중심적인 교육기관은 주일학교이다. 평신도가 주일학교에 참석하여 성경을 배운다는 것은 자신의 신앙 성장에 큰 힘이 된다는 것이다. 평신도가 예배와 교육에 참여하는 일은 평신도의 성장인 동시에 교회의 성장인 것이다. 와그너는 그의 교회 성장학 강의에서 교회 성장에 대한 기본적 계산법은 교회의 세례 교인 수와 주일 낮 예배, 참석 인원과 주일 학교 출석수를 기준으로 하였다.

평신도가 예배와 주일학교에 잘 참석한다는 것은 곧 교회 성장인 것이다. 그리고 예배와 교육은 정기적으로 모여든 회중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필요 불가결한 기초가 되는 것이다.

()평신도의 신령한 은사와 청지기 의식

하나님은 모든 신도들에게 신령한 은사에 따른 청지기의 사명을 주셨다. 그러나 이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살아가는 신도들이 많이 있다. 신도들의 자질 향상은 그의 신령한 은사의 청지기 의식을 갖고 그 직무를 잘 감당하는데 있다. 예배와 성경공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발견하고 청지기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열의를 가져가게 하는데 또한 의의가 있다고 본다.

평신도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잘 활용하여 청지기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할 책임이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청지기직은 단순한 삶의 한 분야가 아니라 삶의 전체를 의미한다. 그것은 전인격과 시간과 재산으로서 크리스챤의 임무를 수행하는 삶의 실제이다. 주어진 청지기직은 생명도 포함된다.

우리가 은사를 논할 때에 특별히 그리스도의 몸을 생각하게 된다. 몸에는 여러 가지 지체가 있듯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도 각 신도마다 지체가 있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하나의 몸 안에 여러 지체가 있어서 신자들의 집단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의 몸이다(1:21-23). 교회는 한 머리에 각 지체가 연결되어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각 지체를 자기가 받은 은사대로 역사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양성과 통일성의 질서를 지켜야 한다.

()교회 기관에 참여함으로 인한 친교와 봉사

조직된 교회 안에는 다양한 기관들이 있다. 장년회, 청년회, 전도회, 학생회, 또는 성가대, 주일학교, 또는 평신도부 등 그 외에도 소그룹들이 있을 수 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다. 그러므로 신도는 주님의 교회 안의 기관 활동에 참가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기관들은 일종의 집단이다. 교회 안의 집단들은 대게 동질성을 띄고 있다.

소집단이 지니고 있는 성격은 친교이다. 수백 명씩 되는 대집단에서는 친교성이 약하다. 그러나 소수로 구성된 집단에는 친교성이 강하다. 교회는 깊은 관계를 갖는 친교이다. 초대교회는 성령에 의하여 지도를 받는 크리스챤들의 친교였다. 그때의 신도들은 그들의 삶과 재산과 기쁨을 함께 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친교는 그리스도의 속죄적 사랑을 재현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리스도안에서 크리스챤들의 친숙해지는 인간관계라고 할 수 있다. 소집단의 성격은 봉사직이다. 주님은 세상에 섬김을 위하여 오셨고(20:28) 우리에게 섬기는 본을 보여주기도 하셨다(13:14-15). 그룹의 목적은 친교와 봉사에 있다. 평신도들을 교회 기관에 참여하여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안에서 친숙한 사랑의 친교를 도모하게 하고 주님이 보여주신 본을 따라서 섬기는 자들이 되게 하여야 한다. 기관 또는 소집단은 곧 평신도들의 활동 무대인 것이다.

()평신도의 선교적 사명

평신도가 교회의 일원으로서 활동하여야 할 역할 가운데 궁국적인 임무는 선교에 있다. 선교란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다. 개인 전도를 비롯하여 개체 교회를 확장시키기 위한 전도, 개척교회를 설립하는 일, 민족 복음화 운동, 나아가서는 세계 각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까지 포함하여 선교라고 한다. 선교 없는 교회 성장은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아서 즐거워 어깨에 메고 기쁨을 나누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전도는 사람들을 영생에 참여하도록 구속주이신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전도의 중심이며 거기에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이 있을 수 있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맺어지는 이 관계는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한다. 이것이 바로 전도의 목적이다. 그리고 전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맺고 새신자가 된 그로 하여금 주님의 제자가 되게 하는데 있다. 제자의 훈련을 받은 자는 다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서 주님이 맡기신 전도의 대 임무를 수행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그 열매로 하여금 30, 60, 100배가 되게 하기를 주님은 원하신다.

전도의 사명은 교회 어느 부분의 사역이 아니라 교회 전체의 사명이다. Win Arn은 말하기를 전도는 개체 교회의 모퉁이 돌이다. 그것은 어떤 최선의 계획이 아니라 본질적인 우선이다.’ 라고 하였다. Synder는 전도의 세 가지 요점을 언급하여 말하기를 첫째로 전도는 세상에 대한 교회의 사명 중 가장 우선적이다. 둘째로 전도는 본질적인 증거이다. 셋째로 증거는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기능들이다.’ 라고 하였다.

교회는 신도들의 공동체인 만큼 공동체의 일원이 된 사람은 누구나 증거자가 되는 것이고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기능화가 되어야 한다. 특히 교회원의 99이상을 차지하는 평신도의 전도적 사명은 교회의 전도에 대한 기능화를 좌우한다. 그러므로 평신도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왕같은 제사장이요 사도성을 띤 전도적 사역자의 사명 이행에 충실함을 기하는데 평신도의 궁극적 기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3.평신도와 교회성장의 상관성

 

교회성장과 평신도의 기동화는 양 바퀴와 같다고 하겠다.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는 교회성장 원리는 평신도의 비중과 역할이 얼마나 중요성을 띠고 있느냐 하는 것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교회는 평신도로 구성되었고 평신도에 의하여 성장한다는 사실은 교회성장을 위한 평신도 개발의 필요성을 더욱 확고히 하고 있다. 교회는 일부의 성직자를 제외하면 전부가 평신도들이다. 교회가 크냐? 작으냐? 하는 것은 평신도들이 많으냐? 적으냐? 하는 것이다. 절대 다수의 평신도들로서 구성된 교회는 평신도의 제자화 훈련이 철저하게 되는 날 교회는 비약적 성장을 가져오지 않을 수 없다.

교회성장의 큰 요인은 평신도의 활성화(活性化) 또는 기동화(起動化)이다. 교회는 절대 다수인 평신도들이 기동화하면 교회가 성장하고 작동하지 아니하면 교회가 침체 상태에 있게 된다. 그러므로 성장하는 교회상태는 평신도의 활동 여부에 의하여 좌우된다.

교회성장에서 목회자의 기능 발휘가 평신도를 통해서 나타난다. 평신도에게는 비상한 잠재력이 있기 때문에 목회자는 평신도 없는 교회성장은 시킬 수 없다. 목회자로 혼자 24시간 일해도 같이 일하는 평신도팀이 없을 때 그의 하는 일은 큰 효과를 낼 수 없다. 목회자로 혼자 십분의 일을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평신도와 같이 팀의 일을 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는 성장한다. 이 말은 목회자 혼자 일하려 하지 말고 먼저 평신도 지도자를 개발하고 같이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이 세상에 대한 사명을 다하지만 평신도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교회 안에 있는 평신도들을 100% 교인이며, 동시에 100% 사회인이다. 교회의 사회에 대한 책임은 이들을 통해서만 이행 할 수 있다. 교회가 평신도를 개발하고 훈련하여 전도에 동원한다면 교회는 성장하게 된다. 시대마다 평신도 전도 운동이 힘있게 일어나는 곳에는 교회가 크게 발전하고 성장했다. 교회가 평신도들을 동원하고 기동화하고 복음 전도에 힘쓴다면 교회는 날로 새로워지고 크게 부흥하고 성장할 것이다.

교회 성장원리에서 맥가브란은 양들을 정상적 상태로 회복시키는 일은 꼴을 먹이고 돌보는 일에 성실하게 하는 일이며 양육하는 일은 주님의 제자가 되는 훈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교회성장 전력 가운데 무보수 평신도 지도자를 개발할 것이라고 하였고, 또 교회성장에 중요한 것은 평신도 동원과 전략 개발과 영적 자원의 활용이라고 하였다. 피터스는 교회성장의 원리에서 평신도의 동원과 평신도의 훈련을 든다. 슐러는 교회성장의 요소로 훈련된 평신도의 봉사와 평신도의 참여가 성장의 원리라고 한다. 와그러는 교회성장원리에서 잘 기동화된 평신도는 성령의 은사를 발견하고 개발하여 잘 활용 할 것을 강조한다.

은사는 각각 다룰 수 있는 다양한 성격을 띠고 있으며 평신도의 기동화는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를 발견하고 활용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Chaney는 교회 성장 원리에서 평신도 기동화를 위하여 훈련을 강조한다. 그는 또 평신도의 진지한 참여없이 교회 성장은 결코 있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평신도와 기동화는 영적이고 희생적인 중대한 사역에 도전하는데서 이루어진다. 그 훈련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훈련과 성령의 은사를 발견하여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훈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성장의 가장 중요한 원리중의 하나가 평신도를 개발 훈련하는 것이다.

전호진 교수는 한국교회 성장의 원인에서 평신도들 중에서 선발된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 집중적 성경공부를 실시한 사경회는 한국교회의 성장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 평신도의 참여는 교회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초대교회는 핍박으로 흩어진 평신도들이 복음을 증거 하였는데 초기 한국 선교사들도 평신도 지도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들을 먼저 훈련시켰다.

이렇게 교회 성장에 평신도의 비중과 역할은 매우 크다. 즉 평신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교회 성장을 위한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이란 자각과 함께 교역자들과의 동일선 상에서 서로 협력하며 사역을 감당해 나가는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잃지 말고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야 할 것이다.

 

 

 

 

.평신도 훈련의 실제적 방안

 

1.목적(비젼)중심의 신앙훈련

 

(1)새로운 목적(비젼)의 필요성

 

교회성장에 있어서 평신도에게 교회의 비젼을 세우고 가르쳐 주어 그 비젼을 향해 일하게 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교회의 비젼을 평신도들에게 바로 심어주지 못하기 때문에 평신도들의 활성화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부 집단은 오로지 과거에 대하 영상만을 상상한다. 현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하도록 부르고 계신가를 분별하려는 노력이 없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미래에 대한 그들의 생각 역시 정지된 채로 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 하나님의 현존의 현재적 의미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비전도, 어떠한 생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핵심적인 비전을 기대하긴 하나, 그 비전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그룹에서 회원들은 이런저런 일에 계속 사로잡혀 있기는 하나 결코 그 일들에 대한 확신이 없다. 그들은 열심히 온갖 활동에 참여하긴 하지만 그 방향이 모호하다. 활동을 많이 하는 것이 틀림없이 좋고 얼마간 소득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약점은 특정한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분별해 내지 못하는데 있다. 평신도에게 분명한 목적성과 온전한 방향성을 갖도록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비젼을 갖는다는 것은 앞으로 올 것을 내다보는 것이다. 우리의 세계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비젼을 갖는 것은 개인과 지도자 그룹 모두에게 계시에 동참하는 계기가 된다. 하나님의 활동의 비젼을 바라보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나아감으로 그 비전에 응답하는 것은 곧 우리 가운데 뚫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영원한 영역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제시해 주시는 비전을 이해하고 거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평범한 것, 하나님의 의도와 우리의 현실, 미래와 현재, 가능성과 불필요한 한계, 그리고 절망과 희망 사이의 갈라진 틈을 연결하는 것이다.

성경이 기록된 이후에 나온 비전의 수많은 예들이 있는데, 여기에 한 가지만 언급하고자 한다. 마틴 루터 킹 박사는 자기 꿈을 다른 이들이 볼 수 있도록 드러내 보였다. 건전한 인종적 다양성(racial diversity)에 대한 그의 비젼과 설명은 1963828, 20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워싱턴에서 행진하기 전에 행한 그의 유명한 연설 나에게 하나의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에 분명히 표현되었다. 이 연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새 힘을 불어넣었고, 그 비전이 제시하는 한 가지 초점에 마음을 모으게 했다. 그 이래로 자신의 비전을 표현하는 킹의 능력에 힘입어서 그가 본 비젼의 일부가 되려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배출되고 있다.

릭 워렌이 지은 새들백교회 이야기에서 그는 교회를 이끌어가는 몇 가지 유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모든 교회는 무엇인가에 의해 움직인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인도하는 힘과 조절하는 가정과 이끌어 가는 확신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전통에 따라 움직이는 교회, 인물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 재정에 따라 움직이는 교회, 프로그램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 건물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 행사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 구도자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교회가 있다. 여기에서 성경적 패러다임의 교회는 목적에 의해서 즉, 비젼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이다. 그래서 교인들에게 비젼을 심어주고 그 비젼에 의해 교인들이 움직일 때, 교회의 성장을 가져올 수 있다.

모든 교회가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왜 우리가 존재하는가?”이다. 의기소침한 교회를 생기 왕성한 교회로 바꾸는 데 교회의 목적을 다시금 발견하는 것보다 더 빠른 길은 결코 없다. 우리의 교회가 성장이 멎었거나 감소하거나 또는 단순히 사기가 꺾인 교회라면 목적을 재 규정하는 것, 교인들에게 분명한 비젼을 보여 주어야 한다.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무엇을 하기 원하시고, 하나님이 무엇을 하도록 나를 부르셨는가를 교인들에게 인식시켜 주어야 교회가 다시 활력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평범한 교인에게 왜 그들의 교회가 존재하는가를 묻는다면 아주 다양한 대답을 들을 수 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분명한 합의를 이루지 못한다. 릭 워렌은 그의 새들백교회 이야기에서 왜 교회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응답한 교인들 중 89%가 교회의 목적은 나와 나의 가족의 필요를 돌보아 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목사의 역할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을 기쁘게 해 주고 그들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애쓰는 것이다. 오직 11%교회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잃어버린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후에 같은 교회들의 목사들에게 왜 교회가 존재하는가를 물었다. 놀랍게도 결과는 정확히 반대로 나타났다. 응답한 목사들 중 90%는 교회의 목적은 세상을 구하는 것이라고 대답했고, 10%는 교인들의 필요를 돌보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우리가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갈등과 혼란과 침체 현상을 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목사들과 교인들이 교회의 존재 목적에 대해 일치하지 못한다면 다른 모든 것에 있어서도 갈등과 불협화음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교회를 움직이는 힘이 성경적이지 않는다면, 그러한 교회는 건강과 성장을 하나님은 원치 않으신다. 튼튼한 교회는 프로그램이나 사람들, 혹은 사람의 잔재주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교회의 성장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교인들에게 분명한 성서적 목적 즉 비젼을 심어 주어야 한다.

 

(2)건강한 교회의 기초(교인들의 마음 다지기)

 

기초에 따라 건물의 규모와 튼튼함이 결정된다. 기초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보다 더 크게 건물을 지을 수 없다. 부적당하거나 잘못된 기초 위에 세워진 교회는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바에 결코 다다를 수 없다. 만약 기초보다 더 커진다면 그것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건강하고 튼튼하고 성장하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기초를 놓는데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 이 일은 교인들이 마음 속에 왜 교회가 존재하며,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혀 줌으로써 이루어진다. 분명히 규정된 목적은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그것은 다섯 가지의 놀라운 유익을 가져다 준다.

1)분명한 목적은 사기를 북돋운다.

사기와 사명은 항상 함께 간다. 고린도전서 110절은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바울은 말한다. 교회에서의 화목의 열쇠는 목적을 중심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성경에 비전이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는 말씀이 있다. 많은 교회들은 비전이 없기 때문에 겨우 현상 유지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들은 계속 성취해 나가야 할 목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주일마다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목적과 사명이 없는 교회는 결국에 가서 과거의 유물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이 될 수밖에 없다.

존재 이유를 모르는 것보다 더 교회를 맥빠지게 하는 것은 없다. 반면에 침체되어 있거나 쇠퇴해 가는 교회를 재생시키는 가장 빠른 길은 그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다시 밝히고 그리스도가 교회에 주신 위대한 사명을 교인들에게 다시금 이해시키는 것이다.

2)분명한 목적은 좌절감을 줄인다.

분명한 목적 진술은 중요하지 않은 문제를 잊어버리게 함으로써 우리를 좌절감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하나님은 자신들의 목적을 굳게 지키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온전한 평화를 주신다. 분명한 목적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보여 줄 뿐 아니라 우리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보여준다. 효과적인 삶의 비결은 무엇이 진정 중요한 것인지를 알고 그것을 행하고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 것이다.

분명한 목적 진술이 없으면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온갖 산만한 일들 때문에 좌절하기 쉽다. 분명히 정의된 목적없이 교회를 이끌어 가려고 하는 것은 마치 안개 속에서 차를 운전하는 것과 같다.

교회가 목적을 잊어버리게 되면 무엇이 중요한가를 결정할 때, 어려움을 겪게 된다. 결정을 제대로 내리지 못하는 교회는 불안정한 교회다. 목적이 이끌어가는 교회는 한번 방향이 정해지면 결정을 내리는 일이 매우 쉬워지고 또 좌절감도 줄어든다.

3)분명한 목적은 집중력을 가져온다.

초점이 맞추어진 빛은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초점이 흩어진 빛은 아무 힘이 없다. 예를 들어 돋보기로 태양 빛의 초점을 맞추면 나뭇잎을 태울 수 있다. 그러나 같은 빛이라도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으면 태울 수 없다. 더 나아가 레이저 광선과 같이 훨씬 더 고밀도로 빛을 집중시키면 심지어는 강철도 자를 수 있다.

집중의 원리는 다른 영역에서도 통한다. 초점이 맞춰진 삶이나 교회는 그렇지 않은 삶이나 교회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분명한 목적은 우리의 노력을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바로 바울은 이 사실을 알았다. “나는 나의 모든 에너지를 이 한 가지에 쏟고자 합니다.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고대하는 것입니다”(3:13, Living Bible)라고 말했다.

이 시대의 교회들이 자주 부딪히는 흔한 유혹 중의 하나는 덜 중요한 것을 중요하게 취급하는 함정이다. 그들은 좋지만 덜 중요한 계획과 집회와 목적 때문에 집중력을 잃고 산만해진다. 교회의 에너지는 분산되어 사라져 버리며 힘을 잃고 만다.

4)분명한 목적은 협력을 가져온다.

사도 바울은 언제나 목적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그가 하는 일에 동참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빌립보 교회의 경우, 더욱 그랬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의 선교에 아주 매료되어서 그에게 재정적 지원을 계속했다

교인들이 교회에 대해 열심을 내고,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또 후하게 드리게 되기를 원한다면, 지도자는 교회가 지향하고 있는 바를 정확하고 생생하게 그들 앞에 설명해야 한다.

5)분명한 목적은 평가를 도와준다.

고린도후서 135절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말씀한다. 교회는 어떻게 자신을 평가하는가? 자신을 다른 교회와 비교해 봄으로써가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 일을 얼마나 잘하고 있는가?”라고 물어 봄으로써 평가해야 한다. 피터 드리커가 말했듯이 무엇이 우리의 사업인가? 그 사업이 어떻게 되고 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이것들은 우리의 교회를 평가하는데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질문이다.

 

(3)목적 규정하기

 

교회는 그리스도의 것이지 결코 우리의 것이 아니다. 주님은 교회를 창설하셨고, 교회를 위해 죽으셨고, 교회에 성령을 보내주셨으며, 언젠가는 교회로 다시 오실 것이다. 교회의 주인으로서 그분은 이미 목적을 세워 놓으셨고 그 목적은 결코 흥정될 수 없다.

우리의 의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가지셨던 계획들을 이해하고 그것들을 이행하는 것이다. 각 세대마다 프로그램들을 바뀌어야 하지만 목적은 결코 바뀔 수 없다. 우리는 사역의 방식을 개선할 수는 있지만 사역의 본질 자체는 결코 바꿀 수 없다.

효과적인 목적 진술은 성경적이어야 하며, 명확하고 분명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전수할 수 있어야 하며,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교회의 목적은 5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첫째,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라. 둘째,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셋째, 가서 제자를 삼으라. 넷째, 세례를 주라. 다섯째, 지키도록 하라.

모든 위대한 교회들은 목적을 규정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어떤 과정이나 체계를 나름대로 만들어 냈다. 교회의 목적을 규정하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것은 교역자가 추구하는 목표일 뿐 아니라, 교인들의 존재 이유인 것이다. 명확한 목적 진술은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에 방향, 활력, 범위, 그리고 추진력을 가져다 줄 것이다.

 

(4)목적 전달하기

 

교회의 목적을 규정했다면 그것을 모든 교인에게 계속해서 그리고 분명하게 인식시키고 전달해야 한다. 이 일은 한 번 하고 잊어버려도 좋은 것은 아니다. 이 일은 지도자가 가장 우선적인 책임이다.

비젼과 목적을 전달하는 방법으로는

성경-교회의 비젼의 각 부분이 어떤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성경구절을 제시함으로 가르쳐 보여 주어야 한다.

상징들-사람들은 종종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 그 개념을 시각적으로 보여 주는 것들을 필요로 한다. 상징들은 강한 열정과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에 강력한 의사 소통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구호들-사람들은 설교를 잊어버린 지 오랜 후에도 구호, 격언, 표어, 또는 짧은 경구 등은 기억한다.

이야기-예수님은 간단한 이야기를 사용하셔서 사람들에게 그분의 비젼을 이해시키셨다. 마태복음 1334절은 예수님은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 계속해서 예화를 사용하셨다. 그분은 최소한 한 가지 예화라도 사용함 없이 그들에게 말씀하신 적이 결코 없었다고 말한다.

교회의 목적을 전달하고자 할 때, 그것들을 개인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목적을 개인화하는 방법은 각각의 목적에 따르는 개개인의 특권과 책임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의 목적을 한 번의 설교를 통해 가르쳤다고 해서 교회의 방향이 영구히 잡히게 될 것이라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자꾸 반복하여 사용해야 한다. 강대상에서 설교를 통해서 이것이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라는 기회를 자주 가져야 한다. 방법을 약간씩 바꾸면서 반복적으로 전달해야 한다.

설교나 강의를 통해 교회의 목적을 전하는 것 외에 안내책자, 깃발, 교회 소식지, 주보, 비디오 테잎, 노래, 예배당 입구에 목적을 기록하고 성구를 새겨놓는 등을 통해 목적을 전달해야 한다.

 

(5)목적을 중심으로 조직하기

 

어떤 교회 갱신 운동도 지속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돌보고 뒷받침할 수 있는 조직이 있어야 한다. 목적을 규정하고,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목적을 중심으로 교회를 조직해야 한다.

어떤 교회는 교제는 잘 되고 있지만 전도가 약하다. 그런가 하면 다른 교회는 예배는 잘 되고 있지만 제자훈련이 잘 안되고 있다. 또 다른 교회는 전도는 잘하고 있지만 봉사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교회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이 자신 있는 부분은 강조하고 자신 없는 부분은 소홀히 여기기 때문이다. 교회의 건강과 성장에 오직 하나의 열쇠가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한 가지를 하라고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 여러 가지를 하라고 부르심 받은 것이다. 그렇기에 균형이 중요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이 생생하게 묘사했듯이, 그리스도의 몸은 많은 지체를 가졌다. 단지 손이나 입이나 눈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몸은 각 부분과 기관들이 함께 일하도록 되어 있다. 사실상 우리의 몸은 여러 다른 조직들, 즉 호흡 계통, 순환 계통, 신경 계통, 소화 계통, 골조 계통 등등 많은 조직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모든 조직들이 균형을 이룰 때에만 우리는 건강하다고 말 할 수 있다. 바로 불균형은 병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도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교회는 크게 다섯 가지 유형이 있다.

영혼 구원형 교회-만일 목사가 그의 우선적 역할을 전도자로 생각한다면 그 교회는 영혼 구원을 강조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이 교회의 주요 목표는 영혼을 구하는 것이므로 언제나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간다. 이 교회에서 자주 듣게 되는 용어들은 증거, 전도, 구원, 그리스도를 위한 결단, 세례, 심방, 결단에의 촉구, 전도 집회 등이다. 영혼 구원형 교회에서는 전도 이외의 것은 무엇이든지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하나님 체험형 교회-만일 목사의 열정과 은사가 예배에 있다면 그는 본능적으로 교회를 하나님을 체험하는 교회로 이끌어 갈 것이다. 이 교회의 초점은 예배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체험하는 데에 맞춰져 있다. 이 교회에서 주로 쓰이는 용어들은 찬양, 기도, 예배, 음악, 영적 은사, , 능력, 부흥 등과 같은 것이다. 이 유형의 교회에서는 예배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된다.

가족 재회형 교회-교제에 가장 중점을 두는 교회이다. 이 교회는 관계 중심적이고, 사람들을 사랑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교인을 돌보는 일에 사용하는 목사가 이끌어 가는 교회이다. 이 교회의 주요 용어들은 사랑, 소속감, 교제, 돌봄, 관계, 다과회, 소그룹, 즐거움 등이다. 이 가족 재회형의 교회에서는 모이는 것이 다른 어떤 목표보다도 중요하다.

교실형 교회-교실형 교회는 목사가 자신의 우선적인 역할을 교사라고 생각하는 교회다. 그는 설교와 강의를 강조하고 교회의 다른 일들을 덜 강조하게 될 것이다. 목사는 뛰어난 강사의 역할을 하고 교인들은 교회에 올 때 공책을 가지고 와서 필기를 하고 집에 돌아간다.

사회 참여형 교회-사회 참여형 교회의 목사는 자신의 역할을 선지자나 개혁가로 본다. 이 유형의 교회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에 나선다. 이 교회는 말씀을 행하는 자인 활동가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유형에 속하는 교회에는 자유주의적인 교회도 있고 보수주의적인 교회도 있다. 자유주의적인 교회는 우리 사회의 불의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보수주의적인 교회는 우리 사회의 도덕적 타락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교회는 교회가 정치적인 과정에서 주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다섯 가지의 교회 유형들에서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은 각각의 교회의 교인들은 대개 자신들의 교회가 가장 영적인 교회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관심과 은사에 맞는 유형의 교회에 끌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이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들을 강조하는 교회의 일원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의 강조점들은 모두 다 교회의 중요한 목적들이며,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이들 사이에 균형이 있어야 한다.

교회를 이 다섯 가지 목적을 중심으로 조직하고 사람들을 그 각각의 목적에 대한 헌신에 따라 분류함으로써 균형있는 사역과 건강한 교회를 이루는 일을 제대로 해 나갈 수 있다.

 

2.제자훈련

 

(1)제자훈련의 목적

 

제자훈련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본받는 신자의 자아상을 확립하는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제자는 예수의 제자이다. 바울의 제자도 아니며 담임목사의 제자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훈련의 주제이며 표준이며 목표이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각자의 왕, 주인으로 모시고 그를 따르며 배우며 순종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인격적인 면과 사역적인 면이 다 포함된다.

먼저 예수의 제자는 그 인격이 예수님을 닮아 가야한다. 제자훈련이라는 것은 지도하는 교역자나 훈련을 받는 평신도가 다같이 동참하는 일종의 영적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에 사역적인 면에서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고, 그 일을 위해 자기 삶을 철저하게 진리의 증거자, 사랑의 종으로 헌신하셨다. 그러므로 제자훈련을 한다는 것은 평신도를 예수의 증인으로 만들어 세상으로 내 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비젼을 자기의 것으로 채택하여 그의 말과 행위를 통해 복음을 증거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전 생활이 바로 이 비젼으로 인해 새로운 존재 가치를 가진다. 그의 직업이 무엇이든 간에, 그가 사는 환경이 어디이든 간에 그가 존재하는 그 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천국이 임하게 하는 사람이 곧 예수의 제자다.

 

(2)제자훈련의 동기부여

 

제자훈련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사람들을 한 무리로 불러모으는 첫 단계는 동기부여이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 방향 즉, 내적으로 외적으로 동기가 불러 일으켜져야 한다. 내적으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갖도록 동기가 부여되어야 하고, 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도록 동기부여가 되어야 한다.

제자훈련은 영적인 거장들을 위한 것이므로 우리들은 그와 같은 훈련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 또한 훈련은 자신들의 시간을 기도와 묵상에 전적으로 바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므로 우리들은 그와 같은 훈련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하는 생각도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모두에게 영적 삶의 훈련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 자녀들을 돌보는 사람, 그릇을 씻는 사람, 잔디를 깎는 사람 등등 보통 사람에게 말이다. 사실에 있어서 훈련은 우리들의 하루하루의 일상적인 활동 속에서 가장 잘 이루어진다.

우리는 영적 훈련을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을 빼앗아 가는 어떤 침울한 고역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기쁨이 모든 훈련의 기조(基調)이다. 훈련의 목적은 이기주의와 공포의 노예로부터 자유 함을 얻는데 있다.

 

(3)대상의 선택

 

제자훈련을 누구부터 시작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먼저 교역자 자신이 시작하여야 한다. 담임교역자가 제자훈련을 하는 공동체의 분위기에 자신이 먼저 얼마동안 젖어 보아야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할 수 있다. 지도자가 먼저 제자가 되지 아니하면 다른 사람을 제자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다음 제자훈련을 받을 대상을 선택해야 하는데,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한 원리를 따르면 된다고 본다. 예수님은 배우기를 원하는 자들, 그리고 메시야와 그의 왕국을 기다리는 소박한 믿음의 사람들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손에 쓰임 받기를 원하였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을 선택하셔서 훈련을 시키셨다.

실질적으로 대상을 선택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개척교회의 경우와 기성교회의 두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먼저 개척교회의 경우는 선택을 고려할 만한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 대부분의 실정이다. 몇 사람 안 되는 적은 수의 개척 멤버가 고작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출석하는 성인 교인을 다 훈련의 대상으로 놓고 계획을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음으로 기성교회의 경우를 보면 담임교역자가 제자훈련을 시작하려고 하면 그 교회의 규모가 어떠하든 간에 개척교회보다 훨씬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님처럼 장시간의 기도 가운데서 심사숙고 할 필요가 있다. 교역자가 사전에 설득과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교회의 공감을 얻어야 한다. 또 기존의 성도들부터 훈련을 시켜야 하는데 당회를 가진 조직교회라면 장로들을 우선적으로 제자훈련에 참여 시켜야 바람직하다. 나이의 고하나 은사의 유무를 따지지 말고 장로를 제일 먼저 훈련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나중에 그가 나이가 너무 많아서 혹은 남을 영적으로 지도할 만한 은사가 없어서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장로가 제자훈련을 먼저 받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4) 기본적인 훈련 내용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사용한 기본적인 훈련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 자신과 제자들의 경험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체적인 교육 내용이 되었다. 예수님 자신은 살아계신 진리의 실체로서 제자들을 따르게 하는 모범이 되었다. 경험은 제자들이 그 배운 바를 실제적으로 적용하게 하는 실습이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세 가지 훈련 내용은 인격적인 진리요, 인격적인 모범이요, 인격적인 경험이었다는 데서 당시 유대교 랍비들이 방안에서 죽은 지식으로만 가르치던 율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데가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시던 훈련 내용이었다. 그가 가르치신 하나님의 말씀은 두 가지 소스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말씀 그 자체이신 자기 자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기록된 구약성경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성경이야말로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를 가르치는 교과서였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우선적으로 해 주신 일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가르쳐 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교회엣 제자훈련을 담당한 지도자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자기 마음에 풍성히 거할 수 있게 말씀을 준비하여야 한다.

그리고 제2의 훈련내용은 모범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리를 이론적으로만 던져 주는 선생이 아니었다. 그는 가르치는 대로 사셨다. 그 자신이 완전한 모범이며 실물교육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궁극적으로 배워야 했던 것은 그들의 선생 자신이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능력이 있었던 것은 그의 교훈이 그의 생활과 일치하는데 큰 원인이 있었다.

3의 훈련내용은 경험이다. 예수님에게는 또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훈련 내용이 있었다. 그것은 제자들이 스스로 보고 느끼면서 배울 수 있는 경험이었다. 경험적인 지식은 생활현장을 가까이 접하고 직접 보고 귀를 기울이는 데서 얻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현실을 잘 알고 그 속에서 고생하는 인생을 바로 이해하기를 원하셨다. 그가 여러 가지 비유를 가지고 무리들에게 설교하신 다음 그것을 제자들에게 풀어 주셨는데 그 비유의 소재들이 흔히 보는 일상생활에서 많이 나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제자들이 지혜로운 눈을 가지고 자세히 살피면 진리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삶의 현장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자훈련이 중반기에 접어들면 우리는 가능한 한 실습을 자주 강조하는 것이 좋다. 훈련의 내용 가운데서 어느 것도 현장의 적용이 필요 없는 것이 없다. 전도, 기도생활, 봉사 등 모든 것이 세상 속에서 다시 해석되고 재 음미 되어야만 산 진리가 될 수 있다. 세상과 격리된 제자훈련, 그것은 예수님이 보여 주신 훈련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5)훈련방법

 

우리가 제자훈련을 시키려면 소그룹이라는 교육형식을 빌리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예수님은 이 점에 대해 선구자적인 위치에 계신다. 그분은 제자들과 보낸 3년 동안의 경험과 결과를 가지고 소그룹의 성격과 기능에 대해 웅변적으로 증명하고 계신다. 왜 그분이 소그룹을 선택하셨는지 직접 설명하고 계시지는 않는다. 교회가 제자를 만들 때 반드시 12명 이내의 모임을 가지고 해야 한다는 명령을 하신 일도 없다. 그러므로 소그룹이라는 것이 제자훈련의 절대요소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전례를 따라 수 많은 작은 모임들로 구성된 독특한 성격의 공동체르 이루어 가고 있었다.

그들이 다함께 성전에 자주 모이기도 하였지만 실제적인 성도의 교제와 새 생명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던 곳은 가정에서 모이는 소수의 그룹에서였다.(사도행전 2:42, 46) 고린도 교회도 오늘과 같은 한 빌딩 교회가 아니었다. 20-30개의 가정교회로 구성된 공동체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폴 해어(Paul Hare)의 조사에 의하면 1899-1958년 사이를 예를 들어도 소그룹에 관한 학술적 연구 논문이 매년 수 백 종씩 쏟아져 나오는 실정이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소그룹 형식이 생산성에 큰 효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실험실 그룹(The Test Tube Group)이라는 연구팀을 장려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단순히 생산성만 높이는데 유용한 것이 아니라 인간 관계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주며 결과적으로 개인의 인격에 변화를 일으켜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가지는 기능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초대교회의 체질로 다시 돌아가지 아니하면 안 된다. 제자훈련은 평신도 지도자를 생산하는 일만 아니라 교회체질을 인간의 상호관계에다 강조점을 두는 유기적인 성격으로 다시 바꾸어 놓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에 소그룹은 방법론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소그룹의 형식을 빼놓고는 우리가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한다 할지라도 그 만큼 신속하게 교회가 지닌 본래의 기능을 회복하기 어렵다. 소그룹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칠 환경을 만들어 주는 성경적인 왕도이다.

제자훈련은 성경을 중심으로 모두가 둘러앉아 말씀의 거울에다 각자의 마음을 반사시키는 데서 일어나는 영적 변화를 기대하고 있다. 제자훈련은 인간 상호관계를 통해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목적에 가장 알맞는 환경이 소그룹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과 경험을 서로 공유할 수 있는 분위기와 귀납법적인 성경교재를 가지고 제자반을 인도하려면 지도자는 적절한 질문을 사용할 줄 아는 능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 지도자가 적절하게 던지는 질문은 수련생들을 함께 연구하는 자리로 끌어들이는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가 된다.

성경을 공부하는데 질문을 사용하는 것은 새로운 기술이 아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백 개 이상의 질문을 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예수님은 질문에 답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질문하러 오셨다고 했다. 예수님은 자신이 원하는 답에 대한 암시를 주시되 질문을 받은 자가 스스로 결론을 끌어내도록 하기 위해 유도질문을 종종 사용하셨다.

제자반에서 질문은 확실히 수련생들의 이해와 지식과 학습성과 등을 평가하는데 유용하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진리에 접근하게 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진지하게 기다리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적절한 질문 하나로 인해 그들이 모두 다 긴장하게 되고 집중하게 되는 효과를 가져다준다.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부담없이 대화에 동참하는 분위기를 형성시켜 준다.

제자반에서 사용할 수 있는 질문에는 네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성경본문의 내용을 묻는 질문이다. 이 질문의 대답은 항상 선택된 본문 가운데 들어 있어야 한다. 둘째는 본문의 의미를 묻는 질문으로서 해석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다. 각자가 깨달은 바를 대답하든지 다른 성경에서 찾아 대답할 수 있다. 셋째는 적용을 목적으로 하는 질문이다. 적용은 성경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넷째는 토의를 하는 가운데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물어보는 즉흥적인 질문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질문이 어떤 유형의 것이든지 그것이 좋은 질문이 되려면 그 의미가 명료해야 하고 상호 연관성이 있어야 하고 토의에 자극을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지도자는 수련생들에게 주간에 할 숙제를 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신구약 성경을 체계적으로 통독하게 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전도에 인용할 수 있는 성경구절을 암기하도록 훈련하는 것은 영적 무장에 큰 힘이 된다. 필요에 따라 그 날에 다룬 성경 내용과 관계된 간증문을 써 오게 해서 읽도록 하면 각자의 영적 변화를 정확하게 점검할 수 있다.

주기적으로 전도실습이나 다락방 순장 실습을 시키는 것은 그들의 수준을 더 빨리 성장시켜 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한 주에 한 두 번씩 자신이 가장 은혜 받은 본문을 가지고 경건의 노트를 만들게 해서 개인적으로 평가받게 하는 것도 영적 성장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제자반의 끝맺음은 15분 정도의 시간적 여유를 두고 공부를 마무리 짓는 것이 좋다. 말씀을 공부한 다음에는 진지한 기도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기도 시간이야말로 성령께서 말씀의 양털 뭉치를 이슬로 가득히 적셔주는 기회다. 배운 진리를 삶의 능력으로 바꾸는 일이나 변화의 열매를 가져오게 하는 일은 전적으로 성령께 달려 있다.

 

 

 

.결론

 

지금까지 교회성장에 있어서 평신도의 이해와 교회성장의 이해 그리고 교회성장과 평신도의 상관성에 대해서 또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 평신도를 어떻게 훈련을 시킬 것인가에 대해서 논해왔다.

역사적으로 평신도에 대한 이해가 다르게 변천해 왔다. 초대교회 시대에서는 평신도와 성직자 사이에 별다른 큰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중세시대에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현저하게 나타나 상하구분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종교개혁으로 어느 정도 상하구분을 없애고 동등권을 강조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평신도의 역할이 많이 활발해졌지만 아직도 중세 교회처럼 우리의 현 교회에서 목회자 중심의 교회가 많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현 교회들이 평신도에 대한 바른 이해가 새롭게 정립되어야 하며, 교회의 바른 성장을 위해서는 목회자 중심에서 평신도를 중심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본인의 입장을 탈피하여 세상과 교회를 오가는 평신도를 중심으로 평신도 신학정립이 필요하다. 또 목회자들은 평신도들이 함께 사역하는 Team Work사역이 이루어져야 한다. 예수님의 최후명령인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은 목회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평신도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다. 그래서 평신도를 훈련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목회의 비젼도 목회자 혼자만 가지고 교회를 이끌어 가는 것보다 모든 평신도들에게 목회 비젼을 함께 나눔으로 그 비젼을 향해 자발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비젼에 대한 제시를 해야 한다. 그래서 목회자가 이끌어가는 교회가 아니라, 비젼이 이끌어가는 교회가 되어지고, 모든 성도들이 그 비젼을 향해 나아갈 때 교회의 올바른 성장을 가져올 수 있다. 교회의 비젼을 제시해 주지 못하면 성도들은 방향을 잡지 못하여 방황을 하게 된다. 그래서 똑같은 비젼을 가지고 함께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내적성장과 외적성장을 함께 병행할 수 있는 길은 제자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1세기의 짧은 역사 속에서 한국교회를 급성장시켜 주셨다. 양적인 성장을 질적인 면과 함께 올바른 성장이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평신도에 대한 관심과 함께 어떻게 그들을 훈련시켜 나가느냐함에 있다.

여기에서 제자훈련을 시키는데는 이론적인 습득만으로는 되지 않고 전인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과 모범과 경험을 통한 훈련이어야 하며, 인격적인 면과 사역적인 모두를 겸한 훈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모든 교회가 평신도의 기능과 역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평신도를 중심한 목회사역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본 연구를 끝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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