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 집! (눅 15:12-20)
본문 말씀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곁을 떠나기만 하면 무슨 수가 나는 줄 알고 떠났다가 고생만 싫도록 하고 결국에는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탕자의 이야기는 오늘 현대인들에게 많은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습니다.
지난주간에는 영국의 '다니엘 디포'라는 사람이 쓴 '로빈슨 크루소'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을 읽어보면서 여기 나오는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가 어쩌면 성경에 나오는 탕자와 그렇게도 흡사한가를 생각했습니다. 아마 다니엘 디포라는 사람이 탕자의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쓴 것이 아니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케에르케고르는 "시인은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상상을 통해서 선을 추구하고 미를 추구한다고 해서 시인을 악마주의라고 혹평을 했습니다. 플라톤도 공화국 제 10권에서 문학은 진리에서 3단계 떨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상 국가에서 필요 없으니 추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 보면 비유가 굉장히 많이 나와 있습니다. 이 비유가 모두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아가서 같은 것은 비유를 모두 문학적으로 풀어놓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다니엘 디포가 쓴 로빈슨 크루소를 한번 소개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합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1632년 영국의 요크 지방에서 로빈슨 크루소라는 사람이 태어납니다. 그의 집은 중산층이었고 그는 아주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 고등 교육을 받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장차 법률가가 되는 것이 소망입니다.
그러나 크루소는 유년시절부터 방랑벽이 심합니다. 날마다 바다에 나가서 멀리 바라보이는 수평선만을 내다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온통 탐험에 대한 욕구만이 가득합니다. 중산층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았지만 어쩐지 그 환경만으로는 만족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1651년 9월, 나이 19세 때 마침내 집을 떠나버립니다 아버지가 제발 떠나지 말고 같이 살자고 강권했지만 기어코 집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런던으로 가서 배를 타고 기니아로 갑니다. 가다가 그는 포로로 잡힙니다. 그때부터 그는 2년 동안 모진 고생을 다하며 노예 생활을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죽기를 각오하고 필사적으로 탈출해서 브라질로 갑니다.
그곳에 가서 사탕수수를 재배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재벌이 되었습니다. 여유가 생기니까 즐기기도 해 보았습니다. 방탕 생활도 해 봅니다. 그래도 만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1659년 1월, 다시 배를 타고 브라질을 떠납니다. 가다가 이번에는 풍랑을 만납니다. 배가 뒤집혀서 탔던 사람들은 다 죽고 구사 일생으로 자기 혼자만 살아 남았습니다.
그는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갑니다. 이때부터 그는 고독이 무엇인지, 외로움이 무엇인지를 되씹으면서 쓰라리고 외로운 나날을 살아갑니다. 로빈슨 크루소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아버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만류하던 아버지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 나온 자신을 후회합니다. 그리고는 그 애틋한 아버지의 사랑을 되 뇌이고 또 되 뇌이고 합니다. 이 사랑을 알레고리칼 러브라고 합니다.
어느 날 그는 식인종 하나를 만납니다. 그를 만난 날이 금요일이라서 후라이데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고는 그를 교화시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고생을 죽도록 하고서는 구사 일생으로 구출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것이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입니다. 탕자와 아주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로빈슨 크루소를 현대판 탕자의 이야기라고 부릅니다.
성경에 나오는 탕자도 그랬습니다. 중산층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던 탕자는 집이 싫었습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 보았으면 하고 열망하던 중, 어느 날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집을 나갑니다. 나가서 탕진도 하고, 방랑도 하고, 멋대로 살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돈을 다 써버린 후에 온갖 고초를 다 겪습니다. 그 때 가서야 탕자는 이 알레고리칼 러브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버지께로 가야지, 이 길만이 내가 살길이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본성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원죄의 문제입니다.
탕자나 크루소나 모두 아버지의 집이 싫었습니다. 집을 떠나 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 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혼자서 마음대로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마음대로 놀아 보고, 돈도 써 보고, 마시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모험도 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집을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탕자의 아버지나 크루소의 아버지나 한사코 말렸습니다. 집을 떠나면 고생밖에 없으니 좋은 환경에서 나와 함께 살자고 만류를 합니다.
여기서 자꾸만 떠나려는 속성을 지닌 인간이 바로 우리 자신이고, 떠나지 말라고 만류하며 안타까워하고 있는 부심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으로부터 떠나려는 사람들을 붙잡고 제발 떠나지 말라고 만류하시는데도 세상의 탕자들은 자꾸만 하나님의 곁을 떠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이것이 모두 원죄 때문입니다. 아담이 하나님 안에서 살다가 하나님의 곁을 떠난 이후 그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아버지의 집과 품을 떠나지 못해서 안달입니다.
어렸을 때 고분고분 교회에 잘 다니던 아이들도 좀 크고, 머리가 커지면, 모두 탕자처럼, 크루소처럼, 아버지 집에 잊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모두 그 품을 떠나려고 합니다. 나가서 훨훨 날아 보려고 하고, 실컷 쏘다녀 보려고 하고, 방탕도 좀 해 보고 싶어하고, 취해보려고도 합니다.
이것이 원죄의 속성 때문입니다. 이것이 탕자의 심성입니다. 우리들의 심성에도 모두 이 같은 탕자의 심성이 다 들어 있습니다.
주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예배당에 분명히 나와 앉아 있어야 할 사람들이 안 나옵니다. 바빠서 못 나온 것이 아닙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낚시하러 갔고, 산으로 갔고, 스키 타러 갔고, 바둑 두러 갔고, 아니면 지금 집에서 할 일 없이 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안 나오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원죄 때문입니다. 그 심성에 깊숙이 들어 있는 하나님을 떠나 잊으려는 탕자의 마음 때문입니다. 이것이 원죄의 속성입니다.
둘째는 원죄의 결과입니다.
성경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죄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나면 제일 먼저 찾아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 상실입니다. 불안 의식, 무의미성, 고립감 등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소외 현상에서 오는 것들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면 재미가 있을 줄 알았습니다. 무슨 수가 나는 줄 알았습니다. 거기에 무한한 자유가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저함 없이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처음 며칠은 재미가 있었습니다. 자유를 만끽했습니다. 싫도록 마셔도 보고, 취해 보기도 했고, 화려하게 방탕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다 돈이 다 떨어졌습니다. 돈이 떨어지니까 친구도 떨어졌습니다.
그때부터 탕자에게는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온갖 소외감들이 찾아 왔습니다. 갈 곳이 없습니다. 불안합니다. 삶의 의미를 잃고 되지 우리 안에서 잠을 자야 했습니다. 실컷 고생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몸에 병까지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소외의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습니다. "아, 내가 아버지를 떠나온 것이 죄로구나." 그러고는 하염없이 고독하게 눈물을 흘립니다. 이것이 원죄의 결과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사람은 누구나 이 같은 고백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시키는 이 같은 소외감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순간 찾아오고, 집으로부터 탈출할 때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시키는 카라마조프 형제들이나 죄와 벌이라는 책 속에서 이 같은 인간의 소외 현상을 묘사했습니다.
그는 인간은 본질상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다는 말입니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게 되면 다른 무엇인가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때로는 황금이나 성(性)이나 이념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황금에 집착해서 무릎을 꿇는 것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을 황금에 무릎을 꿇게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념 앞에 무릎을 꿇는 행위는 하나님 앞에 꿇어야 할 것을 선택을 잘못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신 없이 산다는 것은 죽은 사람이나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황금에 미쳐 살고, 성에 미쳐 살고, 이념이나 이데올로기에 미쳐 있는 사람은 모두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찾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직 하나님을 찾지 못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거기에 미쳐 있는 것은 하나님에게 미쳐야 할 열심히 잘못된 방향으로 미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원죄의 결과입니다. 이것에라도 미치지 않고는 사람은 허전해서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안정된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들이 신앙 생활을 더 잘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안정된 고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신앙 생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고향을 떠나고 객지 생활을 하고 타향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신앙 생활을 아주 잘합니다. 다른 나라에 이민을 가서 사는 사람은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보다 더 잘 믿습니다.
그래서 생전 믿을 것 같지 않던 사람이 외국에 이민을 간 후에는 잘 믿는 것도 이런 이치 때문입니다. 모두 소외 현상 때문입니다. 외로움과 고독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게 된 것이 다행스러운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말대로라면 이들이 하나님을 찾았으니까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황금에 미치던가, 알코올에 미치던가, 아니면 성에 미치게 되었을 것입니다.
로빈슨 크루소가 집을 떠날 때는 기대가 컸습니다. 그런데 가다가 모진 시련을 겪습니다. 포로 생활을 2년 동안이나 합니다. 배가 파선하여 죽을 고비를 넘기고는 겨우 무인도에 표류된 채 홀로 살아갑니다. 거기서 그는 고독함에 사로잡혀서 살다가 열병에 걸립니다. 혼수 상태에 빠집니다.
그 때 환상 속에서 천사가 나타나 말하기를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그럽니다. 그 소리가 마음 깊숙이 들어와 박힙니다. 로빈슨 크루소는그 소리에 놀라 깨어나서는 한동안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성경 말씀을 읽어보려고 성경책을 찾아보았지만 그것마저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목놓아 울고 또 울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외롭고 허기지고 고독하고 불안해서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온 것이 죄로구나. 그렇지.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어기고 집을 나온 것이 죄야." 그러고는 큰소리로 목놓아 울면서 부르짖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서럽게 회개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게도 만류하며 떠나지 말라던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울었습니다. 이것이 원죄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원죄의 결과는 사람들을 고독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이 대목에는 우리에게 희망을 갖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뉘우침입니다. 탕자가 돼지우리 안에서 진지하게 생각을 합니다. "이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그때 퍼뜩 생각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집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에 가서 이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최상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탕자가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얼마나 지혜로운 판단입니까? 고집부리지 않고, 더 타락하지 않고, 더 고생하지 않고, 집으로 발길을 돌린 것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러지 않고 오기로 더 타락했던가, 강도 짓을 했던가, 아니면 무슨 낯으로 집으로 갈 것인가 차라리 자살이라도 하자. 그러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인 것입니다.
사람이 때로 고민도 하고 몸부림을 칠 때도 있는데 그것은 살아보려는 의지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후회도 없고, 고민도 없고, 몸부림도 없습니다.
빅톨 프랭클이라는 사람이 쓴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는 유태인 정신과 의사가 아우슈비츠라는 수용소에 갇힙니다. 다 죽고 나중에 몇 사람만이 살아 남습니다. 그때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겪으면서 체험을 쓴 것이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한 사람이 막다른 골목에서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칠 때 무엇에 근거해서 발버둥을 칠 용기가 생기는가? 그것은 의미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어떻게 그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이겨낼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그것은 눈물과 한숨 때문이었다고 대답합니다. 여러분, 눈물이나 한숨, 비명이 왜 있습니까? 그것은 살아 보려는 의지 때문입니다. 로빈슨 크루소나 탕자가 외로운 곳에 앉아서 울고 한숨짓고 몸부림을 친 것은 살아 보려는 의지 때문입니다. 무엇인가 깨달은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그리스어로 말하면 "그노티 세아우톤"입니다.
옛날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의 대리석 벽에는 바로 이 "그노티 세아우톤", 즉 "네 자신을 알라."는 말이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젊은이여 네 자아를 자각하라"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자아를 자각하라는 말은 자기의 사명을 자각하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해야 할 사명을 깨달을 때 위대해진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는 돼지우리 안에 있으면 안 됩니다. 젊은이가 돼지우리 안에 앉아 있으면서도 고민이 없다면 말이 안 됩니다. 비록 지금 앉아 있는 곳이 돼지우리 같은 곳이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심각한 고민이 있어야 하고, 몸부림이 있어서 자신이 하여야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탕자가 돼지우리 안에서 자기의 할 일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 탕자의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바로 이 대목입니다. 이것이 모든 문제의 해답입니다. "내가 아버지를 떠나 온 것이 죄로구나. 그러니 이제라도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그래서 돌아갑니다.
로빈슨 크루소가 집으로 돌아와서는 이렇게 외칩니다. 아, 참 평안한 곳은 내 집뿐이로구나." 이 사람이 자신이 살아야 할 곳은 다른 곳이 아니고 내 집은 것을 알고는 열심히 씨를 뿌리고 가꾸며 생의 의미를 찾아 살아갑니다. 이것이 가장 좋은 해결 방안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곳이 어디입니까? 그곳은 내 집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내 집은 "하나님의 품"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곁을 떠나려는 것을 탈선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탕자의 이야기가 주는 교훈입니다.
여러분이 있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그곳은 "내 아버지의 집"입니다. 여기가 우리들이 평생 머물러 있어야 할 자리인 것을 알고 감사하면서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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