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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담임목사 세습에 대한 목회적 고찰

by 【고동엽】 2022. 1. 11.
담임목사 세습에 대한 목회적 고찰


정승원 목사(합동신학대학원, 조직신학)


I. 서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고 하면 우리는 어떤 일, 어떤 말, 그리고 어떤 생각을 하든 반드시 성경을 최종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비록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더라도 우리가 필요한 지식은 반드시 성경에서 발견되어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버지를 이어서 아들이 담임 목사로 일한다는 자체가 문제가 된다면 왜 문제가 되는지 그 이유를 반드시 성경에서 찾아야 하며, 그 문제의 해결 역시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비록 성경에서 그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과 지시가 없다 할지라도 그 문제에 관한 하나님을 뜻을 발견하면 그 가르침에 순종해야 한다.


성경에서 그 해결책을 찾는 과정 자체가 바로 소위 ‘담임목사 세습’ 문제에 대한 바른 태도요, 이 문제가 발생될 수밖에 없었던 한국 교회의 상황을 바로 진단하고 개혁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우리가 필요한 모든 지식의 최종 근거로 삼아야 하며, 단지 ‘세습’ 문제를 우리 개인적 소견에 따라 ‘나쁘다’ 혹은 ‘좋다’하는 태도로 해결하는 것을 피해야 할 것이다.






II. '세습'의 문제 분석


1. 세습의 숨은 아젠다(agenda)


소위 담임 목사 ‘세습’ 문제가 교회 문제만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불거졌다는 자체가 한국 교회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아버지를 이어서 아들이 같은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세습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이어서 같은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성경적 근거는 없다. ‘세습’이란 말의 뜻은 아들이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아 아버지가 가졌던 일정한 권한, 재산, 명예 등을 물려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목사에게는 세습이라는 말을 적용할 수 없다. 왜냐면 목사 개인에게 물려줄 그러한 특권이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아버지 목사와 아들 목사 사이에 세습이라는 말이 적용되고 있다고 한다면 먼저는 아버지 목사 개인이 아들에게 물려 줄 특권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문제 삼아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그런 특권을 수용했다는 사실 역시 문제 삼아야 한다.


이것이 먼저 해결되지 않고 단지 아들이 아버지를 이어서 같은 교회에 담임 목사가 되었다는 것을 문제시한다면 이것 자체가 무지의 수치요 한국 교회 개혁에 큰 도움이 안 된다. 물론 지금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이 단지 아들이 아버지를 이어서 담임 목사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세습 문제를 일반화 혹은 극대화시키기 위해 아들 목사가 아버지를 이어 담임 목사가 된다는 것 자체도 문제삼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문제의 일반화와 극대화 역시 큰 문제이다.


우리는 좀 더 현명하고 인내할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특유의 사고 방식인 흑백논리와 마녀 사냥식 몰이를 목회자 후임 문제에도 적용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 한국 교회가 당면한 문제는 총체적 문제이다. 이런 총체적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세습 문제만을 갖고 씨름하는 것은 오히려 총체적 한국 교회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
사실 세습 문제 갖고 마치 한국 교회를 개혁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너무 안일한 발상이고 말하기 좋은 사람들의 넋두리로 끝날 수가 있다. 물론 세습이 큰 문제인 것만은 사실이다. 세습 문제 해결이 총체적 한국 교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의 한 부분으로 좋게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먼저 우리는 왜 세습이 한국 교회에 발생되었는지를 진단하고 그 문제부터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 이 세습 문제를 해결해도 한국 교회가 달라지지 않을 것이고 한국의 총체적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세습 문제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세습 문제의 숨은 아젠다를 다루지 않고 단순 논리에 의해 아들이 아버지를 이어 담임 목사가 되는 것을 모두 세습으로 매도하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이어 성경적으로 아름답게 목회할 수 있는 여지까지도 없애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여지까지 없애는 것은 참으로 슬프기까지 한 일이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세습 문제가 아니라 숨은 아젠다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왜 유독 한국 교회에서만 아들이 아버지를 이어서 담임 목사가 되는 것이 문제가 되는지 그 숨은 이유를 찾아 해결해야 할 것이다. 장로 아들이 아버지를 이어 한 교회 장로가 되는 것은 왜 세습이라고 하지 않는지, 오히려 그것은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찾아 해결해야 할 것이다.






2. 목사에게 주어진 잘못된 특권


20여 년 전 故 박윤선 목사가 강원도 오색 약수터 근처 호텔에 있었던 합동 총회 교역자 수련회에서 ‘목사는 제사장이 아니다’라는 요지의 설교를 했다고 한다. 설교를 하고 내려온 故 박 목사에게 소위 한 중진급의 목사가 한 말을 간접적으로 들었다. “박 목사님 그거 누가 모릅니까? 그렇게 하면 목회가 안돼요!” 이것은 무슨 말인가? 이 말은 ‘꿩 잡는 게 매’ 혹은 ‘뭐로 가나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말이다. 이러한 목회관념이 벌써 20년도 넘게 한국 교회에 팽배해 있었다는 것이다.


목사는 성경에서 허락한 것 외에 어떤 특권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괜찮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보다는 자신이 더 권위가 있는 것으로 믿는 이단보다 크게 나을 것도 없는 것이다.


세습의 문제가 불거진 곳이 소위 대형 교회에서부터다. 대부분의 대형 교회가 담임 목사의 역량에 의해 성장된 곳이다. 심지어 그 대형 교회와 담임 목사가 동일시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부분 대형 교회 담임 목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특권은 목사가 가져서는 안 되는 특권이기도 하다. 그러니 목사가 은퇴 후 자신에 의해 성장된 교회에서 자신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것을 견디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아들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해줄 수 있는 사람을 후임으로 삼고자 할 것이다. 이런 대형 교회의 모습이 다른 중형 혹은 소형 교회까지도 파급되고 있다는 것이 또한 슬픈 실정이다.


바로 세습은 이런 식의 목회 이념이 낳은 사생아와 같은 것이다. 사실 아버지 목사가 아들에게 물려 줄 세상적 권위나 교회 재산 등의 특권을 아버지 목사가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아들 목사가 가져야 하는 권위가 있다면 그 권위는 아버지만 아니라 누구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권위이다. 잘못 가진 특권은 그 당시에 벗겨야 할 것이지 누구에게 물려 줄 것이 아니다. 사실 이러한 잘못된 특권을 물려받는 목사는 비단 아들만 아니라 누구라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 굳이 아들이 아니라도 전임 목사의 말을 잘 듣는 후임 목사가 얼마나 많은가?


아들이 목사가 아니므로 자기 말을 잘 들을 목사를 후임으로 세운 교회가 얼마나 많은가? 후임 목사를 청빙하는데 있어서 전임 목사의 입김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이 아닌가? 아들이 아버지를 이어서 목사가 되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잘못된 특권이 그 세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임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 관계를 문제화시킬 것이 아니라 잘못된 특권이 이어지는 것을 문제화 시켜야 한다.






3. 세습의 한국 문화적 영향


유독 한국교회에만 담임 목사의 세습문제가 불거져 나온 것은 한국의 문화적 영향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유교적 영향과 무속 신앙적 영향이 그것이다. 윗사람을 존경해야 한다는 유교적 가르침은 누군가 위에 존경할 대상이 있어야 함을 전제한다.


교인들에게는 목사가 그 대상이다. 일단 존경의 대상이 세워지면 권위도 함께 부여해준다. 존경의 대상이 있어야 의지할 수도 있고, 가능한 한 많은 권위를 부여해야 자신들의 자존심도 세워지고, 대리 만족도 누린다.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목사에게 떠맡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의 권위는 목사 자신에 의해서만 생긴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만들어 준 것이요 또한 한국 사회 전통이 그 배경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만인 제사장’의 교리는 무색하게 된다. 성경의 가르침보다는 인간 관계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한국 교회 현실이기 때문이다. 한국 문화 전통이 성경보다 실질적으로는 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 무속 신앙은 한국 교회의 목사들로 하여금 스스로 잘못된 이미지를 갖도록 만들기도 했고 성도들로 하여금 잘못된 이미지를 요청하도록 만들었다. 성도 자신들에게 복을 빌어 줄 소위 영매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런 관계에서는 목사 스스로도 더욱 권위를 세워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말 복이 자기를 통해서 내려오는 것으로 믿도록 해야 하고, 비록 복이 내려오지 않더라도 그것에 대해 감히 도전할 수 없는 위치로 자신을 승격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복을 빌고 빌어 주는 관계에서 목사의 권위는 정말 신적 권위까지 부상된 것이다. 이 신적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복 대신 저주가 오는 것으로까지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다. 공공연하게 ‘목사를 대적했더니 그 집안이 이러이러하게 망하더라’는 에피소드가 회자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누가 세습의 문제를 들고 일어나면 본 교회 성도들이 먼저 흥분하고 그들이 먼저 그 목사 부자를 감싸는 것이 이러한 한국 문화적 영향 때문이라고 하겠다. 자신들이 존경하는 대상을 외부 사람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목사들은 이러한 문화적 특성을 자기 권위를 세우는 데 악용해 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외국 교회와는 달리 한국 교회에서는 담임 목사가 가져서는 안 될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한국의 특유한 문화적 악 영향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한국 교회 토양에서는 세습이 자연스럽게 대두될 수 있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 집단과는 다르다고 주장하면서도 한국 교회가 전반적인 한국 문화적 전통을 초월하지 못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가 바로 세습인 것이다.


이것은 또한 교회가 철저하게 성경 위에 서있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성경보다는 인간 관계가 앞서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기보다는 사람 숫자에 의한 영광을 더 구하는 것이 한국 교회이다. 그러므로 세습 문제를 논하기 앞서 한국 교회에 끼친 문화적, 사회적, 전통적 문제를 먼저 다루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4. 와전된 교회 권위


성경에서 가르치는 권위는 바로 목사 개인의 권위가 아니라 교회의 권위이다. 교회는 목사를 포함한 모든 지체들이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목사 개인이 한 성도보다 그리스도 몸을 이룸에 있어서 크게 차지하는 것이 없다. 오히려 약해 보이는 지체가 더 귀히 여김을 받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는(마16:19) 그러한 권위가 교회에 주어진 것이다.


바울도 아볼로도 게바도 교회에 속하는(고전3:22) 그러한 권위가 목사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교회에게 주어진 것이다. 사실 어떤 단체에 커다란 권위가 주어지면 그 단체의 장이 그 권위를 행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교회는 달라야 한다. 목사 개인이 교회의 권위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가 말씀으로 바로 집행할 때 그것에 따라 교회의 권위가 세워지는 것이다.


목사의 권위는 바로 하나님 말씀을 바로 전하고 가르칠 때 주어지는 것이다. 이 권위도 목사 개인의 권위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말씀의 권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 개인이 하나님 말씀을 바로 전하지 못하고 말씀대로 따르지 못한다면 그 목사는 권위는 커녕 본인이 하나님 말씀으로 치리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사실 한국 교회에서는 교회가 누려야 할 권위, 교회가 집행해야 할 권위를 목사가 한 몸에 다 받아 누리고 있는 실정이다. 마치 로마 천주교 교황이 누리고 있는 그러한 특권까지 누리려고 하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성전의 휘장이 갈라진 의미가 바로 성도들은 바로 직접 담대히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히10:20).


그런데 한국 교회 목사들은 휘장을 쳐 놓고 자기를 통과하도록 하고 있다. 물론 더 큰 문제는 많은 목사들 자신이 이러한 사실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와전된 권위를 가진 목사가 자기 아들을 후임으로 세워 놓고 그 권위를 유지하려는 것은 얼마든지 용납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왜냐면 그것이 교회의 권위인 것처럼 와전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잘못된 권위가 주어지면 세습보다 더한 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III. 아들 목사가 후임이 될 경우 실제적 발생될 현상들




1. 부정적 현상들


a. 악순환의 문제: 아들 목사가 후임이 되는 대부분의 경우는 사실 많은 부정적인 문제가 이미 깔려 있는 것이다. 목사의 잘못된 특권이 아들에게 계승된다는 것은 아버지 목사가 잘못된 특권을 누린 것보다 더 큰 문제이다. 그 특권이 얼마나 비성경적이며 큰 죄악인지를 깨닫지도, 인정하지도, 고치지지도 않은 채 아들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반성과 고치려는 결단이 무색하게 되었다는 것은 더 큰 비극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아들 목사에게만 국한 될 문제가 아니다. 선임 목사가 선정한 후임 목사에게 그러한 잘못된 특권이 계승되고 후임 목사가 여전히 그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것도 똑같은 문제이다. 악순환이 계속 된다는 것이 큰 불행이다. 그러므로 아들이 후임이 되었다는 것이 진짜 문제가 아니라 후임이 전임과 같은 잘못된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 진짜 문제인 것이다.


b. 원로 목사의 위치: 목사의 권위는 말씀의 권위이다. 그러므로 은퇴한 경우라도 말씀을 전할 때는 담임 목사와 똑같은 권위를 갖는다. 사실 목사가 말씀을 전할 때는 원로 목사, 담임 목사, 부 목사, 교육 목사라는 구분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의 권위가 아니라 위치적, 행정적, 조직적 권위를 은퇴 혹은 원로 목사가 은퇴 후에도 계속 가지고 있다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은퇴 목사 혹은 원로 목사가 단지 교회를 출석할 경우 그 목사는 한 성도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주어진 달란트를 가지고 한 파트에서 사역을 한다든지 말씀을 전할 때는 목사로서 권위가 주어지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 말씀의 권위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행정적, 정치적 권한을 행사하는 원로 목사 제도는 비성경적이다.


한국 사회에서 원로라는 말은 어떤 권위가 주어졌고 또 그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의미로 통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역자로서의 원로가 아니라 세상적 의미의 원로는 비성경적이므로 그런 원로 제도부터 없애야 한다. 20년 목회를 하면 원로 목사가 된다는 의미는 그 동안의 수고를 치하하는 것이며 노후를 위한 은급의 차원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 은퇴한 교회에 어떤 권위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은퇴 목사가 말씀을 전할 때에는 담임 목사와 마찬가지로 말씀의 권위가 주어져야 한다.


c. 성경의 권위 추락: 소위 세습에 있어서 두각 되는 또 하나 심각한 문제는 목사가 지닌 말씀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약해진다는 것이다. 소위 세습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성경의 가르침보다는 아버지 목사의 권위가 더 크게 작용되는 것이다. 사람의 권위가 두각 되면 자연적으로 말씀의 권위가 약해지는 것이다.


성도들도 말씀의 권위보다는 목사의 권위를 더 가깝게 느낄 것이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서는 목사가 어떤 잘못을 하고 비리를 저질러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는 것이다. 단지 7계명 같은 것을 어기고 들키게 되면 치리하는 정도이다. 성경을 거역하는 모든 잘못은 7계명을 어기는 것만큼 죄악이요 치리 건이 되는 것이다.


목사가 비성경적인 일을 자행할 때 치리가 없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목사 개인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 위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목사가 성경을 풀어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사실 때문에 성도들은 쉽게 목사의 주장을 성경과 일치되는 것으로 오인하기 쉽다. 성경의 권위가 악용되는 것은 오히려 성경의 권위 자체까지 흔들리게 만드는 것이다. 소위 세습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성경의 권위가 추락했음을 의미한다.


d. 아들 목사 성장의 저해: 아버지를 이어 아들이 담임 목사가 되는 교회는 대부분의 경우 아버지 목사가 20년 넘게 목회를 한 경우이다. 그렇다면 대부분 기존의 교인들이 수십 년을 넘게 아버지 목사와 동고동락한 셈이다. 그러므로 아들이 담임을 맡게 될 경우 대개는 아버지를 봐서 아들을 청빙한다. 물론 아들이 뛰어나서 맡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아버지를 봐서 아들을 청빙한다.


그렇게 되면 아들은 아버지의 눈치를 보고 성도들의 눈치를 봐야 한다. 소신껏 목회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것이다. 아버지 존재가 오히려 아들 목사의 성장을 억제할 것이다. 한가지 예로, 이전 예배 순서를 바꾸는 일에 대해서도 기존 성도들은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바로 전임 목사가 채택한 순서라는 것이다.


또한 소위 세습의 상황에서는 아버지 목사의 소천과 같은 유고 시에도 문제가 발생된다. 성도들의 마음에는 신임 목사라는 사실보다는 전임 목사 아들이라는 사실이 더 강하게 작용되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 목사의 유고도 그의 존재만큼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더욱이 아들 목사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되면 아버지 때문에 후임이 되었다는 사실이 약점으로 악용될 수 있다.


e. 위의 문제와 연결되는 문제로서 아들 목사가 새롭게 목회를 펼치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버지 목사는 아무래도 현대적 감각이 결여되어 있다. 즉 매우 보수적이라는 것이다. 성도들도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고 아버지의 목회 철학을 두둔하게 된다. 이전 목회가 원칙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롭게 목회하기가 두 배 이상으로 힘들게 되는 것이다.


f. 아버지를 이어서 담임 목사가 되었다는 것은 이중적 부담이 될 수 있다. 성도들과 아버지가 실망하지 않도록 목회를 잘 해야 할 부담도 있고 또한 아들로서 아버지에게 효도해야 할 부담도 있다. 두 가지를 잘해야 한다. 아들로서 아버지를 잘 모시지 않으면 목회에도 큰 지장이 있는 것이다.


또한 역으로 아버지가 하던 목회 방식에서 크게 다를 경우 그것을 효와 연결시킬 것이다. 아무리 옳다고 해도 아버지를 봐서라도 바꿔서는 안 된다는 식이다. 또 다른 예로 아버지 목사가 아들을 위해 일부러 교회를 출석하지 않는 경우라도 성도들이 아버지 목사를 찾고 궁금해하기 마련이다. 안나오는 이유가 무엇인지? 혹시 아들이 아버지를 섭섭하게 한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을 할 수 있다. 그만큼 목사의 위치와 직분이 잘못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2. 긍정적 모습들


한편 아들이 아버지를 이어서 담임 목사가 된다는 것에는 여러 장점이 있다. 이것을 부정할 수 없다. 단지 세습이라는 것이 부정적이라서 단순히 아들이 담임이 되었다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봐서는 안될 것이다.


a. 성도들의 분열을 막을 수 있다: 담임 목사가 바뀌면 여러 가지로 교회가 흔들릴 수 있다. 성도들은 오랫동안 이전 목사에게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의존해왔다. 이것이 세상적이면 몰라도 人之常情의 차원에서는 비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의존이 새로운 목사에게 쉽게 전가되지 않는다.


선임 목사가 출석하든 하지 않든 간에 그에 대한 의존심이 후임 목사가 온 후라도 한동안 남아 있음으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혼란이 올 수 있다. 목사라는 직책이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고 가르치고 말씀대로 살도록 지도하는 일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목사를 의지하려는 것은 당연한 모습이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목사는 그러한 성도들의 의존성을 악용해서는 안 된다. 아무튼 선임 목사를 향한 의존성이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후임이 아들일 경우 성도들의 마음이 보다 쉽게 안정이 되고 그 마음이 후임 목사로 향하게 될 것이다. 실제적으로 후임 목사가 온 후 교회가 분열될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아들 목사가 후임일 경우 그러한 가능성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목사가 교체될 때 성도들의 마음이 갈린다는 그 자체는 좋은 현상이 아니다. 이러한 현상이 원로 목사의 존재로 인해 더욱 쉽게 발생될 수 있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런 차원이 아니라 목사라는 영적, 신앙적 지도자의 역할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특히 인간 관계를 중요시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성도들의 그러한 태도를 정죄할 수 없다. 어쩌면 하나님이 한국 사람들의 그러한 의식 구조를 선하게 사용하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은퇴 목사는 일부러 신경을 써 자신을 향한 의존도를 약화시키도록 해야 할 것이며 후임 목사의 지도력에 의존하도록 선도해야 할 것이다. 은퇴 후 교회를 떠나 다른 곳에서 사역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b. 개혁의 가능성: 아들이 후임이 될 경우 아버지의 목회 철학을 뛰어 넘어 개혁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지만 동시에 역으로 개혁할 수 있는 가능성도 동시에 주어진다. 은퇴 혹은 원로 목사의 권위에 아들 아닌 다른 목사가 도전하기는 매우 어렵다. 무엇보다도 선임 목사를 중심으로 장로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굳혔다면 개혁하기가 더욱 어렵다. 이들이 당회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아들 목사가 아닌 다른 후임 목사가 담당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은퇴 혹은 원로 목사의 후임 목사들은 대개 선임 목사의 말을 잘 듣는 목사들이다. 또 그렇게 해야 할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후임 목사가 교회를 개혁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짧은 세월 내에 혹은 그 선임 목사가 살아 있는 한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 목사는 그 교회의 개혁의 실행을 빨리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성도들도 잘 따라 줄 수도 있고 아버지의 권위도 그렇게 손상되지 않고 장로나 집사들의 기득권도 그렇게 손상되지 않을 것이다.


c. 협력 목회의 가능성: 은퇴 목사라고 해서 후임 목사와 협력하여 목회를 해서는 안 된다는 성경적 근거는 없다. 한국 교회에 협력 목회가 잘 안 된다는 현실이 오히려 비성경적 모습이다. 친구라도 협력 목회를 하다가 깨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부자지간일 경우는 잘 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이해하며 양보할 수 있고, 성도들의 마음도 갈리지 않고 두 사람 다 잘 따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부자간의 협력 목회가 마치 가족끼리 다 해 먹는 식으로 비쳐서는 아니 될 것이다. 어떤 권력 이양이며 이득 공유가 아니라 교회를 위한 희생과 봉사라 한다면 부자가 교회를 위해 함께 사역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며 그리스도의 몸이 자라감에 큰 기여를 할 것이다.


d. 언약 공동체의 모델: 믿음의 가족은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언약의 가족이다. 그러나 언약의 가족이라는 의미에서는 혈연적 가족도 다 들어 있는 것이다. 자녀에게 할례나 유아 세례를 주는 것은 언약 신학에서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부모의 신앙을 따라 지적 능력이 없는 아이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는 말씀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들이 아버지를 이어서 신앙인이 되고 목사가 된 것은 언약 공동체 차원에서 볼 때 기릴만한 일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이어서 한 교회에 담임목사가 된다는 것은 더욱 그렇다. 성도들에게 본이 될 만한 일인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이어서 담임 목사가 되는 사례들이 외국 교회에 많은 이유가 이런 이유일 것이다.


미국 교회에서는 목사 아들을(목사 아들이 아니라도 성도들의 자녀들 가운데 목사 감의 아이를 선정하기도 함)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관심을 갖고 교육시키고 신학교에 보내고 다시 담임으로 초빙한다는 것을 듣기도 했다.


e. 교회의 권위 인정: 어느 누구도 한 교회의 담임으로 청빙될 수 있다. 아들도 예외일 수 없다. 아들이라고 해서 후임 목사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역 차별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의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 교회가 성경적 권위를 갖고 결정하고 담임 목사를 초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의 눈치, 사회의 비난을 피하고자 아들을 제외시키는 것은 오히려 교회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다.


물론 소위 세습이라는 것을 교회의 권위로 보자는 것이 아니다. 선임 목사나 외부의 압력이 없이 정식으로 교회에서 회의를 통하여 청빙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들이라고 해서 이러한 공정한 청빙의 대상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아들이 담임이 되었다는 것은 교회의 권위가 인정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IV. 결 론


우리는 한국 교회의 세습 문제를 바라보면서 한국 교회가 처해 있는 심각한 총체적 문제를 인식해야 한다. 종교 개혁 이전 상황하고 그렇게 달라 보이지 않는 한국 교회 현실이다. 우리가 세습 문제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지만 세습 문제는 오히려 한국 교회 총체적 문제라는 빙산의 일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아들이 ‘후임’이 되는 것을 ‘세습’이라는 명예스럽지 못한 말로 정의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몇 가지 제안을 해본다.


첫째, 하나님 말씀의 권위가 회복되어야 한다. 성경은 단지 장신구나 상징적 책이 아니다. 모든 삶과 신앙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들러리로 삼고 목사나 교회의 체제가 주인공이 되면 세습 같은 문제가 튀어나올 수 있다. 목사나 장로나 일반 성도들 모두가 하나님 말씀의 권위에 순복해야 한다. 목사라도 말씀에 어긋난 일을 할 때는 말씀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역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말씀을 잘 알고 말씀을 잘 실천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말씀 위에 바로 설 수 있다.


둘째로, 우리 모두는 죄인이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주(Savior)와 주(Lord)가 되심을 인정해야 한다. 나 자신이나 사람이 영광을 받는가, 아니면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는가를 확실하게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세상 기준이나 칭찬을 위해 목회를 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며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목회를 해야 한다. 어떤 세상적 기준에 의해 교회를 평가하고 움직이기 때문에 세습이라는 질병이 나타난 것이다. 사람이나 세상적 기준은 믿을 것이 못되는 것이다.


셋째로, 목사 중심의 교회를 탈피해야 한다. 목사는 한 지체에 불과하다. 물론 말씀을 연구하고 전하고 가르치는 일로 인해 중요한 직책임에 분명하지만 목사 개인이 다른 성도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거나 성경적 권한외의 다른 권한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


일반 세상적 조직처럼 한 장(長)으로 목사가 군림하기 때문에 목사의 욕심이나 개인적 판단 같은 것이 정당화되고 다른 성도들도 따라줘야 하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교회가 말씀 중심이 아니라 목사 중심이 되면 목사와 관련된 비성경적인 모습들을 견제할 수 없게 된다.


성도들도 무의식적으로 목사를 맹목적으로 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후임 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부상되는 것이다. 장로 아들이 장로가 되는 것이 좋아 보이는 이유는 장로가 필요 이상의 특권을 누리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목사를 교회 중심에서 빼내어 말씀을 그 중심에 넣게 되면 세습 문제가 대두될 수가 없을 것이다.


넷째로, 성장 위주의 교회 부흥을 탈피해야 한다. 한 지교회가 너무 커지면 그것에 따른 욕심과 아집과 명예욕 등이 자리 잡게 된다. 세습 역시 성장 위주의 교회 부흥에 따른 소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한 교회를 통해 명예나 이익이 아니라 손해만 보고 희생만 하는 것이라고 하면 세습 같은 욕심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다섯째로, 성경의 상황화(contextualization)을 잘 다루어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의 후임 문제는 한국의 문화적 사회적 영향을 없지 않아 받고 있다. 세습 문제는 상황(context)이 성경(text)을 좌우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잘못된 상황화로 자칫 잘못하면 세습 문제가 마치 성경에 근거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즉 쉽게 용인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상황’이 텍스트(성경)에 의해 변하는 것은 용인될 수는 있어도 텍스트(성경)가 상황에 의해 변하는 것은 결코 용인될 수 없다. 바른 성경의 상황화로 세습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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