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 양태론
삼위일체론 : 양태론
기독론 : 아폴로내리우스적인 신성과 인성의 분리
인간론 : 영. 혼. 육을 세 장소적으로 분리시키는 이원론
이 세가지의 교리가 신인합일론을 만들게 됩니다.
이 세가지 교리를 충분히 파악한다면, 지방교회가 과연 어떤 곳인지 여러분들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지방교회는 자신들의 교리를 숨기고 위장하며 감춥니다.
과연 그들의 주장과 같이 그들은 삼위일체는 양태론이 아닐까요? 그들의 신론은 명백한 양태론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경륜적삼위일체를 주장하기 때문에 양태론이 아니며, 상호내재를 주장하기 때문에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을 합니다. 또한 초대교회의 어거스틴과 갑바도기아 교부들도 자신들과 같은 삼위일체를 주장하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교회사에서 이러한 고전적삼위일체의 배경을 파악하는 사람에게는 이들의 주장은 모두 거짓 조작과 위장을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중에서 제일 먼저 설명할 교리는 양태론이며, 지방교회가 양태론을 주장한다는 명백한 증거와 함께, 지방교회가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하는 소위 경륜적삼위일체와 상호내재론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할 것입니다.
1) 양태론
- 그러므로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은 세 개의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가지의 세 단계"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 아들, 성령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 하나님의 세 방면"이다. 예를 들어 얼음은 물이 되고 물은 수증기가 된다. 즉 "한 실체가 세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그 실체가 수증기의 상태에 이를 때에 우리가 호흡하는 데 유용하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은 성령이 받으며, 성령은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그분을 우리 안으로 가져다 준다. 하나님은 그분의 삼일성 안에서 설명하고 묘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많은 예들이 있다.(위트니스 리의 하나님 297쪽)
위트니스 리의 주장은 전형적인 양태론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한가지의 세 단계” 혹은 “세 방면”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계속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살펴 보겠습니다.
- 아버지는 온전한 수박으로 설명된다. 아들은 조각난 수박으로, 성령은 수박의 즙으로 설명되어진다. 이제 여러분은 요점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일 뿐 아니라 아들도 된다. 그리고 아들은 아들일 뿐만 아니라 성령이 되기도 한다. 바꿔 말하면 이 수박은 먹기 위한 조각도 되며, 우리 안에 있는 즙도 된다. 그 수박은 먹혀진 후 없어진다. 본래 그 수박은 식탁 위에 있었지만, 그것을 먹은 후에 그 수박은 온 가족 속에 있는 것이다(하나님의 경륜, 55-56쪽).
- 왜 그 분의 경륜을 이루는데 하나님의 세 인격들이 필요한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다른 세 하나님이 아니라, 세 인격으로 나타난 한분의 하나님이다. (하나님 363쪽)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리된 세 인격이나 세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은 한 하나님, 한 실제, 한 인격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이름으로 지칭된다. 이름은 그 인격을 지칭하며, 그 인격은 그 이름의 실제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이름은 그 분의 인격과 동등한 신성한 존재의 총체이다. 하나님은 삼일, 즉 셋-하나이시다.(세부분의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 하나님. 52쪽)
- 우리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왜, 어떻게 이 한 하나님이 세 위격을 가지셨으며 가지실 수 있는가? 위격(person)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없다. 그것은 사람의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 290쪽)
아래 글을 읽어보면 위트니스 리가 승계론이라고 하는 전형적인 양태론이라는 것에 대해서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을 것입니다, 성부가 성자로 오고, 성자가 성령으로 왔다는 세 과정과 세 단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아래 글을 읽고 지방교회가 양태론이 아니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신학적으로 무지한 사람일 것입니다
-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처녀의 태 속에 들어가서 그 속에서 아홉달 동안을 머무셨다. 이렇게 해서 그분은 인성을 그분의 피난처와 거처로 취하셨다. 분명히 그분의 성육신은 그분의 과정이었다. 두 번째로 그분은 삼십삼년 반이라는 인생의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이 땅에서 생활하셨다. 이것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세 번째로 그분은 죽음 안에 들어가서 무덤과 음부를 포함한 죽음을 통과하셨다. 네 번째로 그분은 삼일후에 사망과 음부를 걸어 나오셔서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 분의 죽음과 부활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다.(세부분인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하나님 52-53쪽)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리된 세 인격이나 세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은 한 하나님, 한 실제, 한 인격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이름으로 지칭된다. 이름은 그 인격을 지칭하며, 그 인격은 그 이름의 실제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이름은 그 분의 인격과 동등한 신성한 존재의 총체이다. 하나님은 삼일, 즉 셋-하나이시다.(세부분의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 하나님. 52쪽)
- 그러므로 요한복음 3장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주셨다. 이 아들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지 말라.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이 아들이 바로 다름아닌 그 "하나님 자신"이다. 당신이 아들을 영접할 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당신의 기도에서 당신은 그분을 아들이라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 부른다.(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가지 큰 비밀. 18-19쪽)
- 이 놀라우신 하나님은 그분의 분배를 성취하기 위해 <친히 두 단계>를 취하셨다. 성육신에 의해 그 분은 구속하는 어린양으로서의 사람, 마지막 아담이 되셨다. 그런 다음에 그분은 또 하나의 단계 인 부활을 취하셨다. 부활 안에서 그분은 더 전진된 어떤 것이 되셨다. 그분은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가지 큰 비밀. 19-20쪽)
더욱이 위트니스 리는 정통기독교가 가르치는 삼위일체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미 파악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정통 기독교가 성경의 계시와 정통적인 가르침과 해석에서 벗어났다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삼위일체와 양태론에 대한 정의와 판결을 위트니스 리 개인이 내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 어떤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삼일성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에서 아버지를 아들과 분리시킨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 영을 모두 분리시킨다. 그들의 가르침에서 그들은 아버지, 아들, 영이 구별될 뿐 아니라 분리될 수 있는 위격들이라고 말한다.(하나님 287쪽)
- 전통적인 가르침의 영향 때문에 우리는 온전한 하나님이 아닌, 아들 하나님만 성육신이 되셨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실상 신약은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신약은 하나님이 육신 안에 나타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온전한 하나님이 성육신 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신약의 결론, 그리스도 78쪽)
-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아들이 아버지이고 주님이 그 영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그 들이 충고할수록 나에게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말할 힘이 더 생긴다. 나는 성경에 따라 아들이시고, 사람이 되셨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우리 그리스도가 오늘 아들일 뿐 아니라, 아버지와 그 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성령42쪽)
지방교회의 주장은 양태론입니다. 어느 누가 보아도 양태론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한 인격을 주장하고 한 실제를 주장하며, 세 과정과 세 단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정통기독교가 주장하는 것까지 이미 파악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성육신을 한 것이며, 하나님 자신이 직접 마리아의 태 속에 들어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예수로 이땅에 와서, 하나님 자신이 직접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지방교회의 주장이며, 어느 누가 보아도 이것은 전형적인 양태론이 분명합니다. 지방교회는 위트니스 리와 다르다고 말할 자신이 있으며, 위트니스 리를 이단이라고 정죄할 결심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지방교회가 위트니스 리와 다르다고 답변할 수 없다면, 지방교회는 기독교의 양태론이라고 솔직히 말하는 것이 당당할 것입니다.
2) 상호내재
지방교회는 누가 보아도 양태론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양태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가 자신들은 상호내재를 주장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 그 셋은 결코 분리되지 못한다. 그 셋은 항상 동시존재하며 상호내재한다. 한 분이 이곳에 있을 때에 셋 모두가 이곳에 있다. 분리됨이 없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 288쪽)
위트니스 리는 자신들은 셋을 분리시키지 않으며 상호내재와 동시존재를 주장하기 때문에 양태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삼위 양식론의 오류는 무엇인가? 삼위 양식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모두 영원하지는 않고 또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오히려 삼위양식론은 아버지께서 아들의 오심으로 끝났고 아들은 그 영의 오심으로 끝났다고 주장한다.(위트니스 리, 하나님 37-38쪽)
즉 양태론은 성부가 성자가 되고, 성자가 성령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동시에 셋이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자신들은 셋이 동시에 존재하고 상호내재한다고 가르치므로 양태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캘빈의 시대에도 세르베투스라는 양태론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주장한 내용이 바로 삼중적인 신을 도입하는 것이었습니다.
- 캘빈이 그들에 관해서 말한 내용을 잘 검토해 보면, 세르베투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고대의 두 이단설이었던 사벨리우스주의와 아리우스주의를 교묘하게 혼합한 설을 가르친 듯 하다. 일면 세르메투스는 사벨리우스주의자였다. 캘빈이 말했듯이 세르메투스는 "신의 본질 안에 세 위격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마다 삼중적인 신을 도입하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단일성에 일치 않는 한, 이 삼위는 공상적인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234쪽)
앞에서 충분히 검토한 바와 같이 지방교회는 하나님자신이 성육신으로 육신을 입고 왔으며,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살려주는 영의 세 과정, 세 단계를 거쳤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 세 과정과 세 단계가 동시존재, 상호내재한다고 하므로 양태론이 아니라는 주장은 웃을 수도 없는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대학시절의 “나”가 있었고, 그 후에 “나”는 졸업을 하여 회사에 취직하여 일하였고, 그 후에 “내”가 교회에서 이단연구를 하게 되는 세 과정과 세 단계를 거쳤다고 가정합니다. 그 대학생이었던 “나”와 회사에서 근무했던 “나”와 이단연구를 하게된 “내”가, 지금의 “나”라고 하는 사람 안에 상호내재하고 동시존재한다면 하면, 그 나의 세 인격이 하나입니까? 셋입니까? 그 셋이 서로 상호교류가 되고 셋이 구별되는지요?
대학사절의 내가 이단연구를 하는 니와 상호교류를 할 수 있으며, 서로 구별이 됩니까? 그 셋이 내 안에 상호내재하고 동시존재한다고 하여 양태론이 아닐까요?
그러한 삼위일체는 곧 양태론입니다.
이와 같은 삼중적인 개념의 도입이 양태론이 아니라는 변명이 되는지요?
성경을 보면 성부는 성자와 성령을 파송합니다. 삼위일체는 본질적으로 분리되지 않지만, 인격적으로는 분리되어야만 합니다. 만일 인격적으로 분리가 되지 않는다면, 성부가 성자와 성령을 파송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삼위의 파송에 대해서 위트니스 리의 황당한 주장을 들어 봅시다.
-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삼일하나님이 삼일하나님을 보내셨다고 말할 수 있다. 요한복음14장26절에 의하면 삼일성의 첫 번째가 세 번째를 보내셨다. 그러나 세 번째가 보내심을 받았을 때, 그 분은 두 번째로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더 나아가 요한복음15장26절에 의하면, 세 번째는 첫 번째에 의하여 보내심을 받았을 뿐 아니라 두 번째에 의해서도 보내심을 받았다. 세 번째가 오셨을 때 그분은 두 번째로 첫 번째와 함께 오셨다. 하나가 보내심을 받을 때에 모두가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하나가 올 때 모두가 오는 것이다.(성령. 190쪽)
그렇다면 보내는 성부하나님에게도 삼위가 동시존재, 상호내재되어있고, 보내심을 받으시는 성자에게도 삼위가 동시존재, 상호내재되어 있으며, 파송되는 성령에게도 동시존재, 상호내재가 된다면, 삼위일체는 구위삼체가 되는지요?
이런 삼위일체가 양태론이 아니라고 생각이 되어서 재검토를 해달라고 요청을 하였습니까?
지방교회는 자신들이 양태론을 주장하면서도, 당당하지 못하고 비굴하게 그것을 감추고 위장하기 위하여, 교회사의 고전적 삼위일체를 조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방교회는 어거스틴도 상호내재를 주장하였다고 말합니다. 어거스틴의 등 뒤에 숨어 자신들은 양태론이 아니라고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상호내재는 페리코레시스라고 하는데, 그 문자적인 뜻은 윤무(輪舞)를 말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안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상호내재라는 주장은 초대교회에서 종속론이 등장하였을 때에 그것을 반박하기 위한 주장으로서 갑바도기아교부들과 어거스틴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즉 초대교회에서 고전적인 삼위일체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성부가 가장 크고, 성자예수와 성령은 좀 열등한 신성을 가졌다는 종속론이라는 주장이 오리겐등을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과 같이 예수는 열등한 신적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기 위하여, “아버지 안에 내가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는 소위 상호내재라는 주장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 상호내재는 서로가 동등하다는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하여 주므로서 종속론에 멋진 반격을 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호내재라는 이론은 삼위의 인격을 구별할 수 없다는 의문을 일으켰기 때문에 성공적이지 못하였다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 또한 이 말은 모든 신적인 속성 각각이 세 휘포타시스 모두에게 똑같이 돌려진다는 의미다. 즉 세 휘포타시스는 모두 전능하며 전지하며 영원하다. 이 교리는 종속론의 문제를 피하게 해주며 사벨리우스주의나 서머나의 노예투스의 성부고난설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골로새서2:9 "그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에 대해 적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상호점유의 개념은 오리겐의 위계질서적 모델을 기반으로 한 커다란 진보였다. 그러나 이 개념은 휘포스타시스들이 <서로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느냐는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이 점에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제럴드브레이의 신론, 186-187쪽)
상호내재는 장소적인 개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적인 개념으로서 상호침투라는 개념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정통신학은 인격이 구별되며, 상호교류가 가능한 상호내재를 주장하게 됩니다.
지방교회는 초대교회에서 양태론적인 물의를 일으켰던 고전적 삼위일체를 슬쩍 끄집어 내어, 자신들이 양태론이 아닌 것처럼 조작을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경륜적삼위일체
지방교회는 또 자신들은 경륜적삼위일체를 주장하기 때문에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을 합니다, 그들은 초대교회 교부들도 경륜적삼위일체를 주장하였다고 말합니다.
다음은 지방교회가 말하는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들은 자신들도 구별된 삼위를 인정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 "경륜적"으로 말하자면 아들은 이 땅에 계셨고, 아버지는 하늘에 계셨다. 그러나 요한복음14장에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본질적으로 말해서, 아들이 이 땅에 계셨을 때, 아버지는 그분 안에 계셨으며, 그 분은 아버지 안에 계셨다. 우리는 "본질적"이라는 단어를 그분의 본체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존재하심을 언급하는데, "경륜적"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언급하는데 사용한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하여 아버지는 하늘에 계셨고 아들은 땅 위에 계셨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즉 그 분의 실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존재하심에 따르면, 아들은 항상 아버지 안에 계셨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셨다. 이것은 상호내재의 문제이다. 이들은 아버지와 하나였을 뿐 아니라 아버지와 상호내재하였다. (위트니스 리, 그리스도. 33-34쪽)
위 글을 읽고 지방교회도 구별된 삼위를 인정한다고 생각할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다음 글을 읽어보겠습니다.
- 본질적이라는 것은 생존과 존재를 위한 것이며, 경륜적이라는 것은 일과 기능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본질적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분의 존재를 가르키는 것으로, 그 분의 존재하심 안에 있는 거룩한 삼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경륜적인 삼일성을 말할 때 이는 그분의 움직이심과 역사와 기능을 가르키는 것으로 그분의 경륜 안에 있는 거룩한 삼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다.(위트니스 리, 성령 69쪽)
이들이 말하는 용어를 파악하면 이들의 주장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지방교회가 말하는 경륜적삼위일체란 실제적인 삼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과 기능을 위한 사역적인 분류일 뿐입니다. 즉 하나님과 예수님은 인격적으로는 구별되지 않고, 단지 사역적으로만 구별된다는 것이 경륜적 삼위일체인 것입니다.
즉 그들이 구별된 삼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일과 기능을 위한 사역적으로만 구별되어진다는 것으로 양태론이라는 스스로의 고백과 같습니다. 동일한 한 하나님이 구약에서는 아버지로 사역하셨고, 신약에서는 예수로 사역하셨다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성령으로 사역을 한다는 것이 곧 사역적(경륜적) 삼위일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통신학자가 말하는 경륜적삼위일체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 그러나 이 견해는(필자주: 경륜적삼위일체는) 전체 교회의 지지를 획득하는 데 실패했다. 신학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동방의 3대 신학자와 아우구스티누스 후부터 경세론적 삼위일체론을 공적으로 지지하는 신학자는 없었다......이러한 이유에서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제4세기 이후부터는 신학영위의 중심부에서 밀려나고 말았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7쪽)
이들이 주장하는 경륜적 삼위일체란 사역적으로 구별되는 삼위를 가르키는 것으로서, 이미 4세기 이후에 자취를 감춘 이론일 뿐입니다. 이들은 삼위일체를 경륜적과 본질적으로 구별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양태론이 아니라고 위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 이러한 유형의 경륜주의에 따르면, 구약성경은 성부에 대한 계시였으며, 성육신에서 승천에 이른 시기는 성자에 대한 시대였고, 오순절 이후부터의 시기는 성령에 대해 계시하는 시대라는 것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51쪽)
또 그들이 말하는 상호내재(페리코레시스)도 초대교회에서 양태론적인 오해를 불러 일으켜 비판을 받았던 주장으로서, 인격을 구별할 수 없다면 안됩니다. 상호내재는 고유의 인격성을 강조하여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상호내재라는 개념이 비판을 받아왔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 위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바실(필자주: 초대교부)은 삼위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통해서’, ‘안에서’ ‘함께’ 라는 낱말을 구사하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본성적 상호교류 또는 대자적 관계성을 강조했다. ..... 그는 신성의 통일성과 단일성을 강조하다가 군주신론(필자주:양태론)에 빠진 데오도투스나 사모사타의 바울을 경계했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1쪽)
그렇다면 정통신학이 말하는 상호내재적인 연합이란 무엇일까요?
- 그(예수)는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했는데 이는 우리의 연합이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와 성자 사이의 완전한 연합과 같게 되기를 기도하신 것으로, 우리의 하나됨은 영원하고 완전히 조화를 이룬 것이어야 함을 (하나님의 하나됨과 같이)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삼위를 통한 비유가 대단히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개개인의 성품을 흡수해 버리지는 못할 것을 경고하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완전한 연합을 이루고 있음에도 그들은 <독립된 삼위>이다. 마찬가지로 어느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다른 신자들과 함께 완전한 연합을 이루게 되겠지만,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능력, 관심 책임, 친구관계, 선호도, 욕망등을 소유한 <독립된 개체>로 남아 있을 것이다.(웨인 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557쪽)
양태론은 단순한 이단적인 신학적 이론이 아닙니다.
양태론을 주장하게 되면, 와이셔츠의 처음 단추를 잘못 맞춘 결과가 되어 나중 단추를 채울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양태론을 주장하는 자들 중에서는 예수의 재림을 부정하는 곳도 있으며, 지방교회는 예수의 가시적(可視的)이며 신체적인 재림을 부정하며, 죽어서 가는 사후 천국의 장소적인 개념도 부정합니다,
양태론에 의하면 성령이 곧 다시 오신 예수가 되며, 예수가 죽고 부활하여 성령으로 오신 양태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에 예수의 재림은 없게 됩니다.
또 구약의 하나님의 신, 성령과 오순절 이후의 성령은 다른 존재가 됩니다.
더욱이 하나님 자신이 직접 육신으로 와서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을 드리는 분과 그 제물을 온전히 받으시는 분이 인격적으로 동일한 존재가 됩니다. 즉 그들의 십자가 대속적 개념은 정통기독교와 다른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의 죽음은 죄에 대한 대속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공급하기 위한 신인합일의 목적이 되어 버립니다. 그들의 구원관은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지방교회는 누가 보아도 명백한 양태론을 주장하면서, 그들을 양태론이라고 비판하면 그들은 자신들은 상호내재를 주장하므로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을 합니다. 또 그들은 초대교회의 교부들과 같은 경륜적삼위일체를 주장하므로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교회사를 통하여 고전적삼위일체의 과정과 단계를 인지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모두 거짓조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단들 중에서는 당당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말하는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주장을 위장하고 감추어서 교인들을 미혹하는 이러한 지방교회와 같은 이단들은 매우 위험한 이단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출처] 지방교회의 양태론과 그들의 위장과 거짓조작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작성자 dsmed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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