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관복음(정훈택 교수)
공관복음이란?
마태,마가,누가 복음을 함께 다루는 과목이다. 그 이유는 마태,마가,누가 세 성경의 성격이 비슷하며, 같은 시각을 가지고 예수님의 생애를 보도하기 때문이다.
우선 2가지 전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1>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
2>요한복음과는 상당히 그 내용이 다르다는 점이다.
공관복음 자체가 그런 내용을 가지고 있다.
< 본 강의의 목적>
1>3복음서의 내용
2>각 복음서의 특성
3>복음서를 바르게 주석하는 요령을 습득
<과제>
복음서 주석> 헬라어 실력 + 역사적 지식을 이용하여 본문 해석 + 특별한 해석 원리를 본문에 적용 +① 공관복음서의 비교 연구(공관복음서 문제의 이해)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눅6:20>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 두 구절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예수님이 과연 어떤 대상을 두고 복되다고 하신 것일까? 이것을 비교하면서 연구하려면, 어떤 사람이 진짜 복된 사람인가?가 문제가 된다.
민중신학이 나오게 되는 근거가 누가복음에 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위해 오셨고, 그들을 복되다고 했으므로 현대 기독교 지도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민중신학자들은 주장한다. 두 구절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그런데 이 구절들에서 정확하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문맥을 살펴보면) 가난한 자들에게 있지 않다. 문제는 제자들에게 있다. 공관복음서 문제를 이해하고 주석하는 것과 그냥 주석해 나가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목회과제>
언제라도 결정적인 해답은 복음서에 와서 얻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머지 과제는 평생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 이 공관서문제는 초대교회부터 문제시되어 왔으나 2,000년 후에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결코 어떤 결론에 도달한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그러나 스스로 연구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민중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어디서 나오는 것쯤은 알아야 한다. 교회 안에서는 청소년들이 의문을 제기해 올 수도 있다. 그러므로 평생 이 문제를 가지고 연구해야 할 과제로 남겨 두어야 한다.
<과제>
1. 공관복음서를 대조하면서 1번이상 읽을 것(공관복음 대조성경)
<차이점이 나는 부분에 표시하라. 정확한 일치점(사건의 경우) 표시를 하라.
공관복음서대조성경이 컬러풀하게 하라.
<유의점2가지>
1)한글 성경의 차이점이 헬라어 성경에는 차이점이 아닐 경우가 있다.
(4복음서 헬라어 대조성경)
2)한글 성경을 읽을 때 전혀 나타나지 않는 문제가 헬라어 성경에서는 나타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아람어야 히브리어냐?를 논한다면, 한글성경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주석류나 연구서를 읽어야 한다.
3. 개인적 관찰이 진행되는 동안 중요한 차이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별도의 표를 만들것.
*차이점 - 동일 사건을 이야기 하면서 공관복음 사이에서 차이점, 같은 사건을 기록함에 있어서 똑같이 기록되어 있다(일치점)는 점에 관심. 편집부(기자들이 편집한 것)를 관찰.
4. 필독서를 읽을 것.
‘공관복음문제’
‘신약의 초석’(공관복음문제와 관련된 부분만 읽을 것)
10월 6일 강의시간 때 퀴즈,
‘열매로 알리라’ (리포트 용지 3-4매) - 책의 요약이 아님
책을 읽고 솔직하게 느낀 소감. 비판.
1/2은 책을 요약, 1/2는 소감
독후감 - 10점
한국교회가 보수주의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엇던 것은 개혁성경이 보수적 입장에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한국교회에서 보수주의 입장에서 새번역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눅1:1에 <·········붓을 든 사람들이 많았더라 >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책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실제 2,000년 누가에게 가면 붓이 없었다. 그 시대에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해석을 해서 번역한다. 그러므로 누가는 직접 붓을 들지 않았지만, 2000년후의 필기구의 모습으로 번역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른 해석을 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번역에도 해석이 필요하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법서나 사전을 찾기 보다는 기도나 명상을 통해서 직감을 얻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 즉 성령의 조명과 감화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도 성경해석의 한 방법이다.
개혁신학은 지금까지 그의 사랑하는 종들을 통해서 기록한 66권성경만으로 충분하다. 이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신학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예수님께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그것이 성령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 모르므로 혼란이 일어난다.
개혁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찾는 것은 이러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2가지 방법
1>성경전체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란, 문법적 해석방법이 있다. 문법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역사적인 방법 - 역사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
그 이외의 여러가지 방법들은 전체에 적용될 수 없다. 부분, 부분 적용될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어떤 본문에 어떤 해석을 해야 할 것인가는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본문 자체에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범죄하거든 눈을 뽑아 버려라’는 말씀을 듣고 직설법을 이해한다면 모두 눈을 빼어 버려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과정법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이 말씀이 유럽으로 건너갔다. 그들이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한 경우도 있다.
예수님께서 그런 과장법을 사용하셨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예수님께서 과장법을 사용하셨다면 특별한 방법이 동원되어야 한다.
*공관복음서를 이해하기 위해서 3가지 피할 것이 있다.
1)개별적 해석방법의 보류
마태복음에 있는 것은 있는 그대로, 누가복음에 있는 것은 있는 그대로 두고 해석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마태복음과 로마서 사이에 충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충돌이 있다면 누가 그 성경을 없앨 수 있는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왜 기록된 말씀대로 보지 않고 따로 보려고 하는가?”
우리가 유럽 신학자들을 자유주의자라고 해서 쉽게 비난해서는 안된다. 최소한 그들은 기록된 성경을 그대로 인정하려는 기본적인 태도가 서 있었다.
그 결과 제안하는 것이 3가지이다. 우리의 선입관념이 강하게 서 있기 때문에 본질에 도달하기가 어렵다. 개별적 해석방법을 보류하라는 것은, 성경을 조각조각 끄집어 내어서 재구성하는 것이다. 조직신학자들이 이 작업을 하였다. 그들의 나름대로 새로운 작업을 하였다. (여러분들이 설교할 때 어떻게 하는가?) 인내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설교한다면 어떻게 설교하는가? 잠언서에서 인내라는 구절을 가지고 창 -계 인내 설교를 한다면?
마태복음은 조각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다. 한단어, 한문장이 그 문맥 속에서 가지는 의미가 있다. 예를 들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구절을 가지고 해석 할 때, 그 구절만을 가지고 한다면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의 민중의 지도자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문맥을 살펴 보면,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마태복음에서도 마찬가지다. 바다위로 걸어오라는 말씀도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이지, 오늘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빠질 수 밖에 없다. 복음서를 분해해서, 진짜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을 분류하고, 진짜 일어났던 일과 믿음으로 본 일들을 분류해 버리고 해석하였다. 그 뒤에 종합적인 방법들을 동원해서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2) 조화, 종합적인 해석방법을 보류하라.
성경의 내용들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서 종합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다. 66권이지만 저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뭔가 동일한 내용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성경전체를 탐험하여 종합을 시도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짜맞추기 위해서는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의 특성들이 무시되어 버린다.
<나의 이 말을 듣고도 행치 아니하는 자는 모래위에 지은 집과 같다>
산상설교에서도 당연히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이 말이 말세 종말의 심판과 같단 말인가? 우리는 로마서에서 구원론을 배웠는데,·················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산상수훈에서는 예수님이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 같지만, 사실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성경해석이 옳았는가, 잘못되었는가? 설교가 잘되었는가? 잘못되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본문을 알아야 한다> 과연 내가 바르게 설교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본문으로 돌아와야 한다.
성경이 결국 우리가 바로 가고 있는가를 늘 이야기해 주고 있다. 성경은 66권 이전에 1권으로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결론적으로는 이런 태도가 필요하다. 복음서를 관찰할 때, 복음서를 독자적으로, 독립적으로, 종합적으로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 주간에 공관복음서 문제 해결을 위해서복음서의 내용을 가장 잘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2가지 방법론을 고려해야 한다. 오늘은 그 세번째로 <신학적인 방법을 잠깐 보류>해 달라는 것이다.
* 신학적인 방법 보류
- 이 방법은 본문에서 성경의 본문내용을 파괴한다. 성경으로부터 핵심되는 내용을 빼내어 성경을 신학적 체계 안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조직신학자들이 해석하는 방법이다. 문맥과 각 책으로부터 내용을 다시 조직하고, 서로 조화시키기 위해서 신학적 조화를 시도한다.
<설명>
이 방법은 예를 들어보면 쉽게 알수 있다. 종교개혁시대부터 개혁교회 전체에 가장큰 영향을 끼친 구적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구약 성경에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연결시켜놓은 것이 많다. 마< 너희가 너희 말한 것으로 의롭다함을 받고>라는 구절 /약< 믿음에다 행실을 덧붙이고자 하는> 구절 / 산상설교등이 있는데 이 구절들은 조직신학자들이 해석하기 어려워하는 구절이다.
<어느 주석가의 말>
이 구절들은 우리의 심각한 사색을 요한다. 왜냐하면 이 구절들에서 행위 구원론을 가르치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석해 버리면 개혁신학체계에 잘 맞지 않는다. 그래서 해석을 붙인다. 이 구절 역시도 예수님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신학적 체계 속에서 모든 구절을 해석해 버린다.
그래서 교회 설교자들은 <영적 의미>를 내세운다. 어떤 구절이 나올 때, 자기의 신학 체계에 따라서 성경을 해석해 버리는 것이다.
신학적 해석방법을 사용하면 한 교단 안에서도 일치점을 찾지 못한다. 영적 해석을 하다보면 자기의 체계를 본문안에 넣어서 해석하게 된다. 성경연구나 성경해석의 결과로 탄생한 신학의 틀을 가지고 해석하려는 경우, 위험하다. 특히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에 대해서 이러한 작업을 한다. <신학적 해석방법>은 누구나 다 사용할 수있다. 그 방법을 사용하면 누구나 자기의 신학이 옳다고 생각한다. <표면적으로는 이렇게 보이나 진짜는 그렇지 않다>고 해석한다. 신학사상, 교리, 체계는 성경연구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지 <성경해석의 원리>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신약성경은 <상황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를 들면, 베드로가 바다 위로 걸어간 사건이 있다. 이것은 베드로라는 특수한 사람에게 준 경우인데, 이것을 보편적으로 해석해서 자기가 그렇게 직접 바다에 뛰어내려 본다면.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신학에도 상황성이 있다. 칼빈주의나 개혁주의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가? 개혁주의자들은 그들이 개혁교회에 자라나면서 그들이 교육받은 교리가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해서 엄청난 교리를 찾아냈다. 종교개혁자들은 자연히 믿음의 문제를 강조할 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종교개혁자 후대의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그들의 스승이 믿음만을 강조하니까, 삶의 문제를 등한시 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그들의 상황이 믿음을 강조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외국 사람들은 그들의 삶이 기독교적 삶의 양식이 그대로 베어 있었다>
<정교수님의 견해>
믿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인정한 뒤, 행위에 대해서 강조한 것이다. 왜 그런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는지, 그 상황성을 무시해 버리고, 신학체계에 대해서만 짜맞추게 되면 원래의 의미를 다 잃어버리게 된다. 초기 단계에서는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지만, 충돌하는 부분에서는 비유적, 영적인 해석으로 바꾸어 버린다.
교회 사이의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성경해석의 문제>이다. 성경해석과 교리체계가 달라버리면 영원히 만날 기회를 잃어버린다. 신학적 해석방법을 자의적으로 하게 되면 같은 교단 안에서도 나뉘어지게 된다. 소위 영적 해석, 신학적 해석을 적용하면서 본문을 바꾼다면 분리될 수 밖에 없다.
<기독교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신학적 해석방법을 포기해야 한다. 우선은 본문을 가장 정확하게 해석해 내는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비록 오랜기간이 걸린다 하더라도 그 방법을 사용하면 기독교는 하나가 될 희망이 있다. <신학적 해석>의 방법은 성경연구의 결과인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해석을 제대로 했는데도 불구하고 칼빈주의에 말하는 그 어떤 이론이 나오지 안나올 경우, 성경이 잘못된 것인가, 신학체계가 잘못되어 있는가? 신학체계를 고쳐야 한다.
개혁신학이 모토로 낸 것은 <오직 성경으로>이다. 이 3가지 방법들은 성경본문의 독자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한 본문의 특징을 파괴할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
복음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룬다.
<복음서의 문학양식>
복음서는 어떤 종류의 책인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인간언어가 가지고 있는 문학양식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본문이 서정시적인 양식이라면 시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또한 헬라어 구조를 파악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신약신학이 독자적으로 길을 걸어오는데(17세기이후) 신학자들은 신약성경의 문학양식을 파악해야 했다.
<복음서는 전혀 새로운 문학양식>이었다. 복음서는 하나의 설교에 불과하다라고 한다면 문제가 된다. 복음서는 청중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 짜맞춘 것이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 당시 <영웅전>이 많이 있었다. 황제나, 장군이나 그들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서 쓴 영웅전처럼 우리는 복음서를 이해해야 한다고 할 경우, 주의해야 한다. 한 사람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서 美辭麗句를 사용하는데, 한 사람을 신의 위치로 끌고 간다, 소위 신격화를 시킨다. 만약 그런식으로 복음서를 취급한다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하는 것이 실제가 아닌 것을 그런 식으로 찬양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복음서를 독특한 문학 양식으로 파악하기를 원한다. 복음서들은 전기형 요소는 가졌으나 전기는 아니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을 소개하면서도 전체를 소개하면서도 일부분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어떤 복음서는 고난과 죽음 부활에 1/2을 할애하고 있다. 실제사건을 보도하지만, 역사서도 아니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있지만, 영웅전도 아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업적을 찬양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대신 업적을 기록하면서 천사들이나 사람들의 찬양을 기록한다. 기자들은 중립적 위치에 서 있다. 공정하게 기록하려고 하였다.
<복음서는 기록된 복음이다> 우리는 지난 학기에 신약정경론을 이야기 하면서 복음서는 기록된 복음이라는 것을 이야기했다. 복음서는 창작물이 아니다. 저자가 있지만, 복음서 기록 당시에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다. 복음서가 기록되기 전에 복음이 있었다. 수많은 신약복음서가 탄생했는데, 어떤 복음서는 교회가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기준은 사람들이 옛날부터 알고 있는 복음과 일치하느냐 일치하지 않느냐에 있었다. 그들은 일치하는 복음은 기쁘게 받아들였지만, 터무니 없는 이야기로 가득차 있었을 경우에는 가차없이 버렸다. 그것이 정경화 과정의 아주 주요한 것이었다. 복음서는 기록된 복음이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과 여러분들이 전하는 복음이 같은가? 다른가? 신학자들의 결론은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과 우리의 복음은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수주의 경향을 가진 사람일수록 같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이란 말은 예수님의 입에서 맨 먼저 나온다. <복음이라는 단어> 원래 <유앙겔리온>이란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좋은 소식>이란 뜻이다. 무엇이 좋은 소식이란 말인가? 유대인들에게는 어떤 소식이 기쁜 소식인가? 유대인들은 복음서가 시작되면서 복음이란 단어를 그냥 이해하는 것 같다. 복음을 전파했다고는 기록되어 있는데, 무엇을 전파했다고는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한국사람들은 기뻐하였다. 왜 그렇게 기뻐하였는가는 상황성에서 알아야 한다)
유대인들이 어떤 희망을 대대로 가졌는가? 선지서의 복음이란 말이 사용된다. 산을 넘고 ······아름다운 발이여. 즉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이 복음이다.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돌보심이 이제 시작된 것, 하나님의 나라가 이제 가까이 온것,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된 것, 하나님의 역사 개입이 이제 시작된 것 그것이 복음이다.
이스라엘을 회복할 때가 언제인가? 그런데 여러분들의 복음은 어떤 것인가?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셨는데, 잠시 후에는 그 예수가 복음의 내용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전하고 다녔다. 원기독교는 예수님이 전파하신 내용이다. 예수를 이야기하지 말고 원 복음으로 돌아가자. 분명히 복음이 바뀐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관심은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는가 하는 것이다. 왜 내용이 그렇게 변화되었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처음에 예수님은 오셔서 우리가 전하는 복음처럼 이야기 하지 않았다. 우리는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복음서 초창기에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이야기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나라의 구속, 통치가 이루어진다고 이야기 하면서 자신이 등장한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게 사람들이 오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구속을 위해 내가 왔다. 병든 자를 고치기 위해서 내가 왔다. 하나님의 통치가 나를 통해서 나타난다고 하였다.
복음서 안에서 이런 발전을 바라보게 된다. 그 과정에 있었던 일들이 복음서 안에서 기록되어 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영생을 주겠다. 예수님은 <어떻게>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복음이 변질 되었다고 하기 보다는 첨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는 사람들을 부르시고 찾아 가셨다.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요구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도록 하는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믿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속의 방법, 중계자로 인정하시기를 기대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을 빠뜨리고 예수님의 생애를 복음으로 이야기 하지 말고, 천국만 이야기하자는 것은 복음서를 완전히 오해하는 것이다.
복음이란 단어의 의미가 기독론으로 나간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서신은 기독교의 핵심을 복음으로 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떤 여인의 일을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전하게 하셨다. 복음의 내용이 이렇게 확대되어 가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러면 복음의 핵심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하신 일, 그 의미도 포함되며, 책에 기록되면서 이 복음서들은 그냥 복음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초대 교회에서는 기록된 복음과 전파된 복음을 전혀 구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의할 것은, 복음의 핵심이 무엇이냐라고 했을 때, 십자가라고만 할 수 있는가? 그렇게 되면 다른 일들이 무시된다. 그러므로 탄생으로부터 부활까지를 포함한다. 예수님의 공생애도 중요하다. 병을 고쳐주시는 것이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복음에는 어느 것이 중요하다,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오늘날까지 예수님의 사역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살아계시며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것이 복음이다. 복음서에 예수님의 역사하시는 모습이 나온다. 행전에 들어가서도 예수님이 역사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계시록에도 마찬가지다. 오늘도 역시 예수님이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신학자들이 복음이 다르다는 점을 설명하면서 사도행전이나 고전후서를 지적하는데, 신학자들이 복음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사도들이 설교가 한정되어 있다. 예수님은 부활에 집중하였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사도들에게 있어서 부활만 강조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상황성을 이해해야 한다. 베드로 사도가 오순절에 설교할 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그렇게 설교 하였다. 다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지 청중들이 몰랐던 것은 부활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복음의 장소와 시간이 멀어질 수록 복음을 폭넓게 서술한다. 바울사도가 다메섹에 한번의 만남으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예수에 대하여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도 확신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예수가 죽은 자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 예수를 만난 것이다.
바울 사도의 생애도 너무 극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극적인 것은 예수님이 바울 사도에게 나타나신 주님이 극적인 것이다. 예수님이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이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게 될 경우 그런 변화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복음은 예수님과 관계된 모든 것이 복음이다>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록 복음의 폭은 넓게 기술된다.
유세비우스 캐논이라고 하는 것은 유세비우스가 공관복음서를 표로 만든 것이다. 이 표를 통해서 2가지 도움을 받는다.
1. 공관복음서 문제가 초대교회시대에 연구되어 있었다는 것과,
2. 그의 자료는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자료라는 점이다.
유세비우스는 공관복음서를 비교한 다음 10개의 캐논으로 만들어 놓았다. 각 캐논 밑에는 수 없이 많은 수를 붙여 놓았다.
캐논 1> 4복음서의 공통되는 내용
캐논 2-4> 3복음서의 공통되는 내용
캐논 5-9> 2복음서에 공통되는 내용
캐논 10> 1복음서에만 있는 내용
지난 시간에 공관복음서 문제와 관계해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새로운 해결책이 없을까 관심을 가지면서 함부르헌 견해를 살펴보았다. 그 분만 새로운 방법을 쓰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 나름대로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다. 오늘은 공관복음 문제에 있어서 안전하게 다룰 수 있는 주의사항을 말할 것이다. 이것은 공관복음서 문제를 다르면서 일종의 두려움 때무일 것이다. 혹시라도 차이점이 만들어지면 어떠할까?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차이고 없고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와서 차이점이 발견되므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구전설을 이야기 해야 하는가. 문서 의존설로 돌아가야 하는가? 이런 문제 때문에 공관복음서에 도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긴박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지침을 만들었다.
우선 인정해야 할 것은 <성경은 성경이다>라고 하는 사실이다. 명상과 상상력, 의욕이 아무리 뛰어난다 하더라도 기록되어 있는 성경을 고칠 수는 없다. 따라서 눈에 띄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런 출발점에서 문제를 다루어 보겠다.
1)고려해야 할 사항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면서 공관복음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체적인 연구방법, 종합적인 연구방법을 해야 한다.
복음서 개개를 인정하면서 어떻게 다룰 것인가? 우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질문을 해보자
(1)서로의 문제가 어떻게 다른가? 즉 현상이해를 해야 한다. 이 현상이해를 이해하지 못하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본문연구가 가장 중요하다. 그러므로 20-30번을 계속 읽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의 논리에 끌려가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학자들의 논리의 헛점이 발견된다. 신약신학과 구약신학의 기준은 성경본문이다. 그 기준이 완전히 소화될 때, 어떤 이들의 주장에 끌려가지 않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디가 다른가, 어디가 일치하는가 하는 현상을 파악한 다음에 이 문제에 대한 책임 소재를 파악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서 들려오는 소리는 한번 뿐이었다. 마태복음에서는 ‘너는 내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엿고, 마가복음에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였다. 그래서 2 · 3인칭 각각 다르게 파악하였다. 이 현상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어디에서 이렇게 다르게 되었는가?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다르게 되어 있는 부분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것은 내가 다르게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 복음서 자체가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이런 차이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한면으로는 성경관을 위협할 수 있지만, 한면으로는 성경의 이해해 풍부함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르기 때문에 성경을 버린다는 것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3)복음서 기자가 어느 정도 책임을 질 수 있는가? 복음서 기자들에게 어느정도 책임을 돌릴 수 있는가? 마태 사도가 ‘너는 ··· 이라’는 2인칭을 3인칭으로 변경시켰는가? 아니면 반대인가? 이에 대해 어느정도 복음서 기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편집비평가들은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가 그렇게 고쳤는가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편집비평가들이 마태사도가 변경시켰다는 결론이 성경해석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3년동안 수많은 설교를 하셧는데 그 설교를 소개하면서 마태사도는 5장에서 산에서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누가 복음서에는 비슷한 설교를 평지에서 하셨다고 한다. 예수님의 설교를 소개하는데 평지를 소개하느냐, 산을 소개하느냐 하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그렇게 크지 않다. 거기에서 멈추는 것에 대해서 별 어려움이 없다. 때로는 성전에서, 회당에서. 배에서 다양하게 설교하셨다. 일일이 다 일기를 쓰듯이 쓸 필요가 없다. 그런 장소를 설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3번에서 100%대답을 하고 멈추어도 별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하늘에서 들려왔던 소리에 대해서 성경기자들이 그렇게 하였다면 문제가 심각해 진다. 그래서 5번으로 간다. 기자들이 책임자가 될 수 없다면 누구의 책임으로 돌려야 하는가? 전승의 과정에서 로마 문화, 그리스 문화의 영향으로 이런 내용이 이런 내용으로 변했고, 그래서 기독교가 형성되는 시기로 설명했다. 그렇게 대답한다면 6번의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을 좀더 긍정적으로 설명할 수있을까? 아니면 전달 과정에서 변화된 것이 어렵다면 7번의 과정으로 진행해 간다.
5)의 예를 들어보자.
마태복음에 보면 <누가 너희의 속옷을 가지고자 하면 겉옷도 가지게 하라> 옛날에는 옷이라고 하는 것은 보물이었다. 대부분 한겹 정도로 만족하였다. 속옷을 걸친 사람은 부자인 셈이다. 누가복음에서는 겉옷을 가지고자 하면 속옷도 주라고 한다. 속옷 겉옷의 순서가 다르다는 것이 신학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 신학자들의 관점은 속옷과 겉옷의 가치가 다르다는 것이다. 겉옷을 중시한다면 동양 문화권에 살 때 그런 생각을 한다. 유대 세계에서는 겉옷을 더 중요시했다. 그런데 누가복음을 보니까 무엇인가 차이가 있었다. 겉옷과 속옷의 가치가 달랐다는 것이다. 로마 헬라세계는 속옷을 더 중시했다.
왜 그 순서가 바뀌었는가? 유대 세계의 가치체계과 로마 세계에서의 가치체계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만약 로마 세계에서 겉옷을 주라고 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 될 것이다. 뭔가 이야기 하려면 더 높은 기준을 말해야 한다. 로마세계에서 속옷과 겉옷의 순서를 바꿈으로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똑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기자들이 책임을 질 수 없지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바꿀 수 있다. 그렇다면 전승과정에 책임을 돌린다. 양식비평가들은 여기서 다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러가지 의문이 남아 있다면 7)으로 돌아가라.
일치점, 자이점의 원인을 모두 예수님께로 혹은 복음서가 보여주는 그 당사자들에게로 돌릴 수 있는가?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원래 하늘로서 두 소리가 났다고 한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 경우 속옷을, 다른 경우에 겉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주라고 하였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보수주의자일수록 7번으로 가려고 한다.
만약 예수님이나 당사자들에게 책임을 돌릴 수 없는 문제가 하나라도 남는다면 다시 3번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님께서 다르게 말씀하셨다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되면 어디선가 다시 물어보아야 한다.
9) 8번까지 질문해 본 결과 어디에도 갖다 붙이기도 어려운 본문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2000년간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이점 일치점이 일으키는 문제가 공관복음서 문제의 신실성을 파괴하는가? 현대신학자들은 파괴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공관복음서 문제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공관복음서 문제의 신실성을 파괴하는 문제는 아니다. 또 같은 사실을 두고도 결론은 다르다. 결국 그것은 성경본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신학자들의 견해와 선택경향에 의한 것이다.
결론은 학적으로 증명되는 것이라고 보다는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였다.
복음서는 역사를 왜곡하거나 비역사적인 것을 역사적인 것으로 돌려야 하는가? 보수신학자들은 아니라고 한다.
공관복음서가 어려운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알려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관복음서 사이에 일치점, 차이점이 이렇게 등장한다면, 진짜 질문은 공관복음서는 역사적인 예수님의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는가? 여기에서도 2종류의 대답이 나뉜다. 진보주의자들은 그렇다. 복음서는 편집비평가들이 양식비평가들이 중간에 수정하고 믿음의 눈으로 채색한 것이기 때문에 복음서를 믿을 수 없고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역사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 , 나사렛 예수, 갈릴레아의 예수,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 메시야 예수 등은 역사적 예수를 믿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다시 채색을 하고 있다.
우리 주변에 여전히 역사적 에수와 공관 복음서 사이에 어느 정도 간격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11번의 질문이 나왔다. 역사적 예수와 공관복음서 사이에 어느 정도 간격이 있는가? 베드로 사도가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지 못했다. 그런데 복음서를 읽어 보면, 독자는 이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시작한다. 그래서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의 자리에 있을 때. 예수님을 평범한 인물로 보지 않고 읽고 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을 처음에는 평범한 만남이었는데 복음서 기자들이 나중에 채색을 했다는 것이다. 간격이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수님을 믿은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이 차이점, 간격이라면 역사적인 예수와 공관복음서 사이의 예수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가? 실제 사건은 공관복음의 보도와 어느 정도의 역사적 진실인가?
복음서가 보도하는 예수님의 모습과 그 당시의 그들이 알고 있던 예수님, 복음서에서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하고 있다. 베드로의 실제 사건을 연상해 보라. 3년간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경험했던 것을. 처음에는 누군지 잘 몰랐다. 따라오라고 하니까 부르시는 분의 권위 때문에 따라다녔는지도 모른다. 야단도 맞고 이리저리 찔렸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쯤에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승천한 다음에 전도를 하는데, 베드로는 그가 얻은 결론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오해한 부분,실수한 부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론 부분만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 전도자의 사명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12번으로 돌아가자. 실제 예수님의 모습과 공관복음서의 모습의 간격이 있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가? 이 간격이 기독교와 기독교의 역사성이 치명적인 해를 가하는 것인가? 오히려 사도들의 활동을 더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간격의 원인이 필수적인가 우발적인가. 베드로의 경우에는 오히려 필수적이다.
그래서 14번에 마지막 질문이 나온다. 정당성을 찾을 수 있을까? 복음서가 말하는 예수님과 실제 예수님의 사이에 간격이 있다면 오히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제공해 주고 있다.
공과복음서가 차이가 있음으로 복음서를 믿을 수 없다고 한다면 잘못이다. 똑같은 본문을 두고서도 다른 결론이 나오는 것은 믿음의 문제이다. 믿음의 눈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 복음주의이다. 아직까지는 신앙도 믿음의 문제고, 신학도 믿음의 문제이다. 똑같은 이야기를 해도 어떤 사람은 믿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는다.
철학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신약신학도 그렇다. 계속 파고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갈림길을 만들어 낸다. 그 태도에 의해서 어떤 사람은 이런 결론을, 어떤 사람은 저런 결론을 만들어 낸다.
2) 지침
지금부터는 그 질문에 대해서 답변의 가능성을 살펴보자.
1. 언어부로 나타난 것은 처음부터 그대로 나타나고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일치점보다는 차이점이 연구의 대상이 된다.
왜 예수님의 말씀이 달리 기록되었느냐? 언어의 차이로 인해서 복음서 사이에 차이가 나타날 경우가 있다. 예수님 당시 아람어가 헬라어로 번역, 혹은 통역의 과정이 필수적으로 개입한다. 항상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아람어로 번역하는데 누가 번역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번역자가 다르다면 목격자가 같다 하더라도 달리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누가 헬라어로 번역했느냐에 따라서 똑같은 의미라도 달리 표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똑같은 헬라어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또한 같은 사람이 번역한다 하더라도 시대에 따라서 단어가 달라질 수있다. 그런 것을 가지고 변질되었다고 하기 어렵다. 목격자들이 수 없이 복음을 전하며 번역했다고 해서 항상 고정된 번역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 언어의 장소의 제한성, 특수성, 시대적 상황성, 가변성을 첨가하면 다양한 번역의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 베드로사도가 번역을 했는데 30년대 번역과 60년대 그리스도·로마에서 가르치는 것은 차이가 있다. 여기서 복음서의 성격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어떻게 하면 원본 그대로 보존할 수 있을까?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라도 더 관심을 가지게 해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까 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진 것 같다. 만약 원본을 원한다면,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람어 사본은 발견되지 않았다.
초대교회 관심의 핵심은 복음전도에 있었다. 헬라어 번역 자체가 그것을 반영해 준다.
사람들이 알아 듣도록 하기 위해서는 번역작업을 해야 한다. (신약신학에서는 역사적 현상, 현장을 주로 다룬다.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한도 안에서 현상, 역사 배후에 대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야기 한다. 우리의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이다. 그러나 조직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일의 전체적인 시스템이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선택해 놓으시고 믿음을 주시고 구원을 얻게 하셨다는 식으로 접근한다. 유럽에서는 성경신학자들이 더 큰 소리를 친다. 조직신학자들이 하나님의 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보다도 신약신학에 더 치중하고 있다.)
2) 두번째, 언어의 시간적, 장소적 제한성과 특수성 및 가변성으로 인한 차이의 가능성을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쪽’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자. 국자가 본문에 쓰여져 있다면 그것을 특수한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쪽이라는 단어로 번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역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시대에 따라서도, 개인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어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 번역했다는 것 자체가 가변성을 가져올 수 있다. 문제는 그 사람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로 기록하는 것, 그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중요하므로, 그 지역에 특수한 언어 형태로 복음을 번역하는 것이 중요하다. 복음서가 탄생한 것은 그 상황을 고정화함으로서 그 시대의 언어로 기록하였다. 언어란 계속 달라진다. (성경 헬라어를 연구하려면 그리스가 아니라 유럽으로 가야 한다) 한 지역의 언어는 계속 변화한다. 신약성경은 2000년 전의 한 기준으로 기록한 언어이다. 그 시대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오고 오는 모든 시대에 기준으로 작용하게 된다.
복음 전도자의 언어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도 상당히 중요하다. 개인적인 어감이 상당이 중요하다. 혼자 사용하는 독특한 어감을 가지고 있다. 언어라고 하는 것은 항상 독특한 색채를 지니고 있다. 바로 그런 차이 때문에 복음서 사이에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마태사도는 ‘선생’이란 단어를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님이라는 단어를 계속 쓰는 것 같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만약 선생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그런 결론을 내린다면, 그것이 복음서의 내용을 변질시켰다고 볼 수 없다.
네번째 가능성은, 처음부터 다르게 말씀하셨을 수도 있다.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예측해 보는 것이다.
다섯번째, 목격자들의 이해해의 차이의 가능성이 있다.
공관복음서 문제는 영원히 풀리지 않은 문제이다.
그러나 가능한 여러가지 해결책들이 여기저기서 시도되고 있다. 그 기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다각도로 검토하고 있다.
많은 신학자들 가운데 공관복음서 문제로 인해서 급진주의자가 되거나 기독교를 떠나게 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선택의 문제이다. 그러나 공관복음서 문제는 더 큰 도움이 될 지 모른다.
교회론, 성령론의 문제를 가지고 공관복음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려는 사람이 있다. 편집비평사학파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이나 천상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이 동일하다는 입장이다. 성령을 통해서 주신 말씀이라 해도 권위상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가 공관복음서를 연구하면서 산산조각을 내 버렸던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보혜사 그가 오시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을 생각나게 하고 가르쳐 줄 것이다”
행전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지상에 계시던 바로 그 분이셨다.”
그러므로 승천후 예수님의 사역은 계속되고 있다.
공관복음서 문제는 신앙과 신학을 방해하는 것만은 아니다. 일치점, 차이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 차이점이 있다고 하는 것이 보수주의를 떠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모습을 통해서 교회의 탄생역사를 더 잘 알수 있는 것이다.
<각 복음서의 구조와 특징>
원인에 대한 문제를 일단 접어두고 시작한다. 마태복음에서 시작할 것이다.
* 특징
마태복음은 초대교회로부터 가장 많이 읽혀지던 책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가장 잘 보존되고 있는 책이라고 한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으로 탄생하셨다. 그것은 곧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체적 특징을 공유했다는 것이다. 또한 문화적, 지리적, 사회적 특징들을 공유하셨고, 그 당시 언어를 사용하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하셨다. 만약 한국에서 사역하셨다면 한국어를 사용하셨을 것이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기록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유대인을 대상으로 전한 복음을 전한 것이 마태복음인데,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복음이 로마인이나 헬라인에게 전한다면 문제가 될 것이다.
마 26:17> 막 14:12 >눅 22:7
*마태복음에서는 그 날을 무교절이라
*막>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날
*눅>유월절 양잡는 무교절
이렇게 놓고 볼 때, 마태복음의 대상이 유대인들이라면 무교절이라는 간단한 단어 하나만으로도 그 날이 무슨 날인지 다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아니라면 유월절, 무교절이라는 것으로 어린 양을 연상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유월절 어린양 예수님과 비교할 수 있도록 추가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그 대상이 된다고 볼 수 있다.
마태복음 15 :1 -2 / 막 7 :1-23 / 눅 11: 37
정결예식 때문에 일어나는 논쟁이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것을 바로 소개하고 있다.
마가복음에서는 유대인들이 지키는 정결예식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있다. 이런 설명이 없이는 왜 정결예식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어렵게 된다.
마 24 /막 13 / 눅 21
예루살렘이 포위당하면 산으로 도망하며, 그것이 겨울이나 안식일이 되지 않도록 하라고 마태복음에 들어가 있지만, 마가복음에는 안식일이 빠져있다.
이것을 두고 볼 때, 각 복음서의 특징들을 확인할 수 있다. 유대인들에게는 겨울만 괴로운 것만이 아니고 안식일이 더 괴로운 것이다. 안식일에 도망을 해야 한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헬라인들이나 로마인들은 안식일에 도망하는 일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무에 안식일이 빠졌을 것이다.
2. 유대인들이라고 하는 그 대상이 변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과 아울러, 팔레스틴에는 풍습, 지리, 관습 등을 마태복음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을 다른 지역에서 전하려고 할 때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게 된다.
마태복음 23 :27 / 누가복음 11 :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는 부분을 볼 수 있다.
“너희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 누가복음에는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과 같다”
마태복음이 주는 의미는 겉은 아무리 아름답게 꾸며도 속은 썩어가는 의미이다. 한국사람들은 이 말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복음을 처음 듣는 아이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이것은 한국의 환경, 풍습에서 이해할 수 있는 말은 아니고, 팔레스틴에서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굴을 파서 시체를 넣고 굴을 막고 회칠을 하고 그 밖에다 회칠을 한다. 그런데 이런 무덤을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이야기할 때는 그 무덤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유럽에서는 무덤에서는 축구장과 같은 곳에 무덤을 만든다. 평토장한 무덤인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때,의미가 바로 전해 질수 있도록 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 7:7 -11 / 눅 6장
집을 짓는 방법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조금 다르다.
마태복음에서는 그냥 반석위에 집을 짓지만, 누가복음에서는 땅을 파내려 가다가 반석이 나오면 집을 짓게 된다. 유럽식 집짓는 방법이다.
홍수의 방법이 다르다. 마태복음에서는 홍수가 비가 와서 나게 된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강물이 넘쳐서 홍수가 난다. 한국에서는 홍수가 나는 것은 비가 왔을 때만 일어난다. 유럽에서는 비가2-3개월 오지 않아도 홍수가 난다. 알프스의 눈이 녹아내리면서 홍수를 일으키게 된다. 지금 마태복음에 기되어 있는 것은 유대, 팔레스틴의 지역의 기후를 잘 반영한 반면, 누가복음은 유럽의 자연환경을 잘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내용면에서도 마태복음에서, 율법의 문제를 다룰 때, 율법문제가 상당히 중요했다. 5:17-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다” 이 구절은 2000년 기독교역사상 가장 중요한 구절이다. 사도행전에도 율법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우리가 전도할 때,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율법을 완성시키신 분이시므로 예수를 믿으십시오, 라고 전도한다고 한다면 우리의 상황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 별 반응이 없었을 것이다. 한국적 상황에서 한국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던 이슈와 예수그리스도를 연결시켜 주어야 하는데, 그것은 극락이라는 개념을 통해 천국을 소개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율법문제가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소개할 때, 율법의 완성자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을 전할 때, 그 사람의 자라온 배경을 가지고 복음을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도록 해 주는 것이 목적/ 그러므로 그의 언어와 그의 상황에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율법과 자신의 관계, 율법과 제자들의 관계를 설명, 예수님의 죽게 되는 것도 율법과 관련된 것이다. 마태복음에는 율법과 자신의 관계가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은 마태복음의 대상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복음이 누구에게 전해지고 있는냐? 하는 것과도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마태복음의 내증을 가지고 유대인들과 연결시키는 것을 어렵지 않다. 유세비우스의 글과 같은 외증과 연결할 때, 별 무리가 없게 된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설교, 사역과 관련된 가장 주요한 단어는 하늘나라, 하나님의 나라이다. 마태복음에서는 ‘하늘들의 나라’라는 표현이 주로 사용되었고, 막, 눅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 두 단어는 같은 것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왜 그러면 마태복음에서는 복수를 썼느냐? 그것은 유대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에 경외심을 가졌다. 예수님 당시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함부로 사용하지 못했다. (한국에도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때는 ‘자’를 붙여 부르는 경향이 있다) 유대인들이 2천년 전에 하나님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하늘’이라는 단어를 대용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의 세례에 대해서 질문할 때, 사람에게서냐? 하늘로서냐?라고 말할 때, 하늘은 하나님의 대용어이다. 하늘나라라는 표현이 마태복음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에서 유대세계에 아주 잘 어울리는 복음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내용상의 특징>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메시야를 증거, 그리스도의 이름, 이스라엘의 역사. 족보, 3*14의 도식,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계에서, 구약의 인용과 성취가 마태복음의 특징으로 나타난다. 유대인들에게 적합한 내용들은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주로 다루어 진다. 마태복음에는
15:24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길로 가지 말라”
10:5-6 이방인들의 길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집 이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
이 두구절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고 보냄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자기를 위장했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예수님의 실제사역에 초점을 맞추어보라.
예수님의 실제사역의 경계선이 어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가버나움에서 사시고 갈릴리에서 사시다고 예루살렘에 왕복하신후 골고다에서 돌아가셨다. 예수님의 사역이 유대에 제한되어 있다. 그 당시에는 유대 안에서 행동하셨던 것이다.
구약성경과 구약역사를 그대로 인정할 때, 기독교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 구약성경을 읽을 때 신약적인 눈을 가지고 읽는다면 설교하기는 좋으나 기독교 전체를 이해하기는 어렵게 된다. 역사 속에서 태어나서 살고 있는 우리는 신약의 눈을 가지고 구약을 읽게 되면 무의미한 해석으로 흐를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런 경향에서 예수님의 사역도 보자는 것이다. 신교가 옳다고 해서 로마 캐톨릭을 무조건 지워버리자는 경향으로 흘러서는 안된다. 비록 로마캐톨릭이 잘못된 길로 나갔다고 하더라도 인정해야 우리의 뿌리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ㅇㅇ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오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거부한다. 이방인들이 2번이나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지만 이스라엘이 거부한다. 그러자 예수님도 이스라엘을 거부한다. 새로운 공동체의 출현이 나타난다. 교회가 출현한 것이다. 마태복음 처음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누군가?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예수님의 탄생시에 임마누엘이 이스라엘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들이는 사람인가
마21:41
악한 농부들의 비유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비유를 보도하면서 시 113을 인용하고 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다고 인용한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는 빼앗기고>라는 구절이 추가되어 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을 것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마가복음으로 들어가자.
특징:
베드로 사도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를 언급하지 않아도 될 부분에서도 베드로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 이 자료를 가지고 베드로가 마가복음 배경에 있었다고 하는 것. 유세비우스의 언급
베드로 사도와 깊은 관계가 있다.
이와 함께 유대 색체가 마태복음보다는 훨씬 줄어 들었다는 것이다. 로마와의 관련성이 점점 진해지고 있다.
마가복음에 환산하는 부분이 있다.막 12,42 / 눅 21,2
마가복음에서는 렙돈이라는 헬라동전을 고드란트란 로마 돈으로 화산하여 설명하고 있다. 마가복음에서는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라고 설명하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마가복음과 로마의 관련이 아주 깊다는 것이 여기에 나타난다. 마가복음의 독자들에게는 이탈리아 동전 고드란트이 친숙했기 때문에 독자들이 로마인인 것임을 알게된다.
마가복음에는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이 나온다. 그는 피아돌로로사을 거쳐서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서 골고다까지 십자가를 지고간 사람이었다. 이 사람만이 예수님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들어 준 것이다. 이 사람을 소개하면서 마가는 15:21에서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소개한다. 왜 이렇게 설명했는가? (사람을 소개할 때, 잘 아는 사람을 통해서 사람을 소개하는 방법이 있다) 롬16:13에 보면 루포의 이름이 나온다. 바울 사도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할 때, 루포의 집에 문안하라고 하였다.(물론 가능성이다) 두 사람의 동일인물이라면 마가복음은 로마에서 기록된 것이 분명하다.
내용상의 특징은 ‘고난 받는 인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마태복음의 분위기를 생각해 보자. 굉장히 장엄하다. 족장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서 그 역사를 시작한다. 마태복음의 상황, 분위기는 장엄하다.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이 나오고, 이스라엘의 역사가 거론되고, 헤롯 왕실이 거론되고,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온다. 산상수훈에서 그 분위기는 더욱 장엄하다. 예수님은 마치 모세처럼 사람들에게 산상수훈을 하시는 것이다. 마태복음 마지막에는 더욱 장엄하다.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가복음에는 그 분위기가 다른다. 고난 받는 인자의 모습이 나온다. 2장부터 고난받는 부분이 나온다. 마태복음에서는 중간쯤에 고난이 나오지만, 마가복음에는 2장부터 나온다. 그리고 고난받는 부분에 대해서 1/3을 할애하고 있다. ‘인자’라는 칭호가 그것을 증명한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신 칭호를 사용했는데, 인자는 3가지 내용과 결합되어 있다.
1.예수님 자신의 지상생활의 비참한 모습을 설명하실 때, 인자라는 말을 쓴다.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에게는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2. 인자가 고난을
3. 재림과 심판을 말씀하실 때, 인자라는 말을 많이 쓴다.
지상생애와 관련해서는 마가복음에는 2번 나온다.
따라서 마가복음에서 인자라는 칭호는 고난과 마지막 십자가의 죽음에서 특별히 사용되고 있는 단어이다. 마가복음은 고난받는 예수님의 상을 보여주고 있다.
마가복음의 특징 중에 메시야 비밀론을 이야기한다. 이 메시야 비밀론에 대해서 간단한 설명하고 평가를 하겠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된 것을 잠깐 살펴보기를 원한다.
<메사야 비밀론>
2가지 전제를 가지고있다. ①예수님께서 사역ㅇ르 하실 당시 예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드은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생각하지 않았다.② 제자들이 심리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받고 부활절 아침에 모종의 신비적 경험을 하게 된다. 불트만은 이 신비한 경험을 설명하고 있다. 부활절 새벽에 그런 경험을 하고 그런 경험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고, 메시야로 믿게 되었고, 하나님의 아들로 전파하였다는 것이다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기독교의 출발점을 유월절의 신비한 경험에서 출발하는 경우도 있다. 기독교의 부활절 새벽부터 시작하는 것은 그 이전의 것을 다루지 않겠다는 것이다. 연구의 대상이나 역사에서 제외시키고 부활절부터 시작하게 된다. 부활절을 기독교의 출발점으로 볼 수 없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출생, 생애자체, 십자가 그 후에 부활절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부활절만 몰랐기 때문에 부활절을 이야기했지, 부활절이 중요했기 때문에 서역에서 많은 부분을 설정한 것은 아니다.
이런 2가지 전제에서, 부활절을 지난 제자들이 메시야로 전파하였다는 것이다. 이 상황은 행전에 나온다. 전도하면서 나온 어려움은 사람들이 그런 전도를 들으면서 의아해 했다는 것이다. 왜 우리가 만난 예수는 직접 그런 말을 한 적도 없었느냐?
그래서 마가복음을 썼다는 것이다.
마가는 그런 신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생애와 그의 복음서에 정리하면서 소위 <메시야 비밀론>이라고 하는 것을 그의 작업핵심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메시야 비밀론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가 메시야라고 하는 것을 다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은 바로 그 내용을 자신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을 비밀에 붙여 둔 것이다. 침묵명령을 하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부활했기 때문에 예수가 메시야라고 하는 것을 전파하기 시작했고 그 전까지는 비밀에 붙여진 것이라고 함으로서 <메시야 비밀론>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사람들이 설명하는 것 중에 틀린 것이 있는가?
마가복음에 예수님께서 침묵을 지키도록 명령한 것이 사실인가?
예수님께서 자신을 메시야라고 공개적으로 말한 적이 없는가? 이사람들은 없다고 했다.
(사람들은 단순히 예수님을 랍비정도로 생각했다.)
예수님께서 그런 사실을 실제로 제자들에게 말하지 말고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을 하셨다. 마가복음에 특별히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메시야라고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비밀을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그 지적도 틀린 것은 아니다.
이 문제를 꺼내는 이유는 메시야 비밀론을 말한 브레이드로 부터 이전에 알지 못했던 마가복음의 아주 중요한 특징, 내용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비평에 대한 이야기를 보자.
1)비메시야적 증거자료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사람들은 하나같이 인간 예수라고 알고 있었다. 그것을 증거할 수 있는 자료가 하나도 없다. 이것이 메시야 비밀론에 대한 일차적 공격이 될 수 있다. 그 사람들은 그럴 듯한 답변을 만들어냈다. 천 수백년동안 기독교 문화속에서 살아온 그들이 그런 문서를 남겨둘 리가 없다.
2)예수님의 생애시 예수님을 메시야로 추론한 흔적이 여기저기 나타나 있다. 이러한 흔적이 마가복음 안에도 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권세가진 자로 불렀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세례 요한이 살아난 것이 아닌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 메시야 비밀론자들은 마가가 삽입해 놓은 구절이라는 것이다.이것은 메시야 비밀론을 약화시키는 구절이다.
4)만약 이 메시야 비밀론이 사실이라면 마가는 끝까지 메시야 비밀론이라는 것을 지켜야 하는데(침묵 명령을 했을 때, 사람들이 침묵을 지키지 못하고 그 소문이 퍼져나갔다), 지키지 못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여기서 그치겠다.
2가지 방법에서 현대신학자들과 싸우는데,
하나의 방법은 따로 따로 연구하는 것이다.
또하나의 방법은 그들의 논리를 사용하면서, 그들의 약점을 치고 들어가는 것이다.
<김세윤 교수의 글을 읽으면 잘 배울 수 있다>
11)마가복음에서 무언가 상반되는 이야기 속에서 긴장되는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마가복음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2가지 긴장이 발견된다. 어떤 사람들은 메시야라고, 어떤 사람들은 부정했고, 예수님 자신과도 관련이 된다. 마가복음을 자세히 읽으보면, 자신을 명확히 예수 그리스도라고 명시한다. 때로는 애매하게 , 때로는 부정하기도 한다.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인가? 우리 나름대로의 해명이 필요하다.
적들이 없을 때에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이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인정하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료는 맞는데 이들의 설명이 틀렸다. 보수주의를 공격하는 자들의 이야기를 분명히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찾지 못한 것을 그들을 통해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주장이 마가복음을 공격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사실은 밝혀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왜 예수님은 메시야로 오셨으면서 위장하시려 했는가? 그렇게 되면 메시야 상이 꾸겨진다. 위장이 아니고 메시야를 거부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의 메시야관과 사람들의 메시야관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을 숨긴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 당시의 메시야 관은 어떤 것이었는가?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야관, 민중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야관은 예수님과 달랐다.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되고,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게되자,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루는 때가 도래한 것이 아닌가? 제자들이 생각햇다. 그런데 예수는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 때와 시기는 아버지에게 속한 것이라고 대답하신다. 제자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공생애기간동안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은 드디어 정치적 권력을 탈취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나는 왼쪽, 너는 오른쪽)
제자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달랐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행동하셔야 했는가?
그 당시 메시야관은 정치적 메시야로 다윗의 위에 앉아서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는 메시야, 모세와 같은 군사적 메시야관을 가지게 된다. 혹은 율법적인 메시야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이 만약 옳다면, 당신이 메시야라고 물었을 때, 아니라고 대답하시면서 메시야관을 고정시켜 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당신이 메시야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신다>.
예수님 주위의 사람들은 왕적 메시야를 요구하였다. 고난받는 메시야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권위있는 사역이 메시야관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참된 메시야상은 아니었기에 사람들의 고백에 애매했거나 침묵명령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경고하신 것이다.
사람들의 메시야 대망사상이 예수에 의하면 수정되어야 한다. 그가 메시야라고 하는 질문에 대해서 잘못된 이해에 대해서는 부정했지만, 바른 이해에 대해서는 긍정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부정은 결국 예수님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메시야 사상과 그 당시의 사람들의 메시야관이 일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엇던 메시야관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구약 성경에서 나온 것이다. 다윗의 뿌리, 이새의 뿌리, 정치적 메시야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모세와 같은 군사적 메시야관이 형성될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사람들이나 제자들이 가지고 있엇던 메시야관은 구약성경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메시야관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메시야 비밀론에 대한 완벽한 해답이 될 것이다.
바로 이런 메시야관이 구약성경이 말하는 메시야관이라고 증명하기 위해서 신약의 기자들은 노력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은 아브라함으로 올라가도 모든 족속과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고난은 이미 구약성경에 나온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야 말로 구약성경이 말하는 메시야관을 완성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왜 그럼 그 당시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야관을 부정하셨는가?(전체적이지는 않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야관은 대단히 편협한 것이라는 것이다. 신약 기자들은 그들이 구약성경으로 돌아가서 증명하고 있다. 그 당시의 메시야의 논쟁은 지금보다 더 복잡했다. 예수님을 배척했던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야관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예수를 맞추어 보았는데, 그 잣대에 맞지 않으니까 결국 그를 배척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기준에 당신의 맞지 않다. 그러므로 당신은 메시야가 아니다.
누가복음의 특징
1. 누가 복음에 의학적 용어가 많이 표현된다는 것이다. 단 이 상황은 2천년전의 상황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스 지역에서 의술이 발달되어 있었는데, 당시에 뇌 수술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지만 현대의학술어 정도까지는 갈 수 없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는 마가,마태복음에서보다 병의 상태, 치료과정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을 가지고 이레니우스의 기록, 의사 누가가 기록했다는 것을 차고한다면 저자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 수 있다.
2. 로마 헬라적인 배경이 보인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무덤의 형태가 팔레스틴인 반면에 누가복음에는 유럽형이라는 것을 이미 말했다.
겉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속옷을 주라고 한 말에서 속옷을 더 귀중하게 여기던 그들에게 겉옷을 요구하는 자에게 속옷까지 주라는 것이다.
누가는 긴 서론을 덧붙였다. 데오빌로 각하에게 보내고 있다고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일차적으로 데오빌로를 향하고 있다. (한개인) 아마 데오빌로는 복음을 들었지만 주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배운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썼다고 한다. 누가는 믿음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 이것을 쓴다고 하고 있다. 아마 데오빌로 각하 개인에게 보내는 서신인지 몰라도, 또한의 특성은
3. 개인적인 자료, 개인적인 경혐, 개인과 관련된 명령이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스라엘, 교회, 혼인잔치, 왕, 백성에 대한 이야기, 포도원의 일군들이 많이 나온다. (마태복음은 집단체가 많이 나온다.) 이런 이야기가 결국 데오빌로 한 개인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데오빌로가 기독교인으로 들어오는데, 예수님이 개인에게 베푸셨던 이야기를 함으로 효과를 노린 것이 아닌가?
기독교 2세들은 듣고 본 사람들에 의해 배운 자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세히 들은 이야기를 적기 위하여 붓을 든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누가는 여기서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전혀 밝혀 주지 않고 있다. (비평사학자들은 문서설의 확실한 근거를 찾고 있다/ 그러나 누가가 자료를 사용했는지의 여부를 알 길이 없다) 따라서 이 서론으로부터 문서설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도 무리고, 공격하려고 하는 것도 무리다.
4. 또하나의 특징은, 누가복음에는 여러개의 찬송이 삽입되어 있다. 이 찬송들이 그 당시에 실제로 불리던 찬송이냐 구야성경의 재조립 찬송이냐 논쟁하는 학자들이 있는데, 이 결과에 대해 누가는 구약성경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인상을 받게 된다. 누가복음 배후에 구약성경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는 구약성경이 없이도 어느정도 유대인의 풍습, 종교를 알 수 있도록 수록해 놓은 것 같다.
7.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역사적으로 기록하면서 연대표상의 기록을 남겨놓으려고 하엿다. 가이사 아구스도, 티베리우스 통치 15년에 세례요한이 사역을 시작하였다는 것은 데오빌로와 관련시켜 사용한 것이 아닌가?
데오빌로가 복음을 들었지만 주저주저 하였는가? 복음증거가 불충분해서일까? 그래서 누가가 자세하게 기록하여 보내려고 했던 것인가? 아니면 데오빌로는 기독교에 대해서 하챦게 여긴 것은 아닌가? 만약 그랬다면, 누가가 예수님의 복음 사역을 황제와 관련시켜 설명하는 것이 복음사역이라고 하는 것이 비록 나사렛이라고 시작되지만 한쪽 구석에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하에 사람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때에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복음 사역을 세계사와 연결하면서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구속사라는 거창한 시각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8. 누가복음의 또하나의 특징은 구속사라고 한다. 세상의 역사를 한 나라의 흥망성쇠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계획으로 이야기하려는 것이 구속사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어떤 사람은 대상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결국 같은 말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성령과 관련해서 몇시기로 나뉜다.
누가 복음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역, 죽음의 필연성이 강하게 부각된다. 누가는 이것을 구속사관으로 발전시키고 있는데, 성령의 활동상황에 따라서 3시기로 구분시킨다.
<시대론>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이것은 세계 역사를 7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이 일곱세대는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개혁교회가 이를 거부하는 이유는 각 시기를 다르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원리는 같다고 보고 있는데, 세대론자들은 각각 시기마다 다르다고 보기 때문이다. 천년왕국은 세대론 때문에 가장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 개혁주의에서 무천년설이 가장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 물론 전천년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각 복음서를 보면 구속사란 관점에서 세상의 역사를 두,세시기로 나눈다. 결국은 같은 이야기인데, 구약시대, 신약시대로 나누는데, 그 중간에 예수님의 생애 시기를 별도로 이야기하면 3시기로 나눈다. 누가복음에서는 3시기로 나누는것 같다. 그렇다고 다르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매개자, 도구가 다르다느 ㄴ것이다.
1)성령이 선지자들의 출현과 그들을 통한 시기
2)성령의 사역이 예수에게 직접 관여한 시기
3)성령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강하게 관여한 시기
그러므로 누가복음에서는 성령의 사역이 강하게 부각하고 있다. 예수는 성령의 객체 뿐만 아니라, 주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성령에 의해 도움을 받으면서도 성령을 다스리시는 사역이 나타난다. 성령론에 초점을 맞추면 누가복음은 오순절 자체를 그렇게 강하게 강조하고 있지 않다. 구약시기에도 성령이 왕성하게 활동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을 강하게 강조하는 것은 예수와 관련된 것에서 설명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지상생애를 근거해서 예수님이 높아지신 다음에 아버지에게서 받아서 너희에게 주셨다고 하셨다.
여기서 예수라고 하는 이름은 육체로 오신 그 분에게 붙여졌다. 예수라는 이름은 창세전에 붙여진 것이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었을 때 붙여진 것이다. 그 분에게서 성령이 오셨다는 것에서 오순절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성령은 구약에 있어서 능력보다는 계시, 인식으로 작용하고 있다.
11)미천한 자, 가난한 자, 사회적 소외그룹에 대해 강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누가복음을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라고 한다. 가난한 자들이 부각되고 있다. 목동들, 죄인, 십자가에서 죄용서 기도, 십자가에 못박힌 한 강도이야기, 사마리아인 이야기, 문둥병자를 고쳐주신 이야기에 한 사람이 돌아와서 감사하는데 그가 사마리아인이었다는 것, 여인들의 모습(그 당시 천대받던 사람들), 이에 반해서 부자, 재물에 대해서는 마태,마가보다 훨씬 강하게 반대한다. 왜 이런 자료들이 다른 복음서보다 풍성하게 나올까?
누가복음은 데오빌로라는 한 개인에게 쓴 글이다. 그런데 왜 이런 풍부한 자료들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왜 이런 개인적인 자료들, 그것도 사회적 소외계층의 이야기들이 누가복음을 채우고 있을까? 그 지역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도움이 될 것이다. 그 당시의 상황이라고 하는 것은 60년대가 시작되면서 로마의 핍박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ㄷ. 그 전까지는 주로 유대인에게서 핍박이 왔지만, 60년이 지나면서 교회의 핍박이 로마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과 다르다는 것이 인식되면서 박해가 일어난다. 처음에 기독교인이 박해를 받을 때, 무엇때문에 받았는가? 기독교는 미신이다라는 사실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많은 영토를 지배했지만 종교는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의 종교가 미신적 종교로 인식되게 되었다. 이들은 자식들의 피를 마시는 살인적 종교라는 것이다. 성찬식에 대해서, 비밀리에 하는 것 때문에 박해를 받기 시작한다. 이런 개인적 자료들이 총독의 권한을 행사하는 데오빌로에게 효과가 있으며, 변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기독교는 미신이 아니라 개인의 권리를 존중히 여기는 종교다. 로마는 한 사람의 개인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해 주었던 것을 바울의 호송사건에서 잘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자비, 은총을 강조하고, 인간의 권리를 최대한으로 살려주는 박애정신을 가진 가장 고등한 종교라고 말하는 것 같다.
12)개인적 구원의 분위기가 전체를 좌우한다. 한 개인 데오빌로에게 관심을 쏟고, 기독교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것 같다.
3복음서의 특징이라고 한다는 것은 그 복음서에만 등장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각 복음서가 비교적으로, 상대적으로 이런 점이 각 복음서에 강하게 부각된다는 것이었다.
이제 전체적으로 요약해 보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인간세상에서 나타나도록 하시고, 주변의 목격자들을 세우게 함으로서 그러한 사실이 후대에 전해지도록 배려했다. 그래서 인간기자들을 100%이용하셨던 것 같다. 그들의 머리, 감정, 복음서를 기록하기 위한 모든 방법들, 전통수집, 배열들을 함께 사용하신 것 같다. 복음서 저자들이 어떤 식으로 복음서를 기록하였는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사용하시고 배려하셨는가 하는 연구이기도 하다. 우리의 영감론은 인간 저자들을 100% 이용하신다는 입장이다. 현대기독교의 흐름가운데 개혁주의에서는 인정한다.
우리가 가지는 성경관은 초대교회가 가지는 성경관 이상일 수 없다. 복음서 기자들도 기계적이 아니라 그들의 모든 것, 그들이 자란 배경, 언어, 사고, 감정을 활용해서 복음서를 썼다.그 속에서 100% 마태 사도의 작품 속에 100%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다.
우리가 각 복음서를 비교함은 인간적인 작업들이 어떤 것일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마태복음의 서두>
**유대인들을 향하고 있다는 증거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의 자손
*족보책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위의 요소들은 중요한 요소였다. 다윗의 후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 자손 중에 누군가 나타나서 자신들을 구해 줄 것을 믿던 사회였다.
2,000년 전의 사회에서 족보책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유대인들은 족보에 착념하는 자들이었다. 로마나 그리스는 그런 것을 중요시 하지 않았다. 마태복음에 이런 것이 등장한다는 것은 마태복음의 성격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마가복음의 서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마가복음에서는 <시작>이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 <시작>을 끝과 비교하면서, 마가복은 전체인 것같다고 한다. 그가 쓰고 있는 것이 복음의 시작이라고 본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세례요한의 시작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말씀, 사역에 관계된 것 뿐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의미한다. 기독교 세계 전체의 역사를 복음이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다.
* 두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고유명사로 이해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어가 고유명사라는데서 몇 가지 기억해 내어야 한다. 구약에서는 이 단어는 일반명사로서 칭호로 사용되어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는 이 말은 고유명사가 되기 전이다. 술어에 지나지 않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따라다니면서 얻은 결론이 <다른 그리스도가 없다. 예수님 만이 그리스도다>라고 하였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개입하려는 모든 자들은 <적그리스도>이다. 제자들의 고백은 다른 그리스도가 없다. 그리스도라는 단어와 나사렛이라는 이름이 점점 붙어 다녔다. 2천년이 지난 오늘, 예수 그리스도는 고유명사화 되었다. 복음서가 쓰여질 당시, 고유명사로 정착화되고 있다.
<누가복음의 서두>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가 되고 일꾼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현대주의자들은 여기에서 누가복음에서 말하는 것을 마가복음으로 추측하고 있다.
누가복음에서는 누가복음 전체가 사도행전 전체를 의미하는 것을 지시한다고 이해된다. 복음이라고 하는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와만 관계된 것만이 아닌 것 같다. 사도행전을 복음서 안에 포함시킨다. 역사서라는 사도행전의 개념을 20세기에 들어와서는 형태는 약간 다르긴 하지만 복음서로 이해한다.
복음이 전거되어 온 세상 끝까지 나아가는 것을 복음이라고 한다면, 사도행전의 역사도 복음의 역사이다.
우리도 복음서 속에 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복음서는 역사적인 것이다. 역사를 가진다. 과거의 역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살아 움직이고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 복음이다. 물론 복음서와 같은 책을 쓸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특성, 기독교적 평가를 알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마태복음으로 들어가 보면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백성을 말하고 있다> 그 후의 이야기는 아주 간단히 생략되어 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의 구성, 복음을 전하고 불러내는데, 항상 너희와 함께 하리라/ 그러므로 예수님은 오늘도 함께 하신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항상 불러 모으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다. 국가나 교회를 천국이라고 할 수 있는가? 복음서에서는 천국,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사역이 시작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통치가 전체적으로 지배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 개인, 한 국가, 전 세계가 마찬가지로 확대되어 나가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2,000년 전에 시작된 하나님의 통치가 이제 확대되어 나가며 완성되어 나가는 것이다.
각 복음서가 지향하고 있는 것은 과거만이 아니다. 과거의 사건을 기록한 것만이 아니고, 그들의 현재도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복음서를 읽는 사람에게 어떻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까? 또한 복음서는 미래와도 관련되어 있다. 복음서의 끝 부분에서 이러한 언급을 하고 있다.
“우리”라는 표현이 가능한가? 누가는 복음사역의 목격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 가운데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① 누가는 그 사건의 목격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본 것처럼 말하는 것은?
기독교 집단체 속에 들어가 있으면서 그 집단에 속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때, 이런 표현을 할 수 있다. 누가는 이미 기독교인이 되어 있고 기독교 집단 밖의 사라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쓰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② 누가가 그 집단체 속에서 대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사도행전을 읽다 보면, 19장에 가면 ‘우리’라는 표현이 나온다. 사도행전에 우리라는 것은 누가가 비로소 사도바울과 동행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라는 상황은 바울의 상황을 잘 이야기 해 준다.
기독교 공동체의 한 사람이 되어 잇으면서, 대표자로서 데오빌로에게 기독교의 상황을 정확하게 서술하려고 한다.
p. 105 족 보
2천년 전에는 모계를 통하여 족보를 만들지 않는다. 성경의 시대는 부계를 따르는 형태의 족보다. 그런에 예수님의 족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영구해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족보의 일치점과 차이점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거의 일치한다.>
눅 42개의 이름/ 마 28개의 이름/
한 세대의 간격을 30년으로 본다면 420년의 차이가 난다.
106페이지>
예수님의 계보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흘러온 거룩한 선을 의미한다. 이 선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선이요 구원이 이루어지는 선이다. 그것은 생물학적인 의미는 곧 한계에 부딪힌다.
4명의 여인의 수록: 다말,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
*공통점 - 이방인이었다.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이스라엘의 계보에 들어왔다.
*구약성경에서 믿음의 어머니로 꼽히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 네 여인의 이름의 다른 역할은 이들의 이름이 미리 나옴으로써 잠시 후의 마리아의 이름의 출현을 한층 부드럽게 해 준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과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개념은 유대인드이 기대했던 생물학적이요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계약적이요 영적이다. 예수는 마리아를 통하여서만 다윗이라는 의미는 살아난다.
*실제 족보는 하나님 - 마리아 - 예수 밖에 없다.
생물학적으로보면 누가나 마태가 다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계약적이요 영적이다. 예수는 마리아를 통하여서만 다윗의 족보에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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