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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편◑/교리사

정통 개혁주의 신학에서의 언약의 통일성(김영규 목사)

by 【고동엽】 2022. 1. 12.
정통 개혁주의 신학에서의 언약의 통일성(김영규 목사)




그리스도의 만족교리가 점점 더 파괴되는 과정과 관련하여 헤르만 바빙크의 역사적 진단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즉 "그리스도가 모든 인간들을 위해 죽으시되 그들 편에서의 신앙과 회심의 조건 위에서 죽으셨다 하는 아미랄두스(Amiraldus)의 가설적 보편주의가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 많은 장로교 학자들 사이에도 동의를 얻게 되었고, 용서는 독특하게 그리스도의 만족에 의존하였던 것이 아니라, 그의 귀감적인 고난에서 그것의 적용에 대한 가능성을 창조하였다고 하는 그로티우스(Grotius)의 이론에 길을 준비하였으며 웨슬레적인 아르미니안주의에서 뿐만 아니라,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성경적이고 바르다고 포용되었다"는 점이다. 그와같이 코케이우스의 전통신학에 대한 반발이 후대 합리주의, 데카르트주의로 가는 길을 열어 놓았다. 코케이우스의 잘못은 언약론 자체에 있었다기 보다는 성경을 교의학의 원리와 규범으로 삼지 않고 교의학의 대상으로 삼는 성경적 역사적 교의학이었다는 점에 있었다. 그는 성경신학을 전통신학과 대립시키고 언약을 성정과 대립시키며 역사를 이념에 대립시켰다. 그의 방법의 위험성은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언약의 실체)을 시간적이고 역사적인 것(언약의 경륜)으로 바꾸고 하나님 자체를 되는 이념으로 바꾸었다는데 있었다. 자유, 즉 학문의 자유는 기존의 것을 파괴하는 힘을 가졌고 진보적이고 합리적이지만, 동시에 자체의 뿌리를 없애 버리고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그러나 이런 자유의 개념 이전에 이단들의 기원과 관련하여 종교적 호기심(curiositas)과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형태가 오래된 동기라고 할 수 있다.
교회사적으로 신구약 통일성 문제가 등장한 것은 직접적으로 마르시온 이단과 마니교와의 싸움에서 생긴 것이다. 마르시온 가르침은 세 가지였다. 1) 율법과 선지자로부터 선포된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다. 2) 후자는 인식할 수 있고 전자는 알 수 없다. 3) 하나는 의로운 자이고 다른 이는 선한 자이다. 즉 신지식에 대한 원리들을 가지고 구약을 버렸다는 말이 된다. 이런 원칙에 의한 성경비판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신신학의 개혁자요 역사비판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새믈러(Johann Salomo Semler)는 마르시온과 같은 비판원리를 가지고 성경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즉 현 구약의 정경은 기독교와 반대된 유대적인 선입견으로부터 구성된 책이요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용한 진리가 들어있는 신적이고 영감된 기록은 적다는 것이었으며 신약은 보편적인 영원한 종교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신신학에서 사용된 비판원리란 단순히 계몽된 자유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지극히 영지주의적인 것이고 그런 영지주의적인 경건한 루터신학의 배경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으로 인하여 구약책으로부터 건전한 발췌된 것만이 우리 그리스도인(아마 루터주의)에게 유용하게 된 것이다. 스피노자의 유대자유주의적인 문헌사비판이나 카톨릭적인 시몬의 전승사비판과 성질이 다르다. 그것은 성경전체를 분석할 때 루터가 율법과 복음의 두 원리에 의해서 재구성하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원리가 루터보다 마르시온이 급진적인 원리였을 뿐이었다. 오늘날 성서신학의 이름으로 역사비판학적 방법에 의해서 성경을 비판한 결과, 진정한 것으로 알려진 것은 조각들뿐이다. 성서고고학이 발달하고 언어학이 발달하며 문헌학이 발달할수록 성경으로부터 진정한 정경을 찾는 원리들을 개발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해방신학, 여성신학 등 새로운 이념들에 의한 성경비판작업은 이미 마르시온이래 정당화되었고 오늘날 가톨릭주의나 복음주의 이름 아래서도 정당화되고 있다. 경륜과 믿음의 원리에 의해서, 기독론과 성령론에 의해서 구약과 신약,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구별하고 있다. 오순절 성령이 단회적이냐? 교회시대적이냐?등의 해석에 있어서 루터주의 신학이 유대인 학살에 참여한 것도 선교의 원리에 의해서 직접 간접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나찌정신은 게르만 민족주의가 루터 민족주의, 하나님의 택한 백성, 국가 민중교회 그리고 통일화작업등이 결합하여 비로소 성공하였다. 히틀러 시대에도 마르시온의 성경책처럼 원리에 의해서 재구성된 성경책이 유포되었고 이것을 일본 기독교에서도 일어난 것이 우리 나라에서 확인된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비판신학의 깊은 뿌리는 모든 교회사와 교리사 및 정경사와 그 역사를 같이 하고 있다. 왜냐하면 문헌적으로 마르시온을 처음으로 자신의 정경을 만들었다는 것이 확증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신구약의 정경은 마르시온의 직접 간접의 영향으로 생겼다는 비판을 극복하는 객관적인 자료가 없는 형편이었다. 성경 사본상 마르시온(주후 150년)보다 이전의 사본이 발견되어야 하고 그것도 완전한 형태이어야 한다. 더구나 가장 교회사 문헌들인 저스틴, 이레니우스, 터툴린안 문헌들이란 그런 이단들에 대한 반박문헌들이기 때문에, 마르시온 이단 사상을 객관적으로 비교할만한 교회문헌들이 없는 상태이다. 그래서 우리의 문제는 가장 오래된 문제이고 현대신학에 있어서 가장 심각하고 가장 포괄적인 난제이다.


1. 헤르만 바빙크의 언약론에 대한 역사적 평가


성경에서 언약관념은 저절로 기독교 신학으로 넘어갔다. 교부들의 경우 특별히 그들의 주석들에서 그것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언약론이 교의학적인 의미를 얻게 된 것은, 그리스도 종교가 이스라엘적인 종교와 결합속에서 동시에 그것과 구별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사실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미 사도시대로부터 여기에 두 가지 경향들이 서로 대립해 있었다. 거의 모든 회집들에서 바울의 인격과 가르침에 반대하였던 유대주의는 이방인으로부터 온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도 모세법 특별히 할례의 보존을 요구하였다.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단교가 일어난 이후, 예루살렘은 황폐화되고 그리스도교회는 헬라로 쫓겨났으며 135년 이방 그리스도 교회가 예루살렘에 세워지는 등, 점점 더 사교들이 되고(나사렛파, 에비온파) 유대인은 그들의 교리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서 부정하였다. 다른 편에서 영지주의가 있는데, 그것은 이미 사도시대에 그 근원을 갖지만(시몬 마구스, 케틴투스), 특별히 2, 3세기에 동방에서 서방으로 퍼졌고 마르시온이란 인물의 날카로운 공격은 구약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는 하나님과 물질 사이의 영원한 이원론에서 출발하여 그 둘 사이의 변이는 모든 세대들(aconon)을 통하여 중재되었으며 세계의 창조를 조물주(domiurg) 혹은 요덴신(jodengod)이라 하는 낮은 신의 탓으로 돌렸다. 이 신은 지극히 높고 참된 하나님이 아니라, 낮은 신분의 하나님이요, 율법, 의와 복수의 하나님이다. 구약은 신약보다 아주 낮은 상태에 있다. 이는 구약의 하나님은 질투적이고 복수심에 불타며 악의 창조자이다. 그는 완고하고 경직적이며 애굽인들의 재물을 훔치고 가나안들의 죽음과 같은 모든 죄들을 명하였다. 그는 선하지 않는 법들을 주었고 기만과 거짓 등의 각종 죄들을 범한 자들인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다윗등과 같은 사람들과 언약들을 맺었다. 친히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도록 하였으나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서 지옥으로 돌리게 될 요덴신이다. 그리스도안에서는 전혀 다른 신 즉 은혜와 사랑의 신이 계시되었다. 그 때문에 율법적인 전체입장은 사라지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고, 구약전체로부터 자유롭다. 이것을 바로 선하다고 통찰하였던 유일한 자는 바울이다. 그가 유일한 참된 사도이다.
이런 두 가지 당파들과 대조적으로 기독교와 그 신학이 어떤 이중과업으로 분류됨을 보여준다. 영지주의와 대조하여 그것은 신구약의 통일성을 주장하고 유대주의와 대조하여 신구약의 차이를 주장한다. 그것을 위해 고린도후서 3장의 바울의 신구약( )에 관한 가르침을 이용하였다. 라틴어 '언약'(testamentum) 혹은 '도구'(instrumentum)란 말은 처음 경륜에 적용된 낱말들이지만 후에는 신구약 성경에 적용되었다. 그 둘은 근원과 내용에 있어서 하나이다. 하나님이나 로고스가 둘의 저자이다. 둘 안에는 하나의 같은 신앙, 한 언약, 구원에 이르는 한 길이 표상되어 있다. 차이는 다만 형식에(in dem vorm) 있고 이것이 그와같이 존재함에 틀림없다. 이는 하나님은 참으로 한 분이시지만, 사람들이 다르고 그 때문에 역시 다양하게 양육되었음에 틀림없다. 하나님은 그의 은혜를 계속적으로(successief steeds) 더 풍부하고 더 판명하게 계시하시고 있다. 구약시대에는 예속이 있고 지금은 자유가 있다. 그 때는 모형이고 지금은 진리이다. 그 때는 그림자이고 지금은 빛이다. 그 때는 한 민족을 위한 은혜이고 지금은 모든 이를 위한 은혜이다. 그 때는 두려움이요 지금은 사명이다. 그 때는 메시야가 없었고 지금은 도래하셨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본질적인 동일성을 없이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특별히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고 오직 그의 강퍅성 때문에 주어진 것이다(암 5:17; 렘 7:21; 겔 20:19). 이것을 넘어 그것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모형적이고 그리스도에 앞서 이스라엘을 양육하며 그 때문에 역시 그리스도안에 그 종결과 목적이 도달하였다.
이것이 일치하게 교부들을 통해서 율법과 복음은 참으로 구별되나, 분리될 수 없다고 종종 표현되고 있다. 열매가 씨로부터 나온다면, 열매가 씨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복음도 율법과 분리되고 오히려 율법으로부터 속행한다. 그로부터 다른 것이나 외래적이거나 별종이 아니고 모순적이지 않다(Sicut fructus scparatur a semine, cum sit fructus ex semine, sic et Evagelum separatur a lege, dum provehitur ex lege: aliud a illa, sed non alienum, diversum, sed non contrarium). 두려움은 더 구약에 속해 있고 사랑은 더 신약에 속해 있으나, 구약안에 신약이 감추어져 있고 신약안에 구약이 드러나 있다(in Verere Testamento Novum latet et in Novi Vetus patet). 구약은 신약의 감추어진 것이요 신약은 구약의 계시이다(Vetus Testamentum Novum pracoccupat et Novum interpretatum est Votus. Vetus Testamentum est occultatio Novi, et Novum est revelatio Verteris). 차이는 본질에 따른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한 것이다( ). 구약이 성직계급, 제사직과 희생관념에서, 복음에 대한 율법적인 견해에 있어서, 의식과 예술에 있어서까지 교회보다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많은 관점에서 구약적인 신정정치를 원하였고 강하게 유대적인 요소들을 그 자체안에서 받아 드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경우 새 경륜속에 있는 교회가 구 경륜 위에 높아지게 된다. 스콜라 신학과 로마 카톨릭 신학에서 두 언약의 구별은 구약의 약속은 일시적(temporalia)이었고 지금은 하늘적인 것(coelestia)으로 선포되고 있다. 저 때의 계명들은 좀 더 외적인 규정들(exterius regulantia)이나 지금 완전한(pleniora) 규정들이다. 손으로된 규정일 뿐만 아니라, 영혼으로된 규정(non solum manum sed et mentem regulantia)이다. 그 때 성례들은 단지 비유적인 것들(figuralia)이고 지금은 은혜를 수열하는 것들(gratiam conferentia)이다. 그것과 결합속에서 구약의 성도들은 직접 하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연옥(limbus patrum)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늘을 향하여 양도된다.
종교개혁은 이 점에서 상호 그들의 관계가 정의됨에 틀림없는 각종 신조들이 그 곁에 발생함을 보았다. 유대적이고 영지주의적인 사상들은 중세시대에 발전되었고 지금에도 그들의 영향이 타당하고 있다. 재세례파는 급진적이고 종교 윤리적 개혁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적인 개혁을 원하였으며 성경에 호소하여 이자, 일부다처주의의 추방, 재산들의 통용을 열망하였다. 신구약적 다양한 경륜들의 규례들의 첫 소개를 행하기를 원하는 자연과 은혜의 이런 대조는 점점 더 성경 전체를 내적인 말씀안에 종속시키는 결과로 인도하였다. 즉 성경은 어떤 죽은 문자였다. 특별히 구약은 모든 복음적인 내용을 잃었다. 이스라엘은 돼지떼와 같이 다만 세속적인 재물에 의해서 길러 내진 것이다. 율법은 우리에게 모든 가치와 힘을 잃어 버렸다. 쏘시니안주의는 자신의 합리주의적인 원리에 의해서 같은 결과에 도달하였다. 즉 구약은 신약보다 훨씬 저위에 있다. 그것은 일부다처제를 가르치고 이웃사랑을 제한하며 모든 덕들을 전체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있으며 아주 무거운 형벌들을 사소한 죄들에게 고정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만 노예적인 두려움과 땅에 속한 약속만을 알고 있다. 그것은 어떤 완전한 의와 용서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다. 그 때문에 그것은 완전히 폐지되었고 그리스도가 새로운 입법자로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아르미니안주의는 그와같이 대담하게 말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을 다만 세속적인 재물들을 약속하였던 언약으로서 파악하였다. 루터조차도 신구약을 종종 율법과 복음처럼 대조시켰으나, 후에 더 조심하여 구약안에도 풍부한 복음적 약속들이 있었다고 가르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견해는 루터주의 신학에 영향을 끼쳤다. 참으로 그들은 신구약안에 단지 한 메시야, 한 신앙, 구원의 한 길만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한 언약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언약'이란 말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맺은 율법적인 언약을 의미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신약과 근본적으로 구별되고 있고 그것은 신약과 대립하고 있으며 신약에 의해서 폐지된 것이다. 구약에는 우리에게도 타당한 많은 약속들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으나, 이스라엘과 맺는 하나님의 율법적 언약으로서 구약은 결코 은혜언약(foedus gratiae)이 아니였다. 아담과 아브라함등에게 주신 복음의 약속들은 참으로 은헤언약아래 종합될 수 있으나, 역시 구약에서의 이런 은혜언약은 우연에 있어서만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약속이 성취와 구별되고 그림자가 몸체와 구별되듯이 실체에 있어서도 신약과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언약론은 개혁주의 신학에서 가장 풍부하게 발전되었다. 언약론적인 신학은 유페이(Ypey)가 주장한 대로 코케이우스에게로부터 기원한 것도 아니고, 헤페(Heppe)가 생각하듯이 멜랑히톤안에 그 아버지를 갖는 독일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견해의 부당성은 강한 논증에 의해서 밝혀지고 있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인정되고 있다. 언약론 자체는 처음 올레비아누스, 칼빈 혹은 불링거에게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원리적으로 이미 재세례파와 대립하여 신구약의 근본적 통일성을 주장하였던 쯔빙글리안에서 만나게 된다. 쯔빙글리로부터 그것은 불링거와 칼빈에게 계승되고 특별히 올레비안누스, 우르시누스, 손니우스(Sohnius), 애글린(Egling), 보쿠비우스(Boquinus), 휘페리우스(Hyperius)등 독일 개혁주의자들안에서 받아 들여졌음을 발견하게 된다. 영국신학에서는 롤록(Rollock), 하우(Howo), 카아트라이트(Cartwright), 프레스톤(Preston), 토마스 블레이크(Thomas Blake), 퍼킨스 (Perkins), 아메시우스(Amesius), 존 볼(John Ball), 제임스 우서(James Usher),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프란시스 로버스(Francis Roberts), 토마스 보스톤(Thomas Boston)등에 의해서 받아 들여졌다. 네델란드에서는 스네카누스(Snecanus), 유니우스(Junius), 고마루스(Gomarus), 아버지와 아들 트렐카티우스(Trelcatius), 네르데누스(Nerdenus), 라벤스페커(Ravensperger)등에게서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클로펜부르크와 코케이우스보다 오래전에 언약론은 개혁주의 신학안에 고유점이다. 그러나 후자 인물들이 언약론을 전 교의학의 출발점과 지배원리로 삼았고 동시에 원리적인 변화를 야기케 하였다.
코케이우스와의 싸움은 직접 모든 이들에게 인정된 언약론에 대한 것이 전혀 아니라, 에센니우스와 호른백의 경우 안식일에 대한 것이고(1633-1639), 마레시우스의 경우 두 가지 경영에 있어서 교회의 상태에 대한 것이며(1662), 보에티우스의 경우 구약에서의 용서( )에 대한 것이다(1665). 코케이우스에서 논쟁되고 있는 것은 언약개념이 아니라, 그의 성경신학과 그의 역사적 방법이다. 철학에서 데카르트와 같이 코케이우스는 신학에 있어서 스콜라주의와 전통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났고 성경연구를 주장하며 그의 교의학 제목이 가리키고 있는대로 성경으로부터 끌어낸 신학대전(suma theologiae ex Scripturis ropetita)을 원하였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그는 그의 책 ' 언약에 관한 교리대전'(Summa doctrinae foerdere)에서 하나님과 그의 영원한 의논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그의 입장을 역사와 인간과 하나님의 언약속에서 취하였다. 따라서 그의 교의학은 구원사이고 거기에서 성경은 원리와 규범이 아니라, 대상과 내용이었던 역사학적인 형식을 띤 성경신학이 되고 있다. 그는 그 언약 즉 참된 종교를 역사적으로 그의 첫 시작에서부터 현재까지 추적하였다. 그리고 그는 어디에서나 다양하고 계속적인 경륜들안에서 이 언약의 발전과 진보를 가리켰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들이 말하였던 대로 계시의 명료성, 즉 통찰의 선명과 의식의 판명성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 아니다. 은혜언약의 다양한 경륜들아래에서 객관적 축복들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 구약에서 안식일은 행위의 연기안에(cessatio operis) 있었고 이스라엘은 아직 참되고 영원한 선(vera et permanentia bona)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되, 소망의 백성이었고 땅에서의 긴 생을 열망하였으며 여전히 죽음의 공포안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충만한 죄 용서( )를 갖지 못하고 불완전 용서( )만 가지고 있었다. 동물희생은 전혀 화해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칭의는 불완전 하였다. 신자들의 위로도 약하였고 그들의 양심은 안식하지 못하였다. 마음의 할례는 참으로 없었고 다만 신약에서 선물로 주신 것이다. 율법은 천사들에 의해서 제공된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구약에는 참으로 모든 것이 현존하였으나 다만 모형과 그림자로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자체의 실재성은 전적으로 부정되지 않았어도 그 때 대부분이 부정되었다. 주관적으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우연에 있어서(in accidentia)뿐만 아니라, 실체에 있어서(in substantia)도 구약은 신약과 다른 것이었다. 참으로 코케이우스가 은혜언약을 다만 부정적으로 점진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이며 계속적으로 발전된 행위언약의 폐지로서 파악하였을 때, 친히 언약론 전체를 근절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는 언약에 대해서 아무 것도 남긴 것이 없었다. 그것은 다만 일시적으로 인간적이며 계속 스스로 변하는 종교의 형태이었다.
그렇게 코케이우스는 의심할 것도 없이 개혁주의 신학의 출발점과 기본선을 잃었다. 이것이 직접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느껴졌기 때문에 역시 다소 논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원리적인 논쟁이었다기 보다는 부속적인 점들에 대한 공격이었다. 코케이우스주의는 바로 데카르트주의와 결합되어 계속 점점 더 받아 들여지면서 여러 가지 교의들에 대한 반대로 인도하였고 역시 구약을 붕괴시키는데 공헌하였다. 어디에서나 무의식적으로 구약은 단지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고 교의학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파고 들어 갔다. 이런 변경된 교의학적인 직관으로부터 저절로 그의 때가 되어 특별히 스피노자(Spinoza)와 시몬(R. Simon)이래 구약의 역사적 비판이 태어났다. 합리주의와 초자연주의는 구약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거의 의미가 없었다. 칸트에 따르면 유대주의는 그 위에 국가법이 기초하였던 단지 순수히 제도적인 법의 총괄 개념이다. 그러나 도덕적인 추가들은 고유한 것에 부록이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유대주의는 전적으로 교회이기를 원치 않았고, 단지 국가이기를 원하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다만 계명의 외적 준수를 요구하였고 내적인 성숙성을 요구하지 않았다. 기독교는 유대주의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완전 폐지가 있다. 쉴라이어마허의 경우 유대주의는 그의 특수주의 때문에 주물숭배와 친밀해 있고 기독교와의 그것의 관계가 이방 세계와의 그것의 관계와 동일하다. 헤겔은 고매성의 종교로서 유대주의를 아직도 미의 그리이스 종교와 능률성의 로마종교 아래에 자리를 주고 있다. 헤겔의 두 제자들인 바트케(Vatke)와 브루노 바우어(Bruno Bauer)는 구약에 대한 이런 철학적 직관을 성경의 역사적 비평에 의해서 탐구하고자 추구하였다. 지난 세기의 성경비평은 세계관을 변경시키지 못하였어도, 그 왜곡된 세계관이 성경의 대 사실에 대한 종종 아주 부정적인 판단을 요구하였다. 구약적 성경비평은 현금 오늘날에도 일찍이 구약에 대해서 영지주의자들, 재세례파를, 소시니안주의자들, 합리주의들에 의해서 제한 되었던 모든 관점들로 되돌아가고 있다. 야훼는 한 하나님, 참된 하나님,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민중신, 근원적으로 태양신이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옛날에는 여러 다신론에 탐닉된 다양한 씨족들로부터 온 원시 유목민들이었다는 것이다. 창조, 타락, 홍수, 족장들, 사사들등에 대한 이야기들은 부분적으로 다른 민족에서 빌어온 신화들이요 우화들이다. 율법은 선지자들보다 훨씬 낮은 것이고 종종 외적이고 감각적이며 행복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특별히 다윗과 같은 구약의 성도들은 그 이름에 합한 가치를 가지지 않고 전혀 현존하지 않았거나 후손에 의해서 이상화된 것이다. 참되고 거짓 선지자들의 구별은 전적으로 주관적이다. 기독교는 최소한 유대인에 의해서 준비된 것처럼 유대주의에 의해서 준비되었다.
언약론은 교의학의 경우와 동시에 기독교 삶의 실천의 경우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와 루터주의 교회보다 개혁주의 교회와 신학이 이것을 더 많이 파악하였다. 성경에 근거하여 그것은 신구약의 참된 종교를 계속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으로서 파악하였다. 이것은 타락하지 않은 인간과 맺거나(행위언약, toedus operum), 노아의 경우 일반 창조와 맺거나(자연언약, foodus gratiae) 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만 여기에만 머물러 서 있지 않고 시간에 있어서 이런 언약들 이전에 그것은 하나님의 의논 안에 확고하고 영원한 기초를 찾고 있고 인류의 보존을 의미하는 대로 이 의논을 신적 본질 안에서 세 위격들의 한 언약으로서 파악하였다(pactum salutis, 구원의 언약, 평화의 의논, 구속의 언약), 이 마지막 언약은 짧게 그리고 실제적으로 이미 올레비안누스, 유니우스, 고마루스와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좀더 클로펜부르그와 코케이우스에 의해서 넓게 발전되었다. 그 후 부르만(Burman), 브라운(Braun), 비트시우스(Witsiur), 비트링가(Vitringa), 투레티누스(Turretinus), 라이덱커(Leydecker), 마스트리히트(Mastricht), 말크(Marck), 모르(Moor), 브라켈(Brakel)의 경우에 교의학안에 확고한 자리를 얻었으며 마지막 다시 듀르호프(Deurhof), 베셀리우스(Wesselius)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논쟁이 되었다가 점점 더 완전히 교의학으로부터 추방되었다.
개혁 주의자들 안에서 구원언약(pactum salutis)론의 발전은 스콜라적인 궤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이 교리를 위해 인용되는 고전적인 구절(locusclassicus)인 슥 6:13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고 다만 자체 안에 결합하고 있는 메시야의 왕직과 제사장직은 그의 백성의 평화를 의논하고 고무할 것이다는 말이다(카일). 그러나 욥 17:3; 사38:14; 시119:122으로부터 그 모든 것중에 어느 것도 메시야를 바라본 것이 아니고 히 7:22은 다만 그리스도가 영원히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는 보증이시다는 것이요, 새 언약이 영원히 존속할 것이다는 사실에서 그리스도께서 영원 전부터 구원의 언약 안에서 보증이 되었다는 사실이 추론되는 것이다. 그리고 크렐(Crell)과 림보르크(Limbroch)가 주장하는 대로 실로 우리와 더불어 계신 하나님에 대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참되신 분으로서 하나님은 어떤 보증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케이우스와 비트시우스등이 증명하고자 하는 대로 하나님 곁에 있는 우리에 대한 것이다. 더구나 보증인(fidejussor)과 약속인(expromissor) 사이의 구별은 법률학자에게서 빌어 온 것이고 구원의 언약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택자들의 죄를 자신 위에 조건적으로 취하였는지, 그 후 참으로 절대적으로 취하였는지에 대해서 물었다. 전자는 코케이우스, 비티키우스(Wittichius), 아링가(Allinga), 반틸, 듀렝(d'Outrein) 페리죠니우스(Perizonius)와 다른 사람들이 말하였다. 후자는 라이덱커(Leydecker), 투레티누스(Turretinus), 마스트리히트(Mastricht), 보에티우스(Voetius) 등에 의해서 가르쳐졌다. 마지막으로 역시 이 구원의 언약(pactum salutis)이, 라이넥거, 베세리우스(Wesselius)와 다른 사람들이 확고히 했던 대로 언약의 성격보다, 코케이우스, 부르만, 하이덱거, 쉬레(Schiere)가 증명하듯이 눅 22:19; 요17:24; 히6:17; 9:15; 13:20에 호소함으로 어떤 유언의 성격을 띠고 있었는지에 대한 차이점이 언급되고 있다.
그것의 결합적인 형태에도 불구하고 이 구원의 언약론은 성경적인 생각에 의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보자로서 성자가 성부에게 종속적이고 그를 그의 하나님이라 칭하며(시 22:3; 요20:17), 그는 그의 종이고(사 49장 이하), 그의 사역을 행하도록 일임되었었으며(사 53:10; 요6:38-40; 10:18; 12:49; 14:31; 17:4), 성취된 순종에 대해서(마26:42; 요4:34; 15:10; 17:4,5; 19:30) 상급을 받았다(시 2:8; 사53:10; 요17:4,11,17,24; 엡 1:20이하; 빌2:9이하). 성부와 성자 사이의 이런 관계가 땅에서 그리스도의 여정 동안에 가장 명료하게 나타났었을 지라도, 성육신의 순간에 처음 개입한 것이 아니다. 이는 이 성육신이 이미 성자에게 맡겨진 사역의 실천이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 전부터 일어난 일이고 따라서 역시 이미 구약시대에 현존하였다. 성경이 이스라엘의 인도를 왕 여호와께 돌리고(출3:2이하; 13:21; 14:19; 23:20-23; 32:34; 33:2; 민 20:16; 사63:8,9) 그리스도로 하여금 역시 구약 시대에 직무적인 활동을 하게끔 하였을 때(요8:56; 고전 10:4,9; 벧전 1:11; 3:19), 그것은 이것을 명료하게 가르치고 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한 중보자만이 계시고(요14:6; 행4:12; 딤전2:5)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같은 자로 계시며(히13:8) , 영원 전부터 중보자로서 선택되어(사42:1; 43:10; 마12:18; 눅24:21; 행2:23; 4:28; 벧전 1:20; 계13:8) 영원히 로고스로서 존재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요1:1,3; 8:58; 롬 8:3 고후 6:9; 갈 4:4등). 성경은 이 모든 것을 통하여 구속사역에 대한 풍부하고 영화로운 표상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구원의 언약(pactium salutis)은 신적 본체 안에 세 인격들의 관계와 생(het leven)을 언약의 생, 지극히 높은 자기 의식과 지극히 높은 자유의 생활을 알도록 하고 있다. 여기 신적 본체 안에서 언약은 자신의 충만한 실재상을 갖는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은 둘 사이의 무한한 거리 때문에 항상 다소 주권적 명령( )을 띠고 있을 지라도, 여기에서 그것은 충만한 의미에서 세 인격들 사이의 계약( )이다. 최고의 자유와 가장 완전한 일치가 여기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구원의 역사는 그 일에 모두가 함께 일하시고 그 안에서 각각 자신의 고유한 일을 수행하시는 삼위의 사역이다. 작정에 있어서, 예정의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하나의 같은 의지가 그 배경에 있고 삼위적인 성격이 아직 그렇게 뚜렷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여기 구원의 언약(pactum salutis)에 있어서는 구원의 역사는 자신의 충만한 신적 아름다움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인간창조의 경우에 하나님은 자의적으로 자신들끼리 미리 의논하였던 것처럼(창 1:26), 재창조의 경우에도 삼위의 각자가 더 명료하게 각자의 구별된 성격으로 나타나고 계신다. 창조의 사역과 같이 재창조는 하나님의 사역일 뿐이다. 만물이 그로부터 말미암아 그를 향한다. 어떤 인간도 그의 의논사였거나 혹은 그에게 그것을 다시 갚도록 다만 그 분에게 주었던 것이 아니다. 구원의 전사역을 함께 고안하고 함께 확고히 하며 함께 수행하고 함께 성취하시는 분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뿐이다.
그러나 특별히 이런 구원의 언약은 역시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역과 이를 위해서 시간상에서 행하시는 그것 사이에 관계가 있다. 시간상에 계시된 은혜언약은 허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불변의 기초에 의존하고 있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의논과 언약 위에 확고히 있고 그로부터 전혀 오류가 없이 따르는 적용과 집행이다. 시간상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과 맺게 된 은혜 언약 안에서 참으로 인간은 실행하는 사이거나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자가 아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기도된 이후 재창조의 사역을 성취하시는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과 이스라엘과 처음 그의 언약을 맺으신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처음 맺으셨다. 그러나 은혜언약은 영원전부터 삼위의 구원의 언약안에 준비되었던 것이고 이 때로부터 타락이후에 현실화되었다. 그리스도는 성육신과 더불어 그리고 그 이후에 비로소 역사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고, 성령은 그의 일을 오순절날 그가 부어짐과 더불어 비로소 처음 시작한 것이 아니다. 창조가 삼위일체적인 사역인 것처럼, 재창조 역시 첫 순간부터 삼위의 사역이었다. 창조의 타락 이후에 흘러나온 모든 은혜는 성부로부터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그들에게 이른다. 성자는 타락 직후 중보자로서, 첫 사람을 대신한 두 번째 그리고 마지막 아담으로서 등장하였고 그가 부패시키고 내버림을 받았던 것을 회복하시고 완성하셨다. 그리고 성령은 바로 위로자(개역성경:보혜사)로서, 그리스도를 던짐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적용자로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통찰과 지식에 있어서 모든 변화와 발전과 진보는 피조물의 편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님 안에서는 어떤 변화가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 성부는 영원한 성부이시고 성자는 영원한 중보자이시며 성령은 영원한 위로자이시다. 그 때문에 구약은 신약과 본질과 실체에 있어서 하나인 것처럼 그렇게 파악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이 그의 계시를 계속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경륜하고 더 풍부하고 더완전하게 하였고 따라서 인류가 계시의 지식과 소유 및 그 기쁨에 있어서 진보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은 같은 분이시고 같은 분으로 남아 계시기 때문이다. 태양이 땅의 왕국을 점점 밝게 하지만, 그 자체는 아침이나 저녁이나, 낮이나 밤이나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역사를 처음 땅에서 역사의 중간에서 성취하였고 성령이 오순절에 처음 부어졌고, 하나님은 은택들을, 그를 통하여 거절하고 적용할지라도, 이미 역시 구약시대에 완전히(ten volle) 분배하였다. 구약의 성도들은 우리와 결코 다른 방식으로 구원되지 않는다. 믿음도 하나요, 중보자도 하나이며 구원의 길도 같고 은혜 언약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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