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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믿음의 또 다른 이해! (히 11:1-6)

by 【고동엽】 2022. 2. 3.

믿음의 또 다른 이해! (히 11:1-6)

 

신앙이 좋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기도하는 가운데 의롭게 살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자기 생각에는 세상 사람들과 접촉을 피하는 것이 죄를 덜 짓는 것이라 생각하고 외롭게 외딴곳에 따로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비기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비가 오나 했는데, 비가 그칠 줄을 모릅니다. 홍수경보가 발효되었고, 빨리 안전지대로 대피하라는 방송이 급하게 들려왔습니다. 남들은 다 안전지대로 피난을 가는데 이 사람만은 하나님께 기도만 합니다.
"하나님! 이 홍수에서 우리의 집과 재산 그리고 온 가족들의 생명을 구원하여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끝나갈 무렵, 누군가 문을 두드립니다. 나가 보았더니 어떤 청년이 트럭을 가지고 와서 빨리 트럭에 올라타 안전지대로 피해야 산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는 하나님께서 직접 구원해 주실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면서 트럭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또 기도를 합니다. "노아의 가족을 구하듯이 우리 가족도 구하옵소서!"
비는 억수같이 쏟아져 이네 사방이 물바다가 되어갑니다. 그때 밖에서 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나가보니 어떤 사람 하나가 보트 하나를 가지고 와서 얼른 타라고 재촉합니다. 그러나 커다란 방주라면 몰라도 그 조그마한 보트에는 탈수가 없었습니다. 노아의 온 가족과 재산을 구원하듯, 자기 식구들과 재산을 구원하려면 큰 방주가 있어야지 그 조그마한 보트에는 어림도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 사람은 계속 기도만 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약속하셨으니 구원해 주시옵소서!" 한참 기도하고 있는데 지붕 위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아! 드디어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구원해 주시나 보다"하고 나가보았더니 헬리콥터 한 대가 지붕 위에 떠있는데, 밧줄 한 가닥이 내려져 있고, 위에서 빨리 잡으라고 소리를 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 밧줄에 매달릴 수가 없었습니다. 밧줄보다는 조그마한 보트가 났고, 보트보다는 트럭이 좋았습니다. 그는 헬리콥터에서 내려준 밧줄을 거절했습니다.
마침내 언덕은 물바다로 변하고 그 집도 물에 잠겨 붕괴되었으며 그도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그가 죽어서 주님 앞으로 인도되었습니다. 그는 화가 났습니다. 주님을 보자마자 "제가 얼마나 기도했는데 그럴 수가 있습니까?" 따졌습니다. 그 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 고집쟁이야! 내가 세 번이나 너를 구원하려고 트럭을 보내고, 보트를 보내고, 헬리콥터를 보냈는데 네가 거절했으면서 무슨 소리냐?"고 책망만 받았답니다.
믿음이 좋은 것 같지만 그런 믿음은 교만한 믿음이요, 어리석은 믿음입니다. ◀제목소개▶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찬송을 불러도, 기도를 해도, 대화를 해도,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말이 믿음으로 하라는 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설명하려고 하면 마땅히 설명하기가 곤란할 때가 많습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알기는 알 것 같은데 이것을 요령 있게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께 맡긴다/의지한다/주님이 나의 구세주다"는 등 많이 알고 있지만 더 깊은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 할 때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믿음의 본질, 믿음의 또 다른 이해에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믿음이란 주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요1: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신앙은 고백이 중요합니다. 롬10:9-10절에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습니다. 이것은 세상 적인 권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권세입니다. ●이 권세를 가지고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권리가 있습니다. ●이 권세 속에 죄 사함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또 다른 이해가 무엇인가?

 

1. 믿음은 '빛'으로 오신 예수를 품고 사는 것입니다.

빛은 생명입니다. 믿음은 그러니까 생명입니다. 요1: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5절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4절의 말씀은, 예수 안에 생명이 있고 이 생명은 사람들 속에 빛으로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요8:12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쉽게 말하면 예수가 곧 빛이라는 말입니다. 이 빛 되신 예수가 이 땅에 왔는데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지 아니했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이 빛 되신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빛은 '생명이고, 사랑이고, 길이고, 진리'입니다. 요한복음의 주제입니다. 이 빛을 받아들여서 빛을 품고 살아가면 그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빛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영의 양식을 주고, 은혜를 주고, 믿음을 더해 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들이 이 빛을 품고 살아갈 때 불의를 멀리하게 되고, 죄를 멀리하게 되고, 멸망에서 멀어지고, 심판에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을 빛의 자녀라고 합니다. 그러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을 '어두움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맛 좋은 사과는 미국 캘리포니아산 사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일조량이 아주 풍성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곡식도, 과일도, 식물들도, 햇빛이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수께로부터 나오는 이 빛을 받고 살아갈 때 성숙한 신앙, 열매맺는 신앙인이 됩니다. 그래서 이 빛을 '믿음의 빛,생명의 빛'이라고 말합니다.

 

2. 요한은 믿음을 '질'로 비유했습니다.

요1:4절에 보면 "그 안(빛/예수)에 생명이 있었으니"라고 했습니다. 생명이라고 모두 똑같지 않습니다. 어두움에 묻혀서 살아가는 생명도 있고, 그 빛 가운데 거하는 생명도 있습니다. 어두움에 묻혀서 살아가는 생명은 살아 있으나 실은 죽은 영혼이고 무의미한 생명입니다. 사람도 보면 변화 받은 사람이 있고 변화를 받지 못한 옛사람 그대로의 사람도 있습니다. 그 생명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우선 질이 다릅니다. 모양이 다릅니다. 내용이 다릅니다. 색깔이 다릅니다. 품위가 다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영혼은 질이 다릅니다. 고품격입니다.
●어느 대학 총장님이 뒤늦게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나이가 들어서 처음으로 신앙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고, 늦게 신앙의 내용을 알게 되었고, 신앙의 맛을 알게 되었고, 신앙이 무엇인가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기독학생회로부터 초청을 받고 가서 어린 대학생들에게 "여러분은 일찍이 철들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헛살았습니다"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예수를 알고 보니까 예수를 알지 못했던 그 옛날의 자신과, 예수를 알고 변화를 받는 오늘의 자신을 비교해 볼 때 그 질이 같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질이고 내용입니다. 모양이고 가치입니다. ▶믿어집니까?
여러분, 질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질이 좋아야 합니다. 물건도 질이 좋아야 합니다. 그래야 값이 있습니다. 우리가 질을 따질 때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품질입니다. 이것을 '아가도스'라고 합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신앙이든, 사랑이든, 불문하고 품질이 좋아야 합니다.
거짓말하고 사기 치고 허풍떠는 사람들을 가리켜 '질이 나쁜 사람'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품질이 좋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국산품이 자꾸만 외면을 받는 것도 이 품질이 좋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자꾸만 위태위태한 것은 믿음의 품질이 나빠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믿음 생활을 하면서도 변화를 받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도 믿음의 품질이 좋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믿음이든, 사람이든, 물건이든, 품질이 좋아야 합니다.
▶다음은 '모양'입니다. 이것을 '칼로스'라고 합니다. 질을 말할 때는 품질만 좋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 모양도 좋아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씨가 곱고 품질만 좋다고 모두 인기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요새 젊은이들은 마음씨만 보지 않습니다. 품질도 좋고 모양새도 아름다워야 그게 고루 갖춘 미인으로 봅니다. 그래서 얼굴 짱, 몸 짱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신앙도 '질'입니다. 여기서 질이 좋다는 말은 품질과 모양이 다같이 좋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알고 변화를 받게 되면 먼저 질적인 면에서 변화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 속에 모든 믿음의 행위가 다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을 가진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질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 믿음은 '소망'입니다. 즉 천국행 티켓을 소유한 것입니다.

시119:105절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예수님이 내 어두운 인생 길에 빛을 비춰 주십니다. 깜깜하던 인생 길에 빛이 비추니까 순식간에 어두움은 물러가고 감추어져 있던 길이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이제 우리의 미래가 훤히 내다보입니다. 나의 운명도 훤하게 내다보입니다. 우리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천국을 보면서 사는 존재입니다.
빛이 있는 생활은 미래를 내다보고, 미래에 약속된 생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내세를 내다보고, 천국을 소망하며,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고 살아간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입니다. 그래서 미래를 훤히 내다보고 사는 사람과, 내다보지 못하고 사는 사람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은 완행열차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은 우리세대에는 완행열차를 많이 타고 다녔습니다. 시간이 되어 개찰을 하자마자 먼저 들어가려고 야단들이다. 줄을 바로 섰느니 안 섰느니 하면서 대합실에서부터 고함소리가 들리고, 개찰을 하면 다른 사람들을 밀치고 뛰어서 기차에 오릅니다. 왜 그런가? 자리를 잡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용케 자리를 잡으면 다행이지만, 자리를 잡지 못하면 목적지까지 서서 가야 합니다. 모두들 자리를 잡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다닙니다. 그러다가 우등열차나 새마을호 열차를 타게 되면 한껏 여유가 생깁니다. 천천히 여유 있게 대합실에서 기다리다가 조용한 시간에 차례대로 열차에 오릅니다.
여러분! 그 차이가 어디에 있는가? 완행열차를 타는 사람들은 무식하고 가난하고 교양이 없는 사람이라서 그렇게 서로 먼저 나가겠다고 야단들이고, 특급열차나 새마을호를 타는 사람들은 교양 있고 신사들이기 때문에 질서를 지키며 여유 있게 행동하는 것인가?
그게 아닙니다. 새마을호 열차를 이용하는 승객들은 자기 표에 좌석이 지정되어 있지만, 완행열차에는 좌석이 지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빨리 서둘지 않으면 먼 거리를 서서 가야 하기 때문에 밀치고 뛰고 허둥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미래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천국의 자리가 보장된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큰 소망입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의 미래를 훤히 내다보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자신의 운명까지도 샅샅이 알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 갈 길을 다 가면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이라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돌 더미 속에서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하늘을 보았을 때 그를 기다리며 두 팔 벌려 영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님이 그를 환영한 것이지요! 그러니 스데반이 얼마나 가슴이 설래이겠습니까? 우리도 주님께서 환영해 주실 것입니다. 확실히 믿고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믿음은 소망이고, 미래입니다. 이 미래가 있는 사람은 결코 인생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어떤 부인이 남편에게 10년 동안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남편이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어느 날 남편은 밤늦게 술에 취해서 들어오면서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또 술상을 차리라고 합니다. 얼마나 밉겠습니까?
부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이 꼴입니다. 그런데도 이 부인은 아무 소리하지 않고 술상을 차렸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의 친구들이 의아해합니다. 자기의 부인들은 그 정도면 난리가 날 일인데 아무 소리하지 않고 순순히 대접을 잘 해주니 궁금해서 물었답니다. 이 믿음 좋은 부인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제 남편에게 10년을 전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이제 포기하고 보니 나는 천당에 갈 것이고 저 사람은 지옥으로 갈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살 동안만이라도 편안하게 대접을 잘 해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미래가 확실한 사람은 살아가는 모습이 다르고, 길도 다를 뿐 아니라 생각하는 것도 다릅니다. 약속된 미래를 보고, 믿고 살기에 오늘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약속된 미래가 있는 사람은 오늘 조금 어렵고, 고되고,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한 것이 별로 문제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한집에서 살고 있지만, 한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이고, 한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두 사람의 생의 질이 같을 수가 있습니까? 천국과 지옥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빛이고, 질이고 소망이고 미래입니다.

 

4. 믿음은 '보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 배를 타고 갑니다. 그런데 갑자기 풍랑이 일어 배가 뒤집힐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깨웁니다.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얼어나시며 제자들을 꾸짖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두려워하느냐?" 그러십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눈 뒀다 보지 않고 무엇 하느냐?"는 뜻입니다. 이 말은 방금 전 우리가 배를 타기 전에 온갖 병자들을 기적같이 고쳤는데 그 고치는 모습을 보고서도 지금 의심하느냐는 그 말입니다.
▶마6장에 나오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제자들에게 "들의 백합화를 보라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십니다. "새가 농사를 짓더냐, 백합이 길쌈을 하더냐, 그런데도 굶주리지 않고, 헐벗지 않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하시기 때문이니, 그것을 보고서 믿으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보지 않고 눈 뒀다 무엇 보느냐 그 말입니다.
신앙 생활은 보는 생활입니다.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보고, 꽃과 새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이웃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보고,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보고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요9장에 보면, 예수님이 한번도 눈을 떠 본 일이 없는 소경을 눈을 뜨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장님이 눈을 뜨게 해 주는 사람을 선지자로 여겼습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만은 선지자가 아니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눈뜬 소경을 불러 놓고 심문합니다. "저가 네 눈을 뜨게 해주었느냐?" 이 눈뜬 소경이 생각하니까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도 잡혀가고, 자기도 벌받을 것 같아서 말하기를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옛날에는 내가 소경이었는데 지금 보이는 것만은 사실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신앙이 바로 이것입니다. 전에는 우리 눈에 하나님이 안 보였습니다. 예수님도 안 보였고, 십자가도, 죄도, 구원도, 천국도, 지옥도, 믿어지지 않았고, 보이지도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못 믿었었습니다. 믿기는커녕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던 것들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눈은 떴으나 모두 소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들의 눈에 이것들이 다 보입니다. 구원도 보이고, 천국도 보이고, 지옥도 보이고, 심판도 확실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는 죽습니다. 이것은 생각만 해도 두렵고 떨립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계시면 여러분은 모두 믿음이 있는 분들이고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분들은 내가 지금 구원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모르겠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일 날 한번 예배드리지 말고 놀러 가 보십시오. 그랬는데도 하루 종일 마음이 편안했다. 즐겁기만 했다면 그것은 큰일입니다. 하루 종일 마음이 불편하고 두려워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죄송하고 한 번만 할 일이지 두 번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지으면 가슴이 철렁 덜컹해야 합니다. 죄를 지었는데도 편안하게 잠을 잘 정도라면 그것도 큰 일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죄를 지으면 두려운 마음이 생깁니다. 왜?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영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과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보고, 천국을 보고, 심판을 보고, 내일을 보고, 우리의 미래의 운명을 보는 그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눈으로 앞을 보는 신앙인은 미래에 약속된 축복을 믿고 살아가게 됩니다.

 

5. 믿음은 '눈을 뜨는 것'입니다.

믿음은 '눈을 뜨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영안이 열렸다고 합니다. 눈을 떠서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머리로만 믿고, 지식으로만 믿던 신앙은 눈을 떠서 보아야 합니다.
수5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되어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여호수아는 지금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만이 목적입니다. 오로지 그 일에만 골몰해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일만 계속합니다. 그런데 가다 보니까 완전 무장한 장군 하나가 칼을 빼들고 서 있습니다.
깜짝 놀란 여호수아가 "너는 누구냐?"하고 물으니, 그가 "나는 하나님의 군대 장관이다"라고 합니다. 그가 바로 천사장 미카엘입니다. 그가 여호수아에게 명령합니다. "이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을 벗으라." 그때 여호수아가 비로소 신령한 눈을 뜨게 됩니다. 이때 여호수아가 눈을 뜨고 보면서 발견한 것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여기가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까 가나안, 그곳이 천국이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을 벗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여호수아가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발견한 것은 하나님이 이미 그들이 앞에 있는 적들과 싸워 이기게 하기 위해서 군대 장관인 미카엘을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여호수아는 그때부터 마음놓고, 안심하고 싸웁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눈을 뜨고 보니까 나 혼자가 아닌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나 혼자인 줄 알고 두려워도 했고, 무서워도 했는데, 눈을 뜨고 보니까 내 곁에 하나님이 계셨고, 내 앞에 주님이 계시고, 내 속에 하나님의 영이 내주 해 계신 것이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뭘 주저할 것입니까?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용기를 주고, 힘을 주고, 담대함을 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눈을 뜨고 보니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서 군대 장관을 이미 파견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렇지 않아도 모세가 죽은 후에 겁도 나고, 두렵기도 하고, 책임도 막중하고 해서 내심 걱정이 많았던 중인데, 그때 얼마나 힘이 되었겠습니까?
여러분,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눈을 떠서 지금 저와 여러분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힘있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눈을 뜨는 일입니다.
욥42:5절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믿음은 '싸우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싸우는 것이고, 전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제일 먼저 찾아오는 것은 기쁨이 아닙니다. 행복도 아닙니다. 그것은 전쟁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모르고 살아갈 때는 아무 것도 아니고, 꺼리낄 것 하나도 없던 것들이 예수를 믿고 보니까 모두가 양심에 걸리고, 죄책감이 생기고,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옛날에는 적당히 살았고, 적당히 먹었고, 적당히 눈도 감았었는데, 그래서 마음에 거리끼는 것도 별로 없었고, 사탄과 싸울 일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탄과 한통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알고 나니까 모두와 싸워야 합니다. 모두가 부딪칩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들이 싸우게 됩니다. 자신과 싸우고, 세상과 싸우고, 원수 마귀와 싸우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또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기로 했으면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세탁을 하듯이 한꺼번에 깨끗하게 씻어서 다시는 죄 속에 빠지지 않도록 해 주시면 좋겠는데, 내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다 하는 확신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죄의 속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투기가 일어나고, 음란이 솟아나고, 욕심이 터져 나오고, 시기와 부패한 마음이 자꾸만 솟아나옵니다. 그때마다 마음에 의심이 생깁니다. 자신에 대해 "내가 왜 이러나, 내가 아직도 가짜가 아닌가?" 하고 의구심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사도 바울 같은 분도 그래서 탄식을 했습니다. "내 속에서 내가 원하는 선을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7:19)하고 탄식을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경건을 연습하라고 했습니다. 딤전4:7절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죄는 습관입니다. 거짓말을 쓰기 시작하면 습관이 되고 나중에는 양심이 무뎌지고 끝내는 죄를 지을 용기까지도 생깁니다. 그런데 경건을 연습하면 경건 생활이 내적으로 습관화됩니다. 신앙 생활은 용기입니다. 용기 없는 사람은 이 핑계 저 핑계해서 회피하지만, 용기 있는 사람은 결단하고 싸워 이기는 자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보는 것이고, 눈을 뜨는 것이고, 싸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싸워서 이기는 사람만이 천국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히11장을 보면 믿음이라는 말이 굉장히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에 '믿음으로'라는 말이 232번이나 나오고 있고, 히11장에서 만도 25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11장을 '믿음 장'이라고 합니다.
롬1: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히10:38절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핵심은 모두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계명이 10가지 10계명이라고 합니다. 이 열 가지를 이사야 선지자는 여섯 가지로 요약을 했고, 미가 선지자는 이것을 세 가지로 요약을 했고, 하박국 선지자는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을 했는데 그 한마디가 합2:4에 나와 있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라'는 유명한 말입니다.

 

7,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이 말은 믿음은 감히 인간으로서는 바라볼 수 없는 것을 바라보게 하는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여기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실상'이라는 말은 '기초, 근거, 받침대, 기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때로 소망을 갖게 되는데, 그 소망을 갖게 되는 데는 어떤 기초가 있어야 하고,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하는데, 아무 것도 없는데 무턱대고 소망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근거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기초가 되어 주시고, 기반이 되어 주시고, 받침대가 되어 주십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 무턱대고 소망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이때 그 근거를 믿음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라는 지방에서 살았습니다. 부잣집에서 태어나서 곱게 자랐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안정되고, 평안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명령이 그에게 주어집니다. "너는 고향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이때 아브라함은 망설임이 없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납니다. 사실 이 같은 아브라함의 행동은 이치로 따진다면 무모한 것입니다. 확실한 보장이 없습니다. 계약서도 없습니다. 구체적인 내용도 없습니다. 우리들 같았으면 말할 것도 없이 한마디로 거절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떠나라는 말씀 한마디를 믿고 고향을 떠납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하리만큼 당돌한 아브라함의 행동의 근거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행동에 옮긴 것입니다.
이때 이 말씀이 곧 '실상'입니다. 이를테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말씀이 곧 실상으로 나타날 것을 믿고 고향을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곧 실상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가 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넙니다. 얼핏 생각하면 사람이 바다를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한두 사람도 아닙니다. 배가 있어도 그 많은 사람을 실어 나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비행기도 없지만 있어도 불가능합니다. 헤엄을 쳐서 건넌다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들은 건넜습니다. 어떻게 건넜느냐 하면 믿음으로 건넜습니다.
이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출14:15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고 했습니다. 지팡이가 무슨 능력이 있습니까? 지팡이는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여기서 무엇이 능력입니까? 그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할 때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모세는 홍해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갈라질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성경에는 소개는 되지 않았지만 전설에 의하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홍해를 건널 때, 물을 밟고 건너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바닷가에 서서 망설입니다. 밟으면 갈라진다고 했지만 밟아서 갈라질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여러분, 한강에 가서 한번 서 보십시오. 그때 모세가 가졌던 생각 그대로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모세가 망설이고 서 있을 때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서 있던 여호수아가 모세를 바다로 떼밀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믿음이 더 큰 것 같습니다. 엉겁결에 모세가 앞으로 넘어지면서 첫발이 바닷물에 닿게 되자 바다가 순식간에 쫙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면 된다고 약속하신 것을 믿고, 그렇게 하면 그것이 실상으로 나타날 것을 믿고 밟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또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일곱 바퀴 돕니다. 하나님이 일곱 바퀴를 돌면 성이 무너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이끌고 그 무더운 날에 열심히 성을 돌았습니다. 개중에는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불평도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돕니다. 그랬더니 마침내 그 성이 믿은 그대로 산산이 무너져 내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실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감히 바랄 수 없는 것을, 이치로 따지면 불가능한 것을, 믿음으로 그것을 바라볼 때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골라 쓰실 때 그 기준이 바로 이 같은 점을 보십니다. 그래서 믿음은 사람의 생각 그 이상을 바라보게 하고, 믿음의 힘은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결혼하는 두 젊은이를 보십시오. 믿음이 아주 좋습니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하면 잘살 줄을 믿고 결혼을 합니다. 조금도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굉장한 모험입니다. 그들이 잘살 것인지 못살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사랑의 힘으로 잘 살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그들로 하여금 미래를 밝게 내다보게 해줍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같은 믿음이 있기를 빕니다.

 

8.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해 주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증거'라는 말은 '확신'이라는 뜻입니다. 이를테면 믿음은 지금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는 내적인 확신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노아에게 앞으로 이 세상을 홍수로써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노아는 역사상 최장기 홍수 예보를 들었습니다. 120년 뒤의 큰비가 온다는 예보입니다. 그러니 큰배를 만들되 산 위에서 만들라고 하십니다. 이때 노아가 하늘을 쳐다봅니다. 홍수는커녕 이슬비도 오지 않게 생겼습니다.
그 땅은 원래 비가 오지 않는 땅입니다. 홍수가 쏟아질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까지 홍수가 온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홍수가 올 것이니 산 위에서 배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웃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런 신탁을 받았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들도 분명히 웃었을 것입니다. 비가 온 일이 없는 땅에서, 그것도 산 위에서 배를 만들라 하십니다.
그런데 노아는 보았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이 땅에 홍수의 물결이 넘쳐서 온 세상을 쓸어 가는 것을 영적인 안목으로 봅니다. 그래서 그는 산 위에서 그 무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방주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조롱합니다. 그래도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120년 후의 심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보고 나서 믿으려고 합니다. 전도를 하다보면 자꾸 보여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천국을 보여 달라고, 신통력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11:40절에서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셨고, 요20:29절에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때로 우리들을 실망시킵니다. 그래서 믿음의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야 이 같은 안목을 가지고 앞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해 주는 능력입니다.

 

9. 믿음은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주님은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할 수 있고, 나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기만 하면 할 수 잇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이 믿음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안 믿는 것이 불신입니다. 믿으면 역사가 일어나고, 믿지 않으면 철저하게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2절에 보면 "증거"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할 수 없는 것을 했더니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는 말입니다.

 

10. 믿음은 '믿고 바라보는 자에게는 좋은 것으로 상'을 받습니다.(6절)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믿음입니다. ▶어떤 믿음을 기뻐하십니까? 그 분이 살아계신 것을 확실히 믿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상을 주십니까?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십니다.
지금 올림픽에서 우리 선수들이 선전하고 있습니다. 양궁, 베드민트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얼마나 선수들과 우리 국민들이 기뻐했습니까?
상은 기쁜 것입니다. 상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완전한 상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우리 모두 목에 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2004년 8월 22일 대예배 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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