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적인 교회건설을 추구한 청교도
청교도들은 이상적인 교회 건설을 위하여 여러 방면의 노력을 쏟아 부었다. 지난 호에 다루었던 것이 장로교체제를 영국국교회의 정치제도로 채택하기 원했던 반체제운동이고, 또 하나의 운동은 청교도 분리파운동이다. 청교도들의 반체제운동이 진행 중이던 1579년부터 성직자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e)의 주도하에 소위 분리파운동이 시작되어, 1581년 그를 중심으로 영국국교회를 탈퇴하고 40명이 모여서 영국에 분리파 교회를 세웠다. 이것은 불법이었기 때문에 교회와 국가로부터 많은 탄압을 각오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의 의지는 단호했다. 하나님 앞에서 신앙양심의 자유를 외쳤고 교회의 정체성을 가지지 못한 영국국교회에 참여하며 순응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최초로 시행된 교회 언약제도
청교도 분리파 교회는 처음부터 소위 ‘교회언약’ 제도를 실시했다. 성도들은 교회언약의 구체적인 내용에 서명했고, 그 서약에 따라 교회 직분자들이 임명되었고 예배 형식이 제정되었다. 처음 시행된 교회언약 제도였다.
교회언약의 내용은 간략히 다음과 같았다. 첫째, 한 무리로 연합하여 주님께 헌신하고 주님의 율법과 통치를 따르며 성도의 교제를 하고 무질서와 악을 금하겠다. 둘째, 성도들 스스로가 선택한 목회자를 돕고 순종하겠다. 셋째, 교회 내에서 질서있게 기도, 성경봉독, 권면, 위로 등을 하겠다. 넷째, 주위 사람들에게 전도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
성도들의 자발적 참여가 없는 영국국교회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는 분리파 청교도 지도자들은 교회 성도들에게 자발성을 요구했다. 교회는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믿음을 고백하고 스스로 주님을 섬기겠다고 나온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청교도 분리파는 교회가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맺고 있다고 믿었다. 하나님을 말씀대로 따르고 순종하는 교회는 축복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교회는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교회언약 제도는 이러한 믿음 위에 실행된 것이다. 개인이 하나님과 은혜언약 관계를 맺고 그들은 모여서 교회 공동체를 세우며, 교회는 공동체 차원으로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는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구약교회 공동체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고, 신약시대에는 신약교회가 형성되어 각 지체들이 각양의 은사를 사용하여 몸을 세우는 것이다(롬 12:1∼13, 엡 4:1∼16). 교회가 공동체로서 주님을 따르며, 지체들은 교회 공동체가 주님의 뜻을 잘 따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나아갈 때에 교회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분리파 청교도들은 교회정치제도에 있어서 장로교제도를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회중교회제도를 신봉했다. 회중교회제도는 개교회의 독립성을 고수하며 교회의 상위계급제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개교회 위의 교회계급이 비성경적이라고 보았고 교회언약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개교회에서 교회의 모든 운영과 방침을 스스로 정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아가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보았다. 교회 밖의 어떤 개인이나 기관도 개교회를 간섭할 수 없다고 믿었다. 회중이 중심이 되어 목사를 선출하고 목회의 방향을 결정하며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었다.
1580년대와 1590년대에 이르러 분리파 청교도들은 탄압을 받으면서도 그들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분리파 청교도들은 영국국교회를 교회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근본적으로 영국국교회의 출발에는 자발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성도들의 자의적인 신앙고백으로 교회가 형성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국 교회는 국교회로 영국 국민들이 다 속해 있는 교회였다. 즉, 개인의 자발적 동의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들을 모두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에는 전혀 언약적 자발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것이 어떻게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둘째, 영국 교회는 치리가 없었다. 종교개혁 시대에 개혁자들은 교회의 징표를 말씀과 성례의 두 가지로 보았다. 분리파 청교도들은 교회의 징표에 하나를 더 첨가했다. 그것은 치리였다. 성도 개개인의 영혼을 철저히 돌보되 권징(징계)까지 포함하는 교인의 철저한 영적 훈련이 치리의 의미다. 영국 교회는 감독이 치리를 했고 개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목회적 차원의 치리는 제도적으로 허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분리파의 교회제도는 영국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분리파들은 영국의 극심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추후에 분리파의 영향으로 교회언약제도와 회중교회제도를 받아들이며 생긴 소위 독립파 청교도들은 온건성으로 말미암아 좀 더 영국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독립파 청교도는 분리파와 기본 이념은 같았으나 영국 교회를 교회로 인정하고 형제 관계를 맺기 원했다. 그러나 분리파 청교도 운동은 극심한 탄압으로 말미암아 1597년 지도자들이 투옥 처형되며 쓰라린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독립파 청교도운동
독립파 청교도운동은 1596년 헨리 제이콥(Henry Jacob)이라는 청교도에 의해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헨리 제이콥은 분리파운동을 반대하던 입장이었다. 그가 분리파 청교도들을 설득하려고 하던 중 스스로 분리파 청교도들의 설득에 감화되었다. 분리파가 주장하는 교회언약제도와 회중교회제도는 옳다고 본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 교회를 교회로 인정하지 않는 과격성을 배제했다. 분리파 청교도들이 영국에 제대로 발을 붙이지 못했으나 독립파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어느 정도의 활동이 가능했다. 교회언약을 만들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회중교회제도를 시행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독립파 교회도 영국국교회의 박해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1607년 소수의 분리파 청교도들은 탄압에 견디지 못하여 결국 영국을 떠나 종교적 자유가 허용되었던 화란으로 이주했다. 그들은 화란에서 그들이 뜻하던 이상적 교회인 분리파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화란도 이상적인 곳은 아니었다. 화란에 종교적 자유를 제공하던 허영주의는 분리파 청교도 2세들로 하여금 방종이라는 비신앙적 분위기에 휩쓸리게 하였다. 2세들에게 그들이 원했던 신앙교육은 불가능해 보였다. 더욱이 1618년에는 역사상 첫 국제 전쟁인 30년 전쟁이 유럽에서 발발했다.
분리파 청교도들은 이것이 유럽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믿었다. 2세 교육의 문제와 30년 전쟁은 분리파 청교도들로 하여금 미 신대륙으로의 이주를 결정케 했다. 1620년 분리파 청교도들 101명은 메이 플라워호를 타고 미 신대륙을 향해 떠났다.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위한, 꿈에 그리던 이상적 교회건설의 염원과 하나님의 징계를 피하기 위한 그들의 생각이 대단한 모험을 감행케 한 것이다.
1620년 9월에 영국을 출발한 메이 플라워호는 11월에 미 동부연안에 도착했다. 항해의 어려움으로 인해 원래 의도했던 버지니아까지 이르지 못한 분리파 청교도들은 지금의 메사추세츠주에 위치하고 있는 플리머스라는 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삶의 여건이 전혀 조성되어 있지 않았고, 그들은 그러한 상태에서 추운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겨울은 혹독했다. 다음 해 봄 101명의 분리파 청교도들 중 50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도전의 삶은 그 후 점차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1630년, 영국에 있던 독립파 청교도들도 결국 영국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여 미 신대륙으로 이주했다. 범선 10척에 1,000명의 청교도들이 대거 이주하여 플리머스에서 멀지 않은 지금의 보스턴에 도착했다. 이 두 정착지는 나중에 결국 합쳐졌고 뉴잉글랜드라는 지역적 명칭하에 교회언약제도를 실천하는 회중교회를 세우고 민주주의를 근본으로 하는 사회정치제도를 구축하였다.
분리파와 독립파 청교도는 결국 미국의 초기 역사를 만드는 공헌을 했고 그들의 회중교회제도와 민주주의 정치제도는 미국의 교회와 사회 그리고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분리파와 독립파 청교도들은 하나님 나라를 영국에 세워보겠다는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핍박하고 교회와 국가를 그릇된 방향으로 이끌고 가는 정치권으로 말미암아 영국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원했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세워보려는 꿈을 완전히 접을 수 없었다. 그들의 선택은 나라를 버린다는 엄청난 댓가를 치루는 것이었고, 신대륙의 백지 위에 완전히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현대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게 신앙과 교회가 이러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 세상과의 타협에 빠르고, 너무도 쉽게 이상을 접고 안주해 버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큰 교훈을 남기는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원종천·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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