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미로에서 뒤틀린 목회자의 영성(박영돈 교수)
박영돈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영성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 아마 목회자일 것이다. 그러나 참된 영성을 소유하기가 가장 힘든 사람 역시 목회자이다. 이것이 목회자가 처한 영적 딜레마이다. 최근 영성의 붐이 일어나면서 목회자의 영성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고 있다. 하지만 목회자의 영성이 안고 있는 근본 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은 부족한 듯하다. 영성추구에 있어서 목회자만이 갖는 어려움과 위기가 무엇인지를 바로 직시하고 올바로 대처하는 것이 참된 영성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일 것이다.
욕망의 위력
러브호텔이 전 국토의 구석구석에 창궐했다. 신도시에까지 무섭게 번져가면서 이를 저지하려는 시민들의 시위가 연이어진다. 그러나 이미 공권력으로도 제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소설가 김훈은 다음과 같이 예리한 분석을 하였다. “행정력뿐 아니라 군사력이나 경찰력을 동원해도 러브를 막을 수 없다. 종교나 교육의 힘도 러브 앞에서는 무력해 보인다. ‘종말이 가까워 왔다’고 겁주어서 될 일도 아니다. 욕망에는 종말이 없고, 욕망에는 회개가 없다.” 이 말은 욕망의 걷잡을 수 없는 충동과 통제할 수 없는 마력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다. 인간 안에 이보다 더 큰 활력은 없을 것이다. 플라톤에서부터 칸트와 헤겔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전통적인 인간 이해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이성적인 존재로 보았다. 인간은 이성으로 육신의 충동과 욕구를 제어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낙관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그렇게 이성적으로 자유롭고 고상한 존재인가?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그의 역작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서 인간은 이성보다 육적인 욕망에 의해 주관되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더욱 사실적인 인간이해라고 분석했다. 니체나 프로이드 그리고 칼 마르크스의 사상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인간은 이성보다 그 저변에 도사리고 있는 권력에 대한 욕망, 성적 욕망, 물질에 대한 욕망에 의해 더 은밀히 자극되고 주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이성을 이 욕망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또는 합리화하는 방편으로 활용한다. 이성이 욕망의 시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교육도 권력과 물질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권력의 욕망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와 이념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 세속적 욕망이 가장 교묘하면서도 무섭게 위장되고 합리화될 수 있는 영역이 바로 종교이다. 성스러운 명분과 슬로건 아래 속된 욕망이 흉측스럽게 꿈틀거리는 모습을 감쪽같이 은폐할 수 있다. 사람들의 이기적인 욕망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은 채 종교로 겉포장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도 세속적인 성공주의와 은밀히 결합하여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평안, 세상에서의 형통함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가 되기 쉽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에 여실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축복 신학, 번영 신학, 성공주의 메시지가 이를 부추기는 동시에 합리화한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열심히 추구하는 성령운동은 영적인 에너지와 힘을 끌어당겨 이기적 자기실현의 원동력으로 삼으려는 욕망의 분출구 역할을 한다.
목회자의 세속적 야망이 교인들의 그런 욕심과 하나로 맞물려 대형화와 물량주의, 성장제일주의의 폐단을 불러왔다. 한국사회가 온통 물질과 권력과 쾌락의 욕망에 사로잡혀 휘청거리고 있는데, 세상을 헛된 욕심에서 해방시켜야 할 책무를 띤 교회마저 그 욕망의 광적 질주에 합세하고 있는 형국이 벌어지고 있다. 이 시대는 성속이 함께 뒤엉켜 품어내는 욕망의 열기로 가득한 정욕의 분화구와 같은 모습을 방불케 한다.
한국교회의 세속화 문제는 심층적 분석을 요한다.
한국교회의 부패는 교인들의 ‘욕망의 세속화’에서부터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특별히 목회자들이 성령의 소욕으로 교묘히 위장된 육신의 소욕 - 힘과 성공과 명예에 대한 욕망에 이끌려 성직을 수행하고 영적인 일을 해온 것이 한국교회의 신앙과 영성을 세속에 오염시켜 혼탁하게 하고 뒤틀리게 하는 근본 요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영적 명분으로 가려진 육적 욕망
욕심이 사람의 눈을 멀게 하며 그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육적인 욕심은 영안을 멀게 하여 영적 분별력을 둔화시킨다. 그래서 신자가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수록 그 사실을 바르게 인식하기가 힘들어진다. 더욱이 육신의 욕망을 따라 거룩한 일을 하는 성직자의 경우에 있어서 이 사태는 훨씬 더 심각한 양상을 띤다. 육신의 간교함이 성스러운 명분으로 인해 보강되고 이중적으로 위장되면 그 ‘미혹의 힘’은 배가 되어 영적 분별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이기적 욕망을 따라 목회하는 이들이 자신의 영적인 진상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솔직하게 인정하기가 가장 힘들다. 그런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한다는 투철한 명분론에 빠져서 자신이 그런 줄로 착각하며 그러한 구호를 더욱 힘차게 외치곤 한다. 그러나 존 오웬(John Owen)이 지적했듯이, 육신의 세력은 “가장 잘 느끼지 못하는 곳에서 가장 강력하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안고 있는 영적 문제는 자신 안에 얼마나 육신이 강하게 역사하는지를 알지 못하는데서 비롯된다.
목회자는 힐라리(Hilary)가 말한 “하나님을 위한 불경건한 열심”, 즉 자기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신성 모독적인 열망”을 부단히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열심이 얼마나 자신의 영광과 명성과 성공에 대한 욕망에서 자극될 수 있는지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존 화이트(John White)는 사람들에게 영광과 찬양을 받고 싶은 갈망은 자신이 경배를 받고 싶은 마귀적 욕망이라고 했다. 사람들의 인기와 명성에 대한 욕망은 곧 자기숭배의 열망이라는 것이다. 목회자가 선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자기를 숭배하는 무서운 죄에 빠질 수 있는 매우 위태로운 곳이다. 목회자가 주의 일을 하면서도 은밀히 자신의 이름 내기, 업적 쌓기와 명성 얻기에 집착하게 될 때 이런 위험은 극대화 된다.
더욱이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자기중심적인 문화는 목회자의 이런 이기적 야망을 부추기고 고조시킨다. 목회자마저 자기도 모르게 성공지향적인 경쟁사회의 논리와 가치관에 젖어 성장제일주의에 매몰되어가기 쉽다. 또한 교회 성장은 수적 증가라는 가시적인 증거로 나타나야한다는 인식이 교인들 안에 보편화되면서 목사는 보이지 않는 압력과 스트레스에 쫓기며 강박적으로 성장을 추구한다.
‘교인수가 목사의 계급장’이라는 자조적인 말까지 생길 정도로 대형교회를 이루는 것이 목회성공의 척도라는 은연중의 암시가 교계 안에 편만하게 되면서, 이것이 젊은 목회자들 안에 무서운 영향력으로 작용하여 ‘성공 마니아’를 배태하였다. 사무엘 리마(Samuel Rima)는 이렇게 자신의 경험을 토로한다. “나는 노골적으로 영적인 스타의 지위에 오르려고 노력하지는 않았지만, 잠재적으로 성공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욕구가 내 모든 사역의 은밀한 동기가 되었다. 그것은 나에게는 완벽하게 정당한 것처럼 보였다... 수 년 동안 나의 사역의 노력은 미묘하게 나 자신의 개인적인 성공에 의해 운전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항상 천국의 언어로 그러한 의도를 위장했고, 나와 함께 사역한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비슷한 성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양적 팽창과 대형화를 위한 열심이 영적 명분으로 포장된 목회자들의 세속적 욕망에서 상당부분 자극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복음 전파라는 미명으로 섬긴 우상, 교회성장”이라는 손봉호 교수의 비판은 교회성장을 위한 과도한 열심 속에 감추어진 목회자들의 헛된 욕망을 간파한데서 나온 날카로운 지적이라고 하겠다.
헛된 욕망의 열매들
이러한 목회자의 육적인 욕망은 그의 인격과 영성, 그리고 모든 사역을 부패하게 한다. 목회자가 개인적인 야망에 이끌려 목회하고 있다는 분명한 사인 가운데 하나는 교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도구들로 은밀히 이용하려는 것이다.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그의 책 「나와 너」에서 사람들을 “너”아닌 “그것”으로 취급하는 것이 세상에 보편화된 인간관계임을 지적했는데, 목회자가 이런 세속적인 원리를 따라 교회를 운영함으로써 새로운 인간관계가 형성되어야 할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비인간적인 집단으로 변질시키는데 주역을 담당하고 있다.
사람과 인격 중심의 목회가 아니라 일과 업적 중심의 목회로 치우친다. 이러한 위험에 대해서 찰스 스윈돌(Charles Swindoll)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의 동기를 감추고 교묘한 수법으로 교인들을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도록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감쪽같이 위장해 교인들이 그 일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 사실은 그들이 내 뜻을 행하여, 내가 영광을 받는데도 말이다.” 육신을 따르는 목회자는 교인들의 에너지와 자원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세우고 그들의 신앙인격 성숙과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사용하기보다, 목회자의 성공적인 업적을 증진시키기 위한 목적을 위해 활용하도록 교묘히 유도한다. 그래서 불필요하게 거대한 건물 건축과 숫자 늘이기 전도와 프로그램 확장에 그 힘을 소진하게 한다.
또한 목회자의 이기적인 욕망은 목회자 자신의 인격과 기도와 영성에 매우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의 기도는 순수성을 잃어버린다. 겸손과 거룩을 구하는 기도마저도 경건자체보다 경건의 유익과 명성에 더 집착하는 육적인 마음에서 촉발된다.
야고보는 우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고 했는데(약 4:3), 육적인 목회자의 기도가 많은 경우에 이런 기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기도가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는 미명으로 치장된 ‘목회자의 은밀한 종교적 정욕’을 채우기 위한 방편이 되어 버린다.
하나님께서 때로 욕망에 사로잡힌 목회자의 이기적인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은 그의 기도를 기뻐하셔서가 아니라, 그가 섬기는 교인들과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목회자는 그것이 자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인 줄 알고 거룩한 성령을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동력으로 이용하는 함정에 빠진다. 이런 욕망이 강할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하는 기도가 더욱 간절해진다.
기도라는 욕망의 탱크로 천국을 침노하여 하나님 나라의 영적 보화들을 자신의 육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삼으려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은 육적인 목회자에게 매우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다.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가 부패한 인간의 육신을 섬기는 ‘색욕거리’로 변질된다.
육적인 소욕을 따르는 목회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현상은 목회자의 영성이 현저히 퇴화된다는 것이다. 육적인 욕망은 목회자를 영적으로 무력하게 하는 역기능을 발휘한다. 목회자를 지치고 탈진하게 하며 영적인 고갈상태에 빠지게 한다. 그는 외적으로 많은 것을 성취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내적으로는 공허하며, 말씀을 전하고 나서도 마음에 허탈함을 느끼게 된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죄에 대한 저항력은 약화되고 유혹에 대한 면역은 저하되어 특별히 자극적인 죄, 음란과 같은 죄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이기적 야망과 음란은 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대개 욕심이 많고 이기적 야심이 클수록 음욕이 커진다. 육신의 소욕을 따라 목회하는 이는 결국 여러 가지 부도덕하고 음란한 죄에 연루되기 십상이다. 슈네이즈(Robert Schnase)가 지적했듯이, “목회사역에 있어서 목회자 자신들이 당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대다수의 비극은 목회자의 타락한 욕망에서 초래한 것들이다.”
참자아를 잃은 목회자
또 다른 치명적인 결과는 목회자의 이기적인 욕망이 진정한 자아형성을 심각하게 저해한다는 점이다. 목회자가 육적소욕을 따라 사역하면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는데 사용되어야 할 모든 정신적인 힘과 영적인 에너지가 자기중심적 추구를 위해 소모된다. 그래서 외적으로 많은 것을 성취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세계는 황폐해진다.
목회자가 성령의 뜻을 거스르는 자아중심적인 뜻과 욕망을 좇을 때 그의 내면세계는 그 안에 계신 성령과 날카로운 긴장과 대립 관계에 놓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성령이 부여하는 풍성한 영적 생명력의 공급이 차단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아를 형성해 가는데 필요한 영적자원이 고갈된다. 자연히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성화는 진행되지 않고, 성령의 열매도 산출되지 않는다. 결국 목회의 은사는 있을지라도 인격의 열매는 없는 목사가 된다.
그래서 뛰어난 설교의 은사는 있지만 좋은 인격의 열매는 없는 목회자가 될 수 있다. 설교와 영성은 꼭 비례하지 않는다. 특별한 말씀의 은사를 가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참된 영성을 소유했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설교의 은사가 남다르게 뛰어날수록 그 은사의 탁월함과 위력 때문에 더 고차원적으로 자신을 깊은 영성을 소유한 사람으로 가장할 수 있는 위험이 커진다. 물론 영성과 설교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깊은 영성에서 우러나온 말씀이 감동적이고 은혜롭다. 이렇게 영성과 설교는 함께 가는 것이 정상이지만 목회자의 죄성 때문에 이것이 괴리되는 변칙적인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목사의 진정한 영성의 증거는 우선적으로 설교의 은사가 아니라 인격의 열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인격만을 중시한 나머지 은사를 평가절하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목회자의 참된 영성을 위해서는 인격의 열매와 설교의 은사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 영적 성숙과 성화의 진전은 은사와 열매의 상호작용과 연합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다. 목사가 설교의 은사를 성령의 소욕을 따라 겸손히 교인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사역을 위해 활용할 때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사랑의 인격자로 성숙한다.
반면에 설교의 은사를 육신의 소욕, 즉 이기적 야망을 따라 사용하면 그 은사는 영적성숙에 기여하는 성화론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열매로 귀결되지 못하는 은사로 전락한다. 결국 목회자의 육신적 욕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와 은혜가 자신의 인격개발과 자아성숙에 사용될 수 없게 한다. 육신적 목회자는 성화보다 사역과 업적성취를 위해 성령의 은혜를 더 열심히 구한다. 강단 위에서는 성령충만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강단 밑에서는 성령충만하기를 그렇게 원치 않는다. 그러나 목회자의 참된 영성은 강단 밑에서의 그의 모습에서 더 확실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이 은사와 열매, 사역과 성화가 조화롭게 통합되지 않으면 목회자의 진정한 자아 성숙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설교는 잘하지만 인격에 문제가 있고, 강단 위에서와 아래에서의 모습이 다른 이중적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목회자에게 가식의 무거운 짐이 가중된다.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모순된 모습을 최대한 감추고 자신을 좀 더 의로운 사람으로 보이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교인들이 기대하는 목회자상에 자신을 맞추거나, 자신이 가장 되고자 하는 사람의 모습을 자아내려고 힘쓴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자신의 진정한 인격과 욕망을 숨기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이려 하는 데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고 스트레스가 쌓인다. 그리고 그가 애써 창출해낸 경건의 모습은 성령의 은혜로만 가능한 자율성과 창의성이 결여 되었기에 자연스럽지 못하고 경직되고 가식적이다.
목회자가 이런 가식에 익숙해져서 점차 자신의 외양을 실제로 착각하여 가면을 참 자아와 동일시하게 되면 진정한 자아를 상실할 위기에 봉착한다. 그의 열심과 헌신은 그 가면을 보강하여 참된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기 더욱 힘들게 하고, 이렇게 종교적인 가면으로 완고해진 자아는 깨어지기가 가장 힘들다.
진정한 자아를 찾아서
그러므로 목회자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내면세계를 깊이 살펴보는 자기성찰이 있어야 한다.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는 「개혁주의 목사」에서 목회자의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임무는 자기성찰이라는 점을 역설하였다. 지금은 이 고전적 영성훈련의 부활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이다. 목회자들이 외적 성취에 너무 분주하여 자신의 내면세계를 돌아볼만한 여유가 없다. 자신 안에 깊은 마음의 동기와 욕망을 살피는 것을 소홀히 할 뿐 아니라 그것을 매우 꺼려하고 두려워한다.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꿈틀거리고 있는 흉한 “파충류”와 같은 더럽고 추한 욕망의 용솟음침을 예민하고 솔직하게 직시하는 고통스러운 자기성찰을 최대한 회피하려 한다. 그러나 사람은 대개 점검되지 않은 욕망에 의해 주관된다. 자신 안에 측량할 수 없이 간교하고 거짓된 육신의 소욕이 무섭게 역사하며, 이를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통절한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이 욕망의 희생물이 될 가능성이 많다.
그러므로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자신 안의 욕망의 움직임, 은밀한 동기의 복합성을 판독할 수 있는 예리한 영적 투시력을 갖는 것이 목회자의 영성 계발에 있어서 필수적인 일이다. 시편기자와 같이 “나를 살피소서”라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는 것이 참된 영성으로 나아가는 첩경이다. 자신의 영적상태를 점검하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가, 무엇이 나를 어떤 일에 매진하도록 몰아가는가, 내 마음이 지속적으로 애착하며 지향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성령의 은혜와 능력을 구할 때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왜 그 은혜를 구하는가를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정규적으로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내가 이 일을 과연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있는가?”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한다. 그리고 이 질문 앞에 자신을 항상 정직하게 돌아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목회자 안에는 항상 개인적인 야망과 주님을 위한 열망 사이에 날카로운 긴장이 존재하며,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사이에 맹렬한 싸움이 계속된다. 목회자의 심령이 가장 격렬한 영적 전쟁터일 것이다. 사탄이 지옥의 권세를 총동원하여 공격하며, 그의 탁월한 위장술로 목회자를 미혹해 자신의 욕망, 즉 육신의 소욕을 따라 주의 일을 하게 한다. 교회의 영적 성쇠는 이 싸움의 결과에 달려 있다. 목회자가 육신의 소욕에 굴복해서 마음의 순수성을 잃어버릴 때 교회의 타락과 세속화는 시작된다. 역으로 목회자가 육신을 쳐서 복종시킬 때 그의 영혼은 성령의 충만한 은혜의 통로가 되어 온 교회에 풍성한 생명력을 공급하게 된다. 그러므로 목사가 살면 교회가 죽고 목사가 죽으면 교회가 산다.
한국교회가 사는 길은 먼저 목회자들이 자신의 이기적 욕심,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욕망에 대해 죽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미명 하에 은밀히 간직하고 있는 우리의 우상들, 성공과 명예와 인기라는 우상들을 쳐부수는 것이다. 칼빈이 강조했듯이, 자기를 철저히 부인할 때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 목회자가 자아 중심성을 포기할 때 그의 자아는 내면세계에 거하시는 성령께 다시 사로잡힘으로써 좁은 자아의 굴레에서 벗어나 더 큰 자아, 하나님께 지배받는 새로운 자아로 거듭난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거짓된 외면을 계속 지탱하기 위해 허비했던 영적 에너지를 성령 안에서 참된 자아의 성숙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의 말대로, 이렇게 “목회자들이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분명히 드러낼 수 있다면 목회사역은 훨씬 수월해 질 것이다.”
새로운 욕망으로의 초대
이기적 욕망을 제어한다는 것은 결코 욕망 자체를 아예 죽이거나 그것을 최소한도로 억제해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기적 욕심이 많은 것뿐 아니라 욕망이 없거나 적은 것도 영성의 무서운 적이다. 이기적 동기부여가 없으면 도무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자극되지 않는 영적 냉담함과 나태는 거짓된 육신의 또 다른 얼굴이다. 육신적인 목회자는 자신에게 크게 성공할 만한 잠재력과 은사가 없거나 그럴만한 현실적 가능성이 희박하면 성공에 대한 열망을 잃어버리고 현 상태에 안주하려는 무사안일주의에 빠진다.
뛰어난 설교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그것을 잘 개발하여 성공과 명성을 얻으려는 이기적인 야망에 사로잡힐 확률이 높은 반면, 설교의 은사가 그다지 탁월하지 못한 이들은 그런 야망이 없는 대신 말씀사역에 성의와 열정 없이 임하는 적당주의로 치우치기 쉽다. 이와 같이 육신적인 욕망으로 주의 일을 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열정을 의무감으로 죽이고 직업적 타성에 젖어 안일하게 목회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 한국교회의 큰 문제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육적인 욕망을 비운 마음의 공백을 새로운 욕망, 더 강하고 고귀한 욕망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 기독교는 결코 욕망을 죽이는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를 욕망으로 초대하며, 우리 안에 새로운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기독교는 성공을 위한 욕망과 훌륭한 업적을 이루려는 열심 자체를 본질적으로 죄악시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것을 성취하려는 열망을 우리 안에 심어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 원대한 꿈과 포부와 비전을 갖게 하신다.
성령이 우리를 갱신하는 사역은 먼저 우리 마음의 깊은 욕망을 변화시킨다. 성령은 우리 마음의 근본적 지향성, 추구, 애착이 획기적으로 전환되게 하신다. 육신의 일에 집착하고 몰두했던 생각이 성령의 일에 집중되고 이끌리게 하신다. 우리 안에 육신의 소욕을 죽이고 성령의 소욕을 소생시키신다. 이기적인 욕망은 소멸되고 거룩한 열망이 타오르게 하신다. 이런 거룩한 욕망이 없이 성화가 이루어 질 수 없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가 “마음의 성결은 오직 한 가지만을 원하는 것”이라고 했듯이, 하나님에 대한 거룩함은 우리의 욕망이 오직 하나의 대상을 향해서만 온전히 집중될 때 가능하다. 우리에게 영적 성숙이 없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두 방향으로 나누이기 때문이다. 하우어와스(Stanley Hauerwas)는 이렇게 분열되어 통합된 욕망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마음이 다시 하나로 모아져 하나님의 뜻만을 “전심”으로 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진정한 영적 자유함이며, 이러한 자유함 속에서만 성화와 인격의 성숙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거룩한 욕망이 참된 영성의 핵심이다. 이 욕망이 영성의 질을 결정하며, 그 강도가 영성의 깊이를 말해준다. 이런 욕망 없이 성령을 따라 살 수 없으며 성령으로 충만할 수 없다. 또한 이런 욕망 없이는 진정한 기도도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을 위해 어떤 위대한 일도 성취할 수 없다. 교회사에 길이 빛날 신앙의 본과 자취를 남긴 주의 종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한 불타는 야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 욕망을 죽이는 것은 영적 자살행위이며 영적인 거장이 되게 하는 원동력을 말살해 버리는 것이다. 이 욕망 없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있을 수 없다. 죄에 대한 사랑이 그에 대한 욕망으로 표현되듯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욕망으로 나타난다.
이 시대의 목회자들이 진정한 영성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욕망은 주님께 최상의 존귀함과 영광이 돌아가게 하기위해 나의 최선을(My Utmost for His Highest)다하려는 열정이며, 주님을 본받아 최대한 성결하게 살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거룩에 대한 열망이다. 그리고 이 땅위에서 성공한 목회자로 알려지기보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가고 자신은 잊혀 질 때 행복해하는 주의 종이 되기를 전심으로 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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