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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부자! (눅 12:13-21)

by 【고동엽】 2022. 2. 6.

어리석은 부자! (눅 12:13-21)

 

▶서울의 어느 병원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새벽에 몸집이 아주 좋은 신사 한분이 심장마비로 병원에 실려 왔습니다. 친구들에 의해 업혀온 이 신사는 급히 응급실로 옮겨졌지만, 의사는 이미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의사는 죽은 그 사람을 보면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죽을 때는 일반적으로 손을 펴고 죽는데, 이 사람은 오른손을 펴고 왼손은 꼭 움켜 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 의사는 움켜쥔 왼손의 손가락을 펴보니 그의 손에서는 화투 두 장이 꼭 움켜져 있었습니다. 바로 '삼팔 광 땡'입니다.
이 사람은 초상집에 가서 친구들과 어울려 밤새도록 화투를 쳤습니다. 계속 돈을 일타가 모처럼 '삼팔 광 땡'이 온 것입니다. 이 남자는 너무나 감격하고 놀란 나머지, 화투 두 장을 미처 펼치지도 못한 채, '삼, 삼, 삼…' 하다가 그만 쇼크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개 한 마리가 고깃덩어리를 훔쳐서 입에 물고 신나게 가는 도중에 다리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한참 다리를 건너다 물 속을 들여다보니 문득 물 속에 자기와 같이 고깃덩어리를 물고 있는 개가 한 마리 보였습니다. 어리석은 개는 자기 그림자인줄도 모르고 그 고기가 탐이 나서 그림자를 향하여 큰 소리로 짖어댑니다. 그 순간! 입에 물고 있던 고깃덩어리가 그만 물 속에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는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욕심이 일을 망칩니다.
오늘 본문에도 어리석고 욕심이 많은 부자의 이야기입니다. 본문을 흔히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라고 일컬어집니다. 이 비유 중에 나오는 부자는 돈을 모으는데 천재적인 머리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부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외에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18-19절에 보면 '내가, 내 곡간, 내 모든, 내가, 내 영혼에게'라는 말이 짧은 두 절에서 다섯 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에게는 이웃도 없고, 하나님도 없었습니다. 그는 모을 줄만 알았지 쓸 줄도 몰랐습니다. 창고가 차고 넘쳐도 이웃에게 베풀 줄을 몰랐습니다.
그는 완전히 착각 속에 살았습니다. 풍성한 소출도 자신의 노력이었고, 마음에 평안은 물질이면 족했고, 심지어 생명까지도 곡간의 곡식으로 연장될 줄로 알았습니다. 실로 그는 육신 적으로는 부유한 자 같이 보여도 영적으로는 참으로 가난한 자였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만물과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습니다. 이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이미 최고의 '광 땡'을 잡은 사람들입니다. /믿/
우리는 본문에서 '왜 그가 어리석은 사람이었는가?'를 살펴봄으로 우리도 '어리석은 자가 아닌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해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제목소개!▶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그 동안에 무리 수 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그 날도 수없이 많이 몰려든 관중들과 그리고 그 관중들 속에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께서 설교를 시작하십니다. 그 날도 예수님은 인간의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잠깐 분류해 보면, 4-5절에서 '몸은 죽일 수 있으나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의 세력은 이 세상에서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두려워하라고 하십니까?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하나님)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내가 이제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라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6절에서는 '참새 몇 마리가 땅에 떨어져 죽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고, 7절에서는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지도 다 세신 바 되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인생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셀 수 없는데 하나님은 우리 머리카락을 다 세시고 우리의 적은 일까지 세밀하고 자상하게 알고 계시며 돌보고 계시므로 우리를 향하여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참새보다 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영혼을 돌봐주십니다.
사43:1절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두려워해야 합니까? 잠1: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경외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입니다.
8-9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여러분, 신앙은 고백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고백하십시오, 롬10:10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할/
10절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절대로 사하심을 받을 수 없다고 준엄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이때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뛰어듭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13절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여러분, 지금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계시는데 여기 한 젊은이는 하나님의 나라와는 아무 관심이 없는 '땅의 일'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너무나도 엉뚱한 부탁을 해 옵니다.
한마디로 형제간의 재산싸움에 예수님이 재판관이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아마 젊은이의 생각은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놀라운 기적과 이적을 세우시고, 한 말씀, 한 말씀이 지혜와 지식의 말씀이며, 그 말씀의 권위가 대단한 분이시니 저 예수님이라면 욕심 많고 고집스러운 우리 형님도 충분히 설득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이 젊은이는 아마도 그 아버지가 유산처리를 제대로 못한 체 세상을 떠난 것 같습니다. 그랬으면 형이 마땅히 동생 몫을 나누어주어야겠는데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아마도 주지 않는 모양입니다.
당시 유대 법에 의하면 만약 아들이 형제뿐이면 큰아들이 재산의 ⅔를 갖고, 동생은 ⅓을 받을 수 있는 것이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습니다.
신21:15절 이하를 보면 당시에도 이런 재산 싸움이 자주 일어난 것 같습니다. 그때는 이런 분쟁을 율법사들이 해결했습니다. 아마도 이 젊은이는 예수님을 율법사 중의 한 사람으로 착각한 것 같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이런 사건 하나 해결하지 못하실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가하게 이 땅에 남의 재산 싸움에 재판관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영혼을 살리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믿/
이 젊은이의 부탁을 들으신 예수님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 치라'고 하시면서 오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비유에 들어가기 전에 중요한 말씀은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생명'이라고 번역한 말은 '행복'이라고 바꾸어도 됩니다. 참 생명과 참 삶은 우리가 얼마나 재산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과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생명'은 단순히 '죽고, 살고'의 그러한 뜻만이 아닙니다. 더 넓게 보면 사람의 행복이 소유에 넉넉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가정은 가난해도 오순도순 행복하게 사는 가정이 있는가하면 큰 부자로 살면서 늘 싸움이 끊이지 않는 가정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적으론 대단히 부자이지만 정신적으로 아주 빈곤한 사람도 있습니다.
재산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 않게 인격도 중요합니다. 그런가하면 한 단계 더 올라가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 속에 사는 영적인 부자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모든 것에 감사할 줄을 압니다. 또 모든 것에 만족해합니다. 부자는 다른 것이 부자가 아닙니다. 풍족하고 만족해하는 것이 부자입니다.
또 아쉬워하는 것이 없어야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부자들은 가지고 가져도, 쌓고 쌓아도 만족이 없습니다. 더 가지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투기하고 사재기를 하고 그렇습니다. 돈 많은 사람을 보면 꽤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서도 더 좋은 차를 갖지 못해서 계속 불만입니다. 자가용 없는 사람이 더 많은 세상에서 가지고도 불만이라면 그는 분명 가난한 사람입니다.
미국의 재벌 '록펠러'가 말했습니다. '사람이 소유가 넉넉하다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내가 클리블랜드에서 처음 직장 생활을 할 때, 주급 3불을 받아 너무 좋아서 몇 번이고 화장실로 달려가 물래 세어보곤 했는데, 그 때의 가슴 뿌듯하게 여겼던 행복을 도로 살 수만 있다면 지금의 많은 재산을 다 내어놓겠다'고 했습니다.
록펠러의 이 말은 그냥 해보는 헛소리가 아닙니다. 거짓 없는 진심이었습니다. 사람의 행복이란 그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예수 안에 있느냐? 예수 밖에 있느냐?' '내가 지금 천당에 있느냐? 지옥에 있느냐?'에 문제입니다. /믿/ '나의 생명이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요, 나의 행복도 소유에 있지 않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자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할/
▶유대인들의 탈무드를 보면 이러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 쓸모 없는 고물을 팔았는데 그 고물 속에는 귀한 보물이 들어 있었습니다. 고물을 산 사람이 정리하다 보물을 발견하고는 고물을 판 사람에게 찾아가서 "이 보물은 당신의 것이니 도로 받으십시오. 나는 당신에게 고물만 샀지 이 보물은 사지 않았습니다." 라고 하자, 고물을 판 사람은 "아닙니다. 내가 그것을 고물과 함께 판 것이기 때문에 당신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 문제를 랍비에게 가지고 가서 해결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랍비는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에게 아들과 딸이 있습니까?" 그들은 "예,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둘을 결혼시켜서 그 보물을 그들에게 주라고 해서 문제가 아주 은혜롭게 해결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15절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 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를 비유로 들어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들판에 나가 보았더니 농사가 잘되어 대 풍작이 예상됩니다. '작년보다 이번 수확이 더 많게 생겼는데 전에 가지고 있던 창고는 도저히 그 많은 곡식을 다 저장할 수가 없겠구나! 옳지 전에 있던 창고를 헐어버리고 새로 더 크게 짓자. 그리고 모든 곡식과 내 소유 전부를 거기에 쌓아 두자'고 생각하고 그 부자는 곳간을 넓히는 개조작업을 착수합니다.
이 사람의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그는 선견지명이 있었습니다. 그는 미래를 내다보는 미래지향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해 가을에 그는 풍성한 소출을 거둬들인 다음에 곳간마다 가득가득 쌓아두었습니다. 그 모든 곡식을 다 쌓아두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그는 자기 마음속으로 독백하기를 19절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장면에 개입하셨습니다. 그 날 밤 하나님이 이 부자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0절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이 어리석은 자여!' 여러분, 왜 이 부자가 어리석은 자입니까? 우리 생각에는 이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가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사람은 남들이 깊이 잠들어 있는 밤중에도 자신의 농사를 성공시키기 위해 연구에 몰두했던 사람입니다. 남들이 휴일에 가족들과 함께 유원지로, 운동장으로 놀러 가는 시간에도 그는 손에 쟁기를 잡고 밭을 갈았습니다.
이 사람의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이 사람이 만일 현대에 살고 있다면 그는 성공한 사람이요, 출세한 사람이요, 자신의 꿈을 성취한 사람이요, 자기의 기업을 성공적이고, 정상적인 궤도에 올려놓은 사람으로서 모든 사람의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뜻과 하나님의 뜻, 사람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은 다릅니다. /믿/ ▶왜 하나님이 부자에게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을까요?

 

1. 이 부자는 수단과 목적을 혼돈했습니다.

 

어디 이 부자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16-17절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결실은 하나님이 주신 은총입니다.
⑴모든 식물의 열매는 하나님이 주신 은총입니다. 창1:29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에 씨 맺는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부자의 밭에 열매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 열매를 먹고살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⑵시절에 따라 열매 주심도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시1:3절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시냇가에 흐르는 물이 마르지 않도록 우로를 간섭하심도 하나님의 은혜요, 잎이 시들지 않도록 기온을 조절하시고 날씨를 간섭하심도 하나님의 은혜요, 풍성한 수확을 먹을 수 있도록 형통함을 주심도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⑶황충을 금하여 주심도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말3:11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수많은 꽃이 피었다 가도 집니다. 또한 수많은 열매가 맺혔다가 중도에 다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추수 때까지 결실 하여 수확할 수 있게 하심은 하나님이 지키셔서 황충을 금하여 주신 특별하신 은총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의 근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이 살기 위해서는 곡간이 필요합니다. 곡식도 필요합니다. 물질도 필요합니다. 사업도 절대 필요합니다.
이런 사실을 성경은 결코 부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풍성하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기독교만큼 인간의 실제적인 요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는 종교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삶에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마디로 내가 땀을 흘리고 애를 쓰고, 돈을 벌고 투자를 하고 지혜를 짜내어 내 모든 힘과 삶의 열정을 다해서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애쓰는 것, 단순히 돈을 우리 수중에 넣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라면 이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삶에 대한 목적을 그리스도 안에서 정립하기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오늘 이 말씀 앞에 다시 물어 보고 확인해 봐야 합니다.
진실로 내 삶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목적은 무엇입니까? 내가 땀을 흘린 대가로 노동을 한 대가로 모아들인 이 모든 것을 가지고 나는 어떤 유형의 삶을 추구할 것입니까? 이 목적을 분명히 세우지 않고는 우리는 우리 주변의 불신자들의 삶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울의 대답을 들어보겠습니다. 고전10:31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솔로몬은 전12:13절에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개혁신앙의 진수인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 1문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묻고는 그의 해답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왜 사느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우리는 분명하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믿/ 바울은 그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롬5:2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닥친 모진 환난 중에도 즐거워했습니다. 여러 가지 고통과 고난을 이기면서 자기가 가야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 삶의 목적이 분명한 사람들에게 우리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31절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기 '이런 것'이 무엇입니까? '먹고, 마시고, 입는 것,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희랍 신화 중에 '다이데스'라는 왕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황금에 눈이 어두웠던 이 왕은 어느 날 낯선 신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 신이 왕에게 말합니다.
"당신의 소원이 무엇이요? 내가 다 들어주리라" 왕은 기뻤습니다. "신이시여! 내가 손으로 만지는 모든 것이 다 황금이 되게 해 주시오!"하고 소원을 말합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의 소원은 이루어져서 그의 손으로 만지는 것마다 다 황금으로 변했습니다.
하루 종일 왕은 황금을 만드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그러다 황혼녘에 '다이데스'가 부르짖는 절규를 들어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놓은 이 황금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해가 지는 이 황혼녘에 절망하기 시작합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가 사랑하는 딸도 그의 손에 닿는 순간 황금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입니다. 딸뿐만이 아닙니다. 진수성찬도 황금으로 변하고, 마시는 물도 황금으로 변해 버립니다. 그의 소원대로 그의 꿈대로 그의 이상대로 모든 세계가 황금이 되었지만 그 황금의 한복판에서 그는 절규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제 황금이 아닙니다. 나의 딸 메리의 생명을 돌려주옵소서!" "내가 원하는 것은 황금이 아닙니다. 한 모금의 물입니다."
오늘 현대인들도 황금이면 무엇이든지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런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시고 '어리석은 자여!'라고 책망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에 깨닫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2. 이 부자는 이기적인 인생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다시 이 짤막한 부자의 독백 속에서 그의 관심, 그의 생각, 그의 의식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가 무엇인가를 들어보겠습니다.
17절 이하에 보면 여기서 무슨 말이 제일 많이 등장합니까? '내가, 나'입니다. 또 '어찌할꼬! 거기 쌓아두리라!' ▶부자는 먼저 어찌할꼬! 하는 생각을 합니다. '먹고 남았으니 어찌할꼬!' '쌓고 남았으니 어찌할꼬!' 곡식을 창고에 쌓아두니 썩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쥐가 들끓지나 않을까 걱정, 돈을 금고에 넣어주니 도적이나 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 어리석게도 부자는 자신의 일만 걱정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주님은 '너희는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 '거기 쌓아 두리라'입니다. 이웃을 보면 굶은 사람도 있고, 헐벗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남이야 굶든지 말든지 부자는 생각을 했고, 거기 '쌓아 두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부자는 곡식과 재물을 자신의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땅의 모든 것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천지를 지으시고 다스리시고, 운행하시고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것을 지키는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은 물질 뿐 만 아니라 생명과 재능과 대자연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청지기는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내 것으로 알고,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자를 하나님이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마6:19-20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쌓아두면 간단히 끝날 것을 땅에 쌓아두겠다니 문제가 많습니다. 집에 보화가 많은 사람 걱정도 많습니다. 그것 때문에 잠도 깊이 못 자고, 집을 비우지 못합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집을 지킨다고 무슨 소용입니까? 마음놓고 부스고 들어와서 칼을 들이대고 가져갑니다. 여러분 하늘에 쌓아두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유산을 보존해 주십니다.
여러분 구제하는 것 하나님께 빌려주는 것입니다. 선교, 감사, 건축헌금, 차량헌금, 십일조 이 모두가 하늘창고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할 때 30배, 60배, 100배로 갚아주십니다.

▶가장 안전한 곡간은 어디인가?
⑴의롭게 사는 정직한 곡간입니다. 시37:25절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정직하고 의롭게 사는 자가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⑵긍휼을 베푸는 구제의 곡간입니다. 잠11:24절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할 수 있으면 이웃에 많이 베푸시기 바랍니다.
⑶주의 전에 헌신하는 하늘의 곡간입니다. 말3: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했습니다.
재물이란 잘 벌어야 하고 잘 지켜야 하며, 그리고 잘 써야 합니다. 오늘 부자는 이 사실을 몰랐으므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 보겠습니다. 부자는 '내가, 나를' 내세웁니다. '내 곳간, 내 물질, 내 곡식'등 거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 다음에 '내 영혼 나의 영혼'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것입니까? 큰 착각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이 부자는 그 영혼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비로소 뼈아프게 깨달았습니다. 그 날 밤에 그의 삶의 주인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겠으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 목숨을 도로 찾아가리라!' 내 심장을 뛰게 하는 분이 네 몸의 고동소리를 들리게 하신 분이 네 몸 속에 피를 돌게 만드신 분이 목숨을 영혼을 거두어 가시면 그 무슨 재주로 거역하고 반항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부자 이 사람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부자는 내 것으로 알았고, 내가 다 한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시127:1절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 함이 허사로다" /할/
여러분, 우리는 물질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주께서 나에게 건강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주께서 나에게 지혜를 주시지 않았더라면 주께서 나에게 이러한 환경과 삶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신앙의 의식을 가진 자는 늘 하나님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말합니다. 오늘 부자는 이 모든 것의 출처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오직 나, 나, 나, 이 사람의 입술에는 당신도 없고 하나님도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 때문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의도적으로 제거해 버리고 철저하게 이기주의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주님은 '어리석은 자여!'라고 선언하십니다.

 

3. 이 부자는 영혼의 필요와 육체의 필요를 혼동했습니다.

 

육체를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며 영혼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를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래 육체는 흙으로 지음 받은 사실을 망각한 것입니다. 또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생기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이 사실을 그는 잊어버렸습니다.
그 부자의 마지막 밤 그가 자기의 곳간마다 가득히 곡식을 쌓아두고 독백하던 그 소리를 다시 한번 들어보십시오, 19절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여러분, 영혼이 무엇을 먹을 수 있습니까?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은 육체 뿐 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영적인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가지고 누리고 권좌에 올라가고 또 올라가도 그들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는 열망이 있습니다. 그런 세상 것 다 누려도 무엇인가 항상 만족하지 아니하고 불안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경은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진단합니다. 영적인 존재는 무엇을 먹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마4:4절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되어 질 때 비로소 영혼에 만족과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그 사실을 성 '어거스틴'은 알았기에 '오! 하나님 우리의 영혼이 당신의 품안에 들어가 쉴 때까지는 참으로 우리에게 평안함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20세기에 가장 탐심에서 멀리 떠난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설문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단연코 '테레사 수녀'가 뽑혔습니다. 그래서 카톨릭에서는 그를 '성녀'의 반열에 올리는 문제로 논쟁을 벌였습니다.
어느 날, 테레사 수녀가 미국의 부자와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는데, 부자가 수녀에게 물었습니다.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정말 많은 기부금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테레사 수녀는 "저에게는 예수님만 필요합니다. 주님 한 분이면 만족합니다." /할/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입니까?
오늘 부자는 그의 영혼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육체의 소욕으로 착각했기에 주님이 어리석은 자라고 한 것입니다.

 

4. 자기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 돌려드릴 준비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영혼을 하나님께 돌려 드릴 준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천년만년이 아닙니다. 야고보 장로님은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말합니다.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이 얼마나 비참한 말입니까? '아무리 아끼고 감추고 쌓아두어도 네 영혼 거둬가 버리면 누구의 것이 될지도 모르고 창고만 넓히고 있는 이 어리석은 인간아, 왜 죽음을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여러 해 쓸 것을 쌓았으니 안심하자'고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여러 해란 몇 년을 말합니까? 10년입니까? 50년입니까? 100년, 1000년입니까? 모세는 인생을 70, 강건하면 80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나일강 변 바로 왕의 애굽의 보좌는 어디 갔으며, 유브라데 강가 바벨론, 페르시아 또 막강한 로마제국의 영광은 지금 어디에 갔습니까? 부귀영화를 쌓을 곳이 없어서 '어찌할꼬!' 하지말고 죄를 지어 '어찌할꼬!' 거룩한 탄식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아멘!/

▶우리의 영혼이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⑴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창1:26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그러므로 인생의 삶의 원리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야 합니다.
⑵인간에게는 종교의 씨가 있습니다. 전3:11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⑶죽음 뒤에는 분명한 심판이 있습니다. 히9: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⑷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요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888년 한 유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인류역사상 최초로 다이너마이트를 만든 사람입니다. 그는 다이너마이트를 제조한 다음에 일약 당대의 명사가 되었고, 수많은 돈을 벌고, 사람들의 관심과 촉망을 받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아침잠에서 깨어나 언제나 하던 버릇처럼 신물을 펴서 기사를 읽기 시작했는데 깜짝 놀락 만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 신문 일면에 '자기가 죽었다'는 기사가 씌어 있습니다.
'세계 최초로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이 죽다.' 이 기사를 읽은 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실 자신의 동생이 죽었는데 기자들이 혼돈하여 자기가 죽은 것으로 보도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노벨은 자기 자신의 사망 기사 앞에서 깊은 침묵과 말할 수 없는 도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폭탄을 만들어서 재물을 얻었고 명성을 얻었지만 결국 내 인생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닌가?'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많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폭탄을 만든 제조업자가 드디어 죽다'는 기사를 찢으면서 그는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교회에 찾아가 '예수를 나의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것이 저 유명한 '알프렛트 노벨'의 '노벨 평화상'이 시작된 유래임을 우리가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가장 부한 자입니까? 만일 내가 지금 죽는다면 오늘밤 떠난다면 하나님 품에 앉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시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가장 부한 사람입니다. /믿/

 

5. 왜 어리석은 자가 된 것인가?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어리석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부자와 같이 생명이 물질에 있는 줄 알고 사는 것이 어리석습니다. 영혼은 물질에 의해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살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기쁘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찬송가에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하고 노래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영혼보다 육신의 생명을 더 귀히 여겼습니다. 육체는 영혼을 담고 있는 그릇에 불과한 것입니다. ▶부자는 영원한 내세를 위해 준비하지 않고 잠시 후에 없어질 현세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부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 없이 자기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롬14:7-8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할/

①이 부자는 '자기 관'이 어리석었습니다.
이 사람은 오직 '나, 내가'입니다. '우리'라는 단어는 한 번도 찾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은 나 혼자만이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있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미국의 어느 심리학자는 현대인의 병은 '내가 병'이라고 했습니다. 바클레이는 '나라는 단어는 침략적 단어'라고 했습니다.
②이 부자는 '물질관'이 어리석었습니다.
본문에서 네 가지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쉬자, 먹자, 마시자, 즐거워하자' 이 모두는 1차원적이고 쾌락적인 감정의 표현입니다. 로마 격언에 '돈은 바다 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 해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를 벌었는가를 묻지 않고 어떻게 얼마를 썼는가를 점검하십니다. 이웃을 위해서 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써야 합니다. /할/
③이 부자는 '영혼관'이 어리석었습니다.
영혼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내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도로 찾으리니'란 말은 영혼의 주인은 하나님임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영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물질과 영혼의 일시적인 청지기일 뿐입니다. 제대하는 군인이 모든 것 다 반납하듯이 끝나는 날 모두를 반납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한 부자는 하나님이 자기 생명을 거두어 가실 때 속수무책인 존재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밤'이라는 말이 그의 모든 계획을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오늘 밤'은 찾아옵니다. 준비하고 사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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