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누가 복 있는 사람인가? (시 1:1-6)

by 【고동엽】 2022. 2. 8.

누가 복 있는 사람인가? (시 1:1-6)

 

오래 전에 한 중견 작가가 '공평하지 못한 세상'이라는 단편집을 문학지에 실었습니다. 잘생긴 한 젊은이가 일류 대학을 나와 회사를 창업해서 유능한 기업으로 성장시켜 많은 사원을 거느리는 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양지 바른 언덕에 그림 같은 아름다운 양옥집을 짓고 예쁜 여인과 결혼을 해서 아들딸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 젊은 사장은 부족한 것 하나 없이 모든 것을 다 구비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상류층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밑에서 일하던 못 배우고 초라하고 가난한 노동자 한 사람이 그 사장 집에 침입하여 부인과 아이들을 인질로 삼고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경찰이 쫓아와서 급기야는 그 노동자의 부모님이 와서 '자수하라'고 권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그 청년이 울부짖으며 하는 말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 왜 너만 세상에서 좋은 것을 다 가지고 있는 거냐? 어째서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하냐?'고 소리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보면 가진 사람은 엄청 많이 가지고 있고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복 있는 사람이 있고, 복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참 복 있게 잘도 삽니다. 모든 것을 누리고 삽니다. 그래서 매일 큰 소리 치며 삽니다.
그런가하면 복이 지지리도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탄식을 합니다. '이 세상은 참 공평하지가 않구나. 있는 사람은 너무 많이 있고, 없는 사람은 너무 많이 없다.'고 탄식을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세상에 보면 행복한 사람은 마냥 행복하게 살고, 고생을 하는 사람을 보면 너무도 많은 고생을 하면서 삽니다. 세상에는 항상 이면 성이 있기 마련입니다.
한쪽이 길면 한쪽은 짧습니다. 한쪽이 웃음이 있으면 한쪽에는 눈물이 있습니다. 선이 있고, 악이 있습니다. 높은 곳이 있고, 낮은 곳이 있습니다. 더위가 있고, 추위가 있으며 밤이 있고 낮이 있습니다. 낮이 있기 때문에 밤이 표현되고 어두움이 있기 때문에 빛이 표현됩니다.
본문을 보면 '악인과 의인' 두 인간상을 통해서 복 있는 사람과 복 없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옛말에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는 다 까마귀들이나 가까이할 곳들입니다. 흰 옷 입은 백조들, 곧 하나님이 입혀주신 거룩한 의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그런 것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원리로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제목 소개!▶

 

여러분, 복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복이라는 개념은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좋은 것, 옳은 것, 최상의 것, 기쁜 것, 아름다운 것, 유쾌하고 풍성한 것' 등의 뜻이 있고, 이 모든 말을 다 포함하는 말로 '행복한 것' 이것이 바로 복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오복을 말합니다. '오래 살고, 부자로 살고, 귀하게 살고, 아들 많이 낳고 살다가 고생하지 않고 제명대로 살다가 죽는 것을 복'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도 복은 복입니다. 오래 사는 것은 누구나 다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몸보신을 합니까?
또 부자로 살고 명예를 얻고 직위도 얻고 권세를 얻고 귀하게 사는 것을 다 원합니다. 이왕이면 딸 많은 것보다는 아들 많은 것을 사람들은 선호합니다. 그래서 지금 남녀비율이 깨졌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들이 탐내는 세상 적인 복이 꼭 복이라고 우길 필요는 없습니다. 오래 사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욕일 수도 있고 저주일 수도 있습니다. 부하게 사는 것도 어떤 이에게는 그 재물이 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들 많은 것도 반듯이 복일 수는 없습니다. 모두 효자 일 때 복이지 깡패 같은 아들을 둔 것은 결코 복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같은 복을 외형적인 복 상대적인 복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의 개념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 인들은 이 보다 더 진지한 면에서 그리고 보다 더 근본적인 면에서 복을 생각하고 소망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멘!/

 

▶그러면 보다 근본적인 복은 무엇입니까?
여기 본분에서 말하고 있는 복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라크'와 그 다음에 '아쉬레'의 복입니다. '바라크'의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직접 받는 복'을 '바라크'라고 하고, 그 다음 '내가 받은 복이 차고 넘쳐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런 복을 '아쉬레'라고 합니다.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는 복을 받은 사람들인데 그 복이 어떤 복인가? 한마디로 '바라크'의 복, 즉 하나님으로부터 많이 받아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아쉬레'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믿/
그런데 오늘 시편에는 '아쉬레'라는 외침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의 끝은 '할렐루야'로 마칩니다. '아쉬레'와 '할렐루야'는 시편의 첫마디와 끝마디입니다. 양끝은 감격에 벅찬 소리인 '아쉬레' 인생 즉 참 행복의 사람, 축하 받을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할렐루야'로 모아진 것입니다.
특히 시편 1편에서 시작되는 '아쉬레'는 구약에서 45번 나타나는데 세 가지 경우에 썼습니다. ⑴사람들이 번영을 누리거나 자식을 많이 두었을 때 '아쉬레' 하고 축하했습니다(8번). ⑵하나님을 잘 믿음으로 물질적 축복을 받았을 때, 하나님 믿는 사람에게 내리는 건강함과 범사가 잘 될 때 '아쉬레' 하고 축하했습니다(31번). 그리고 ⑶자식이나 물질의 소유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법도 안에서 바르게 살아갈 때 '아쉬레' 하면서 축하했습니다(6번). 가난하게 살아도, 건강을 누리지 못해도, 자식을 두지 못했어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살아가는 것을 볼 때 '아쉬레'의 복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람이 아무리 오래 살고 부자로 살고 귀하게 살아도 하나님을 모르고 살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참 복은 하나님이 범사에 함께 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형통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란 말입니다. 창39:2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또 왕하18:7절에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사울을 보십시오, 그는 최고의 권좌인 왕좌에 앉았지만 어느 날 하나님이 그에게서 떠나 버리시니까 그 순간부터 그는 정신병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는 그 마음이 병들고 정신이 병들어 마침내 폐인이 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프랑스 루이 14세 하면 이 세상에서 제일 사치한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누려본 사람입니다.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다 해보았다고 큰 소리 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만족해하지도 행복해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병명을 모르는 중병에 걸렸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명의들이 와서 진단을 하지만 병명을 못 찾아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도사가 처방하기를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속옷을 빌려 입으면 병이 낫는다.'는 희한한 처방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전국 각지에서 자칭 행복한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루이 14세가 볼 때는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산책을 하던 왕은 어느 시골 길 나무 밑에 앉아 양치는 목자를 보았습니다. 낡은 하프를 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데 보는 순간 왕은 '저 사람은 정말 행복하게 보인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다가가서 '행복하냐?'고 물으니까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때에 왕은 전후 사정을 말하고 '당신의 속옷을 빌려 입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그 목자는 웃으면서 겉옷을 벗는데 속옷이 없는 맨살 뿐 이었습니다. 이때 루이 14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 행복한 사람은 있어도 행복한 사람의 속옷은 없구나!' 행복이란 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의 일화입니다.
▶본문에 진정으로 '복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누구인가?

 

1.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한 사람입니다(1).

 

세상 적으로도 악인을 따르다가 망한 사람이 있습니다. 수사관들이 죄를 짓고 감옥에 간 사람들은 대상으로 조사해 보았더니 자발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은 아주 적었고, 대부분 누군가와 함께 죄를 지은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죄에는 공법이 있습니다. 마치 고구마를 캘 때 순을 잡아 올리면 줄줄이 매달려 나오듯이 죄인 하나를 잡으면 여러 공범들이 줄줄이 잡혀 나온답니다. 모두 악한 사람의 꾀를 좇다가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는 잘 사귀어야 하고 사람을 잘 만나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악인이 꾀를 쫓다가 하루아침에 죄인이 되어 그가 일생동안 쌓아올린 공든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 악인이라고 하는 말은 성경에서 세 가지로 말합니다. 먼저 1절에 보면 '악인, 죄인, 오만한 자'가 나오는데 이는 모두 불신자들을 말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불신자의 꾀를 좇지 아니하는 자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악인은 ⑴악하고 게으른 자를 가리킵니다. 책임을 맡아 놓고 일하지 아니하는 직무태만한자를 말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했습니다.

⑵말씀을 거역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는데 이웃을 거역하고 부모를 거역하는 자가 악한 자, 또 나라를 거스른 자도 악한 자요 하나님을 거스른 자도 악한 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가리켜 '악한 세대'라고 한 것입니다.
⑶음란한 자, 절개를 지키지 않는 자를 가리킵니다. 도덕적인 것도 포함되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영적인 것으로 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것을 숭배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악인의 꾀를 절대로 쫓지 말아야 합니다.
꾀란 정당한 행동에서 어긋난 것을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악인의 꾀를 쫓아간 사람입니다. 악인의 꾀에 빠지는 사람은 잠20:17절에서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꾀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창39:9절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악인의 꾀를 쫓지 않기 위해서는 단호히 끊을 것을 끊을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하고 자신의 신앙의 가치관을 바로 정립해야 합니다. 하와는 가치관 정립에 실패한 자요, 요셉은 성공한 자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악인의 꾀를 쫓지 마십시다.

 

2.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죄는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을 떠난 것을 죄라고 합니다. 옛날 희랍에서는 교만을 가장 큰 죄로 보았습니다. 불교에서는 탐욕을 가장 큰 죄로 봅니다. 유교에서는 불효를 가장 큰 죄로 여깁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살인을 가장 큰 죄로 취급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 하나님을 떠난 것'을 큰 죄로 취급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면 죄인의 길에 설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떠나면 세상과 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길이란 말은 방향을 뜻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취향입니다. 그러니까 '죄인의 길에 서지 말라'는 말은 '세상 사람들의 취향에 어울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의 취향은 크게 세 가지로 나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속에 사는 자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쾌락을 삶의 철학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에 관심을 두다가 조금만 여우가 생기면 쾌락을 쫓아갑니다. 그런데 세상 적인 쾌락은 육체의 오관을 자극하는 것으로 그 욕심을 끝이 없습니다. 가지고, 누리고, 해보면 언제나 갈급 함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맙니다.
유명한 영화배우 마릴린 몬로는 그처럼 많은 남자들의 이목을 끌었지만 결국은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유서에는 '너무 갈급해서 죽는다'고 했답니다.
우리 예수님은 수가성 우물가에서 여인하고 대화하던 중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4:13-14절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세상이 주는 기쁨과 우리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는 천지차이입니다.
그 다음 여기서 말하는 죄인이란 하나님의 뜻을 어긋난 사람들, 그리고 창조목적에 빗나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을 안 한 것이 죄요,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한 자도 죄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크게 두 가지로 말합니다. '하라'와 '하지 말라'입니다. 진정한 신앙 인이 되려면 세 가지 측면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진실, 성실, 신실'해야 합니다. 내가 내 자신에게 진실해야 합니다. 그 다음 다른 사람 즉 이웃 앞에 성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하나님 안에서는 신실해야 합니다. /믿/할/

 

3.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사람과 사귀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 있고, 거만한 사람이 있고, 오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⑴교만은 자신을 높이는 자를 말합니다. 힘을 자랑하고, 지식을 자랑하고, 돈을 자랑하는 자입니다. 성경은 교만한 자는 물리치신다고 했습니다.
⑵거만은 한 마디로 웃기는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아무 힘도 없으면서 거들먹거리며 뽐내는 자입니다. 이것이 거만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가잔다.'고 했습니다.
⑶본문의 오만은 종교적인 말로 하나님을 보고 주먹질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오만입니다. 오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실존을 무시하고 철저하게 자기 또는 인간의 능력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 오만한 자의 종교는 휴머니즘이라고 합니다. 인본주의 인간 만능주의가 그분의 신앙입니다.
여러분 휴머니즘에 종교의 빛, 그러니까 예수님의 빛을 받으면 굉장한 가치를 발휘할 수 있으나 종교와 대적할 때는 하나님의 적이 됩니다.
예수님이 마16:11절에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은 종교입니다. 그러나 '주여 그리 마옵소서!'하고 말린 베드로는 휴머니즘입니다. 종교는 하나님의 일이요, 휴머니즘은 인간의 일입니다.
오만한 자들은 사람의 일로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려고 하며 사람의 일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의 일을 무시합니다. 이들의 모든 생각과 사상은 인간의 인본주의에 맞춥니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은 '가치관, 인생관, 종교관'을 하나님께 그 근거를 둡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무식한 사람이 누구인가? 공부를 못해서 자식이 없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우기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실존을 믿지 않기 때문에 무슨 짓이든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역사를 보면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한결같이 무자비합니다. 히틀러 같은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무실론 자에다 신에 대해 증오심까지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가 통치하는 동안 가장 고통을 당한 사람들이 유태인들과 교회입니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유태인들을 모조리 죽였습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구덩이에 몰아 놓고 생매장을 했고, 창고에 가두어 놓고 불을 질렀고, 가스실에 집어 놓고 죽여서는 그 죽은 사람으로 기름을 짜서 그 기름으로 전쟁터에서 불을 피우게 했고, 빨래 비누를 만들었던 사람입니다.
이것이 오만한 사람이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부인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때 구 소련이 미국보다 앞선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모스크바 역사에는 우주 비행사인 유리 가가린의 동상이 높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주 비행 전시관에 가보면 가가린은 우상화하고 있답니다.
가가린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우주 비행사이면서 과학자였습니다. 그가 달나라를 갔다 와서는 큰 소리로 '내가 아무리 논을 비비고 봐도 우주 안에 하나님을 보이지 않더라'고 하나님은 비방하고 기독교를 비방한 사람입니다.
그는 달나라를 갔다 와서 정치가의 야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몰랐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달나라에 갖다 와서 6개월만에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오만한 사람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을 모독하지 맙시다.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합시다. 잠22:4절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할/


▶여기 '좇다, 서다, 앉다.'의 세 개의 동사는 죄의 연속성입니다(1).
우선 '좇다'라는 말은 그저 '따라서 걸어가다'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죄악의 길로 빠져 들어가는 첫 단계가 바로 악인의 꾀를 그처럼 '좇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악인들의 유혹하는 일들을 호기심에서 흉내내듯이 슬슬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자연히 도달하게 되는 단계가 '서는 단계'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재미 삼아서 가끔 흉내내어 보던 것이 얼마 지나지 않으면 꽤 익숙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죄인의 길에 함께 '서게'됩니다. 다시 말해서 범죄의 생활에 아주 '상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인의 길에 익숙해지면 그 다음 단계는 자동적입니다. 바로 오만한 자리에 아예 '앉게' 되어 있습니다. 즉 이제는 죄악의 현장에 완전히 주저앉아서 다시는 헤어날 길이 없도록 동화되어 버리고 맙니다.
처음에는 그저 '꾀' 즉 악인들의 생각하는 바를 좇아가다가 조금만 지나면 그들의 '길' 즉 그 행위에 동참하게 되고, 결국에는 그들과 '자리'를 같이함으로써 아예 삶 전체가 완전히 같아져 버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악인, 죄인, 오만 한 자' 역시 점점 더 타락해 가는 과정을 나타내는 점층법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악인' 즉 도덕적인 의미에서 나쁜 사람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다음에는 '죄인' 곧 하나님 앞에서 정죄 받은 인간이 되고, 결국에는 '오만 한 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이 '오만 한 자'의 원문은 '비난 자'라는 단어인데 바로 자신이 악인이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부끄럽게 여기거나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과 의인들을 욕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처음에는 그저 친구 따라 배운 술 한 잔이 나중에는 말술이 모자라는 주정뱅이 인생이 되고, 처음에는 장난으로 시작한 내기가 나중에는 엉덩이를 뗄 줄 모르는 도박꾼으로 아예 상주하게 됩니다.
▶다윗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하루는 그가 왕궁의 옥상을 거닐다가 저 아래 옥상에서 어떤 아리따운 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마음속에 슬그머니 음욕이 불일 듯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떨쳐버렸어야 했는데 다윗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신하를 시켜서 그 여인을 왕궁으로 불러오게 해서 악인의 꾀를 좇고 만 것입니다.
그 여인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였습니다. 그의 남편 우리아는 지금 전쟁터에 나가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의 권력을 이용해서 밧세바를 범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죄인의 길로 들어서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밧세바가 덜커덕 임신을 해 버렸습니다. 다윗은 자기와 밧세바 사이의 일을 감추기 위해서,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렀습니다. 다윗은 전쟁에 관한 몇 가지 소식을 묻고 나서 그를 집에 돌려보내 아내와 쉬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아는 충직했습니다. '내 동료들이 지금 전쟁터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데, 어찌 나만 편히 쉴 수 있으랴' 그러면서 아내와 가까이하지를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다윗은 우리아를 전쟁터 최전방에 보내서 그를 죽도록 만들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오만한 자리에까지 앉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할 줄도 몰랐습니다.
죄라는 것이 본래 그렇습니다. 악인의 길을 좇다보면 나도 모르게 죄인의 길에 서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오만한 자의 자리에까지 앉아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은 애당초 그 모양까지라도 버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코끼리는 코만 들어오면 다이다!'라는 인도의 속담이 있습니다. 그 덩치 큰 코끼리가 코만 들어오면 나중에는 그 거대한 몸까지 비집고 들어오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단칼에 처치해 버려야지, 그렇지 않고 악인의 꾀를 생각하게 되면 죄의 길에 들어서게 되고, 나아가 오만한 자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특성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아니하셨습니다.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말씀으로 그를 깨우치셨습니다. 그제야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대성통곡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다시금 그를 의롭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말씀으로 그의 영혼이 다시금 소생함을 받은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세상을 멀리합니다. 그 대신 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면서 말씀에서 생수를 얻고, 그 말씀을 지키면서 거기서 기쁨을 얻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멘!/
여기서 중요한 결론은 '악인의 꾀를 좇지 말고, 죄인의 길에 서지도 말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도 말아야'합니다. 이것이 복 있는 자의 신앙의 결단입니다. /믿/

 

4. 악을 벗어버리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①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렇습니다.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여기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라는 말은 악인의 삶과 그 결국은 1절에서 3절까지 말한 '의인의 복된 삶과 그들의 축복에 결코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을 강하게 대조시키는 말씀입니다.
악인은 겨와 같다고 했습니다. 겨는 그 안에 생명이 없습니다. 뿌리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열매도 없습니다. 껍질이요, 쭉정이입니다. 그러므로 바람과 함께 이리 저리 날아다닙니다. 결국 불에 태움을 받게 됩니다. 그러기에 죄악을 멀리하지 않으면 허무한 인생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3:1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불에 던짐을 받는 쭉정이와 같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②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합니다(5/상).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여기 '심판'(샤파트)은 마지막 때에 있을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공의로우신 심판을 의미합니다. 여기 '견디지 못한다.'는 말은 자신의 죄악이 너무 커서 그 결과가 너무 무서워 일어서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거나 거절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모든 인생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 악인은 하나도 그 앞에 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상급을 얻기 위하여 그 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③의인의 회 중에 들지 못합니다(5/하). 여기 '회 중'(에다)은 거룩한 장소인 성소나 성전을 말합니다. 더 복음 적으로 말하면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합니다. 그런데 악인은 의인의 회 중에 들지 못합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어디로 갑니까? 지옥 음부로 내려가서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악인의 길을 걷지 말아야 합니다. /믿/
노아 때를 보세요! 그 당시 사람들은 너무나도 타락했습니다. 그들은 그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육체적인 향락을 취하는 것이 그들의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온 세상이 인간의 죄악으로 가득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은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었던 노아와 그의 가족 여덟 명은 방주를 만들게 해서 하나님이 구원시켜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노아의 가족들은 구원을 받았지만, 죄악으로 관영 했던 세상은 홍수로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죄인은 결코 구원받은 의인의 회 중에 들 수가 없습니다.
그 뒤 소돔과 고모라 성에 살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본시 그 땅은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온 땅에 물이 넉넉했습니다.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의 땅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롯은 그곳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 성 사람들은 너무나도 악했습니다. 그들은 성적으로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불로써 심판하셨습니다. 의로웠던 롯과 그의 가족들은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나머지 사람들은 하늘에서 유황불이 내려와서 진멸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악인은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죄인은 결코 의인의 회 중에 들지 못합니다.

 

5. 복 있는 사람은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2).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66권'을 말합니다. 천지는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일 점 일획도 변치 않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①이 말씀은 신비한 맛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에 취한 사람은 꿀 송이 보다 더 달다고 했습니다. 시119:103절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보면 볼수록 새로운 은혜가 넘치는 깨달음을 줍니다. 보통 세상 책은 한 번 읽고 접어둡니다만 성경은 있고 또 읽고 또 읽어도 항상 새롭습니다. 말씀 속에는 신비한 맛이 있습니다.
②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온전케 하는 힘이 있습니다. 교훈이 있고, 책망이 있고, 바르게 함이 있고,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읽다가 감동을 받아 '아! 그렇구나!'깨닫고 인생이 새롭게 변화되어 갑니다.
여러분 사람이 변화되어야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네가 이 세상을 변화시키겠다.'고 열심히 뛰었는데 세상이 변화가 되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의 가정을 먼저 변화시키자'고 굳게 믿고 뛰었지만 좀처럼 가정이 변화되지 않더랍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 받아 '그렇구나!' 내가 먼저 변화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자신을 변화시켰더니 새로운 삶이 열렸다고 기뻐 뛰었습니다.
사람은 변화시키는 것은 어떤 지식이 대학이 아닙니다. 어떤 제도도 아닙니다. 어떤 권력 기관도 아닙니다. '경찰도 검찰도, 안기부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아멘!/
오래된 사람입니다. 고재봉이란 사람은 그 당시 최고의 살인마였습니다. 도끼로 일가족을 몰살한 살인자입니다. 그를 변화시킨 것은 경찰이 아니고 형무소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으십시오, 눅11:2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계1:3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아멘!/
여기 '즐거워한다.'는 것은 원문에는 히브리어로 '하페츠'라는 명사로 되어 있는데 '마음이 온통 쏠려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에게 마음이 쏠린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또 '묵상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가'인데 본래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학자는 '새가 지저귀는 것으로 번역'했습니다. 더 쉽게 이해하려면 짐승의 되새김질을 연상하면 됩니다. 먹이를 먹고 그냥 소화시키는 게 아니라 꺼내서 되새김질을 하고, 또 다시 꺼내서 되새김질을 합니다.
그리고 '율법을 즐거워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법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한다는 것은 그 말씀하신 하나님의 사랑하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수지맞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은 덧입습니다. 롬8:28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할/
여기 또 묵상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겁게 대하는 것은 소가 풀을 뜯어먹는 것에 비유되고 묵상한다는 말은 그 풀은 먹은 소가 되새김질해서 소화시키고 영향 분을 흡수하는 것에 비유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묵상해 보십시오, 조용히 그 뜻을 음미해 보는 것입니다. 더 큰 은혜가 있습니다.
영국의 크롬웰 장군은 전쟁터에서도 주머니에 조그만 성경책을 넣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한번은 적의 총탄을 맞고 쓰러져 기절을 했는데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성경책에 총알이 박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구했다고 했습니다.
그때 그가 외친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육신의 생명을 구했고, 내 영혼의 생명까지도 구하셨다.'고 감격했다고 합니다. /할/

 

6. 결론적으로 복 있는 사람에게 어떤 축복이 있는가?

 

3절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⑴성장하는 나무가 됩니다. 사람은 키도 커야 하고 인격도 성장해야 하고 신앙도 성장해야 하고 우리들의 사업장도 성장해야 합니다.
⑵때를 따라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생명수의 시냇가에 뿌리를 내린 나무는 그 결과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렘17:8절에서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시92:12-15절에서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여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할/
여러분, 열매는 축복입니다. 신앙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시절을 좇아 맺는 열매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입니다(마3:8). 이 열매는 구원을 얻는 믿음의 열매요(벧전1:9), 성령의 열매요(갈5:22-23), 빛의 열매요(엡5:9), 찬송의 열매요(히13:15), 물질의 열매요(빌4:17-18), 부활의 열매요(고전15:23), 영생에 이르는 열매입니다(요4:36). 이와 같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심기운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의인의 삶 속에 풍성한 생산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직장에서 때를 따라 높여주는 열매도 체험하게 됩니다. /아멘!/
⑶그 행사가 다 형통합니다.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의 특징은 걱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워도 가물어도 걱정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복된 사람은 이와 같이 매사에 형통한 복을 주십니다. 형통이란 전화위복이 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지금 어렵지만 그 어려움이 전화위복이 되어 역사가 일어납니다. 신앙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한 인물들을 수없이 많이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녹을 삼 백년 동안 형통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형통케 하여 복의 근원이 되게 하였고 그로 인해 만민이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형통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여호수아를 형통케 하셨고,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였던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형통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3:10절에서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그 행사가'라는 말은 '그가 행하는 모든 일들'이라는 뜻입니다. 형통의 반대는 불통입니다. 즉 막혀서 할 수도, 갈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형통은 문이 열렸다는 말입니다. 일이 잘 된다는 말이고,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통해야 할 것이 잘 통해지는 것을 형통이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들이 형통의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통한다.'는 말을 자주 씁니다, 나와 다른 사람과의 마음이나 생각이 같을 때 서로 통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관계가 좋아집니다. 부부간에 통하지 않으니까 싸움이 벌어집니다. 서로간의 미움이 일어나는 것도 통하지 않아서입니다. 통하지 않으면 정말 답답합니다.
'그 행사가 다 형통'하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통하다는 말씀입니다. 이 관계만 잘 되면 물질적인 형통이 따라오고, 육체적인 건강도 형통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의 사도 요한은 '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할/
⑷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6). 여기 '대저'라는 말은 '왜냐하면'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왜 의인이 복을 받습니까? 여호와께서 그 길을 축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께서 그 길을 인정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제멋대로 가다가 결국은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십니다. 인정한다는 말은 아신다는 말이요, 보호와 관심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섬기는 사람들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여기 '의인'이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잠24:16절에 보면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일곱 번 넘어진다는 말은 수도 없이 넘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선다고 했습니다.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누가 진정 복이 있는 자입니까? 하나님이 인정해 주는 자입니다. 학생이 선생에게 인정받으면 모범생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인정받으면 효자입니다. 대통령에게 인정받으면 장관자리도 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인정받으십시오, 만사가 다 형통해 집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