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자! (롬 8:26-28)
저는 오페라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합니다만 흔히들 오페라를 '종합예술'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여러 종류의 예술이 한데 어우러져 무대 예술을 창출해 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국어사전은 오페라를 '가극'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노래와 극으로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오페라는 춤과 노래, 연기, 의상무대, 조명 등 다양한 예술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종합예술로 평가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배우면서 '하나님은 위대한 종합예술의 창조자'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창조의 섭리를 보십시오, 우주만물을 운행하는 법칙을 보십시오, 하늘의 천계를 운행하시고, 이 땅에 자연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솜씨야말로 종합예술을 창조하신 분이요, 지금도 종합예술로 연출하고 계시는 위대한 예술가이십니다. /믿/
세계적으로 유명한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십시오, 만일 사람의 힘으로 그토록 많은 물을 매일 24시간 그리고 365일을, 그리고 백년이나 이 백년간 계속해서 물을 퍼부어 폭포를 만든다면 인간의 힘으로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할 일입니다.
먼 외국의 예보다 더 가까운 우리나라 산들을 보십시오, 남산, 삼각산, 도봉산, 저 관악산에 서 있는 저 울창한 나무들과 철따라 피고 지는 아름다운 꽃들은 인간의 힘으로 때를 따라 꽃을 피게 하고 잎을 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할 수 있겠습니까? 못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저 하늘이 수 없이 떠 있는 별들을 보십시오, 별들은 고무풍선을 천장에 매달아 놓은 것처럼 교정시킨 것이 아닙니다. 저마다 태양을 중심으로 제 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현대과학이 태양계를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운행하시고, 대자연을 섭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역사만 운행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한 개인, 개인을 섭리하시고, 다스리십니다.
여러분,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 그리고 성장하는 과정, 과정이 종합예술이 아닙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의 모든 섭리가 종합예술입니다. 이러한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섭리를 바울은 본문 28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야곱 스펜서'는 말하기를 '성경을 하나의 반지로 본다면 로마서는 그 반지의 보석'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보석인 로마서 중에서도 8장이 보석 중에 보석이요, 그 다음에 28절이 보석의 극치'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씀이요, 즐겨 사용하는 성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언뜻 보면 오해하기 쉽습니다. '예수만 믿기만 하면 좌로 가나 우로 가나 만사가 잘된다는 말씀이구나!' 이렇게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신앙생활은 개떡같이 하면서도 예수 믿기만 하면 만사가 형통할 것으로 착각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이 아닙니다. 여기에 주 포인트는 '누군가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도록 주관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와 그분의 뜻대로 사는 자들을 돌보셔서 모든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분'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제목소개!▶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되 형식적으로 의식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진심은 거짓과 가식이 없고 위선이 없는 그런 순수한 사랑을 말합니다. /믿/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요1서 4: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11절에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였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마치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은 자식이 그 부모의 은혜를 깨닫고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사랑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성도와의 관계는 이 사랑의 관계가 계속되어야 합니다. /아멘!/
1. 우리가 사랑해야 할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창조주이십니다. 창1장에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하실 때에 기록에 두 가지 특별한 언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그대로 되니라'는 말입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은 7번 나오고 '그대로 되니라'는 말은 6번이 나옵니다.
▶이 말씀 속에 몇 가지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①그 분의 절대 주권입니다. 엄청난 우주를 창조하시면서 '그대로 되니라'하신 것은 하나님은 절대자라는 강력한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하나님이 닫으면 열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면 못 할 것이 없고 하나님이 안 하시려고 하면 할 사람이 없습니다. .
②그 분의 예언입니다. '그대로 되니라' 이 말은 예언입니다. 성경은 모두 66권입니다. 그런데 첫 장에 '그대로 되니라'가 6번이나 반복된다는 것은 나머지 성경도 하나님의 뜻 그대로 된다는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대 주제 예언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영적 원리요 성경의 대 주제입니다.
⑴죽은 후에 심판이 있습니다. 히9: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마디로 예수 믿으면 천국이요, 안 믿으면 지옥으로 떨어지는 심판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대 예언입니다. /믿/
⑵심는 대로 거둡니다. 갈6;7-9절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씀은 역사의 진리이자 위대한 예언입니다. 가을에 거두려면 봄에 심어야 합니다. 내일 거두려면 오늘 심어야 합니다. 심는 대로 거둡니다.
⑶믿음대로 된다는 말씀도 대 예언입니다. 꼭 믿음대로 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이루려면 우선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또 '믿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어라'고 하셨습니다.
③'순종하라'입니다. '그대로 되니라'는 말씀은 '모든 역사와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될 터이니 그대로 순종하라'는 순종의 명령입니다.
2.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고 돌보시는가?'를 알아봅시다(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여기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여기서 우리 인간의 본체를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강한 자도 아닙니다. 연약한 존재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인간의 연약함을 가리켜 '인간 조건의 총체, 또는 피조물다움'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몸을 질그릇으로 비유하십니다. 질그릇은 얼마나 깨지기를 잘합니까? 조그마한 감기에도 우리는 꼼짝 못합니다. 또 죄에 유혹에 쉽게 넘어집니다. '조석변개'라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나 연약한 존재입니까?
이 연약성은 아담이 범한 원죄로 말미암아 유전된 타락의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연약한 인간들을 우리 하나님이 '도와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우리의 어려움도 도우십니다. /할/
▶사람은 한 평생 동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사람 인(人)자는 홀로 기둥처럼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의지하고 도움을 주고받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서로 기대면서 살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도우심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은 무궁합니다. 그러므로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오늘 무사히 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하나님 우리의 사업을 도와주세요! 이 일을 도와주시고 저 일도 도와주세요!' 의탁하시기 바랍니다. /할/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중생 되었다고 해서 이 연약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연약성은 우리가 믿음이 좋다고 해서 금방 벗어 던질 수 있는 겉옷이 아닙니다. 또 성령이 충만하다고 해서 슬그머니 사라지는 증세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일생동안 연약한 존재로 피조물다움을 벗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합니다.
이와 같이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시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천사로 바꾸려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성령께서 우리의 보혜사가 되셔서 늘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지만 영적으로 한없이 연약합니다. 그런 우리를 성령께서 도우신다고 하십니다.
'도우시나니' '다른 사람의 손으로 붙잡아 준다'는 의미가 있고, '함께 나누다. 함께 취하다'라는 뜻으로 성령께서 '우리의 나약함을 도와서 그 연약함을 함께 나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연약함'이란 학자들은 '기도와 관련된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성도의 전반적인 연약함을 가리키는 말로 성도가 이 땅에서 당하는 모든 환난과 고난을 견디며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성령께서 부어주신다'는 뜻입니다.
칼뱅은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리 신실한 자라도 현재의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을 다른 말로 보혜사라고 합니다. 보혜사는 도우시는 분입니다. 여기 '돕는다'는 뜻은 '함께 담당하다,' 좀 더 쉽게 표현하면 '맞잡아 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무거운 통나무를 지고 가는 사람을 돕는 것은 통나무 한쪽 끝을 맞잡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모셨다고 해서 우리의 연약함이 금방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신다고 해서 우리가 갑자기 초자연적인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 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그대로 두시고 도우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분의 도움을 따르려고 할 때' 우리를 도우십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특별히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 성령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성령께서 특별히 기도를 도우신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기도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신 적으로나 영적으로 연약해지면 기도의 힘을 잃게 됩니다. 우리는 몸에 조금 열이 나면 기도를 못하고 누워버립니다. 기분이 조금 상한 일이 있어도 마음이 무거워서 기도를 제대로 못합니다.
또 신앙생활에 긴장이 풀려서 세상 재미에 맛을 들면 우리의 영혼이 캄캄해지고 기도는 막힙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연약함이 기도를 못하게 하는 쪽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이것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성령 님은 특별히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에 힘쓰지 못하면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할 다른 길이 없습니다. 성령 님은 우리를 돕기 위해서 와서 계시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만 도우십니다. 기도는 우리가 성령 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한 생명줄과 같습니다. /믿/
기도가 끊기면 신앙생활은 파산입니다. 기도가 끊기면 영혼은 병듭니다. 그러니까 성령 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특별히 돕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①어떻게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까?
⑴빌 바를 알지 못할 때, 빌 바를 알게 해주십니다. 사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정도로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돌이 떡인 줄 알고 돌을 달하고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뱀이 생선인 줄 알고 뱀을 달라고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성령님은 지혜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에 기도할 마음을 일으키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정당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또 기도하다보면 생각지도 않았던 기도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도우심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빌 바를 알게 해주십니다. 쉽게 표현하면 인간의 욕심으로, 정욕으로 구하지 않게 막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로 인도하십니다. /믿/
⑵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십니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정도로 연약하지만 성령께서는 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친히 간구해 주십니다. 물론 우리는 그 간구를 들을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해 주십니다.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그 시간까지 끊임없이 계속해서 성령은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십니다.
②성령님이 언제 탄식합니까?
주의 백성이 믿음을 저버리고 죄악으로 달려갈 때, 은혜의 자리를 벗어나 무지로 달려갈 때, 세상 좌우로 치우칠 때, 원망 불평으로 달려갈 때, 기도해야 할 사람이 기도하지 않을 때, 감사해야 할 사람이 감사하지 않을 때, 이럴 때 탄식하십니다.
또 마음에도 없는 기도할 때, 형식적인 기도할 때, 죄를 숨겨 놓은 채 청산유수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성령님은 탄식하십니다. 성령의 그 탄식이 있기에 비록 형편없는 기도지만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믿/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성령은 자신이 탄식하면서 기도하는 우리를 탄식하게 도우십니다. /아멘!/ 깨닫게 도우시고, 뉘우치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그래서 가슴을 치며 탄식의 기도를 도우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사는 존재입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성령님의 탄식이 없다면 우리의 기도는 공중을 날다가 힘없이 떨어지는 화살처럼 되고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피조물의 꽃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됨을 보고 22절에서 '모든 피조물이 함께 고통하며 탄식한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피조물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을 위해 탄식하며 신음하고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위해 탄식하고 신음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탄식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⑴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살지 못하고 넘어지고 무너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늪에서 나를 건져내랴!'고 했던 사도 바울의 탄식이 곧 우리의 탄식이 되어야 합니다.
⑵본문의 '탄식한다'는 말은 '해산하는 산모가 비명을 지르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 탄식은 단순히 비통해서 터지는 그런 탄식으로 끝나는 탄식이 아닙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새 생명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기뻐서 지르는 탄식이기도 합니다.
마치 산모가 아이를 분만할 때, '새 생명을 얻는 다는 기쁨을 알고 비명을 지르는 것'과 같은 탄식입니다. 그 산모의 마음에는 희망과 기쁨이 솟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탄식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새 사람이 된 생명의 잉태의 비명을 질러야 합니다. /할/
③성령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100%일치합니다(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되는 기도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서툴고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그것을 고쳐 간구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는 늘 아름다운 향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보좌로 끊임없이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십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입술에서 나온 잘못된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서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해 주시는 내용에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믿/
34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지금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십니다. 고난을 겪고 계십니까?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나 홀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서는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또 친히 간구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위에서 우리를 잡아당겨 주시고, 성령께서는 밑에서 우리를 밀어주십니다. /할/
그렇습니다. 성령이 직접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을 열어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하시고 그 뜻에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도우십니다.
마20장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려고 할 때, 요한, 야고보, 또 그의 어머니 살로메가 예수님께 나와서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옵소서." 이때 우리 주님은 참 의미 있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22절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구나!"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신의 욕심대로 구한다는 말입니다.
23절에서 주님은 "내 좌우 편에 앉은 것은 너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던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따로 있는데 이 모자는 자신들의 뜻대로 무조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기도는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이기에 응답이 없습니다.
약4;2-3절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뜻을 바로 알고 구해야 합니다. 마26;42절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성령은 우리의 불완전한 기도를 온전케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하여 한시도 떠나지 않고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시고 우리의 빌 바를 알게 해주시며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해주시는 성령을 찬양해야 합니다. /아멘!/
3.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선을 이루는 축복을 받습니다!(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을 집중적으로 조명해 보겠습니다.
①<우리가 알거니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원어 적인 설명은 '영감으로 알든지, 성경지식으로 알든지, 체험해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은 영력을 주십니다. 그 영역 속에 영감이 들어있습니다. 또 기독교는 체험해서 아는 종교입니다.
가장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에서 알아야 합니다. 이게 제일 정확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언 기도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무엇을 아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가장 위험한 것이 예언기도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며, 인간이 죄로 인해 멸망 받을 수밖에 없음을 아시고,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피 흘려 죽게 하시고, 인간의 죄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실 분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부모는 언젠가는 우리 곁을 떠납니다. 형제도, 친구도, 남편도, 아내도 갑니다. 영원히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하지 못합니다. 암으로 남편을 먼저 하나님 나라에 보낸 어떤 집사님은 '백년 가약 맺어 놓고 자기 먼저 가면 나는 어떻게 사느냐?'고 슬피 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언제 어디서나 날마다 나와 함께 하십니다.
히13: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느니라" /할/
어제는 시간적으로 과거를 말하고, 오늘은 현재를 그리고 영원토록 이란 미래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초월하여 계시는 영원한 전능자이십니다. 그 주님이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이 날마다 나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⑴날마다 나를 지켜주신다는 뜻입니다. ⑵날마다 나를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⑶날마다 우리의 쓸 것을 공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령 안에서 가능합니다. /아멘!/
우리 모든 가정에는 조리용 가스레인지를 사용합니다. 언제든지 렌지에 붙어 있는 스위치만 돌리면 파랗고 빨간 불이 켜집니다. 그런데 사고를 막기 위해 호스 중간에 밸브를 만들어 사용하지 않을 때는 잠가 놓도록 장치가 되어 있습니다. 밸브를 잠가 놓은 채 아무리 렌지의 스위치를 돌려도 가스 불은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의 은혜와 축복도, 사랑도, 24시간 365일 동안 풍성하게 우리에게 공급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능력은 중단하심도 없고 모자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가스 호스의 밸브를 잠가 놓듯이 은혜와 사랑의 공급로를 차단하거나 막아버리면 하나님의 은혜로 축복도, 능력도 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은혜를 공급받고 날마다 풍성한 축복을 원한다면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②<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날마다 주님을 위해 믿음으로 사는 것은 가르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 누군가를 위해 살아왔습니다. 부모를 위해, 자식을 위해, 남편을 위해, 회사를 위해,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그 무엇인가를 위해 살아왔습니다. 사업을 위해, 진급을 위해, 돈벌이를 위해 살아왔습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사람들은 약간의 명예와 지위와 성공과 재산을 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의 영혼을 책임지지 못합니다. 물질이 나의 영혼을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회사를 위해 죽도록 충성을 다한 어떤 중년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휴가도 휴일도 회사를 위해 반납하고 수십 년 동안 오로지 회사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 열심의 덕으로 회사의 중역이 되었습니다. 중역이 된 다음부터는 사명감 때문에 밤도 낮처럼 일했고, 주일도 회사 일을 핑계삼아 지키지 않았고 가정도 회사 다음으로 둔 채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사정이 어렵다고 명퇴 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수십 년 몸 바쳐 일하던 회사에서 쫓겨난 그가 한 말은 '죽인 놈들! 이럴 수가 있는가?' 원망과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여러분, 몸을 바치면 몸을 바친 만큼, 삶을 바치면 삶을 바친 만큼, 시간을 바치고 돈을 바치면 바친 만큼 보다 더 풍성하게 채우시고 보상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30, 60, 100배입니다.
주를 위해 살아보십시오, 주님은 절대로 우리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본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란 '하나님을 믿는 자'란 의미입니다. 그런데 왜 믿는 자라는 말 대신에 사랑하는 자로 말을 바꾸어 썼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믿음을 시험할 수 있는 시금석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믿음이 진짜냐 가짜냐를 테스트하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아니하는가?'를 가지고 논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⑴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집에서 키우는 개도 주인의 사랑을 느끼면 고분고분해지고 순해집니다. 사랑은 순종할 마음을 일으켜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고향을 떠나라! 첩을 버리라! 100세에 얻은 이삭을 바치라!'는 이 어처구니없는 명령에도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요구하는 것은 진수성찬이나 호의호식이 아닙니다. 순종입니다. 부모의 의견의 따라 주는 자식이 제일 효자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순종입니까?
요1서5:3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그래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키는 자가 순종하는 자입니다. 내 뜻과 내 마음에 맞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아멘하고 순종하는 것,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아멘!/
⑵하나님과 늘 함께 하는 자, 즉 동행하는 자입니다. 사랑하는 연인들과 같이 있을 때 무한한 행복감을 느낀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지금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창5:22절에 보면 에녹은 '하나님과 300년을 동행했다'고 합니다. 때론 야단도 맞고 때론 귀찮은 일도 시키셨을 것이고, 때론 이치에 맞지 않는 일도 요구하셨을 것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녹은 300년 동안 하나님의 곁을 떠나지 않고 동행했습니다.
잠깐 동행한다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한 평생을 그 누군가와 동행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300년간 꾸준히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여러분 에녹이야 말로 우리 모두의 모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친구와 오랫동안 동행하려고 해도 자기를 죽이고, 양보하고, 손해를 각오해야 하듯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나를 죽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⑶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드리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사랑의 가치는 받을 때보다 더욱 줄 때 더욱 기쁨이 샘솟습니다. 같은 사랑입니다만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이 더 흐뭇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에게 주고 또 주어도 기쁘고 행복합니다.
사랑은 공식이 있습니다. 사랑을 받았으면 주어야 하는 공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자들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는 시간도, 물질도, 재능도 생명까지도 드려야 합니다. 아까워하는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③<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는 무엇입니까?
뜻대로 부르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29-3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미리 아시고 정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왜 부르셨을까요? 우리를 사랑하셔서 곁에 두고 보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보는 것이 행복이고 기쁨입니다. 저는 요즘 손자들의 노는 모습만 보아도 행복이 넘쳐 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고, 소중하고, 필요한 것은 항상 곁에 두게 되어 있습니다. 가장 필요한 사람은 항상 곁에 있고 함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기에 항상 주님 곁에서 내 맘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소명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죄 짓고 살 때는 내 마음대로 살았지만 이제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고 사는 순간부터는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아멘!/
④<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종합예술입니다.
여기 '모든 것'이란, 범사의 모든 일,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일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합력 한다'는 말은 서로 연관되어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모든 일들 속에는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우연이며, 내가 스스로 만든 일이라고 생각할지라도, 모든 일들 속에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모든 것'이란, 선한 것도 있을 수 있고, 악한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가장 위대한 것에서부터 가장 천하고 시시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말이 여기 '모든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 또 '선을 이룬다'는 말은 '옳고 유용하게 한다. 목적을 이룬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어떤 목적입니까? '나를 잘 되게 하고, 좋아지게 하고, 나아지게 하고, 온전케 하고, 새롭게 하시려는 뜻'이 있습니다(요10;10). 왜요? 하나님께서는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종국에는 우리를 저 영원한 천국에 영생복락의 기업을 주시며 생명의 면류관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믿/
그래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축복으로 인도하십니다. 앞에서 오페라 얘기를 했습니다만 오페라에는 희극도 있고, 비극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행 과정 속에는 성공도 있고, 실패도 있고, 사랑도 있고, 증오도 있습니다. 또 희망이 있는가 하면 절망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작품으로 연결되고 집합되어 종합예술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개인의 삶 속에도 온갖 것들이 교차됩니다. 성공과 실패, 사랑과 증오, 희망과 절망 등이 뒤범벅이 되어 다가오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긍정적으로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성도의 삶은 항상 똑같이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잘 되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씨를 뿌려서 아무 어려움 없이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씨를 뿌려보면 별의 별일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곡식을 더 좋은 열매를 맺고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성도의 삶에도 바람이 붑니다. 어려움이 옵니다. 비가 옵니다. 천둥이 치고 어둡고 캄캄한 밤이 오지만 열매 맺는 일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열매 맺게 하십니다. 어려운 일이 있다 할지라도 잘못된 일이 있다 할지라도 이해하지 못한 일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함께 묶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부모에게 작별인사도 못하고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애굽에서 남의 집에 종살이 하다가 그 집에서도 못살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종신형을 받아 전혀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요셉은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나중에 요셉이 무엇이 됩니까? 애굽을 다스리는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감옥에서는 내가 왜 감옥에 들어왔는지 이해를 못했습니다. 애굽에서는 내가 왜 형제에게 팔려 이곳에 왔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총리가 된 다음에야 이해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을 다스리는 총리가 되게 하시려고 '애굽으로 판 것이 아니라 애굽으로 유학을 보내셨구나' 하고 이해를 했습니다. 나중에 형들 앞에서도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바로 아는 자가 축복 자입니다. /아멘!/
성도는 팔려가서도 성공하고 망해서도 성공합니다. 한 가지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 과정을 거쳐서 잘되는 것, 우리 교회도 그렇습니다. 과정이 어렵다고 낙심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걱정한 것은 '왜 내 믿음이 이 모양인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하여 걱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 동안 우리는 말로는 많이 사랑하여 왔습니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찬송도 힘있게 불렀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다짐도 했고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 해를 보내면서 생각해 보면 모두가 말뿐이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말만으로는 안 됩니다. 수고가 뒤따라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땀을 흘려야 합니다.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손해를 감수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시간도 손해를 보고, 물질도 손해를 보고, 개인적인 행복도 좀 손해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 때문에 결혼도, 개인적인 행복도 포기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위해서 공주의 아들이라는 자리도 내놓았습니다.
나 때문이라면 술도, 취미도, 오락도 버릴 수가 없지만 주님 때문이라면 그 이상의 것도 과감하게 버릴 수가 있다는 이 손해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야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하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40:31절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시18:1절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십니다. 오늘 결론은 롬8:31절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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