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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고난, 고난주간, 고난행사

by 【고동엽】 2022. 2. 1.

고난, 고난주간, 고난행사

 

이광호 목사(조에성경신학연구원)

 

해마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부활절이 찾아온다. 그러면 앞의 한 주간을 특별히 고난주간으로 지키는 교회들이 많다. 일 년 동안 잊고 살았던 그리스도의 고난을 한꺼번에 만회하려는 듯한 묘한 분위기마저 느낀다. 고난주간을 보내며 금욕을 통한 고난의 길을 택하는 사람들은 신앙이 더 좋은 듯이 비쳐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다소간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교회들 마다 고난에 연관된 다양한 아이디어와 방법들을 동원하는 것을 보게 된다. 금식을 하는가 하면 오락을 금함으로써 금욕적인 고난에 참여하려는 자들도 있다. 최근에는 텔레비전, 인터넷, 컴퓨터 게임 등을 중단하는 소위 ‘미디어금식’이란 신조어마저 생겨나고 있다.

 

우리는 먼저 성경 말씀과 건전한 역사적 교회들 가운데 고난주간을 지킨 예가 있었던가 하는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성경에는 그런 기록이 나타나지 않으며 정통적 교회들은 고난주간을 특별히 지키지 않았다. 사도교회와 초대교회 시대에는 고난주간이라는 절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 대신 성숙한 교회들은 항상 고난 중에 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 년에 한차례 고난주간을 행사화하여 지키는 것과 성질이 다르다. 이에 반해 우리 시대에는 고난주간이 점차 기독교적인 행사가 되어 가고 있다. 이는 우리가 매우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왜냐하면 고난주간이 끝나면 그 고난으로부터 해방되려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일 년에 한번만이라도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며 그에 참여하는 것이 유익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자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행사화된 고난주간은 긍정적이고 순기능적인 차원보다 부정적이고 역기능적인 면이 훨씬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이는 일 년에 한 차례 돌아오는 고난주간을 기해 금욕하며 종교적인 절기를 지킴으로써 스스로 기독교 신앙에 충실한 교인으로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당수 기독교인들이 고난주간을 가볍게 여기는 터에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신앙적인 만족감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고난주간을 지킴으로써 그 이외의 기간은 고난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오해할 우려가 있다. 만일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며 그것을 지켜야 한다면 특정한 한 주간 뿐 아니라 항상 그 고난에 참여해야만 한다. 성도의 고난은 일정기간의 행사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삶 가운데 드러나게 된다. 즉 몇 끼 금식을 하는 것이나 오락을 중단하며 각종 미디어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행사에 참여하는 의미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것은 고난 주간이 지나면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말해줄 따름이다.

 

필자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고난주간을 지키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막연한 부정적 시각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성숙한 성도들은 세상에 살아가면서 상당한 고난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분위기나 형편을 봐가며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삶에 마땅히 따라 오게 된다.

천국시민이 되어 이 세상에서 나그네가 된 성도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점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가치관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상이한 가치관을 가지게 되면 상호 강한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것은 결국 타락한 세상에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고난을 안겨주게 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욕망을 추구하는 동안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원한 천국에 궁극적인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값어치 있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을 교회와 성도들은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은 자신의 삶을 값어치 있는 것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성도들을 결코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성도들로 하여금 고난의 길을 걷게 하는 만만찮은 조건이 된다. 성숙한 성도들은 일시적인 행사성 고난을 체험하는 것에 의미를 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세상으로부터의 진정한 고난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된다. (교회연합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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