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사랑과 행복의 비밀! (요 21:15-17)
제가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실패자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에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 많으시니 실패자도 쓰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실패자만 쓰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너무나 감사한 것입니다. 이 말씀에 선뜻 아멘이 되지 않고 고개가 갸우뚱하실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한경직목사님은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목사님이셨고. 기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워지는 템플턴 상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한경직목사님은 일제 시대 신사 참배를 하셨던 분입니다. 탬플턴 상을 받는 자리에서 자신이 고백한 사실입니다.
일제 시대를 청산하는 문제로 사회에서 아직까지도 논란이 많습니다만 한국 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신사참배를 했느냐 안 했느냐는 것은 그가 참 신앙인이냐 아니냐를 구별하는 기준으로 여길 정도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신사 참배를 하지 않아 일제 시대에 옥고를 치른 목사님들도 많은데, 하나님께서는 왜 신사 참배를 했던 한경직목사님을 들어서 한국 교회의 표상으로 만드셨을까요? 실패자를 쓰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한경직목사님을 기억하기를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라 합니다. 아마 한경직목사님은 자신이 신사 참배했던 죄인이요 실패자인데, 주님의 은혜로 쓰임 받는다는 것을 평생 명심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한경직목사님을 그렇게 큰 종으로 사용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실패자가 아닌 사람은 하나님이 쓰시지 않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29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분명히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실패자가 아닌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실패자요 죄인임을 깨달은 사람이냐, 아니면 자신의 실패와 부족함을 감추고 오히려 자기를 자랑하려는 교만한 자이냐 만 있을 뿐입니다.
저는 실력있는 자, 성공한 목사가 되려고 몸부림쳤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제 마음은 계속되는 긴장과 좌절과 열등감과 두려움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저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실패자라는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더 이상 제 자신을 꾸미거나 제가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낼 이유가 전혀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제 약한 것 다른 사람보다 부족한 것 미련한 것을 쓰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오직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제게 놀라운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에 앞서 예수님을 대신하여 교회와 성도들을 맡아 목양할 책임을 베드로에게 맡기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하필 왜 베드로인가?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실패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 엄청난 사명을 맡기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으신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정확하게 사람을 보고계셨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이제는 베드로가 자격을 갖추었다고 보셨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베드로가 무슨 자격을 갖추었다는 것입니까?
베드로는 자신을 믿지 않는 자가 된 것입니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나 같은 자가 무슨 자격이 있나?’ 그런 베드로가 주님의 택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물으시고 그 때마다 ”내 양을 먹이라“ 하셨습니다.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실 때, 베드로는 가슴이 져렸을 것입니다. ‘정말 내 마음을 주님 앞에 드러내 보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자신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일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주님, 제가 비록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이지만, 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합니다. 저를 주님이 다시 찾아주시고 제게 사명을 맡기신 주님을 저는 정말 사랑합니다.” 그렇게 세 번째 고백을 하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죄를 씻어주시고 교회와 양떼들을 베드로에게 맡기셨습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그 사명을 받고 베드로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베드로도 한 때는 자신이 실패자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당당했고 자신이 있었습니다. ‘나는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다! 주여, 다 예수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죽을지라도 예수님을 버리지 않ㅎ겠나이다. ’ 그랬던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실패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베드로는 자기가 실패자라고 하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이 사실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랬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올 때마다, 그가 큰 문제를 만날 때마다 베드로는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는 그 고백으로 사명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그에게 닥친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베드로를 통하여 하나님은 교회를 세웠고 위대한 일을 해내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평생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능력이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사역하는 동안에 배신을 얼마나 많이 당했을까요? 베드로 속을 썩이는 사람을 얼마나 많이 만났을까요? 그러나 그 어떤 사람을 만나도 베드로가 이제 누구를 배은망덕하다, 배신자라고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었지만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전혀 자격이 없었는데 사도로 세움받았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도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명을 맡기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쓴 성경을 읽어 보면 베드로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정말 용서의 사람이오,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벧전 3:8-9)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4:7-8)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우리는 여기서 알게 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용서의 사람, 사랑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러한 사람이 되기까지 인도하시고 가르치시고 기다리십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우리 주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그런 복을 누리려면 명심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완전한 용서의 사람, 진정한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그렇게 인도하고 계십니다.
한 신학교 교수가 설교에 관한 강의를 좀 특이한 내용으로 준비했습니다. 그는 한 학기 동안 학생들에게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주제로 설교하라고 하면서, 매 강의 시간마다 한 사람씩 각자에게 정해진 강의실로 가서 설교하도록 했는데, 시간이 임박하게 알려주어 그 강의실까지 가려면 서둘러야만 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정해진 강의실까지 가는 길에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부랑자가 서 있도록 하였답니다. 그런데 그 부랑자를 도와주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춘 선한 학생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주어진 시간이 짧을수록 부랑자들을 돕기 위해 멈춘 학생들의 수가 적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에 관한 설교를 하기 위해 서둘러 가면서, 그들은 그 설교의 핵심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을 그냥 지나쳐 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용서와 사랑을 읽었고 가르치기도 하지만 그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용서 받은 자라는 고백이 분명히 있습니까?
“나는 말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영원히 버림받을 수 없는 실패자입니다. 그런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독생자를 보내주시고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주셔서 나는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아무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이 믿음이 분명하십니까? 그렇다면 어찌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할 수 있습니까?
일제 시대 소위 옥중 성도라고 불리는 분들은 핍박 중에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것은 귀했으나 참 안타까운 것은 해방 후, 많은 옥중 성도들이 자신들만이 한국 교회의 진정한 지도자로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며 한국 교회를 분열 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교만과 비판의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일제 시대 때 신사 참배했던 목사들은 전부 교회 강단에서 내려와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그 때부터 분열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2005년 4월 8일 한국 복음주의협의회 월례 조찬 기도회에서 충현교회를 담임하셨던 김창인 원로 목사님이 공개 회개를 하셨습니다. 1945년 해방 후 개신교는 일제 때 신사 참배 문제를 놓고 장로교와 고려파로 분열했는데, 이를 막지 못한 책임이 나에게 있습니다. 광복 직후 평양, 부산 등에서 몇몇이 모여 재건 교회를 하면서 함부로 입을 열어 다른 사람들을 저주했습니다. 우리가 교만해지면서 판단력이 어두워졌고 사랑이 없어져 (생각이 다른 사람과는) 밥도 같이 먹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을마귀당이라고 공격했습니다. 참으로 비통한 고백을 했습니다. 김창인목사님은 마지막으로 하늘 나라는 회개한 자만 간다고 했습니다. 저를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며 목이 메인 채 고백을 마쳤을 때, 백발이 성성한 원로 목사의 통한에 찬 고백에 참석한 사람들은 큰 박수를 쳤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은혜의 사람, 용서의 사람, 사랑의 사람이 되기를 기다리십니다. 왜냐하면 그 때부터 역사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늘 웃는 얼굴에 보기만 해도 온유함과 사랑이 드러나는 한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분과 함께 지내면서 그 분이 본래부터 그렇게 사랑이 많았던 것은 아니었음을 알았습니다. 그 목사님의 학생, 청년시절, 교회 생활에 열심은 있었으나 지나치게 율법적이고 무서운 사람이었답니다. 그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도록 하라고 해서 며칠씩 왼 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닌 적도 있었고, 여자를 보고 음욕만 품어도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는 말씀을 보고는, 고등학교 때 교회만 오면 울면서 회개했었답니다. 교회 어른들 중에 마음으로부터 존경하는 사람이 없었답니다. 저 집사님은 아직 담배 피우고, 저 장로님은 새벽 기도회에도 안 나오고, 저 목사님은 그런 사람을 교회 중직으로 세운 것을 보니 삯군에 틀림없다. 고 생각하였답니다. 한 번은 교회 다니던 친구가 생활의 어려움과 여학생으로부터 실연당한 일로 음독 자살을 했는데, 병원에 가서 그 친구를 보고 손가락질을 하며 네가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이야? 그렇다면 어떻게 자살을 할 수 있어? 하고 책망을 했답니다. 그 친구는 아무 말도 못하고 울더랍니다.
그러던 그가 시험에 빠졌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가려고 할 때 집에서 반대 하고, 등록금을 내 주시지 않아 등록을 못하게 될 때 엄청난 낙심이 왔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그렇게 예수 잘 믿는 것 같았으나 한 번의 시험에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그 후. 그는 몇 년 동안 방황 끝에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 자신의 교만 죄가 하늘을 찌를만큼 컸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답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실족시켰는가를 깨닫고 통곡하였답니다. 그런 자신을 용서하시고, 여전히 사랑하시는 예수님 때문에 다시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답니다. 그 후 달라진 것입니다. 그의 실패가 그를 사랑의 목사로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와 사랑의 사람이 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양이란 사람을 말합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 중에 가장 어려운 십자가가 사람 십자가입니다.
오늘 우리 중에 사람 십자가를 지고 고통 당하는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가출한 청소년을 상담하게 되었습니다. 소년에게 탕자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이제라도 아버지에게 돌아가면 신발을 사주고 금가락지를 끼워주고 송아지를 잡아 환영해 주실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그 학생이 집으로 돌아간 후 다시 만났을 때, 반가와서 물었습니다. 그래. 아버지가 신발을 사 주시든? 아니요, 발바닥이 터지도록 맞았는데요. 금가락지를 끼워 주셨겠지? 아뇨. 지갑까지 다 빼앗겼는데요. 송아지를 잡아 주셨겠구나. 아뇨, 나를 잡아 송아지에게 먹이려고 하시던데요.
그렇습니다. 인간의 사랑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힘으로 사람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맡긴다.” 하시면서 요구하신 것은 오직 주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열쇠입니다. 능력입니다.
사람 십자가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고백 속에서 사람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영원한 사랑과 행복의 비밀입니다.
제가 사역이 힘들고 사람 때문에 지치고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주님께 나가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더는 못합니다. 하나님, 이것이 제 한계입니다. 더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 때마다 주님께서는 제게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아무 말을 못하였습니다. 저는 어떤 사람 때문에 힘들다고 했는데, 왜 주님은 주님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지, 어떤 때는 정말 답답했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으로 모든 위기를 이겨 나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신 그것이 제게 말할 수 없는 복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한다. 는 말을 들으면 좋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때가 좋은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만 나를 사랑하느냐 묻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나 가까이 하기 싫은 사람이 공개적으로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면서 “나 아무개 사랑합니다.” 하고 소리치거나, 벽에 누가 여러분을 사랑한다고 써 놓으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죽을 맛일 것입니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랑이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에게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두 다 나를 사랑하세요!”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느냐?” 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사실은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사랑의 프로포즈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로 믿어집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의 죄가 사해졌음이 믿어지느냐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프로포즈를 받은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십자가를 볼 때 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한다는 고백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중요한 것이 남았습니다. 그것은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할 차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고백을 이미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대답을 할 차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하나님, 저도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대답을 드린 사람입니까? 이 점이 중요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하는 고백에 여러분에게 닥친 모든 시험을 이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인생이 바뀝니다. 다윗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요한이 그랬고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영원한 사랑과 행복의 비밀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어느 날 고양이 한 마리가 어머니가 차려 놓은 밥상에서 생선 한 마리를 물고 마루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것을 보고 목사님이 야단을 치며 나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고양이도 자기 잘못을 알기 때문에 매를 맞을까봐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한 시간 정도를 그렇게 고양이와 씨름을 했답니다. 결국 고양이가 나왔는데. 기가 팍 죽어서 나왔습니다. 그 놈을 잡아서 야단을 치며 한 대 때려 주려고 손을 드니 눈을 꼭 감고 꼼짝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모습이 불쌍하기도 하고 예쁘기도 해서 때리려는 손을 멈추고 그냥 꼭 안아 주었습니다. 꼭 안아 주면서 사람에게 말하듯 다시는 그러지 마. 그러면 안돼. 하고 타일렀답니다. 그리고는 땅에 내려놔 주었는데. 그 날로 고양이가 거듭났다는 것 아닙니까! 고양이가 변하여 강아지처럼 된 것입니다. 이 목사님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학교에서 돌아오면 달려오고. 목 위로 올라오고. 가는 곳마다 따라 다닙니다. 고양이는 개보다 야성이 강해서 주인이라도 사람이 있는데서 새끼를 낳지 않는데, 그 고양이는 목사님이 보는 앞에서 새끼 세 마리를 낳았답니다.
용서와 사랑은 삶에 기적을 낳습니다.
이제 요한복음 설교의 마무리입니다. 요한복음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면 결국 베드로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 저는 목사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하며 눈물로 기도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것을 인정하느냐? 예. 그렇다면 그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여라! 하셨습니다.
진정한 회개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고민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이제 알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회개하였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죄를 보고 용서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데이비드옥스버거 목사님이 쓰신 [용서를 통하여 오는 자유] (The Freedom of Forgiveness) 책에서 아주 놀라운 일을 목격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어느 날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 미국 상원의원이 연설하기로 예정된 만찬에 참석했었습니다. 저녁 식사가 끝날 무렵. 한 여 종업원이 디저트 그릇을 옮기다가 상원의원의 어깨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케이크와 레몬 소스가 상원의원의 코트. 넥타이. 셔츠. 무릎에까지 흘러 내렸습니다. 당황한 그 종업원이 상원의원의 옷에서 음식물을 털어내는 동안 상원의원은 그 종업원에게 거듭 괜찮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지배인이 달려오고 주위 사람들이 다 일어나 둘러싸고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너무나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그 때 상원의원이 여전히 얼굴이 빨개져 있는 그 여 종업원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가까이 당겨서 뺨에 부드럽게 입맞춰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서 홍조가 사라지고. 대신 웃음이 피어나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그 홀을 나갈 때는 얼굴에서 광채가 났고 생기가 넘쳤다고 했습니다. 옥스버거목사님은 상원의원의 행동이 가져다준 의미를 말하기를 그 상원의원은 젊은 여성이 평생 창피함을 느끼며 기억할 고통스러운 사건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이야기로 바꾸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용서와 사랑의 기적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시간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주님께서는 남편을 사랑하느냐 아내를 사랑하느냐? 아이들을 사랑하느냐? 김 집사를 사랑하느냐? 부모님을 사랑하느냐? 교인을 사랑하느냐? 직장에서 동료들을 사랑하느냐? 묻지 않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고 반복하여 고백해 보십시오.
여러분, 언제 가슴이 저리도록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 고백을 뜨겁게 해보셨습니까?
“주님, 자격없는 사람 은혜 받았고,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용서받았고, 저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 지셨고, 정말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고백은 이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그 고백을 주님께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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