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살라! (빌 1:27-30)
저는 제가 설교할 때, 너무나 화가 나는 사람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어느 교회 부흥회를 하는데, 권사님 한 분이 편지를 주셨습니다. 제가 설교할 때, 너무나 화가 났다는 것입니다. 꼭 저렇게 믿어야 하나? 자신이 그동안 믿고 살아왔던 것과 너무나 다르게 말씀하여서 너무나 속상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답니다.“꼭 강사 목사님 말씀처럼 믿어야 하나요?”그랬더니 하나님께서‘강사 목사의 말이 맞다.’하셨답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마음을 여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런 사람이 있을까 걱정입니다.
제 설교가 혹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삶의 열매를 강조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께서 정말 하시고 싶어하시는 말씀입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우리가 다 천국에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지를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하였습니다.
빌 1:27 여러분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십시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무엇일까? 용서와 사랑, 기쁨과 감사, 전도와 헌신 등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은 아주 특별하면서도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당하는 것을 특권이라고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29절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특권, 즉 그리스도를 믿는 것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특권도 주셨습니다.
여러분, 정말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당하는 것이 특권이라고 여기십니까?
“이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당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선착순 입니다.” 광고하면 3부 예배에 나온 교인들이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지겠습니까?
아무리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고난이 특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고난 당하는 것이 축복이고 특권이라 여겨진다면 기적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기적이 일어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특권이구나! 믿어지는 기적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고 하였는데, “생활을 하라”는 말씀을 각주에서는 “시민 노릇을 하라”는 말이라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나라 시민답게 살라.”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당시 최고의 신분으로 여겼던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을 비유로 말한 것입니다.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당연히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최고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보호를 받으며, 로마의 풍습을 따라 살았고, 로마 시민이 아닌 사람들은 다 야만인이라고 여겼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로마 시민권자 처럼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살듯이 우리도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일본 시민권, 중국 시민권, 미국 시민권, 몽골 시민권 등 여러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삽니다. 그들은 다 다르게 삽니다. 시민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시민권의 매우 독특한 부분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시민권에는 반드시 의무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권리도 있지만 의무가 있습니다. 교육의 의무, 근로의 의무, 납세의 의무, 국방의 의무와 같은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 위하여, 중국 위하여 나의 생명, 가정까지 희생할 마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어려움에 처했다면,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라도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나설 것입니다.
얼마 전 뉴스를 보니 보훈처에서 37년 동안 6·25 전사자 유족에게 보상금으로 5천원을 지급해 온 것으로 밝혀져 논란을 빚었습니다. 그래도 군에 입대할 것입니까? 그렇지요. 그래도 입대해야지요! 나의 조국이니까요!
하나님의 나라 시민이 된 특권에는 권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무도 특권입니다.
외국인은 우리나라 군대에 입대할 수 없습니다. 본인이 원해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그런 특권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도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 시민권을 가진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구원받은 신앙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복음으로 구원받은 것 뿐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싸우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시민 된 증거를 보고 싶다고 한 것입니다.
27절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함께 싸우며”
그리고 그렇게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30절 “여러분은 내가 하는 것과 똑같은 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당하는 것도 특권이라 여기려면 반드시 해결받아야 하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를 보고 싶어 했습니다.
28절 “…어떤 일에서도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나에게 들려오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고난을 당하는데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잘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고난당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 시민이라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려움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시민이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 미움을 사고 따돌림을 받습니다. 이것이 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외국인을 특별히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 시민인 증거가 된다고 생각하면 꼭 나쁜 일이 일어난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축복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은 멸망당할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28절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징조이고 여러분에게는 구원의 징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나면 우리를 대적하는 이들이 무섭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당하는 것이 정말 특권으로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핍박은 엄청났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생명을 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을 때, 구원의 은혜도 받았지만 고난도 당할 것을 각오했습니다. 그것을 오히려 기뻐하였습니다.
행 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이 전해졌을 때, 믿음의 선조들도 구원도 받았지만 고난도 당할 것을 각오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이렇게 복음이 부흥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북한의 지하교회 믿음의 형제들도 주일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그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지는 느낌입니다. 우리는 북한 교회를 불쌍하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그런 지 생각해야 합니다.
북한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을 때, 당연히 고난도 받을 것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당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싫어한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느 쪽이 불쌍한 교회입니까? 북한 교회와 믿음의 형제들을 생각하면 불평할 것이 없어져야 합니다.
텔레토비 시리즈가 한창 유행할 때, '크리스천과 '텔레토비의 공통점' 이란 유머가 있었습니다. 내용은 "시간이 지나도 성장하지 않는다. 고민이나 눈물, 수고가 없다. 그리고 그들의 모임엔 새로운 멤버가 없다." 였습니다. 죽은 믿음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고난도 축복이라고 믿는 지는 자녀에게도 주를 위한 고난의 길로 가게 할 수 있는지를 점검해 보면 압니다. 많은 성도들이 여기서 무너집니다. 자신은 고난의 길을 가리라 결단하고도 자녀만큼은 편안한 길을 가기를 원합니다. 이 역시 모순이고 아직 온전히 복음이 결론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좋은 것인 줄 아는 것은 자녀들이 싫다고 해도 강권합니다.
자녀들에게 공부 공부하지만 공부 많이 해서 다 행복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 확실한 길이 아닌데도 그렇게 자녀들에게 강요하면서, 정말 자녀들에게 영원히 복된 확실한 길 있는데도 왜 강권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당하는 길로 가라고 하는 데는 주저하십니까?
고난이 힘들어서가 아닙니다. 부모 자신에게 복음이 분명치 못한 것입니다.
여전히, 고난이 특권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죄책감을 가질 것이 아니라 앞으로 주님이 변화시켜 주실 것을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인격으로 만나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고난이 특권임이 믿어지되 자녀에게도 권할 만큼 믿어지게 될 것입니다.
주광조 장로님은 자기 아버지, 주기철 목사님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주기철 목사님을 믿음의 용사,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이 아들은 일본 고등계 형사가 자기 집을 덮쳤을 때 도망나가는 아버지,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안간 힘을 쓰는 비겁한 아버지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대로 증언했습니다. 그런 주기철 목사님이 어떻게 순교하셨습니까? 그 분에게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이 믿었던 주님이 능력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약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놀랍게도 그 믿음이 능력이 됨을 봅니다.
제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 가장 크게 회개한 것이 목사를 성공하는 방편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 때 저는 장애인이 될 처지에 빠졌습니다. 다리를 절지 않게 해달라는 절박하게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 회개의 영이 임하고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나를 천국에 가게 하신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도가 확 바뀌었습니다.“제 오른쪽 다리를 바치겠습니다.”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순간 정말 장애인이 되는 것이 더 축복일 것 같았습니다. 두 다리가 벌쩡하니 내가 좋아하는 임지, 자리를 찾아다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주님이 가라 하시는대로 순종하여 갈 수 있으려면 차라리 장애인이 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설 때, 내 종아 수고하였다 하는 말씀만 들을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 날 제 눈이 열린 것입니다. 비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를 위하여 고난 당하는 것이 더 유익함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기 성공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 기회가 와도 붙잡지 못하게 됩니다.
목회하다 보면 교회를 대상으로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있고, 성도들을 장사의 대상으로 여기고, 돈 거래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복음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고난을 이기고 복음의 승리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옛날에 교환수가 시외전화를 연결해 줄 시절에, 한 목사님이 어떤 교회의 부흥집회를 약속했는데 그 교회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교회 사무직원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는데 부흥회 주제를 알려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성경은 시편 23편이고, 제목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전화 감이 멀어선지 사무직원이“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라구요?”하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예, 맞습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입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사무직원이 물었습니다.“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가 전부입니까?”목사님이 짜증이 났습니다.“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합니까?”하고 크게 소리쳤습니다. 그랬더니“예,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목사님이 부흥회를 가서 전단을 보니 부흥회 주제가 실렸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합니까?“
고난은 참 신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한국에서 기독교가 부흥한 것은 일제 36년,과 6.25 전쟁이라는 민족사의 고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일제 시대에 반일 애국운동의 본산이었습니다. 해방 후 민족의 지도층은 자연히 기독교인들이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6.25를 거치면서 공산주의에 끝까지 항거하는 힘이 교회를 중심으로 이어졌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바로 이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이요 잘되는 길입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에 새로 오신 분들은 교회 시설이 이것 저것 불편한 것이 많으시겠지만, 예배당에만 들어와도 눈물이 난다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예배당 건축과정에서 고생을 같이 하고 헌신하였던 이들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해 줍니다.
예배당 건축도 이 정도라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헌신은 어떻겠습니까?
현대인들의 특징이 고난을 피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마음을 고치시기 바랍니다.
고난도 축복임을 깨닫게 해 주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입니다. 하나님 나라 시민인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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