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사상의 이해 손봉호 교수(서울대학교, 기윤실 대표)1. 시작하는 말오늘날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기독교인들이 캠퍼스 내에 상당한 숫자가 있습니다. 만약 이들만이라도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한다면 이 한국 학원 전체, 더 나아가서는 사회전체가 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제 어느 정도 개혁주의로 무장이 되느냐에 문제가 될 것이고 개혁신앙운동원이 어느 정도 튼튼하게 사명의식을 가지고 앞으로 학원생활을 하며 사회생활을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사회 전체가 달라질 수 있다고 이야기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 개혁주의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 여러 가지로 좋겠다고 생각됩니다. 사실은 여러분이 지금 대부분 교회생활을 통하여서 개혁주의 사상 속에 교육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개혁주의가 무엇인지를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은데 굉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을 통해 구체적으로 조금 의식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여러분이 좀더 개혁주의 정신에 투철해진다면 더울 더 반가운 일이라 생각됩니다.2. 개혁주의의 어원과 역사 첫째, 개혁주의란 만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대부분의 말이 서양말을 번역한 것인데 한 가지 예외가 있으니 그것이 개혁주의입니다. 개혁주의는 도무지 서양에서 거기에 해당되는 말이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서양 사람에게 역수출할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의」란 말은 그 사상의 내용이 유연성이 없고 바뀌어지지 않는 위험이 있으니까 「ism」이란 말이 없는 것이 다행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서양에서는 reformed faith, reformed theology 등을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개혁주의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보면 역사적으로 종교 개혁주의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보면 역사적으로 종교 개혁에서 나왔습니다. 종교개혁은 여러 사람의 개혁이 있었는데, 특별히 우리가 개혁주의라 했을 때 칼빈의 사상을 말합니다. 현재 남아 있는 큰 두 줄기는 하나는 루터교고 하나는 개혁주의입니다. 그러면 루터교는 루터파라 하는데 개혁파는 칼빈파라 하지 않느냐 하는데 칼빈은 도무지 사람이 영광 받는 것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사람이 중심이 되는 것을 아주 싫어했고, 그 때문인지 모르지만 지금 칼빈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조차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칼빈주의란 말 대신 개혁주의란 말을 사용합니다. 개혁주의가 받아들이는 신학젹 기독교 입장은 칼빈 만이 한 것이 아니고 그 뒤에도 여러 신학자-아브라함 카이퍼(목사, 신학자, 언론가, 수상역임), 바빙크(자유대학 신학교수)-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는 칼빈이 어떤 인물이고 카이퍼가 어떤 인물인가에는 그렇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사상이 성경적이냐 아니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개혁주의에서는 도무지 인간을 우상화하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일전에 교황이란 인물이 한국을 휩쓸고 갔는데 놀라운 것은 한국 사람의 정신적 수준이 너무 낮다는 것입니다. 한 개인을 우상화하여 평화의 사도니, 그리스도의 대리자니 하는 것이 가능한가 의심스럽습니다. 오늘날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이 신비스럽습니다. 저에게는 도무지 우상이 없고 이 세상 인간이 다 별수 없다는 생각뿐입니다. 인간은 별 수 없다는 것, 이것도 개혁주의의 한 특징입니다. 개혁에서의 「개改」자는 고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 있으니까 고친다는 것입니다. 즐, 잘못되었다는 것이 전제가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열쇠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때 교회가 성경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교황이 와서 천주교의 인상이 강조되었지만 그 시대의 카톨릭은 많이 쇠퇴해 있었습니다. 그 시대는 성경을 신부만 읽고 누구도 읽지 못하게 했습니다. 또 라틴 성경만 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해석의 권리는 교회만 있었습니다. 또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해 있었습니다. 부패가 아주 극치에 달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을 찾아갔을 때 교황이 금은을 세면서 아퀴나스에게 ‘「금과 은은 내게 없어도」 란 말은 쓸 수 없지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아퀴나스는 ‘예,「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 라는 말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 것은 실제로 개혁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면죄부 판매가 옳은가에 대한 반박이었습니다. 루터가 95개 조항을 내건 것은 모두 면죄부와 관계있습니다. 이 조항을 공공장소에 게시하고 루터는 이 면죄부가 과연 옳은가 이것을 제안했던 것이었습니다. 실제 교황청은 너무 부패해 가지고 성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왔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가 여러 가지 압니다만 카톨릭의 사상 가운데 성경과 거리가 먼 것이 한둘이 아니고 지금도 마리아를 숭배한다든지 마리아가 에베소에서 승천했다든지 마리아가 동정녀로 남아있었다는 등, 그리고 교황의 말은 성경과 동일한 권위가 있고, 그에게는 절대 잘못이 없다는 교황 무오설이 있습니다. 이렇게 천주교의 많은 교리가 교황 무오설을 바탕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교황 제도를 없애지 않는 한 그것은 철회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카톨릭 안에서도 교황 무오설은 말도 안된다고 주장하다 교수직을 박탈당한 사람도 있습니다. 3. 개혁주의의 특성1) 성경 중심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모토는 성경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는 오늘날의 개신교회 중 성경을 중요시하지 않는 데가 어디 있느냐, 모두 성경을 말하지 않느냐, 그런데도 구태여 개혁주의만 성경을 중요시한다고 하느냐는 의문이 있을 것입니다. 개혁주의에서 성경을 중요시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처럼 성경을 열심히 공부한다는 것과 함께 성경에 입각한 일관성 있는 생활태도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성경과 일관성 있는 하나의 생황체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그저 성경을 적당해 읽어서 성경에서 은혜 받고 성경대로 살려고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의 세계관, 우리의 인간관, 우리의 신관, 우리의 가치관, 이 모든 것이 가르침과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 개혁주의의 특색입니다. 개혁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른 신학은 개혁주의가 아니면서 그와 유사한 사조를 띄었다고 해서 개혁주의와 같은 것이 아니냐고 말하기 때문에 우리가 개혁주의, 개혁주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몇가지 예를 들어 이야기 하겠습니다.오늘날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카톨릭인데 카톨릭은 정말로 성경과 일관성 있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이성과 신앙은 분리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모든 사람은 다 이성을 가지고 있고 그 이성은 모든 사람에게 다 동등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은 물론 안 믿는 사람도 이성은 가지고 있지만 특별히 기독교인들에게는 그 위에 또 하나 더해졌는데 그것이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믿음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성 위에 하나 더 얹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도 다른 말로 고치면 소위 자연과 은총이라고도 말하는데 자연이라는 것은 누구든지 다 가지고 있는 것이고 기독교인은 그 위에 은총이 하나 더해졌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되니까 안 믿는 사람도 이성의 영역에서나 자연의 영역에서는 같습니다. 그러나 다만 안 믿는 사람이 하나 못 가진 것이 무엇인고 하니 믿음이요 은총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성은 그 이성의 영역 내에서는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이성은 동일합니다. 다만 그 위에 믿는 사람이 믿음을 하나 더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카톨릭의 소위 토미즘,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카톨릭 신학의 특징이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니 안 믿는 사람도 상당한 진리를 획득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인간이 인간인 이상 인간으로서 그 상당한 진리를 소유할 수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다만 믿는 사람이 그 위에 하나 더 알 수 있다고 하여 이성의 자율성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카톨릭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매우 중요시합니다. 카톨릭 신학의 글에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대문자P로 써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소문자 p로 써놓으면 그것은 다른 철학자이고 대문자 P로 써놓으면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고, 거의 구원받을 뻔했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상당한 교회가 비록 개신교회라도 사실은 천주교적 통합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다른 영역으로 확대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차이는 주일날 교회에 가고 안가고의 차이이며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똑같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그 외에 사회생활은 꼭 같은데 다만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 다르게 담배 안 비우는 것, 술 안 마시는 것, 조금 나은 사람은 밥 먹을 때 기도하는 것 등의 차이가 있으며 그 외에 탈세를 하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하는 것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개혁주의가 아닙니다. 개혁주의는 신앙이 없다면 이성도 아무 능력이 없고, 은총이 없으며 자연도 아무능력이 없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개혁주의는 위의 답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성이라 하는 것 그 자체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힘을 얻어야만 이성의 역할을 할 수가 있으며 자연도 은총 속에서만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령, 구체적으로 새가 어떻게 나느냐는 문제에서, 새가 모이를 먹으면 속으로 소화가 되어 에너지를 발산하니까 법칙에 의해서 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은 하나님이 도와주시나 안도와 주시나 상관없이 새가 날아간다고 생각하고, 물이 위에서 내려올 때 그것이 폭포가 되는 것은 자연법칙으로 되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도와주시나 안 도와주시나 상관없이 새가 날아간다고 생각하고, 물이 위에서 내려올 때 그것이 폭포가 되는 것은 자연법칙으로 되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면 이것은 개혁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봐야 개혁주의입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질 때도 그것은 하나님이 바빠서 어떻게 일일이 간섭하느냐, 그런 것은 다 자연법칙에 맡겨 놓고 가끔 가다가 누가 특별히 기도를 하면 그때 기적을 행하여 하나님이 간섭한다고 생각하면 개혁주의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머리털하나 떨어지는 것 하나하나까지 하나님이 계산한다고 믿는 것이 개혁주의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의 영역이 그자체로 독립되어 있지 않다, 모든 영역은 다 하나님의 시시각각의 간섭하에 놓여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우리는 성경을 매우 중요시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왜 성경을 중요시할 수 밖에 없는가 하니까 천주교인들은 이 분야에서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물론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으면 괜찮은데 하나님이, 예수님이 없어도 꽤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에서는 만약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지식이 다 헛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거기서 굉장한 차이가 납니다. 개신교 가운데 루터교는 물론 천주교처럼 엄격하게 구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루터교에서는 두 왕국설을 믿습니다. 정치적인 영역에 있어서 세상의 권한은 완전히 세상이고 교회는 교회라고 하여 서로 상당한 독립성을 인정합니다. 그 다음에 자유주의는 천주교 보다 더 인간의 이성을 절대시합니다. 어느 정도인고 하니까 밑에 것이 위에 것을 지배한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자유주의는 밑에 것이 위에 것을 지배한다고 생각하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어떻게 아느냐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판단해 보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므로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든지,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든가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과학의 원칙에 어긋나니까 그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그렇게 되니까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 없습니다. 이것만 가지고 충분히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데 무슨 계시가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시가 제일 필요한 것이 개혁주의입니다.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면 인간은 아무런 올바른 지식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가장 성경을 중요시하고 그 다음에 성경과 일관성 있는 삶의 태도, 삶의 철학을 갖고 있다고 주장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상에서는 그렇게 할 필요가 별로 없다고 주장합니다. 즉 성경과 일관성 있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성이라는 하나의 상당히 넓은 영역이 성경과는 독립되어서 존재할 수가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절대주권성경을 중시한다는 말은 동시에 그 배경이 절대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는 말은 이성의 영역을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않고 놓아두시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영역에 다 절대적으로 지배하시는 분이시니까 이 세상에 자율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Autonomy라는 말이 자율이라는 말인데 auto는 자신이라는 것이고 nomy는 법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자기에게 법이 되는 것이 Autonomy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독립이라는 말입니다. 아무도 나에게 새로운 법을 덮어씌울 수 없고 내가 나의 법이다라는 것이 자율입니다. 그러니까 이성은 자율적이고 유명한 철학자 Kant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색을 자율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성의 특성은 autonomy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autonomy를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분야는 다 neitronomy, 타율이며 그 他는 바로 하나님입니다. 이 세상 모든 영역이 다 하나님 권능 밑에 있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일관성 있는 삶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개혁주의는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의 다른 모든 교회보다도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모든 영역에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모든 시간에 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하나님께서 주관하지 않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3) 인간의 전적 부패그 다음에, 그런 하나님의 절대 주권만 가지고 성경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또 한 가지 개혁주의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를 들면 인간의 전적 부패라는 것입니다. 그것 역시 앞의 말과 직접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마는 인간이 전적 부패했기 때문에 자기의 이성으로, 자기의 능력으로는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는 얘깁니다. 인간이 부패하지 않았다면 어느 정도 스스로 진리를 발견할 수 있고 선을 행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조금 남겨 두고 부패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두면 전혀 진리를 발견할 수 없는 완전한 장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인간에게는 올바른 지식이 있을 수 없고 따라서 구원의 능력도 구원의 길도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자들에게는 성경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우리인간에게 가르쳐 주시므로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도 이 사상이 항상 전제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 인간이 완전히 부패했다고 믿는다면, 그리고 우리의 의지조차도 항상 악만 추구한다면 로마서 3장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만약에 계시가 아니 주어졌더라면 우리는 영원한 멸망 받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늘 잘 드는 예로서는 아브라함의 예가 있는데 인간적으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우선 애굽에 가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했는데 그 얼마나 비겁합니까. 좋게 말하면 얼마나 꾀가 많습니까. 그렇게 하면 자기 목숨은 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은 또 하나님께서 네 자손이 하늘의 별,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은 거라는데 나이는 다되어가고 아니 못 낳을 때가 다가오고 하나님이 약속은 했는데 이루어 주시지는 않고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느냐 하니 내가 한번 이루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외에도 성경에 보면 사람의 기대와 어긋난 방법으로 일을 이루신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그런 것이 아주 꽉 차있습니다. 요한은 아주 고의적으로 그렇게 서술해 놓았습니다. 너희가 거듭나야 하리라 할 때 사람이 자기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올 수 있습니까? 하는 것이 인간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하니 내가 물 길러 오지 않아도 되게 해 주십시오 라고 해석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바가 무엇입니까. 너희들의 생각과 다르다, 동에서 서가, 하늘과 땅이 먼 것처럼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들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 많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유명한 초대 교부이자 평신도 신학자로 유명한 터툴리안(Tertulian)은 “Credo absurdiban" 좀 의역을 하면 “나는 말이 안 되기 때문에 믿는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내 이성에 맞지 않기 때문에 나의 능력을 초월한 것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믿을 가치가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책을 잃었는데 그 안에 다 아는 내용만 있다면 그 책을 아주 중요한 책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가르쳐 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무가치한 책일 것입니다. 인간은 부패했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과 꼭 같은 성경이라면 역시 아무가치도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거스틴(Augustinus)은 “I believe so that I understand", 내가 알기 위해서 믿는다고 했습니다. 내가 이해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해하기 위해서 즉 내가 먼저 믿어야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지식이라는 것이 있어서 거기서 믿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거기서 새로운 믿음의 지식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역시 하나님의 지식은 사람의 지식을 초월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는 제가 개혁주의의 가장 중요한 사상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고 그것이 어떤 배경에서 나왔느냐 하는 것을 간단하게 말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적대주권과 인간의 전적부패 때문에 성경으로 돌아가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것이 결국 다른 사상으로부터 분리되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끝으로 이것과 관계해서 한마디 들릴 것은 오늘날 개혁주의 사상이 아주 맞는다는 것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상에서는 이성이 있다고 믿었고, 그 이성이 자율성을 갖고 진리를 가질 수 있다고 믿었는데 현대 철학에 있어서는 이성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물론 루터가 ‘이성은 창녀와 같다’고 이야기한 바가 있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그 당시 이성은 그 자체로 진리를 가르쳐 줄 수 있다고 했는데, 루터는 이성은 가난한 자에게는 가난한 자를 위해서 부자에게는 부자를 위해서, 우익의 이성은 우익을 위해, 좌익의 이성은 좌익을 위해 봉사하기 때문에 만인의 창녀라는 것입니다. 몇 세기 후 독일의 철학자 니이체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오늘날에 와서 신막스주의자인 볼 카이브가 「도구적 이성 비판」이라는 책을 썼는데 오늘날 이성은 모두 도구가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아득한 옛날 터툴리안이 주장했고, 어거스틴이 주장했고, 특별히 칼빈이 주장했고, 루터가 주장했던 것으로 우린 벌써 가만히 앉아서 옛날에 그 사실을 알았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개혁주의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아주 현대적입니다. 모든 인간의 철학사상을 훨씬 앞선 사상입니다. 이성이 어디에 있습니까? 무언지 아십니까? 그래서 요사이 철학자들은 이성이라는 말을 별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이성이 머리속에 들어있다고 생각했는데 x-ray가 발명되고 보니까 이성이라는 것이 있어야지요. 유태인 660만을 죽인 히틀러 이후로 인간에게 이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보지요. 비슷한 얘기로 술로 채운 못에서 배를 띄우며 술을 퍼마셔가며 놀았던 중국 주나라 때의 걸왕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간에게 양심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안된다고 말리는 신하의 배를 갈랐으나 양심을 찾지 못했지요. 과거에는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었는데 현재 와서 보니 아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올바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장님과 같이 엉뚱한 데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여러분은 당장 항의를 할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도 훌륭한 과학적 발명을 하고,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도 위대한 이야기를 하고, 소련에서도 인공위성을 띄우고 하는 것은 무슨 일이냐? 불교신자도 좋은 일 많이 하는데 어떻게 진리를 알고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가?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개혁주의에서는 거기에 대한 대답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일반은총이라는 것입니다. 이 우주는 완전히 죄악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을 그대로 두신다면 우리는 모두 멸망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반은총을 주셔서 안 믿는 자나, 믿는 자나, 악한 자나, 의로운 자에게 다 골고루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십니다. 그것은 개혁주의에서는 일반은총이라 부르는데 모든 사람은 스스로 의식은 못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조금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로마 사람들이 그렇게 위대하게 만든 법도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쓰고 있는데, 일반은총은 구원에 이르게는 못하지만 그러나 악이 극도에 달하는 것을 막아 주고 어느 정도의 진리를 간간이 소유하게 해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모든 진리-수학적 진리이든, 자연 과학적 진리이든-의 배경에는 진리의 영인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 일반은총은 나중에 사람들에게 핑계하지 못할 무거운 책임으로 몰아갑니다. 어느 정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부어 주셨는데도 하나님 대신에 썩어질 인간의 버러지와 금수의 형상으로 우상을 만들고 섬긴다고 로마서 1:12이하에 기록하고 있습니다.4. 개혁주의자의 삶 1)성경중심의 삶구체적으로 개혁주의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인데 이것을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우리는 근본적으로 일반은총이든 성령의 계시이든 모든 진리는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옵니다. 안 믿는 어떤 교수가 좋은 책을 내고 좋은 강의를 하더라도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빌려온 것입니다. 각양 좋은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고 야고보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개혁주의에서는 성경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권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교황이 제아무리 엑스카테리아 강단 위에서 설교를 해도 , 더 나아가 S.F.C 강령이니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라도 성경에 근거해 있을 때만 권위를 가집니다. 개혁신앙의 유일한 교권은 성경입니다. 총회나 노회, 당회에서 결정했더라도 어긋나면 우리는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어긋난다는 말을 할 때에는 조심을 해야지요. 성경을 열심히 공부할 때 너무 주관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는 방법으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도 성경에 어긋난다면 거역할 수도 있는데 장로교 헌법에 모든 총회와 노회와 당회의 결정에도 개인의 양심상 성경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불복할 권리를 주어 놓았습니다. 올바른 성경공부는 주석도 보고 원어도 아는 분이 있으면 묻고 해서 너무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렇다고 너무 주관적인 것을 배제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라고 성경을 말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가 필요하고, 지도자가 필요하고 주석이 필요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신뢰하는 삶제가 이제까지 성경의 중요성을 말했고, 두 번째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해서 말했지만 로마서 11장 마지막 절의 말씀처럼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지금 영유되고 또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고 끝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 있어서 이중적인 구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정치문제, 학문문제, 경제문제,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또 천주교인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음악가 하이든이 ‘천지창조’라는 노래를 작곡했는데 들어보니까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 찬양을 하더니 그 다음에는 “자, 하나님에 대한 찬양은 끝났으니 이제는 우리 사랑노래를 하자”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전형적인 루터교 사고 방식이며 천주교 사고방식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개혁주의자들에게는 세속적인 것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직업은 성직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 일을 안하면 죄악의식을 느끼는 사람도 있는데 오해입니다. 우리의 모든 직업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그의 면전에서 주신 달란트대로 하는 것이지 나를 위해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산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 거역한다는 의미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개혁주의에서는 종교와 정치의 분리,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영어에서 State and Church라 했지 Religion and Politics라고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 만든 말입니다. 서양에서는 기독교 정당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치는 종교적으로, 예술을 할 때에도, 문학을 할 때에도 종교적 입장에서 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인들은 모든 분야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모든 좋은 것들의 합법적인 주인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불법적 주인입니다. 우리가 예술을 한다면 우리가 예술을 할 수 있는 고유의 권한을 가지고 있고, 안 믿는 사람들은 옆에 끼어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만한 긍지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이 우주의 주재자이신 하나님의 합법적인 자녀들로서 모든 일에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공부만 잘하면 제일인가, 기도를 많이 해야지”하는 생각은 오해입니다. 자연의 영역과 은혜의 영역을 구별하는 천주교식으로 해석하면 가능하지만 적어도 개혁주의에서는 기도하는 것과 공부하는 것을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무식할 권리는 없고, 유식할 의무만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기에 뒤지면 우리의 합법적 소유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뒤에서 머뭇거리는 그런 상황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달란트가 주어졌는지 자세히 조사하고 그 달란트를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고, 이런 의미에서 개혁주의자들에게는 직업의 귀천이 없는 것입니다. 3) 인간의 전적부패를 신뢰하는 삶세 번째로 인간의 전적 부패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는데, 그것은 단순히 지적으로만 어두워진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분별력이 없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어리석다 했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어리석음은 선하고 악한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든 분야에서 다 부패했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고귀한 일, 가치 있는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런 일을 한다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종이 충성되게 일하고 나서도 끝에 가서는 나는 무익한 종이로소이다 라고 말하게 되는데 이것이 개혁신앙인의 태도입니다. 우리 인간은 뭐가 잘되고 일이 좀 잘되면 자기 공로로 내세우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 유혹은 물리쳐야 합니다. 어떤 때는 특별히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도 속으로는 ‘역시 내가 잘했지’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내가 제일 많이 체험했기 때문에 솔직히 말씀드리지만 내가 개혁주의자가 아니라면 안 싸웠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계속해서 싸웁니다 하나님이 축복해서 우리가 좋은 일을 했는데, 그 영광을 우리가 다 받아 버리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교만은 인간에게 계속 붙어 다니는 유혹입니다. 교만이 곧 죄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인간의 가장 무서운 죄는 교만이요, 두 번째로 무서운 죄도 교만이요, 세 번째로 무서운 죄도 교만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내가 너무 이것을 강조하면 어떤 사람은 젊은 사람 기를 다 죽여 놓는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자가 어떻게 교만해질 수 있습니까? 여기서 예정교리가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정교리를 이상하게 해석해서 질문을 많이 하는데, 예정교리의 본래의 의도는 인간의 좋은 것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그 중에 가장 좋은 것이 구원인데,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그것이 바로 예정교리입니다. 나의 믿음으로, 나의 결심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고, 구원에 있어서 내가 공헌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바로 이것이 예정입니다. 에베소서 1장을 한번 보십시오. 칼빈이 말한 인간의 전적부패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불가피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예정입니다. 본래 예정교리는 믿는 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 예정교리를 쓰지 마십시오. 믿는 사람이 자신을 돌이켜보니까 자기가 잘해서 믿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이 믿게 하셔서 믿게 되었구나 하는 고백적 차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거나 인간의 전적부패는 가장 비인도적인 입장이라고 주장하는 니이체니 막스니, 포이에르 바하와 같은 사람들도 있지만 기독교는 인간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존재이니 얼마나 고귀합니다. 어느 날 YMCA에서 공개 철학강의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인권문제에 관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인간이 존귀한 근거가 무엇이냐 철분을 조사하면 못 두 개 밖에 안 되고 총 한방에 죽는데 무엇이 중요하냐, 아무리 존귀한 이성을 가진 자라도 교통사고로 죽는데 무엇이 존귀하냐 근거도 없는 이러한 인권에 대한 외침은 결국 오래가지 못합니다. 막스주의에서 이러한 인권을 얼마나 강조하는데 왜 공산주의에서는 인권이 무시당합니까.” 인간이 존중되고, 인간이 고귀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상이기에 고귀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기에 고귀한 것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옛날에는 이성이 있기 때문에 고귀하다고 했는데 요즘은 이성이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르겠고, 실지로 우리가 천하보다도 더 귀한 것 은 하나님이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까닭일 뿐인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위에 올라가면 오히려 가치가 더 하락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에게 주어진 본래의 위치, 즉 하나님 밑에 있으면 자기의 가치를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와 관련해서 최근에 학생들 사이에서 느낀 것을 한 가지 말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지만 역사에 있어서 인간이 역사의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에 역사는 항상 죄로 섞여 있습니다. 좀더 재미있는 비유를 보면 천국은 이와 같으니 해놓고 가라지 비유를 합니다. 즉 이 역사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속에 가라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인간의 죄악이라는 것은 인간 공동체에 너무나 강하게 나타납니다. 현대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라는 사람이 ‘도덕적인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말하기를 인간의 모든 공동체는 이기주의적입니다. 그것은 항상 비도덕적입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국가입니다. 제가 최근에 언론 연수원에 가서 기자들을 연수하는데, 국가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비도덕적이라 하면 깜짝 놀라요. 개혁주의 신앙에서는 혁명을 반대합니다. 그 이유는 혁명을 해봤자 별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에서 그것이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혁명을 통해 좋아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러시아 혁명, 멕시코 혁명, 어느 혁명이 성공했습니까? 그래서 니버는 잘 지적했습니다. 대게 혁명을 일으키면 그 혁명을 일으킨 세대는 어느 정도 소위 혁명의 정력이 남아 있어서 꽤 괜찮아 보이지만, 그 세대가 지나가면 문제가 생깁니다. 급격한 혁명을 일으켜서 많은 사람을 죽이지만 자신은 죽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빈부, 억눌린 자를 보지만 자신은 수 억대의 재산을 가지고도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지는 않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국가가 이상주의 국가가 되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국가는 커녕 교회도 이상적인 교회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지만 선지자들은 계속 외쳤던 것을 보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하실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가 악을 대항해서 싸우고 불법을 비방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정부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데 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민주주의가 좋은 이유는 개혁주의가 민주주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개혁주의의 신앙정신이 아래서부터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는 가장 비효율적인 제도입니다. 몇 시간 떠들고 나면 다시 처음 시작으로 돌아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좋은 이유는 여러 사람이 의견이 반드시 더 낫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개혁주의는 독재 정치를 허용치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개혁주의는, 적어도 역사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개혁주의는 굉장한 자제와 금욕을 행합니다. 유명한 사회학자 막스베버는 자본주의가 칼빈주의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세계 내적 금욕” 때문입니다. 세계 내적 금욕은 짐을 싸들고 기도원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 살면서 금욕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개혁주의 정신을 받아들인 나라에 가보면 압니다. 우리나라는 도덕적으로 매우 해이해져가고 있습니다. 또한 개혁주의 신앙에 입각한 여러분들은 시간관념이 철저해야합니다. 생활이 규칙화되고, 향락에 빠지지 않고, 모든 감정과 향락에 있어서 절제를 하고, 시간을 엄격히 지키는 고급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개혁주의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생활에서 나타나야합니다. 유혹과 싸워야합니다. 죄악의 요소가 나를 사로잡을 때는 그것을 억누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개혁주의의 힘입니다. 이 힘으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발휘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상 받을 준비를 합시다.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상적인 교회건설을 추구한 청교도 (0) | 2022.01.12 |
---|---|
개혁신학과 복음주의의 상관성 (0) | 2022.01.12 |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삶 /삼하 6:12-15 (0) | 2022.01.12 |
세계적 베스트셀러 성경 /요 20:30-31 (0) | 2022.01.12 |
유일한 대안 /요 6:10-15 (0) | 2022.01.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