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오신 하나님
사 53:1-3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오늘은 교회력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교회력은 지난 주일로 끝나고 오늘부터 다시 시작됩니다. 교회력의 맨 첫 절기는 대강절입니다. 그래서 오늘이 대강절 첫 번째 주일이 됩니다. 대강절은 예수님이 오실 것을 고대하고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예부터 손님이 오실 때가 되면 손님을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청소를 하고 음식 준비를 하고 손님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결혼식 때 신랑을 맞을 때면 집에 도배를 하고 단장을 하고 준비한 후에 신랑을 맞았습니다. 또 명절 때가 되면 집을 수리하고 단장을 하고 명절을 맞이합니다. 그 심정으로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기다리는 한 달간의 기간을 우리는 대강절 혹은 대림절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기록한 내용입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740년 전에 활동하던 예언자입니다. 이사야는 BC 742년 20세 때 예언자로 부름 받아 예수의 탄생을 처음 예언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예수님은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독생자입니다. 메시야입니다. 구세주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주님이십니다. 세상 말로 말하면 예수님은 왕자인 셈입니다. 여러분, 왕자가 세상에 오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요란하고 화려하고 웅장한 가운데 떠들썩하게 세상에 왔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전혀 예기치 않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세상에 태어나실 때의 모습을 미리 예언한 내용입니다. 그는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고” “모양도 없고” “멸시를 받고 버림받고 귀히 여김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세상에 태어나시는데 사람들의 기대와 상상을 무색하게도 너무나 조용하게 아무도 모르게 오셨습니다. 그것도 가난한 집으로 오셔서 공생애 동안 목수의 아들이었다고 무시당하시다가 마침내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고 또 땅에 묻히는 수모를 당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오시는데 그렇게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이해해야 합니다.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해하지 못하면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구속의 의미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성탄의 의미도 이해가 안 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조용하게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예수를 그렇게 세상에 보내셨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수준에 맞추시려 애쓰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를 부정하고 오신 모습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기를 제한하심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자 이십니다. 권능과 초능력을 지니신 절대적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세상에 오시는 과정을 보면 그 권능이나 능력이나 권세를 다 포기하시고 오셨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지극히 제한하시고 오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오심은 곧 하나님의 오심입니다. 오심의 과정을 보면 자신을 제한하시고 오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모든 권능과 능력과 권세를 가지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세상에 오시는데 아무도 모른 채 조용한 가운데 오셨습니다. 아들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려면 화려하게 보란 듯이 모두가 머리 숙이고 복종하도록 보내실 일인데 인간의 생각과 정반대로 보내셨습니다. 오시는데 그렇게 누추하고 초라할 수가 없게 오셨습니다. 가장 가난한 집에, 빈천한 목수의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애 동안 목수의 아들이라고 천대를 받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세상에 오시는데 가장 낮은 자리로 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축소하시고 오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를 제한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세리의 친구라는 비방 받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그 세리와 함께 먹고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기겁을 했습니다. 어떻게 예수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힐난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도 죄인이라고 몰아 붙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타락한 것이 아니고 자기를 제한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죄인을 구하고 잃은 자를 찾기 위함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그 하나님은 무기력하게 집나간 아들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 모습도 하나님의 권세나 능력을 제한하신 모습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집나간 아들을 찾아서 강제로 끌어 올 수도 있었지만 그 아버지는 그냥 사랑의 마음으로 아들이 스스로 깨닫고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사역은 자기제한적인 사역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 수준에 맞게 제한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그런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께서 오셔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어떻게 예수가 고난을 당합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고난을 당한단 말입니까. 고난뿐 아니고 또 예수는 마침내 죽임을 당합니다. 어떻게 예수가 하나님이 죽임을 당합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축소하고 제한 하셨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방법으로 하나님의 수준으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더라면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해 못할 것이고 모양도 이해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수준으로 자신을 제한하시고 축소하고 오셨기에 우리들이 하나님을 보고 이해하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마침내 능력을 발휘해서 뛰어 내릴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기대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최후의 순간에는 그렇게 될 줄로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끝까지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를 축소하신 결과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유치한 사랑으로 표현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그 절대적인 사랑이 얼마나 완벽하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 하나님의 사랑이 아주 유치하게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자식 자랑하는 것을 반병신이라 했고 아내자랑을 왼 병신이라고 팔불출이라고 흉을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유치한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사탄에게 “나의 종 욥을 보았느냐, 그는 동방의 의인”이라고 칭찬합니다. 성경은 함축된 언어로 지극히 짧게 설명하고 있지만 아마도 하나님은 사탄에게 입이 마르도록 자랑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들이 말했더라면 수준에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절대적인 의의 수준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겨우 다윗의 마음과 합하는 수준입니까. 백성들이 우상을 따라가고 애굽을 동경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실 말씀입니까. 질투는 인간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절대적인 의의 하나님이 질투하신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모두 인간 수준의 유치한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때로 유치한 사랑의 차원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조금만 잘 하면 엄청나게 자랑하고 만족해하시고 칭찬하시고 상을 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왜 이렇게 까지 유치하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축소하고 인간 수준으로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인간이 하나님을 더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높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음식점에 가면 주문받을 때 좀 세련된 음식점에서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주문을 받습니다. 그것은 주문자와 손님과 눈높이를 같이 한다는 뜻입니다. 아직도 구태의연한 음식점에 가면 지금도 뻣뻣이 서서 내려다 본채 음식을 주문받습니다. 그것은 그 음식점의 운영이 구태의연해서 그렇습니다. 아이들을 혼낼 때는 어머니가 아이를 앉혀 놓고 서서 높은 위치에서 혼내고 대화할 때는 어머니가 앉아서 아이와 눈높이를 같이 한 채 대화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말은 상대방의 수준에서 이해하고 배려하라는 뜻입니다. 아이들과 대화할 때는 내가 어른처럼 말하고 대화하면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도 아이처럼 되어야 대화가 통합니다. 그것이 눈높이를 맞추는 것입니다.
엄마가 어린 아이를 낳고 기르고 있습니다. 아이가 6개월 쯤 되면 옹알이를 합니다. 그 아이와 대화하는 엄마를 보면 그 엄마는 꼭 6개월짜리 아이와 같은 수준으로 자신을 제한하여 말도 안 되는 언어로 대화를 합니다. 그리고 나가서는 아이가 자신에게 윙크했다고 우깁니다. 거짓말도 그런 거짓말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엄마가 아이 수순에 맞게 자신을 제한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인간 수준에 맞게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수준에서 욥을 칭찬하고 다윗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다윗이 선했기로서니 그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 마음과 합했겠습니까. 욥이 의롭기로서니 하나님의 의에 비하면 얼마의 수준이 되었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렇게 칭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의의 수준을 인간의 수준에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인간수준으로 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지혜는 우리와 눈높이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름이면 모기와 일전을 벌여야 합니다. 모기에 윙윙거리며 가까이 올 때 모기가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손바닥을 펴서 잡으려는 순간 모기는 순식간에 날아가 버립니다. 몸길이라야 1-2센티미터 밖에 안 되는 작은 체구인데도 공중을 아주 빠르게 자유자재로 날아다닙니다. 그 작은 몸 안에 엔진도 없고 추진기관도 없고 동력 장치도 없는데 날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빨아먹은 아주 작은 양의 피가 주는 칼로리의 힘을 입어 두 날개만 가지고 자유롭게 비행하며 날아다닙니다. 오늘 현대과학이 첨단을 누비고 있지만 아주 작은 물체에 엔진기관을 내장시켜 이렇게 비행하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그토록 대단하다고 감탄하는 현대과학도 하루살이 모기 한 마리도 만들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아무 소리 말고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이 우리 인생으로 하여금 참된 행복과 평안을 얻어 살아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오시는데 인간의 수준에 맞게 오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배려입니다.
하나님 이해 선행
우리는 하나님을 밝히 이해해야 합니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때로 우스운 일이 벌어집니다. 어느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믿음이 열심이었습니다. 방학 때면 밤에 아이들을 운동장에 모여 놓고 캠프파이어를 해 주었습니다. 운동장 중앙에 장작을 세워놓고 옥상에 연결된 줄을 통해 불을 내리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하나님 불 내려주세요“하고 큰 소리로 외치게 하였습니다. 그러면 옥상에서 불이 줄을 타고 내려와 장작불에 불이 붙게 만들었습니다. 그 날도 아이들을 모아놓고 “하나님 불 내려주세요”하고 외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불이 안내려옵니다. 그래서 다시 외치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더 큰 소리로 “하나님 불 내려주세요”하고 외쳤는데도 불이 안내려왔습니다. 그러자 교장선생님이 얼굴에 화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더니 교장선생님이 옥상을 향해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김씨, 이젠 불 내려요”. 그러자 순식간에 옥상에서 불이 줄을 타고 내려오더니 장작 쌓아놓은 곳에 불이 붙었습니다. 옥상에서 불 내릴 준비를 하고 있던 학교 소사 김 씨가 타이밍을 놓친 것입니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하나님의 성을 김 씨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모르면 별 이야기가 다 만들어집니다.
하나님을 깊이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영원하신 존재무한하신 분입니다. 인간의 유한함에 크게 비교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유한하기에 늘 그 하나님을 향해서 결핍을 호소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고 지혜를 빌려 살아가야 살아지는 존재입니다. 마치 아이들이 숙제를 하다가 막히면 언제든지 아빠를 불러대는 것과 같습니다. 무슨 일을 하다가 힘에 부치면 사람들은 더 힘 있는 사람을 불러 댑니다. 함께 해야만 옮길 수 있는 물건들이 있습니다. 모두 자신의 힘에 부칠 때 더 힘 있는 상대를 불러서 도움 받고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그런데 언제나 부족해서 도와달라고 부르는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이것을 먹어보라고 부를 때도 있습니다. 전번에는 나의 부족을 보완해 달라고 호소하려고 불렀지만 이번에는 풍성함을 나누려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모습입니다.
때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부르시는 이유는 손이 모자라서 부르시는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풍성함을 나누시기 위해서 부르십니다. 베푸시려고, 나누시려고, 사랑하시려고, 도우시려고, 길을 안내하시려고 부르십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부르셔서 은혜를 주시며 뜻을 펼치도록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계십니다. 자격이 있어서 부르시는 것은 아닙니다. 능력이 있어서 부르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창조적인 부르심 입니다. 불러서 새롭게 창조하시고 능력을 주시려고 부르십니다. 아브람을 불러서 아브라함을 만드셨습니다. 야곱을 불러서 이스라엘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시몬을 불러서 베드로를 만드셨습니다. 사울을 불러서 바울을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나가서 창조적 삶을 살아가게 하시려고 새롭게 지으신 것입니다. 할 일을 하도록 내 보내신 것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려 하심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브라함으로, 이스라엘로, 베드로로, 바울로 활동하며 하나님의 뜻을 창조적으로 이 땅에서 할 일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그들만 부르신 것이 아니고 오셔서 나도 부르셨습니다. 여러분들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자녀로 삼으셨고 집사로 삼으셨고 권사로 삼으셨고 장로로 삼으시고 또한 목사로 삼으셨습니다. 그렇게 불러서 우리로 하여금 창조적 삶을 살게 하시고 할 일을 하게 하시고 주님의 뜻을 펼치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시고 창조하신 것입니다. 신앙의 길은 그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쁨으로 응답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 “예” 하고 응답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연약함에서 해방되고 무지에서 깨우침을 받고 주님의 뜻을 이 땅에서 펼치며 창조적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렇게 부르시고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세상에 오셔서 부르시는 일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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