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의 청지기적 삶
예레미야 32:6-15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내게로 와서 이르되 청
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
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
는지라 ....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이같이 말하
노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하
하셨다 하니라.
오늘 제목을 “예레미야의 청지기적 삶”이라고 했습니다. 청지라는 말은 헬라어로 오이코노모스(oikonomos)라는 말인데 받은 본분을 충실하게 잘 감당하는 종의 정신을 청지기 정신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맡은 것이 많습니다. 직분도 맡았고 사명도 받았고 재능도 받았고 크고 작은 일들을 많이 맡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나만의 인생을 받아 태어났습니다. 나의 인생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나만의 몫이고 나에게만 삶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엄숙한 존재인 것입니다. 인생은 함부로 살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렇게 사역을 맡은 사람들은 그 사역을 이루는데 남다른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고 생각과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 정신과 태도를 잘 발휘하는 삶을 우리는 “청지기적 삶”이고 말합니다. 그 삶의 모습이 오늘 읽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한 시대를 아픔과 결단의 삶으로 진정한 지도자로서 살아간 사람의 일생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예레미야 입니다. 그가 살아가던 시대는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은 불안한 시대였습니다.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때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의 백성으로, 지도자로서, 예언자로서, 선지자로서 최선의 역할을 다해 살아갔습니다. 그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 우리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예레미야의 모습을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좋은 신앙인
예레미야는 그 시대 좋은 백성이었습니다. 좋은 지도자였습니다. 좋은 예언자였습니다. 좋은 신앙인이었습니다.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하면 아주 불안하고 사회가 불안정한 그런 시대였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 직전에 처해 있습니다. 그때 실정을 되풀이 하고 있는 시드기야 왕에게 하나님의 주신 계시의 말씀을 그대로 전합니다. 그리고 왕에게 직언했습니다. 그 결과로 예레미야는 핍박받고 고난당하고 마침내 투옥을 당합니다. 그런 일련의 일들을 바라보는 백성들은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때 예레미야는 아주 의연하게 그리고 중심 있게 주어진 직분을 최선을 다해 이루어 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느 시대나 최선을 다 하여 살아가는 삶은 아름다운 삶입니다.
여러분, 좋은 신앙이 무엇입니까. 좋은 신앙은 평상시에는 모릅니다. 평상시에 큰 소리 치는 신앙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남들이 병들었을 때 찾아가서 너무 쉽게 “기도하라”, “고쳐주실 줄 믿으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말하기는 쉽습니다. 너무 큰소리치지 마십시오. 내 자신이 그 입장이 되면 나도 얼마나 흔들릴지 모릅니다. 너무 쉽게 말하고 너무 간단한 말로 위로해서 부작용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병에 걸린 분에게 찾아가 너무 쉽게 너무 간단하게 기도하라는 말이 당사자에게는 조롱하는 말 같이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방문을 거절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자존심과 체면과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 싫기도 하지만 찾아와서 너무 쉽게 말하는 것이 속이 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장 좋은 위로는 무언으로 기도해 주는 일입니다.
예레미야는 그 시대에 진정으로 사람들을 위로하였고 격려하였던 신앙인이었습니다.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감옥에 갇히면서도 그 시대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그런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계시를 왕이 듣고 기분 좋으라고 각색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핍박이 주어질 지라도 신앙인으로서 할 일을 다 했습니다.
좋은 애국인
예레미야는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나라를 위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려가며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애원하면서 외쳐도 당시 나라의 지도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제사장들은 뱃속만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를 살아가던 백성들은 각성도 회개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중에 나라는 점점 망해가고 있었습니다. 바벨론은 당장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혼자서 눈물을 흘리며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눈물로 외쳤습니다.
4장19절에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을 잘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패망의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장막과 휘장은 갑자기 파멸되도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앞으로 주어질 환란을 이미 환상으로 보았습니다.
얼마 후이면 이 나라가 전쟁으로 파멸당하는 나팔소리를 들었는데 그 내용을 당시 사람들에게 말하고 외쳐도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다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슬프고 내 마음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을 잘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럴 때마다 왕은 위협하면서 좋은 소리만 하라고 윽박질렀습니다. 그래도 예레미야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줄기차게 다가오는 나라의 운명을 말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말을 쏟아냈습니다. 그러니까 왕은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37:15, 38:6) 그래도 까딱 안하고 할 말을 다 했습니다. 그 결과 결국에는 예루살렘이 예레미야가 우려하며 예언했던 그대로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지고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왕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에게 잡혀 자신이 보는 앞에서 두 아들이 죽임을 당하고 수많은 방백들과 장수들이 붙잡혀 무참히 죽임을 당하고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을 빼내는 고통을 당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사랑해야 합니다. 나라가 잘못되면 모든 백성들이 다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 하나하나는 모두 이 나라를 사랑하는 지도자들이 다 되어야 합니다. 지도자는 반드시 앞에 나서야만 지도자가 아닙니다. 그 시대를 책임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지도자들 입니다. 오늘은 저마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섰는데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들을 보면 모두 상대방 흠집만 파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 마음이 불안하고 미래가 불안합니다. 오늘은 책임 있는 지도자가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는 모두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책임 있게 기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나라사랑하는 충직한 마음을 봅니다.
명예를 소중히
예레미야는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직분을 받고 예레미야는 충실하게 그 직분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가감 없이 그대로 전파하였습니다. 그 말을 왕과 당시 방백들과 나라의 고위지도자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습니다. 잘못하고 있다는데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당시 왕 옆에서 좋은 말만 하는 거짓 예언자들이 기생하였습니다. 그 거짓 선지자의 대표가 하나냐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서 그대로 전하면 하나냐가 나타나서 하나님이 나에게는 이렇게 말 하라고 하셨다 하고 계시를 뒤집었습니다.
그 말은 모두 왕에게 아첨 하는 말입니다. (28:1-17) 그러니 예레미야가 얼마나 속이 상했겠습니까. 그럼에도 예레미야는 그 하나냐를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도 명색이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참다가 마침내 예레미야가 하나냐를 심판 합니다. 28장15절부터 보면 “하나님이 너를 보내지 않았거늘 왜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하느냐“고 무섭게 반박했습니다. 그리고 “너는 그 죄로 금년에 죽으리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하나냐가 그해 7월에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죽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예레미야가 얼마나 회유를 받고 위협을 받았겠습니까. 나중에는 듣지 않으니까 예레미야를 좋은 소리만 하라고 윽박지르고 그래도 듣지 않으니까 굴에 가두었습니다. 그것은 난국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겪어야 하는 고난의 사명입니다. 그런 아픔이 주어져도 예레미야는 끝까지 하나님이 주신 말씀만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눈물의 선지자였다고 불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최선을 다 하였던 선지자였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지도자는 후대의 평가가 참 중요합니다. 지도자는 후대의 평가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후대의 사람들의 평가는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역사의 평가도 무섭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더 무서운 것이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이 평가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선지자의 최대의 수치는 “권세와 야합했던 선지자였다“라는 평가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최선을 다했던 선지자였다고 평가를 받았습니다. 내게 주어진 직분을 소중히 하는 것도 축복입니다. 잘 수행하는 것은 더 큰 복이고 은혜입니다. 주어진 직분을 잘 수행하기가 참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 하다가 못 미치는 것은 괜찮습니다. 형식적으로 수행하면 책망을 받게 됩니다. 그 책망과 두려움이 후대의 평가입니다. 후에 그를 평가하기를 “그 분은 참으로 최선을 다한 분이였다”라고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저도 이 평가가 두렵습니다. 제가 목회를 다 마칠 때 여러분들이 내 목회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것이 참 두려운 일입니다. 모두 장로로서, 권사로서 후일에 주어질 평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이 보다 더 두려운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질 평가입니다. 그래서 청지기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레미야는 명예를 끝까지 지키고 그 명예를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에 비전과 희망을 준 지도자
지도자에게는 가장 중요한 사명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희망과 비전을 주는 일입니다. 백성에게, 국민에게, 아이들에게, 젊은이들에게 비전과 꿈과 희망을 줄 수 있어야 지도자입니다. 예레미야는 그 혼란한 시대를 살면서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는 오늘 내일 바벨론에 침략당해 예루살렘이 불바다가 될 위험에 처해 있을 때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서 완전히 포위당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모두 이제는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은 파괴되어 불바다가 될 것이고 백성은 모두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 모두가 낙심해 있고 미래에 대해서 모두 희망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때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찾아왔습니다. 와서 내 밭을 사라고 했습니다. 그런 시대에 어느 바보가 땅을 사겠습니까. 그런 전쟁 중에는 재빨리 현금을 확보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서슴지 않고 그 땅을 샀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모두 정신 나간 사람으로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주저하지 않고 땅을 사 들였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그 상황에서 예레미야가 왜 땅을 사 들였습니까. 그것은 예레미야가 부동산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고 예레미야는 그 일을 통해서 지금 낙심하고 불안해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소망의 메시지를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나라가 망할 순간입니다. 전쟁으로 나라가 풍비박산 당할 것이 불 보듯 뻔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잡혀가 언제 돌아올지 아무도 모를 그런 때입니다. 그때 예레미야는 오히려 땅을 사 들였습니다. 그 당시 많은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믿었습니다.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진실한 하나님의 계시를 그대로 전하는 예언자로 모두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그토록 신뢰하고 믿고 있던 예레미야가 그 어려운 시대에 땅을 사 들인 것입니다. 그 행동은 낙심해 있는 백성들에게 상당한 희망을 주고 소망을 주는 한줄기 소망의 메시지였습니다.
그 메시지는 “보라, 내일 우리들이 잡혀갈지라도 우리는 곧 돌아온다, 이 나라는 다시 일어난다, 곧 회복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한 우리는 다시 일어난다”는 강한 메시지를 백성들에게 준 것입니다. 그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예레미야는 그 상황에서 땅을 사 들인 것입니다. 그것이 지도자입니다. 어떤 지도자냐 하면 예레미야는 백성에게 비전을 주고 희망을 주는 지도자였습니다. 이것이 지도자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지도자이고 사회의 지도자이고 나라의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나 어느 단체나 지도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 한 달 있으면 이 나라의 지도자를 선출하게 됩니다. 여러분, 백성은 좋은 지도자를 만나는 것이 복입니다. 좋은 지도자를 뽑아야 합니다. 좋은 지도자가 선출되도록 우리들이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이번에는 백성에게 비전을 주고 꿈을 주고 희망을 주는 지도자가 세워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 담임목사, 장로님들, 권사님들, 그리고 모든 집사들이 이 시대를 향해서 그리고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 하는 후배들에게, 동료들에게, 자라나는 젊은이들에게 이런 꿈과 소망을 주는 지도자들이 되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도자입니다.
18세기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준 영적 대 각성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앞에서 그 운동을 진두지휘한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입니다. 그 목사가 각성운동을 일으키면서 “5대 결심”이라는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이 5대 결심이 지도자로, 신앙인으로, 청지기로 살아가야 할 삶의 내용입니다. 첫째 “살아가는 동안 힘을 다해서 살아가자”, 둘째 “한순간이라도 놓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선용하자”, 셋째 “아무리 큰 이익이 된다 해도 타인으로부터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면 결코 취하지 말자”, 넷째 “어떠한 일이 있어도 원한을 주지도 품지도 말자”, 다섯째 “인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좋은 기회라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안 좋은 일이라면 선택하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존심, 책임, 체면, 중심, 선택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가 이 조건을 내 걸고 영적 대 각성운동을 펼칠 때 큰 각성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 신앙인에게는 체면과 자존심과 명예와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가는 청지기들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 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주신 직분, 주어진 내 인생, 시간, 물질 등을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것이라는 점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또 신앙인으로서 명예를 존중해야 합니다. 조그만 이익 때문에 자존심도 없이 집착해 살고 직분에 지독한 욕을 먹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욕은 고스란히 예수께로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큰 죄입니까. 아무리 내게 지금 이익이 된다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안 좋은 것이라면 과감히 거부할 수 있는 신앙의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청지기로서의 신앙인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아 직분을 맡은 청지기들입니다. 청지기는 청지기의 역할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선지자로 부름 받아 그 시대에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때로는 세상에 호소했습니다. 때로는 진노도 했습니다. 그리고 안타까운 마음에서 눈물도 흘렸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 시대에 희망을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이고 청지기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외롭지 않게 늘 곁에서 함께 하셨고 힘과 능력을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지기들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 시대에 살아가야 할 삶의 몫이 있고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을 충실하게 이루며 살아가는 데는 종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종들입니다. 종은 종으로서 충실하게 살아가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그 청지기의 삶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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