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자상은?
성경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지도하는 자들도 목자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들의 성실한 목양을 촉구하고 있다(겔 34 : 1-10. 렘 23 : 1-4, 슥 13 : 7-9).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목자”라고 부르시며(요 10장), 양들과의 친밀한 인격관계를 가지고 그들을 인도하며, 지키며, 보호하고, 양육하며, 양들을 풍성한 삶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생명을 내놓고 희생하는 목자상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예수님은 또한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목자없는 양무리에 비유하며 (마 9 : 36), 자신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고통하는 목자로 비유한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를 만나 “내 양을 먹이라”고 부탁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탁을 실천하며 자기 동료 장로들에게 똑같은 권면의 말을 한다. :
너희 중에 있는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 5:2-4).
이러한 목자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몇 가지 중요한 목사의 의미를 전달해 준다.
1) 성경의 목자의 이미지는 율법과 복음의 조화를 보여준다.
히브리서 기자는 독자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축복기도에서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의 복을 기원하고 있다. 히브리 기자는 큰 목자이신 주 예수님이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제물이 되셨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는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실 뿐 아니라 친히 속죄양이 되셔서 인간의 죄를 씻으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목자로서 양을 인도하며 훈련하는 분으로 구약의 언약과 율법을 대표할 뿐 아니라 양으로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신약의 복음을 대표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구약의 언약과 신약의 복음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을 본다. 뚜르나이젠은 「목회신학」에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구체적인 목회의 실천은 율법과 복음, 그리고 칭의와 성화를 진정성있게 조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1962, 255). 우리에게 성결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와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목자시요 동시에 희생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며,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준엄한 십자가의 심판을 받으며 동시에 십자가의 피로 씻음과 용납과 구원을 받는다. 그러므로 목사는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용서를 보여주며, 성도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통한 책망과 심판을 경험할 뿐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경험하게 하는 자이다. 그리고 목사는 성도들의 삶 가운데서 끊임없이 참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책망과 훈련, 인도와 보호를 받을 뿐 아니라 속죄양이신 예수의 피로 씻기며 구원받는 삶을 살게 인도한다.
2) 목자의 이미지는 지도자의 권위와 희생적 섬김을 조화시킨다.
목자는 권위를 가지고 양들을 인도하고 양육하며, 훈련하고 보호한다. 양들이 제길로 가지 않을 때 목자는 합당한 권위를 가지고 그 양을 훈련하며 바른 길로 인도한다. 목자는 지도자로서 훈련하고, 지도하고, 감독하지 않으면 안된다. 분명한 권위를 가지고 양들을 지도하지 않는 목자 때문에 “양의 무리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 마다 유리되었고 ···· 양의 무리가 온 지면에 흩어”(겔 34:6)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겔 34:5)되고 있다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준엄하게 책망한다. 목사는 양들을 돌보고, 훈련하고, 지도하고 감독하라고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위임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다.
그러나 목자의 권위는 강압적이요 정치적인 권위는 아니다. 양들의 처지를 공감함이 없는 외적이요 조작적이요 강제적인 권위는 목자의 권위와는 거리가 멀다. 목자의 권위는 상호관계에 근거한 권위요 지도력이다. 목자의 권위는 양들과 인격적 친밀관계에 근거하여 양들의 필요와 상황과 아픔과 감정을 공감적으로 이해하고, 그들의 삶에 참여하여 양들과 함께 생활하며, 양들에게 최선의 돌봄을 줌으로서 얻는 관계적 권위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워 인간의 몸으로 성육신하여 인간들과 함께 사시면서 인간들을 공감적으로 이해하며, 그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섬김의 지도력이요, 종의 권위이다.
목사는 섬기는 지도자로 부름을 받았으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십자가의 섬김을 위해 위임받은 자이다. 그러므로 목자의 주제는 하나님께 부름받고 교회로부터 위임받은 양의 목자로서의 권위와 지도력을 가지면서, 양들을 공감적으로 이해하고, 양들에게 더욱 풍성한 삶을 주기 위하여 양들과 함께 살면서 양들을 돌보며, 양들의 최선을 위해서 죽기까지 섬기는 희생적 섬김으로 봉사하는 목사직의 양극을 조화시킨다.
(3) 목사의 뜻
교회는 교회의 덕을 세우고 교회를 바로 인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목사의 직을 임명하시고 세우셨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목사의 목회를 통하여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 자신의 교역을 계속 실천해 나가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은 목사가 교회 안에서 교회와 함께 세상을 향한 교역을 실천해 나가는 동안에 거기에 친히 임재하여 목사의 목회를 지탱하시고 하나님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나가신다.(Oden, 1987, 115) 토마스 오덴은 목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
목사는 하나님과 교회에 의하여 부름을 받고 안수를 받아 교회를
대표하여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전을 집례하고, 하나님의 자기 계시
에 완전히 응답하도록 기독교 공동체를 인도하고 양육하기 위하여
구별된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이다. (Oden, 1987, 116 : 비교,
Calvin Inst. 3. 20, 4. 3, 4. 9)
목사는 구약의 제사장의 측면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역할을 담당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제사장이요 동시에 속죄양이 되어서 단번에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구약적인 희생제사는 필요없다(Calvin Inst. 4. 14), 그러므로 목사가 예배를 인도하고 성례전을 집례하더라도 이것은 제사장으로서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다. 목사는 희생제물이 되셔서 우리 죄를 위한 제사를 단번에 드리므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전을 집례하므로 오늘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확장해 간다.
목사는 안수를 받지 아니한 일반 교역자 (minister)들과 구별된다.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어 각기 기능을 부여받고 각기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교회와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는 교역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도 교역자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일반 교역자들과 안수 받은 교역자, 즉 목사와의 차이는 목사가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하나님의 교역자로 세우는 지도력에 있다. 목사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완전히 응답하도록 기독교 공동체를 인도하고 양육하라’고 부름받고 구별받은 자이다. 일반 교역자는 목사의 지도와 양육과 훈련을 바르게 받아 하나님의 교역을 수행하는 자요 목사는 일반 교역자를 교육하고 훈련하며, 양육하고 지도 감독하여 하나님의 교역자로 세우는 자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두 가지 위험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그 하나는 현대의 타협주의요 다른 하나는 과거에 많이 나타났던 고립주의이다. 타협주의는 목회의 본질을 인간의 사회적 기능이나 철학적 통찰력, 또는 도덕적 교훈이나 심리적 상담, 또는 정치적인 운 동등으로 생각하여 여기에 빠지는 것이다. 이러한 타협주의는 목사직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위탁에 근거하며, 성령의 인도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며, 계시에 뿌리를 두고 단단히 서야 하는 특수성을 간과한다. 특히 목사직은 사도적 신앙에 충실해야 하는 책임성을 져야 한다. 그러나 타협주의는 육신을 입어 우리 가운데 오신 인간 예수는 보면서도 그가 곧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보지 못한다.
목사는 시대를 대변하는 철학과 사회과학 등의 문화를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근원적으로 목사는 기독교회의 역사적 정체성과 전통에 굳게 서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역사의 현장 속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들을 분별하여야 하며, 세상을 이기게 하며 구원의 능력이 되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를 통하여 이 땅에 소개되고 전달된다. 소리는 말씀을 전달하는 소리이어야 한다. 그 소리가 철학이나 심리학이나 정치운동의 소리일 때 목사는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
고립주의는 타협주의와 반대의 위험을 안고 있다. 고립주의는 목회의 신적인 유래와 영원한 목적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목회의 인간적인 측면을 잃어버리고, 목사를 특권적인 계급이나 또는 배타적인 성직제로 만들려는 유혹이다. 고립주의는 섬김을 위해 부름을 받은 목사들에게 군림하여 지배하고픈 시험을 받게 만든다. 즉 고립주의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르시고 세우셨으며, 목사의 목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신비가 이 땅에 들어오며,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나타남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때문에 목사가 마치 신비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므로 목사는 타협주의에 빠질 때 섬김과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이 땅에 들어 왔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자기에게 신적인 권위와 위엄을 부과하려고 한다. 목사는 언제든지 이러한 고립주의의 위험을 알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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