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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목회자(가나다순)

목사여!설교할 때, 그대는 청중이 손에 잡히는가?

by 【고동엽】 2022. 2. 15.

목사여!

설교할 때, 그대는 청중이 손에 잡히는가?

 

나는 매 주일 오후에 거의 다른 교회로 단회 설교를 나간다. 그리고 주일 오후나 월요일부터는 매주 부흥성회로 전국을 떠돈다. 자기 강단이 아닌 다른 강단에 설 때마다 아주 묘한 영적 분위기와 영적 전쟁의 실상을 본다. 그리고 그 속에서의 나의 설교의 성공 여부를 점검해 본다.

50세가 넘은 이 나이에 나 스스로 냉정히 평가해 볼 때에, 나는 설교를 못하는 사람은 분명 아니다. 부흥성회에서 하는 설교 시간이 보통 1시간 반에서 2시간인데, 청중의 집중도가 거의 95% 이상이다. 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 설교 시간에 졸거나 딴전 부리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나는 설교 시간 내내 거의 원고를 보지 않는다. 전체 청중을 손에 꽉 쥐고 설교한다.

내게는 지난 20여년 동안에 직접 만들어 온 200여 항목의 주제설교와 100여 주제의 부흥성회 설교, 그리고 진정 나의 보물처럼 여기는 성령부흥성회 등 설교 수천 편이 있는데, 남에게 공개하지 못한다. 정말 수 많은 목회 자료들을 아낌없이 나누는 내가, 이 나의 설교들이 귀해서 나누지 않으려 함이 아니다. 이유는 단 하나, 지나 온 20여 년의 세월 속에서 나의 허물과 삶이 그 속에 다 녹아 있어 부끄럽고 차마 공개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나를 정말 사랑하고 이해해 주는 분들에게는 기꺼이 이 설교들을 전송해 줄 마음이 있다. 단 이 설교들을 유포하지 않으며, 혹시라도 그 속에 나오는 나의 개인적인 허물들을 문제 삼지 않으신다는 약속을 한다면...

목사로서 나는 스스로의 자기 중심적인 여러 착각에서 벗어 나려고 몸부림친다. 자기 나름대로의 시각이 고정되어, 편협한 목사가 되지 않으려 함이다.

목사는 정말 열려 있어야 한다. 다른 목사의 설교는 잘 평가하면서, 자기 설교는 바로 평가하지 못한다. 그런데 듣는 성도들은 죽을 맛이다. 절대 잘 하는 설교가 아니다.

 

1.잘 하는 설교란 뭐니 뭐니 해도 청중이 빨려 들어야 한다.

청중에게 설교가 그냥 저절로 들려져야 한다. 애써 듣는 설교가 있고, 그냥 들려지는 설교가 있다. 집중도가 높아야 한다는 말이다. 청중이 손에 꽉 잡혀야 한다. 물론 모든 목사가 다 설교를 잘 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설교하고 나면 바로 점수를 매긴다. 98점, 95점, 90점, 85점, 80점, 그리고 정말 힘든 설교를 하고 나면 내 속에서, “오늘은 70점이다, 내리 죽 쑤었다. 아아! 주님. 절망스럽습니다. 내게 주신 또 한번의 유일한 기회를 놓쳤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탄식한다. 이럴 때에는 정말 내 심령이 괴롭다.

 

위대한 목사 스펄전이 한번은 설교를 내리 죽을 쑤었다. 하도 하도 영혼이 참담하여, 주님 앞에 그 설교를 두고 간절히 간절히 기도했다. “아버지! 나는 죽을 쑤었으나, 그 말씀이 땅에 떨어지지 말고, 성도들의 영혼에 새록 새록 돋아 나서, 저들 영혼에 결실하게 하옵소서.”

다음 주에는 설교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대박을 쳤다. 너무나 흡족하여, “주님! 오늘은 정말 잘 했습니다. 제 영혼이 흡족합니다.”

그는 두 설교의 영향력을 비교해 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설문조사를 해 보았더니,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첫 번째 설교에서 훨씬 더 많은 영혼의 결실을 보았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설교 준비와 설교 시행 과정, 설교 후에 설교자가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하고도, 분명하게 알려 준다. 그것은 설교자가 오직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령님이 덮으신 설교를 하라는 것이다. 오직 기도로 성령님의 임재를 설교의 전후에 두르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결실과 열매를 가져 온다.

 

2.설교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

설교자로서 나는, 오늘날 설교처럼 구닥다리 전달 매체가 또 있을까 탄식할 때가 많다. 오늘날은 첨예한 감성의 시대이며, 첨단 영상 매체가 사로잡고 있는 시대이기에, 사람들은 재미가 없으면 더 이상 설교를 듣지 않는다. 설교 시작한지 1분 내에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다.

재미도 여러 가지이다. 막 웃기고 까부는 재미가 아니라, 진지하고 들을 만한 내용이 많아서 재미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설교는 첫째 재미, 둘째 눈물과 그로 인한 감동이 있어야 한다. 한 편의 설교에 정말 기탄없이 웃을 일과 울 일이 몇 번은 반복되어야 한다. 정 웃길 수 없으면 유머라도 일부러 해서 웃겨라. 그리고 울릴 내용도 반드시 하나만 넣으라.

설교자의 가장 큰 맹점은 정말 설교가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너무 딱딱하다. 너무 교과서적이다. 너무 윤리 도덕적이며, 목사적이고, 신앙적이라는 것이다. 너무 뻔히 아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청중을 무시하고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너무 원고를 내리 읽고 있다는 것이다. 원고가 설교가 분명히 아닐진데, 오늘날 설교자들은 교인들이 무서워(?, 특히 장로들이 시비 거니까!) 원고 없이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러니 영감이 살아 나지를 않는다. 그러나 사실은 교인들이(장로들이...) 목사 설교에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라, 목사 당신 자신을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한 유명한 부흥강사가 자기 교회에 부흥회를 하면서 강사를 초청했는데, 그 강사가 원고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설교를 내리 죽을 쑤길래, 살짝 설교 노트를 감추어 버렸다.

상상해 보라. 강사의 안절부절 하는 모습이 눈에 역력했다. 모른 척 하고, 내버려 두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강사가 간절히 기도하고, 원고 없이 설교하니, 점점 설교가 살아나, 나중에는 은혜가 온 교회를 덮었다는 이야기이다.

 

설교 원고 이야기를 하니, 또 괜히 개탄스러운 일이 있다.

어떤 목사는 정말 원고가 없다. 그런데 원고가 없는 게 아니라, 아예 설교 준비가 없다. 단에 서서 말도 안되는 사설만 잔뜩 늘어 놓는다. 사람 미치고 환장할 일이다. 목사 한 개인의 쓸 데 없는 잔소리 들으려고, 성도들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아닌데 말이다. 소명 받은 한 사람의 목사로서, 어찌 하나님의 존귀한 성도들에게 그렇게 대할 수가 있는가?

 

내 나름대로의 설교 원칙은 이렇다.

설교 준비를 철저히 한다. 원고의 분량을 가능한 한 많이 많이 만든다. 설교를 5시간 해도 다 못할 정도로 많이 많이 만든다. 그리고 설교 전후에 기도를 심고, 또 심는다. 기도가 문장, 문장 속에 녹아 들어 있도록 한다. 그리고 설교 문장을 외우지 말고(어차피 머리도 나쁘고 안 외워지니까), 기도하며 설교 원고를 읽고, 또 읽으며, 교정한다.

나의 설교 원고는 거의 기도문이다. 나는 설교 원고를 읽어 가며, 계속 방언으로 기도한다. 그리고 원고를 수 차례 교정한다. 여기까지가 설교 준비이다.

그 다음 단에 설 때에는 원고를 가지고 올라 가던, 안 가져 가던 중요한 게 아니다. 이제는 성령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서는 것이다. 원고는 없어도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전에 설교 준비 안하고, 생각 나는 대로 막 말하는, 준비 없는 악한 종은 정말 주님 앞에 두들겨 맞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기도 많이 하고, 그렇게 설교 준비한 후에, 단에 서야 한다. 설교를 못하는 사람이라도 좋다. 그 때부터 성령 하나님이 말씀을 입에 담아 주시기 시작한다. 마치 물이 흐르듯, 말씀이 줄줄 나온다. 성령의 레마의 원음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 말씀 앞에 성도의 영혼이 거꾸러지는 것이다.

성도가 설교를 들을 때 그냥 동의하는 수준은 안된다. 정말 지식적 내용이 많다는 수준은 안된다. 참 은혜 된다는 수준은 안된다. 설교를 듣고 어쩔 줄 몰라야 한다. 울고 불고 웃어야 한다. 통탄과 결단이 쏟아지고 터져 나와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설교 시간이 즐거워야 한다. 우리 목사님의 설교는 꼭 들어야 한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머리에 박혀야 한다. 이런 설교는 그냥 잘 하는 설교자가 하는 설교가 아니다. 진정으로 설교하는 자 만이 이렇게 설교할 수 있다. 설교에는 말씀 내용과 기도, 성령 역사 3박자가 반드시 조화롭게 어우러져야 한다.

 

나 개인의 판단으로는 나이 50세가 넘어서도 원고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목사는 정말 문제라고 생각한다. 원고에 매여 있는 한, 말의 역동력은 살아 날 수가 없다. 설교는 글을 읽는 게 아니다. 말하는 것이다. 설교 언어는 문장체가 아니라, 구어체이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수려한 문장체가 자연스러운 구어체로 나오는 것이다.

진정 원고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씌어진 글에 매여 설교하는 목사의 설교는 어쩌면 사람 당신이 설교하는, 그야말로 사람의 소리인지 모른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의미 없는 인간의 소리인지 모른다. 성령으로 설교하는 사람이 아닌지 모른다. 원고 만에서는 결코 레마의 성령의 원음이 터져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의 폭탄같이 터져 나오는 원음이 설교 속에 녹아 있지 않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설교자의 자격이 없다.

더우기 자격이 없는 목사는 설교 준비를 아예 안하고, 무슨 영감이니 어쩌니 하면서 단에서 그냥 내리 갈기고 떠드는 목사들이다. 그건 목사도 아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사자인 목사에게만 부여된 특권이다.

 

3.설교 내용이 복음이어야 한다. 예수 설교, 성령 설교여야 한다.

오늘날 목사들의 대부분의 설교는 사실상 설교가 아니다. 복음이 없고, 예수가 없고, 성령이 없고, 하나님이 없다. 온통 상황적인 인생론, 철학 사상, 잡다한 생활 이야기, 인격 수련 지침, 윤리 도덕 강의, 처세론, 정치 사회 문화 분석, 책을 줒어 모은 이야기, 각종 난무하는 목회 프로그램 이야기, 심리적 엉터리 이론... 들이다. 현장과 삶은 없고, 오로지 설교 준비하기 위하여 하는 설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토록 횡행하는 각종 목회 이론들, 세미나들, 프로그램, 목회 방법론에 매달리지 말라. 본질을 추구하라. 깊은 말씀 묵상과 설교 준비, 나 만의 골방에서의 오랜 기도의 삶, 성령 동행, 한 영혼 사랑... 등등 목회의 본질적인 것들에 목숨을 걸고 승부하라.

나는 지난 날 종말론, 전도, 내적치유, 셀목회, 뜨레스디아스, 제자훈련... 등등에 나의 목회를 접목시켜 보았었다. 다 나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10여년 전부터 오직 “기도와 성령” 여기에 내 목회의 초점을 맞추었다. 내가 맞춘 것이 아니고, 나의 성령 하나님이 그렇게 이끄셨다. 나는 “성령” 하나로 평생의 나의 목회를 꾸려 갈 것이다. 이제 나의 “성령목회”의 열매가 10여년 만에 결실이 이루어져, 한 달에 평균 6-7개 교회에서 40여 편의 부흥성회 설교를 한다.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일이다.

남의 것은 절대 나의 것이 아니다. 목사는 자기 것 하나를 찾아야 한다. 그것도 가장 복음적인 본질 하나를... 그것으로 평생 목회해 먹고 사는 것이다.

너무 믿음 좋은 체 말라. 너무 목사 연(然)하지 말라. 너무 꾸민 경건과 신앙의 틀 속에 살지 말라.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살아 가라. 그냥 자연스럽고, 순수하고, 솔직하라. 교인들에게 솔직하고, 정말 허물 많은 당신이 그래도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성도를 사랑하려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라. 그러면 교인 중 어느 누구도 목사를 허물지 않으리라.

 

4.설교 현장의 영적 전쟁의 실상을 모른다. 그래서 기도가 녹아 들어 있지 아니한 설교들을 한다.

문제는 또 있다. 자기 강단은 놔 두고, 다른 강단에 서 보면 영적 전쟁이 더욱 더 치열해진다. 나는 주로 성령설교를 하는 부흥강사인데, 성령이 메마르고, 성령이 덮지 않는 교회에 가서 설교해 보면 정말 진땀이 난다. 말이 딱딱 말라 붙는다. 설교가 이어지지 않는다. 가장 힘든 설교는 성령이 덮지 않는 교회가 가서 단회 설교를 하는 경우이다.

얼마 전에도 어느 교회에 가서 설교를 했다. 죽을 뻔 했다. 마치고 돌아 오면서 “주님! 오늘은 70점입니다. 잘못 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담대하지 못하고, 충분히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제 영성이 따라 가지 못했습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나는 너무나 바쁜 사람이라 이 마음을 오래 붙들고 있지 못했지만, 며칠이 지난 지금도 계속 회개하는 중이다.

역시 해결책은 말씀 선포의 영적 전쟁에 승리토록, 충분히 기도하는 수 뿐이다.

 

5.자기 설교를 개발하라.

내 나름대로 이제 나이 50세가 넘어 나의 설교하는 방식이 있다. 나의 주장은 평소에 설교문 들을 많이 많이 읽으라는 것이다. 설교 준비를 위하여 설교 준비하지 말고, 평소에 늘 설교문을 하루에 5편 정도씩 계속 읽으라는 것이다. 일주일이면 30여 편을 읽는다. 그러면 그 중에는 분명히 내 마음에 닿는 설교의 내용이 있다. 그것으로 착상하라는 것이다.

남의 설교를 그대로 가져 와도 좋다. 해 아래 새 것은 없다. 양심으로 고백해 보라. 목사 설교의 95% 이상은 사실상 남의 것이 아닌가? 책에서 가져 왔고, 인용한 것이 아닌가? 다 남의 것이 아닌가? 목사들이 무슨 작가처럼 그렇게 문장력이 좋은 것도 아니고, 한국교회의 상황 속에 매주 10여 편의 설교문들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사기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목사들은 마치 자기가 순수히 만든 설교처럼 생각한다. 스스로 착각한다.

어떤 목사는 주일 설교 한 편 만은 철저히 준비한단다. 그런데 들어 보면 남의 것을 그대로 가져 와 대충하는 새벽기도회나 일반 저녁 설교가 훨씬 은혜스럽고, 자기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설교는 진짜 재미없고, 딱딱하고, 자기 중심적이며, 성도들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한 마디로 설교 준비를 할 줄 모르는 것이다. 안되는 자기 만의 방법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잘 하는 설교의 대원칙은 설교문들을 많이 많이 읽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착상을 얻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 많이 하라. 그러면 저절로 설교와 기도는 하나로 녹아 든다. 그러면 내 설교로 편집하여 만들면 되는 것이다.

남의 원고를 그대로 가져 오라. 그리고 기도하며 당신의 원고로 바꾸어라. 내 설교, 남의 설교 괜히 뻔한 소리로 스스로 사기 치지 말라. 가져 와 조합하면 내 설교이다.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사실 남의 것을 다 가져 와 놓고서, 자기 것이라고 말한다. 설교자는 편집 기술이 좋아야 한다. 문제는 여기 저기 설교문만 편집만 하지 말고, 기도와 성령으로 편집하라는 것이다. 남의 글만 가져 오지 말고, 방대하고도 충분한 내용을 가져 온 후에, 이제부터 기도와 성령으로 재편집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설교를 한번 하고 그만 두지 말고, 여러 번 반복하라. 공부도 반복이 가장 효과적이다. 성도들에게 설교를 반복하면 안된다는 인식을 불식시키라. 중요한 것은 내 설교는 반복해도 은혜가 되지만, 남의 설교는 반복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사실이다.

주일 오전과 오후를 시리즈로 이어, 반복하라. 아니면 주일오전, 오후, 수요일까지 시리즈로 복습하며 반복하라. 나는 설교 한 편으로 일주일 내내 10여 회 정도 반복한다. 물론 원고의 내용들이 방대하지만... 교인들을 괜히 이것 저것 복잡하게 만들지 말라. 한 주제로 한 주간을 살게 하라.

 

나는 매주 목사님들에게 지난 10여 간 모은 수 천편, 수 만편의 설교를 그냥 보내 준다. 그 동안 보낸 설교의 분량은 정말 수 십만 편이다. 평생 읽어도 다 못 읽을 분량이다.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많은 목사님들이 그 자료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에... 그 귀한 보물을... 돈으로 따지만 수 천만원, 수 억원의 가치가 있는 것들을...

가진 게 없으면 나올 게 없다. 많이 가진 자는 잘 조합만 해도 멋진 설교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아니 가진 게 없는데, 어떻게 좋은 설교를 만든다는 말인가?

어느 정도의 교세를 가진 교회 목사는 설교 도용 문제로 정말 골치 아프다. 못된 교인들이(주로 장로들이지만) 일일이 가려 내서 시비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절대 나쁜 것이 아니다. 사실 그들은 목사의 설교에 너무나 시험 들어 있는 것이다. 목사의 설교가 듣기 싫어 시비하기 위하여 아예 작정하고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 해결은 간단하다. 방대한 설교 분량으로 카바해 버리라는 것이다. 엄청난 분량의 설교 원고들을 갖고서 평소에 늘 읽고 그 내용들을 편집하면서, 기도하고 성령으로 덮은 나의 설교를 하면 내용이 전혀 달라진다. 남의 것을 글자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설교하니, 당연히 당하지!

 

6.설교에 또 중요한 것은 성령님의 나타남이다.

성령님이 빠진 설교는 정말 맛이 없다. 아무리 좋은 재료를 써도 음식 맛은 요리하는 각자의 손 끝에 달려 있듯이, 성령님의 기름부음이 없으면 설교는 죽어 버린다. 좋은 내용이 설교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직접 말씀하셔야 설교는 산다. 성령님이 덮어야 설교는 제 맛이 난다. 특별히 설교 단에서의 성령님의 역사는 절대적이다.

“성령님! 저는 사라지고, 대신 제 입술을 통해 말씀해 주세요. 저들 심령들을 울려 주세요. 회개와 회심의 영을 부어 주세요.”

설교는 내가 하지만,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이 쓰시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성령이 없는 목사는 그런 설교를 할 수가 없다.

절대적으로 명심하라. 목사로서 한 인간인 당신의 소리는 아무리 현란하고 아름다운 말들일지라도 아무 들을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귀에 듣기는 현란할지 몰라도 아무 열매가 없다는 사실을...

 

7.설교자가 원숙해져야 한다. 적어도 나이가 50대, 60대는 되어야 한다.

나는 최근에 가까이서 특별히 눈 여겨 본 30대 젊은 목사 둘이 있다. 대단한 설교가 들이었다. 그들은 앞으로 한국교회 앞에 떠 오를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설교의 전달에 있어서 청중을 손에 꽉 잡지를 못했다.

어느 해 여름 중고등부수련회의 주강사였던 한 젊은 목사는 설교가로서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학생들이 산만했는데, 아이들을 꽉 잡지 못하여 설교가 겉돌았다. 나는 그에게 설교 점수를 40점 주었다.

교사 세미나에서 설교한 한 젊은 목사는 성경으로 성경을 푸는 뛰어난 복음가였다. 그러나 역시 청중을 손에 쥐는 데는 실패했다. 이유는 너무 청중을 도외시하고, 딱딱하고, 어렵고, 지루했기 때문이다. 나는 설교 점수를 50점 주었다.

 

설교가는 청중을 잘 알고 그들의 기호와 흐름을 예민하게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때때로 반전을 기할 줄 알아야 한다. 찬양, 기도, 유머, 단락을 이어 가는 대화의 기술... 등등이 있어야 한다. 지루해 하고, 듣지 않는 설교는 더 이상 끌고 가지 말라. 정 하려면 반전을 기하라.

젊은 목사는 큰 강단에 서면 영성이 일천함으로, 손에 청중을 꽉 쥐지 못한다. 오히려 청중에게 압도 당해 버린다. 설교는 시간 시간마다 치열한 영적 전쟁이다. 특히 남의 강단에 서면 그 영적 전쟁은 진실로 무서울 정도로 치열해진다.

앞에 소개한 두 젊은 목사는 앞으로 큰 목사가 될 것이다. 처음부터 잘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설교자는 관록과 나이, 경륜이 있어야 한다. 60대의 중후한 큰 목사에게서 보는 담대함과 사자후는 가슴을 울린다. 나는 그런 설교자가 되고 싶다. 진지하고, 깊고, 중후하고, 크고, 영혼을 울리는 설교자... 아아! 주님 저를 그런 설교자로 만들어 주옵소서.

그런데 설교자에게서 늙음이 보이면, 교인들이 이미 싫어한다. 아아! 시대의 흐름을 어찌하리!

그래서 나이 든 목사는 서러워진다.

 

8.설교에 성령님이 말씀하도록 가로 막지 말라.

나는 이렇게 외치고 싶다.

“나로 하여금 오직 성령님께 매여 마음껏 설교하게 해 주세요. 나를 가로 막지 말아 주세요. 그러면 반드시 100% 성령님의 나타남, 회심의 물결, 기적의 현장이 나타 납니다.”

부흥성회에 가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은 “목사님 마음껏 설교하세요.” 하는 말이다. 그러면 나의 설교는 반드시 95점대 이상을 홈런 친다.

그런데 각 교회들에 가 보면, 너무나 말씀을 외치는 데 장애가 많다. 인간적인 조건들이 너무 많다. 성령님이 없다. 아아! 너무나 개탄스럽게도 성령님이 없는, 영적으로 초토화된 교회들이 너무나 많다. 주님! 이 일을 어찌 하오리이까?

설교를 마음껏 못하게 하는 장애물들이 너무나 많다. 첫째는 시간 제한이다. 둘째는 설교의 주문이다. 셋째는 담임목사의 각종 제동이다. 넷째는 협박이다. 이런, 저런 설교는 하지 마시오.

나는 보따리 장사이니 어쩌랴? 목사에게 맞추고 교회 생리에 맞추다 보면, 성령님은 슬퍼 하시며 뒤로 물러 가신다. “배목사! 돈이나 받아 가자. 이 교회는 나를 원치 않아!”

내가 원하는 것은 성령님의 나타남이다. 설교에서 성령님의 그 원음을 전하고 싶은 것이다. 영혼이 회심하고 돌아 오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탄식하며 울고, 또 울고 돌아 온다.

“성령님! 오늘도 나와 함께 가 주세요. 그리고 나타나 주세요. 어차피 저나 교회들이나 목사님들은 다 한계에 묶여 있는 죄인들이 아니옵니까? 그래도 나타나 주세요. 부족한 우리에게 그냥 이대로, 부족한 이대로 나타나 주세요. 나의 중심을 아시잖아요. 그래도 말씀해 주세요. 그래도 저를 써 주세요......”

나의 절규의 기도이다.

 

아아! 평생의 업보(?!) 설교...

나는 설교하는 것이 즐겁다. 설교자로서 나는 행복하다. 성도들이 나의 설교를 듣고 울고 불고 회심하는 것을 보는 것은 내 존재의 가장 가득함이다.

하나님은 어찌하여 나에게 이러한 은총을 베푸셨는가?

 

그러나 설교는 영원한 목사의 숙제!

나는 오늘 또 고민하고, 고민한다.

 

(목사님! 좋은 충고가 있다면, 일러 주세요.)

 

2011.2.3일 목요일 새벽

순명 배종부 목사(saesung7@hanmail.net)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가장낮은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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