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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신사도 운동의 회개

by 【고동엽】 2022. 1. 28.

신사도 운동의 회개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신사도 운동교회들은 강력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한다. 나는 신사도 운동이 뭔지도 몰랐을 때에 그들 몇 목사의 설교를 듣고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일단 회개라는 단어가 자주 설교에서 나오기 때문이었다. 요즘 유명한 목사들의 설교에서 회개라는 단어는 과연 일 년에 몇 번이나 등장할까? 한번 신경쓰면서 들어보는 것도 약간의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 우리 시대의 기독교에서는 회개라는 말은 깊은 산 속의 산삼같이 진귀한 것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나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개독교인”이라는 말에 합당한 저질 교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회개가 무우처럼 흔하지는 않더라도 산삼처럼 보기드물지 않았더라면 개독교라는 단어가 쉽게 한국 사회에서 먹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교회에는 떼를 지어 부지런히 다니지만 믿음의 참 모습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개독교라는 조롱의 말이 쉽게 먹혀들고 말았다. 신사도 운동 교회들의 강한 회개의 외침은 바로 이런 상황과 잘 맞았다. 마치 천상으로 호출되어 진도하신 하나님을 대면하고서 세상에 보내어진 거룩히 분노하는 선지자의 일성으로 다가왔다. “교회만 다니면 다 구원 받습니까? 예수를 영접한다고 기도만 따라하면 다 구원 받습니까? 죄를 짓고도 아무 가책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입니까? ... 회개하지 않고 어떻게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습니까? 회개하세요! 회개하지 않으면 믿는 자도 지옥에 갑니다! 그들 몇 목사들의 회개에 대한 설교는 확연하게 나나 다른 목사들의 설교와는 달랐다. 그래서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들었더니, 점점 이상하다는 느낌도 들기 시작했다. 세례요한의 이미지 같기도 하고, 그러나 세례요한 스타일도 아니었다. 바울의 이미지와도 닮은 것 같기도 하나, 바울의 스타일은 더욱 아니었다. 별종의 회개가 등장한 것이다. 모든 믿는자들을 싸잡아서 저질로 몰고 욕을 보이는 부끄러운 개독시대를 살며 "왜 이렇게 되었나? 무엇이 잘못되었나? 정말 구원은 오직 은혜인가?"라며 반성의 부담을 느끼는 성도들에게 강력한 회개의 메신저로 다가운 그들은 바로 신사도 운동의 선구자들이었다. 제대로 바르게 전하기나 하면서 그러면 귀엽게나 봐 주겠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의 진리를 모두 왜곡하면서 회개에 대한 강박관념만 가지게 한다. 더 심각한 것은 그 설교를 듣고 회개! 회개! 회개! 하는 사람들이 실상은 회개하지도 않으면서 자신들도 덩달아 그 구호로 즐긴다는 것이다. 성경적이도 실질적이지도 않는 회개의 허황스런 열풍이 그들에게서 일어난다. 온전치 못한 연약하고 부족한 양들을 지배하려는 것인지 ... 확연히 다른 메시지로 자신을 부각시키려는 것인지 ...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신사도 운동에 빠진 목사들의 회개의 메시지는 강력하다. 그러나 확실히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다. 내가 주목하여 살펴본 신사도 운동에 빠진 한국과 미국의 이민 교회의 목사들의 회개의 외침은 정말 그랬다. 아직 미국의 신사도 운동하는 목사들의 회개에 대한 설교를 접해보지는 못했다. 서로 영이 같으니 성향도 같고, 회개에 대한 부분도 비슷할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서는 믿음의 증거가 확실하게 드러나야 한다. 믿음의 증거들 가운데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할 참 믿음의 증거는 죄에 대한 우리의 자세이다. 이전에 즐기던 죄가 더 이상 즐겁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죄에 대해서는 친근하지 않아야 한다. 혹시 죄를 범하더라도 속히 하나님 앞에서 바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회개이다. 회개는 믿음의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회개는 영적인 속성이 변함으로서 나타나는 일이다. 죄를 거부하고 죄와 투쟁하는 영적인 성향,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가장 학실한 특징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절대로 죄를 범하지 않는다!”라고 하면 비성경적이다. “죄에 대한 생각과 태도가 이전과 확실히 달라진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말해야 성경적이다.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나는 성경을 제대로 아는 바른 목사라고 자부한다. 또한 목사이건 일반 성도이건 상관없이 모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다시 죄에 빠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항상 조심해야 한다. 구원 받았지만 여전히 우리 속에는 두 인간이 있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 우리 속에서 서로 대치하며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두 속성의 싸움,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실존이다. 어떤 세력이 더 자주 이기는가에 따라서 인생이 질이 변한다. 우리의 믿음의 품격도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늘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 어떤 믿음 좋은 성도도 항상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다 그렇지!”하며 너무 쉽게 죄와 타협하지 말고 죽도록 싸워야 한다. 가장 큰 마지막 싸움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우리 자신을 쳐서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싸움이 최고의 전투이다. 회개는 가장 중요한 전투를 승리로 마감하기 위한 절대적 요소이다. 회개없이 영적전투에서 승리를 얻을 수는 없다. 회개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회개없이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는 없다. 회개없이 불행을 행복으로 바꿀 수는 없다. 회개없이 마귀를 이길 수 없다. 회개아 영원히 담을 쌓은 것은 하나님과 담을 쌓는 것이다. 회개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능한 자주 많이 회개해야 한다. 나도 충분히 강력하게 회개에 대해서 설교하는 목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신사도 운동 교회의 목사들은 우리 시대의 또 다른 골치거리이다. 회개를 이상하게 남발하면서 복음을 왜곡해 버린다. 그들은 “진짜 구원 받은 성도도 회개 안하면 다시 지옥에 떨어진다!”라고 거침없이 설교한다. 얼핏 생각하면 나쁠 것이 없다. 가능한 죄를 짓지 않게 만들고, 죄에 빠지더라도 빨리 회개하도록 하니 좋은 것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아무리 좋은 회개라도 어디까지나 성경적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명령과 뜻 안에서 울던불던 해야 진짜 회개이다. 어찌 하느냐에 따라 복음적인 회개일 수도 있고 사탄적인 회개일 수도 있다. 회개가 어떻게 사탄적일 수도 있을까? 복음적 사고가 부족한 사람에게는 어려운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의 가슴을 시리게하는 서글픈 사실이다. 혹시 쉬지 않고 "회개해야 해! 회개해야 해!..." 하는 사람의 영혼 속에서 구주의 피 묻은 십자가가 점점 왜소해지다가 그만 사라지고 마는 것을 본적이 있는가? 처음 듣는 이야기라면 이제부터 신사도 운동하는 목사들의 구원과 회개에 관한 설교를 주의깊에 들어보기 바란다. 그 설교를 듣고 흥분하고 돌아오는 성도들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기 바란다. 뭔가 분명히 보일 것이다. 신사도 운동에 앞장서는 그들의 설교를 듣노라면 과연 구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하나님의 값었는 선물인지에 대해 의심이 일어난다. 구원은 내가 나 자신의 회개를 통해 힘들여 획득하고 끊임없는 회개로 껄떡거리면서 유지보수하는 나의 힘겨운 노력의 결실이라고 여겨진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써야 했던 동일한 상황이 2,000년이 지난 지금 한국과 미국의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들에게서 되살아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자신을 선지자나 사도라고 한다. 일반 성도들로서 강력한 회개의 복음을 전하는 그들이 일반 목사도 아니고 더욱 위대한 사도와 선지자라고 하니까 감히 대항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의 가르침을 통하여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과 권세가 어떻게 교회에서 사라지고 있는지, 새로운 기독교 세계가 어떻게 열리고 있는지 ...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보면 좋겠다. 결코 예삿일이 아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설교를 들어보라! 그들의 입에서 예수의 보혈의 위대한 능력과 권세가 과연 제대로 선포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바란다. 카랑카랑한 선지자의 음성으로 회개를 죽도록 외치기는 하지만 십자가는 없다. 그 부분이 일반 교회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존귀하신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창안하는 신기독교에는 십자가가 없거나 너무나 왜소해졌다. 십자가가 없어진 그 공간이 그들의 복음에 은혜을 받은 사람들의 열심, 기도, 회개, 봉사, 충성, 순종, 찬양, 기적, 입신 ... 들로 채워진다. 그리고 그들은 자랑한다. "전세계적으로 부흥하는 모든 교회들이 신사도 운동을 추진하는 교회들이다!", "하나님은 신사도 운동하는 종들을 통하여 새로운 은혜를 시대를 열어가신다!" ... 고스란히 부흥으로 홍보된다. 나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들의 이 거짓 부흥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는 목사들이 너무나도 한심하다. 빈번한 단기선교, 뜨겁고 감동적인 찬양, 특히 일어서서 손을 들고 찬양하거나 손 춤을 주면서 찬양하는 사람들, 신비적인 기도 소리들, 자기들끼리의 뜨거운 결속, 그 지도자들에 대한 절대적 충성과 순종 ... 이것들이 부흥의 진정한 증거들일까? 이 자체가 꼭 나쁜 것이라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부흥의 알맹이도 결코 아니다. 십자가의 권세와 능력을 힘써 선포하지 않으면서 이런 따끈다끈한 현상이 일어나고 유지된다면, 절대로 반길 일은 아니라고 보아야하지 않겠는가? 더우기 십자가와 전혀 상관없는 별난 회개의 복음이 울려퍼지고 있다면, 그것이 부흥이고 성령의 역사일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그들의 회개의 복음은 결코 무기력하지 않다. "믿는 사람들 중에서 결국 구원 받는 사람은 2%~15% 정도이다!"라고 거침없이 말해도 통한다. "입신하여 천국 상황을 보고 온 사람들의 간증을 종합하여 보고, 예언자들의 예언을 종합해 보니 그런 통계가 나옵니다"라고 오중직을 모조리 다 가지신 서울의 한 사도가 말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 그 인사의 회개복음에 은혜 받아서 십자가를 부여잡기 보다는 더 힘써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런 일이 어찌 사람으로 부터 왔겠는가? 어떤 영리한 인간이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십자가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겠는가? 오직 그 이름이 Satan이라는 자와 그의 종들이 벌이는 일일 것이다. 구원의 복음은 본질적으로 놀라운 은혜이다. 그 은혜의 넓이과 깊이는 인간의 필설로는 형용할 수가 없다. 십자가에서 발원한 구원의 강의 깊이와 넓이는 너무나도 엄청나다. 그래서 "Amazing Grace"라는 찬양은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우리의 영혼을 울리는 아름다운 찬양이다. 신사도 운동의 별종의 회개를 전파하는 그 추한자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다시 지옥간다! 회개하라! 회개해야 한다!" ... 라고 설파하면서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인 보혈의 십자가를 떠나게 한다. 대신 부지런히 회개하자고 한다. 그래서 그들의 복음을 신약의 신율법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회개와 구원의 관계, 회개와 성화의 관계를 잘 모르는 성도들은 그들의 간교한 설교에 속게 된다. 우리는 회개의 두 차원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구약성경에는 회개라는 단어가 없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께로)돌아오라”라는 표현이 구약성경에 나타난 회개의 개념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오라(사31:06).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욜2:12).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인간의 행위의 개념을 신약성경은 “회개”(메타노에오)라는 한 단어로 표현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회개의 개념도 자세하게 살펴보면 두 차원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구원(Salvation)을 위한 회개이고 또 하나는 성화(Sanctification)를 위한 회개이다. 사도행전 앞부분에서 나타난 사도들의 회개의 설교는 대부분 구원론적 회개이다.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회개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이 내신 예수라는 다리를 건더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이 구원의 길이다. 다른 길들과 다른 다리들을 향하여 걸어가던 사람이 예수라는 다리를 향하여 인생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구원의 회개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행5:31)라고 선포했다. “임금과 구주”라고 했다. 더 이상 예수를 평범한 사형수로 취급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를 사회운동하다 실패하고 죽은 죄인이나, 나사렛 출신 저질 이단으로 간주하지 말라는 것이다. 구원 받고자 하는 자들이 선택해야 할 유일한 그리스도 뿐이니 그길로 방향을 바꾸라는 것이었다. 예수에게 고개를 숙이고 겸손하고 생명을 의탁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베드로와 사도들의 회개의 중심 멧시지였다. 이 회개로 인하여 실패한 에덴의 아담으로 인해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살아나고, 잃어버린 자여의 권세가 회복되는 효능이 발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사도 운동에 빠진 이단 목사들은 베드로의 이런 설교조차 바르게 해석하지 못한다. 전혀 엉뚱하게 제 멋대로 설교한다. “구원은 예수를 자기의 임금으로 삼는 것입니다. 예수가 임금인데, 어떻게 예수가 싫어하는 일을 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임금이 싫어하는 일을 그대로 달고 살수가 있습니까? 임금이 싫어하는 죄를 지으면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어떻게 예수를 자기의 임금으로 삼은 사람이 예수가 싫어하는 죄를 그대로 둘 수 있습니까? 임금이라면서요? 그게 정말 예수 믿는 겁니까? 아닙니다. 속지 마세요. 교회라고 다 같은 교회가 아니고, 목사라고 다 같은 목사가 아닙니다. 영혼을 죽이는 소경된 설교자들에게 영혼을 맡기지 마세요! 진짜로 구원 받은 사람일지라도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다시 지옥에 갑니다!”라고 거침없이 외친다. 참으로 살 떨리게 하는 강한 회개의 메시지이다. 그러나 이는 베드로의 의도와는 전현 상관이 없는 설교이다. 베드로가 구원의 차원에서 언급한 회개를 그들은 성화와 영적성장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적용한다. 바로 여기서 복음의 중대한 변질이 일어난다. 구원을 위해 자기 지혜와 자기 노력을 버리고 십자가 상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고 의탁할 것을 결단하는 회개와 영적성장과 더 깊은 성화로가기 위한 회개를 혼탁하게 섞어서 외친다. 그러니 성도들이 구원과 회개에 대해서 바른 지식을 가질 수가 있겠는가? 결국 그들의 구원이 시시때때로 출렁거리고 덜렁거리게 되는 것이다. 중대한 사실은 그들의 설교에서는 구원의 영속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복음에 의하면 인간의 구원은 오직 그 자신이 죄를 짓느냐 마느냐, 그리고 회개를 하느냐 마느냐에 달렸다. 죄를 조심하는 것은 좋지만, 그런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에서 어떻게 건강한 성도가 태어나고 자라고 훈련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수시로 확실하게 구원 받은 성도도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한다. 그 근거를 성경에서 찾아서 외친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하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히6:5,6). 이 말씀으로 이미 구원 받은 성도의 구원의 박탈을 자신있게 말하는 목사들은 대부분 신사도 운동에 빠진 사람들이다. 조금만 신경써서 들으면 그들의 설교에는 십자의 대속과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상하리만큼 그들은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를 말하지 않는다. 참 이상하게도 예수의 보혈의 공로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복음은 사탄적인 복음이다. 십자가와 예수의 보혈이 없는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아무리 예배와 기도와 찬양이 풍성해도 그런 교회는 사탄의 교회일 뿐이다. 우리 구원과 구원의 영속성의 사유가 십자가와 보혈이라는 사실을 거의 강조하지 않는 목사들이 신사도 운동에 빠진 그 자들이다. 신사도 운동을 앞장서 전개하는 어떤 목사의 설교를 들었는데, 그는 처음 예수를 믿는 단계에서부터 모든 죄를 회개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착각이 들도록 설교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을 말하지 않는 것은 입장에 따라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값없는 구원의 은혜, 오직 십자가를 부여잡는 믿음으로 인해 임하는 구원의 은총에 대해서는 전혀 말이 없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라는 구절을 그럴 듯하게 인용했다. “복음을 믿으라!”라고 하는 부분보다 “회개하고”라고 하는 부분이 앞서 있으니까 먼저 모든 죄악을 철저하게 회개한 후에 드디어 예수를 믿을 수 있고, 그때 구원이 임한다는 식이었다. 신사도 운동은 이렇게 복음을 왜곡한다. 나는 그에게 묻는다. “당신은 그렇게 구원받았습니까? 아직 영혼이 죄 속에서 죽어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자기 죄를 깨닫고 용서를 구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과연 자기 죄의 몇 %의 회개해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갈 자격 생긴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어떻게 해야 끝가지 구원을 간수하여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더럽고 추한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와 은혜를 의지함으로 구원을 얻는다. “아무 공로 없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의지합니다!”라며 진심으로 결단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순간 그 사람은 구원 받는다. 이것이 구원의 회개이다. 이 외의 그 어떤 것도 구원에 작용하는 것은 없다. 다른 어떤 것도 추가할 인간의 것이 없다. 이것이 참 복음이고, 이것이 구원을 얻는 회개이다. 그렇다면 이 구원의 회개가 진정이었는지? 정말 그 사람이 구원을 얻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것은 삶의 변화이다. 삶, 사상, 가치관, 세계관에서 성경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이것은 거듭난 영적생명의 성장이 시작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구원의 회개가 확실할지라도 영적훈련이 아직 미약하면 뚜렷한 변화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구원의 감격을 느끼는 사람에게서는 반드시 이러한 변화가 나타난다. 좋은 예가되는 인물은 삭개오이다. 그는 구원의 감격을 느끼는 순간부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눅 19:08). 구원의 회개로 인해 거듭남과 새로운 생명을 얻고 나면 즉시로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이전까지 즐기고 좋아하던 죄에 대한 새로운 태도이다. 느낌이 달라진다. 서서히 결별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가장 큰 성화의 특징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치 못한 오래 묵은 죄악된 습성들과 취미와 기질과 죄들을 신앙으로 다루는 성화의 회개가 일어난다. 이 일은 그리스도인의 전 생애를 통하여 쉬지 않고 일어나는 과정이다. 전인격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활동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사도 바울은 이 과정을 "구원을 이룬다"라고 표현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그러나 신사도 운동가들은 이 말씀을 성도의 구원의 불안정안 달랑거림으로 해석한다. 신사도 운동에 빠진 거짓된 목사들과 참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들의 차이는 여기에서 극명하게 갈라진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구원의 회개와 성화의 회개를 구분하지 않는다. 구원의 회개와 성화의 회개를 동일시하거나 혼합하여 설교한다. 성화의 변화의 도상에서 일어나는 회개를 구원을 유발하고 유지하는 인간의 신앙적 공로와 조건으로 만들어 간다. 이것이 사탄의 계교가 아니면 무엇인가? 이보가 더 큰 말씀의 변질이 어디에 있는가? 사도바울이 그렇게 미워하고 증오했던 일이 그들에게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9). 성경에는 말씀을 변질하거나 왜곡하거나 더하거나 빼는 자들에 대한 심판이 명백하게 나타난다.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9). 이 모든 일들이 신사도 운동에 빠진 목사들에게서 나타나고 있지 않는가? "진짜 구원 받은 사람일지라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시 지옥에 떨어진다!". 벌건 대 낮에 강도가 기승을 부리듯이 버젓하게 그런 설교를 하고 다니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순진하고 우매한 성도들은 더욱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은혜 없는 종이 되어간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 끝까지 구원을 유지하는 사람은 2% ~ 15%에 불과하다고 사도께서 입신하여 천국을 본 성도들의 간증을 종합하여 결론을 내리시니 더욱 오금이 조리고 떨릴 것이다. 구원의 여정에서의 회개와 성화의 여정에서의 회개는 다르다. 성화의 여정은 일평생이며, 성화의 회개도 일평생의 일이다. 전혀 열매가 없는 나무는 산 나무가 아니라 죽은 나무이듯, 전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성화의 회개가 더디고 느리다고 해서 그가 죽은 영혼이거나, 지옥에 떨어질 영혼이라고 설교하면 안된다. 영혼이 분명히 거듭났을지라도 영적훈련이 시작되지 않거나 미약하면 행동에서 신앙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믿음이 게으르고 열매가 없을지라도 다시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설교할 수 없다. 성도의 영혼의 보존은 성도 자신의 노력과 힘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의 영속은 인간 자신의 행위와 믿음에 달린 것이 결코 아니다. 성도의 영혼의 보존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다. 성도의 구원의 영속성은 오직 하나님의 권능에 달렸다. 마귀는 절대로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에 도전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보호를 입고 있는 구원받은 성도의 영혼을 빼앗지 못한다. 만일 마귀가 우리의 죄나 다른 어떤 다른 수단으로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서 빼내어 다시 지옥에 떨어지게 할 수 있다면, 그가 바로 하나님이다. 정말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 못 믿겠다. 나를 마귀에게 빼앗길 수도 있는 그가 왜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있겠는가?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니라”(롬8:39).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아무도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한번 영생을 얻은 자는 다시 지옥에 가지 않는다. 인간의 머리는 이 진리를 이해하고 담기에는 너무나 작다. 나도 어리석게 이전에 이 진리를 바로 가르치지 못한 적이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죽였다 살렸다 변덕을 부리시지 않는다. 마귀는 우리에게 고난을 줄 수 있을지라도 영혼을 빼앗거나 죽이지는 못한다. 죄을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다시 지옥에 떨어진다는 신사도 운동 교회의 이단 목사들의 사상은 마귀의 힘을 찬양하는 악한신학이다. 마귀가 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성공하면 걸려드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다시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구원하는 하나님이나, 다시 지옥에 가도록 만드는 마귀나 땡기는 방향이 다를 뿐 능력 그 자체에로는 뭐가 다른가? 그들은 그런 식으로 마귀를 높인다. 사랑하는 자녀가 지옥가게 되어도 그대로 방관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죄에 빠진 자녀를 회개하도록 책망하시고 때리시기까지 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빼앗기지 않는다. 불순종의 죄를 짓고 도망간 요나를 깊은 물에 던져지게 하시고, 큰 물고기가 삼키게 하시고, 다시 뭍으로 토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영혼과 지옥과 천국, 모든 것을 다스리고 주관하신다. 주권과 권능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마귀와 공유되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신사도 운동은 어느 정도 죄를 회개하고 도덕적 영적 수준이 평균은 넘어야 예수를 믿을 수 있고, 그래야 구원이 있는 것처럼 가르친다. 성경은 모든 죄인들이 조건없이, 값없는 은혜로 피 묻은 십자가를 의지함으로 구원받는다고 한다. ▣신사도 운동은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으로만 회개하는 것처럼 강조한다. 각자가 회개하고 안하고에 따라 영혼의 생사가 갈린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회개하여 은혜에 이르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 ▣신사도 운동은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다시 확실하게 지옥에 떨어진다고 한다. 그러 나 성경은 구원받은 영혼은 하나님의 권능과 주권과 은혜에 근거하여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신사도 운동은 죄인에게 부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진부한 주제라고 가르친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교회의 질이 떨어지고 성도들이 저질로 전락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의 주제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영원토록 십자가를 통해 부으시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이다. 생각을 조금만 하면 신사도 운동의 성경파괴 운동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런대도 목사라는 자들이 구별을 못하고 빠지고 있다. 신사도 운동의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 성령의 인도하심, 보혈의 권능이 실종된 자력구원, 자력갱신, 자가회개의 복음이다. 그들의 최고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가 있는듯 하나 더 자세히 보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다양한 모든 것들이 풍성하게 넘치고 있다. 더욱 거운 기도, 더욱 번한 회개, 뼈와 살까지 다 녹이는 굉장한 찬양, 여름보다 뜨거운 단기선교, 매 주일 더해지는 숫적증가 ... 부흥이라 자랑할 모든 다 갖추었다. 과연 그들의 중심에 피 묻은 십자가가 있는지 보라! 과연 그들의 의가 십자가를 통하여 받은 의인지를 보라! 이상하게도 여러 면에서 그들의 색채는 구약적이다. 그것이 신사도 운동 교회의 신앙이다. 특히 그들의 회개의 교훈도 복음적이라기 보다는 더욱 더 구약적이다. 그들의 많은 설교들과 핵심 주장들을 보노라면 지금 우리가 신약 교회에 속했는지,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고 있는지 햇갈린다. 그들의 회개와 구원의 가르침을 신율법주의라고 비판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신사도 운동가들은 따로 모여 교단을 결성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역에 교회에 필요한 사람을 양성하기 위해 기존의 신학교육 기관을 이용하지 않고 선지자학교, 중보기도학교 ... 등의 스스로 만든 자체 훈련기관을 더 중시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서는 기존의 교단처럼 일치된 교리나 신조가 나타나기는 어렵다. 그러나 보니 그들 내부간에도 약간의 노선의 차이가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들기리 Blame game을 하기도 한다. 회개에 관한 부분도 그렇다. 다른 면에서 신사도 운동에 연류된 정황이 나타나지만, 그릇된 회개 사상을 선포하지 않는다 하여 그 분이 신사도 운동과는 거리가 멀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아직은 극도로 위험스러운 선에 이르지 않는 인물이다" 또는 "회개에 대한 별다른 주의주장은 없는 분이다"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내가 본 바로는 한국과 미국의 이민 교회 중에서 신사도 운동의 선구자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몇 분들에게서는 변질된 회개사상이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더욱 더 위험스러운 사탄의 큰 일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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