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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대한 성경신학적 고찰 /이광호 목사

by 【고동엽】 2022. 2. 1.

기도에 대한 성경신학적 고찰

 

이광호 목사

 

 

Ⅰ. 서론

 

기독교인들 가운데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마땅히 기도해야 하며 항상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지속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기도를 소홀히 하거나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만일 교인이라 하면서 그런 자가 있다면 외형은 기독교인일지라도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신앙이 지극히 어린 사람이라 할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는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많이 하는 교회로 정평이 나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기도를 매우 강조하고 교인들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성도의 자세인줄 알고 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급속하게 성장한 원인을 성도들의 기도 때문이라고 분석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이후 한국교회의 성장은 소강국면에 접어들었으며 전반적으로 교회 본연의 모습을 점차 상실해가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는 이 논문을 전개하기에 앞서, 한국교회의 성장 정체현상과 세속화의 원인이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미리 언급해 둔다. 오히려 잘못된 기도가 비정상적인 교회성장을 초래했으며 교회의 세속화와 함께 타락의 길로 접어들게 했음을 밝히고자 한다. 지금도 한국의 대다수 교회들에서는 기도에 열중하고 있다. 지도자들의 성(性) 윤리문제, 부당한 재산문제, 교권적 파당문제 등 온갖 부정과 비리에 얼룩져 있는 교회들 가운데서도 여전히 새벽기도와 철야기도에 열중인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는 데도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마저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하는 기도가 잘못되었거나 그것이 아예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이라 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도하기 전에, 성경이 기도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 기도는 결코 인간의 종교적 경험의 산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 종교들에서는 기도가 종교적 자기 만족을 채워주는 방편으로서 기능을 하지만, 기독교의 기도는 의와 공로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기도하는 자의 종교적 자기만족을 채워주는 방편이 될 수 없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기도에 대한 신학적 고찰을 하고자 한다. 그리고 성경의 교훈에 따른 경건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 살펴보려 한다. 그에 대한 효과적인 전개를 위해, 한국교회 기도의 특징과 그 원인을 간단하게 살핀 후 기도에 관련된 성경의 직접적인 몇몇 본문들을 통해 그 의미와 실천에 대해 비판적 고찰을 시도하고자 한다. 이로써 개혁주의 신학정신을 가진 성도인 우리는 참된 기도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 그 교훈을 얻게 되기를 바란다.

 

 

Ⅱ. 한국교회 기도의 특징

한국교회의 기도 가운데는 전통종교를 배경으로 한 지극히 한국적인 특이한 기도 방법들이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들은 새벽기도1), 철야기도, 통성기도, 중보기도 등이다. 한국교회에서는 새벽기도를 매우 중시한다. 독실한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 새벽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위선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다수 교회들에서는 매주 한차례 모여 철야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 교회전통으로 되어 있다. 또한 한국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통성기도는 매우 특이한 토착화된 기도방법이다.2) 여러 성도들이 모인 공적인 자리에서 기도를 할 때는 질서를 따라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도록 기도해야 하지만,3) 한국교회의 통성기도는 제각기 자기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옆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각자 큰소리로 기도한다. 그리고 중보기도4) 또한 한국교회의 특이한 기도방법이다. 물론 서구의 교회들이나 역사상의 많은 교회들에서도 이웃을 위한 기도가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웃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중보기도는 그런 교회들의 중보기도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중보기도는 이웃을 위한 기도라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그 자체는 문제가 없겠지만 이웃의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게 살펴져야 할 부분이다. 즉 한국의 성도들은 자신이나 타인의 출세나 건강, 사업 성공, 질병의 치유, 다른 사람이 예수 믿도록 하는 것 등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이웃이 잘 되도록 비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내용들이 과연 기도의 내용이 될 수 있느냐 하는 점과, 어떤 방식으로 기도가 이루어져야 하는가 하는 점이 필히 고려되어야 한다. 위에 열거한 기도의 방법이나 내용들은 온전한 다른 교회들에서 찾아보기 힘든 한국교회 기도의 특성이다. 따라서 이런 기도들에 대한 성경적인 명확한 검증이 필요하다. 기도를 잘못 이해하여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으면서 경솔하고, 몰염치하고, 무례한 태도로 합당치 못한 일을 하나님께 조르며 닥치는 대로 요구하는 것은 도리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5)

그렇다면 한국 기독교인들은 과연 누구로부터 그러한 기도를 배웠는가? 앞에서 언급한 새벽기도, 철야기도, 통성기도, 중보기도 등 기독교 역사상 다른 건전한 교회들에 있지 않은 이런 기도의 형태들은 과연 어디서 왔는가? 우리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기도의 형태들은 거의 한국 전통종교에서 차용된 것이라는 점이다.

19세기 말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일반 한국 백성들 가운데는 새벽기도를 하고 철야기도를 하는 이들이 많이 있었다. 새벽기도는 여성들의 종교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극히 소수의 남성들 중에 새벽기도를 하는 자들이 있었으나, 당시의 가정주부들은 대개 가정의 무당역할을 했으며 매일 새벽 정화수를 떠놓고 조왕신에게 빌면서 성미(誠米)를 바쳤던 것이다. 그것이 나중에 길선주 목사의 새벽기도와 접목이 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의 전통이 되어 있다. 이는 원래 기독교의 기도방식이 아니라 한국의 전통적 기도의례와 습합된 토착화 종교행위의 대표적인 것이다.6)

철야기도는 원래 산기도와 관련이 있었다. 기독교 전래 초기에 유행하다가 1970년대 이래 기도원 운동과 더불어 일어났던 한국교회의 산기도 운동은, 지금은 시들해졌으나 한 때는 산기도를 하지 않으면 진정한 영적 신앙인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될 만큼 활발하던 때가 있었다. 그 때 철야기도는 더욱 활성화 되었으며 지금껏 철야기도는 한국교회의 중요한 특징으로 남아 있다.

또한 기독교 역사상 한국교회에만 보편화되어 있는 통성기도는 우리 민족의 한풀이와 연관이 있으며 한국무속과 연관된다. 한국교회의 통성기도는 가슴에 쌓인 것들을 큰소리로 토해 냄으로써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받았던 것이다. 한국교회 초기에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을 한풀이의 한 모본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많이 있을 정도였다. 기독교 전래 초기 성경을 받아 읽던 사람들은 공관복음서의 귀신을 쫓아내는 일과 질병을 치유하는 사건, 그리고 예언자들의 영체험 소명기사를 접하면서 그들의 무의식 속에 있는 무속종교와 유사한 종교로 생각했던 것이다.7)그러한 신앙적 사고의 틀을 보유한 채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인 기독교인들은 기도를 하면서도 그와 상응하는 종교적 개념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중보기도는 구복(救福)적 방편으로서의 기도이다. 이 역시 한국 전통종교의 기복적이며 악귀의 영향을 물리치는 종교성과 연관된다. 무속신앙에서 신령은 구슬리고 달래야할 대상이다. 신령을 잘 달래고 그에게 잘 보이게 되면 복을 받을 수 있으며, 재앙을 물리칠 수도 있다고 믿는 것이다. 기독교의 신앙이 한국의 무속신앙의 종교적 관념과 명확한 구분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을 잘못 오해하게 된 것이다. 그런 오해에서 발생한 것이 바로 기복적 중보기도인 것이다. 이외에도 40일 새벽기도, 백일 작정기도, 영역확보를 위한 땅밟기 기도8) 등은 한국적 종교풍습에서 온 것들이다.

 

 

Ⅲ. 교회의 기도로서의 기도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살아가며 언어적으로 혹은 비언어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 곧 기도이다. 올바른 믿음을 가진 성도라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으며 기도를 쉴 수도 없다. 믿음이 있는 자로서 기도하지 않으리라 결심을 해 보라. 그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 진정한 믿음이 있다면 설령 아무리 기도하지 않으려 애쓴다 해도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9)

성경이 말하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신앙인의 호흡이라 할 수 있다. 그 호흡은 선택적이 아니며 잠시도 중단할 수 없는 필수적인 것이다. 개별적 기도를 포함한 성도들의 모든 기도는 교회를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란 보편교회와 그 교회에 온전히 붙어있는 지교회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와 무관하게 자기 마음대로 하는 기도는 참된 기도라 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자기 욕심이나 욕망의 표출 이상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씀선포와 성찬을 기본으로 한 삶의 표현으로서의 기도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교제라 할 때 그것은 말씀선포와 성례와 연관됨을 의미한다. 기도는 아무나 자의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례를 통해 교회에 입교한 성도가 된 자10), 즉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 된 자여야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하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말씀선포와 성례가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방편은 없다. 각 개인 성도들의 일상생활 역시 말씀선포와 성례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성도들의 모든 기도는 선포된 말씀과 성도들이 함께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며 기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엄하심을 깊이 생각하며 세상의 걱정과 애착을 모두 버리고 나서 기도하는 사람만이 합당하게 기도하는 성도이다.11) 이는 주님의 말씀과 성찬에 온전히 참여하는 성도들이 가지는 기본자세이며,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온 교회와 그에 속한 의미를 확인하는 방편이 되는 것이다.

외형적으로 구분한다면 주일 공예배 시간에 하는 공기도와 성도들이 개별적으로 하는 사적인 기도를 들 수 있다. 공예배 시간의 기도는 원칙적으로 감독자들에게 맡겨진다. 즉 장로교에서 공기도는 말씀과 성도들의 삶을 감독하는 장로들이 담당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는 장로의 종교적 특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직분에 기초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공적인 기도를 할 때는 교회를 대표하는 기도이므로 직분에 따른 상당한 준비가 필요하다. 즉 하나님과 현실적 교회의 관계 속에서 어떤 기도를 해야 할지에 대한 개별적인 말씀묵상과 더불어 각별한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공예배에서 대표기도를 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은 겸손하게 전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의 영광을 전혀 생각지 않으며 자기의 가치를 일절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12) 그러므로 공적인 기도를 위해서는 사전에 준비하는 자세는 매우 중요하며 생각나는 대로 기도하는 것이 익숙해진 우리시대에는 미리 기도문을 작성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기도하는 것이 권장할만할 것이다. 즉 공기도는 자기 개인적 환경이나 기분에 따라 기도할 것이 아니라 준비된 기도여야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과 교회 사이의 공적인 거룩한 교제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개별적인 기도는 공기도와 달리 사전에 준비하여 하는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일상적인 삶을 하나님 앞에 고백적으로 드러내는 기도이다. 그렇지만 개별적인 기도를 하며 자신의 개인적 목적이나 욕망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께 요구하며 간구함으로써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널리 드러내며 그의 이름을 선포하는데 도움이 되는 일을 구함과 동시에 우리자신에게 유익한 은혜를 구해야 한다.13) 물론 그 기도는 교회와 연관된 상태의 기도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 때 이루어지는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우심과 자신의 죄된 모습을 보는 가운데 회개와 감사, 찬양의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성도는 개별적인 자기의 풍요로운 삶이나 윤택한 생활을 위해 기도할 수 없다.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과 그 가운데 형성된 교회의 존재에 있는 것이다. 즉 궁극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기도는 단순히 개인을 위한 신앙의 방편이 아니라 종말론적 개념에서 교회를 굳건히 세움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도를 본질상 하나님 중심으로 이해해야 하느냐 아니면 인간중심으로 이해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기도의 출발점은 하나님이며, 성도가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그의 은혜에 신앙적 반응을 하는 것이 기도라 이해해야 한다. 위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살고 있는 그의 백성을 끊임없이 돌보시며 부르실 때 그에 대한 반응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 중심의 기도여야 한다. 즉 인간들이 기도의 내용을 정하고 그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요청에 따른 하나님 중심의 기도여야 하는 것이다. 성도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그의 뜻이 이루어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야 한다. 기도하는 인간이 그것으로 말미암는 공적을 이룸으로써 하나님께로 부터 인정을 받고자 한다거나 자기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것은 올바른 기도가 아니다.

하나님을 이용해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적을 이루겠다고 하는 것은 도리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세속적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기도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기도하는 자가 있다면 아직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고 있는 자이며, 아직도 더 많은 것을 얻고자 기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만족의 표시 이상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성도와 하나님 사이의 친밀한 대화이며, 우리는 경외심과 겸손한 자세를 가짐으로써 잡다한 요구를 함부로 늘어놓거나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범위를 넘어 탐하는 일이 없도록, 순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존엄성이 우리에게 무가치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14)

기도하는 자는 기도응답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우리는 성경의 교훈을 통해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응답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우리가 올바른 기도를 한다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한다. 나아가 많이 기도하지 않고 제대로 기도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 더 성숙한 복음적인 자세이다. 물론 이 말은 기도를 소홀히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말씀에 따라 올바르게 기도해야 함을 뜻한다.

우리는 기도하지 않고도 이 세상에서 잘 살아가는 사람들을 숱하게 보고 있다. 복음을 알지 못하여 기도하지 않는데도 출세를 하고 사업에 성공하며 명예를 얻어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되고 싶어서 늘 기도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상황 가운데서 한평생을 살아가는 교인들도 수없이 많이 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바 그런 식으로 응답하시는 분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성도들의 일상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알게 된다면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기도는 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하나님이 자기의 욕망을 채워주는 존재인 양 불경한 생각을 하며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불신앙의 표현이자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15) 성도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올바르게 기도한다면 항상 하나님의 응답과 연결되어 존재하게 됨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도의 응답은 개별적인 미시적 응답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종말을 향한 교회의 거시적인 응답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Ⅳ. 성경은 기도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우선 우리의 기도의 표준이 되는 주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살펴보자. 주기도문은 성도들이 항상 암송하도록 주님께서 주신 말씀이 아니다. 도리어 성도들의 모든 기도가 그 기도의 범주를 넘어서지 않도록 교훈해 주고 있는 계시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 범위를 넘어 다른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자들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에 무엇을 첨가하려는 것이므로 그런 자세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의 범위 내에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고 자기의 욕망에 사로잡혀 불신앙 가운데 기도하므로 진정한 응답을 받을 수 없다.16) 우리는 주기도문에 포함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구하거나 기대해서는 안된다.17) 이제 주기도문 가운데 흔히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위한 기도라고 하는 몇 가지 내용들18)을 선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주님께서는 주기도문의 내용 중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는 말씀을 주시며, 그것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면서 날마다 먹을 양식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거의 날마다 암송하거나 주문처럼 읊조리고 있는 그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 가운데는 굳이 그런 기도를 하지 않아도 넉넉한 양식이 이미 준비된 자들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기도해도 그 일용할 양식조차 가지지 못하는 자들도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의미를 당시의 궁핍하던 시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즉 당시에는 그날 하루 먹을 양식조차도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친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의미를 단순히 그렇게 단정지어 말할 수 없다. 그 진정한 의미는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상태유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적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잠언서 기자는, “허탄한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8,9)고 노래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간구를 하도록 하신 것은, 제자들이 먹을 양식에 대한 우려를 표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삶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우리는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늘로부터 허락된 만나를 먹던 원리를 잘 기억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용할 양식을 날마다 공급하셨으며(출16:4), 그들에게는 식량의 남음이나 부족함이 없었다(출16:18).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시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게 한 것은, 일용할 양식 이상으로 과다한 양에 얽매이지 않도록 요구하신 것이며 동시에 그 양식마저 없어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나님께 구하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그것은 결국 현재 먹고 살아가는 양식마저도 종말적 성취와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19) 즉 이 세상에서 먹고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천국에서의 삶의 의미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요구는 예수님의 제자들 뿐 아니라 오늘 그를 주님으로 알고 따르는 모든 성도들에게 동일한 가르침이 되고 있다.

주님께서는 또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여기서 시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은 유혹에 빠지지 않음을 뜻한다. 학자들 중에는 여기의 ‘시험’을 무서운 시험 즉 사탄의 세계에 의한 시련이나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말한다.20) 그러나 그런 해석은 충분하지 않다. 시대나 지역에 따라서는 그런 형태의 시련을 전혀 겪지 않은 교회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언급하는 ‘시험’이란 부정적인 개념을 지닌 일반적인 유혹에 국한되지 않는다. 즉 물질적 유혹이라든지 성적인 유혹, 혹은 쾌락의 유혹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유혹이란 세상적 가치에 대한 유혹을 말하는 것이다. 그 유혹은 일반적인 도덕률을 기초로 한 유혹 이상의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뒤에 따라오는 말씀인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문구에서 ‘악’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의 값어치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경험이나 이성적 안목에서는 훌륭하고 좋은 것으로 비쳐질 수 있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세상에 속한 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적 가치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치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 세상적인 가치를 진정한 가치로 알고 살았지만 이제 주님을 알게 되어 세상의 가치를 허망한 것으로 알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가치만을 참된 가치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특히 주님께서는 종교적 유혹을 경계하며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가르치신다(마16:6, 막8:15). 그들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 말미암은 세상적 가치와 혼합된 가치관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구축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런 차원에서 세상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 역시 그와 동일한 교훈 가운데서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는 죄의 용서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계신다. 성도의 기도는 죄의 용서와 관련된 기도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더불어 이미 죄를 용서받은 성도들이 또다시 죄 용서를 위해 기도하라는 그 말의 의미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기도의 요청은 시대에 관계없이 모든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내용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었으니 하나님께서도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고 요구하라는 조건적 언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우리가 그렇게 했으니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여 달라고 할 수 있다든지, 혹은 반대로 주님께서 그렇게 기도를 가르쳤으니 우리는 모든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야 한다고 설명할 것도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바는 ‘용서의 의미’를 설명하며 우리의 죄에 대한 그런 용서를 누릴 수 있도록 간구하라는 것이다. 즉 용서받지 못하면 그 죄나 잘못에 얽매인 상태로 놓여 있지만 용서받게 되면 그것이 완전히 소멸되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소멸시키시는 분임을 알고 그렇게 기도하도록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죄의 개념은 하나님께 진 빚(debt)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이 역시 종말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21) 즉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현재적으로 체험되는 것은 종말적인 용서와 연관된 것이다. 이는 성도가 이 세상 가운데서 누리는 자유를 함유하고 있다. 우리로부터 자유함을 누리는 사람들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간구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오늘 우리 역시 그와 동일한 선상에 놓여 있으며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지만 우리는 여전히 죄된 세상 가운데 살면서 잘못된 가치의 영향을 받으며 그에 얽매인 채 투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죄를 소멸하시는 주님을 의지할 때 우리에게 진정한 감사와 찬송이 울려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가 개개인 성도의 삶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교회와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위한 기도임을 잘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요14:14;15:16;16:23)고 요구하고 있다. 이 세상의 어떤 인간도 스스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만큼 자격을 갖춘 자가 없으며 그에게 나아갈 수 없다. 단지 그리스도의 이름에 힘입어 그렇게 할 수 있을 따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말은 곧 “네 마음대로 기도하지 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성도는 기도할 때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도한다. 즉 성부께 기도하면서 성자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성자가 포함된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또다시 성자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기도하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풍요로워지기 위한 목적으로 기도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위한 기도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직접 연결되는 개념이다.22)

또,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비롯한 여러 교회들에 편지하면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엡6:18)고 명령하고 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의미는 교회가 어떤 신앙적 자세를 가져야할지 보여주는 말씀으로서 무시(無時)로 기도하라는 의미이며, 매일 시간을 정해두고 기도하라는 말과 차이가 있다. 이는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시간을 정해두고 기도하는 것을 경직된 원칙으로 삼게 되면 이는 기도하는 시간 이외에는 기도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즉 매일 새벽과 매일 저녁에 기도한다는 말은 자칫 그 시간 이외의 낮시간 동안에는 기도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기도를 하다가 쉬다가 하는 일을 되풀이 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쉼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는 이 말씀과 함께 기록된 데살로니가전서 5:16과 18절 말씀과 조화롭게 설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말씀들은 “항상 기뻐하라”(16)와 “범사에 감사하라”(18)이다. 이 땅에 살아가는 성도가 과연 항상 기뻐할 수 있으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가?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살면서 당연히 많은 고통과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시점에서 감성적으로 기뻐한다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리고 엄청난 괴로움 가운데서 감사함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들이 환란(살전1:6)을 당한 것과 바울 자신이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한 사실(살전2:2), 그리고 성도들은 항상 긴장 가운데 살아야 할 것(살전5:5) 등을 말하고 있다. 그런 삶 가운데서 가지게 되는 기쁨이나 감사함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류의 감성적인 것이 아니다.

어떤 일이 발생해도 무조건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말은 자칫 운명적 낙관주의에 빠지게 할 우려마저 있다. 그것은, 이래도 하나님의 뜻이며 저래도 하나님의 뜻이니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면 된다는 식이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런 운명적 낙관주의를 가르치고자 한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말하는 기쁨과 감사의 의미는, 말씀과 성찬에 참여하는 교회 공동체가 얻게 되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직접 연결되는 것이다. 즉 그 말의 진정한 의미는 교회에 속한 성도의 소망이 천국에 있으며, 어떤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뜻이다. 이처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도 위에서 말한 내용들과 함께 천국에 소망을 둔 자로서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말고 항상 그와의 교제 가운데 있으라는 의미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산상보훈에서, 기도할 때 ‘골방에서 기도하라’(마6:6)고 당부하고 있다. 이는 개별적인 기도에 대한 교훈이다. 우리는 혹 남에게 기도하지 않는 사람으로 비쳐질까 우려하지는 않는가? 기도는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다. 남보다 더 많이 오랜 시간 기도하는 것이 결코 자랑거리가 될 수 없으며 유창한 말솜씨나 외형적 경건이 더 능력있는 기도가 되게 하는 것도 아니다. 소위 ‘기도의 사람’으로 인정받으려는 노력은 유치한 발상일 따름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의미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여 행하는 종교의례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원한다면, 기도를 자기 영광을 위한 방편으로 삼으려는 위험에 빠져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마6:5).

그러므로 교회의 교사는 하나님과 인간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해야 하는 것으로 성도들을 가르쳐서는 안된다. 종교적 자기 욕망에 따라 열성적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신앙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랜 시간을 투자하여 열심히 기도하라고 가르치며 배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에서 교훈하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온전히 살며 기도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하게 되면 기도는 성령의 도우심에 따라 저절로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자녀를 교육하면서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가르치거나 효도하는 방법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올바른 자녀로 양육하게 되면 효는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Ⅴ. 올바른 기도와 잘못된 기도에 대한 이해

인간은 스스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존재인가?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위해서 기도할 수는 있을지언정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는 못한다. 로마서 8장에는 성령과 성자께서 자기백성을 위해 중보자로서 기도하고 있음을 잘 설명하고 있다(롬8:26,34).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우리의 기도 때문이 아니라 성령과 성자의 기도 때문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힘을 다해 기도한다는 의미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알아 그 가운데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의미를 항상 부여잡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기도의 핵심을 이야기하면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요구한다. 이 말의 의미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따르고 그 다음에 네가 원하는 것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나라와 의를 따르는 것이 너희의 전부’라는 의미이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할 것이라”(마6:24)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다. 이는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따르면서 동시에 네가 원하는 세상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과 동일한 의미이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것이 그 기본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 그의 뜻에 합당한 것들을 진심으로 기도하며 구해야 한다.23) 그에서 벗어나는 것은 자기를 위한 기도이므로 진정한 기도가 될 수 없으며 그것은 이방인들의 기도와 다르지 않은 기도가 될 수밖에 없다.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인한 신앙적 반응으로서의 하나님과의 교제와 대화이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에서 자생적으로 우러나오는 기도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부패한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기도는 그것이 설령 진심이라 할지라도 그것 자체로서는 악한 것일 따름이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이 없는 기도는 가증한 것이라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28:9).

우리는 성경에서 떳떳한 자세로 많이 기도하는 자들을 보게 된다. 그들은 주로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은 자들이다. 이와는 달리 사도들 가운데서는 당당한 자세로 많이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이 기도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 아니라 삶 가운데서 항상 기도하며 은밀한 가운데 기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한 사도들처럼 기도하지 않는 것은 외형상 아무리 그럴듯해 보일지라도 올바른 기도가 아니다. 바리새인들이 책망을 들은 것은 기도를 자기들의 의의 방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을 ‘외식하는 자’라 불렀으며 그들의 기도를 본받지 말도록 요구하신 것이다. 우리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한 비유’(눅18:9-14)를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스스로 의롭다고 믿는 자들(18:1)에게 그 비유의 말씀을 주신 것이다. 비유 가운데 등장하는 바리새인은 기도하기를 좋아하며 자기의 빈틈없는 종교생활로 인해 매우 당당하다. 그 바리새인은 자기가 얼마나 의로운 자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며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8:11,12). 그는 자기의 그런 삶이나 기도가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열성적인 종교적 삶과 자신의 그러한 기도마저도 하나님이 좋아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의한 자로 말씀하고 계신다. 이처럼 어떤 경우에도 기도가 자기의 의를 나타내는 방편이 되어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에게 기도를 강조함으로써 자기는 기도를 많이 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음도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산상보훈에서, “기도할 때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7,8)고 가르치셨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두 가지 교훈을 얻는다. 하나는 기도는 말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했던 말을 되풀이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불신앙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므로 인해 동일한 요구를 되풀이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기도하면서 말을 많이 하는 것은, 하나님께 조차 자신이 기도를 많이 하는 자요 의로운 자임을 보여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24) 그러므로 중언부언하는 기도나 유창한 언술로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기도자세는 하나님 앞에서 오만한 태도이다. 인간의 많은 말이나 유창한 말로 하나님의 귀를 자극하면 그로부터 무엇을 얻어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나 사람을 설득하듯이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자세는 잘못된 것이다.25) 나아가 동일한 내용을 되풀이해서 많이 기도하는 것을 장려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도리어 믿음이 없다는 증거가 될 따름이다.26)

성경은 우리에게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로 기도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다(마6:31). 이는 생활의 방편을 위한 기도로서 다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현실적으로 기도하는 내용은 어떤가? 어쩌면 성경에서 그런 것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내용조차도 우리 시대의 일반적인 기도와 비교한다면 훨씬 소박한 내용들일 수 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의식주 문제는 삶의 기본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런 기도조차 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자기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것들이다. 하물며 우리 시대에 있어서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영광과 픙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야 오죽 이방인들의 기도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결코 그런 것을 위해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으며 모든 사도들이 그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이다. 종말을 눈앞에 둔 세상 끄트머리에 살고 있는 우리 역시 그 가르침을 온전히 따라야만 한다.

사도바울은 이전에 가치 있는 것으로 알던 것을 그리스도를 알고 난 이후로는 배설물(빌3:8)로 여긴다고 말한다. 이는 그가 이전에 가졌던 종교적 열성과 그 결실들이 더 이상 자신의 의를 내세울 수 없음을 고백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복음을 알기 전에 하나님과 자신에게 소중하다고 여기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무가치한 것이라 밝히고 있다. 그런 것들은 세상의 값어치에 의한 것일 뿐 그리스도 안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울이 배설물로 여긴 것들을 종교적으로 의미화하여 하나라도 더 얻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는 않은가 반성해 보아야 한다. 그것이 오히려 욕망적 추구대상이 되어, 그런 것들을 더 많이 얻고자 기도한다면 출발부터 문제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Ⅵ. 결론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의 의미와 목적을 잘 이해해야 한다.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써 그를 찬양하기 위함이며, 그것을 통해 은혜의 감격을 누리게 된다. 기도는 결코 공로가 되지 못하며 남에게 자랑삼을 방편이 되지 못한다. 그런 것을 기대하며 기도하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심한 책망을 들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성경에, 오늘날 우리처럼 복을 달라고 기도한 사도들이 있는가? 성경에 자식이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바라며 기도한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또한 사업성공을 위해 기도한 사람이 있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건강을 위해 기도한 사람들이 있는가? 좋은 배우자를 얻기 위해 기도한 예가 있는가?

우리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원해 기도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주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자기 자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사업에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어불성설이다. 그러한 자세는 자기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과 결부시키는 매우 위험한 판단이며 비신앙적 행위이다.

우리는 자식이 성공하도록 기도할 것이 아니라 성공을 탐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하며, 건강을 위해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 건강함에 대해 ‘겸손한 감사’27)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이웃의 사업성공을 위해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 사업을 하면서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하며, 질병에 걸린 사람이 빨리 낫도록 기도할 것이 아니라 병중에서도 천국의 소망을 잃지 않고 주님만을 의지하며 참된 감사의 마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며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예수 믿도록 기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은 백성이 어디에 있는지 염두에 둔 지혜의 기도를 해야 한다. 그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그 모든 것들을 얻게 될 때, 우리는 ‘겸손한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많은 시간을 들여 열심히 기도하는 인간의 종교적 행위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 응답하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도리어 기도하지 못하고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더 큰 은혜가 아닐까?

열심히 기도하는 것보다 본질적으로 더욱 중요한 것은 올바르게 기도하는 것이다. 새벽기도나 철야기도를 위해 오랜 시간을 투자하여 열성적으로 기도하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 새벽이나 밤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올바르게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하는 가운데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하며, 시편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며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인간의 본성이나 종교적 경험을 통해 배우고 익힌 기도를 버려야 한다. 성경의 가르침을 떠나 이방인들의 종교적인 성향에서 배운 기도를 그만두어야 한다. 그 대신 주님께서 성경을 통해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과 방법을 올바르게 알아 그에 순종함으로써 기도해야만 한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며, 주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귀한 방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말씀을 통해 깨닫고 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단순히 기도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면 대신 소극적이며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려 한 것이 아니다. 기도는 개인의 목적이나 생활의 방편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한 것임을 밝히려 했다. 우리는, 모든 기도가 주님께서 그의 나라를 위해 이룩하신 교회 공동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28)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참된 기도를 회복함으로써, 교회의 교회됨이 세상 가운데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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