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 받는 생활! (창 13:14-18)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복 받기를 좋아합니다. 복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이 어떤 복이든 복은 다 좋은 것입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복이든 영적인 복이든 우리 성도들은 모두 다 하나님 앞에 복을 받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복을 다 받고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찾아오는 복도 쫓아 버립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화합이 깨지고 조화가 무너지고 불화가 조성되고, 그래서 결국 판이 깨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참 이상한 현상입니다.
그런가 하면 복을 받으려고 별 짓을 다해도 복이 멀리 달아나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별 방법을 다 동원해 보고 별 수단을 다 사용했는데도 불구하고 복이 좀처럼 그에게 가까이 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언제 보아도 살아가는 모습이 그대로입니다. 남들보다 더 수고하고 노력도 더 많이 하는데도 복이 와 주지를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복이 쫓아와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을 해도 잘됩니다. 사람들이 몰려오고, 하는 것마다 잘됩니다. 이런 사람이 구역 일도 잘합니다. 어려운 구역을 맡겨 주었는데 연말쯤 가면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어서 두 배로 만들어 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모여든다는 것은 복입니다. 어떤 분은 모여 있는 성도들도 다 흩어 놓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불화를 조성하고 파벌을 만들고 문제를 일으켜서 사람들로 하여금 흩어지게 만듭니다.
그런가 하면 흩어져 있던 사람들을 모아 놓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별로 애를 쓰는 것 같지도 않은데 일이 아주 잘됩니다. 분위기와 환경을 아주 부드럽게 만들어 놓습니다. 복은 이렇게 따라와 주어야 합니다. 붙잡으려고 쫓아 다녀서는 안 됩니다. 복은 이렇게 알아서 와 주어야지 애를 쓴다고 잡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그렇게 가는 곳마다 복이 쫓아온 사람이 있습니다. 복이 그 사람의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래서 그가 가는 곳마다 복이 주어졌고, 형통함이 주어졌고, 앞길이 순탄했습니다. 왜?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사람입니다. 그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복이 함께 했고, 형통함이 따라다녔습니다. 심지어 그를 가리켜 '복의 근원'(샘 줄기의 복)이라고까지 합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보면 그 비결이 몇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같이 알아보고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살다가 복을 받는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그는 가는 곳마다 '제단 쌓는 생활' 즉 '예배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단을 쌓는 생활이 축복의 생활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좇아가며 가는 곳마다 단을 쌓았습니다. 창12:6-7절에는 세겜에서 단을 쌓았고, 창12:8절에는 벧엘에서 단을 쌓았고, 오늘 본문에 헤브론에서 단을 쌓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단을 쌓는 생활, 즉 예배드리는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축복의 생활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 그리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요,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예배는 가장 중요한 것이요, 가장 긴급한 것이고,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를 드리면 우리의 영혼이 살고 육체가 삽니다. 그리고 예배드리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나라는 어디입니까? 바로 미국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미국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민족은 비록 소수이지만 유대민족입니다. 유대민족을 연구한 사람들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장수하는 민족이고, 가장 범죄율이 적은 나라도 유대민족이고, 가장 노벨상을 많이 받은 우수한 민족도 유대민족'입니다.
그들은 '유대민족은 안식일을 지켰고, 그 안식일은 유대민족을 지켰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안식일이 유대민족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민족이 살고 개인도 사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민족과 국가는 형통하고,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개인도 인생에 축복을 받아 위대한 삶을 살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축복을 받고 선한 일을 많이 하여 존경받는 사람은 미국의 '존 데이비슨 록펠러'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세 가지 기적을 이루었는데, ⑴역사상 가장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지만 가장 부자가 되었고, ⑵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다른 사람에게 기부하였고, ⑶98세까지 장수하고도 치아가 하나도 썩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게 살다가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록펠러가 존경받고 착한 일을 많이 하고 부자가 되고 역사적인 인물이 된 데는 세 가지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⑴그는 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리는 일을 한번도 빠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⑵매일 성경을 읽었다고 합니다. ⑶하나님 앞에 반드시 온전한 십일조를 드렸을 뿐 아니라 십의 구조까지 드리기도 했답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우리가 이 예배 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생명 걸고 예배드리라고 저는 시간마다 광고합니다. 이것이 만복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축복의 사람이 된 것은 바로 이 예배 생활 때문입니다. 이것이 축복의 원천이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하셨던 비결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자꾸만 편 하려고만 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도 자꾸만 쉽고 편하게 하려는 풍조가 아주 강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쫓아오는 복을 내쫓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신앙 생활은 편안해지려고 하면 금방 쇠퇴해 버립니다. 나중에는 모든 것이 귀찮아집니다. 그러면 그 신앙은 생명력이 없어져 버리고, 얼마가지 못해서 그 신앙 생활은 끝장나기 쉽습니다. 이것이 축복의 생활을 좀 먹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생활에 더 열심을 내시기를 바랍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주일날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날입니다. 예배가 살면 모든 것이 살게 됩니다. 반대로 예배가 실패하면 모든 것이 안됩니다.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축복이 따라다닌 것은 그가 예배 생활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축복의 원천입니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 들은 자꾸만 제단 쌓는 일을 멀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때가 올 줄 미리 아시고, 히브리서 기자를 통하여 "모이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처럼 하지말고 더욱 모이기를 힘써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를 보면, 모이는 일이 자꾸만 시들해지고 있습니다.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이 옛날 같지가 않습니다. 모두들 모이는 것을 귀찮아합니다. 겨우 주일날 한 번 모여 예배드리면 그것으로 할 일 다한 것처럼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풍조는 시대가 가면 갈수록 더 확산될 것 같습니다.
▶모이기를 싫어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①세상이 너무 분주해서 그렇습니다.
이 시대의 특징이 그렇습니다. 왠일인지 분주합니다. 별로 하는 일도 없는데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분주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들 생활이 분주하고 마음에 여유가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어린 학생들까지 분주합니다. 무용할라. 피아노 할라, 조기 영어 배울라 눈코 뜰 새가 없습니다.
이렇게 생활이 번잡하고 분주하면 신앙 생활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우선 정신적인 여유가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려고 하면 생활에서 우선 순위가 분명하게 정해져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삶의 우선 순위를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분주하게 살아가다가도 예배드리는 날이 되면 다 놓아두고 나의 주님이신 예수께 나아가 엎드려 나의 신앙을 고백하고, 구원받음에 대해서 감사하고, 오늘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예배하고 묵상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②형식주의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하는데 가장 큰 적이 있다면 그것은 '형식주의'입니다. 형식주의는 신앙 인들에게서 진지한 마음을 빼앗아 갑니다. 눈물도 빼앗아 갑니다. 순수함도 빼앗아 갑니다.
그것은 신앙이 그만큼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형식화'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감격도 사라지고, 눈물도 사라지고, 기쁨도 사라지고, 열심도 없어지고, 남은 것은 형식만 남게 됩니다. 바리세인들이 그랬습니다. 신앙 생활에서 가장 큰 적은 바로 이 형식주의입니다. 우리 모두 조심합시다!
③안일주의 때문입니다.
신앙이 이렇게 형식화되면 곧바로 안일함에 빠지게 됩니다. 주일이 돌아와도 전혀 준비가 없습니다. 토요일 날은 밤늦게까지 놀고 TV 보고 그리고 늦게 잡니다. 그러니까 주일날 아침에 일어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다가 예배 시간이 가까워 오면 고민이 많아집니다. '교회에 가야 되느냐, 아니면 계속 잠을 자야 하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입니다.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교회에 가야지'하고 일어나려고 하면 온 몸이 천근 만금입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면 시간은 이미 지나가고 있고, 허둥대며 뛰어 교회에 와 보면 예배는 중간쯤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뒷자리에 와서 살짝 앉았다가 예배가 끝나면 곧바로 돌아가 버리는 그 발걸음에서 무슨 뜻을 발견하고 무슨 영적인 깊이를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를 구속해 주시고,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분에게 드리는 예배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사실 예배는 떨리는 마음으로 드려야 할 소중한 시간입니다. 예배는 주님이 피 흘리심으로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내가 구속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영적인 헌신의 시간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내가 새 생명을 받은 것을 감사하며 드리는 시간이 예배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 시간을 어떻게 그렇게 성의 없이 드릴수가 있습니까? 예배는 정성을 다해 드리는 것입니다. 준비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왜 이런 안일함에 빠지게 됩니까? 그것은 그 신앙이 모두 '개념적인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신앙 생활을 머리로, 생각으로, 지식으로만 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도 없이 합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그것은 세상을 구원하시고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신앙 고백의 내용입니다. 이것이 내 마음으로 고백되어질 때 비로소 거기서 신앙이 주는 힘이 솟아 나오고, 능력이 주어지고, 나의 운명과 미래를 모두 그분에게 맡기고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바로 신앙 생활입니다.
여러분, 시대가 아무리 번잡하고 형식이 난무하는 세상을 살아갈지라도 신앙 중심을 지키고 받은 바 은혜를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세상을 살아가도 주님께 예배하는 생활이 내 생활 중에서 우선 순위 제1순위가 되도록 목표를 세워 놓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인생을 주님께서 지키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예배가 왜 귀한 일입니까? 출20:24절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복 받는 길이기에 귀합니다.
요4:23절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기에 귀합니다. 그러기에 예배자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한 평생을 절에 다니다가 예수를 믿게 된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이 분은 유별나게 불심이 깊던 분이셨습니다. 매일 새벽 불공을 드리셨는데 새벽 불공 전에 매일 같이 목욕 재개하셨답니다. 그런 할머니가 예수 믿고 나서 새벽 기도를 드리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매일 새벽에 목욕재개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벽에 교회 나오기 전에 남보다 1시간 전에 일어나 목욕을 하려니 잠도 부족하고 얼마나 힘이 드시겠습니까?
목사님이 "할머니 꼭 그렇게 안 해도 됩니다" 말씀을 드렸는데 막무가내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돌로 만든 부처 앞에 헛된 불공드릴 때도 목욕 재개했는데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데 어찌 그냥 갈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예배를 기뻐 받으십니다. 우리가 거룩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2. 아브라함은 '평화주의자' 즉 '피스메이커'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또 축복의 사람이 된 것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평화주의자입니다. 아브라함은 평화를 위해서 투자를 많이 했고 희생도 감수했던 사람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오늘 본문 속의 조카 롯과의 분쟁 해결을 잘한 사례입니다. ▶본문을 잠깐 생각해 봅시다!
가난이 원인이 되어 형제나 동기간에 불화하고 싸우는 경우보다는 재산의 분배나 돈 때문에 불화하고 싸우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생각해 보면 돈보다는 의리가 더 중요하고 재물보다는 핏줄이 더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돈 때문에 형제가 적이 되고 친구가 원수가 되고 동지가 등을 돌리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본문 속에서 신선하고도 아름다운 인정을 찾게 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희생과 헌신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홀과 하란을 동생으로 둔 맏형이었습니다. 막내 동생이었던 하란은 롯이라는 아들을 낳은 후 맨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므로 롯은 큰아버지인 아브라함이 키우고 돌보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날 때 조카인 롯도 데리고 떠났습니다.
얼마의 세월이 지난 후 롯도 장성하여 독립하기에 이르렀고 제법 재산도 모으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롯은 모두가 목축업자였기 때문에 양이나 소 떼를 키우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브라함과 롯의 재산이 증식되면서 양쪽 집 종들간의 시비와 충돌이 잦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충돌과 시비의 원인은 그 지방에 귀한 물과 목초에 있었습니다. 자연히 종들의 시비나 충돌은 주인들의 감정을 자극하게 되었고 피차 속상할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본문 8-9절을 보면, 어느 날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부른 다음,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것은 아브라함의 위대한 결단이었습니다. 기득권을 포기한 그런 결단입니다. 이런 결단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결단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①그 땅이 아브라함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창12:7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이지 롯에게 주신 땅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소유권과 기득권과 우선권이 아브라함에게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먼저 좋은 입지 조건의 땅을 선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②아브라함이 롯을 키웠기 때문입니다.
롯의 아버지 하란이 죽고 난 후 아브라함은 롯을 책임지고 키웠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롯은 아브라함에게 신세를 지며 장성한 손아랫사람인 것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롯이 양보를 하는 것이 일의 순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롯에게 "우리 서로 싸우지 말자.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할 것이며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과 선택권을 고스란히 롯에게 양보해 버렸습니다.
롯은 야심 만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물이 넉넉하고 비옥한 요단 들판을 선택했습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그곳은 물이 넉넉한 곳이었고 에덴 동산처럼 아름답고 애굽처럼 기름진 땅이었다고 했습니다.
롯은 그날로 짐승 떼를 이끌고 자신이 선택한 요단 평원으로 떠났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롯이 선택하고 남은 땅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본문 13절입니다. 롯이 선택했던 비옥하고 물이 흐르는 그곳, 여호와의 동산과도 같고 애굽의 곡창처럼 윤기 흐르는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악하기 이를 떼 없어 하나님 보시기에 큰 죄인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롯이 선택했던 그곳엔 이미 문명을 일구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름진 땅에서 거둔 곡식과 과일로 독주를 담가 놓고 마셨고, 경제적인 여유를 구실로 극도의 방종과 타락을 일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롯이 그 쪽을 택한 것은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르는 처사였습니다.
그 증거가 창세기 14장에 나타납니다. 살기 좋은 곳은 탐내는 사람이 많은 법입니다. 롯이 살고 있던 소돔과 고모라 주변의 왕들이 연합군을 편성하여 소돔을 침략했고, 그리하여 롯과 그의 모든 소유는 포로가 되고 약탈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장을 보면 사치와 방종의 극을 치닫던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로 멸망하게 되던 날, 재산은 모조리 불타고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
▶선택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롯은 눈앞에 보이는 조건만을 선택의 조건으로 삼았다가 패가 망신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일보의 양보도 없이 자기 곁을 떠나 버린 롯의 무정 때문에 괴로워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이후가 중요합니다.
▶어떤 복을 받았습니까?
①가나안 땅의 소유권을 무상으로 받게 되었습니다(14-15).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이 말씀을 12:7절과 비교해 보면, 12:7절에서는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했고, 본문에서는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라고 했습니다. 즉 본문에는 "너에게 주리라"가 추가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재확인이며 다짐인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라고 하신 그대로 바라본 아브라함은 자기가 바라본 땅의 지주가 되었습니다.
②자손의 축복을 주셨습니다(16)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자식처럼 키우고 보살폈던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직후 하나님께서는 땅의 티끌처럼 무수한 자손의 축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가 떠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셀 수 없는 자손의 축복을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창22:16-17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바치려 할 때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어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재산 때문에 가정이 불화한 것을 알고는 재물에 관심이 많은 조카 롯에게 자심이 가지고 있는 재산 중에서 좋은 것을 모두 다 내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황무지나 다름없는 불모지의 땅을 갖습니다.
그것은 굉장한 결단입니다. 그리고 조카 롯을 내보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갈등의 소지를 없앱니다. 얼마나 용단 있는 행동입니까? 이것은 그가 평화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오늘 이 땅에는 재산 때문에 갈등이 많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평화는 누군가가 이렇게 희생해야 얻어지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손해를 감수해야 비로소 평화가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생각이 좋아야 합니다. 그리고 뜻이 좋아야 합니다. 화합을 만들고, 평화를 만들고, 가능을 향하여 눈이 열려져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하늘로부터 복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주변에서 이 같은 복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옛부터 가화만사성이라고 했습니다. 가정뿐만이 아니라 교회도 교화만사성이요, 나라도 국화만사성입니다. 거기에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되어 보십시오.
화합을 조성하는 사람이 되어 보십시오. 그것을 위해서라면 손해도 회생도 감수해 보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하늘의 보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런 복을 받고 살아가야 그것이 진정한 축복의 생활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5:1절에서 "화평을 누리라"고 했습니다. 이 화평은 신앙이 주는 가장 좋은 첫 번째 선물입니다.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하게 되면 가장 먼저 주어지는 선물이 바로 이 화평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세상에서 이 화평을 최고의 복으로 여겼습니다. 화평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샬롬'이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사람을 만나면 인사말로 '샬롬'이라고 합니다. 이 히브리인들은 살아오는 동안 숱한 전란과 환난을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화평이라는 것을 체험한 민족입니다.
우리는 복의 개념을 말할 때 물질을 말하고 물량적인 것을 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 말은 '새해 돈 많이 버세요'와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의 복의 개념은 물질이 아니고 '샬롬 곧 화평'입니다. 잠언을 보면 "마른떡 하나를 놓고도 서로 화평한 것이 육선이 가득한 집에서 싸우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화평을 누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화평이 소중한 것을 언제 알게 되는가 하면 화평이 깨진 후에야 알게 됩니다. 화평이 있을 때는 그 화평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모릅니다. 그러다가 화평이 깨지고 불화한 다음에 가서야 사람들은 이 화평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후회를 하는 것입니다. 후회는 모두 뭔가 깨진 후에 나오는 탄식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주는 가장 좋은 선물은 이 화평, 샬롬입니다.
▶여기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신 깊은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포기한 아브라함에게 찾아 오셔서 더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배우는 교훈이 있습니다. 집착하고 있는 것을 버리기 전까지 더 좋은 것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집착을 버리면 더 크고 넓은 세계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내 것을 집착하고, 내 생각을 집착하고, 내 뜻을 집착하는 한, 넓은 세계, 넓은 생각, 넓은 뜻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 포기하고, 내 집념 포기하고, 내 욕심 포기할 때 더 넓은 세계를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
렘1:10절 "보라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새로운 일을 위해서는 먼저 뽑고 파괴하고 파멸시키며 넘어뜨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피카소도 '창조가 있기 전에 파괴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장성하기 위해서는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더 누리기 위해서는 떠날 줄 알아야 합니다. 더 풍성하기 위해서는 포기할 줄 알아야합니다. 옛 정욕을 버리고, 옛 습관을 버리고, 옛 생각을 버려야합니다. 그래야만 내 생각이 충만해지고, 내 마음이 풍성해집니다. 내가 양보해야 하고, 내가 손해를 보아주어야 하고, 내가 겸손히 섬겨야 이웃이 생깁니다. 인정을 받습니다. 사람들이 따릅니다. 동료가 생깁니다. 더 넓은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한 알의 밀알처럼 내가 죽고, 내 것을 포기하고, 내 욕심 버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주고, 섬길 때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눈을 들어 새로운 땅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see와 look가 있습니다. 둘 다 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다릅니다. see는 눈에 들어오는 것을 그냥 보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look는 목적을 가지고 보는 것입니다. 의미를 생각하며 보는 것입니다. 찾으면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눈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냥 보면 안됩니다. 목적을 가지고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무슨 뜻인가를 보고 탐구하고 추구해야 합니다. ▶바라보라는 말씀에는 몇 가지 깊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①잃어버린 것을 바라보지 말고, 새롭게 주어질 것을 기대하라!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버리면 얻고 취하게 됩니다. 빈 그릇에 보배를 담을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바라보면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도 내게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새롭게 열린 것들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렸습니까? 그 잃어버린 건강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건강은 잃었지만 더 좋은 다른 문이 열립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약할 때 곧 강함이라'고 했습니다. ▶물질을 잃어버렸습니까? 그 잃어버린 물질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물질을 잃었지만 더 좋은 다른 문이 열립니다. ▶친구를 잃어버렸습니까? 그 잃어버린 친구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친구는 잃었지만 더 좋은 다른 문이 열립니다. 주님은 '이제부터는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라' 잃어버린 것을 보지 마십시오. 새롭게 얻게 될 더 좋은 것을 바라보십시오.
②지나간 과거를 바라보지 말고,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라!
과거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과거는 지나간 날이요, 날아가 버린 화살입니다. 그것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새로운 미래는 우리가 새롭게 창조하는 일이 더 급한 일입니다.
사43:18-19절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의 강을 내리니" 과거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미래는 성공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잃었습니다. 그러나 미래는 얻을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과거를 생각하지 마시고 창조하는 미래를 생각하십시오. 없어진 과거를 붙들지 말고 형통할 미래를 설계하십시오. 지나간 과거를 탓하지 말고 내일을 위해서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으십시오.
③땅을 바라보지 말고, 위를 바라보라!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난자들입니다(요1:12-13). 위로부터 난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를 보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땅을 소유하고, 땅을 정복하여야 하지만 그래도 땅을 바라보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위를 보고, 위에 것을 생각하며 위엣 것으로 땅을 정복하여야합니다. 골3:2절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
원래 인간은 '안드로포스' 위를 보는 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로 왔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배드리며, 찬양하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④바라보고 끝나면 아니 됩니다. 바라본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라보았느냐 그러면 움직이라고 하십니다. 행동하라고 하십니다. 적극적이 되라고 하십니다. 꿈을 꾸고, 소원을 가졌으면 대가를 지불하라고 하십니다. 그 소원을 위해서 모험을 하라, 전진하라, 뒤로 물러서지 말아라. 뒤를 돌아보지 말아라. 끊임없이 전진하라고 하십니다. 인내하면서 소원을 이루어나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꿈을 향한 집념이 있어야 합니다. 행동하십시오. 씨를 부지런히 뿌리십시오. 그러면 마침내 얻을 것입니다.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하십시오. 마침내 거두기 위해서는 땀과 눈물과 피의 세 가지의 액체를 흘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희생 없이, 눈물 없이, 각고의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3. 아브라함의 '순종의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복이 쫓아다닌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순종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순종의 표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판단이 되면 절대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예'만 있었고 '아니오'는 없었습니다. 떠나라 하면 그는 말없이 떠났습니다. 아들을 바치라 하면 말없이 바쳤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는 물음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오직 '예'만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축복이 따라다니게 된 이유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라면 절대 순종해 보십시오. 기도하는 중에 마음속에서 '좀더 수고하라'는 생각이 떠오르거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좀더 기도하라'는 생각이 떠오르거든 그것이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한번 그렇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냐고 묻지 말고, 핑계 대지 말고, 미루지 말고, 그대로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운 순종의 생활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생활 태도 때문에 누구와도 비교도 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순종은 축복 받는 비결이요, 하늘 문이 열리는 통로요, 성도의 가장 아룸다운 덕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문을 열어 드리는 비결이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길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의 올바른 신앙 안에서 산다고 하면서도 이 순종의 길을 멀리멀리 외면하고 사는지 모릅니다.
삼상15:22절에서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낳다"고 했습니다.
▶순종한 다윗은 복을 받았지만, 불순종한 사울은 버림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2장에 가나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주님의 말씀대로 빈 항아리에 아구까지 물을 채우니 맹물이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면 하늘 문이 열려지고, 맹물 같은 내 인생이 포도주와 같은 단물 인생으로 바꿔지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마음으로 우리가 순종해야 할까요? 순종의 자세도 중요합니다.
①온 마음을 다하여 순종하라!
신26:16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
②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을 하라!
롬6:17-18절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③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라!
시100:2절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④온전히 순종하라!
민14:24절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⑤끝까지 순종하라!
시119:33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순종하는 자에게 어떤 역사가 일어납니까?
①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행5:32절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②우리의 영혼이 깨끗하게 됩니다.
벧전1:22절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③마음에 즐거움을 주십니다.
사55:2절 "나를 청종(순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④재앙이 물러갑니다.
렘26:13절 "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순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고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
⑤순종도 습관입니다.
무엇이든지 해본 사람은 잘합니다. 기도도 해본 사람이 잘하고, 충성도, 전도도, 사랑도 해본 사람이 잘합니다. 맛을 봐야 맛을 안다고 했습니다.
순종하는 좋은 습관을 쫓아 살다가 하늘 문이 열려지는 축복의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 아브라함의 '손 대접'을 잘 하다가 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축복이 따라다닌 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손님을 대접하는 일을 기쁘게 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점에 있어서는 남다른 달란트가 있는 사람입니다. 지나가는 나그네를 강권해서 데려다가 대접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나그네를 강권해서 집으로 데려다가 정성을 다해서 대접을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나그네가 천사였습니다.
복 없는 사람은 물에 빠진 사람을 위험을 무릅쓰고 건져 주었더니 보따리 달라고 한다는데, 복 있는 사람은 지나가는 사람 한 번 대접한 것이 그만 하나님의 천사를 대접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유대인의 격언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부지중에 손님을 대접하면 그것이 천사를 대접하는 것이다."
여러분! 이제 많이 베풀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가능하면 나누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만나는 사람 한 사람에게도 좋은 마음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좋은 인연이 되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좋은 일들이 일어나고 특히 그들에게 복음을 주고 생명을 살리면 그보다 더 큰 축복이 무엇이겠습니까?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복이 쫓아다녔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찾아서 쫓아다닌 것이 아니라 복이 아브라함을 쫓아다녔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복을 받았습니다. 하는 일마다 성공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를 대접했는데 결국은 천사를 대접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복이 저절로 들어왔습니까? 아닙니다.
거기에는 아브라함의 남다른 생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예배 생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소중히 여기는 생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이 어떤 조건이든지 간에 절대 순종하는 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접하는 마음으로 나그네를 대접하는 그의 아름다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그에게는 언제나 복이 따라다녔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땅을 정복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세상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믿는 자들은 약한 자들이 아닙니다.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자들입니다. 다윗처럼 골리앗을 정복하는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땅을 얻는 자들입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 같은 축복의 생활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려면 가장 중요한 예배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강조하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하늘로부터 내리는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 모두 축복 받는 성림의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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